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군
견성군(堅城郡)註 157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마홀군(馬忽郡)註 158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159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포주(抱州)註 160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2개이다.
견성군(堅城郡):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소속의 군(郡)으로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586쪽; 정구복 외, 1997d, 251쪽). 사천현(沙川縣)과 동음현(洞隂縣) 등 영현(領縣) 2개를 거느렸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마홀군(馬忽郡)을 견성군으로 고쳤다고 하는데,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는 ‘비성군(臂城郡)’으로 나온다. 본서 신라본기4와 고구려본기8에 따르면 신라가 629년(진평왕 51, 영류왕 12) 8월에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점령하였다고 나오는데, 낭비성은 견성군(堅城郡)의 옛 고구려 지명인 비성군(臂城郡)에 해당한다고 파악된다(서영일, 1996: 1999, 243~249쪽). 한탄강 지류인 포천천 일대는 629년까지 고구려의 영역이었다가, 낭비성 전투를 계기로 신라의 영역으로 바뀐 것이다(김강훈, 2020). 포천 반월산성(半月山城)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마홀’(馬忽)’명 기와가 출토되었는데(단국대학교 사학과, 1996~1998; 박성현, 2008, 107쪽; 서봉수, 2021, 134~137쪽), 견성군=비성군의 치소(治所)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서영일, 1999, 243~249쪽; 박성현, 2010, 262쪽).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남경유수관 양주 포주(抱州)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포주’로 이름을 고쳤고, 성종(成宗) 14년(995)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1005)에 없앴고, 현종(顯宗) 9년(1018)에 양주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 경기 포천현조에 따르면 조선 태종 13년(1413)에 현감을 두었다고 한다. 광해군이 영평(永平: 포천시 영중면)과 합쳐 부(府)로 삼았다가 인조가 각기 다시 분리하여 현(縣)으로 낮추었다. 고종이 군(郡)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단국대학교 사학과, 1996~1998, 『포천 반월산성』 (1차~3차 발굴조사보고서)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서봉수, 2021, 『한강유역의 기와-신라』, 백두문화재연구원
서영일, 1996, 「抱川 半月山城 出土 ‘馬忽受解空口單’銘 기와의 考察」, 『사학지』 29
박성현, 2008, 「신라 성지 출토 문자자료의 현황과 분류」, 『목간과 문자』 2
김강훈, 2020, 「629년 신라의 낭비성 전투 승리와 그 의미」, 『사학연구』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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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훈, 2020, 「629년 신라의 낭비성 전투 승리와 그 의미」, 『사학연구』 138
마홀군(馬忽郡):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견성군(堅城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는 ‘비성군(臂城郡)’으로 나오는데, 629년(진평왕 51, 영류왕 12) 8월에 신라가 점령하였다는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이 비성군에 해당하는 것으로 파악된다(서영일, 1996: 1999, 243~249쪽). 마홀의 ‘홀(忽)’은 견성(堅城)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499~500쪽). 포천 반월산성(半月山城)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마홀’(馬忽)’명 기와가 출토되었는데(단국대학교 사학과, 1996; 박성현, 2008, 107쪽), 견성군(=비성군)의 치소(治所)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서영일, 1999, 243~249쪽; 박성현, 2010, 262쪽).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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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 2008, 「신라 성지 출토 문자자료의 현황과 분류」, 『목간과 문자』 2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
사천현(沙川縣)註 161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내을매현(內乙買縣)註 162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163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사천현(沙川縣):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견성군(堅城郡) 소속의 현(縣)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 경기 양주목 고적조에 따르면 양주 북쪽 30리 거리에 사천폐현(沙川廢縣)이 있었다고 한다(이병도, 1977: 2012, 586쪽). 대체로 지금의 경기도 동두천시 송내동 일대로 비정된다(정구복 외, 1997d, 251쪽).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내을매현(內乙買縣)을 사천현으로 고쳤다고 한다.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서는 내을매현(內乙買縣)을 ‘내이미(內尒米)’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이에 내을(內乙)=내이(內尒)는 사(沙)의 훈, 매(買)=미(米)는 천(川)의 훈에 해당한다고 보아 광개토왕이 영락 6년(396)에 공취한 백제 58성 가운데 하나인 미사성(彌沙城)을 사천현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여호규, 2012, 192쪽). 또 『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 13년에 나오는 신라의 니미방(尼彌方)을 ‘내이미’과 음이 유사하다고 보아 동두천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전덕재, 2009, 109~110쪽). 사천현에 대응하는 신라 성곽으로는 동두천시 대전리산성이 있다(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0, 384~386쪽; 박성현, 2010, 262쪽).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남경유수관 양주 사천현(沙川縣)조에 따르면 현종(顯宗) 9년(1018)에 남경유수관 양주에 내속(來屬)하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 경기 양주목조에 따르면 조선에서도 양주에 내속하였는데, 사천폐현(沙川廢縣)은 주의 북쪽 30리에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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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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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을매현(內乙買縣):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사천현(沙川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서는 ‘내이미(內尒米)’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내을매와 내이미의 내을(內乙)=내이(內尒)는 사천의 ‘사(沙)’, 매(買)=미(米)는 ‘천(川)’에 상응하는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497~498쪽). 이에 광개토왕릉비 영락 6년(396)조의 백제 58성 가운데 하나인 미사성(彌沙城)의 ‘미(彌)’가 매(買)=미(米)=천(川), ‘사(沙)’는 내을(內乙)=내이(內尒)=사(沙)에 각각 상응한다고 보아 사천현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여호규, 2012, 192쪽). 또 『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 13년에 나오는 신라의 니미방(尼彌方)을 ‘내이미’와 음이 유사하다고 보아 동두천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전덕재, 2009, 109~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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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
동음현(洞陰縣)註 164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양골현(梁骨縣)註 165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166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동음현(洞陰縣):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견성군(堅城郡) 소속의 현(縣)으로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영평리(永平里)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586쪽; 정구복 외, 1997d, 251쪽).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양골현(梁骨縣)을 동음현으로 고쳤다고 하는데,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서는 양골현이 견성군이 아니라 철원군(鐵圓郡) 다음에 기재되어 있다(김태식, 1997, 46쪽; 이정빈, 2019, 45~47쪽). 동음현(포천시 영중면)이 견성군(포천시 군내면)과 철원군(철원읍) 사이에 위치하였다는 점에서 경덕왕대에 양골현을 동음현으로 이름을 고치며 철원군에서 견성군으로 소속을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양골(梁骨)’명 명문기와가 출토된 바 있는데(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경덕왕대의 지명 개정 이후에도 그 이전 지명이 널리 사용된 사실을 보여준다(전덕재, 2021, 117~124쪽). 동음현에 대응하는 신라 성곽으로는 포천 영중면의 성동리산성이 있다(경기도박물관, 1999, 301~484쪽; 박성현, 2010, 262쪽). 『고려사』 지리지3 교주도 동주 동음현조에 따르면 현종 9년(1018)에 동주(東州)에 내속(來屬)시켰고, 예종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원종 10년(1269)에 영흥현령관(永興縣令官)으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 경기 영평현(永平縣)조에 따르면 조선 태조 3년(1394)에 ‘영평’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고종이 군(郡)으로 삼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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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이정빈, 2019,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고구려 지명과 그 의미 - 경기도 연천 지역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134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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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양골현(梁骨縣):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동음현(洞陰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서는 양골현이 견성군(堅城郡)이 아니라 철원군(鐵圓郡) 다음에 기재되어 있다(김태식, 1997, 46쪽; 이정빈, 2019, 45~47쪽). 동음현(포천시 영중면)이 견성군(포천시 군내면)과 철원군(철원읍) 사이에 위치하였다는 점에서 경덕왕대에 양골현을 동음현으로 이름을 고치며 철원군에서 견성군으로 소속을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양골(梁骨)’명 명문기와가 출토된 바 있는데(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경덕왕대의 지명 개정 이후에도 그 이전 지명이 널리 사용된 사실을 보여준다(전덕재, 2021, 117~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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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
註) 157
견성군(堅城郡):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소속의 군(郡)으로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586쪽; 정구복 외, 1997d, 251쪽). 사천현(沙川縣)과 동음현(洞隂縣) 등 영현(領縣) 2개를 거느렸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마홀군(馬忽郡)을 견성군으로 고쳤다고 하는데,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는 ‘비성군(臂城郡)’으로 나온다. 본서 신라본기4와 고구려본기8에 따르면 신라가 629년(진평왕 51, 영류왕 12) 8월에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점령하였다고 나오는데, 낭비성은 견성군(堅城郡)의 옛 고구려 지명인 비성군(臂城郡)에 해당한다고 파악된다(서영일, 1996: 1999, 243~249쪽). 한탄강 지류인 포천천 일대는 629년까지 고구려의 영역이었다가, 낭비성 전투를 계기로 신라의 영역으로 바뀐 것이다(김강훈, 2020). 포천 반월산성(半月山城)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마홀’(馬忽)’명 기와가 출토되었는데(단국대학교 사학과, 1996~1998; 박성현, 2008, 107쪽; 서봉수, 2021, 134~137쪽), 견성군=비성군의 치소(治所)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서영일, 1999, 243~249쪽; 박성현, 2010, 262쪽).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남경유수관 양주 포주(抱州)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포주’로 이름을 고쳤고, 성종(成宗) 14년(995)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1005)에 없앴고, 현종(顯宗) 9년(1018)에 양주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 경기 포천현조에 따르면 조선 태종 13년(1413)에 현감을 두었다고 한다. 광해군이 영평(永平: 포천시 영중면)과 합쳐 부(府)로 삼았다가 인조가 각기 다시 분리하여 현(縣)으로 낮추었다. 고종이 군(郡)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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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일, 1996, 「抱川 半月山城 出土 ‘馬忽受解空口單’銘 기와의 考察」, 『사학지』 29
박성현, 2008, 「신라 성지 출토 문자자료의 현황과 분류」, 『목간과 문자』 2
김강훈, 2020, 「629년 신라의 낭비성 전투 승리와 그 의미」, 『사학연구』 138
註) 158
마홀군(馬忽郡):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견성군(堅城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는 ‘비성군(臂城郡)’으로 나오는데, 629년(진평왕 51, 영류왕 12) 8월에 신라가 점령하였다는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이 비성군에 해당하는 것으로 파악된다(서영일, 1996: 1999, 243~249쪽). 마홀의 ‘홀(忽)’은 견성(堅城)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499~500쪽). 포천 반월산성(半月山城)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마홀’(馬忽)’명 기와가 출토되었는데(단국대학교 사학과, 1996; 박성현, 2008, 107쪽), 견성군(=비성군)의 치소(治所)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서영일, 1999, 243~249쪽; 박성현, 2010, 262쪽).
〈참고문헌〉
단국대학교 사학과, 1996, 『포천 반월산성 1차 발굴조사보고서』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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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59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
註) 161
사천현(沙川縣):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견성군(堅城郡) 소속의 현(縣)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 경기 양주목 고적조에 따르면 양주 북쪽 30리 거리에 사천폐현(沙川廢縣)이 있었다고 한다(이병도, 1977: 2012, 586쪽). 대체로 지금의 경기도 동두천시 송내동 일대로 비정된다(정구복 외, 1997d, 251쪽).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내을매현(內乙買縣)을 사천현으로 고쳤다고 한다.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서는 내을매현(內乙買縣)을 ‘내이미(內尒米)’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이에 내을(內乙)=내이(內尒)는 사(沙)의 훈, 매(買)=미(米)는 천(川)의 훈에 해당한다고 보아 광개토왕이 영락 6년(396)에 공취한 백제 58성 가운데 하나인 미사성(彌沙城)을 사천현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여호규, 2012, 192쪽). 또 『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 13년에 나오는 신라의 니미방(尼彌方)을 ‘내이미’과 음이 유사하다고 보아 동두천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전덕재, 2009, 109~110쪽). 사천현에 대응하는 신라 성곽으로는 동두천시 대전리산성이 있다(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0, 384~386쪽; 박성현, 2010, 262쪽).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남경유수관 양주 사천현(沙川縣)조에 따르면 현종(顯宗) 9년(1018)에 남경유수관 양주에 내속(來屬)하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 경기 양주목조에 따르면 조선에서도 양주에 내속하였는데, 사천폐현(沙川廢縣)은 주의 북쪽 30리에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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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0, 『연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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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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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62
내을매현(內乙買縣):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사천현(沙川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다.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서는 ‘내이미(內尒米)’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내을매와 내이미의 내을(內乙)=내이(內尒)는 사천의 ‘사(沙)’, 매(買)=미(米)는 ‘천(川)’에 상응하는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497~498쪽). 이에 광개토왕릉비 영락 6년(396)조의 백제 58성 가운데 하나인 미사성(彌沙城)의 ‘미(彌)’가 매(買)=미(米)=천(川), ‘사(沙)’는 내을(內乙)=내이(內尒)=사(沙)에 각각 상응한다고 보아 사천현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여호규, 2012, 192쪽). 또 『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 13년에 나오는 신라의 니미방(尼彌方)을 ‘내이미’와 음이 유사하다고 보아 동두천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전덕재, 2009, 109~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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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63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
註) 164
동음현(洞陰縣):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견성군(堅城郡) 소속의 현(縣)으로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영평리(永平里)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586쪽; 정구복 외, 1997d, 251쪽).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양골현(梁骨縣)을 동음현으로 고쳤다고 하는데,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서는 양골현이 견성군이 아니라 철원군(鐵圓郡) 다음에 기재되어 있다(김태식, 1997, 46쪽; 이정빈, 2019, 45~47쪽). 동음현(포천시 영중면)이 견성군(포천시 군내면)과 철원군(철원읍) 사이에 위치하였다는 점에서 경덕왕대에 양골현을 동음현으로 이름을 고치며 철원군에서 견성군으로 소속을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양골(梁骨)’명 명문기와가 출토된 바 있는데(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경덕왕대의 지명 개정 이후에도 그 이전 지명이 널리 사용된 사실을 보여준다(전덕재, 2021, 117~124쪽). 동음현에 대응하는 신라 성곽으로는 포천 영중면의 성동리산성이 있다(경기도박물관, 1999, 301~484쪽; 박성현, 2010, 262쪽). 『고려사』 지리지3 교주도 동주 동음현조에 따르면 현종 9년(1018)에 동주(東州)에 내속(來屬)시켰고, 예종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원종 10년(1269)에 영흥현령관(永興縣令官)으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 경기 영평현(永平縣)조에 따르면 조선 태조 3년(1394)에 ‘영평’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고종이 군(郡)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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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65
양골현(梁骨縣):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동음현(洞陰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서는 양골현이 견성군(堅城郡)이 아니라 철원군(鐵圓郡) 다음에 기재되어 있다(김태식, 1997, 46쪽; 이정빈, 2019, 45~47쪽). 동음현(포천시 영중면)이 견성군(포천시 군내면)과 철원군(철원읍) 사이에 위치하였다는 점에서 경덕왕대에 양골현을 동음현으로 이름을 고치며 철원군에서 견성군으로 소속을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양골(梁骨)’명 명문기와가 출토된 바 있는데(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경덕왕대의 지명 개정 이후에도 그 이전 지명이 널리 사용된 사실을 보여준다(전덕재, 2021, 117~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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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66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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