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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이 남가라와 탁기탄을 일으켜 임나에 합치고자 하나 반정(磐井)이 방해함

21년 여름 6월 임신삭 갑오(3일),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오후미노케나노오미)주 001
번역주 001)
『古事記』에는 建內宿禰(武內宿禰)의 후손으로 波多臣 및 淡海臣이 있다고 하였는데, 近江臣은 淡海臣의 이표기로 생각된다. 近江毛野臣에 관한 내용은 그의 죽음과 관련된 가요 등의 일본 측 전승과 가야, 신라의 인명·지명을 담은 한반도 계통의 자료를 조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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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리 6만을 거느리고 임나에 가서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남가라(南加羅)주 002
번역주 002)
金海의 加羅國을 가리킨다. 高靈의 大加羅가 성장하면서 加羅國을 南加羅로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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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탁기탄(㖨己呑)주 003
번역주 003)
가야 소국 중 하나로 생각되며 경산, 낙동강 동안의 영산 주변, 영산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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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다시 일으켜 세워 임나에 합치고자 하였다주 004
번역주 004)
近江毛野臣이 6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은 『日本書紀』 편찬자의 윤색으로 보인다. 繼體 23년 3월 是月條에 보이는 것처럼 安羅에 파견된 사신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 정도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다면 磐井의 방해나 반란을 얼마든지 진압할 수 있었을 것이고, 또한 신라의 공격으로 곤경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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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축자(筑紫;츠쿠시)의 국조(國造) 반정(磐井;이하위)주 005
번역주 005)
『古事記』 繼體段에서는 竺紫君 石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筑後風土記』 逸文에는 磐井의 무덤에 관한 기록이 있고, 현재 福岡縣 八女市의 岩戶山古墳이 磐井의 묘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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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은밀히 반역을 도모한 지 수년이 지났다. 그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항상 틈을 보고 있었다. 신라가 이를 알고 몰래 뇌물을 반정에게 보내어 모야신의 군사를 막아주기를 권유하였다. 이에 반정화국(火國;히노쿠니)주 006
번역주 006)
九州의 활화산인 阿蘇山 주변에 위치한 지역으로 肥國으로도 표기하였다. 율령제에서는 肥前國과 肥後國으로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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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국(豊國;토요노쿠니)주 007
번역주 007)
九州의 동북부 지역으로, 현재 福岡縣의 동부 및 大分縣 전역에 해당한다. 7세기 말에 豊前國과 豊後國이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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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두 지역을 점거하고,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밖으로는 해로를 막아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국의 연공을 바치는 배를 끌어들이고, 안으로는 임나에 파견하는 모야신의 군사를 차단하고 함부로 큰소리치기를, “지금 사신은 전에는 나의 동료로서 몸을 서로 부비고 한 그릇에 밥을 나누어 먹었는데, 어찌 갑자기 사신이 되었다고 나로 하여금 그 앞에 엎드리게 하는가.”라고 하고 싸움을 일으켜 따르지 않으며, 교만하고 기세등등하였다주 008
번역주 008)
磐井의 난에 대해서는 大和政權의 한반도 출병으로 인한 군사적·경제적인 부담에 築紫지역 수장층이 반발한 것으로 보는 견해를 비롯하여, 大和政權의 지방에 대한 직접지배를 강화하는 데 대한 불만, 九州 지역이 大和政權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전쟁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磐井의 동향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新羅가 磐井과 결탁 혹은 지원하여 大和政權과 대립토록 하고 있는 점이다. 신라가 김해 등 가야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가야와 大和政權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磐井과 제휴했을 개연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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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모야신은 방해를 받아 중도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천황은 대반대련금촌(大伴大連金村;오호토모노오호무라지카나무라)과 물부대련추록화(物部大連麤鹿火)와 허세대신남인(許勢大臣男人;코세노오호오미워히토) 등에게 조를 내려, “축자반정이 반란을 일으켜 서쪽의 변방을 점거하고 있으니, 누가 가히 장군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대반대련 등이 입을 모아 “정직하고 어질고 용감하며 병법에 달통한 바가 지금 추록화(麤鹿火)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천황이 “좋다.”고 하였다.

  • 번역주 001)
    『古事記』에는 建內宿禰(武內宿禰)의 후손으로 波多臣 및 淡海臣이 있다고 하였는데, 近江臣은 淡海臣의 이표기로 생각된다. 近江毛野臣에 관한 내용은 그의 죽음과 관련된 가요 등의 일본 측 전승과 가야, 신라의 인명·지명을 담은 한반도 계통의 자료를 조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金海의 加羅國을 가리킨다. 高靈의 大加羅가 성장하면서 加羅國을 南加羅로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가야 소국 중 하나로 생각되며 경산, 낙동강 동안의 영산 주변, 영산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近江毛野臣이 6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은 『日本書紀』 편찬자의 윤색으로 보인다. 繼體 23년 3월 是月條에 보이는 것처럼 安羅에 파견된 사신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 정도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다면 磐井의 방해나 반란을 얼마든지 진압할 수 있었을 것이고, 또한 신라의 공격으로 곤경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古事記』 繼體段에서는 竺紫君 石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筑後風土記』 逸文에는 磐井의 무덤에 관한 기록이 있고, 현재 福岡縣 八女市의 岩戶山古墳이 磐井의 묘로 추정되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九州의 활화산인 阿蘇山 주변에 위치한 지역으로 肥國으로도 표기하였다. 율령제에서는 肥前國과 肥後國으로 분리되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九州의 동북부 지역으로, 현재 福岡縣의 동부 및 大分縣 전역에 해당한다. 7세기 말에 豊前國과 豊後國이 설치되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磐井의 난에 대해서는 大和政權의 한반도 출병으로 인한 군사적·경제적인 부담에 築紫지역 수장층이 반발한 것으로 보는 견해를 비롯하여, 大和政權의 지방에 대한 직접지배를 강화하는 데 대한 불만, 九州 지역이 大和政權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전쟁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磐井의 동향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新羅가 磐井과 결탁 혹은 지원하여 大和政權과 대립토록 하고 있는 점이다. 신라가 김해 등 가야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가야와 大和政權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磐井과 제휴했을 개연성이 높다.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근강모야신, 반정, 반정, 모야신, 반정, 모야신, 모야신, 대반대련금촌, 물부대련추록화, 허세대신남인, 반정, 대반대련, 추록화(麤鹿火)
지명
축자, 화국, 풍국, 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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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이 남가라와 탁기탄을 일으켜 임나에 합치고자 하나 반정(磐井)이 방해함 자료번호 : ns.k_0029_0150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