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이 신라에 투항하다
(
669년
02월
)
〔당 고종 총장〕2년 기사년(669) 2월에 왕의 서자(庶子)註 001 안승(安勝)註 002이 4천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였다.註 003
왕의 서자(庶子) : 여기서 서자(庶子)의 뜻은 맏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 이하를 일컫는 말이다. 안승의 출자에 대해서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본서 고구려본기 본문에서는 보장왕의 서자(庶子)라고 하였고,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1 당기17 고종 함형(咸亨) 원년 4월조, 『신당서』 권220 열전145 동이 고려 등에서는 보장왕의 외손(外孫)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2 紀異下 文虎王法敏조에는 보장왕의 외손, 본서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10년 6월조에는 연정토(淵淨土)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보장왕의 외손이며, 연정토의 아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이병도, 7쪽; 村上四男, 242쪽; 노태돈, 249쪽; 井上直樹, 100-104쪽)
〈참고문헌〉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李丙燾, 1964, 「高句麗의 一部 遺民에 대한 抽戶政策」, 『震檀學報』 25·26·27
村上四男, 1978, 「新羅国と報德王安勝の小高句麗国」, 『朝鮮古代史硏究』, 開明書院
井上直樹, 2016, 「高句麗遺民と新羅-7世紀後半の東アジア情勢」, 『東洋史硏究』 75-1
〈참고문헌〉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李丙燾, 1964, 「高句麗의 一部 遺民에 대한 抽戶政策」, 『震檀學報』 25·26·27
村上四男, 1978, 「新羅国と報德王安勝の小高句麗国」, 『朝鮮古代史硏究』, 開明書院
井上直樹, 2016, 「高句麗遺民と新羅-7世紀後半の東アジア情勢」, 『東洋史硏究』 75-1
안승(安勝) :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1 당기17 고종 함형(咸亨) 원년 4월조과 『신당서』 권220 열전145 동이 고려에는 ‘安舜’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본기 기사는 주로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기록을 발췌한 기사인데, ‘安舜’이란 이름을 ‘安勝’으로 기술하였다. 본서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10년 6월조에 의하면 안승은 고구려 멸망 후 서해의 사야도(史冶島)에 피신해 있었는데, 670년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킨 검모잠(劒牟岑)에 의하여 추대되어 한성(漢城)에서 왕으로 즉위하였다. 소형(小兄) 다식(多式)을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여 문무왕은 그를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그 후 문무왕 14년(674)에는 보덕국왕(報德國王)으로 봉하였다. 신문왕 3년(683)에는 경주로 옮겨 살게 하였고 이때 소판(蘇判)의 관등을 주고 김(金) 성을 하사하였다. 안승의 행적은 아래의 글들이 참고된다.
〈참고문헌〉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정선여, 2010, 「신라로 유입된 고구려 유민의 동향-報德國 주민을 중심으로」, 『역사와 담론』 56
최재도, 2015, 「漢城의 高句麗國 再檢討」, 『동북아역사논총』 47
신은이, 2018, 「보덕국의 탄생과 그 의미」, 『大丘史學』 113
김강훈, 2018a, 「高句麗 復興運動 硏究」, 경북대 박사학위논문
김강훈, 2018b, 「고구려 멸망 직후 당의 고구려 故地 지배 시도와 유민의 동향」, 『大丘史學』 113
방용철, 2018, 「고구려 부흥전쟁의 발발과 그 성격」, 『大丘史學』 113
정원주, 2018, 「唐의 고구려 지배정책과 安勝의 行步」, 『한국고대사탐구』 29
정원주, 2019, 「安勝의 向方과 고구려 부흥운동」, 『軍史』 110
김수진, 2020, 「670년 평양 일대 고구려 유민의 남하와 부흥운동의 전개」, 『역사와 실학』 72
최호원, 2020, 「고구려 검모잠·안승 세력과 대신라관계 인식」, 『신라사학보』 49
권창혁, 2021, 「670~673년 신라의 고구려 부흥운동 지원 전략에 대한 검토」, 『신라사학보』 51
村上四男, 1978, 「新羅国と報德王安勝の小高句麗国」, 『朝鮮古代史硏究』, 開明書院
井上直樹, 2016, 「高句麗遺民と新羅-7世紀後半の東アジア情勢」, 『東洋史硏究』 75-1
〈참고문헌〉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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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훈, 2018a, 「高句麗 復興運動 硏究」, 경북대 박사학위논문
김강훈, 2018b, 「고구려 멸망 직후 당의 고구려 故地 지배 시도와 유민의 동향」, 『大丘史學』 113
방용철, 2018, 「고구려 부흥전쟁의 발발과 그 성격」, 『大丘史學』 113
정원주, 2018, 「唐의 고구려 지배정책과 安勝의 行步」, 『한국고대사탐구』 29
정원주, 2019, 「安勝의 向方과 고구려 부흥운동」, 『軍史』 110
김수진, 2020, 「670년 평양 일대 고구려 유민의 남하와 부흥운동의 전개」, 『역사와 실학』 72
최호원, 2020, 「고구려 검모잠·안승 세력과 대신라관계 인식」, 『신라사학보』 49
권창혁, 2021, 「670~673년 신라의 고구려 부흥운동 지원 전략에 대한 검토」, 『신라사학보』 51
村上四男, 1978, 「新羅国と報德王安勝の小高句麗国」, 『朝鮮古代史硏究』, 開明書院
井上直樹, 2016, 「高句麗遺民と新羅-7世紀後半の東アジア情勢」, 『東洋史硏究』 75-1
註) 001
왕의 서자(庶子) : 여기서 서자(庶子)의 뜻은 맏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 이하를 일컫는 말이다. 안승의 출자에 대해서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본서 고구려본기 본문에서는 보장왕의 서자(庶子)라고 하였고,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1 당기17 고종 함형(咸亨) 원년 4월조, 『신당서』 권220 열전145 동이 고려 등에서는 보장왕의 외손(外孫)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2 紀異下 文虎王法敏조에는 보장왕의 외손, 본서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10년 6월조에는 연정토(淵淨土)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보장왕의 외손이며, 연정토의 아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이병도, 7쪽; 村上四男, 242쪽; 노태돈, 249쪽; 井上直樹, 100-104쪽)
〈참고문헌〉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李丙燾, 1964, 「高句麗의 一部 遺民에 대한 抽戶政策」, 『震檀學報』 25·26·27
村上四男, 1978, 「新羅国と報德王安勝の小高句麗国」, 『朝鮮古代史硏究』, 開明書院
井上直樹, 2016, 「高句麗遺民と新羅-7世紀後半の東アジア情勢」, 『東洋史硏究』 75-1
〈참고문헌〉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李丙燾, 1964, 「高句麗의 一部 遺民에 대한 抽戶政策」, 『震檀學報』 25·26·27
村上四男, 1978, 「新羅国と報德王安勝の小高句麗国」, 『朝鮮古代史硏究』, 開明書院
井上直樹, 2016, 「高句麗遺民と新羅-7世紀後半の東アジア情勢」, 『東洋史硏究』 75-1
註) 002
안승(安勝) :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1 당기17 고종 함형(咸亨) 원년 4월조과 『신당서』 권220 열전145 동이 고려에는 ‘安舜’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본기 기사는 주로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기록을 발췌한 기사인데, ‘安舜’이란 이름을 ‘安勝’으로 기술하였다. 본서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10년 6월조에 의하면 안승은 고구려 멸망 후 서해의 사야도(史冶島)에 피신해 있었는데, 670년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킨 검모잠(劒牟岑)에 의하여 추대되어 한성(漢城)에서 왕으로 즉위하였다. 소형(小兄) 다식(多式)을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여 문무왕은 그를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그 후 문무왕 14년(674)에는 보덕국왕(報德國王)으로 봉하였다. 신문왕 3년(683)에는 경주로 옮겨 살게 하였고 이때 소판(蘇判)의 관등을 주고 김(金) 성을 하사하였다. 안승의 행적은 아래의 글들이 참고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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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도, 2015, 「漢城의 高句麗國 再檢討」, 『동북아역사논총』 47
신은이, 2018, 「보덕국의 탄생과 그 의미」, 『大丘史學』 113
김강훈, 2018a, 「高句麗 復興運動 硏究」, 경북대 박사학위논문
김강훈, 2018b, 「고구려 멸망 직후 당의 고구려 故地 지배 시도와 유민의 동향」, 『大丘史學』 113
방용철, 2018, 「고구려 부흥전쟁의 발발과 그 성격」, 『大丘史學』 113
정원주, 2018, 「唐의 고구려 지배정책과 安勝의 行步」, 『한국고대사탐구』 29
정원주, 2019, 「安勝의 向方과 고구려 부흥운동」, 『軍史』 110
김수진, 2020, 「670년 평양 일대 고구려 유민의 남하와 부흥운동의 전개」, 『역사와 실학』 72
최호원, 2020, 「고구려 검모잠·안승 세력과 대신라관계 인식」, 『신라사학보』 49
권창혁, 2021, 「670~673년 신라의 고구려 부흥운동 지원 전략에 대한 검토」, 『신라사학보』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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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훈, 2018a, 「高句麗 復興運動 硏究」, 경북대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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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주, 2018, 「唐의 고구려 지배정책과 安勝의 行步」, 『한국고대사탐구』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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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진, 2020, 「670년 평양 일대 고구려 유민의 남하와 부흥운동의 전개」, 『역사와 실학』 72
최호원, 2020, 「고구려 검모잠·안승 세력과 대신라관계 인식」, 『신라사학보』 49
권창혁, 2021, 「670~673년 신라의 고구려 부흥운동 지원 전략에 대한 검토」, 『신라사학보』 51
村上四男, 1978, 「新羅国と報德王安勝の小高句麗国」, 『朝鮮古代史硏究』, 開明書院
井上直樹, 2016, 「高句麗遺民と新羅-7世紀後半の東アジア情勢」, 『東洋史硏究』 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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