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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설명

제목
도자기에 새겨진 삶의 기록 - 묘지명(墓誌銘) [심지연]
등록일
2008-09-22
주관부서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1029


묘지의 매장은 후한시대부터 시작되어 위진남북조·수(隋)·당(唐)시대에 가장 성행하였고 그 풍습은 명·청대까지 계속되었다. 한국에서도 묘지의 풍습은 고려·조선시대에 가장 성행한 매장문화의 일종이다. 묘지는 일반적으로 묘소를 조성할 당시에 매장하지만 장례 후에 만들어 넣는 경우도 있었다.

묘지(墓誌)는 봉분이 없어지더라도 누구의 유골인지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석판(石板)이나 도판(陶板)에 행장을 적어 무덤의 앞이나 옆에 묻은 것을 말한다. 대체로 죽은 사람의 행장(行狀)과 사적, 즉 성명과 자(字), 출생지, 선대계보, 생년월일, 가족관계, 관직의 약력과 부임지(赴任地), 행적과 품행, 덕망, 경력, 사적, 자손의 성명, 묘의 위치, 묘의 방향 등의 내용을 적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묘의 주인공이 누구이며 그의 행적이 어떠했는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 돌이나 도자기, 호(壺), 석관(石棺)에 새겨서 매장할 때 넣는 것을 말하며 지석(誌石), 광지(壙誌)라고도 한다.

이렇게 돌이나 도자기 새겨진 묘지명은 한 개인이 죽은 이후에 바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후대에 정리된 역사책이나 족보와 같은 문헌자료와 비교해 볼 때 훨씬 정확하고 생생한 내용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묘지명은 한 개인의 삶에 대한 충실한 기록물인 동시에 당시의 사회와 문화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묘지명은 중국의 석비(石碑) 문화의 영향으로 삼국시대를 즈음하여 한반도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예로 묵서명이 있는 고구려 고분(안악 3호분, 덕흥리 묘지, 모두루 묘지)과 백제 무령왕릉묘의 지석 등을 들 수가 있다.



고려시대에 묘지명을 주로 만들었던 사람들은 왕실이나 귀족계층의 사람들로 묘지명의 찬자(撰者)와 서자(書者)는 묘지의 주인공과 특별한 관련이 있는 문장가이거나 명필로 이름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묘지의 형태는 대부분 판형으로 글자를 새기고 그 음각된 글자 위에 주묵(朱墨)을 칠하였고 점판암과 청석 혹은 오석 같은 석재를 다듬어 음각으로 글을 새긴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여건에 따라서 나무나 다른 재료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사진1) 이익현묘지명(1518)『高麗·朝鮮 墓誌 新資料』, 2006, 국사편찬위원회



사진2) 영창대군묘지명(1628) 『중요발견매장문화재도록Ⅲ』 1998, 문화관광부·문화재관리국

조선시대의 묘지는 초기에는 석재지석과 도자기묘지가 함께 사용되었고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석재보다 백자나 토제로 제작되는 경우가 증가한다. 조선시대 일반사대부의 민묘의 경우에는 석재 또는 도자기묘지가 함께 사용되었고 왕실의 원릉에서는 숙종이후부터 《오례의》의주에 따라서 석재로 만든 지석을 사용하였다.

왕릉의 경우 도자기로 만들어진 묘지를 처음 사용한 곳은 효종(孝宗)의 영릉으로 이 때문에 숙종의 명릉(明陵)부터는 지석대신 도자기로 만들어진 묘지의 사용을 항식(恒式)으로 삼게 되었다. 조선 시대 중후기로 내려오면서 일반 사대부 계층에서는 도자기로 만들어진 묘지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고 이후 자기질의 묘지를 비롯하여 토제 묘지가 제작되면서 점차 묘지의 제작이 쉬워지는 경향을 가지게 되면서 일반 서민들에게까지도 묘지명 문화가 전파되었다.

지석의 재료가 석재에서 도자기로 바뀌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자연석을 구해야하는 어려운 문제와 이를 마연하여 글을 새기는데 있어서의 소요되는 높은 제작비용이 문제점으로 언급되고 있다. 석재로 만들어지는 지석은 도자기로 만들어진 지석보다 만들기가 어렵고 비용이 비싸기 때문에 비용이 적게 드는 도자기로 만들어진 묘지의 제작이 증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도자기 제작기술의 발달했던 점과 지석보다는 많은 내용을 기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도자기묘지를 선호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묘지는 깨지기 쉬운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석보다 제작이 간편하기 때문에 선호되었고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러한 경향은 지속되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지석과 도자기묘지 이외에 흙과 석회를 섞거나 흙을 굳혀 만든 토제 묘지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것은 도자기 묘지나 지석보다 비용이 적게 든다는 점과 제작이 쉽고 간편하며 제작기간도 많이 걸리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게 되었다.

묘지의 형태는 원통형, 원반형, 필통형, 사발형, 주발형, 대접형, 접시형, 벼루형, 묘비형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고 묘지의 글씨는 먹, 청화, 철화 등을 사용하여 붓으로 쓴 것, 써서 새긴 것, 쓰고 새겨 상감한 것 등이 있다. 그 서술내용에 있어서는 후대로 갈수록 묘지나 묘비명의 내용이 형식화, 과장화가 심해지면서 당대의 문장가가 아닌 본인이 직접 자신의 묘지명을 쓰는 예가 조선 후기에 이르면 많아지게 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이다.



사진3) 청화백자사도세자묘지(1762) 『중요발견매장문화재도록Ⅰ』, 1989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사진4) 백자철화지석 <명지대박물관 소장>

고려, 조선시대의 묘지는 땅에 묻혀 있기 때문에 풍화작용에 의한 마모가 적어 대부분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학문적인 가치가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러한 묘지명의 연구에 있어 역사학, 서예학, 금석학 뿐만 아니라 공반되는 복장의 분석에 따른 복식사적인 접근 및 분묘 축조방법에 따른 고고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며 도자명기의 문양, 제작기법에 따른 도자사적인 연구가 좀 더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문화재청 청주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심지연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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