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산·마산·고산·사평현을 설치하다
(
686년
02월
)
2월에 석산(石山)註 001·마산(馬山)註 002·고산(孤山)註 003·사평(沙平)註 004의 네 현을 설치하였다.註 005
석산(石山)〔현〕: 석산현(石山縣)은 오늘날 충남 부여군 석성면에 해당한다. 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웅주 부여군(扶餘郡)조에 “석산현은 본래 백제 진악산현(珍惡山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석산현으로)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석성현(石城縣)이다.”라고 전한다. 본서 권제7 신라본기제7 문무왕 11년 6월조에 “장군 죽지(竹旨) 등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백제 가림성(加林城)의 벼를 짓밟게 하였다. 마침내 당나라 군사와 석성(石城)에서 싸워 5천 3백 명을 목 베고 백제 장군 두 명과 당나라 과의(果毅) 여섯 명을 사로잡았다.”고 전한다. 이 기록을 통해 백제에서 진악산성을 석성이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신문왕 6년(686)에 석산현을 설치하였으므로, 백제에서 석성을 또는 석산(石山)이라고도 불렀다고 볼 수 있다. 경덕왕대에 진악산현을 석산현으로 개칭하였던 것에서 신문왕 6년 이후 석산(또는 석성)을 진악산이라고 고쳐 불렀고, 경덕왕대에 진악산현을 다시 석산현으로 개정하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고산(孤山)〔현〕: 고산현은 오늘날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 해당한다. 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웅주 임성군(任城郡)조에 “고산현(孤山縣)은 본래 백제 오산현(烏山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예산현(禮山縣)이다.”라고 전한다. 한편 본서 권제37 잡지제6 지리4 지심주(支潯州) 9현조에 “마진현(馬津縣)은 본래 고산(孤山)이었다.”라고 전한다. 두 자료를 통해 고산현이 고려의 예산현에 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9년(548) 4월조에 고구려 군대가 백제의 마진성(馬津城)을 포위한 사건이 전하고,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9년(548) 2월조, 권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4년(548) 정월조, 권26 백제본기제4 성왕 26년(548) 정월조에 고구려가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고산(孤山)과 독산(獨山)은 상통(相通)하므로 둘은 동일한 지명을 가리키는 이표기(異表記)라고 볼 수 있다. 『일본서기』와 본 기록을 통해 충남 예산군 예산읍을 백제에서 마진(馬津) 또는 고산(독산)이라고 불렀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당나라는 백제를 정복한 후에 두 지명 가운데 마진(馬津)을 취하여 현의 명칭으로 삼았다. 당나라가 백제고지에 설치한 51현의 하나인 마진현의 본래 이름이 고산이라고 전하여 백제 멸망 무렵에 예산읍을 고산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본 기록은 신문왕 6년(686)에 신라에서도 마진(馬津) 대신 고산이라는 지명을 사용하였음을 알려준다.
석산(石山)·마산(馬山)·고산(孤山)·사평(沙平)의 네 현을 설치하였다: 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웅주조에 네 개의 현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종래에 진평왕대부터 행정촌(行政村)을 현(縣)으로 재편하는 작업을 전개하다가 신문왕 5년(685) 무렵에 전국적으로 현제(縣制)를 확대 실시하였다고 보는 견해(김창석, 2007, 128~136쪽)가 제기되었다. 본 기록은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자료의 하나이다. 한편 본 기록은 신문왕 5년(685) 9주체제를 갖추면서 웅천주 관내의 군현을 정리하였는데, 이때에 누락되었던 지역을 다시 현으로 설정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이문기, 1990, 16쪽).
〈참고문헌〉
이문기, 1990 「통일신라의 지방관제 연구」, 『국사관논총』 20
김창석, 2007, 「신라 현제의 성립과 기능」, 『한국고대사연구』 48
〈참고문헌〉
이문기, 1990 「통일신라의 지방관제 연구」, 『국사관논총』 20
김창석, 2007, 「신라 현제의 성립과 기능」, 『한국고대사연구』 48
註) 001
석산(石山)〔현〕: 석산현(石山縣)은 오늘날 충남 부여군 석성면에 해당한다. 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웅주 부여군(扶餘郡)조에 “석산현은 본래 백제 진악산현(珍惡山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석산현으로)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석성현(石城縣)이다.”라고 전한다. 본서 권제7 신라본기제7 문무왕 11년 6월조에 “장군 죽지(竹旨) 등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백제 가림성(加林城)의 벼를 짓밟게 하였다. 마침내 당나라 군사와 석성(石城)에서 싸워 5천 3백 명을 목 베고 백제 장군 두 명과 당나라 과의(果毅) 여섯 명을 사로잡았다.”고 전한다. 이 기록을 통해 백제에서 진악산성을 석성이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신문왕 6년(686)에 석산현을 설치하였으므로, 백제에서 석성을 또는 석산(石山)이라고도 불렀다고 볼 수 있다. 경덕왕대에 진악산현을 석산현으로 개칭하였던 것에서 신문왕 6년 이후 석산(또는 석성)을 진악산이라고 고쳐 불렀고, 경덕왕대에 진악산현을 다시 석산현으로 개정하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註) 002
註) 003
고산(孤山)〔현〕: 고산현은 오늘날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 해당한다. 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웅주 임성군(任城郡)조에 “고산현(孤山縣)은 본래 백제 오산현(烏山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예산현(禮山縣)이다.”라고 전한다. 한편 본서 권제37 잡지제6 지리4 지심주(支潯州) 9현조에 “마진현(馬津縣)은 본래 고산(孤山)이었다.”라고 전한다. 두 자료를 통해 고산현이 고려의 예산현에 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9년(548) 4월조에 고구려 군대가 백제의 마진성(馬津城)을 포위한 사건이 전하고,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9년(548) 2월조, 권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4년(548) 정월조, 권26 백제본기제4 성왕 26년(548) 정월조에 고구려가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고산(孤山)과 독산(獨山)은 상통(相通)하므로 둘은 동일한 지명을 가리키는 이표기(異表記)라고 볼 수 있다. 『일본서기』와 본 기록을 통해 충남 예산군 예산읍을 백제에서 마진(馬津) 또는 고산(독산)이라고 불렀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당나라는 백제를 정복한 후에 두 지명 가운데 마진(馬津)을 취하여 현의 명칭으로 삼았다. 당나라가 백제고지에 설치한 51현의 하나인 마진현의 본래 이름이 고산이라고 전하여 백제 멸망 무렵에 예산읍을 고산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본 기록은 신문왕 6년(686)에 신라에서도 마진(馬津) 대신 고산이라는 지명을 사용하였음을 알려준다.
註) 004
註) 005
석산(石山)·마산(馬山)·고산(孤山)·사평(沙平)의 네 현을 설치하였다: 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웅주조에 네 개의 현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종래에 진평왕대부터 행정촌(行政村)을 현(縣)으로 재편하는 작업을 전개하다가 신문왕 5년(685) 무렵에 전국적으로 현제(縣制)를 확대 실시하였다고 보는 견해(김창석, 2007, 128~136쪽)가 제기되었다. 본 기록은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자료의 하나이다. 한편 본 기록은 신문왕 5년(685) 9주체제를 갖추면서 웅천주 관내의 군현을 정리하였는데, 이때에 누락되었던 지역을 다시 현으로 설정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이문기, 1990, 16쪽).
〈참고문헌〉
이문기, 1990 「통일신라의 지방관제 연구」, 『국사관논총』 20
김창석, 2007, 「신라 현제의 성립과 기능」, 『한국고대사연구』 48
〈참고문헌〉
이문기, 1990 「통일신라의 지방관제 연구」, 『국사관논총』 20
김창석, 2007, 「신라 현제의 성립과 기능」, 『한국고대사연구』 48
주제분류
- 정치>행정>군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