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일본서기

백제에게 다사진을 주자 가라는 신라와 우호를 맺음

같은 달, 물부이세련부근(物部伊勢連父根;모노노베노이세노무라지치치네)주 001
번역주 001)
『日本書紀』 繼體天皇 9년 2월조의 物部至至連과 동일인물로 생각된다.
닫기
길사로(吉士老;키시노오키나)주 002
번역주 002)
吉士는 수장을 뜻하는 고대어이다. 일본 고대에도 氏名과 姓으로 쓰였다. 氏名으로는 『新撰姓氏錄』에 吉志氏는 大彦命을 시조로 하는 難波忌村과 同祖라고 하였다. 吉士老는 다른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닫기
등을 보내어 진을 백제왕에게 주었다. 이에 가라왕이 칙사에게 “이 진은 관가(官家)를 둔 이래 신이 조공하는 나루였는데, 어찌 갑자기 이웃 나라에 줄 수 있습니까. 원래 분봉받은 영토와 다릅니다.”라고 하였다. 칙사인 부근(父根) 등은 이에 그 자리에서 주기가 어렵다고 여기고 큰 섬으로 돌아가서, 따로 녹사(錄史)주 003
번역주 003)
문서 기록 등을 담당하는 하급 관인을 말한다.
닫기
를 보내어 마침내 부여(扶余)주 004
번역주 004)
백제를 뜻한다. 538년에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닫기
에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가라는 신라와 우호를 맺고 일본을 원망하였다. 가라왕은 신라의 왕녀와 혼인하여 드디어 자식을 낳았다주 005
번역주 005)
『三國史記』 新羅本紀에 의하면 법흥왕 9년(522)에 가라의 국왕이 신라에 통혼을 청하므로 신라는 伊湌 比助夫의 누이를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신라와 통혼한 加羅에 대해서는 고령의 大加羅로 보는 설과 김해의 加羅國으로 보는 설로 나누어져 있으나 고령세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닫기
. 신라가 처음 왕녀를 보낼 때, 아울러 1백 명을 시종으로 보냈다주 006
번역주 006)
1백 명의 종자를 가라를 침략하기 위해 파견한 잘 훈련된 공작원이나 첩자로 보인다.
닫기
. 이들을 받아들여 각 현에 나누어 배치하고 신라의 의관을 착용토록 하였다주 007
번역주 007)
각 지역에 신라 왕녀의 종자를 배치한 주체에 대하여 가라왕과 신라왕으로 보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원문의 착란이 있는 것 같다.
닫기
. 아리사등(阿利斯等) 주 008
번역주 008)
4월조에 任那王 己能末多干岐가 보이며, 『日本書紀』 편찬자는 阿利斯等과 동일인물로 보고 있다. 아리사등이라는 이름은 垂仁紀 都怒我羅斯等, 敏達紀 12년 7월조의 火葦北國造 阿利斯登이 보인다. 아리사등을 位號로, 기능말다를 인명으로 보아 동일인으로 간주하고 가라국왕, 탁순국왕 등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닫기
은 그들이 옷을 바꾸어 입은 것에 분개하여 사자를 보내어 모두 모아 돌려보냈다. 이에 신라가 크게 부끄러워하고주 009
번역주 009)
부끄러워 하였다기보다는 분노하였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으로 생각된다.
닫기
다시 왕녀를 불러오고자 하여 “전에 그대의 청혼을 받아들여 내가 혼인을 허락하였으나, 이제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왕녀를 돌려보내줄 것을 청한다.”고 하였다. 가라의 기부리지가(己富利知伽) 주 010
번역주 010)
己富里는 ‘고을’의 고대어로 ‘고후리’, ‘고훌’ 등으로 읽혔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자로는 評이라고 표기하였고, 村(무라, 마을)보다 상위의 지방 단위이다. 따라서 己富利知伽는 고을의 수장 혹은 그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닫기
[잘 알 수 없다.]가 “짝을 지어 부부가 되었는데 어찌 다시 떨어질 수 있으며, 또한 자식이 있는데 어찌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마침내 신라는 지나가는 길에 도가(刀伽), 고파(古跛), 포나모라(布那牟羅) 주 011
번역주 011)
가야지역의 지명으로 생각되지만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布那牟羅는 5城 속에도 다시 보인다.
닫기
의 세 성을 함락시켰으며, 또한 북쪽 변경의 다섯 성을 쳤다주 012
번역주 012)
『日本書紀』 繼體天皇 24년 9월조의 5城으로 생각된다.
닫기
.

  • 번역주 001)
    『日本書紀』 繼體天皇 9년 2월조의 物部至至連과 동일인물로 생각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吉士는 수장을 뜻하는 고대어이다. 일본 고대에도 氏名과 姓으로 쓰였다. 氏名으로는 『新撰姓氏錄』에 吉志氏는 大彦命을 시조로 하는 難波忌村과 同祖라고 하였다. 吉士老는 다른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문서 기록 등을 담당하는 하급 관인을 말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백제를 뜻한다. 538년에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三國史記』 新羅本紀에 의하면 법흥왕 9년(522)에 가라의 국왕이 신라에 통혼을 청하므로 신라는 伊湌 比助夫의 누이를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신라와 통혼한 加羅에 대해서는 고령의 大加羅로 보는 설과 김해의 加羅國으로 보는 설로 나누어져 있으나 고령세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1백 명의 종자를 가라를 침략하기 위해 파견한 잘 훈련된 공작원이나 첩자로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각 지역에 신라 왕녀의 종자를 배치한 주체에 대하여 가라왕과 신라왕으로 보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원문의 착란이 있는 것 같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4월조에 任那王 己能末多干岐가 보이며, 『日本書紀』 편찬자는 阿利斯等과 동일인물로 보고 있다. 아리사등이라는 이름은 垂仁紀 都怒我羅斯等, 敏達紀 12년 7월조의 火葦北國造 阿利斯登이 보인다. 아리사등을 位號로, 기능말다를 인명으로 보아 동일인으로 간주하고 가라국왕, 탁순국왕 등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부끄러워 하였다기보다는 분노하였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으로 생각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己富里는 ‘고을’의 고대어로 ‘고후리’, ‘고훌’ 등으로 읽혔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자로는 評이라고 표기하였고, 村(무라, 마을)보다 상위의 지방 단위이다. 따라서 己富利知伽는 고을의 수장 혹은 그의 이름으로 생각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1)
    가야지역의 지명으로 생각되지만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布那牟羅는 5城 속에도 다시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12)
    『日本書紀』 繼體天皇 24년 9월조의 5城으로 생각된다.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물부이세련부근, 길사로, 부근(父根), 아리사등(阿利斯等), 기부리지가(己富利知伽)
지명
도가(刀伽), 고파(古跛), 포나모라(布那牟羅)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백제에게 다사진을 주자 가라는 신라와 우호를 맺음 자료번호 : ns.k_0029_0170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