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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유의 빛을 담은 한국 사리장엄구의 변천
작성일
2016-12-05
작성자
문화재청
조회수
8758

고유의 빛을 담은 한국 사리장엄구의 변천 삼국시대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변화한 한국 사리장엄구는 각각의 연대기에 따라 독특한 모양을 자랑한다. 천개(天蓋)와 불단(佛壇)의 결합, 전각 모양 등은 선조들의 솜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01 보물 제1767호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국립중앙박물관 (청동외합 안에 은제병과 금제병을 중첩시켜 봉안)

사리(舍利)와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사리’란 고대 인도에서 사용되었던 팔리(Pali)어인 ‘사리라(Sarira)’를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다. 부처의 몸에서 나온 뼈나 그 결정체를 진신(眞身)사리, 부처가 설법한 내용을 기록한 경전은 법신(法身)사리라고 했다. 그리고 부처의 사리와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다중 구조의 사리기(외함, 내함, 사리병 등) 및 탑 안에 들어가는 각종 공양구를 포함해 ‘사리장엄구’라 한다.

불교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가 열반 직전에 제자 아난(阿難)에게 자신을 화장한 후, 그 사리를 모아 탑을 세울 것을 명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탑에 사리를 모시고 공양을 올렸던 불가(佛家)의 관례를 알 수 있다. 탑이란 본래 인도어 ‘스투파’에서 유래한 말로, 죽은 사람을 화장한 후 유골을 묻고 그 위에 흙이나 벽돌을 쌓았던 인도의 고대 풍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사리를 안치하는 장소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인도 초기에는 사리를 탑 아래에 모셨다면, 현존하는 인도나 간다라의 탑에서는 사리장엄구가 기단부 아래에 묻혀 있다. 인도의 불교를 받아들인 중국은 남북조시대부터 탑 아래에 사리를 안치하다가, 차츰 벽돌이나 석판으로 사각형의 공간을 만들어 탑 안에 사리를 모셨다. 당나라에서는 이를 천궁(天宮)이라 했고, 지하에 모시면 지궁(地宮)이라 했으며, 매우 다양한 부장품을 함께 묻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처음에는 중국을 통해 들여온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여 탑을 세우고자 했으나, 그 수효가 부족해 깨끗한 모래, 수정, 보석류와 같은 광물을 사리로 대신 이용한 변신(變身) 사리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한국 사리장엄구의 변천, 백제와 신라

삼국시대의 탑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사리장엄구의 수도 많지 않다. 우리나라에 사리가 전해진 가장 빠른 기록은 549년 중국 양나라의 무제(武帝)가 사신 심호(沈湖)를 통해 신라 진흥왕에게 보낸 것이다.

그러나 실물로 밝혀진 최초의 예는 부여 능산리 목탑터 아래의 심초석 위에서 발견된 감실 모양의 사리장엄구로, 567년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한데 이곳에는 사리기가 없었다. 이후 2007년 부여 왕흥사지에서 577년에 제작된 사리기(그림1)가 발견됨으로써 백제의 사리장엄구가 이미 6세기 중·후반에 완전한 규범과 격식을 갖추었음이 확인된다. 아울러 동아시아 사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자료라는 점도 살펴볼 수 있다.

최근에는 그간 도굴된 것으로 알려졌던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 기단에서 사리를 봉안한 봉영기(奉迎記, 639년)와 사리병을 발견했다. 은제 도금 사리병 안에 금제 사리병을 담았으며, 그 안에서 유리 사리병의 파편이 나옴으로써 백제의 사리장엄구를 묻는 방식과 다양한 공양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분황사 모전석탑의 사리장엄구에서는 다른 사리기는 발견되지 않고 은합과 은침통, 금·은 바늘, 가위, 동전 등 당시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많은 수의 생활용품이 발견되었다. 이보다 조금 늦은 645년 황룡사지 목탑의 사리기 역시 백제처럼 심초석에서 발견되었는데, 창건 당시의 것과 이후 통일신라 때 다시 넣은 은제 외합, 청동제 사리기, 탑의 내력이 적힌 찰주본기(刹柱本記) 등이 함께 발견되어 황룡사탑의 건립과 중창 시기를 확인시켜 주었다.

02-1 보물 제1359호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 02-2 보물 제366호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_금동 사리외함 ©국립중앙박물관 (상자 모양의 청동외함, 그 안에 천개불단형의 내함과 그 위에 수정제 사리병)

우리나라만의 독창적 형식의 통일신라 사리장엄구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에서 발견된 두벌의 사리기(그림2)는 통일 신라 직후인 682년에 제작된 것으로서, 당시 사리기의 전형을 이루게 된 첫 작품이다. 특히 이 감은사 사리기의 네모 반듯한 외함에 별도로 제작해 부착한 사천왕상은 이국적인 무장(武將)의 모습을 취하고 있어 당시 통일신라 미술의 국제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한편, 경주 황복사탑(7세기 말~8세기 초)의 사리장엄구에는 네모난 청동함 안에 은합과 금합을 여러 겹으로 중첩한 사리기와 함께 순금제의 불상 두 점이 발견되었다. 청동함에 99개의 소탑(小塔)을 장식한 것은 중국에서 번역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이하 무구정경>에 의한 조탑 신앙이 신라에 전파된 것을 밝혀주는 최초의 예이다. 조탑 신앙은 돌을 쌓아 마을의 들어오는 액을 막고, 나가는 복을 막는 민간신앙이다.

이보다 늦은 8세기 전반의 경주 나원리 석탑에서도 사리기와 함께 작은 금불상이 납입되어 있다. 무구정경의 유행은 통일신라 중엽에 와서도 그대로 계승되어 불국사 석가탑에는 직접 목판으로 새긴 무구정경을 사리기와 함께 별도로 납입하기에 이른다. 이후에도 무구정경은 통일신라 석탑 조성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어, 9세기는 양양 선림원지탑과 해인사 묘길상탑에서 흙이나 돌로 만든 소탑(77개 혹은 99개)이 사리기와 별도로 납입된 것이 발견된다.

한편, 통일신라의 사리기 가운데 사리병은 유리로 만든 것을 가장 안쪽에 배치했으며 그 색은 비췻빛의 녹색이 주를 이뤘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출토된 녹색 유리병을 시작으로 칠곡 송림사 전탑의 사리기(그림3)에도 독특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에는 이러한 사리병(그림4)과 함께 19매의 은제 도금 금강경판이 함께 발견되어, 불상과 불경을 사리와 함께 묻는 한국적 사리장엄구가 정착되었음을 보여준다.

03 보물 제325호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엄구 ©국립중앙박물관 (금판을 오려 붙인 천개형(天蓋形) 사리기. 내부에는 물방울무늬가 장식된 컵 모양의 녹색사리구와 그 안으로 잘록하고 긴 목에 둥근 몸체를 지닌 녹색 유리 사리병을 안치) 04 국보 제123호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병 ©국립중앙박물관

소재와 모양에 있어 변화를 겪는 고려와 조선의 사리기

고려시대 사리기 역시 일부 신라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여러 가지 요소가 새롭게 첨가된다. 즉 전각형(殿閣形)과 같은 복잡하고 화려한 모양에서 원통형, 승탑형(僧塔形)과 같은 단순한 형태로 바뀌며, 외함을 청동 대신 도자기로 삼은 예가 많아진다. 또한, 유리 사리병이 금속병이나 수정병으로 바뀌는 경향도 보인다. 이러한 예를 잘 보여주는 것이 고려 후기에 제작된 남양주 수종사 사리기(그림5)로서, 중국 원대(元代)의 대형 주름 청자항아리의 모양을 외함으로 삼았다. 14세기에는 고려의 시대상을 반영하여 원나라 라마탑의 외형을 지닌 다층사리기(多層舍利器)와 불탑의 꼭대기에 있는 기둥 모양의 상륜(相輪)을 수정 사리병의 위쪽에 여러 층으로 장식한 독특한 사리기가 일시 유행하기도 했다. 금강산에서 출토된 이성계 발원 사리기는 외함을 백자로 만들고 내부에 구리로 만든 발(鉢)과 육각 승탑형 사리기, 그 안에 계란형 내함과 원통형 유리제 사리병을 안치했다.

조선시대의 사리장엄구는 억불 숭유 정책에 기인한 듯 많은 수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사리기의 형태는 오히려 형식에 구애됨 없이 뚜껑이 있는 원형 내지 원통형이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외함이 백자 또는 대리석 등으로 바뀌었고, 내부에 안치되는 사리기는 후대로 가면서 청동보다는 놋쇠가 널리 쓰였다. 사리병은 유리 대신 수정, 옥, 호박(琥珀) 등으로 만들어지며, 오색실이나 천, 곡식과 같은 시주를 위한 다양한 물건을 함께 넣는 것도 조선시대의 특징이다. 조선 전기까지는 수정이 사리병으로 쓰이지만, 점차 원통형의 금속제 사리병으로 변화한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남양주 봉인사 부도암지 사리장엄구(그림6)는 대리석으로 만든 외함 안에 놋쇠로 만든 유제합과 은으로 만든 은제합이 다양하게 들어 있다. 특히 은제합에는 용문양이 도드라져 있으며 바닥에는 명문이 기록되었고, 내부의 수정병은 금제 마개로 덮여 있어 이 사리기가 왕실에 의해 발원된 수준 높은 작품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조선 후기 사리장엄구는 청동합에 수정병, 또는 도자기에 청동사리병과 같이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05 보물 제259호 남양주 수종사 부도 사리장엄구_청자유개호 ©국립중앙박물관 06 보물 제928호 남양주 봉인사 부도암지 사리장엄구 ©국립중앙박물관

우리의 시대상을 반영한 문화의 타임캡슐

우리나라 사리장엄구의 중심은 사리를 봉안했던 다중 구조의 사리 용기라 할 수 있으나, 점차 이 사리 용기 이외에 법신사리의 중요성이 인식됨에 따라 불상이나 경전도 점차 사리장엄구의 주체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시대에 따라 사리를 모신 가장 내부의 용기는 금제병을 쓰다가 점차 유리병에서 수정병으로 변화를 보였고, 가장 바깥 외함은 석제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결국 석탑이 한국 탑의 주류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탑 자체가 바로 석제 외함이 된 점에서 그 의미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한국의 사리장엄구는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많다는 점에서 당시 금속공예 수준이나 불교사, 나아가 사회 경제적 면모까지 살펴볼 수 있는 우리의 시대상을 간직한 타임캡슐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글‧최응천(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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