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번역서

각사등록(各司謄錄)

경상감영계록(慶尙監營啓錄)○고종(高宗)

고종(高宗) 원년(1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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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仁同) 죄수(罪囚) 박순철(朴順哲)
인동(仁同) 죄수 박순철(朴順哲)이 그의 아내 금란(錦蘭)을 다듬잇돌로 쳐서 당일 치사(致死)하였습니다. 갑자년(1864, 고종 원년) 5월 13일에 수감(收監)하고 1백 27차례 형신(刑訊 형장(刑杖)을 치면서 신문함)하였습니다.

본부(本府)의 관노(官奴) 재식(在植)이 발고(發告)하기를, “관비(官婢) 금란(錦蘭)이 이달 29일에 그의 남편 박순철(朴順哲)에게 구타를 당하여 당일 치사했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읍내면(邑內面) 면임(面任 각 면(面)에 차정된 권농관(勸農官)ㆍ감고(監考) 등의 통칭) 이재선(李在善)이 문보(文報)한 내용에, “관비 금란이 그의 남편 박순철에게 구타를 당하여 당일 치사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갑자년 5월 13일에 초검(初檢 1차 검시)하니, 나이가 25, 6세 가량 되는 여인이었습니다. 앙면(仰面)은, 정심(頂心 정수리) 좌변에 살갗이 찢어지고 한군데 살이 터진 곳이 있었는데, 길이는 1촌 7푼, 너비는 4푼, 깊이는 3푼이었습니다. 피가 온 머리에 가득하여 모발(毛髮)이 모두 젖었고 두발이 헝클어져 있었습니다. 왼편 조금 아래에 한군데 부딪친 흔적이 있었는데, 모양은 감탕나무 잎과 같았고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조금 딱딱했습니다. 왼편 태양혈(太陽穴 눈썹과 귀의 중간 부분)에도 한군데 부딪친 흔적이 있었는데, 모양은 감탕나무 잎과 같았고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조금 딱딱했습니다. 왼편 눈두덩〔眉角〕에 살갗이 찢기고 한군데 피멍이 든 곳이 있었는데, 상처의 둘레가 2촌 1푼이었고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조금 딱딱하였습니다. 두 눈은 반쯤 떠 있었고, 콧마루〔鼻梁〕왼편에 한군데 부딪친 흔적이 있었는데 모양은 감탕나무 잎과 같았습니다. 입이 반쯤 열려 이빨이 드러났고, 왼쪽 어깻죽지에서 왼쪽 손목까지는 자암색(紫黯色)을 띠며 부어올라 있었는데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단단하였고, 오른쪽 어깻죽지에서 오른쪽 손목 조금 아래까지는 혹 자줏빛을 띠기도 하고 거무죽죽하기도 했는데 조금 붓고 조금 딱딱했습니다. 손 한가운데〔手心〕는 부어올라 딱딱하였는데 색은 혹 자줏빛을 띠기도 하고 푸른빛을 띠기도 했으며, 손가락은 주먹을 쥐지 않았었습니다. 배는 조금 부풀었고, 오른쪽 옆구리에 한군데 피멍이 든 곳이 있었는데 모양은 감탕나무 잎과 같았습니다. 오른쪽 넓적다리 안 조금 아래에 한군데 피멍이 든 곳이 있었는데 둘레가 6촌 5푼이었고, 자암색을 띠며 조금 단단했으며, 조금 아래에 피멍이 들어 합면(合面 몸의 뒷면) 곡추(𦚼䐐)까지 퍼졌었는데 둘레가 1척 1촌이었고 자암색을 띠며 조금 단단했습니다. 왼쪽 넓적다리 안에 한군데 피멍이 든 곳이 있었는데 둘레가 9촌 3푼이었고 자암색을 띠며 조금 단단했습니다. 오른쪽 무릎 위에 한군데 피멍이 들어 자암색을 띤 곳이 있었는데 둘레가 9촌 1푼이었으며, 손가락으로 모두 눌러보니 조금 단단했습니다. 양쪽 겸인(膁肕 정강이) 위에서 양쪽 각면(脚面 발등)까지는 혹 보랏빛을 띠기도 하고 거무죽죽하기도 하고 시퍼렇기도 했었는데,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조금 딱딱했습니다.
합면(合面)은, 양쪽 비박(臂膊 팔과 어깨) 위에서 양쪽 손등까지 혹 자줏빛을 띠기도 하고 거무죽죽하기도 하고 시퍼렇기도 하고 하얗기도 했었는데, 조금 부어올랐고 조금 딱딱했었습니다. 혹 색깔이 짙기도 하고 옅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고 이어지기도 하여 푼치〔分寸〕를 잴 수가 없었습니다. 양쪽 팔 아래에서 곡추까지는 혹 자줏빛을 띠기도 하고 거무죽죽하기도 했었는데 조금 부어올랐고 조금 딱딱했으며, 짙고 옅은 정도가 같지 않아 주위를 잴 수가 없었습니다. 왼쪽 장단지〔腿肚〕바깥쪽에 옛날 칼에 찔린 상처 자국 한군데가 있었는데, 모양은 대나무 잎과 같았습니다. 왼쪽 발 넷째 발가락〔指吐〕한 마디 아래에 칼에 찢긴 자국이 있었는데, 바로 발바닥 가운데〔脚心〕를 찔렀었고 길이가 7푼, 깊이가 3푼이었으며, 피가 흘러 뼈가 드러났습니다. 입 속과 곡도(穀道 대장과 항문을 아울러 이르는 말)에 은비녀를 사용해서 시험해 보았는데 비녀색이 변하지 않았으니, 실인(實因)은 구타를 당한 것이 확실하였습니다.
발고(發告)한 관노(官奴) 재식(在植) 34세. 공초(供招)하기를, “제가 어제 조사(朝仕 아침마다 상관을 뵈는 일)한 뒤 관노방(官奴房)에 들어가니, 관비(官婢) 금란(錦蘭)이 온몸에 피범벅이 되어 방 가운데 누워 있었는데 숨이 거의 다 끊어지려고 하였습니다. 관비 매월(梅月)과 관노 개록(介祿)이 그의 손발을 주물러 주었으므로 그 위절(委折)을 물어보니, 매월이 말하기를, ‘빨래〔洗畓〕하기 위해 교동(校洞) 거리를 지나가니 금란이 그 남편 박순철(朴順哲)에게 끝없이 구타를 당하여 길가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매우 불쌍하고 가엾어서 짊어 메고서 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놀라운 마음을 견딜 수 없어 그의 집으로 짊어지워 보냈더니 마침내 죽었습니다. 이른바 금란은 다른 고을의 외로운 사람으로 본래 일가 친척이 없었으므로, 제가 수노(首奴 관노(官奴)의 우두머리)가 되어 강 언덕 쳐다보듯이 할 수 없어서 이렇게 발고(發告)하였으나, 구타를 당하는 광경은 애초에 목격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발고 서장〔發狀〕을 낸 면임(面任) 업무(業武) 박기철(朴基哲) 39세. 공초(供招)하기를, “제가 공납(公納)을 감독하기 위해 면내(面內)를 두루 돌아다녔는데, 어제 아침밥을 먹은 뒤에 본면 권농(勸農) 관원의 아들이 와서 말하기를, ‘교동에 사람이 죽은 변고가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교동으로 가서 김맹금(金孟金)을 만나 그 위절을 물어보니, 김맹금이 말하기를, ‘관비(官婢) 금란(錦蘭)이 그 남편 박순철(朴順哲)에게 구타를 당하여 끝내 죽었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김맹금의 말만 믿고 과연 문보(文報)하였습니다. 그러나 시비(是非)의 근본 원인과 구타를 당한 광경은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범(正犯 범행을 직접 저지른 사람) 사령(使令) 박순철(朴順哲) 27세. 공초하기를, “제가 금란(錦蘭)과 비록 머리를 틀어 올리고 부부가 된 것은 아니지만 배필(配匹)이 되어 산 지가 벌써 5년이나 오래되었더니, 제가 몇 개월 경산(慶山)으로 옮겨 수감되어 배소(配所)로 가기 위해 집으로 돌아오니 이웃 마을에 사는 일가 친척들이 모두 위문하였는데, 이른바 금란이 제가 옮겨 수감되는 여가를 이용해서 관노(官奴) 재식(在植)과 화간(和奸 간통(姦通))하여 옛 정의(情誼)를 깜빡 잊고 끝내 위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여자를 불러와 무정함을 꾸짖으니 사죄를 안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악독한 성질을 함부로 부렸습니다. 제가 분노를 견디지 못해 과연 머리채를 잡고 끈 일은 있지만 정말로 손찌검을 한 적은 없습니다. 대체로 사변(事變)을 빚어낸 것은 재식과 화간한 데서 말미암았습니다. 재식과 저를 동률(同律)로 죄를 적용하여 이 원한을 풀도록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간증(看證 범죄와 연관된 증인) 양인(良人) 김맹금(金孟金) 42세. 공초하기를, “제가 어제 아침밥을 먹은 뒤 들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의 집 문 앞거리에 도착하니, 박순철(朴順哲)이 말하기를, ‘아내 금란(錦蘭)이 간음을 행하여 손에 옷 두드리는 다듬잇돌을 가지고 금란의 팔다리를 마구 때려 길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리려고 했지만 박순철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만약 붙들어 말리는 사람이 있으면 또한 구타를 당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매우 벌벌 떨려 그대로 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최후의 일은 다시 본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련(詞連 죄인의 공사(供辭)에 연루됨) 관노(官奴) 개록(介祿) 25세, 관비(官婢) 매월(梅月) 20세. 이들이 공초하기를, “개록 저는 어제 아침밥을 먹은 뒤 들어가니, 관비 금란(錦蘭)이 그 남편 박순철(朴順哲)에게 구타를 당하여 방 가운데 누워 있었으므로 마음에 매우 불쌍하고 가엾어서 잠시 손발을 주물러 주었을 뿐이고, 구타를 당한 광경은 애초에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매월 저는 어제 아침밥을 먹은 뒤에 빨래하기 위해 교동(校洞) 거리를 지나가니, 박순철이 화를 내어 길가에 앉아 금란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데도 보살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연유를 물어보니, 박순철이 말하기를, ‘이 같은 여자는 호되게 때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매우 위압적이고 두려워 금란을 돌아보니 온몸에 피범벅이 되어 정경이 참혹하고 가엾었습니다. 함께 고생을 겪은 정의(情誼)가 있어서 차마 강 언덕 쳐다보듯이 할 수 없어서 과연 짊어 메고서 관노방에 눕혀 두고 혹 미음(米飮)을 입에 떠먹이기도 하고 따뜻한 물을 입에 떠넣어 주기도 하였지만 그대로 죽었습니다. 어떻게 구타를 당했는지는 목격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절린(切隣 겨린. 살인 범인의 이웃에 사는 사람) 양녀(良女) 이 조이(李召史) 57세, 양녀 양 조이(梁召史) 40세, 양인(良人) 전강록(全江祿) 39세. 이들이 공초하기를, “이 조이 저는 어제 아침밥을 먹은 뒤 문밖에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나가서 보니, 박순철(朴順哲)이 말하기를, ‘처 금란(錦蘭)이 간음을 행하여 옷 두드리는 다듬잇돌로 금란을 마구 때려 정신을 잃고 질식하여 쓰러져 누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박순철이 화가 나서 길에 앉아 있었으므로 마음이 매우 벌벌 떨려 그대로 피해서 갔습니다. 양 조이 저는 들에 나가 모내기를 하느라 당초 구타하는 상황을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전하는 말을 들으니 박순철이라 하였습니다. 전강록 저는 어제 이른 아침에 들에 나가 저물녘에 집에 돌아왔으니, 이웃에 변고가 일어난 유무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발고(發告)한 관노(官奴) 재식(在植) 34세. 다시 공초하기를, “저의 소회(所懷)는 이미 이전 공초에서 다 말씀드렸습니다만, 금란(錦蘭)이 구타를 당한 뒤 저의 마루방〔廳房〕에 누워 있는 모습을 과연 눈으로 보니 온몸에 상처를 입어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습니다. 당장 보기에 황급할 뿐만 아니라 이미 그 남편과 시비가 붙어 구타를 당하여 거의 숨이 끊어지기에 이르렀으니, 그의 집에서 죽는 것이 일에 합당하였으므로, 과연 짊어지워 보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발고 서장을 낸 면임(面任) 업무(業武) 박기철(朴基哲) 39세. 다시 공초하기를, “저의 소회는 이미 이전 공초에서 다 말씀드렸습니다만, 공화(公貨)를 거두는 일로 금란(錦蘭)이 치사했다는 기별을 늦게야 듣고 문보(文報)하는데 급했고, 본 사건의 근본 원인은 과연 상세하게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범(正犯) 사령 박순철(朴順哲) 27세. 다시 공초하기를, “저의 소회는 이미 이전 공초에서 다 말씀드렸습니다만, 경산으로 옮겨 수감될 때 집의 기별을 들으니 저의 처 금란(錦蘭)이 관노(官奴) 재식(在植)과 난잡하게 간통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공관(空官 지방의 수령이 어떤 경위로 자리를 비움)인 때를 이용해서 모범(冒犯 법에 저촉되는 행동)하고서 집에 돌아오니 문호(門戶)를 닫지 않아 가산이 다 없어졌습니다. 금란이 있는 곳을 찾아가니 재식과 은근히 붙어 앉아 있었습니다. 끓어오르는 혈기와 강렬한 마음에 정말로 참아내기가 어려웠지만 묵묵히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헤아려 그냥 내버려 두고 다시 경산으로 가서 정배소(定配所)에 이른 뒤 다시 돌아오니, 이른바 금란이 옛날 의리를 깜빡 잊고 끝내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설파(說破)하려고 하여 대략 말로 책망하니 도리어 발악(發惡)하였습니다 제가 분노를 견디지 못해 옷을 찢고 그 머리채를 잡아 끌어내니 그가 쓰러져 상처를 입었습니다. 정말로 구타한 일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간증(看證) 김맹금(金孟金) 42세. 다시 공초하기를, “저의 소회는 이미 이전 공초에서 다 말씀드렸습니다만, 들에 나갔다 집으로 돌아와 문 앞에 당도하니 박순철(朴順哲)이 다듬잇돌로 금란(錦蘭)의 팔다리를 호되게 때렸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타하는 것을 차마 보고 지나칠 수가 없어서 손에 있는 다듬잇돌을 빼앗으려고 하니 박순철의 말이 위압적이고 두려웠으며 말리는 사람을 구타하려고 하기에, 저는 그대로 곧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몇 차례 구타를 했는지, 어느 부위에 상처를 입었는지에 대해서는 참으로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련(詞連) 관노(官奴) 개록(介祿) 25세, 관비 매월(梅月) 20세. 이들이 다시 공초하기를, “저희들의 소회는 이미 이전 공초에서 다 말씀드렸습니다만, 개록 저는 다만 매월이 그 손발을 주물러 주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 남편에게 구타를 당했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에 매우 불쌍하고 가엾어서 함께 주물러 주었습니다. 그러나 구타를 당한 광경에 대해서는 정말로 보지 못했습니다. 매월 저는 금란(錦蘭)이 구타를 당하여 정신을 잃고 쓰러진 뒤에 비로소 가서 보았으니 당시 현장의 광경은 비록 참석해서 보지 못했으나 또한 호되게 때리지 않았다면 어찌 정신을 잃고 쓰러질 리가 있겠으며, 또 어찌 온몸 여기저기에 상처 자국이 있겠습니까? 이 밖에 달리 아뢸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절린(切隣) 양녀(良女) 양 조이(梁召史) 40세, 이 조이(李召史) 57세, 양인(良人) 전강록(全江祿) 39세. 이들이 다시 공초하기를, “저희들의 소회는 이미 이전 공초에서 다 말씀드렸습니다만, 양 조이 저는 그날 꼭두새벽에 들에 나갔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돌아왔으니 당시 현장의 광경은 애초에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이 조이 저는 고함을 지르는 소리를 듣고 바로 가서 보니 박순철(朴順哲)이 거리에 앉았고 다듬잇돌이 왼쪽에 던져져 있었으며 금란(錦蘭)이 길가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마음에 저절로 두려움이 생겨 그대로 패해 갔습니다. 전강록 저는 박순철이 그 아내를 구타할 때 아예 집에 있지 않았으니 참으로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발고(發告)한 관노(官奴) 재식(在植) 34세. 세 번째 공초 내용에, “저희 소회는 이미 처음과 두 번째 공초에서 다 말씀드렸습니다만, 박순철(朴順哲)이 경산으로 옮겨 수감된 뒤에 정말로 금란(錦蘭)의 집에 가서 놀았습니다. 이는 금란에게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수노(首奴)이고 금란은 여종이니 수노와 여종간에 서로 필요로 하고 서로 따르는 것이 본래 보통 흔하게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박순철이 한 번 옮겨 수감된 뒤에 제가 그 집에 갔다는 말을 듣고 간통으로 의심하여 몰래 도망쳐 와서 금란을 구타하여 쫓아냈으므로 그가 도망갈까 염려하여 간수(看守)하였으며 참으로 간통한 일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범(正犯) 사령 박순철(朴順哲) 27세. 세 번째 공초 내용에, “저의 소회는 이미 처음과 두 번째 공초에서 다 말씀드렸습니다만, 머리채를 잡고 끌어 낼 때 그녀가 저절로 넘어져 스스로 담장에 부딪쳐 상처를 입은 것이고 실제로 저는 구타한 일이 없습니다. 오직 명백하게 조사하여 처분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간증(看證) 양인(良人) 김맹금(金孟金) 42세. 세 번째 공초 내용에, “저의 소회는 이미 처음과 두 번째 공초에서 다 말씀드렸습니다만, 박순철(朴順哲)이 다듬잇돌로 마구 때릴 때 말리려고 했으나 해(害)를 입을까 두려워 바로 피해 갔습니다. 머리가 깨지고 발이 찢어진 정황은 정말로 눈으로 보지 못했고 그 다듬잇돌로 팔다리를 때리는 상황만 봤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간증(看證) 양인 김맹금(金孟金) 42세, 정범인 사령 박순철(朴順哲) 27세. 이들을 면질(面質)시키니 공초하기를, 김맹금이 박순철을 향해 말하기를, “네가 금란(錦蘭)과 시비할 때 정말로 다듬잇돌로 세 차례 때리지 않았느냐?”라고 하니, 박순철이 말하기를, “내가 그때 옷을 찢고 머리채를 잡고서 끌어냈을 뿐이었는데 지금 다듬잇돌로 구타했다는 말로 무함(誣陷)하여 납고(納告)하는 것은 무슨 심장이오?”라고 하였습니다. 김맹금이 말하기를, “네가 금란을 구타하지 않았다면 무슨 이유로 죽었겠는가?”라고 하니, 박순철이 말하기를, “당신이 보지 않은 일로써 사지(死地)로 남을 무함하니 반드시 평소 원한이 있었던 것이오.”라고 모두 면질하여 납초(納招 죄인이 심문에 응하여 자기의 범죄 사실을 자세히 말함)했습니다.

초검관(初檢官) 인동 부사(仁同府使) 홍준모(洪俊謨)의 발사(跋辭 검시관(檢屍官)의 조사 의견서)에, “이 옥사(獄事)는 화심(禍心)을 쌓았다가 홍안(紅顔)이 집안에서 간통함으로 인하여 눈 깜짝할 사이에 죽었으니 청춘이 도중에서 저문 것이 매우 애석합니다. 그 일을 말하면 흉패(凶悖)하고, 그 정을 말하면 참혹하고 측은합니다. 아! 저 죽은 여인 금란(錦蘭)은 평소 뜬구름처럼 자유롭게 다니며 노닐고 정처(定處)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신발을 신은 걸음에 이 고을에 와서 업원(業冤 전생에서 지은 죄로 이승에서 받는 괴로움)의 짝으로 박순철(朴順哲)을 만나 한 집에서 동거하였으니 비록 머리를 틀어 올리는 정의(情義)는 없었으나 5년 동안 즐거워하고 좋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부의 정입니다. 관비(官婢)의 일에 몸을 맡기는 것이 본래 본분인데, 진수(溱水)를 건너는 걸음〔涉溱之行〕을 바꾸지 않고 옛날 버릇을 고치기 어려워 이에 남편이 감옥살이하는 틈을 엿보아 짝을 지어 다정하게 나는 메추라기와 까치의 행동〔鶉鵲之行〕을 다시 방자하게 저질러 일을 꾸며 냈으니, 한 번의 자취가 탄로 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소서. 멀고 가까운 곳 어디든지 전파되니, 수많은 사람들의 입이 다투어 짖어 대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 남편이 집을 떠나 이미 뜸해진 지가 몇 개월 오래되었고, 또 그 남편이 5백 리 멀리까지 귀양을 가게 되었으니 동거한 정의로 헤아려 볼 때 부지런히 힘써서 위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거늘, 도리어 ‘그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子不我思〕’는 서운한 마음을 품고서 ‘어찌 다른 남자가 없으리오.〔豈無他人〕’라는 생각이 더욱 깊어져 눈을 흘기며 수레바퀴살통이 빠졌습니다. 그리하여 아내가 다시 길에 오가는 남처럼 되어 그 사립문을 부수고 그 가산(家産)을 없앴으니, 남편이 그 때문에 사나운 사람이 되어 불순한 생각을 품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마침 거리를 지나며 기회를 엿보던 여가에 원수를 만나니 분기(憤氣)는 지나간 장막보다 이미 높았고 업화(業火 불같이 일어나는 노여움)는 드러난 원한에서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처음에 머리채를 잡은 것은 오히려 그리워하고 아끼는 모습이 있었지만 끝에 마구 때린 것은 돌보아 꺼려하는 뜻이 전혀 없었습니다. 긴헐(緊歇)을 구분하지 않고 마음을 시원하게 했을 뿐이니, 사나운 송곳이 번개처럼 나르자 쇠잔한 영혼이 눈처럼 녹았습니다. 마침내 6년을 함께한 혈기가 한창 건강한 여인을 갑자기 저승에서 번뇌하며 원통해 하는 혼을 만들었으니, 어찌 그리도 흉악합니까? 너무 참혹합니다.
지금 시장(屍帳 시체 검안서(檢案書))을 살펴보니, 비박(臂膊)과 각퇴(脚腿)에 자줏빛과 거무죽죽한 빛의 피멍이 허다하게 든 자국이 있는데도 오히려 헐후(歇後)한 곳을 신문(訊問)하려고 한 것이니, 죽음을 중하게 여기는 법문(法文)을 손상시켰습니다. 더구나 정심(頂心)이 찢어진 것이 저처럼 깊고 중하며 입에 난 상처의 크기가 저처럼 길고 넓으니, 이 하나의 상처로서도 바로 치사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모든 곳의 중상이 더 심해져 독을 뿜어내어 청춘기 홍안의 여인이 유유히 영영 저승으로 갔으니, 말을 하자니 이가 시리고 들으려니 머리카락이 곤두섭니다. 입을 벌리고 눈을 떴으며 채로 이며 머리털은 헝클어지고 의복은 가지런하지 않았으며 두 손은 주먹을 쥐지 않은 등의 형증(刑症)과 상처 자국이 왼쪽에 많이 있는 것이 《무원록(無冤錄)》 피타사(被打死)조와 합치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실인(實因)은 구타를 당하여 치사한 것으로 현록(懸錄)하였습니다.
박순철(朴順哲)은 타고난 성품이 흉악하고 음험하니 사람의 떳떳한 본성을 어찌 책망하겠습니까? 여인의 음란한 행동이 고약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천도(天道)가 신명(神明)하니 사람이 홀로 죽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관아 노비〔官物〕의 서로 좋아하는 정분〔雲情〕은 본래 정결하고 견고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디를 먹는 비둘기〔食葚之鳩〕를 어찌 금지하며, 나무에 오르는 원숭이〔升木之猱〕를 어찌 가르치겠습니까? 저와 같은 천한 부류에게 비록 완전하게 갖추어 다 잘하기를 요구하기는 어렵지만 만약 이부자리 위에서 알아듣도록 잘 타일러 오히려 남이 혹시 알까 두려워하게 했다면, 비록 지극히 음란하고 추악한 여인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낯가죽에 부끄러워하고 마음을 고쳐먹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인데, 흉패(凶悖)를 부려 마치 풀을 베듯이 사람을 죽여 안타까운 마음을 끊어버리고 흉악함을 다한 것이 독사와 맹수보다 더 심합니다. 그런데 공초하는 뜰에서 감히 살기를 구하려고 머리를 끌었다 하고 그 구타를 자복하지 않았습니다. 올빼미 창자에 이리의 성질이니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그가 얼굴을 붉히며 백뢰(白賴)하더라도 김맹금의 증안(證眼)이 분명하고 금란(錦蘭)의 상처 자국이 훤히 드러났습니다. 초사(招辭 범죄 혐의자가 진술한 말)와 검안(檢案)이 정확하여 철안(鐵案 증거가 확실하여 번복할 수 없는 사건이나 사안)이 이미 만들어졌으니, 옥사(獄事)가 성립되어 상명(償命 범행을 저지른 자를 사형하여 죽은 이의 목숨을 갚는다는 뜻)하는 것은 다시 의논할 것이 없었으므로 정범은 박순철로 적어 넣었습니다. 관노(官奴) 재식(在植)은 금란과 노비(奴婢)로 서로 따르고 좇았으니 설령 매우 가까이하더라도 사사로운 감정이 없었다면 어찌 남의 의심을 받겠습니까? 간사한 사람의 아내가 살인 사건을 이르게 했으니, 만약 원위(原委 본말(本末))를 구한다면 참으로 화(禍)의 계제가 되는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이른바 박순철이 끌어당긴 것은 순전히 쇠를 훔쳤다고 헛되게 의심한 것이고 옥을 훔친 진장(眞贓 범행의 확실한 증거물)이 아닙니다. 살펴보시고 처분하시기 바라며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은 별로 논할 만한 단서가 없습니다. 복검관(覆檢官)은 칠곡 부사(漆谷府使)를 오도록 청원해서 거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연유를 아울러 첩보(牒報)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전(前) 도신(道臣) 서헌순(徐憲淳)의 회제(回題 회답하는 제사(題辭))에, “복검장(覆檢狀)을 빙고(憑考)하도록 시장(屍帳)을 바쳐 올릴 것.”이라고 제사(題辭 판결 또는 처분)를 보냈습니다.

갑자년(1864, 고종 원년) 6월 초7일에 복검(覆檢 2차 검시)하니, 나이가 25, 6세 가량 되는 여인이었습니다. 앙면(仰面)은, 정심(頂心) 조금 왼쪽에서 두개골 조금 왼쪽까지 살갗에 한군데 피멍이 든 곳이 있었는데 둘레는 5촌 8푼이었고 자암색(紫暗色)이 둥그스름하게 테두리를 쳤으며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딱딱했습니다. 왼쪽 태양혈(太陽穴)에도 살갗에 한군데 피가 묻어 테두리가 쳐진 곳이 있었는데 둘레가 2촌이었습니다. 입은 벌려 있었고 두 손은 흩어져 있었으며 오른쪽 광대뼈〔頰骨〕위 피부에 한 군데 피멍이 든 곳이 있었는데 둘레가 3촌 1푼이었고 자암색을 띠고 딱딱했습니다. 겸인(膁肕) 위아래 살갗에 피멍이 들었는데 혹 끊어지기도 하고 퍼지기도 하여 부위를 재기가 어려웠습니다. 왼쪽 발목〔脚腕〕안 고리 뼈가 부러졌는데 가로 길이가 2촌 1푼이었고 왼쪽 복사뼈까지 이어졌으며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매우 날카로웠습니다.
합면(合面)은, 귀뿌리 뼈〔耳根骨〕위 피부에 한군데 피멍이 든 곳이 있었는데 둘레가 1촌 3푼이었고 자암색을 띠며 딱딱했습니다. 왼쪽 팔꿈치〔肐肘〕조금 아래에 한군데 뼈가 부러진 곳이 있었는데 사기그릇이 조각조각 난 것 같았고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자갈 같아 잴 수가 없었습니다. 입 속과 곡도(穀道)에 은비녀를 사용해서 시험해 보니 비녀색이 변하지 않았으니, 실인(實因)은 구타를 당하여 치사(致死)한 것이 확실하였습니다.

발고(發告)한 관노(官奴) 재식(在植) 34세. 공초하기를, “저는 바로 앙역 수노(仰役首奴)입니다. 지난달 29일에 조사(朝仕)한 뒤에 관노방(官奴房)에 나가니 관비(官婢) 금란(錦蘭)이 방 가운데 누워 있었는데 숨이 끊어지려고 했습니다. 관노 개록(介祿)과 관비 매월(梅月)이 곁에서 주물러 주고 있었으므로 그 연유를 물어보니, 매월이 말하기를, ‘아까 빨래〔洗畓〕하기 위해 나가는 길에 교동(校洞) 김맹금(金孟金)의 집 앞에 도착하니 마침 금란이 그 남편 박순철(朴順哲)에게 구타를 당하여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보고 차마 강 언덕 보듯이 할 수 없어서 여기로 업고 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매우 위태롭고 황급하였으므로 그의 집으로 업어 보냈더니 그대로 죽었습니다. 금란은 본래 친속(親屬)이 없었으므로 제가 수노(首奴)가 되어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과연 관(官)에 고발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발고 서장〔發狀〕을 낸 면임(面任) 업무(業武) 박기철(朴基哲) 39세. 공초하기를, “제가 공화(公貨)를 거두기 위해 지난달 29일에 10리쯤 되는 바깥 마을에 나갔는데, 당일 신시(申時)쯤에 권농(勸農)의 아들이 와서 말하기를, ‘교동(校洞)에 사람을 죽인 변고가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부(府)에 들어가 물어보니, 관비(官婢) 금란(錦蘭)이 그 남편 박순철(朴順哲)에게 구타를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즉시 관에 보고하였으나 그 당시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본 증인이 누구인지는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범(正犯) 사령(使令) 박순철(朴順哲) 27세. 공초하기를, “제가 금란(錦蘭)과 배필이 된 지가 지금 5년이 되었습니다. 본래 성품이 욕심이 많고 음란하여 관노(官奴) 재식(在植)과 간통한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제가 금년 2월에 경산으로 옮겨 수감되어 4월 일에 옷감을 주기 위해 잠시 집에 돌아오니 집안이 텅 비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금란이 간 곳을 탐문하니, 이른바 금란이 재식(在植)과 아사(衙舍 관사(官舍)) 바깥 사랑채에서 무릎을 가까이 대고 붙어 앉아 있었거늘 제가 곧장 재식을 향하여 금란을 차지하게 하고 분노를 참으며 돌아와 다시 경산으로 갔습니다. 죄가 조율(照律)해서 도배(徒配)로 결정되어 배소로 떠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오니 옛날 정의를 깜빡 잊고 한 번도 와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9일 아침에 김맹금(金孟金)의 집에 마침 왔으므로 뒤쫓아 가서 잡아 그대로 길로 나와 머리채를 잡아끌었습니다. 금란은 사납고 악독한 여자이니 엎어지면서 발악하여 스스로 부딪혀 상처를 입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관노(官奴) 등이 금란의 시신을 저의 집에 옮겨 두었고, 간부(奸夫) 놈 재식(在植) 그가 도리어 발고하여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저는 애초에 손찌검을 하고 구타를 행한 일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간증(看證) 양인(良人) 김맹금(金孟金) 42세. 공초하기를, “제가 지난달 29일에 아침에 나가 늦게 돌아오니 관비(官婢) 금란(錦蘭)이 마침 저의 집에 왔었는데 사령(使令) 박순철(朴順哲)이 뒤를 따라 쫓아와서 갑자기 금란의 머리채를 잡고 다듬잇돌로 정강이를 세 차례 때리니 금란이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졌습니다. 보기에 매우 위험하고 두려워서 바로 가서 말렸더니, 박순철이 금란을 잡아끌고서 거리로 나가기에 저도 따라가서 애써 말렸습니다. 박순철이 칼을 뽑아 휘둘렀으므로 그 성난 칼끝이 두려워서 잠시 피했습니다. 관비 매월(梅月)도 소란이 그친 뒤에 와서 금란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제가 말리지 않는 것을 책망하였으므로 사실대로 발명(發明 잘못이 없다고 밝힘)하고 그대로 들에 나갔습니다.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매월에게 추문(推問 죄의 정상(情狀)을 조사하고 심문함)하면 자연히 환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련(詞連) 관노(官奴) 개록(介祿) 25세, 관비(官婢) 매월(梅月) 20세. 이들이 공초하기를, “개록 저는 지난달 29일에 조사(朝仕)한 뒤 관노청(官奴廳)에 나가니 관비 금란(錦蘭)이 방 가운데 누워 있었고 관비 매월이 곁에서 주물렀으므로 그 연유를 물어보니, 매월이 말하기를, ‘금란이 박순철(朴順哲)에게 구타를 당하여 지금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너도 주무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말대로 주무를 때 그 왼쪽 팔이 검푸르게 많이 부어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관에서 불렀으므로 즉시 들어왔으니 그 뒤의 일에 대해서는 과연 상세하게 아는 것이 없습니다. 매월 저는 금란과 함께 빨래하는 여종으로 차출되어 지난달 29일에 빨래하기 위해 관아에 들어가니, 금란이 다듬잇돌을 빌리러 간다 하고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금란을 찾기 위해 마침 교동 김맹금(金孟金)의 집 앞에 도착하니 사령 박순철이 울타리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고, 금란이 마당 가 도랑에서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금란을 흔들어 깨워 일어나 걷도록 하니 금란이 다리가 아파 걷기가 곤란하였고 ‘나를 살려 달라’고 청원했습니다. 그러므로 같이 일을 하는 정의(情誼)에 차마 괄시하여 내칠 수가 없었고, 또 옮겨 가려고 하니 그가 집이 없어서 부득이 관노방에 옮겨 두었습니다. 금란이 연거푸 가슴이 답답하다고 외치며 자주 냉수를 청했으므로 정말로 냉수와 미음 등의 음식물을 계속 입에 떠넣어 주다가 빨래가 지체되어 재촉하는 명령이 있었으므로 즉시 관가로 들어갔습니다. 추후에 들으니, 금란이 점점 숨이 끊어지려고 해서 관노(官奴) 등이 박순철의 집으로 옮겼는데 그대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당초 소란(騷亂)이 김맹금의 집 앞에서 일어났으니 흉악한 짓을 한 광경은 김맹금에게 추문하면 자연히 환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절린(切隣) 이 조이(李召史) 57세, 양녀 양 조이(梁召史) 40세, 전강록(全江祿) 39세. 이들이 공초하기를, “이 조이 저는 어제 아침밥을 먹은 뒤 김맹금(金孟金)의 집 앞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나가서 보니, 박순철(朴順哲)이 다듬잇돌로 그 아내 금란(錦蘭)을 구타하여 머리와 낯, 손과 다리에 모두 상처를 입고 땅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으며 박순철은 담장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무슨 말로 끊임없이 꾸짖었습니다. 그러므로 물어 보기가 매우 두려워 그대로 피해 갔습니다. 그 뒤의 일에 대해서는 정말로 상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양 조이 저는 지난달 29일에 일찍 밥을 먹고 이앙(移秧)하기 위해서 들에 나갔다가 저물녘에 집에 돌아와 절린으로 붙잡혔으며, 당시 현장의 광경은 아예 참여해서 보지 않았습니다. 전강록 저는 농업을 하는 탓으로 지난달 29일 아침이 되기 전에 들에 나갔다가 저물녘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절린으로 붙잡힌 뒤 비로소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관비 금란이 그 남편 박순철에게 구타를 당하여 그대로 치사(致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발고(發告)한 관노(官奴) 재식(在植) 34세. 다시 공초하기를, “저의 소회는 이미 이전 공초에서 다 말씀드렸습니다만, 대개 이 금란(錦蘭)은 바로 저의 사촌으로 일찍이 고분고분 살던 사람입니다. 제가 금수(禽獸)가 아닌데 어찌 저와 서로 합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는 관비(官婢)이고 저는 수노(首奴)이므로 불러들여 온갖 관의 일을 지휘하여 부렸습니다. 또 금란의 집이 관문(官門)과 아주 가까워 종들이 왕래하는 길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박순철(朴順哲)이 이로써 의심하여 한 대낮 길거리에서 심하게 구타를 자행하여 마침내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수노가 되어 그대로 둘 수가 없어서 과연 발고했습니다. 박순철이 발고에 유감을 품고 모함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발고 서장을 낸 면임(面任) 업무(業武) 박기철(朴基哲) 39세. 다시 공초하기를, “저의 소회는 이미 이전 공초에서 다 말씀드렸습니다만, 문보(文報)할 때 김맹금(金孟金)에게 물으니, 오전에 구타를 당하고 오후에 치사했다고 했으므로 문보(文報)를 작성하기에 급해 어느 곳에 상처를 입었는지에 대해 미처 상세하게 묻지를 못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범(正犯) 사령 박순철(朴順哲) 27세. 다시 공초하기를, “저의 소회는 이미 이전 공초에서 다 말씀드렸습니다만, 무정한 금란(錦蘭)에게 분노하여 머리채를 끌어 조금이나마 분노를 씻으려 하다가 그가 사납고 독한 여자로 엎어지면서 발악하였으므로 그대로 버렸고 애초에 구타한 일이 없었더니, 지금 검험(檢驗)할 때 여러 곳에 난 상처 자국은 반드시 발악하면서 엎어질 때 돌에 부딪친 탓이고 참으로 구타를 행한 일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간증(看證) 양인(良人) 김맹금(金孟金) 42세. 다시 공초하기를, “저의 소회는 이미 이전 공초에서 다 말씀드렸습니다만, 박순철(朴順哲)이 저의 집으로 쫓아와서 금란(錦蘭)을 잡아끌어다가 다듬잇돌로 세 차례 때린 다음 길거리로 끌어내어 질질 잡아끌었습니다. 또 말리려고 하니 칼을 뽑아 휘둘렀으므로 두려워서 조심스럽게 피했습니다. 박순철이 구타를 행할 때 다듬잇돌은 오른손을 사용했는데 구타를 당한 곳이 오른쪽과 왼쪽 정강이에 해당되니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련(詞連) 관비 매월(梅月) 20세. 다시 공초하기를, “저의 소회는 이미 이전 공초에서 다 말씀드렸습니다만, 금란(錦蘭)을 업고 왔을 때 그 상처를 입은 곳을 보니, 머리 부위의 살이 찢어져 팔에 피가 흘러 있었고 퉁퉁 부었으며 색깔은 푸르스름했습니다. 오른쪽 발은 왜 찢어졌는지 신은 버선 위에 피 자국이 흥건했으니 칼자국인 듯하였습니다. 업고 온 뒤에 속이 답답하다며 마실 냉수를 청했을 뿐이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절린(切隣) 양녀(良女) 이 조이(李召史) 57세, 양녀 양 조이(梁召史) 40세, 양인(良人) 전강록(全江祿) 39세. 이들이 공초하기를, “이 조이 저는 지난달 29일 아침이 지난 뒤에 김맹금(金孟金)의 집 앞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나가서 보니 금란(錦蘭)이 땅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는데 의상(衣裳)이 다 찢어졌고, 박순철(朴順哲)은 담장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다듬잇돌이 앞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본 바가 위험하고 두려워 그대로 피해 갔습니다. 구타를 행할 때의 광경은 참으로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양 조이 저는 들에 나갔다가 해가 저물어 돌아와 절린으로 붙잡혔습니다. 그 당시 일에 대해서는 참으로 들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전강록 저는 양 조이의 공초와 별로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간증(看證) 양인(良人) 김맹금(金孟金) 42세, 정범인 박순철(朴順哲) 27세. 이들을 면질시키니 공초하기를, 김맹금이 박순철을 향해 말하기를, “네가 그날 우리 집으로 쫓아와서 금란(錦蘭)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서 다듬잇돌로 세 차례 때리고 또 그 하체를 때리지 않았느냐?”라고 하니, 박순철이 말하기를, “애초에 구타를 행한 적은 없고 잡아 끌었을 뿐인데, 당신이 보지 못한 일을 이처럼 정녕 납고(納告)한단 말이오. 나는 이런 일을 한 적이 없는데 당신이 나를 무함(誣陷)하려고 하니 매우 근거가 없소.”라고 모두 면질(面質)하여 납초(納招)했습니다.
[주-D001] 은비녀를 …… 보았는데 : 
시신이 중독(中毒)으로 사망한 여부를 시험하는 방법이다. 《무원록(無寃錄)》의 검회식제(檢會式制)에, “독약으로 죽은 시체에는 은차(銀釵)를 목구멍 속에 넣었다가 조금 뒤에 꺼내어서 그 비녀의 빛깔이 검은빛으로 변하면 중독되어 죽었다고 인정한다.”라고 하였음.
[주-D002] 진수(溱水)를 건너는 걸음〔涉溱之行〕 : 
자신의 지조를 버리고 남을 따른다는 뜻으로 《시경(詩經)》 〈정풍(鄭風) 건상(褰裳)〉에,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치마를 걷고 진수를 건너가리라. 그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찌 다른 남자가 없을까?〔子惠思我 褰裳涉溱 子不我思 豈無他人〕”라고 한 데서 온 말임.
[주-D003] 메추라기와 까치의 행동〔鶉鵲之行〕 : 
《시경(詩經)》 〈용풍(鄘風) 순분(鶉奔)〉에, “메추리는 서로 짝을 지어 다정하게 날고 까지도 서로 짝을 지어 다정하게 나는구나.〔鶉之奔奔 鵲之彊彊〕”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위(衛)나라 사람들이 선강(宣姜)의 음란함을 풍자하면서 메추리나 까치만도 못하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는 금란(錦蘭)이 다른 사람과 간통한 것을 비유한 말임.
[주-D004] 그대가 …… 없으리오 : 
자신의 지조를 버리고 남을 따른다는 뜻으로 《시경(詩經)》 〈정풍(鄭風) 건상(褰裳)〉에,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치마를 걷고 진수를 건너가리라. 그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찌 다른 남자가 없을까?〔子惠思我 褰裳涉溱 子不我思 豈無他人〕”라고 한 데서 온 말임.
[주-D005] 수레바퀴살통이 빠졌습니다 : 
《주역(周易)》 〈소축괘(小畜卦) 구삼(九三)〉에, “수레에 바퀴살통이 빠지며 부부간에 반목한다.〔輿說輻 夫妻反目〕”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는 수레에 바퀴살통이 빠져 나가면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 없듯이 금란(錦蘭)이 재식(在植)과 간통하므로 더 이상 부부의 관계가 유지될 수 없음을 두고 한 말임.
[주-D006] 무원록(無寃錄) : 
중국 원(元)나라 왕여(王與)가 송(宋)나라 때의 법의학서들을 정리하여 편찬한 법의학서이다. 조선에서는 세종(世宗) 22년(1440)에 주석을 붙여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으로 간행하여 검시(檢屍) 방법 및 조사 과정과 집행상의 주의할 문제들을 규정하였다.이후 내용이 애매하고 잘못된 점이 있으므로 영조(英祖) 24년(1748)에 증보하고 해석을 붙여 새로 편찬한 것이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이고, 그 뒤 정조(正祖) 14년(1790)에는 한글로 토를 달고 증보한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寃錄諺解)》를 간행하였음.
[주-D007] 오디를 먹는 비둘기〔食葚之鳩〕 : 
여자가 남자와 잘못 놀아난 것을 뉘우치는 시이다. 《시경(詩經)》 〈위풍(衛風) 맹(氓)〉에, “뽕잎이 떨어지기 전에 그 잎이 윤택했었네. 아! 비둘기여, 오디를 먹지 말라. 아! 여자여, 남자와 놀아나지 말라.〔桑之未落 其葉沃若 于嗟鳩兮 無食桑葚 于嗟女兮 無與士耽〕”라고 하였음.
[주-D008] 나무에 오르는 원숭이〔升木之猱〕 : 
원숭이에게 나무에 오르도록 가르친다는 뜻으로, 나쁜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하도록 권함을 비유한 말이다. 교노승목(敎猱升木). 《시경(詩經)》 〈소아(小雅) 각궁(角弓)〉에, “원숭이를 시켜 나무에 오르게 하지 말라. 더러운 진흙 위에 다시 더러운 진흙을 바르는 것과 같다.〔毋敎猱升木 如塗塗附〕”라고 하였음.
[주-D009] 백뢰(白賴) : 
피의자가 신문(訊問)을 받을 때 죄가 없는 것처럼 죄상을 숨기고 꾸며 대는 것.
[주-D010] 검안(檢案) : 
살인 사건에 대해서 시체의 검험(檢驗)에서부터 사건관련 피의자ㆍ증인 등의 심리(審理) 내용을 기록한 문서.
[주-D011] 앙역 수노(仰役首奴) : 
상전이 인근에 데리고 살면서 언제든지 부리는 관노(官奴)의 우두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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