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고종이 백제를 치게 하다
(
660년
03월
)
〔7년(660)〕 3월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註 001 소정방(蘇定方)을註 002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註 003으로 삼고 김인문(金仁問)을 부대총관(副大摠管)註 004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註 005 유백영(劉伯英)註 006 등 수군과 육군 130,000명註 007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그리고〕 칙명(勅命)으로 왕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註 008으로 삼아서 장수와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응원하게 하였다.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 신구도(神丘道) 방면을 원정하는 군대의 총사령관이라는 뜻의 임시 관직이다. 신구는 연연산(燕然山)을 높여서 말한 것인데(『문선(文選)』 권56 봉연연산명(封燕然山名)조), 지금의 외몽골 삼음약안부(三音若顔部)의 항애산(杭愛山)의 옛 이름이다.『후한서(後漢書)』 권23 열전(列傳) 두융부(竇融傅)의 부(附) 두헌전(竇憲傳)에 따르면, 후한(後漢)의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이 화제(和帝) 영원(永元) 원년(89)에 흉노(匈奴)를 북벌(北伐)하여 여기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따라서 신구도라는 이름은 당의 백제 원정을 한나라의 흉노 북벌에 빗댄 것이다.『구당서(舊唐書)』 권83 열전(列傳)33 소정방(蘇定方) 및『구당서』 권199 신라전(新羅傳)에는 ‘웅진도대총관(熊津道大摠管)’으로,「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신구우이마한웅진등십사도대총관(神丘嵎夷馬韓熊津等十四道大摠管)’이라 하였다(정구복 외, 182~183쪽). 한편 신구를 우이와 함께 이종족(異種族) 출신으로서 백제에 귀화하여 도성에 거주하던 집단 또는 행정구역으로 보기도 한다(윤선태, 2006).
〈참고문헌〉
윤선태, 2006, 「백제 사비도성과 ‘嵎夷’-木簡으로 본 사비도성의 안과 밖-」, 『東亞考古論壇』 2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참고문헌〉
윤선태, 2006, 「백제 사비도성과 ‘嵎夷’-木簡으로 본 사비도성의 안과 밖-」, 『東亞考古論壇』 2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부대총관(副大摠管): 이 기사는 중국의 기록에는 전하지 않고, 본서 권제44 열전제4 김인문(金仁問)조에 기록되었다.「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김인문이 부대총관으로서 좌령군장군(左領軍將軍)의 관직을 역임하였다고 전한다.
유백영(劉伯英):『책부원귀(冊府元龜)』 권986 외신부(外臣部) 정토(征討) 현경(顯慶) 5년(660)조에는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다음에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홰(馮士翽)와 좌효위장군 방효태(龐孝泰)가 기록되었다.『신당서(新唐書)』 권220 백제전(百濟傳)에는 유백영의 관직이 좌위장군(左衛將軍)으로, 풍사홰가 풍사귀(馮士貴)로 기록되었다.『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태종춘추공조에도 자(字)가 인원(仁遠)이며, 좌위장군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신당서』의 기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수군과 육군 130,000명:『구당서(舊唐書)』 권199 신라전(新羅傳) 현경(顯慶) 5년(660)조와『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현경 5년 3월조에는 ‘수륙십만(水陸十萬)’으로 기록되었다.『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조의 세주(細注)에는 향기(鄕記)를 인용하여 “군사가 122,711명, 선박이 1,900척”이라고 전한다. 본서의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찬자가 중국 사서가 아닌 독자의 전승 기록을 활용한 사례이며, 이를 보다 존중하였음을 보여준다.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 우이도(嵎夷道) 방면을 원정하는 군대의 사령관이라는 뜻의 임시 관직이다. 우이(嵎夷)는 『서경(書經)』 요전편(堯典篇)과『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전(東夷傳) 서문(序文) 등에 나오며, 지금의 중국 산둥반도의 내이(萊夷)를 가리키기도 하고, 중국 동쪽 방면의 구이(九夷)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한반도를 가리킨다(정구복 외, 184쪽). 한편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에서 출토된 목간에 ‘우이’라는 묵서와 함께 낙인(烙印)이 찍혀 있어 이 목간을 당나라의 유물로 보기도 한다(이용현, 2009).
〈참고문헌〉
이용현, 2009, 「木簡을 통해 본 韓國의 文字와 言語」,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인문한국사업단 6월 동아시아포럼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참고문헌〉
이용현, 2009, 「木簡을 통해 본 韓國의 文字와 言語」,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인문한국사업단 6월 동아시아포럼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註) 001
註) 003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 신구도(神丘道) 방면을 원정하는 군대의 총사령관이라는 뜻의 임시 관직이다. 신구는 연연산(燕然山)을 높여서 말한 것인데(『문선(文選)』 권56 봉연연산명(封燕然山名)조), 지금의 외몽골 삼음약안부(三音若顔部)의 항애산(杭愛山)의 옛 이름이다.『후한서(後漢書)』 권23 열전(列傳) 두융부(竇融傅)의 부(附) 두헌전(竇憲傳)에 따르면, 후한(後漢)의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이 화제(和帝) 영원(永元) 원년(89)에 흉노(匈奴)를 북벌(北伐)하여 여기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따라서 신구도라는 이름은 당의 백제 원정을 한나라의 흉노 북벌에 빗댄 것이다.『구당서(舊唐書)』 권83 열전(列傳)33 소정방(蘇定方) 및『구당서』 권199 신라전(新羅傳)에는 ‘웅진도대총관(熊津道大摠管)’으로,「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신구우이마한웅진등십사도대총관(神丘嵎夷馬韓熊津等十四道大摠管)’이라 하였다(정구복 외, 182~183쪽). 한편 신구를 우이와 함께 이종족(異種族) 출신으로서 백제에 귀화하여 도성에 거주하던 집단 또는 행정구역으로 보기도 한다(윤선태, 2006).
〈참고문헌〉
윤선태, 2006, 「백제 사비도성과 ‘嵎夷’-木簡으로 본 사비도성의 안과 밖-」, 『東亞考古論壇』 2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참고문헌〉
윤선태, 2006, 「백제 사비도성과 ‘嵎夷’-木簡으로 본 사비도성의 안과 밖-」, 『東亞考古論壇』 2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註) 004
부대총관(副大摠管): 이 기사는 중국의 기록에는 전하지 않고, 본서 권제44 열전제4 김인문(金仁問)조에 기록되었다.「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김인문이 부대총관으로서 좌령군장군(左領軍將軍)의 관직을 역임하였다고 전한다.
註) 005
註) 006
유백영(劉伯英):『책부원귀(冊府元龜)』 권986 외신부(外臣部) 정토(征討) 현경(顯慶) 5년(660)조에는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다음에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홰(馮士翽)와 좌효위장군 방효태(龐孝泰)가 기록되었다.『신당서(新唐書)』 권220 백제전(百濟傳)에는 유백영의 관직이 좌위장군(左衛將軍)으로, 풍사홰가 풍사귀(馮士貴)로 기록되었다.『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태종춘추공조에도 자(字)가 인원(仁遠)이며, 좌위장군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신당서』의 기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註) 007
수군과 육군 130,000명:『구당서(舊唐書)』 권199 신라전(新羅傳) 현경(顯慶) 5년(660)조와『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현경 5년 3월조에는 ‘수륙십만(水陸十萬)’으로 기록되었다.『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조의 세주(細注)에는 향기(鄕記)를 인용하여 “군사가 122,711명, 선박이 1,900척”이라고 전한다. 본서의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찬자가 중국 사서가 아닌 독자의 전승 기록을 활용한 사례이며, 이를 보다 존중하였음을 보여준다.
註) 008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 우이도(嵎夷道) 방면을 원정하는 군대의 사령관이라는 뜻의 임시 관직이다. 우이(嵎夷)는 『서경(書經)』 요전편(堯典篇)과『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전(東夷傳) 서문(序文) 등에 나오며, 지금의 중국 산둥반도의 내이(萊夷)를 가리키기도 하고, 중국 동쪽 방면의 구이(九夷)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한반도를 가리킨다(정구복 외, 184쪽). 한편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에서 출토된 목간에 ‘우이’라는 묵서와 함께 낙인(烙印)이 찍혀 있어 이 목간을 당나라의 유물로 보기도 한다(이용현, 2009).
〈참고문헌〉
이용현, 2009, 「木簡을 통해 본 韓國의 文字와 言語」,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인문한국사업단 6월 동아시아포럼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참고문헌〉
이용현, 2009, 「木簡을 통해 본 韓國의 文字와 言語」,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인문한국사업단 6월 동아시아포럼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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