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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잡록(亂中雜錄)

난중잡록 2(亂中雜錄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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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하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8월 1일. 전라 중조방장(全羅中助防將) 이유의(李由義)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경기(京畿)로 향하다.
○ 창녕(昌寧)ㆍ청도(淸道)의 적이 절도사라 자칭하고, 밀양(密陽)의 적은 군왕이라 자칭하고 일시에 올라오면서 길을 닦는다 하다. 《경상순영록(慶尙巡營錄)》에 나옴. ○ 이러한 통분하고 해괴한 말들을 보니 이 적을 만세에 잊을 수 없다 하겠다.
○ 적이 영천(永川)으로부터 봉고어사(封庫御史)라 칭하고 신녕(新寧)으로 향하는데 안동(安東)의 병장 권응수(勸應銖)가 정대임(鄭大任)ㆍ정세아(鄭世雅)ㆍ조성(曺誠) 등과 더불어 박연(朴淵)에서 적을 만나서 크게 이겨 벤 것이 매우 많고 병기와 돈과 곡식과 문서 등 물건을 빼앗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도 영천의 의병(義兵)과 선비들이 본 고을에 둔(屯)치고 있는 적을 멸하기를 도모하여 계책을 이미 정하고 권응수ㆍ홍천뢰(洪天賚)에게 원병(援兵)을 청하다. 응수가 두어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신해(申海)ㆍ정대임ㆍ조성 등과 영천으로 나아가서 추평(楸坪)에 있는 적에게 군사의 위엄을 보여 추격하여 강변(江邊)에 이르렀다가 돌아오고 다음날에 또 그와 같이하였더니 적이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또 다음날에 여러 군사가 합세하여 나아가 포위하여 성문을 쳐부수고 북치고 부르짖으며 들어가니 적이 황급하여 달아나 관사(官舍)로 들어갔으므로 바람을 따라 불을 질러 거의 다 태워 죽이고 혹은 물에 뛰어들어 빠져 죽었으며, 수백여 급(級)을 베다. 병사(兵使) 박진(朴晉)이 치계(馳啓)하여 응수는 통정대부에 승급되고 대임은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으며, 조성 등 여러 사람에게 관직으로 상을 주기를 등차(等差)가 있게 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3일. 김면(金沔)이 지례(知禮)에 둔친 적을 토벌하여 거의 다 태워 죽이다. 전라도의 아름다운 여자들이 많이 적에게 포로되어 있다가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것을 함께 다 태워 죽이다. 우리 군사 중에 죽은 자도 5천여 명이다. 남은 적이 도망하여 성주(星州)로 향하였는데 성주의 군사가 무찔러서 남김 없이 멸하다. 이때에 김면은 거창(居昌)에 주둔하여 지례ㆍ금산(金山)의 길을 막고 정인홍(鄭仁弘)은 성주에 주둔하여 고령(高靈)ㆍ합천(陜川)의 길을 질러 막았으며, 곽재우(郭再祐)는 의령(宜寧)에 진을 쳐서 함안(咸安)ㆍ창녕ㆍ영산(靈山)에서 강을 건너는 적을 방비하니 우도(右道) 일대가 보존될 수 있었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안동의 적이 나와서 풍산(豐山)에 둔치므로 박진이 청송(靑松)으로부터 안동에 들어가 성을 수습하다. 이보다 먼저 적이 군위(軍威)ㆍ의성(義城)ㆍ안동ㆍ예천 등의 고을에 나누어 둔쳐 사방으로 나와 분탕질을 하더니 영천에서 섬멸당한 뒤로는 군위의 적은 철수하여 개령(開寧)으로 향하고 의성ㆍ안동ㆍ예천의 적도 또한 동류를 이끌고 풍산 구담(九潭)에 물러와 둔치니 경상좌도의 인민이 조금 생기가 있었다. 얼마 안 되어 풍산의 적이 또한 상주(尙州)로 물러와 합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아! 우리나라 3백 고을에 적이 없는 데가 몇 고을인고. 이것으로 미루어 추한 무리의 많은 것을 알 수가 있다.
4일. 남원 부사 윤안성(尹安性)이 팔결군(八結軍)에게 명하여 호(壕)를 파도록 하였는데 5일 만에 끝마치다. 이때 본부(本府)에서 사역에 응한 사람이 1천 7백여 명이다.
○ 부산의 적이 칡 줄기를 가지고 왜인의 손바닥을 꿰어 우리나라의 봉비(封臂)와 같이하여 차사(差使)라 칭하고 상도(上道)에 있는 적에게 보내어 내려오기를 재촉한 때문에 모든 적이 흘러내려 길에 가득 찼는데, 우도 각 고을 의병이 곳곳에 구름처럼 일어나서 진주(晉州)ㆍ함양(咸陽)ㆍ거창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적을 쏘아대고 있다니 지금 이때에 무찔러 멸하지 못하면, 위로 임금의 수치를 씻고 아래로 백성이 살육된 것을 위로하지 못할 것이다. 민간에 포고하여 겁내지 말고 선등(先登)하게 하라. 함양 전통(傳通) 통문(通文).
○ 경주(慶州)의 부윤과 판관(判官)이 모두 도망해 숨었으므로 초유사(招諭使)가 우도에 있으면서 전령(傳令)하여 본부(本府) 사람 훈련봉사(訓練奉事) 김호(金虎)로 도대장(都大將)을 삼고, 전 현감 주사호(朱士豪)로 소모관(召募官)을 삼고 진사 최신린(崔臣隣)으로 소모유사(召募有司)를 삼다. 김호 등이 이미 군사를 모아 적을 토벌하였었는데 이에 이르러 더욱 분발하다. 2일에 적 5백여 기(騎)가 언양(彦陽)으로부터 노곡(奴谷)으로 몰려 왔는데 김호 등이 군사 1천 4백여 명을 거느리고 포위하여 싸워서 김호가 총에 맞아 죽었으나, 오히려 퇴각하지 아니하고 싸우니 적이 달아나 본주(本州)의 대진(大陣)으로 돌아가다. 우리 군사가 추격하여 50여 급을 베었으니 경주 전후의 승전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동궁(東宮)이 처음에 평양(平壤)에서 대가(大駕)와 서로 이별하면서 통곡하고 각자 헤어져 영상(領相) 최흥원(崔興源) 등을 거느리고 영변(寧邊)으로 달아났다가 적병이 날로 가까워 오므로 또 정주(定州)로 달려갔다가 정주로부터 비밀리 황해도를 지나 강원도로 향하였는데 낮에는 숨고 밤에 행(行)하여 고생이 말할 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천(伊川)에 행차를 머물렀는데 전라도 의병들이 근왕(勤王) 하러 바로 올라온다는 소문을 듣고 손수 글을 써서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에게 전해 보내기를, “내가 외람되이 임시섭정[權攝)의 명령을 받아 회복의 계책을 돕게 되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건대, 재주와 덕이 엷어서 감당치 못할까 두렵다. 대가를 멀리 떠난 것이 이제 이미 천 리이니 다만 서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릴 뿐이다. 오늘날에 국사(國事)는 이미 10에서 8, 9는 틀렸고 밤낮 오직 근왕하는 군사만 바랄 뿐인데,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 한창 근심과 걱정이 절박하던 즈음에 여러분이 의병을 일으켜 이미 경성(京城)에 가까이 왔다 하니 이는 실로 천지 종묘 사직의 영(靈)이 가만히 도와서 그러한 것이다. 종묘 사직의 존망이 오직 여러분이 힘을 서로 합하느냐의 여하에 달렸으니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구하여 큰 공을 세우기에 힘쓸 일이다.” 하다.
○ 남원 부사(南原府使) 윤안성(尹安性)이 첨지 정염(丁焰)에게 통첩한 것은 다음과 같다.
왕세자 전하께서 이천현(伊川縣)에 계시면서 의병장 김천일에게 수서(手書)를 내리신 것을 보았는데, 반도 다 읽지 못하여 슬픈 느낌이 먼저 생겨 눈물이 절로 흘렀소. 이어 들은즉 주상 전하께서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중국 군사를 따라 이미 서울로 향하셨다 하오. 흉한 적의 화(禍)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고 군부의 바람이 이러한 극도에 이르렀으니 이 날에 신자된 자는 죽느니만 못하오. 마땅히 사람들의 마음을 격려하고 의기(義氣)를 주창하여야 할 것인데, 부사인 나는 사람됨이 지극히 둔하여 봉직(奉職)이 형편없고 일마다 조치를 잘못하여 난을 감당하는 재주가 못 되니, 능히 군사와 백성을 통솔하지 못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하는 즈음에 두 번이나 군사가 붕괴되었소. 지난달 3일에 이르러 헛소문 때문에 뭇 군사가 무너지고 난민이 되어 필경에는 도적질이나 약탈을 함부로 하여 관가와 민간이 텅텅 비어 있었소. 이때를 당하여 내가 홀몸으로 성에 있으면서 앉아서 죽음만을 기다렸더니, 국가의 위령(威欞)이 아직 끊어지지 않아서 도망했던 백성이 이미 모여 들었고 무너졌던 군사가 도로 안정되었소. 큰 변을 여러 번 당하여 마음이 두서가 없을 뿐 아니라 성의가 부족하여 능히 인심을 감동시키지 못하니, 비록 위에 말한 왕세자의 간절한 말씀을 보아도 저 줄지어 늘어선 이들에게 능히 명령할 수 없소. 그러니 경내(境內)의 부로 기구(父老耆舊)는 이 곡절을 알고 마음을 다하여 힘쓰고 격려하여 혹은 의병에 달려가고 혹은 싸우고 지킬 뜻을 굳게 하라. 이상과 같이 첨지 정염에게 통첩한다.
○ 정염의 통문은 다음과 같다.
이극(貳極)이 내리신 수서에 이와 같이 목마르게 기대하시고 주상께서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향하셨다 하니, 신자 된 자로서 어찌 제 집에서 밥 먹고 잠자면서 사세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보고만 있겠습니까. 부사의 하체(下帖)에 이른바 혹은 의병으로 달려가고 혹은 싸우고 지킬 뜻을 굳게 하라 한 것은 분수에 따라 할 일이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지마는 다만 지금 민가에 전연 일이 없는 이가 없어 성을 지키고 물건을 운반하는 데도 또한 미칠 겨를이 없는데, 또 기운을 내어 일하는 것을 어찌 사람마다 독촉하여 나약한 사람들을 억지로 몰아서 싸움터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양가(良家)의 자제로서 조금 활을 쥘 줄 아는 이와 장정(壯丁)으로 군적(軍籍)에서 빠진 자가 반드시 없다고 속일 수 없으니, 부락에서 한두 사람을 내어 준다면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 인정만 보아서 평상시처럼 하지 말고 이미 그런 사람을 뽑았거든 온 부락이 힘을 합하며 밑천을 대어 보내면 국가의 바람을 거의 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저 정염과 같이 늙고 정신없는 것이 감히 스스로 권하고 격려함이 아니라 이미 성주(城主 부사)의 하체를 받고 나서 저의 소견을 부친 것이니 여러분은 알아주십시오.
○ 광양 현감(光陽縣監)의 치보(馳報)에, “적세(賊勢)를 정탐하기 위하여 사람을 경상도 고성(固城) 감치[柹峙]에 보내었더니 복병장(伏兵將) 곤양 군수(昆陽郡守)가 회답하기를, ‘사천(泗川)의 도훈도(都訓導) 최막금(崔莫金)이라고 하는 자가 고성의 적중(賊中)에 들어가 있었는데 제 집에 왕래하다가 복병이 있는 곳에서 잡혀 공술(供述)하기를 「적중에 자진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고 왜놈을 만나 포로가 되어 살려 달라 애걸하고 인하여 적중에 들어갔더니, 적이 먼저 진주의 창고에 있는 곡식이 얼마인 것과 전라도로 가는 바른 길과 얼굴 예쁜 여자들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으므로, 아름다운 여자는 모르고 진주의 곡식은 대충 말해 주고 전라도로 가는 바른 길은 하동(河東)이라 하였다.」하였습니다.’ 하였고, 또 그 사람을 방금 진주의 관(官)에서 가두어 두었다는 것을 통보한다.” 하다.
○ 왕세자가 이천에 머문 지 한 달여 만에 적병이 사방에서 나오므로 따라간 모든 재상과 더불어 밤에 곡산(谷山)으로 가서 강동(江東)으로 가고 강동으로부터 성천(成川)으로 갔다가 도로 영변으로 향하니, 중도에 위태로운 변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각 도의 의병에게 내린 글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보지 않아 섬 오랑캐가 방자히 만행을 부리고 있는데, 각 고을에서 의사(義士)들이 있는 덕분으로 군사가 위엄을 떨치고 있으니, 이에 한마디 말로 여러 사람에게 고하노라. 생각건대, 분수도 모르는 오랑캐들이 초여름에 쳐들어오자 병사(兵使)ㆍ수사(水使)ㆍ감사(監司)들은 대개 앉아서 보고만 있었고, 진장(鎭將)과 수령들은 거의 버리고 도망한 자가 많았다. 도성에 개도 닭도 남은 것이 없으니 뭇 백성들의 도탄을 어찌 차마 보며, 나라에 예악(禮樂)을 지키지 못했으니 종묘가 폐허 됨을 어이하랴. 대가가 멀리 한구석으로 행차하시고 적의 칼날이 8도에 두루 미쳤네. 용만(龍灣 의주(義州))에 파천(播遷)하심 어인 일이냐. 벌써 한 달이 되었구나. 대동강에 사람 없으니 적을 뉘 막으리. 못난 내가 분조(分朝)의 책임을 맡아, 이리저리 다니던 끝에 용안(龍顔)을 천 리에 이별하였구나. 흩어지고 도망한 군사를 수습하여 한 성(城)에서 분조의 체통을 보전하였네. 비록 나라가 이와 같으나 아마도 때를 기다림이 있으리. 중국에 호소하여 구원을 청하니 황제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의병을 일으켜 근왕하니 신하의 절개를 오늘에 보겠도다. 나는 큰 난을 감당하지 못하나, 하늘이 우리나라를 버리지 않으리라. 평안도에서 이천(伊川)으로 갈 때 여러 번 변고를 겪었고, 곡산(谷山)으로 해서 성천에 도달할 때 온갖 고생을 맛보았네. 감히 위험한 데를 피해 편안함을 찾음이 아니라, 오직 국가 회복의 대계를 생각함이다. 항상 원수 갚아 수치를 씻을 것을 생각하여 적과는 함께 살지 않기를 맹세한다. 비록 왕래하느라 헛고생을 하더라도 또한 온갖 위험도 꺼리지 아니하리라. 원수의 적과 한 하늘을 이고 있는 것을 생각하니 내가 안존할 땅 없는 것이 민망하도다. 섶에 누우며 창을 베고 자는 마음이 어찌 잠깐인들 해이하랴. 마음이 아파서 살고 싶지 않다. 너의 군사와 백성들이 협조하고 따라서 다행히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니, 이는 실로 열성(列聖)의 은택이 미친 바이며 또한 너희들의 정성과 절개가 드러난 바이로다. 난리가 너무 크매 토벌하기 더욱 괴롭구나. 뒤돌아 볼 겨를이 없으니 민생이 살 곳을 안정하지 못하고, 싸움에 쉬지 않으매 사졸이 또한 밖에서 오래 있었네. 갑옷과 투구에 이[虱]가 생기니 나 홀로 고생한다는 슬픔이 있을 것이요, 해 저물어 소와 양이 내려오니 언제 오려느냐는 탄식이 응당 간절하리. 하물며 가을 날씨가 점점 차지는데 일찍 추워지는 서도(西道)는 어이하랴. 거처할 곳도 없으니 얼고 배고픔의 걱정을 뉘라서 면해 주리. 어떻게 해를 넘길꼬. 살 준비를 마련하지 못했네. 너희들은 비록 애써서 나를 따르건만 나는 홀로 무슨 마음으로 너희들을 수고시키랴. 매양 생각이 이에 미치매 몸에 병이 든 것 같도다. 너희들의 옷 없는 것을 보매 비단옷 겹으로 입음이 부끄럽고, 배고프고 목마름을 애처롭게 여기매 쌀밥 먹는 것이 어찌 마음 편하랴. 이에 유사(有司)에 명하여 음식 약간을 베푸노라. 소를 잡아 군사 먹이고 술을 쏟아 물을 마시게 하니 역사에 있는 말을 감히 잊으랴. 그윽히 옛사람의 일을 사모한다. 내가 이미 속마음을 너희들에게 전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나라 위해 몸을 바치라. 옛적 신릉군(信陵君)이 출병할 때에, 부자(父子)가 함께 군중(軍中)에 있는 자는 아비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형제가 함께 군중에 있는 자는 형이 돌아가서 부모를 봉양하며, 형제 없는 외아들은 전장에 가지 말라 하였다. 이 말이 책에 있는데 내가 어찌 모르랴. 다만 사세가 급박하므로 징발이 소요(騷擾)스럽게 되었다. 뉘라서 부모가 없으랴. 거리에 나와 기다리는[倚閭] 생각을 위로하기 어렵구나. 또한 아내가 있을지니 집을 떠난 한이 오랫동안 맺혔으리. 아! 공(功)에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에는 반드시 징계함을 감히 오늘날에 어기지 않으리라. 윗사람을 친히 여기고 그를 위해 죽을 것을 너희들에게 바라는 바이다. 요망한 적을 쾌히 소탕하지 못하면 어찌 평일의 품은 뜻을 이루리오. 원하노니, 함께 전장으로 달려가서 천하의 형세를 일신하는데 같이 도모하며, 궁궐을 맑게 하고 능침(陵寢)에 절하여 왕가(王家)를 다시 세울 것이며, 삼경(三京 한성(漢城)ㆍ개성(開城)ㆍ평양(平壤))을 회복하고 대가를 돌아오시게 하여 다함께 영원토록 태평을 누리자. 황신(黃愼)이 지음.
○ 경상도 선산부(善山府)가 순차로 전통(傳通)하기를, “지난달 18일에 충청 감사의 사통(私通)과 공주 목사의 관문(關文)에, 평택현(平澤縣)의 치보(馳報)에 이르기를, ‘총병(總兵) 양원(揚元)이 평양의 적을 이기자, 개성ㆍ경성의 적이 모두 나와서 광나루로부터 양천 해구(楊川海口)에 이르도록 결진(結陣)하고 있는 일입니다.’ 하였고, 동시에 도부(到付)한 감사의 관문에,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해 돌아온 사람의 말에, 적이 중국의 군사가 대대적으로 이른다는 말을 듣고 밤낮 없이 내려오는 일입니다.’ 하였으며, 이달 초에 경상 우수사가 전라 좌수사와 더불어 고성(固城)에서 적과 접전하여 배 70척을 부수고 머리 3백 급을 베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알 수 없으며, 군사를 효유하여 수합해 모아서 적을 치도록 약속한 일입니다.” 하였다.
○ 김수(金睟)를 불러 한성 판윤(漢城判尹)에 임명하고 경상도를 좌우도로 나누어 각기 순찰사를 두어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로 좌도 순찰사를 삼다. 성일의 장계(狀啓)는 다음과 같다.
5월 이후에 신이 네 번이나 장계를 올렸으나 길이 막힘으로 인하여 한 번도 돌아오지 아니하므로, 행재(行在)의 기별을 알 길이 없어 밤낮으로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듣건대 평양을 또 지키지 못하여 대가가 의주로 옮겨 가시고 동궁은 안협(安峽)에 와 머문다 하니, 오장이 무너져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신이 좌도 순찰사에 임명된 지 이미 오래었는데도 교서(敎書)와 인신(印信)이 아직 내려오지 않으니 이것은 반드시 적병이 가득 차서 길이 통하기 어려운 소치일 것입니다. 좌도의 적세를 말하면, 6월 초순 이후까지도 흥해(興海)ㆍ청하(淸河)ㆍ영덕(盈德)ㆍ영해(寧海)ㆍ진보(眞寶)ㆍ청송(靑松)ㆍ안동(安東)ㆍ예안(禮安)ㆍ봉화(奉化)ㆍ풍기(豐基)ㆍ영천(永川)ㆍ예천(醴泉)ㆍ용궁(龍宮)등 10여 고을이 아직 적을 겪지 않았는데, 이제는 용궁ㆍ예천ㆍ안동ㆍ예안ㆍ봉화가 이미 함몰되어 대개 30여 성(城)에 한 치도 깨끗한 땅이 없습니다. 신이 비록 동쪽으로 강을 건너도 다시 발을 붙일 곳이 없으니, 변이 난 뒤로부터 좌우도가 나뉘어 호령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좌도에는 앞장서 일어나 적을 치는 이가 없었으므로 적이 더욱 거리낌이 없어 땅을 저들이 차지하여 각기 고을의 원이라 칭하고, 집을 짓고 농토를 가꾸어 오래 머물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신이 각 고을에 통문을 돌려 선비 중에 유식한 자를 선택하여 소모관(召募官)을 지키고 무변(武弁) 가운데 재주 있는 자로 가장(假裝)을 삼았습니다. 영산(靈山)에는 정로위(定虜衛) 신방주(辛邦柱), 생원 신방즙(辛邦楫), 창녕(昌寧)에는 충의위(忠義衛) 성천희(成天禧), 성안의(成安義), 급제(及第) 성천유(成天裕), 보인(保人) 조열(曺悅), 유학(幼學) 곽찬(郭趲), 업무(業武) 신의일(辛義逸)이 각기 군사 6백여 명을 모아서 매복을 시켜 적을 쳐서 연달아 괵(馘)을 바치고, 이달 4일에 조열ㆍ성천유 등이 군사 1천여 명을 합하여 창녕을 포위 엄습하여 종일토록 교전하여, 고을 원이라 칭하는 백마 탄 왜놈을 소아 죽이자 사흘 만에 적이 책(柵)을 불태우고 도망하였습니다. 신녕(新寧)의 권응수(權應銖)는 신이 통문을 돌리기 전에 이미 군사를 일으켜 적을 쳤으므로 그대로 의병대장을 시켰더니, 지난달 27일에 병사 박진의 명령을 받고 하양(河陽) 의병장 신해(申海)와 더불어 네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영천에 성을 점령한 적을 쳐서 남김없이 무찔렀는데, 하양(河陽)ㆍ신녕ㆍ의흥(義興)ㆍ군위(軍威)ㆍ의성(義城)의 적은 모두 달아나고 안동의 적은 또 풍산현(豐山縣)으로 이둔(移屯)하였습니다. 박진이 부성(府城)에 들어가 있으면서 바야흐로 진격할 계책을 하고 있으며, 현풍(玄風)ㆍ영산(靈山)의 적도 역시 공격할 만한 기회가 있으므로 고령(高靈)ㆍ합천(陜川)ㆍ초계(草溪)의 의병으로 하여금 현풍을 치게 하고 창녕ㆍ의령(宜寧)의 군사로 영산을 치기로 이미 약속을 하였습니다. 곽재우(郭再祐)가 이보다 먼저 현풍ㆍ영산 등 고을을 수복하였는데, 여기서 또 적이 있다 한 것은 적의 오고 감이 일정치 않기 때문이다. 우도에는 전 좌랑 김면(金沔)이 거창(居昌)의 군사를 거느리고 본 현의 경계를 지켜서 금산(金山)ㆍ무주(茂朱)의 적을 방비하고 가장 전 주부 손승의(孫承義)와 전 수문장 제말(諸沫) 등으로 하여금 나누어 고령을 지켜서 성주(星州)의 적을 막게 하였으며, 전 장령 정인홍(鄭仁弘)으로 가목(假牧)을 삼고 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으로 가장을 삼아서 유학 이대기(李大期)ㆍ전치달(全致達)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려 함께 초계를 지켜서 초계 및 강가에 왕래하는 적을 방비하였으며, 봉사(奉事) 윤탁(尹鐸)은 박사제(朴思齊) 등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려 의령ㆍ승진(昇津) 및 신반현(新反縣)을 지키고 유학 곽재우ㆍ봉사 권난(權鸞) 등은 그 모집한 군사 및 전 목사 오운(吳澐)이 모은 군사를 거느려 영산ㆍ창녕ㆍ현풍 및 강가에 왕래하는 적을 지키며 진주 판관(晉州判官) 김시민(金時敏)은 관군 및 군수 김대명(金大鳴) 등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려 고성(固城)ㆍ진해(鎭海)의 적을 막고, 함안 군수(咸安郡守) 유숭인(柳崇仁)ㆍ칠원 현감(漆原縣監) 이방좌(李邦佐)ㆍ사천 현감(泗川縣監) 정득렬(鄭得悅)ㆍ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등은 각기 그 성으로 돌아와서 싸우고 지킨 공이 많았습니다. 함창(咸昌)ㆍ상주(尙州)ㆍ지례(知禮)ㆍ선산(善山)ㆍ김해(金海)ㆍ창원(昌原)ㆍ진해ㆍ고성 밖에는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합니다. 이 달 3일에 김면이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元) 등을 거느리고 지례를 화공(火攻)하여 창고 안에 들어 있는 적을 태워 죽이자 남은 적이 금산으로 도망해 갔습니다. 김면이 현재 다시 화구(火具)를 준비하여 금산 의병장 박사(博士) 여대로(呂大老), 가장 권응성(權應星) 등과 더불어 동군(同郡 금산)을 공격하려 합니다. 7일에 창원 부사 장의국(張義國)이 함안ㆍ칠원 등지의 군사와 더불어 나가 본부(本府)를 포위하여 적 10여 급을 베니 남은 적이 패하여 김해로 달아나고 군량이 남아 있으므로 의국이 그 성에 들어가 있습니다. 진해ㆍ고성의 적은 모두 배를 잃고 빠져 나갈 길 없는 도적이 되어 죽을 각오로 지키므로 진주ㆍ함안의 군사가 여러 번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수사(水使) 원균(元均)이 본진(本鎭)을 버린 뒤에 다만 전선(戰船) 네 채가 있었는데, 전라 좌우도의 수군을 청해 와서 세 번 해전을 벌여 아울러 크게 이겨서 수백 급을 베고 적선 백여 척을 부수었으며,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헤일 수 없었습니다. 적이 크게 겁내어 호남으로 가겠다고 소리를 치면서도 마침내 움직이지 못하고, 바다를 건너려는 자는 반드시 산에 올라 망을 보아 서해에 배가 없는 것을 알고야 떠나니, 변고가 생긴 뒤로 전공(戰功)은 양도(兩道) 수사가 제일입니다. 지금 또 들은즉 호남의 수군이 크게 이르러 장차 모든 섬을 토벌하고자 한다 합니다. 6월 중에 전라 감사라 자칭하는 왜놈이 창원으로부터 바로 함안에 이르러 의령의 승진을 건너고자 하다가 곽재우가 막으니 곧 김해로 돌아갔고, 거창에 침범하려 하다가 김면에게 퇴각을 당하였으며, 지례를 경유하여 무주현으로 향해 충청도의 적과 합하여 금산(錦山)에 들어가서 연달아 무주ㆍ용담(龍潭)ㆍ진안(鎭安) 등 모든 고을을 함락시키자, 전주(全州)의 위급함이 아침, 저녁에 임박하였는데, 다행히 적이 불리하여 퇴각하여 1천여 명이 몰래 본도(本道)로 오는 것을 김면이 지례의 지경에 매복을 시켰다가 불시에 뒤를 밟아 치니 적이 패하여 달아나서 이로부터 적이 감히 다시 오지 못하고 대부분 옥천(沃川)의 지경으로 들어갔습니다. 남은 적은 현재 금산ㆍ무주에 머물고 있는데 호남 사람들이 감히 몰아내지 못하므로, 적이 소리치기를, “여러 곳의 왜병을 합하여 다시 들어와 침략하겠다.” 합니다. 영남ㆍ호남 사람들이 능히 근왕하여 적을 치지 못하는 것을 순찰사에게 허물을 돌렸는데 이 도에는 곽재우가 감히 도주(道主)에 격문을 보낸 것을 신이 겨우 진정시켰고, 호남에서는 광주 목사 권율(權慄) 등이 순찰사 이광(李洸)이 직무를 행하여 적을 치지 못하여 모르는 체하고 있다고 그 죄를 열거하여 도내에 통문을 돌렸습니다. 대개 본도의 형세는, 좌도는 위에 진술한 바와 같으므로 신이 비록 강을 건너가더라도 일은 할 수가 없고 여기에 있으면 오히려 일부는 버티어 부지할 수 있겠으나 명령이 이미 내렸으니 지체하여 머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좌도의 숨어 있는 수령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영접하도록 하였으니, 그 보고가 이르기를 기다려 칼을 집고 강을 건너 사생결단을 하려 합니다. 엎드려 듣건대, 천병(天兵)이 크게 이르러 회복함이 희망이 있다 하니 신이 그동안 죽지 않아 난이 평정되어 환도하시는 날을 보게 된다면 비록 군량만 허비한 죄로 만 번 죽음을 받아도 뉘우침이 없겠나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좌의병장(左義兵將) 임계영(任啓英)이 장흥(長興) 선비들에게 다음과 같이 격문을 돌리다.
의병을 일으킴이 유생으로부터 주창되었은즉 이름이 사류에 참여한 자는 마땅히 분기하여 사졸의 선봉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무식하고 어리석은 병졸들과 게을리 놀던 무리 또한 모두 의기로 달려오고 있는데도, 장흥은 큰 부(府)이면서 동지 1, 2명 외에는 모두 겁내고 움츠려 여기에 종사하려 하지 않고 있으니 여러분은 무슨 별다른 뜻이 있는가. 이때를 당하여 신자 된 이로서는 요행히 살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인데, 여러분은 홀로 임금을 생각하지 않는가. 공론(公論)이 한번 일어나면 정거(停擧)함이 늦을 것이다. 군율(軍律)이 지극히 엄한데 지금 우선 기다리고 있으니, 모름지기 다시 생각하여 일제히 모일 것이요 후회를 남기지 말라. 종사(從事) 정자(正子) 정사제(鄭思悌)가 지었다. 뒤에도 다 이와 같다.
○ 임계영이 낙안(樂安)에서 본군(本郡)에 이르러 격문을 돌린 것은 다음과 같다.
국가의 오늘날 일은 신자로서 차마 말하지 못할 바이다. 금산(錦山)의 패전에 의기가 저상되어 다시 진작할 길이 없으므로 우리들이 세상일에 어두움을 생각지 않고 의병을 일으켰으니 다 같은 사람의 마음에 거의 흥기됨이 있으리라 여겼다. 지금 군성(郡城)에 와 주둔하여 이웃 고을 의사들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본군의 사람들은 응모는 그만두고라도 한 사람도 나와 보는 이가 없으니 별다르게 무슨 뜻이 있는 것인가. 듣자 하니 당초에 의병의 격문이 올 때에 본 읍에서 물리칠 뜻이 있으나 믿을 수 없다 하더니, 지금으로 보건대 과연 헛말이 아니로다. 군수의 뜻도 군인(郡人)과 같으니 군인이 시킨 것임을 알겠다. 우리들의 이 의거는 공사(公事)를 위함이요 나라를 위함인데 이 고을서는 사(私)라고 보니, 아! 이 고을 사람들은 홀로 임금이 없는가. 우리에게는 손익이 될 것이 없지마는 후일에 공론이 없을까.
○ 임계영이 순천(順天)에 이르러 본부에 돌린 격문은 다음과 같다.
의병을 일으켜 적개(敵愾)함은 사람의 마음이 함께 바이며 동궁의 수찰(手札)이 의병을 장려하매 말이 심히 정성스럽고 슬프며 뜻이 심히 애통하니, 신자 된 이로서 누군들 감개하고 눈물을 떨구며 온 힘을 바치고자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왜적이 천병에게 쫓겨 남도로 흩어져 내려왔는데 곤경에 몰린 짐승처럼 싸워 당할 길이 없어, 불사르고 약탈하는 화가 도처에 마찬가지이니 가정과 재물을 장차 누가 보전하랴. 그러니 하루아침에 적의 소유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조금이라도 내놓아 군수(軍需)에 약간의 도움이 되게 함이 나을 것이다. 승평(昇平)은 큰 부(府)라 물자가 풍부하고 인구도 많으며, 또 풍년이 들어 벼가 구름처럼 많으니, 어찌 앉아서 풍족한 것을 누리면서 국가의 일을 모르는 체하겠는가. 명가우족(名家右族)은 다 국가의 은혜를 알고 또 사체(事體)를 살필 것이니 타이르기를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요, 촌락의 평민에게도 또한 이 뜻을 전파하여 널리 거두고 부지런히 모아서 유사(有司)로 하여금 주장하여 때에 맞춰 잇달아 원조한다면 승평 한 부가 옛날 한(漢) 나라를 일으킨 관중(關中)이 될 것이다. 원하건대 여러분은 힘써서 태만하지 말지어다.
○ 좌의병장 임계영이 순천 전 만호(萬戶) 장윤(張潤)으로 부장(副將)을 삼아서 군사를 끌고 남원으로 향하여 각 고을에 돌린 격문은 다음과 같다.
의병을 일으키는 말은 전의 격문에 다하였으니 여러분은 다 보았을 것이다. 우리들은 수천 명의 날랜 군사를 뽑아서 바야흐로 적이 있는 곳으로 향하여 최(崔)의 군사와 더불어 협력하려 하므로 준비가 한창 급한데, 군대에 현재 양식이 없어 두어 고을에서 판출(辦出)하니 유장(儒將 선비로서 장수가 된 이)으로서 계속 시킬 도리가 없다. 이것은 우리들만이 맡을 걱정이 아닌데 여러 귀읍(貴邑)에 이름난 허다한 선비들이 일찍이 그 책임을 함께 나눈 이가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여러분에게도 다 같이 불공대천(不共戴天)의 분함이 있는데 이 의거들을 보고 어찌 차마 마음에 모르는 체한단 말인가. 하물며 금산ㆍ무주의 적이 소굴을 만들어 한 도의 형세가 털끝 하나처럼 위태로운 마당에, 여러분은 아침 저녁으로 구차하게 편안히 지낼 생각이 있는가. 이때를 당하여 신자 된 이라면 감히 제 몸을 제 것이라 생각할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재물을 제 것으로 생각하여 한자 한치를 아끼겠다는 것인가. 지금 비록 내도록 요구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민간에서 곤하고 쪼들리지마는 숨이 아직 붙어 있는 동안에 게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이 비록 혹 병이나 사고가 있어 의병에 종사 하려 하지 않더라도, 군량을 계속해 원조하는 것만은 오히려 힘써 도모해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군사들이 풍우를 무릅쓰는 고생에 대해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고, 흉한 적이 분탕질하는 화를 생각하여 각기 분발하고 격려하며, 마음과 힘을 다하여 양식을 보내고 넉넉지 못한 것을 도와주어, 우리들로 하여금 먼저 국경의 적을 무찌르고 마침내는 근왕의 뜻을 다하여 궁금(宮禁)을 숙청하여 거가(車駕)를 모셔 환도하게 한다면, 군량을 운반하여 끊이지 아니하던 옛날의 소하(蕭何)가 한 나라에 세운 공만을 장하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삼가 바라건대 힘써서 태만함이 없을지어다.
○ 천병 중에 점을 치는 자가 우리 국가의 운수를 점치고 말하기를, “문교(文巧)로 풍속이 폐단이 되었으매 장차 큰 질박[大質]으로 돌아가리라. 엎어져 죽은 이가 삼대[麻]와 같고 피가 흘러 절굿공이 떠서 흐르며 사람들이 그 어미만 알고 그 아비를 모르리라. 그런 뒤에야 난리가 그치리라.” 하다.
○ 최원(崔遠)ㆍ김천일(金千鎰)의 군사가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가 머물다.
○ 광주 목사 권율로 나주 목사를 삼다.
○ 진주 판관 김시민이 전 병사 조대곤(曹大坤), 사천 현감 정득렬 등과 더불어 사천ㆍ고성ㆍ진해에 있는 적을 습격하니, 적이 점차로 도망하여 가다. 함안 군수 유숭인과 칠원 현감이 방좌가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추격하여 쏘아 죽인 것이 매우 많으니 적이 달아나 병영(兵營)으로 들어가다. 모든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타서 나아가 포위하니 적이 밤에 도망하여 가다. 시민이 드디어 연도의 각 고을을 수복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곽현(郭玄)ㆍ양산숙(梁山璹) 등이 서해로 해서 십생구사(十生九死)로 행조(行朝)에 도달하여 표문을 올리니 임금이 친히 남방의 소식을 묻고 두 사람에게 벼슬을 주었으며, 인하여 전라도의 사민들에게 내리는 교서를 선포하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王若曰]. 내가 임금답지 못하여 능히 백성을 보존하여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다. 한편으로는 인화(人和)를 잃고 한편으로는 적병을 방어하는 데에 실패하여 나라를 잃고 서쪽으로 파천하여 의주에 물러와 머문 지가 이미 한 달이 지났다. 종묘 사직은 폐허가 되고 신하와 인민은 어육이 되었다. 창창(蒼蒼)한 하늘이여! 이것이 무슨 일인가. 죄는 오로지 나에게 있으니 진실로 부끄러움이 깊도다. 서쪽과 남쪽이 멀리 떨어져 소식을 들을 길이 없다가, 이광(李洸)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붕궤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부터는 남쪽에서 구원병을 기다릴 생각을 다시는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곽현 등이 수로와 육로를 거쳐 도달하여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이 의병 수천을 모집하여 절도사 최원의 병마(兵馬) 2만과 함께 수원에 나와 둔쳤다고 보고하니, 덕이 없는 나로서 남이 나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하여 줌이 어찌 이에까지 이르렀는고. 우리 조종들의 깊은 인애(仁愛)와 후한 은택이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되어 맺혀진 것이, 아! 지극한 것이로다. 내가 심히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여 곧 양산숙 등을 보내어 너의 군사와 백성들에게 알리게 하노니, 그대 다사(多士)들은 내가 알리는 뜻을 알도록 하라. 내가 즉위한 이래로 이제 25년째이다. 비록 사랑함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여 은택이 아래에 통하지 못하였고 지혜는 물정을 살피지 못하여 정사에 조치를 잘못함이 많았으나, 본심인즉 일찍이 백성을 사랑하고 물정을 알려는 데에 뜻을 두지 아니한 적이 없었다. 다만 요 몇 년 사이에 변방에 허술함이 많고 군정(軍政)이 해이해진 것을 보고는, 오직 성이 높고 참호가 깊으며 갑옷만 견고하고 칼날만 예리하면 왜적을 막을 수 있으려니 생각하여 중앙과 지방에 신칙(申勅)하여 엄하게 방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성이 더욱 견고할수록 국세는 더욱 약해지고 참호를 더욱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날로 깊어져서, 일찍이 가을 뽕잎이 떨어지고 기왓장들이 풀어지듯이 점차 이 지경에 이를 줄을 헤아리지 못하였구나. 더구나 궁중의 사람들을 엄밀히 단속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세세한 이권까지 그물질하고 형벌이 정당함을 잃어서 원통한 기운이 화기(和氣)를 손상하였다. 왕자(王子)들이 산택(山澤)의 이권을 점령하자 세민(細民)들이 생업을 잃어 걱정하였다. 백성은 마땅히 나를 허물할 것이니 내가 무슨 변명이 있으리오. 이에 유사로 하여금 모두 파하여 돌려주었다. 이러한 일들 역시 어찌 내가 다 알았던 것이리오. 내가 몰랐던 것 역시 나의 죄이다. 생각이 이에 이르니, 비록 뉘우친들 어찌 미치리오. 차라리 내 몸을 희생으로 삼아 천지 종사 모든 신령에게 사죄하고자 하노라. 내가 손가락을 깨묾이 이미 이러하니, 바라건대 너희 사민들은 나에게 허물을 고치어 새로운 정치를 도모하도록 허락하여다오. 나의 잘못은 대략 이미 진술하였거니와 이번의 전란은 실로 얼토당토않은 것이다. 미련한 저 오랑캐가 감히 하늘을 쏘려는[射天] 꾀를 내어, 혹은 우리더러 저의 반역에 편당이 되기를 요구하고 혹은 우리더러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므로 내가 대의에 의거하여 배척하고 거절하였더니, 올빼미의 성질이 나의 큰 덕을 잊고 작은 분을 풀려하였다. 나는 종사가 망하고 신민을 버릴 수가 있을지언정 군신(君臣)의 대의는 하늘이 내려다보신다 하여 대의를 우주에 밝히고 가슴속을 해와 별에 밝게 헤쳐 위아래 신령들에게 부끄러움이 없고자 할 뿐이다. 곤궁과 위축을 당하면서 천조(天朝)에 달려가 호소하였더니 천자의 성명(聖明)으로 나의 지극한 뜻을 살펴 요동 총병관(遼東總兵官) 조승훈(祖承訓)으로 하여금 유격장군(遊擊將軍) 등 병마 1만을 거느리고 평양을 진격도록 허락하여 서울까지 이르러 왜적을 소탕하려고 기약하니 천병의 소식이 미치는 곳에 사민들은 마땅히 분발하기를 생각할 것이다. 나의 행전(行殿)이 비록 한구석에 궁박하게 있으나, 천조에서 또 호(湖)ㆍ절(浙) 지방에서 왜적과 싸운 경험이 있는 6천을 징발하여 아침 저녁으로 압록강을 건널 것이며 본도(평안도)의 군사와 말이 또한 수만이 모였으니 응당 다시 실패할 걱정은 없을 것이다. 너희 경명(敬命) 등이 이미 경기도에 이르렀으니 부디 기회를 보아 힘을 합하여 경성을 수복하라. 금성(金城)과 평양을 점령하였던 적도 기세가 이미 꺾였으니 섬멸할 것을 기약할 수 있다. 이 두 곳의 적만 제지하면 나머지 지엽의 적은 싸우지 않고도 절로 평정될 것이다. 지금 각 도가 모두 왜적의 노략질을 당하였으나 오직 호남 한 도가 온전하니, 너희가 만일 힘쓰지 아니하면 또 어디를 믿으랴. 군량이 모자라거든 경(京)ㆍ호(湖)의 국고를 너희들이 먹도록 맡길 것이요, 무기가 다되거든 너희들이 쓰도록 맡기리니 각기 힘쓸지어다. 이제 경명을 공조 함의에 제수하여 초토사를 겸하고, 천일을 장예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로 승진시켜 창의사(倡義使)를 겸하며 박광옥(朴光玉) 등 이하도 각각 차등 있게 벼슬을 주노라. 생각건대 너희들의 충의(忠義)는 벼슬과 상을 기다리지 않겠지만, 내가 은혜를 베푸는 데는 이 밖에 다른 것이 없으니 도착하거든 받고 더욱 힘을 다하라. 또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로 하여금 충청ㆍ전라도 등의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나의 뜻을 선유(宣諭)하고 군무(軍務)를 감독하게 하노니, 너희들은 그의 절제(節制)를 받아서 각기 용감함을 뽐내라. 용만(龍灣 의주) 한구석에서 국세가 위험하여 땅의 한계가 이미 다되었으니 나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랴. 사람의 일이 이미 극도에 다다랐으니 이치가 마땅히 회복함을 구할 것이다. 가을의 서늘함이 동하자마자 국경은 일찍 차가워지는구나. 저 장강(長江 압록강)을 보건대 역시 동으로 흐르니, 돌아가기를 생각하는 나의 한 생각이 물처럼 흐르누나. 이 교서가 이르거든 각기 나의 뜻의 슬픔을 불쌍히 여김이 있으리라. 아! 하늘이 이성(李晟)을 낳았으니 도성을 수복하도록 기대하고, 날로 장소(張所)가 능묘에 탈이 없다고 보고하기를 바라노라. 가뭄에 비구름 바라듯 하는 바람에 어서 부응하여 내가 서리와 이슬을 맞고 있는 괴로움을 면하게 하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아마도 잘 알 것이다. 이호민(李好閔)이 지은 것이다. ○ 아! 멀리 서쪽 국경에 파천하시어 임금께서 몽진하시는데 남방에서 목숨을 붙이고 있는 신자가 이제 애통의 교서를 보니 어찌 슬픈 회포가 없으랴. “죄가 오로지 나에게 있다.”는 것은 성덕의 겸손함이 지극하심이고, “다시는 남으로 바랄 수 없으니, 신정(新亭)에서 서로 만나 우는 것이 무슨 소용이랴! 백성들은 마땅히 나를 허물할 것이라.”는 말씀은 귀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며, “내가 손가락을 깨묾이 이와 같다.” 하신 말씀은 입으로 차마 전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군신의 대의는 하늘이 내려다본다.”는 말씀은 비록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라도 가히 격동할 만하며, “돌아가기를 생각하는 한 생각이 강물처럼 흐른다.”는 그 말씀을 듣고 통곡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초야에 벌레 같은 신하는 미천한 정성을 견딜 수 없어 애오라지 오언율시(五言律詩)를 읊어 서쪽으로 바라며 눈물을 흘린다. “궁궐에는 벼와 기장이 났고 용암에는 우림(羽林: 임금을 호위하는 친위대)이 체류하네. 한관(漢官)의 위의를 어디서 볼꼬. 주도(周道)는 마침내 찾기 어렵네. 북쪽을 바라보는 외로운 신하의 눈물이요 동으로 돌아오길 생각하는 성주(聖主)의 마음일세. 열 줄의 애통교시를 보고 나니 뜻이 침침하네.” 하다.
○ 경상도 신민에게 내린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상동(上同) 운운. 소식을 들을 길이 없어 본도(영남)의 사세와 적의 기세가 쇠하였는지 왕성한지 어떠한 줄을 알지 못하였더니, 근자에 들은즉, 우도 감사(右道監司) 김수(金睟)가 용인에서 패하여 물러갔고, 좌도 감사(左道監司) 김성일이 진주에서 군사를 모집하였으며,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이 싸우지 않고 도망한 죄로 참형(斬刑)을 당하여 박진이 충성스럽고 용감하다 하여 이각을 대신하였고, 우병사(右兵使) 조대곤이 노쇠하여 양사준(梁士俊)으로서 대신하였으며, 변응성(邊應星)이 좌도 수사(左道水使)가 되었다 하니, 그들이 각기 본도로 돌아가서 힘을 써서 한 일이 있는가 모르겠다. 좌도에는 영해(寧海) 일대와 우도에는 진주 등 몇 고을이 아직 보전되었다 하니 이것이 사방 십 리 되는 땅이나 군사 일려(一旅)보다 낫지 않겠는가. 본도는 백성이 신실하고 후하며 본시 충의가 많으니 너희 다사들이 진실로 서로 분려(奮勵)한다면 반드시 회복의 바탕이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을 것이다. 들은즉, 정인홍ㆍ김면(金沔)ㆍ박성(朴惺)ㆍ곽일(郭𧺝)ㆍ조종도(趙宗道)ㆍ이노(李魯)ㆍ노흠(盧欽)ㆍ곽재우ㆍ권양(權瀁)ㆍ이대기(李大期)ㆍ전우(全雨) 등이 의병을 일으켜서 군사를 모집함이 이미 많았다 하고 배덕문(裵德文)은 이미 적승(賊僧) 찬희(贊熙)를 죽였다 하니, 본도의 충의가 오늘날에도 아직 쇠하지 않았음을 더욱 믿겠도다. 하물며 곽재우는 전술이 비상하여 적을 죽인 것이 더욱 많았으되 공을 조정에 아뢰지 않는다 하니, 내가 더욱 기특히 여기노라. 내가 그의 이름을 늦게 들은 것이 한이로다. 호남에도 또한 전 부사 고경명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 명을 모집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의 병마 2만과 더불어 나아와 수원에 머무르면서 바야흐로 경성을 회복하도록 도모하고, 그의 부하 양산숙 등으로 하여금 수로와 육로로 달려와서 행재(行在)에 아뢰는데, 내가 그의 아룀을 보고 눈물이 글썽거려 한편으로는 위로되고도 슬펐다. 이제 양산숙 등이 군중(軍中)으로 돌아가는 편에 이 글을 부쳐 그로 하여금 전하여 이르게 하노니, 너희 사중(士衆)들은 내가 말하는 뜻을 알도록 하라. 내가 왕위에 오른 이래로 운운. 상동 군사들이 마땅히 분발하기를 생각할 것이다. 하물며 지금 광포한 왜적이 죄악을 쌓아 이미 가득 찼으니 하늘의 주벌이 마땅히 내릴 것이다. 더구나 평양의 적이 여러 번 야습(夜襲)을 당하여 세력이 쇠하였으니 섬멸할 것을 기약할 수 있다. 곧 맑은 가을이 철을 재촉하여 태백성(太白星)이 바야흐로 높아서 우리 군사의 머무는 곳에 살기가 이미 응하니 충의가 향하는 곳에 어느 적인들 꺾지 못하랴. 너희 사민들은 마땅히 힘을 헤아려서 비록 고경명 등과 힘을 합쳐 북으로 올라오지 못하더라도, 본도에 유둔(留屯)한 적 또한 많고 왕래하는 자 또한 많아서 길에 잇달았다 하니, 마땅히 서로 요해지를 끼고서 적들이 노략질하는 것을 나누어 무찌르도록 하라. 또한 마땅히 길 옆에 군사를 매복시켜 좌우로 서로 응하여 혹 맞아서 치고 혹은 뒤밟아 쳐서 적으로 하여금 마음 놓고 다니지 못하게 하여 마침내 한 놈도 바다를 건너가지 못하도록 만들고, 온 지방을 깨끗이 하고 평정시켜 노약(老弱)을 불러들여 살게 하라. 그런 뒤에 힘을 합하여 경성으로 나의 행차를 맞아 돌아가면, 너희 사민들이 살아서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고 은택이 자손에게까지 흐를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랴. 정인홍 제용감 정(濟用監正), 김면 합천 군수, 곽일 예빈시 정(禮賓寺正), 박성 공조 정랑, 곽재우 유곡 찰방(幽谷察訪), 이대기(李大期)ㆍ전우(全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여 표창하고 장려하노니, 생각건대, 너희들의 충의는 벼슬과 상을 기대하지 않겠지마는 운운. 상동
○ 처음에 정철이 강계(江界)의 적소(謫所)로부터 풀려와서 행조(行朝)에 따라갔다가 이미 체찰사(體察使)의 명을 받고 또 호남의 소식을 듣고는 초토사 고경명에게 편지하기를, “살아 돌아와서 차마 오늘의 일을 보게 되어 조복(朝服)으로 눈물을 닦으니 눈물이 말라 피가 이어 흐릅니다. 어찌 차마 말하랴, 어찌 차마 말하랴. 좌랑 상산숙이 와서, 형이 창의(倡義)하여 군사를 일으켜 호산(壺山 여산(礪山))까지 왔다고 들으니, 친구의 사사로운 정으로 배나 기쁠 뿐이 아니라 천안(天顔 임금의 안색)에 기쁨이 있고 백관들에게 희색이 돕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 복을 내리는 하늘이 가만히 도와서 그러함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모름지기 기운을 내고 전진하여 회복에 한결같이 뜻을 두어 임금의 행차를 봉영(奉迎)하기를 날로 바랍니다. 나는 외람되이 도체찰사의 명을 받아서 장차 내일 발정(發程)하려 하였다가 길이 막힐 것이 염려가 되므로 당분간 기다릴 뜻이 있으니 어떻게 귀결이 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종이는 다되고 말은 길어 우선 여기서 줄입니다. 철(澈) 배(拜).” 하다. 교지와 이 편지가 왔는데, 경명은 이미 한을 머금고 전사하였으니, 슬프도다.
○ 이광ㆍ윤선각(尹先覺)의 벼슬을 삭탈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하고 나주 목사 권율로서 전라 순찰사를 삼았으며, 공주 목사 허욱(許頊)으로 충청 순찰사를 삼고 이순신(李舜臣)에게 자헌대부의 계자(階資)를 내리다.
○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효순(韓孝純)으로 토포사(討捕使)를 삼다. 교지에,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경상좌도는 아직 보존되었으나 다만 도내에 감사ㆍ병사ㆍ수사가 없어서 조정의 소식이 통하지 못하므로 인심이 붙일 데가 없다. 그래서 비록 창의(倡義)하여 적을 치는 사람이 있으나 통솔하기에 어려운데, 좌감사 김성일은 길이 통하지 않아 아직 간 곳을 모르고 사기(事機)는 심히 급하다. 이제 그대를 당상관으로 승진시켜 토포사를 겸하게 하노니 성일이 미처 부임하기 전에 그대는 군현(郡縣)을 통솔하여 적을 치는 일을 맡고 또 성일이 있는 곳을 찾아서 급히 부임하도록 하여 서로 힘을 합하여 적을 치도록 하라. 군사나 백성으로 공이 있는 자는 일일이 자세히 기록하여 후일에 논공(論功)할 증거를 삼고 공사(公私)의 종은 곧 면천(免賤)해 주도록 하라. 장기 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은 각 고을이 연달아 무너질 때에 적을 베어 공을 세웠으니 극히 가상하다. 역시 당상관으로 승진시키고 그 나머지 공이 있는 사람도 역시 예(例)에 따라 논상(論賞)할 것이니 그리 알라.” 하다. 이 교서는 길이 막혀서 서너 달을 지나서 효순이 감사가 된 뒤에 도착하였다.
9일. 보성 군수(寶城郡守) 등이 금산(錦山)에서 적을 엿보다가 크게 패하여 달아나고 남평 현감(南平縣監) 한순(韓諄)은 적에게 죽었으며, 죽은 군인이 5백여 명이다.
○ 진주 판관(晉州判官) 김시민(金時敏)을 본주(本州)의 목사로 승진시키다. 변란이 처음 났을 때에 시민이 순찰사의 명령으로 날랜 기병(騎兵) 50여 인을 거느리고 영산(靈山)으로 달려가 진군하여 작원(鵲院)에서 맞아 쳤는데 참퇴장(斬退將) 윤탁(尹鐸)과 함안 군수(咸安郡守) 유숭인(柳崇仁)이 모두 붕궤되다. 거느린 군사 1백여 명이 모두 전사하고 숭인은 홀로 강물에 빠져 헤엄쳐 나왔는데, 시민이 옷을 벗어 입혀서 함께 돌아오다. 김수(金睟)가 군관을 시켜 시민에게 전령하기를, “적이 이미 고성(固城)의 길로 향하였으니 빨리 막아 끊으시오.” 하다. 시민이 곧 고성으로 달려오니 적이 이미 고성을 점령하여 전진할 수가 없어서 본주로 돌아온즉, 성중의 사졸들이 이미 흩어졌다가 차차로 돌아와 모여서 기세가 점차로 떨치다. 시민이 사졸과 더불어 고락(苦樂)을 같이하면서 사수할 계책을 하다. 사천을 점령하였던 적이 장차 본주를 범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드디어 조대곤(曺大坤)과 더불어 정병(精兵)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바로 사천성 밑에 이르렀더니, 적이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다. 이튿날에 또 진군하여 적을 십수교(十水橋)에 만나니 현에서 5리쯤의 거리다. 군사가 모두 죽도록 싸워서 머리 몇 급(級)을 베고 쏘아 죽인 것이 매우 많으니 적이 퇴각하여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성 밑에까지 갔다가 돌아오다. 이로부터 군사들의 기운이 배나 되다. 얼마 안 되어 적이 밤에 도망가 고성의 적과 합하다. 시민이 모든 군사에게 명령하여 고성의 적을 습격하고자 하다. 드디어 정병을 뽑아서 진주(晉州)의 남쪽 영선현(永善縣)에 진을 쳤다가 밤중에 군사들로 하여금 재갈을 머금게[啣枚] 하고 가만히 대둔령(大屯嶺)을 넘어서 새벽에 고성의 성 밑에 이르러 북치고 고함치며 위엄을 뽐내다. 적이 두렵고 위축되어 수일 만에 밤에 도망하여 진해(鎭海)에 있는 적과 합세하여 철병하여 창원(昌原)으로 가니, 세 고을이 연달아 수복되어 군의 기세가 크게 떨치다. 이때에 이르러 목사가 되다. 김면은 시민이 장수와 군사의 인심을 얻은 줄을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응원하게 하다. 시민이 곧 정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거창(居昌)으로 달려가서 김면과 합하여 금산(金山)의 적을 쳐서 머리 수십 급을 베고 수 일 있다가 또 나가 싸워서 머리를 벤 것이 역시 많았다. 시민이 칼에 맞아 발이 상하자, 김면이 그 때문에 눈물을 흘리다. 얼마 안 되어 금산 등지의 적이 잇달아 도망가자, 시민이 진주로 돌아오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좌병사 김성일(金誠一)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신이 이미 좌도의 감사가 되었으니 우도(右道)의 일은 마땅히 아뢸 것이 아니나, 다만 소신이 처음부터 의병을 주관하였으니 지금 만일 상례에 맡겨두고 근심스러운 기회를 눈으로 보고도 아뢰지 아니한다면 실로 신하된 의리가 아닙니다. 이러므로 한두 가지 조건을 외람되이 진술하여 직무 외의 일을 간섭한다는 혐의를 피하지 못하나이다. 당초에 김면은 고령(高靈)ㆍ거창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정인홍(鄭仁弘)은 합천(陜川)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각기 적을 쳐서 기세가 떨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김면은 은명을 받아 합천 군수가 되고 정인홍은 제용감 정(濟用監正)에 제수되매, 고령ㆍ합천ㆍ거창 세 고을의 군사가 모두 그 장수를 잃고 마음이 해이하여 적을 칠 뜻이 없으니 진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일이 진정될 동안에는 각기 그 군사들을 거느리고 전대로 적을 치게 하소서. 전 군수 곽일(郭𧺝)은 초계(草溪)의 가수(假守)가 되어 직무를 잘 보아 군사와 백성들이 사모하여 모두 진군수(眞郡守)가 되기를 바라고 군수 정눌(鄭訥)은 있는 곳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곽일로 본군의 군수를 삼으소서. 전 목사 오운(吳澐)은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온 현을 타일러 군사 2천여 명을 모아서 노약자는 빼내어 보(保)를 삼고 군기를 주조하여 전투에 쓰게 하여 의령(宜寧) 한 고을이 온도의 보장(保障)이 되어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하니, 이 몇 사람의 공은 실로 도내에서 함께 아는 바입니다. 일이 의병에 관계되므로 감히 직책을 넘어 외람되게 아뢰나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으로 본도 조방장(助防將)을 겸하게 하다.
○ 전라 우의병장(右義兵將) 최경회(崔慶會)는 담양(潭陽)ㆍ순창(淳昌)으로 해서, 좌의병장 임계영(任啓英)은 구례(求禮)로 해서 남원(南原)에 모이다. 경회가 본부 전 첨사 고득뢰(高得賚)로 부장(副將)을 삼으니, 남원의 선비와 백성으로 의병에 모집된 자가 거의 6, 7백 명이 되다. 두 군사가 장수(長水)에 이르러 유둔(留屯)하고 부장으로 하여금 금산(錦山)ㆍ무주(戊州)의 적을 잡을 조치를 하게 하였다.
○ 최원(崔遠)ㆍ김천일(金千鎰) 등이 장단(長湍)에서 적을 치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오다. 처음에 경기에서 피란한 조관(朝官)들과 의병들이 모두 강화(江華)에 있다가 두 군사가 근왕(勤王)하는 것을 보고 흔연히 기운이 나서 여러 차례 적을 치도록 권하였고 두 장수도 역시 군사들이 해이해질 것을 염려하여, 드디어 본 지방의 군사와 합세하여 강을 건너 장단에서 적을 엿보았는데 적이 군사를 감추고 약한 체하여 우리 군사를 유인하다. 여러 장수들이 급히 군사를 시켜 육지에 내려가 잡게 하였더니 적병이 사면에서 일어나 기세가 바람을 탄 불길 같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수없이 많았고 천일 등은 겨우 몸만 빠져 나와서 쪽배를 타고 달아나다. 수일이 지난 뒤 전장으로 사람을 보내어 당일에 죽음을 면하고 숨어 있는 자 들을 몰래 불러 모으게 하니 겨우 1천여 명을 얻다.
27일.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과 중[僧] 의장(義將) 영규(靈圭) 등이 금산(錦山)에서 적을 치다가 패하여 죽다. 그 뒤 만력 23년 을미년(1595, 선조 28)에 전지(戰地)에 비를 세우다.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아! 여기는 증 참판(贈參判) 조공(趙公)이 순절한 땅으로서 부하와 함께 죽은 병사들이 매장된 곳이다. 만력 임진년(1592, 선조 25)에 왜란이 갑자기 일어나니, 우리 땅을 범하였다. 우리 군사가 닿는 곳마다 번번이 붕괴되어 감히 그 칼날을 막는 자가 없었다. 왜적이 드디어 이긴 기세를 타고 마구 몰아서 바로 한강을 건너오니 삼경(三京 한양(漢陽)ㆍ개성(開城)ㆍ평양(平壤))이 모두 지켜지지 못하고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파천하였으나 근왕(勤王)하는 자가 전혀 없었다. 이때에 공이 옥천(沃川)의 시골집에 있다가 홀로 분연히 일어나서 피를 뿜으며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순찰사와 수령들이 모두 방해하였다. 공이 잉에 동지와 문생인 전승업(全承業)ㆍ김절(金節) 등과 더불어 충청 우도로 달려갔더니 전 참봉 이광륜(李光輪)과 선비 신난수(申蘭壽)ㆍ장덕개(張德盖)ㆍ고경우(高擎宇)ㆍ노응탁(盧應晫) 등이 공의 의기를 사모하여 앞다투어 와서 모였다. 드디어 군사와 군량을 모집하고 혹은 기계를 주조하여 7월 4일에 공주(公州)에서 기(旗)를 세우니 군사가 1천 7백이었다. 이때에 왜적이 공주를 점령하매 방어사 이옥(李沃)의 군사가 붕궤되었다. 공이 청주(淸州)로 진군하여 8월 1일에 바로 성의 서문 밖을 두드려서 승장(僧將) 영규와 진(陣)을 연합하였다. 공이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종일토록 독전(督戰))하니 적이 크게 패하여 마침내 저들의 송장을 태우고 밤에 달아났다. 이로부터 충청 좌도 여러 둔(屯)의 적이 모두 도망하였다. 공이 바야흐로 날랜 군사를 가려서 바로 행조(行朝)로 달려가려고 온양(溫陽)까지 이르자, 금산에 있는 왜적이 다시 창궐하여 장차 충청ㆍ전라도를 침범하려 하였다. 순찰사가 공의 동지를 소개로 하여 공을 만나 금산의 적을 치는 것에 대해 의론하자고 청하였다. 부하 장교들도 역시 대부분 말하기를, “국가의 땅이 모두 적에게 점령당하고 오직 충청ㆍ전라도만이 침범당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하늘이 우리를 도와서 중흥의 열려 함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버리고 서울로 올라간다면 이것은 충청ㆍ전라도가 없어지는 것이요, 또 먼저 금산의 적을 무찔러서 뒤를 밟을 적을 끊은 뒤에 북으로 가서 근왕하여도 늦지 않다.” 하므로, 공이 이에 공주로 돌아왔더니 순찰사와 뜻이 또 서로 틀어졌다. 대개 의병을 일으킬 처음에 공이 순찰사에게 글을 보내어, 그가 군사를 끼고 스스로 호위하고 근왕하는 데는 뜻이 없어 충신과 의사(義士)의 기운을 누른다고 책하였더니 순찰사가 사감을 품은 것이었다. 이에 이르러 순찰사가 각 고을에 공문을 돌려 무릇 공의 취하에 모집되어 있는 자에 대해 그의 부모와 처자를 잡아 가두고 또 관군에 영을 내려 서로 응원하지 않게 하니, 휘하의 군사가 이미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고 다만 의사 7백 명이 공을 따라 사생을 같이하려는 이가 있을 뿐이었다. 8월 25일에 군사를 옮겨 금계(錦溪)로 가려 하니 별장(別將) 한 사람이 극력 말리기를, “적이 명종(明宗) 을묘년(1555)에 호남에서 패한 것을 징계하여 지금 금계를 점령한 자는 특히 정예한 부대요 수효도 수만인데, 어찌하여 우리의 오합(烏合)한 군사를 가지고 당적하겠습니까. 마땅히 군사를 멈추고 기회를 보고 또 조정의 명령을 기다립시다.” 하다. 공이 울면서 맹세하기를, “임금께서 지금 어디 계시건대, 감히 승패를 말하리오.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가 죽어야 하는 것이니 나는 한번 죽음을 알 뿐이다.” 하고, 드디어 영규와 군사를 연합하여 진군하였다. 일찍이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과 27일에 일제히 협공(夾工)하기를 약속하였었는데 권율이 글을 보내어 기일을 변경하였으나, 글이 도착하기 전에 공이 이미 금산군에서 10 리의 거리에 당도하여 전라도 군사를 기다렸다. 적이 정찰해 알고 맞아 공격하여 우리가 미처 진을 치기 전에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번갈아 나와서 우리에게 대들었다. 공이 이내 군중(軍中)에 영을 내리기를, “오늘에는 다만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니, 생사와 진퇴에 있어 의(義) 자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 하니, 군사들이 모두 명을 따라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힘껏 싸운 지 한참 만에 적이 세 번 패하여 겨우 다시 정돈하였는데, 우리 군사는 이미 화살이 다되었다. 적이 드디어 막하로 몰려 들어오자, 군사가 도망가기를 청하였다. 공이 웃으며, “장부가 죽으면 죽었지, 위태로움에 이르러 구차히 살 수는 없다.” 하고 드디어 북채를 들고 독전하기를 더욱 급히 하니, 군사들이 죽음을 각오로 달려들어 맨주먹으로 적을 치면서도 오히려 행오(行伍)를 이탈하지 않고 마침내 공과 함께 죽어서, 삶을 바라고 요행히 면한 자가 없었다. 적도 역시 그만큼 죽어서 세력이 드디어 꺾이자, 남은 군사를 거두어 진중으로 돌아가면서 곡하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고 그 송장을 사흘 동안 운반하여도 오히려 다하지 못하여 이내 쌓아서 불태웠으며, 마침내 무주에 있는 적과 함께 모두 도망하였다. 그러므로 충청ㆍ전라가 보존되어 국가가 그 덕에 오늘날의 중흥이 있게 되었으니, 공이 비록 패하여 죽었으나, 충청ㆍ전라를 보존하여 왜적을 꺾고 막은 공이 어떻다 하겠는가. 공이 군사를 일으킨 몇 달 동안 일찍이 형벌을 쓴 적이 없었으나, 군사들이 모두 명령에 복종하여 이르는 곳마다 숙연히 정제하여 시끄러움이 없었다. 공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는 멀고 가까운 데서 달려와 모여서, 비록 관에게 극력 방해를 당하여 처자가 옥에 갇혔으면서도 또한 공을 사랑하고 사모하여 차마 버리고 가지 못한 자가 있었다. 그의 패함을 듣자 거리에 곡성이 서로 들리며 전사한 집에서도 사사로운 원망을 하지 않고 오직 공의 죽음을 슬퍼하며, 뒤에 처져서 죽지 아니한 자도 자기의 죽음 면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만 의탁할 데가 없음을 한탄하여서 충청 우도의 사람들은 천한 하인까지도 모두 소식(素食)을 하였으니, 공의 덕이 사람에게 감동됨이 깊었던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일이 위에 알려지자, 임금께서 매우 애도하시어 이조참판 겸 동지 경연의금부 춘추관사로 증직하고 그 아들 완도(完堵)를 태릉 참봉(泰陵參奉)으로 제수하였으며 달마다 집에 곡식을 내렸으니 아! 이로써 군신 관계를 보겠도다. 아! 평상시에는 큰 소리를 하다가 작은 이해에 임해서는 두려워하고 피하여 앞으로 갔다가 물러갔다가 하는 자가 많은데, 공과 같은 이는 전일에 곧은 상소를 올리고 국사(國事)를 말하여 여러 번 주운(朱雲)의 칼을 청하였으니 곧은 말을 한다는 명성이 일시에 진동하였고, 한가히 물러나 처하다가 국난을 듣고는 곧 분발하여 먼저 의병의 깃발을 날려 비록 성패가 하늘에 달려 있어 몸에 화살을 맞고 순국하였으니, 그가 전날 말한 바와 맞추어 보매 부절(符節)이 합한 듯 스스로 마음에 편안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또 국가에 문관으로서 전쟁에 달려가야 할 책임이 없고 공은 또 당시에는 관직도 없었는데도 한갓 의로써 일어났으니, 군사를 멈추고 기회를 보아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린다 하더라도 누군들 불가하다 하리오마는,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강한 적에게 항거하여 죽어서 후회가 없었으니 어찌 열렬한 남자가 아니랴. 공이 신묘년(1591, 선조 24)에 왜적의 사신이 왔을 때에 문득 조정에 글을 올려 그 사신을 베어 천조(天朝)에 보고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늠름한 기색과 의연한 말이 바로 해나 달과 더불어 빛을 다투었으니, 호방형(胡邦衡)의 봉사(封事) 뒤로 공의 한 장의 상소를 보겠다. 또 천문에 특히 밝아서 하루는 동남쪽에서 큰 우레 같은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공이 울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천고(天鼓)라는 것이니, 왜적이 이제 반드시 바다를 건널 것이다.” 하였다. 그 말이 과연 증험되어 날짜도 틀리지 않았으니, 공은 이인(異人)이 아니고 무엇인고. 역적 정(鄭)가를 배척하면서 예(羿)와 착(浞)에게 비하였는데 그 뒤에 그 말이 마치 촛불로 비추고 거북으로 점친 것 같았으니, 이것은 사람마다 전해 외우는 바이다. 기타 사적과 행실이 탁월하고 빛나는 것도 진실로 전하지 아니할 수 없지마는, 이제 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한 가지 일은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이다. 공의 8대조 휘(諱) 천성(天性)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당하여 박주(博州)에서 두 번 이기고 안주(安州)에서 패하여 순국하였는데, 공이 일찍이 그 조상의 충절에 강개하여 탄복하고 추모하며 칭도하기를 좋아하더니 지금 마침내 능히 닮았으니, 또한 기이하도다. 공의 휘는 헌(憲)이요, 자는 여식(汝式)이요, 호는 중봉(重峯)이다. 정묘년(1567, 명종 22)에 문과에 올랐다. 집이 가난하여 처자는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였으나 모친을 봉양하는 데는 맛난 음식과 따뜻한 옷이 부족함이 없게 하였고, 몸소 밭 갈아 끼니를 대면서도 여가에는 항시 성현의 글을 대하여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아니하였으니, 옛날에 이른바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글 읽은 것이 아닌가. 인륜과 의리를 외우고 말하여 반드시 행사에 나타나기를 기약하였고, 생사에 분명하여 본래 마음에 정한 까닭에 창졸의 즈음에 능히 우뚝하게 스스로 성취함이 이와 같으니, 가히 공경할 만하도다. 행조에서 공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을 듣고 교서를 내려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을 제수하였으나, 공이 또한 미처 보지 못하였다. 군사가 패한 이튿날에 공의 아우 조범(趙範)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지에 들어가니, 공은 기(旗) 밑에서 죽었고 장수와 군사들은 모두 그 옆에 죽어 있었다. 조범이 곧 공의 시체를 지고 옥천으로 돌아와서 4일 만에 빈(殯)하였는데, 안색이 살아 있는 듯하여서 성낸 기운이 발발(勃勃)하여 눈을 부릅뜨고 수염이 흐늘거리므로 사람들이 그가 죽은 지 이미 오래된 줄을 몰랐다. 공을 따라 전사한 7백 명은 대개 공의 열렬함을 사모하여 듣고 보면서 격동된 자들로서 몸을 버리는 데 뒤질까 두려워하여 온 군사가 모두 충의의 귀신이 되기를 사양하지 않았으니, 특히 이번 전란 이래로 다른 군중에서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옛 역사에 상고 하여 보아도 또한 듣기 드문 바이다. 또 그 중에 더욱 드러난 이로 참봉 이광륜 중임(仲任)은 효도와 우애가 타고났으며 강개히 절개가 있어 향병(鄕兵) 수백을 모집하여 실로 시종일관 공을 돕다가 마침내 죽음을 함께 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증직되었다. 봉사 임정식(任廷式)은 성품이 질박하고 정직한데다가 활 쏘고 말 타는 재주가 있어서 척후병을 거느리고 진(陣) 밖에 있다가 형세가 급한 것을 바라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돌진하여 왜놈 두엇을 쳐 죽이고 죽었다. 선비 김절(金節)은 의병을 모집하는 데 맨 먼저 따라서 전공이 많았다. 이려(李勵)는 바로 고(故) 수상(首相) 이탁(李鐸)의 손자로 학문을 좋아하고 행실이 돈독하였으며, 그의 가풍을 계승하더니 공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을 듣고 의기로 따라왔다가 진중에서 함께 죽었다. 또 만호(萬戶) 변계온(邊繼溫), 현감 양응춘(楊應春), 봉사 곽자방(郭自防), 무인(武人) 김헌(金獻)ㆍ김인남(金仁男)ㆍ이양립(李養立)ㆍ정원복(鄭元福)ㆍ강충서(姜忠恕)ㆍ박봉서(朴鳳瑞)ㆍ김희철(金希哲)ㆍ이인현(李仁賢)ㆍ황삼양(黃三讓)ㆍ박춘년(朴春年)ㆍ한기(韓琦)ㆍ박찬(朴贊)은 모두 편비(偏裨)로서 혹은 선등(先登)하여 견고한 적을 꺾고 혹은 적을 죽이기를 많이 하여 용맹과 열렬함이 남의 이목에 빛난 자들이다. 선비 박사진(朴士振)ㆍ김선복(金善復)ㆍ복응길(卜應吉)ㆍ신경일(辛慶一)ㆍ서득시(徐得時)ㆍ윤여익(尹汝翼)ㆍ김성원(金聲遠)ㆍ박혼(朴渾)ㆍ조경남(趙慶男)ㆍ고명원(高明遠)ㆍ강몽조(姜夢祖)는 모두 혹은 문학으로 혹은 행실로 알려진 이들인데, 살아서는 공의 문하에 출입하였다가 전장에서 공과 죽음을 같이한 자들이다. 공의 아들 완기(完基)는 씩씩한 용모에 체격이 듬직하였으며 성질이 남보다 뛰어났었는데, 군사가 패하자 일부러 그 의관을 화려하게 하여 공의 죽음을 대신하려 하니 적이 대장인 줄 알고 그 시체를 부숴버렸다. 적이 이미 물러가자, 공의 문도(門徒) 박정량(朴廷亮)ㆍ전승업(全承業)이 곧 가서 7백 의골(義骨)을 수습하여 모아 한 무덤을 만들었다. 정량은 기특한 선비라 옛 도리를 힘써 행하고 승업은 단아하여 경학(經學)에 통하고 행실을 다듬었는데, 공의 막하에 있다가 마침 임무를 받아 밖에 나갔었기 때문에 난에서 죽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비석을 세워서 영원히 전하기를 선창하였더니 불행히 연달아 병들어 죽었다. 동문(同門) 민욱(閔昱)은 의를 즐기는 자라, 그들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애석히 여겨 그 뜻을 이어 경영하여 충청도 선비들 및 금산의 기로(耆老)들과 의론이 합하였다. 방백(方伯)과 수령들이 또한 비용을 보조하여 돌을 다듬기를 이미 마치자, 진사 송방조(宋邦祚)가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참판 조헌의 마음과 일을 아는 이가 몇 분인데 모두 세상에 살아 있지 아니하니 감히 자네에게 부탁하네.” 하였다. 내가 참판을 잘 알았는데 그가 순국한 초기 내가 행조에 있다가 듣고 특히 슬퍼하였다. 그러나 천 리에 서로 바라보면서 순국한 그 자리에 술 한 잔을 부어서 예전 마음을 풀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 글을 짓고 사적을 적어서 이 일을 돕게 되었으니 어찌 글이 훌륭하지 못하다는 핑계로 사양하리오마는, 다만 노쇠한 나머지에 어찌 능히 그 사적을 빛나게 써서 땅 밑에 7백의 충혼을 위로하여 그들로 하여금 눈을 감게 할 수 있으랴. 아! 상심된다. 일을 기록하고 시를 지어 끝에 부치노라, 하고, 그 시에,
신하는 큰 강이 있으니 / 臣有大綱
목숨을 바쳐 직분을 갚음은 / 授命酬分
지사의 당연함이건만 / 志士所程
이해가 그것을 빼앗아 / 利害奪之
진실로 실천한 이가 적으니 / 允蹈者鮮
난에 임해서야 나타나네 / 臨難乃明
강직한 조공은 / 侃侃趙公
학문이 이미 실천되어 / 學旣踐實
충성에 합하고 바른 것을 밟았네 / 合忠履貞
전년 용사의 해가 / 昔歲龍蛇
운이 양구를 당하여 / 連屬陽九
섬 오랑캐가 침범하였네 / 島夷構兵
금탕이 험함을 잃어 / 金湯失險
감히 막아내는 이 없어 / 莫敢儲胥
바로 한경에 처들어 왔네 / 直抵漢京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파천하매 / 鑾輅西遷
공이 피눈물을 흘리니 / 公泣其血
의는 중하고 몸은 가벼웠네 / 義重身輕
팔을 걷고 한 번 외치매 / 振袂一呼
의병들이 일제히 분발하여 / 義旅齊奮
소리에 메아리가 따르듯 하였네 / 如響赴聲
강개히 창을 베고 자면서 / 慷慨枕戈
군사를 멈춤이 없이 / 誓無留陣
청주에서 적을 멸하기로 맹세하였네 / 覆賊于淸
흉한 기세가 심히 치성하여 / 兇焰孔熾
금계를 차지하였는데 / 盤據錦溪
누가 그 고래를 잡아 죽일꼬 / 孰剪奔鯨
공은 우리 군사에게 / 公激我師
이 놈들을 멸한 뒤에 조반을 먹자고 맹세하고 / 滅此朝食
바로 나아가 감히 공격했네 / 直前敢攖
혈전하기 한참 만에 / 血戰逾時
화살은 다되었으나 / 矢盡途窮
북소리는 오히려 울렸네 / 枸鼓猶鳴
적을 많이 죽여서 / 殺賊過當
임금의 은혜를 갚았으니 / 以報主恩
비록 패했으나 오히려 이긴 것이네 / 雖敗亦嬴
임금 위해 죽는데 어찌 피하며 / 殉君胡避
장수 따르는데 어찌 두려워하랴 / 從師胡惘
열렬하다! 한 군영이여! / 烈哉一營
일이 행조에 알려지자 / 事聞行朝
충의를 표창하고 벼슬을 내려 / 褒忠錫秩
특별히 임금의 정을 표시하셨네 / 特軫震情
옛사람이 말하기를 / 人亦有言
부서져서 완전함이 있고 / 有碎而完
떨어질수록 꽃이 핌이 있다고 하였네 / 有殞而榮
마침내 그 몸은 죽었으나 / 竟毁其魄
실로 그 천성을 온전히 하여 / 實全其天
그 신령이 위로 올라가리 / 其神上征
끓어오르는 기운과 울려 퍼지는 소리가 / 騰氣犇音
우레가 되고 벼락이 되어 / 爲雷爲霆
우루루 쿵쾅쿵쾅 / 殷殷轟轟
저 요망한 기운을 소탕하여 / 掃彼欃槍
남방의 기강을 지키니 / 以桿南紀
국토가 편안케 되었네 / 彊塲載寧
진 터의 구름은 아득하고 / 陣雲莾蒼
들새는 슬피 우는데 / 野鳥哀吟
충의의 넋이 한 구덩에 묻혔구나 / 毅魄同坑
서대는 구름에 솟고 / 西臺陵雲
진악이 옆에 있어 / 震岳在傍
아울러 이 무덤을 표시하누나 / 幷表厥塋
오는 천추에 / 有來千秋
이 큰 비를 읽으면 / 讀此豐碑
그 사람들이 살아 있는 듯하리라 / 其人若生
하였으니,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가 지었다.
그 뒤 권필(權鞸)의 시에,
몇 번이나 운대의 난간을 꺾었으며 / 幾折雲臺檻
초수에서 깨어 있음을 읊었으니 / 長吟楚水醒
종래로 큰 군자는 / 從知大君子
작은 조정에 처하지 않음을 알겠네 / 不處小朝廷
곧은 기운은 천지를 베고 / 直氣斬天地
외로운 충성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 孤忠炳日星
높디높은 금산의 빛은 / 崔嵬錦山色
만고에 이렇듯 푸르네 / 萬古只摩靑
하였으니, 중봉을 위해 지은 것이다.
○ 전라 감사 권율이 각 고을로 하여금 근왕할 군사를 징발하게 하다.
○ 경상도 예안(禮安) 사람 정자(正字) 유종개(柳宗介)가 군사를 모집하여 적을 치다가 얼마 안 되어 패하여 죽다. 이보다 먼저 경상 좌도 산골의 궁벽한 10여 고을에는 전란이 조금 멀었으므로 선비와 백성들이 아침 저녁으로 구차히 생명을 보존하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서 각기 처자를 보호하여 가재(家財)를 골짜기 안에 숨겨두고, 그 중에 한두 명의 강개한 선비들이 무인과 도망한 군사들을 격동시켜 권하여 적을 칠 의리로 타이르는 이가 있으면 왜적을 끌어들여 화를 입힐 것이라 하여 도리어 전쟁에 대해 말하는 이를 허물하다. 종개가 분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먼저 창의(倡義)하여 향병 수백을 모집하여 큰 산 가운데에 진을 쳤다. 강원도의 적이 평해(平海)ㆍ울진(蔚珍) 등지를 분탕한다는 말을 듣고 장차 광비촌(廣比村)을 넘어서 장서(掌書) 윤흠신(尹欽信)과 윤흠도(尹欽道) 등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맞아 치려하였는데, 적의 선봉이 변복(變服)하고 가만히 오매 척후병이 깨닫지 못하여 매복하였던 군사가 모두 흩어지다. 종개 등이 창졸에 적을 만나서 용감히 싸워 퇴각하지 않았으나, 힘이 다되고 구원병이 없어서 마침내 살해를 당하다. 적이 드디어 예안ㆍ영해(寧海)를 분탕질하고 가니, 이로부터 사람들이 모두 의병을 경계하여서 모집에 응하기를 즐기지 아니하다. 그 뒤에 초유사의 격문이 우도로부터 간간이 좌도 각 고을에 전해져서 문무(文武)ㆍ부로(父老)ㆍ사민(士民)에게 두루 타일러서 국가의 은혜를 잊음을 책하고 의병에 참가하기를 격동시키다. 안집사(安集使) 김륵(金玏)이 또 통문을 내어 말이 간절하였고, 또 영천(榮川)ㆍ풍기(豐基)의 선비 김대현(金大賢)ㆍ곽수지(郭守智) 등과 향병을 소집하였으며, 이상은 7월 사이의 일이다. 전 한림 김해(金垓), 생원 금응훈(琴應勳), 진사 임흘(任屹), 생원 이정백(李廷栢)ㆍ배용길(裵龍吉) 등이 예안ㆍ안동에서 일어나고, 전 현감 이유(李愈)와 진사 권욱(權旭)ㆍ이광옥(李光玉)이 예천(醴泉)에서 호응하다. 찰방 조현(趙玹), 생원 이함(李涵)ㆍ유학(幼學) 백현룡(白見龍) 등이 또한 영해에서 일어나고, 그 사이에 서로 호응하는 이로 신홍도(申弘道)는 의성(義城)에서, 이인호(李仁好)는 의흥(義興)에서, 진사 이영남(李榮男)과 홍위(洪瑋)는 군위(軍威)에서, 김희(金喜)는 비안(比安)에서, 민근효(閔根孝)ㆍ권계창(權季昌)은 청송(靑松)에서 호응하니, 물고기 비늘처럼 일어나서 군사가 만여 명이 되는데 모두 김해의 통솔을 받다. 김해는 충의롭고 강개한 자질로 신의가 본래 남에게 미더움을 받았으므로 먼 데나 가까운 데서 유위(有爲)할 것을 기대하여 간 곳마다 사람들이 적을 치는 데 힘쓰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또 9월 조에 나옴.
○ 경상 좌병사 박진(朴晉)이 모든 장사(壯士)와 더불어 안강(安康)에 모여서 군관 권응수(權應銖)와 판관 박의장(朴毅長)으로서 선봉을 삼아서 16고을의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밤에 40여 리를 행군하였다. 아침에 경주성(慶州城)에 육박하여 장사를 뽑아서 성 밖의 인가를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하여 지척을 분변할 수 없다. 대군이 포위하여 공격하였는데 적병이 경주 남쪽 10여 리로부터 불의에 돌진하여 우리 군사의 뒤를 습격하니, 대군이 놀라 무너져서 장수와 군사들이 갑옷을 버리고 무기를 던지며 달아나다. 적이 기세를 타서 급히 추격하니 송장이 쌓이고 서천(西川)의 물이 다 붉어졌으며 경주ㆍ영천(永川)의 의사들이 모두 죽다. 대개 하루 전에 언양(彦陽)에 있는 적이 와서 깊은 골짜기에 매복하여 우리 군사를 정탐해 기다렸는데도 모든 장수들이 살피지 못하여 패군하게 된 것이니, 사람들이 모두 통분히 여기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이유의(李由義)가 군사를 거느리고 행군하여 직산(稷山)에 다다르다. 경기도 조방장(助防將) 홍계남(洪季男)이 충청 병사 신익(申益)과 약속하기를, 죽산(竹山)의 적을 협공(恊攻)하여 횃불을 드는 것으로 신호를 삼고 밤을 틈타 진군하기로 하다. 유의 또한 약속에 참여하여 군사를 보내 응원이 되다. 호남의 군사가 몰래 죽성(竹城) 밖 5리 되는 땅에 도착하여 경기와 호서의 군사를 기다렸는데, 두 군사가 이르기 전에 적이 이미 먼저 알고 은밀히 기병(奇兵)을 내보내어 앞뒤로 덮치니 우리 군사가 크게 무너져 달아났고 죽은 자가 길에 겹겹이 쌓이다.
○ 충청도 영동(永同)의 선비들이 향병을 모집하고 본 고을의 수령인 한명윤(韓明胤)을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다. 그 통문은 다음과 같다.
양남(兩南) 호서(湖西) 열읍(列邑)의 명부(明府) 및 각 촌락 대소첨존시(大小僉尊侍)에게 삼가 고합니다. 왜적이 한번 범하여 왕경(王京)을 함몰시키매 임금께서 서쪽으로 파천하시고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었으니, 북쪽을 바라보매 심장이 무너져 통곡을 견딜 수 없소. 일국의 백성으로 직분상 마땅히 죽음을 바쳐야 할 터이나, 우리들이 형편없어 지혜는 병을 이끄는 데에 어둡고 생각은 띠풀 베는 데에 어두워 지금껏 이 적과 한 하늘 밑에 살았으므로 통곡하는 원통함은 아마 피차가 한 가지일 것이니, 다시 무슨 말을 하리오. 다만 우리 고을 선비들이 나의 비루하고 옹졸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의장(義將)으로 추대하므로 선비들이 적을 치는 마음에 감동되어 옳은 일에 사양하지 아니하였으니, 감히 급무(急務)를 가지고 문득 호소하오. 대개 적을 치는 데는 군량을 준비함보다 먼저 할 것이 없고, 싸워 이기는 것은 무기의 날카로움에 달린 것이오. 군량이 부족하면 적을 칠 수가 없고 무기가 예리하지 못하면 싸워봤자 이기지 못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에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오. 내가 지키는 이 고을은 본래 적은 백성이 살고 호서와 영남에 끼어 있어 적의 요충이 되어서, 서울을 오르내리는 적이 반드시 이곳을 경유하고 금계(錦溪)로 왕래하는 적 역시 여기로 길을 삼으므로, 분탕질의 참혹함이 다른 고을보다 배나 되고 농사의 황폐함이 각 고을보다 심하오. 온 동리에 종을 단 듯한 집도 없고 백묘(百畝)에 반 포기의 작물도 없소. 무기고는 잿더미가 되었고 병기는 쓸은 듯 없어졌으며, 창고가 불에 타서 군사를 먹일 길이 없소. 관가에서 대여해 줄 희망이 끊어졌으니 군사에게 주린 빛이 있고, 사람들이 싸울 재주가 없으니 누군들 무용(武勇)을 드날리리오. 하물며 이 적변(賊變)에 여름부터 가을까지 혹은 맞이하여 공격하고 혹은 야습을 하여 많고 적음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쫓고야 말았소. 한 번 공격 한 뒤로 활이 부서지고 화살이 다되어 없는 데 따라 곧 준비하나 재물이 다하고 힘이 다되었으며 또 전일의 야습에서 남았던 활과 화살까지 아울러 다되었소. 만약 이때를 당하여 적이 충돌해 온다면 빈 주먹으로 버틴 군사들이 누가 능히 호응하며, 배가 고파 뱃속에서 뇌성처럼 울리는 군사들이 감히 전투하기를 바라리오. 흩어져 사방으로 가게 하자니 나라 원수를 갚지 못하겠고 합쳐 모아 요지에 매복시키자면 무기와 양식이 함께 다되었으니, 온갖 방법으로 생각해도 어쩔 바를 모르겠소. 이에 부득이한 요청으로 첨존시(僉尊侍)에게 두루 고하오. 삼가 원컨대, 여러분들은 온전한 고을에 살고 있으니 우리가 모래를 말질하는 민망함을 불쌍히 여기고 우리가 땔나무를 끄는 뜻을 생각하여, 공사(公私)의 전곡(錢穀)을 넉넉하게 하여 배고픈 군사를 같이 구제하고 화살촉과 어교(魚膠)를 많이 내어 병기를 만들게 한다면 적을 치기 위한 성심이 직접 무력에 맞서 싸우는 자와 일반일 것이오. 옛사람이 이르기를, “남에게 급한 일이 있을 때에 내가 능히 구하지 못한다면, 내게 급한 일이 있을 때엔 남이 누군들 구해 주리오.” 하였소. 이 때문에 산에 올라서 경계(庚癸)를 부르매 신숙조(申叔糶)가 양식을 주었고, 전진(戰陣)에 나아가 무기라 다되었음을 고하매 각완(卻完 춘추 시대 진(晉) 나라 대부)이 무기를 도와주었거늘 하물며 오늘날을 당하여 국적(國賊)을 멸하지 못했음이리오. 그대의 재물과 힘을 한 가지로 하여 피차를 헤아리지 말고 오랑캐가 거의 다 섬멸되려는 때에 특별히 병기와 양식의 은혜를 베풀어,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급함[倒懸之急]을 함께 풀어 준다면 심히 다행일 것이오. 서쪽 궁궐을 우러러 바라보매 눈물도 더 뿌릴 것이 없으니, 어쩌면 서로 만나서 이 뜻을 터놓고 고하리오. 종이를 대하니 목이 메어 우선 이만 줄입니다.
○ 경상도 영해 부사 한효순(韓孝純)이 장기 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등과 더불어 적을 치기를 약속하였는데, 적이 강원도로부터 와서 동쪽에서 진지를 합쳐 영해를 범하고자 하다. 효순이 군관 장기(張豈) 등을 시켜 군사를 매복시켜 맞아 치니 적이 이내 물러가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 우도의 사민들이 김성일(金誠一)이 좌도의 감사로 옮겨 제수된 것을 듣고, 어린애가 젖을 잃은 것처럼 답답하여 통문을 돌려 모여서 구공(寇公)의 길을 막으려 하다. 그 통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영남은 왜적이 침범한 뒤로 모든 성이 와해되어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오듯 장수는 썰물처럼 물러나고 수령들은 쥐처럼 숨으며, 백성과 군사는 붕궤되어 숨고 읍과 촌락이 소조(蕭條)하여 죄다 흉하고 추한 놈들의 굴혈(窟穴)이 되어 다시는 손댈 곳이 없었다. 다행히 우리 초유사 김상공(金相公)이 판탕(板蕩)한 나머지에 애통의 교서를 받들어 간담을 버티고 눈물을 뿌리며 이 적과는 한 하늘 밑에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여, 의를 선도하여 회복함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아 임지에 도착하는 날 곧 각 고을에 통문으로 타일러서 군신의 분(分)을 밝히고 복수할 의를 창도하였다. 말이 간절하매 충의가 격발되어 듣는 이는 팔을 휘두르지 않는 이가 없었고 글을 보는 이는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는 이가 없어서 같은 소리로 서로 응하고 멀든 가깝든 그림자처럼 따랐으니, 피곤하고 흩어진 천백의 군사를 거느리고 흉하고 추하며 한창 날뛰는 왜적에게 항거하여 요해지를 차단해 적의 기세를 꺾어서 국가로 하여금 거의 회복될 희망이 있게 한 것이 그 누구의 힘인가. 지금 들은즉 초유사가 좌도의 감사로 옮겨 제수되었다 하니, 이 어찌 다만 몇 고을 사민의 복 없음이리오. 아마도 또한 장수와 군사들이 마음이 이반되어 해이해지고 흩어질 형세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니, 한 삼태기에 공(功)이 무너져서 또 회복의 기회를 잃을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망했다가 다시 보존된 것은 초유공이 온 때문이요, 뒤에 거의 성공했다가 다시 무너질 것도 초유공이 가는 때문이다. 가나오나 마찬가지로 국사를 위한 것이지마는 늦고 급한 형편에는 피차의 구별이 있고 좌도나 우도가 다 같이 한 도이니, 적을 평정할 기회는 반드시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뜻은 여러분과 더불어 먼저 구공을 빌려 달라는 소를 올리어 선전관(宣傳官)의 가는 편에 부치고, 또 머물러 살려 달라는 청을 초유공에게 바치기를 생각하노니 상상컨대 여러분은 반드시 기약하지 않고도 마음으로 맞는 점이 있을 것이다. 깊이 원하노니 여러분께서 고을의 자제들을 거느리고 다음달 1일에 우리 고을 향교에 와서 모이면 매우 다행이겠다. 유학 강위로(姜渭老) 등.
○ 경상 좌감사 김성일이 거창으로부터 초계(草溪)에 이주(移駐)하기 위하여 장차 강을 건너려는데 선비 이대기(李大期) 등이 길을 막고 머물기를 청하였다. 성일이 말하기를, “임금께서 이미 명하셨으니 어찌하랴.” 하고 드디어 강을 건너 좌도로 가서 우도의 여러 선비들이 적을 친 일을 크게 칭찬하여 일일이 공을 논하여 아뢰니 뭇사람의 마음에 매우 흡족하여 좌도의 인심이 쭉 따랐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피란하여 산에 들어갔던 경상 우도 사람들이 날짜가 오래되어 양식이 떨어지자 모두 호남으로 나오다. 이와 같이 남원부가 영남의 경계에 닿아 있으므로 유민(流民)과 원주민이 서로 반반이다.
○ 금산에 머물던 적의 기병(騎兵) 4백여 명이 무주(茂朱)에 이르러 그대로 머문다 하다. 경상도 합천 진사 박이문(朴而文), 안음(安陰) 진사 정유명(鄭惟明) 등이 소를 올려 김성일을 우도 감사에 유임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고 토포사(討捕使) 한효순으로 좌도 순찰사를 삼다. 이때에 모든 지방 관원들이 모두 샛길을 다니기 때문에 큰 길에는 사람이 없었더니, 효순이 순찰사가 된 뒤에는 항상 자줏빛 도포를 입고 나팔과 피리를 울리며 방백의 위의를 성대히 하여서 각 고을에 둔치고 있는 적들이 성에 올라서 가리키며 바라보아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이로부터 길이 비로소 통하여 사람들이 그의 행차를 보고는, 다시 우리 관원의 위의를 보겠다고 하였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도와 전라도 수병(水兵)의 모든 장수들이 가덕도(嘉德島)에서 적을 치다가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이 죽고 우리 군사들이 퇴각하여 돌아오다.
9월. 김성일이 좌도로부터 강을 건너 서쪽으로 와서 다시 우도 감사가 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성주(星州)에 진을 쳤던 적에게 이미 무계(茂溪)ㆍ현풍(玄風)의 응원이 없어져서 세력이 심히 외롭고 약해졌으므로, 정인홍(鄭仁弘)이 김면(金沔)과 세력을 합쳐서 진격하기로 약속하였더니, 김준민(金浚民)은 형세가 불편하다 하여 어렵게 여기고 의심하는 빛이 있었으나 여러 사람의 의론으로는 모두 진격함이 옳다 하여 드디어 진격하기로 결정하다. 모든 군사들이 모두 모여서 각기 부대를 정돈하고 수십 리에 둘러 포진하니 군사의 형세가 심히 장하였다. 인홍과 김면이 가평(可坪)에 대진(對陣)하니 성주성(星州城)에서 5리나 가까웠다. 모든 군사가 차례로 전진하여 성문을 포위하고 육박하며 진퇴하고 충돌하며 유인하여 도전하나, 왜적이 나오지 아니하고 다만 철환(鐵丸)으로 방어하였다. 종일토록 진퇴하여도 성을 함락시킬 기구가 없어서 해가 저물자 본진으로 돌아오고, 이튿날에 다시 진격하기로 약속하였다. 김면이 배설(裴楔)을 시켜 부상현(扶桑峴)에 매복을 시켜 개령(開寧)에서 응원하러 오는 적을 방비하게 하다. 배설이 응낙하고는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찌 서생에게 절제(節制)를 받아서 그를 위해 중로에 매복한다는 말인가.” 하고 드디어 가지 않았다. 이날 밤에 성주의 적이 개령에 달려가서 급함을 알리매 개령의 적이 크게 왔는데도, 우리 군사들이 알지 못하고 이튿날에야 바야흐로 성을 지킬 기구를 준비하였다. 응원하는 적이 불시에 크게 이르러 학익진(鶴翼陣)을 치고 에워쌌으며 성중의 적 또한 성문을 열고 앞뒤에서 공격하였다. 김면이 갑자기 말에 올라 먼저 나갔으나, 우리 군사들이 기와 북을 버리고 도망해 무너지다. 인홍은 꼿꼿이 앉아 움직이지 아니하고 선비를 김면에게 보내어 진정시키기를 권하였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안장을 얹은 말을 가지고 와서 인홍에게 급히 피하기를 청하매 인홍이 부득이하여 또한 나가다. 김준민이 뒤에 있어 싸우다가 퇴각하다가 하여 모든 군사를 방위하니 이로 하여 군사들이 많이들 죽음을 면하다. 고령(高靈)의 가장(假將)손승의(孫承義)는 탄환에 맞아 죽었고 사사(射士) 이죽(李竹)은 금안장에 탄 왜장을 쏘아서 칼로 베어 죽이다. 우순찰사(右巡察使) 김성일이 합천 의병군관(義兵軍官)을 잡아와서 품(稟)하지 않고 거사한 허물을 책하여 곤장을 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 우도 의병장들이 회의한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 지방이 변란의 초기부터 적의 소굴이 되어 도륙과 약탈의 참혹함이 다른 지방보다 더욱 극심하였다. 우리 부로(父老)와 선비들은 이리저리 도망하여 다른 지방으로 피하였으므로, 간혹 선비들이 분기하여 의병을 일으키려는 자가 있어도 속수무책으로 주먹을 휘두르며 길이 탄식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군세가 크게 떨쳐서 적의 칼날이 이미 꺾이었고 각 고을의 선비들이 각기 의병을 일으켜서 기율(紀律)이 이미 성립되었고, 전일의 피해 도망하였던 자들이 들과 산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분기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런데 우리 본부(本府)에는 이 국가의 백성이 아닌 이가 없는데도 유독 아무도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이 없으니, 비록 적의 세력이 날뛰는 소치라 하더라도 임금의 원수를 어이하랴. 생각건대 여러 부형과 동지가 비록 도피한 중에 있더라도 팔을 걷어붙이고 분기하기를 생각하는 뜻은 일찍이 밥 먹고 숨쉬는 사이에도 마음에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갓 이 마음만 있고, 나와서 거사를 도모하기를 생각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숨어 엎드렸을 뿐이라면 사림의 가운데 설 수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신자의 도리에 죄를 지음이 이미 크지 않겠는가. 간절히 원하건대 부로와 선비ㆍ백성들로 가까운 곳에 피란해 있는 자들은 이달 8일에 의성(義城) 지보사(只寶寺) 앞에 모여서 상의하고 처치할 것이니, 길이 막혀 어렵다고 스스로 저상(沮喪)하지 말라. 명부(名簿) 외의 인원은 응당 간신히 도피해 있어 듣지 못할 것이니, 또한 모두 추록(追錄)하여 서로 통하고 타일러서 때맞춰 와 모이도록 할 것이다. 이 중에 응당 강서(江西)의 인사들은 필시 저 지방에 피란해 있을 것이나, 그 중에는 응당 창의(倡義)한 사람이 있을 것이므로 아직은 이쪽에 피란해 와서 있는 분에게만 고하노니, 그 가운데 혹 기록되지 않은 이는 각기 듣고 본 대로 추록하여 전하고 서로 고하라. 군부의 원수는 한 하늘 밑에 함께 살 수 없으며 문 안에 들어온 도적은 사람마다 죽일 수 있는 바이다. 만약 피란하여 곤궁한 중에 내 몸도 어찌할 겨를이 없는데 하물며 다른 일에 관계하랴 한다면, 그것은 8월의 교서를 보지 못하였는가. 무릇 신민이면 받들어 읽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gm를 것이니, 그것을 읽고도 태연하여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찌 인도(人道)로 책할 수 있겠는가. 유사(有司)가 된 이들은 와서 호응하려는 자들을 단결시키도록 하라. 9월 4일 정자 노경임(盧景任) 등.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남원 읍내의 건장한 사람 70여 명이 모여서 적을 치기를 도모하여 이응수(李應水)를 함께 추대하여 장수로 삼았고, 경내(境內)의 승려들 또한 군사를 뽑아 모아서 두인(斗仁)으로 장수를 삼다. 부사 윤안성(尹安性)이 크게 기뻐하여 곧 양식과 기계를 주어서 무주로 들여 보내었더니, 응수등이 모두 군사를 통솔할 재주가 없어서 적을 보고는 무너져 돌아오다. 그 뒤에 두 군사가 모두 적개병(敵愾兵)에 속하다.
7일. 황해도의 적이 나아가 연안(延安)을 포위하였는데, 초토사 이정암(李廷馣)과 조방장(助防將) 김대정(金大鼎) 등이 크게 부수어 쫓다. 처음에 임진강에서 패전한 뒤에 황해도 24군(郡)에 한 사람의 의사도 없고 진장(鎭將)과 수령은 모두 목숨이나 구하기를 도모하며 일도의 각 고을이 모두 분탕질과 약탈을 당하여 온 도내가 적의 소굴이 되었는데, 오직 연안부(延安府)가 남쪽에 치우쳐 있어서 적병이 이르지 않다. 정암 등이 패한 장수와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모아서 함께 죽음을 바쳐 지킬 계책을 하여 부내의 남녀를 모두 부대에 편입하고 근처의 돈과 양식을 실어다가 먹을 것을 준비하였으며, 척후병과 봉화를 신중히 배치하고 요지에 매복을 시켜 밤낮으로 변을 기다렸다. 이때에 이르러 본도에 웅거하였던 적추(賊酋)들이 군사 5, 6만여 명을 합하여 기세등등하게 쏜살같이 연안으로 달려와서 성을 포위 공격하다. 정암이 먼저 땔나무를 염주관(鹽州館) 입구에 쌓아두어 불행한 경우에 스스로 타 죽어 적에게 더럽혀지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는, 적이 성 밑에 이르자 여러 장수와 부대를 나누어 성을 지켜서 밤낮으로 순찰하였다. 군사와 백성을 위로 하고 타이르며 같이 죽기로 맹세하기를, “8도가 모두 적에 점령을 다하였고 오직 이 한 성이 국가의 소유이다. 지금 또 불행히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번 죽음으로 국가에 보답함이 여기에 있다. 하물며 능히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가 장차 어디로 가겠는가. 천백의 생명이 하루아침에 끊길 것이다.” 하니, 사졸들이 듣고 모두들 격분하여 기운을 내고 먼저 성에 오르며, 선동하여 다친 곳을 싸매고 나와 싸웠다. 그러나 적의 세력이 날로 늘어나고 구원병은 이르지 않으니, 포위를 당한 지 6일이 되매 성이 심히 외롭고 위태로워지다. 정암이 쌓아둔 땔나무 속에 들어가 누워서 종을 시켜 불을 지르게 하니, 사졸들이 듣고는 피눈물을 머금고 다시 성에 오르며 피로한 군사들이 다시 싸워 하나가 적병 천을 당해내다. 마침 동서에서 바람이 일어나매 전현룡(田見龍)ㆍ조신옥(趙信玉) 등이 섶을 불태워 성 밑으로 던지기를 무수히 계속하니, 불길은 세고 바람은 급하매 적의 군사들이 혼란하여 죽은 자가 수를 헤일 수가 없다. 남은 무리들이 본진으로 달아나 돌아가는데 추격하여 머리를 베인 것이 심히 많다.
○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鄭澈)이 행조(行朝)에서 출발하여 경기ㆍ충청도로 오면서 배가 황해도를 지나다가, 밤에 연안을 바라보매 포성과 불꽃이 천지를 뒤흔들다. 정철이 성중의 인명을 생각하고 눈물 흘리기를 마지아니하다. 9일에 장연(長淵)의 금사사(金沙寺)에 이르러 바다의 바람이 순하지 못하기 때문에 열흘을 유숙하다. 또 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이 연달아 패하여 죽었음을 듣고 뜰에다 신위를 설치하고 절하고 술잔을 올리며 통곡하다. 밤에 절간의방에서 사율(四律) 한 수(首)를 슬피 읊어서 종사관(從仕官) 정설(鄭渫)ㆍ황붕(黃鵬)에게 보내어 화답을 구하다. 그 시에,
열흘 동안 금사사에 머무르는데 / 十日金沙寺
삼 년 동안 고국을 생각한 듯 / 三秋故國心
한밤의 호수는 서늘한 기운을 뿜고 / 夜湖噴爽氣
돌아가는 기러기는 슬프게 울고 가네 / 歸雁有哀音
적이 있으니 자주 칼을 보고 / 虜在頻看鏡
친구가 죽었으매 거문고를 끊으려 하네 / 人亡欲斷琴
평생에 외우던 출사표를 / 平生出師表
난을 당해 다시 길이 읊노라 / 臨難更長吟
하다. 또 남정가(南征歌)를 지어서 충의로써 타이르다.
○ 경상도 의병장 제용감 정(濟用監正) 정인홍, 합천 군수 김면에게 교서를 내리니,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한다. 임금과 신하는 천지의 떳떳한 법이요, 충의는 인도(人道)의 대절(大節)이니 본래 있는 바이라 억지로 힘쓰기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너희 영남은 신라가 일어난 땅이므로 부로는 충효를 실천하고 자제들은 시서(詩書)를 익혔으니, 비록 탕패(蕩敗)한 나머지라도 어찌 분기하는 무리가 적으리오. 중악(中岳)에서 달에 맹세하였으매 김유신(金庾信)의 칼이 칼집에서 뛰어 나왔고, 한산(漢山)에서 적을 꺾었으매 실여(實予 신라 때 사람)의 몸에 화살이 비 오듯 하였다. 전일에 적이 처음 이르렀을 때에 창의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음을 괴이하게 여겼더니, 그것은 장신(將臣)들이 소리만 듣고도 놀라 도망한 탓이었고 사민들은 뜻밖에 당하매 불러 모으기가 쉽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이제는 각 고을에 밥 짓는 연기가 끊어졌고, 한 지방이 물결처럼 일렁거린다. 백성은 어육이 되어 다시 살아나기를 도모하지 못하고 창고는 잿더미가 되어 손을 댈 곳이 없다. 내가 서쪽으로 파천한 뒤로 이미 남도에 대하여는 절망하였더니, 어찌 뜻하였으랴. 인홍과 김면이 앞장서서 군사를 모아 결심하고 적을 쳐서 몇 달 사이에 벌써 수천의 군사를 얻었으니, 의기를 하늘이 내려다보아 열사들이 메아리처럼 응한 것이다. 마른 밥을 싸가지고 군량으로 삼으니 백성에게서 긁어모았던 관가의 창고는 텅 비었을 뿐이요, 대를 깎아 활을 만드니 무고(武庫)에 쌓았던 갑옷과 병장기는 어디에 있는고. 정암 나루에서 군사를 떨치니 도망하는 적은 넋이 빠졌고, 무계에서 칼을 휘두르니 흐르는 송장이 강에 찼구나. 관군은 어찌 그리도 잘 붕괴되며, 의사는 어찌 그리도 모두 이기는고. 이는 관군이 겁내는 것은 군법인데 군법이 엄히 시행되지 못하였고, 의병이 결합된 것은 의(義)인데 의는 퇴각을 생각지 않음이다. 처음부터 성 쌓고 참호 파는 힘을 덜어서 백성의 힘을 후히 기르고 감사나 병사ㆍ수사의 봉작을 옮겨서 선비들의 마음을 굳게 맺어야 함을 알았더라면, 적의 혼백이 벌써 동래(東萊)의 들판에서 흩어졌을 것이며 독한 칼날이 어찌 평양성에 이르렀으랴. 오직 내가 밝지 못했던 탓이니,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랴. 근일에 본도 영리(營吏) 강만택(姜萬澤)이 돌아가는 편에 한 장의 종이로 죄기(罪己)의 교서를 내려 천 리에 심정을 토로하였는데, 다만 바다와 산을 건너갈 것이니 군주(郡州)에 잘 도착되었는지가 의문이다. 이에 최원(崔遠)의 군중(軍中)을 통하여 거듭 나의 뜻을 타이르고 인하여 적정(賊情)을 탐지하노니 너희들은 나의 뜻을 살피도록 하라. 나의 소회야 다함이 있으랴. 깊은 가을 서리와 이슬에 종묘사직의 신주(神主)가 표박(漂泊)함이 민망하고 국경의 강변에 장전(帳殿 임시로 임금의 장막을 치고 거처하는 곳)의 쓸쓸함을 부치누나. 고향을 그리워함은 귀천이 다르지 않으며, 돌아가고픈 생각은 아침 저녁으로 날마다 간절하도다. 다행히 천조(天朝)에서 불쌍히 여겨 용맹한 장수들이 명을 받들고 병부시랑(兵部侍郞) 1원(員)을 보내어 광녕진(廣寧鎭)ㆍ요동진(遼東鎭) 등지의 협수(協守)ㆍ총병(總兵) 등 관(官)을 통솔하고 70만의 군마를 내었으며, 아울러 양식과 군수품을 운반하여 수륙으로 함께 나와서 지금에 이르러 왕경(王京)의 적을 소탕하였다. 이달 11일에 유격 장군(遊擊將軍) 장기공(張奇功)이 선봉을 거느리고 강을 건넜고 강절(江浙) 지방의 유격 장군 심유경(沈惟敬)이 연포수(連炮手)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황제께서 내려주신 은(銀)을 가지고 15일에 강을 건넜다. 천병(天兵)이 곧 이르게 되매 산악에 광채가 움직인다. 하늘은 개고길이 말랐으니 바로 오랑캐를 잡을 시기요, 말은 살찌고 활은 굳세니 실로 적을 죽일 기회로다. 철마(鐵馬)가 대정강(大定江)ㆍ청천강(靑川江)에 뻗쳤으며 군함은 등래(登萊)ㆍ강절에 연이었다. 미친 도적이 죄악을 쌓을 대로 쌓았으니 하늘의 주벌이 마땅히 내릴 것이다. 하물며 우리 의병 열사의 무리들이 경기ㆍ황해ㆍ충청도에서 아울러 일어나서 도처에서 적의 수급을 베고 날마다 승전을 보고하는 것은 실로 천지가 가만히 도와서 그러함이니, 이는 바로 종묘사직이 중흥할 기회로다. 너희 다사(多士)들은 다시 충성을 가다듬으라. 들은즉, 김성일은 거창에 주둔하고 한효순은 영해를 보존하였다 하므로 그들에게 좌우도 순찰사ㆍ관찰사 관직을 내리고 대소(大小) 의병장에게 아울러 차등을 두어 관직을 제수하니, 너희들은 나아가서 절제를 받고 또한 함께 계책을 정하여 적이 돌아가는 길을 맞아 그의 뒤를 습격할 것이요, 적이 둔친 곳을 엿보아 그의 병영을 야습하라. 미리 여기서 이래라 저래라 통제하기는 어려우니 기회를 보아 하는 것은 너에게 맡기노라. 손인갑(孫仁甲)이 강물에 빠져 죽었음을 애통히 여겨서 판서의 중직을 내리며, 이형(李亨)이 전사한 것을 민망히 여겨서 아들 한 사람을 벼슬시킨다. 벼슬과 상줌은 관계없이 역사에 기록함을 어찌 아끼랴. 다만 먼저 영남을 평온히 하고서야 비로소 빨리 나의 행차를 영접하라. 나의 말을 다하려 하니 눈물이 먼저 흐른다. 내가 어찌 잊으리오. 너희들은 마땅히 힘쓸지어다. 아, 예악(禮樂)의 고장에서 오랑캐의 기운을 쓸어버린다면 산이 숫돌처럼 닳고 물이 띠처럼 마를 때까지 영원히 봉작(封爵)의 영화를 누릴 것이다. 이에 교시하니 의당 잘 알 것이다. 이 교서를 받고야 어찌 힘을 다하여 적을 칠 마음이 없으리오.
○ 경상 감사가 복수할 일로 관문(關文)을 내리니, 다음과 같다.
흉한 적이 뜻대로 날뛴 후로 각처의 약탈한 인물을 일본으로 보내어 날마다 연달았소. 지금에는 경성에 있던 적이 전보다 배나 흘러 내려오면서 남자와 부녀를 묶어서 내려오는 것이 그 수를 알 수 없어 길에서 곡성이 밤낮으로 끊이지 아니하는데 읍이나 마을을 지날 적에는 반드시 소리치기를, “나는 아무 도(道) 아무 관(官) 아무의 부모ㆍ처첩ㆍ자녀다, 나는 경성 아무 동네 문무관(文武官) 아무의 부모ㆍ처첩ㆍ자녀이다, 우리 고향을 버리고 우리 부모를 떠나서 적에게 몰리어 멀리 타국으로 가니 황천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우리를 살아 돌아오도록 해주소서. 장사들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힘을 다하여 적을 점멸해 주소서.” 하오. 약탈의 참혹함은 비록 말하지 아니해도 알았지마는 지금 이 말을 들으니 간장이 찢어지려 하오. 본도의 관병ㆍ의병 모든 군사는 비록 붕괴된 뒤라도 통분하지 아니함이 없어 앞을 다투어 맞아 공격하여 기어이 한 놈도 돌려보내려 하지 아니하오. 각 도의 여러 장수들은 군민(軍民)을 격동시켜 협력하여 원수를 갚으시오. 이 일로 충청도ㆍ전라도에 관문으로 통지하오.
○ 무주(茂朱)의 적이 소굴을 불 지르고 철병하여 모두 금산(錦山)으로 돌아가매, 본도 관병ㆍ의병 여러 장사들이 무주로 달려가 점령하다. 적이 올 때에는 소리만 듣고 도망했다가 적이 퇴각하고 나면 앞장을 서서 들어가 처치하니 그런 장수와 군사를 어디다 쓰랴.
16일. 금산의 적이 나와서 옥천(沃川)으로 향하였다가 중도에 모여서 밤낮으로 다시 금산으로 들어가더니, 이튿날 밤중에 철수하여 옥천으로 향하고 인하여 성주(星州)ㆍ개령(開寧)으로 내려가다.
○ 안성(安城)의 적이 경기 의병장 홍언수(洪彦秀)를 죽이다. 언수가 그의 아들 계남(季男)과 처음부터 군사를 일으켜 여러 번 큰 공을 세워서 적을 벤 것이 매우 많다. 이로 인하여 계남은 당상관에 승진되어 경기 조방장에 제수되다. 이때에 이르러 계남은 다른 군사와 합세하기를 의론하려고 마침 다른 진(陣)에 나간 사이에 적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언수가 나와 싸우다가 패하여 죽으니 적이 언수의 송장을 가지고 가다. 계남이 일의 급함을 듣고 본진으로 달려 돌아온즉 이미 군사의 패하고 아버지가 죽었으므로, 곧 혼자 말을 타고 적진으로 달려가서 문에서 크게 외치기를, “너희들이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나도 또한 너희들에게 죽겠노라.” 하니, 적이 언수의 송장을 던져서 돌려주고는 기병(奇兵)을 내어 사면으로 둘러쌌다. 계남이 왼손으로 아버지의 송장을 안고 오른손으로 칼을 휘두르며 싸우니, 적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아버지의 송장을 진중에 두고 추격하여 몇 놈을 베니 적이 더욱 겁내어서, 마을을 분탕질하다가도 사람들이 계남의 이름만 부르면 적이 반드시 도망하다.
○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진해(鎭海)에 있는 적장 소평태(小平太)를 꾀어 잡아서 판윤 김수(金睟)에게 부쳐서 행조(行朝)에 보내다. 혹은 평소태(平小太)라고도 한다.
○ 천조에서 유격 장군 심유경을 보내어 평양에 들어가서 행장(行長) 등과 약속하기를, 평양성 밖 40리에 표(標)를 세워서 다시는 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하다. 고사(考事)에서 나옴.
○ 이때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말을 퍼뜨리기를, “평양성 적장에 심안도(沈安度)란 자가 있는데 유경과 동성(同姓)이므로 그 때문에 유경이 적진에 출입한다.” 하다. 나는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의심한다. 적장 도진병고두의홍(島津兵庫頭義弘)이 이때에 의지(義智)와 함께 평양에 있었다. 도진은 성이요, 병고두는 관직이요, 의홍은 이름이다. 뒤에 정유재란에 행장과 의홍이 하동(河東)으로부터 바로 남원으로 갈 적에 유경이 요동에 있으면서 관하(管下) 우파총(牛把摠)을 보내 말렸으나 되지 않았었는데, 그때에도 역시 행장 심안도 등의 군사라고 말하였다. 뒤에 그들이 퇴각하여 둔치고 있을 때에 의홍이 사천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사천의 적장 심안도가 심유경과 동성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성이 심이라는 말도 반드시 헛것이다. 왜적이 그의 장수를 부를 때에는 반드시 관직을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므로 순천의 적이 중납언(中納言)인 행장을 부를 때에 주락갑(注樂甲)이라 한다. 왜음(倭音)이 우리의 한자음과 다른 까닭에 중(中)을 주(注)라 하고 납(納)을 낙(樂)으로 언(言)을 갑(甲)이라 한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해 듣고 주락갑을 행장의 이름이라 여겼다. 이러므로 의심컨대 심안도라는 말은, 뒤에 왜적에게 잡혔다가 돌아온 자에게 물은즉 왜음 도(島)는 심만(沈萬)이라 하고 진(津)을 도(度)라 한다 하니, 유경과 동성이란 것은 분명히 틀린 것이다. 임진년에 순천을 침범한 적장이 36명이요, 정유년에 침범한 적장이 27명인데 심안도라는 이름은 없으니 이것은 왜음이 전해져 잘못된 까닭이다.
○ 함안 군수(咸安郡守) 유숭인(柳崇仁)을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본도 우병사로 제수하고 양사준(梁士俊)을 파직하다.
○ 경상도 안동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키다. 이때에 생원 김윤명(金允明), 진사 배용길(裵龍吉) 등이 초유사의 격문을 보고 부로들에게 고하여 이달 9일에 금법사(金法寺)에 모이기로 약속하고 앞의 사람들이 먼저 가서 기다렸더니 전 현감 권춘란(權春蘭), 전 봉사 안제(安霽), 전 검열 김용(金涌), 진사 신경립(辛敬立) 등이 모두 와서 모이다. 의(義) 자는 스스로 뻐기는 혐의가 있다 하여 향병이라고 칭하다. 기약을 정하여 13일에 또 임하현(臨河縣)에 모였는데 전 예천 현감(醴泉縣監) 이유(李愈) 또한 참여하여 임하의 모임에는 사람 수를 백으로 헤아렸다. 김윤명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배용길로 부장(副將)을 삼아서 17일에는 향교에 모여서 일을 시작하는데, 윤명은 몸이 쇠하고 처사가 둔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생원 이정백(李廷栢)이 대신하다. 전 검열 김해(金垓)가 예안(醴安)으로부터 와서 합세하기로 모의하고, 이튿날에 일직현(一直縣)에서 동맹하여 예안ㆍ안동ㆍ의성(義城)ㆍ의흥(義興)ㆍ군위(軍威)ㆍ비안(比安)을 합하여 하나의 진을 만들어 다시 김해로서 대장을 삼고 정백ㆍ용길은 부장이 되며 안동 향교를 진소(陣所)로 삼다. 신경립은 문서를 맡다. 소속된 각 고을의 남정(男丁)은 모두 관군에 들어갔으므로 군사가 1만 명이 차지 못하자, 이에 선비와 품관(品官)을 모두 징발하여 건장한 자는 군대에 속하고 늙고 약한 이는 종[奴]을 대신하여 쌀을 바치게 하니 일부(一府)에서 얻은 것이 마침내 5백여 원(員)과 쌀ㆍ콩 1천여 석이 되다. 약속하기를, “적의 머리를 베는 것으로 상공(上功)을 삼는다면 먼저 베려고 다투다가 적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우리들의 이 일은 다만 적을 죽이려는 것이니, 잘 쏘아 꼭 죽이는 것으로써 상공을 삼고 머리 베고 왼쪽 귀를 베는 것은 차공(次功)으로 하자.” 하다. 그 뒤에 김면이 합도 대장(闔道大將 전라도 의병대장)이 되고 경립이 의병 명부를 가지고 강을 건너서 충청도 황간(黃澗)으로 둘러서 거창에 도달하다. 김면이 명부를 열람해 보매 모두 유생으로 편성되어 있으니, “이야말로 참의병이로다.” 하다. 이듬해 계사년에 김해는 천병을 따라 경주에 있다가 계림(鷄林)에서 병으로 죽다. 일이 위에 알려지매 홍문관 수찬으로 증직되었고, 생원 금응훈(琴應壎)이 대신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심유경이 평양의 적진에서 나와 순안(順安)에 와서 본국이 일본과 국교를 통하여 변란이 일어난 사실을 역관(譯官) 진효남(陳孝男)에게 물으니, 유경이 적장들의 말을 믿고 들었으므로 이 물음이 있었으니, 슬프도다. 효남이 대답하기를, “일본의 대마도(對馬島)는 땅이 가까우므로 저들이 개시(開市)를 위하여 때로 혹 왕래하나, 우리나라에서는 백여 년 동안 일본에 일체 사신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일에 일본이 근년 이래로 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하여 천조에 범하려 한다는 풍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서 교린(交隣)한다 칭하고 일본에 가서 사정(事情)을 탐지한 일이 있으니, 전일에 아뢴 글 가운데 또한 진술하였습니다. 그 후로 영원히 서로 배척하고 끊어서 길이 통하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원한을 맺었습니다.” 하다. 유격(遊擊) 유경(惟敬) 이 데리고 갔던 무리가 다 나오고 다섯 사람만을 성중에 머물게 하면서 다음달 5, 6일 사이에 유격이 두 번째 입성할 것이라 하다. 유격이 곧 송 시랑(宋侍郞 응창(應昌))에게 글을 보내어 병마(兵馬)를 재촉하여 7, 8일에는 마땅히 도착하게 하고 요동의 양향(糧餉)을 운반하여 평양에 주둔하여 뒷날의 계책을 하게 하였다. 또 효남에게 이르기를, “내가 왜장과 말을 많이 하였는데 행장이 국왕을 보고자 하였다. 내가 도리에 불가하다는 뜻으로 거절하였더니 행장이 말하기를, ‘노야(老爺)의 말이 이치가 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대장부가 식언(食言)하지 아니할 터이라. 50일 안에 가정(家丁)을 보내고 나 역시 뒤이어 와서 서로 약속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니, 평양성을 우리에게 돌릴 일은 어찌할 터인가?’ 한즉, 행장이 지도를 내어 보이며, ‘조선 팔도에 평안도 또한 그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데 어찌해서 평양의 서쪽만이 천조의 지방이 되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본시 천조의 지방이므로 조사(詔使)가 올 적에 국왕이 이 땅에서 영접한다.’ 하였다. 행장이, ‘비록 천조의 지방이 아니더라도 이미 의정(議定)된 것이니 평양 서쪽은 곧 노야(老爺)에게 돌리고 마땅히 대동강으로 경계를 삼아서 서쪽은 대명(大明) 지방이 되고 동쪽에는 일본 지방으로 할 것이나 다만 이 성을 어느 군사로 지키겠는가?’ 하였다. 나는, ‘우리가 스스로 지키겠다.’ 하니, 행장이, ‘노야의 견해가 옳다. 조선 군사로 지켜서는 안 된다. 나는 노야의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경성으로 돌아가겠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왜장이 함경도에 있는 자가 두 왕자(王子)를 포로로 하고 있다 하니, 지금 통지해 타일러서 돌려보내고 포로된 사람들 또한 모두 풀어주게 하며, 각처의 왜인들은 모두 돌아가라.’ 하였더니, 행장이 말하기를, ‘관백이 나를 평안도로 보냈으니 평양성은 내가 주장하지마는, 다른 도는 내가 관장하지 못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지금 노야와 함께 관백에게 가는 것이 어떠한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조정이 나를 시켜 다만 이 성에 갔다 오라 하고, 대동강을 건너는 데는 조정의 명령이 없으니 어찌 감히 넘을 수 있겠는가.’ 한즉 행장이 생각을 한참 하더니, ‘노야의 말이 이치가 있다. 노야는 두 사람을 시켜 봉서(封書) 한 통을 써서 관백에게 보내고, 나는 열 사람을 시켜 구봉(求封 명(明)에서 관백을 봉해 주기를 구함) 문서를 가지고 노야와 함께 북영으로 가면 어떻겠는가?’ 하므로, 내가 허락하였다.” 하다. 효남이 말하기를, “왜적이 언제 평양성에서 물러갑니까?” 하니, 유격이 말하기를, “천병이 크게 오면 적이 물러갈 것이다.” 하다. 이때에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 두 왕자가 수상(首相) 김귀영(金貴榮), 판서 황정욱(黃廷彧), 승지 황혁(黃赫), 남병사(南兵使) 이영(李榮) 및 여러 조신(朝臣) 허명(許銘) 등과 그의 내권(內眷)들까지 함께 몰래 회령(會寧) 땅에 모여 있었는데, 본도의 생원 진대유(陳大猷)가 본부의 관노(官奴) 국경인(鞠景仁)과 공모하고 청정(淸正)에게 밀통하여 불시에 야습하여 모두 포로로 잡아 경성으로 들여 보냈다. 그러므로 유경이 왜장과 말하다가 끝에 왕자를 돌려 달라는 일을 언급하였던 것이다. 이영은 그 뒤에 살아와서 복주되었고, 김귀영 이하 여러 신하는 모두 귀양갔다. 황혁은 순화군의 장인이요, 허영은 임해군의 장인이다.
○ 경상 우도 감사가 정랑(正郞) 박성(朴惺)으로 모곡차사원(募穀差使員)을 삼다. 이노(李魯)가 글을 지어 열읍(列邑)에 통문하였는데 그 글에, “백 척의 나무 이미 빠졌다가 한 치의 뿌리에 생기가 돌아오고, 아홉 길의 산이 장차 이루어지려다가 한 삼태기가 모자라 큰 공이 이지러진다. 진실로 국가에 이로움이 있다면 의당 내 몸에 아까움이 없어야 하리라.” 하였다. 이러한 구절들은《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군사와 백성에게 효유(曉諭)한 글은 다음과 같다.
왕세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앙화를 내리매 섬 오랑캐가 침범하였으니, 각 고을이 붕괴되매 강회(江淮)가 보장(保障)의 험함을 잃었고 옛 서울이 함몰되매 도성 사람이 서리(黍離)의 시를 슬피 읊는다. 구묘(九廟)가 티끌을 무릅쓰고 임금의 행차가 멀리 파천하였으며, 2백 년의 예악 문물이 하루아침에 없어졌으니 예로부터 드문 병화(兵火)의 참혹함이다. 슬프다! 우리 군사와 백성들이 혹은 칼날에 걸려 피를 풀밭에 쓰러지고 혹은 부모가 잡혀가서 의탁할 바를 잃었으며, 혹은 처자가 더럽혀지고 욕을 보아 집을 보존하지 못하니 이 원수를 생각하매 어찌 한 하늘을 이고 살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뉘우치매 회복함은 기약이 없었는데 상국(上國)이 구원병을 보내어 신병(神兵)이 대동강에 모였고 영남ㆍ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맹렬한 장사가 한강 언덕에 구름 뭉치듯 하였으니, 칼날이 이르는 바에 적의 넋이 이미 빠져나갔다. 전승의 보고가 끊이지 않고 전장에서 적의 귀를 베어 바침이 연달았으며, 더구나 적의 괴수 평수길(平秀吉)이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와서 바다 위에서 주자 남은 군사들은 기운을 잃어 항복하며 혹은 거리에서 울부짖고 혹은 영동(嶺東)으로 달아나니, 너희 장사들의 힘으로 이 망해가는 적을 멸하기는 바로 벌겋게 달구어진 화롯불에 털 하나를 태우는 격이요 도끼를 갈아 버섯을 치는 격이라 할 것이다. 내가 왕명을 받고 동쪽으로 와서 국사(國事)를 권서(權署)하매 원수를 갚고자 괴롭고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창을 베고 자며 날새기를 기다리니, 이 적과는 함께 살지 아니하기를 맹세한다. 너희 군사와 백성이 누구인들 우리 열성조(列聖朝)께서 길러낸 사람이 아니겠는가. 위로는 국가의 수치를 생각하고 아래로 사삿집의 욕됨을 생각하여 분기하고 적을 섬멸할 것이 정히 이때로다. 벼슬과 상은 나에게 있으니 나는 너희에게 아끼지 않을 것이다. 아, 죽을 마음만이 있고 살려는 생각을 말아서 적개(敵愾)의 공을 함께 아뢰고 성상을 받들어 옛 도읍에 돌아와서 어서 내소(來蘇)의 희망을 위로하라.
○ 경상 좌병사 박진(朴晉)이 안강(安康)에 주둔하고 흩어진 군사를 수합하여 박의장(朴毅長)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낮에는 성 밑에 달려 돌격하여 군사의 위엄을 보이고 밤에는 산머리에다 횃불을 벌이고 포를 쏘아 놀라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경주의 적이 숨어 나오지 못하다가 얼마 안 되어 성을 비우고 밤에 도망하다. 의장이 성에 들어가서 창고의 곡식 4백여 석을 수합하고 길도 통할 수 있게 되니, 부윤 윤인함(尹仁涵)이 기계(杞溪)에 있으면서 의장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지키게 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황제가 사신 설번(薛藩)을 보내어 행조에 와서 주상을 위로하기 위하여 조서를 가지고 오다. 조서는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에게 칙유(勅諭)하노라. 그대 나라가 대대로 동번(東藩)을 지키고 평소 공순함을 바쳐서 의관(衣冠)과 문물이 낙토(樂土)라 칭해졌는데, 근간에 왜놈들이 창궐하여 크게 함부로 침략해서 왕성을 함락시키고 평양을 약탈하여 점령하매 생민이 도탄에 빠져 멀고 가까운 곳이 없이 소란해지고 국왕이 서쪽으로 바닷가에 피하여 거친 들에 거처하니, 그대가 난리를 겪은 상황을 생각하매 짐의 마음이 측은하다. 어제 급하다는 소식을 전하기에 이미 변방 장수에게 영을 내려 군사를 내어 구원하게 하고 이제 또 행인(行人 외교관) 설번을 시켜 국왕에게 이르니, 마땅히 그대 조종(祖宗)이 대대로 전해온 기업을 생각할 것이요 어찌 차마 하루아침에 가벼이 버리랴. 급히 수치를 씻고 흉악한 놈들을 제거하여 수복을 힘껏 도모하라. 다시 마땅히 계속하여 선유(宣遊)하니, 해국(該國) 문무 신민은 각각 임금에게 보답하는 마음을 굳게 하고 원수를 갚는 의리를 크게 분발하라. 짐이 이제 문무 대신(文武大臣) 2원(員)에게 명하여 요양(遼陽)의 정예한 군사 10만을 통솔하고 적을 치는 것을 도우러 가서 해국의 병마와 앞뒤로 협공(挾攻)하여 흉악한 적을 섬멸하여 남은 종자가 없기를 기하도록 하였다. 짐이 밝으신 천명(天命)을 받아서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에게 군주가 되어 있는데 방금 만국이 모두 편안하고 시해가 안정되었거늘 어리석은 이 조그맣고 하찮은 놈들이 감히 횡행하므로 다시 동남의 연해(沿海) 여러 진(鎭)에 신칙하고 아울러 유구(琉球)ㆍ섬라(暹羅) 등 나라에 선유하여 군사 10만 명을 모아 동쪽으로 일본을 쳐서 악인의 거괴(巨魁)의 목을 베어 바다 물결이 고요해지도록 하니, 벼슬과 상주는 후한 은전을 짐이 어찌 아끼랴. 대저 선대의 강토를 회복함이 이것이 대효(大孝)요, 군부(君父)의 환란에 급히 달려감이 이것이 지극한 충성이다. 해국의 군신은 본래 예의(禮義)를 아니 반드시 능히 짐의 마음을 잘 알아서 옛 강토를 빛나게 회복하여 국왕으로 하여금 개가(凱歌)를 울리며 환도하여 종묘사직을 지키게 하고, 길이 번병(藩屛)을 지켜짐이 먼 지방을 구휼하고 소국을 어루만져 기르는 뜻을 위로할 것이다. 공경할지어다. 그러므로 공경히 이를 선유하고 행인 설번을 시켜 받들고 조선에 달려가서 국왕 및 문무 신민에게 선유하노니 힘써 수복을 도모하기를 시행하라.
○ 8도 신민에게 선유하는 교서는 다음과 같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황천이 우리나라가 왜적에게 침략받은 것을 심히 불쌍하게 여겨 특별히 행인(行人) 설번을 보내어 성지(聖旨)를 선유하고 인하여 크게 군사를 보내어 적을 쳐서 우리의 생령(生靈)을 건지고, 우리의 강토를 회복시켜 주려고 기필하시었다. 그래서 힘이 1천 근의 중령을 들어 낙천근이라고 불리는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를 시켜서 남방의 정예한 화포수(火炮手)로 혼자서도 1백 명을 당해내는 자 5천 명을 거느려 선봉으로 삼고, 광녕총병관(廣寧總兵官) 양소(楊韶)는 요병(遼兵) 및 가정(家丁)ㆍ달자(㺚子)ㆍ철기(鐵騎) 3만 명을 거느리고 다음이 되며, 병부 상서(兵部尙書) 송응창(宋應昌)은 소진(蘇鎭)ㆍ산동(山東)ㆍ산서(山西)ㆍ선부(宣府) 등의 대군을 통솔하여 뒤이어 와서 육로로는 평양으로 달려가서 바로 공격하여 소탕하고 수로로는 두 패로 나누어, 수륙 모든 군사가 모두 경성에서 모여 멀리 몰아 남쪽으로 내려가기를 약속하였으니 전장(戰將)이 3백 명이요, 군사가 무릇 70만 명이다. 천병의 위엄으로 이 조그마한 오랑캐를 치는 것은 비유컨대 태산을 들어 새알을 누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아! 너희 대소 서민들은 조종의 옛 백성으로 이제 함몰되어 섬 오랑캐를 위하여 복역(服役)하고 혹은 그 부모와 처자를 잃었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아니하랴. 어찌 원수 갚을 뜻이 없으랴. 마땅히 각각 힘을 다하고 분발하여 왜적을 메어 공을 바치면 난이 평정되는 날에 공신(功臣)을 녹(錄)하여 은택이 후손에게 미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천병이 멀리 몰아 짓밟을 즈음에 반드시 옥석구분(玉石俱焚)의 근심을 면치 못할 것이니 비록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각기 힘써서 공을 바치라. 왜장 한 놈을 베는 자는 신분을 따지지 않고 가선대부에 승진시킬 것이요, 왜적의 머리 한 개를 베는 자는 공신이 되고 적중에 들어 있던 자도 왜적을 베어가지고 나오면 죄를 면할 뿐 아니라 아울러 그 공을 녹할 것이다. 모두 알라.
○ 황제의 칙서(勅書)를 반포하는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임금답지 못하여 이렇게 천고에 없던 적변을 당하여 삼경(三京)을 지키지 못하고 여기 저기 파천하며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고 생령이 어육이 되었으니 천지와 조종에게 죄를 얻음이 지극하도다. 오직 우리 성천자(聖天子)께서 생각하고 구휼하기를 자성(子姓)의 나라와 같이 보아 전후로 군사를 크게 발하여 만 리에 달려와 구원하고 은(銀) 2만여 냥을 주어 군수(軍需)를 하게 하니, 지금껏 지탱하여 한구석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은 추호도 모두 황제의 은혜로다. 이제 또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과인에게 대효를 힘쓰라 하고 신민들에게 지극한 충성을 힘쓰게 하여, 한 통의 윤음이 정녕하고 간절하여 귀에다 대고 타이름과 같을 뿐만이 아니니 다 읽기도 전에 울음소리와 눈물이 함께 나오는구나. 스스로 생각하건대 박덕한 몸이 어찌하여 이것을 천조에 얻었는고. 불행 중의 다행히 이보다 더 클 수가 없노라. 무릇 혈기 있는 자로서 이 칙유를 보는 이는 누군들 감동되고 격동되어 정성을 다하여 적을 치기로 생각하지 아니하랴. 이에 별지에 등서하여 각 도에 게시하노라. 아! 3백 60여 고을에 어찌 충의 호걸의 선비가 적으랴마는 당초에 변란이 갑작스레 일어난데다 태평을 누린 지도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진실로 방위하는 힘을 바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이 더욱 원한을 쌓았고 선비들은 분발하기를 생각하며, 적도 또한 지극히 흉악함을 저지르던 나머지 조금 쇠하여 하늘이 우리에게 앙화를 내린 데 대해 뉘우침을 성하게 볼 수 있으니, 적을 꺾어 소탕함이 정히 이 기회에 있도다. 무릇 너희 대소 인민은 비록 과인을 생각지는 아니하더라도, 홀로 우리 선왕의 남기신 덕택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비록 우리 조종이 남긴 덕택을 생각하지는 아니하더라도, 홀로 성천자의 은혜로운 뜻을 생각하여 너희 부모 형제와 처자의 원수를 갚지 않겠는가. 힘쓸지어다. 힘쓸지어다.
○ 천사(天使) 설번이 행재(行在)에 하루 동안 머물다가 돌아가면서 먼저 천조에 보고하니, 다음과 같다.
행인사(行人司) 행인직 설번이 왜적의 정상이 교활하여 걱정할 만하므로 군사를 발하여 마땅히 급히 구해야 함과 방어의 한두 가지 사의(事宜)를 아울러 진술하여 성명(聖明)께서 참고하심에 대비합니다. 전에 우리 병부(兵部)에서, 오랑캐 놈이 반란하여 서로 싸우고 왜놈의 정상이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성명께 간절히 빌어서 빨리 문무 대신을 보내어 토벌하기를 경략(經略)하여 급한 환란을 풀어줄 일로 성지를 받들었습니다. 조선이 왜놈의 침략을 당하여 국왕이 심히 급하게 청병하므로 이미 다관(多官)의 회의를 거쳐 득실을 결정하고 예부(禮部)를 시켜 번직(藩職)을 파견하여 칙서를 받들고 가서 조선 국왕에게 선유하게 하였습니다. 공경히 받들고 곧 조선에 달려가서 칙서를 열어 선유하니 해국 임금과 신하가 감동되어 울지 않는 이가 없어 모두 말하기를, “황제의 은혜가 소국을 구원함이 참으로 천지의 은혜와 같다.” 하고, 우리 군사가 오는 것을 바라는 것이 큰 가뭄에 구름 바라듯 합니다. 그 임금과 신하가 슬피 호소하는 간절한 말과, 곤궁하고 고생하는 정상을 눈으로 본 것을 근거하건대 진실로 존망이 순간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사세의 민망함은 조선에 있지 않고 우리나라의 국경에 있으며, 직(職)이 깊이 염려하는 바는 국경에 있지 않고 내지(內地)의 진동(震動)함에 있습니다. 군사를 발하여 토벌함을 어찌 잠시인들 늦출 수 있겠습니까. 직은 청컨대 반드시 닥쳐올 사세와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방어할 지방의 사의를 헤아려서 황상을 위하여 진술하겠습니다. 대저 요진(遼鎭)은 경사(京師 북경)의 팔이며 조선은 요진의 울타리요, 영평(永平)은 기보(畿輔)의 중지(重地)이며 천진(天津)은 또 경사의 문정(門庭)입니다. 2백 년 동안 복건(福建)ㆍ절강(浙江)은 항상 왜환을 만나도 요양ㆍ천진에서는 왜구가 있음을 듣지 못한 것은 조선이 병풍이 되어 가려 준 까닭입니다. 압록강에 비록 세 길이 있으나 서쪽에 가까운 두 길은 물이 얕고 강이 좁아서 말이 뛰어 건널 수 있고, 나머지 한 길은 동서의 거리가 화살 두 개의 거리에 불과하니 능히 그것을 믿고 방어하여 지키겠습니까. 만약 왜놈이 조선을 차지한다면 요양의 백성이 하룻밤도 베개를 편안히 하여 눕지 못할 것입니다. 순풍이 한 번 빠를 때에 돛대를 날리고 서쪽으로 온다면 영평ㆍ천진이 첫째로 화를 당할 것이며 경사가 진동하여 놀라지 않겠습니까. 직은 사사롭고 지나친 걱정을 견딜 수 없어서 발길 가는 곳마다 곧 상세히 묻고 널리 알아보았으며 또 사람을 시켜 바로 평양 지방에 가서 정탐하였습니다. 그 회보에 의거하건대, 모두 이르기를, 왜적들이 각기 남의 집 부녀를 겁탈하여 살림을 차리고 창고를 수선하여 군량과 마초를 많이 저장하여 오래 머물 계획을 하고, 병기를 더 제조하고 민가의 활과 화살을 수색해 모아서 싸우는 데 쓰려고 한다 하니 이것은 그 뜻이 작은 데에 있지 아니합니다. 신이 도착하는 날에 그들이 서쪽으로 와서 압록강에 열병(閱兵)을 하겠다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는데 조선의 신민들이 쩔쩔매어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다행히 유격 심유경이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단기(單騎)로 가서 말을 통하여 50일을 약속하여 그들의 침범할 기간을 늦추면서 우리 군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꾀로 저들을 속일 적에 역시 저쪽에서도 이 꾀를 가지고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습니까. 저것들이 간사하고 교활하여 한창 평양을 함락할 때에는 “조선에 길을 빌려 중국에 원수를 갚겠다.” 하더니, 지금은 ‘길을 빌려 조공(朝貢)하겠다.’ 합니다. 전일에는 중국과 대등하지 못함을 천고의 유한(遺恨)으로 삼다가 문득 또 심유경을 만나 조공을 통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순식간에 거만스럽고 욕하는 말을 하였다가 잠깐 사이에 공순한 말을 하니, 이로써 그들이 간사하여 신빙하기 어려움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또 10년 만에 한 번 공물을 바치기로 일정한 기간이 있었고, 공물을 바칠 적에 전에는 영파부(寧波府)를 거쳤고 또 귀주(貴州) 지방도 있는데 이제 와서는 조선을 끼고서 우리에게 맹약을 강요하니, 신은 생각건대 여러 겹의 번역을 거쳐서 조공하는 자는 아마도 이와 같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대로 두고 문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그 꾀를 헤아리건대, 이렇게 거짓으로 강화를 청하는 척하여 우리의 군사를 늦추려는 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혹은 강이 얼기를 기다려서 요양을 범하거나 혹은 봄을 기다려서 천진을 범할는지도 또한 알 수 없는 바입니다. 만일 이때에 빨리 큰 군사로써 임하지 아니하면 저들은 “침범하는 곳마다 우리를 감히 누가 어쩌랴.” 할 것이니, 순순하게 돛대를 돌리리라는 것을 신은 믿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조선이 거의 망하여 위태로움이 조만간에 임박해 있으나 칙서가 한 번 선포되어 그들의 충의의 마음을 고동시키고 그들의 적개(敵愾)한 기운을 진작시키매, 그 나라 사람들이 회복하기를 생각하여 왜적과는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 인심을 이용하고 정예한 군사를 주어 그들과 함께 왜적을 협공하면 왜놈을 반드시 기일을 정하여 섬멸할 수 있겠으나, 시일만 끌다가 저것들이 가난하고 궁한 백성을 불러 모으고 유리(流離)하는 자를 안정시키며 또 조선 사람들이 전쟁을 싫어하고 새 임금 있는 것을 좋아한다면 비록 1백만 군사가 있은들 되겠습니까. 혹자는,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가서 토벌하면 그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재촉하는 격이다.” 하는 이도 있으나, 직은 “토벌하면 올 것이요 토벌하지 않아도 역시 올 것인데, 토벌하면 평양의 동쪽에서 견제되므로 그들이 오는 것이 더디어 화가 작을 것이요 토벌하지 않으면 평양 밖에 함부로 날뛰므로 그들이 오는 것이 빨라 화가 클 것이니, 속히 토벌하면 우리가 조선의 힘을 빌려서 왜적을 사로잡을 것이요 더디게 토벌하면 왜적이 조선인을 거느리고서 우리를 대적할 것이다.”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신은 군사를 내어 토벌하는 것을 잠시라도 늦출 수 없다고 여기는 것 비록 대병(大兵)이 일시에 일제히 모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마땅히 연달아 군사를 내어 조선에 성세(聲勢)의 도움이 되게 하면 조금이라고 오랑캐의 넋을 빼앗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군사를 일으키는 비용으로는 군량이 막대한데 직이 조선에게 저축한 바를 물어본즉 7, 8천 명을 한 달 먹일 양식은 겨우 되고 부족한 것은 우리가 대주기를 의뢰한다 하고, 그 나라 임금과 신하들도 역시 인마(人馬)를 많이 내어서 압록강 부근에 있기를 원합니다. 평양을 수복한 뒤에는 그 나라 임금과 신하들이 또한 우리 군사들이 그 부모와 형제들을 위해 원수 갚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 양식을 즐겨 바칠 것이니, 절로 지방에 따라 양식을 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왜적이 쌓아둔 것도 있음이리까. 관전보(寬奠堡) 같은 데는 지방이 5백여 리인데 원액 관군(原額官軍)은 수효가 이미 극히 적은데다가, 지금 각영(各營)에서 조발해간 선봉(選鋒)ㆍ초마(哨馬) 및 연만(年滿), 도망친 자, 죽은 군사를 제하고 나면 관전보에 실제로 있는 영군(營軍)은 다만 3백 30여 명뿐입니다. 이미 왜를 막으려 하고 또 오랑캐를 막자니 보(堡)를 지키는 데 군사가 없을 수 없고 적을 질러 막는 데 사람이 없을 수 없으니, 왜가 만일 오게 되어 막는다면 직은 관전보 등지의 군사를 속히 더 설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북방 사람은 오랑캐를 막는 데 잘하고 남방 사람은 왜를 막는 데에 잘하니, 만일 왜와 싸운다면 남방 군사 2만 명을 쓰지 않고는 어찌 그 칼날을 꺾어 그 날랜 기운을 좌절시키겠습니까. 그런즉 남방 군사를 속히 조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장기(長技)는 말 달리고 활 쏘는 데 있고 왜의 장기는 조총(鳥銃)에 있으니, 우리 화살을 쏘는 곳에는 투구와 갑옷으로 피할 수 있지마는 조총을 쏘는 곳에는 군사와 말이 당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등패(藤牌)가 있으면 이미 몸을 가릴 수 있고 또 말도 가릴 수 있으니 등갑(藤甲)과 조총을 속히 준비해야 합니다. 신이 말한 바는 아마도 모든 신하들이 이미 말하였을 것이니 어찌 신이 누누이 진술함을 기다리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하루가 빠르면 조선이 하루에 망하는 화를 면할 것이요, 하루가 더디면 우리 영토에 하루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간절히 바라건대 성명께서 밝으신 결단을 내리시고 해부(該部 병부)에 명령하시어 담당한 모든 신하에게 의론하게 하시고 병마(兵馬)를 재촉하여 전진하게 하면 국토에 다행이요 종묘사직에 다행이겠습니다. 직은 기인(杞人)의 걱정을 견디지 못하나 날씨와 바람은 차고 중도에서 병이 나서 빨리 달려가지 못하고, 의인(義人) 설지(薛志)를 시켜 글을 가져가서 병부에 아뢰나이다.
○ 경상도 의병장 김면이 호남 방백에게 구원을 청하는 글을 내다.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것이니 의거(義擧)는 바야흐로 일하기에 급하고,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것이니[脣亡齒寒] 한 임금의 국토에 어찌 피차를 구분하리오. 이에 불에 타고 물에 빠진 위태로운 자를 구하여야 할 사세를 당하여 감히 우리를 도와 달라는 소회를 진술하나이다. 그윽히 생각하건대, 군부(君父)의 병을 급히 여김은 신하로서의 지극한 정성이요 환란을 나누는 것은 이웃에 대한 도(道)의 대의입니다. 진정(秦庭)에서 통곡함은 실로 초(楚) 나라를 보존할 마음을 가진 것이며 업(鄴)의 군사가 달려가 구원함은 조(趙) 나라가 침략을 받은 화를 구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오창(敖倉)의 곡식이 아니었으면 성고(成皐)를 보존하기 어려웠을 것이요, 진양(晉陽)의 군사가 없었더라면 한단(邯鄲)이 가장 위태로웠을 것입니다. 제(齊) 나라의 곡식이 노(魯) 나라의 배고픔을 구해야 할 것이요, 절강(浙江)의 수자리[戍]를 마땅히 회(淮)로 옮겨야 할 것입니다. 장호(張鎬)의 구원병이 만약 급히 왔더라면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어찌 수양(睢陽)을 잃었겠으며, 소하(蕭何)의 군량 공급이 넉넉하지 못하였던들 한신(韓信)과 장이(張耳)가 어찌 파촉(巴蜀)을 보존하였겠습니까. 나라의 사경(四境)은 사람의 한몸과 같으니 병을 치료하는 데 머리니 발이니 가릴 것이 없고, 난을 구하는 데 어찌 동쪽과 서쪽을 구별하리오. 우리 이남(二南 영남ㆍ호남)은 영(嶺) 밖의 견아(犬牙)요, 별은 화유(火維)의 분야이다. 거진(巨鎭)과 웅주(雄州)는 남방에서 병풍 울타리가 되고, 금성(金城)과 천부(天府)는 부강함이 동방에서 으뜸으로, 유아(儒雅)는 주(周) 나라의 추로(鄒魯)요 물산은 촉(蜀) 나라의 형주(荊州)ㆍ익주(益州)이니, 나라의 재정(財政)이 여기서 나오고 지리(地利)가 여기서 믿을 만한 것입니다. 불행히 본도(本道)에 개ㆍ돼지가 날뛰매, 금탕(金湯)이 험함을 잃어서 60고을 닭 울고 개 짖던 지방이 이제는 오랑캐의 싸움터가 되었다. 수백 년 길러진 생령이 모두 도륙의 칼날에 죽었습니다. 인가가 모두 불타니 오직 봄 제비가 숲 속에 둥지를 짓는 것을 보고, 황새와 조개가 오래 버티매 벌써 가을 기러기가 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초목도 빛을 잃고 강산이 부끄럼을 띠고 있습니다. 제 나라 70성 중에 오직 거(莒)와 즉묵(卽墨) 등 쇠잔한 고을만이 남았고, 삼천 리 검각(劍閣) 가는 길에 외로운 신하 두보(杜甫)가 슬퍼하였습니다. 나라를 걱정하다 희게 센 머리칼이 1천 줄기요, 적을 토벌할 단심(丹心)은 한 말[一斗 담이 큼을 말함]입니다. 밤중에 월(越) 나라 쓸개를 맛보매 태산(泰山)과 화산(華山)이 가슴에 버티었고, 반 년 동안 오(吳) 나라 섶에 잠자매 갑옷에 이[虱]가 생겼습니다. 오랑캐와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고 국가는 강을 건너 한구석에 있을 수 없으니, 눈물을 뿌리며 맨주먹을 떨칩니다. 처음엔 하(夏) 나라의 일려(一旅)도 없더니, 마음이 백일(白日)을 가리켜 맹세하매 거의 당 나라의 중흥(中興)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우리를 돕고자 한 덕분에 인심이 아직도 나라를 생각하여 마음에 충의가 같으니,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구름처럼 달려오고 땅은 동서가 없이 먼 데 가까운 데서 모두 호응하였습니다. 군사의 기세가 점점 떨치어 적의 머리를 많이 베었으니, 어질고 성스러운 열두 임금이 깊이 만백성에게 덕을 쌓아 문명한 소중화(小中華)는 하루아침에 오랑캐가 되지 않음을 이에 알겠습니다.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이 온전할 수 있으매 회복의 근저가 대강 성립되었습니다. 다만 한되는 것은 병화(兵火)가 휘몰아쳐서 군수가 텅 비었습니다. 천으로 만으로 쌓아둔 것이 적에게 갖다주는 물자가 되어 버렸고, 갈아두고 마련해 둔 것이 화살 잃고 화살촉 다된 한탄이 되고 말았으니, 군대는 당장의 양식이 없고 군사들은 정예로운 기계가 없습니다. 교위(校尉)가 무기(戊己)의 군대만을 거느렸으니 누가 한 나라 화살의 신(神)이라 칭하겠으며, 군사는 경계(庚癸)의 소리가 슬프니 양식의 운반을 독려하기 어렵습니다. 군비를 얻어내자니 부자에게도 이미 다 긁어냈고 쇠를 거두어들이자니 백성들에게서도 역시 모자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방법이 없어 두 손 놓고 있을 따름입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영공(令公)은 회서(淮西)의 소범(小范)이요 강좌(江左)의 이오(夷吾)이니, 만 리의 장성(長城)이 되어 명망이 이미 온 나라에 증합니다. 사방에 병영(兵營)이 많으니 걱정이 어찌 한 지방에만 치우치겠습니까. 이공(二公)이 섬(陝)을 나누기는 하였으나 한마음으로 주(周) 나라를 보좌하기는 다름이 없었습니다. 서쪽으로 회(淮)를 치고 북으로 연(燕)을 치매 성공하는 이가 있는 것이니, 현(縣)이 지경을 넘고 군(郡)이 한계를 넘었다고 간섭하지 않는 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물며 호남 전체가 온전히 보존된 것은 본도가 피폐한 것과는 다른데이겠습니까. 군량과 말먹이를 멀리 운반하는 수고도 없었고 병력이 거듭 피곤한 적도 없었으며, 어깨를 쉬고 편안히 잘 수 있도록 조금 편안하여졌으니 사기(士氣) 또한 배나 더할 것입니다. 원컨대 무의편(無衣篇 《시경(詩經)》의 편명으로, 나라를 위하여 싸움터로 나가자는 내용임)을 한 번 외어서 위엄 있고 강한 무용(武勇)을 부르신다면 창이(瘡痍)한 남은 군사가 온전한 군사에게 원조를 빌리고, 배고프고 목마른 피곤한 군사들이 든든한 배부름으로 찡그림을 펼 수 있을 것이니, 장차 사람마다 선등(先登)하는 용맹을 분발하고 군사마다 죽음을 바치는 충성을 간직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적벽(赤壁)의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날고 곤양(昆陽)의 무소와 코끼리가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요, 남쪽 하늘의 초(楚) 나라 기운이 깨끗이 소탕되고 북궐(北闕)의 요(堯)의 이마를 다시 보게 될 것을 나는 날로 바라오만, 누구와 더불어 이것을 준비하겠습니까. 슬픕니다! 촉으로 가는 잔도(棧道)에 구름이 아득하고 한궁(漢宮)에는 풀이 푸르며, 땅은 멀고 하늘은 넓은데 달빛은 속절없이 의주에 비치고 세월은 바뀌었는데 모구(旄丘)에 칡은 이미 변하였습니다. 부로(父老)들은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바라고 남녀들은 주왕(周王)의 수레바퀴를 기다리니, 신하로서 이 지경을 당하여 죽고 삶을 어이 논하겠습니까. 두견(杜鵑)을 읊으며 평강(平江)에 부쳐 있음은 진실로 부득이 함이요, 누른 감자를 던져 올출(兀朮 금 나라 대장)을 놀라게 함을 진실로 바랍니다. 제갈(諸葛)이 몸 바침을 함께 본받고, 숙(叔)ㆍ백(伯)이 귀먹은 듯함과 같게 하지 마시오. 궁금(宮禁)을 숙청하고 당 나라 종묘에 공경히 뵈었으니 이성(李晟)의 충성이 볼 만하였고, 신정(新亭)에 모여서 초수(楚囚)처럼 함께 슬퍼하니 진(晉) 나라 신하들이 한구석에 편안히 살아 있었음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22일. 전라 좌우 의병장이 무주(茂朱)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남원에 와서 진을 치다. 최(崔)는 객사 서헌(西軒)에 거처하고 임(任)은 광한루(廣寒樓)에 머물렀다. 이유의(李由義)를 경상 좌수사로 삼다. 이보다 먼저 유의가 천병계원사(天兵繼援使)로 서울에 달려가 직산(稷山)에 이르렀는데, 죽산(竹山)에서 군사가 패하고 남양(南陽)에 옮겨 주둔하여 그대로 강화를 향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명령을 받고 그 군사를 광주 판관(光州判官) 등에게 맡겨서 강화로 들여보내고, 자신은 단기(單騎)로 도로 호남으로 내려와서 이어 영남으로 향하다.
○ 임금의 급함에 달려오지 않고 용인(龍仁)에서 패군하여 퇴각한 죄를 논하여 금부도사를 보내어 이광(李洸)을 잡아가다. 이때에 이광이 순천에 있었는데 도사가 서해로부터 본도에 이르러 추적하여 체포하고 가면서 남원을 지나다. 도사가 광한루에 이르렀는데 문이 닫혀 들어갈 수 없자 용성관(龍城館)에 들어가서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하기를, “천 리 행조(行朝)에서 명령을 받고 남쪽으로 왔으니 남방 의사(義士)들이 적을 토벌하는 일을 들은 대로 곧 보고하는 것이 나의 뜻이요, 하물며 나는 임금의 계신 데서 왔으니 남도 사람들이 앞다투어 임금의 안부를 물을 것인데 어찌하여 거절하고 들이지 않는가.” 하니, 임계영(任啓英)이 곧 객사의 서헌으로 가서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들어가 도사를 만나고 이야기하고서 물러가다. 이튿날에 도사가 북쪽으로 돌아가다.
○ 전라 감사 권율이 군사 2만여 명을 거느리고 근왕(勤王)하려고 북쪽으로 달려가는데 각 고을 수령과 승장(僧將)ㆍ처영(處英) 등이 따르다.
○ 순천의 무사(武士) 강희열(姜希說)이 군사 2백여 명을 모아서 비(飛) 자로 군표(軍票)를 삼아 거느리고 남원으로 와서 적이 있는 처소로 향하다. 처음에 희열이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군사를 일으켰다가 금산(錦山)의 패전에 분하여 울면서 고향에 돌아와서 전일에 모집한 사람들을 소집하여 단결시켜 군대를 만들었는데 최경회의 의병이 뒤이어 일어나면서 합세하자고 불렀으나 응하지 않더니 이때에 이르러 양식과 기계를 준비하여 싸움터로 달려가다.
24일. 부산에 유둔(留屯)하던 적 등원랑(藤元郞)ㆍ평조신(平調信) 등이 동래ㆍ김해의 왜적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아울러 전진하여 한 무리는 노현(露峴)으로부터 한 무리는 웅천(熊川)으로부터 안민현(安民峴)을 넘어서 창원(昌原)에 범하였는데, 병사 유숭인(柳崇仁)이 관군과 의병을 거느리고 맞아 싸우니 불리하였다. 이때에 우도 몇 고을의 군사가 노현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이 불의에 달려들어 함부로 죽여 남음이 없었다. 이튿날에 숭인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또 싸워서 크게 패하다. 적 80여 명이 바로 창원에 들어가서 읍내를 분탕질하고 물러나 사화촌(沙火村)에 둔치다. 숭인이 모든 장사(將士)와 더불어 마산포(馬山浦)에 진을 치니 이튿날에 적병이 합세하여 나아가 함안(咸安)에 둔치다. 원랑과 조신 이것들은 작은 적장이니, 이번에 온 대장 중에는 또 다른 장수가 있었을 것이나 미처 전해 듣지 못하였으므로 이와 같다.《경상순영록》에서 나왔다.
○ 경상도 함창(咸昌)ㆍ당교(唐橋)의 적이 모여서 큰 진이 되어 용궁(龍宮) 등지에 횡행하면서 장차 다시 내지(內地)로 범하려 하는데, 좌감사 한효순이 안동에 있으면서 장기 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로 대장을 삼아서 만호 민정홍(閔廷鴻) 등과 각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용궁을 지키게 하고 또 안동 부사 우복룡(禹伏龍)으로 도지휘대장(都指揮大將)을 삼아서 예천 땅에 진을 치게 하며, 영천(榮川)의 향병과 춘양(春陽)의 의병들이 합세하여 나아가 치다가 크게 무너져 돌아오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 우감사 김성일이 왜적이 다시 내지에 뚫고 들어올 걱정으로 전라 감사 및 좌우 의병에게 응원을 청하다.
28일. 수병(水兵) 여러 장수들이 웅천 바다를 수색하여 왜적을 만나 싸우다가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돌아오다.
○ 전라 좌도 의병대장이 본도 병영 우후에게 전령하니, 다음과 같다.
당일에 도부(到付)한 경상 우도순찰사 관문(關文) 내에, 김해ㆍ부산의 적이 합세하여 몰아오매 여러 장수가 붕괴되어 흩어지고 병사(兵使)는 퇴각하였다. 25일에 적이 이미 창원의 병영 등지에 침입하였으니 내지에 뚫고 들어올 걱정이 조석간에 급박하였는데, 적의 세력은 치성하고 우리 군사는 적어서 당적할 수 없다. 성주(星州)에 유둔한 적이 방금 거창의 길을 엿보아 동쪽으로 충돌하고 서쪽으로 공격하는 변이 아침이 아니면 곧 저녁에 있을 것이다. 적이 바야흐로 진주(晉州)ㆍ의령(宜寧)ㆍ산음(山陰) 등지를 도모하는데 만약 여기를 지키지 못하면 적이 반드시 바로 귀경(貴境 전라도)을 범할 것이다. 사세가 위급하고 절박하니 남원 근처의 군병은 산음 등지로 순천 등지의 관군은 진주로 장수를 정하여 거느려 보내며, 귀도(貴道 전라도)의 두 의병대장이 지금 남원에 유둔하고 있다 하기에 달려와 구원할 일로 공문을 보내는 것이니 두 대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음ㆍ의령의 길에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와 싸움을 도와줄 것으로 관문하였다. 적의 세력이 치성하여 마구 몰아 북으로 범할 걱정이 조석간에 박두하였으니 각 관군은 급히 출동하여 의병과 일시에 합세하여 달려가 구원할 것이다.
○ 전 남원 참봉 변사정(邊士貞)이 본부의 부로 박계성(朴繼成)과 흩어진 군사를 모았는데, 가까운 고을의 관군이 와서 붙는 자가 매우 많아서 수십 일 안에 2천여 명을 얻고 적개(敵愾)라는 두 글자로 군표를 하다.
○ 왕명으로 전하기를, “수령과 변방 장수 중에 싸우다 죽었거나 도망한 곳에는 각도의 감사가 현재 있는 사람 중에 감당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고 결원된 곳에 임시로 임명하여 일을 보도록 한 뒤에 아뢰라.” 하다.
10월 1일. 적이 함안군(咸安郡)의 동남쪽 경계를 분탕질하고 곧 부다현(富多峴)을 넘다. 부다현은 함안ㆍ진주(晉州)의 경계로 진주ㆍ사천(泗川)ㆍ곤양(昆陽)ㆍ하동(河東)ㆍ단성(丹城)ㆍ산음(山陰)의 군사들이 여기에 매복하였더니, 적이 불의에 달려들어서 죽은 자가 심히 많고 남은 군사는 무너져 달아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2일. 적병이 소촌(召村 진주에 있는 역 이름)에 옮겨 둔치다. 본도 우감사 김성일(金誠一)이 첨정(僉正) 조종도(趙宗道)를 보내어 전라 좌우 의병 및 여러 장수에게 구원을 청하였더니 우의병장 최경회(崔慶會)가 남원(南原)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운봉(雲峯)ㆍ함양(咸陽)으로 향하고 인하여 산음ㆍ단성으로 향하다.
3일. 적병이 길을 나누어 진주로 향하는데 한 무리는 마현(馬峴)을 넘고
한 무리는 불천(佛遷)을 넘어서 바로 진양(晉陽)을 공격하다. 이튿날에 선봉 천여 기(騎)가 진주 동봉(東峯) 위에 달려왔다가 돌아가다. 병사(兵使) 유숭인(柳崇仁)이 싸움에 패하여 단기(單騎)로 달려와서, 성에 들어가 함께 지키기를 원하니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생각하기를, “병사가 성에 들어오면 이는 주장(主將)을 바꾸는 것이니, 반드시 통솔하는 방법이 어긋나서 서로 합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거절하고 들이지 않으며, “적병이 이미 어울렸으므로 성문을 엄하게 경계하는데, 만약 조금이라도 열고 닫으면 갑자기 침입할 염려가 있으니 주장은 밖에서 응원을 함이 옳습니다.” 하다. 숭인이 들어가지 못하고 도로 나오다가 성 밖에서 적을 만났는데 사천 현감 정득열(鄭得說), 가배량 권관(加背梁權管) 주대청(朱大淸) 등과 함께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곽재우(郭再禑)가 시민이 숭인을 들이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감탄하기를, “이 계책이 족히 진주성을 완전히 보존하였으니 진주 사람의 복이로다.” 하다.
6일. 적병이 나아가 진주를 포위하다. 이때에 목사의 군사 3천 7백여 명과 곤양 군수 이광악(李光岳)의 군사 1백여 명이 성중에 있어 부대를 나누어 지키다.
○ 해남 가장(海南假將)이란 전 판관 성천지(成天祗)가 본현에서 군사를 모아서 뇌진군(雷震軍)이란 석 자로 군표(軍標)를 삼고, 양식과 기계를 마련하여 근왕(勤王)하려고 북쪽으로 향하여 흥양(興陽)ㆍ낙안(樂安)ㆍ순천(順天)ㆍ구례(求禮)를 거쳐 남원을 지나가다. 이때에 관군과 의병이 동쪽으로 달리기도 하고 서쪽으로 향하기도 하면서 혹은 근왕(勤王)하겠다 칭하고, 혹은 적을 치러 가겠다 하여 칼과 창이 서로 부딪쳐 각 고을의 군사와 말이 제때에 일제히 출발하지 못하였다. 이것 때문에 천지가 남원 부사 윤안성(尹安性)을 크게 힐난하다.
○ 진주를 포위한 적이 군사를 갈라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을 하다. 전라 우의병장 최경회가 단성(丹城)에 군사를 주둔하였더니, 적병이 갑자기 들이닥쳐 장수와 군사가 놀라 무너지다. 적이 단성을 불태웠는데, 협천 가장(陜川假將) 김준민(金俊民)이 쳐서 쫓다. 아래 장계의 끝에 있다.
○ 경상 우순찰사 김성일이 또 정랑(正郞) 박성(朴惺)을 보내어 좌의병에게 응원을 청하니, 임계영(任啓英)이 남원으로부터 함양으로 향하다.
○ 진양이 포위를 당한 지 여러 날이 되도록 구원병은 이르지 않고 적은 날로 치성하다. 목사 김시민이 온갖 방법으로 계책을 내어 밤낮으로 방어하면서 항상 일심으로 죽음을 같이할 것으로써 모든 군사에게 권면하고, 몸소 밥과 장(漿)을 가지고 분주히 다니면서 배고프고 목마른 이들을 구하며 탄환이 비처럼 쏟아져도 서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때때로 눈물 흘리며 타이르기를, “온 나라가 함몰되고 남은 데가 적어서 다만 이 한 성이 나라의 명맥에 관계되는데 지금 또 불리하다면 우리 국가는 그만이다. 하물며 한 번 패하면 성중에 있는 천백의 인명이 모두 칼끝의 원귀가 될 것이니, 아! 너희 장사(將士)들은 힘을 다하여 용감하게 싸워서 죽을 각오를 하여야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하니, 군사들이 감격하여 결사적으로 싸우지 않는 이가 없다. 싸움이 오래되어 화살이 다되매 성중이 위태롭게 여겨 두려워하다. 시민이 밤에 사람을 시켜 성을 넘어 나가 달려가서 감사에게 보고하니, 감사가 군기(軍器)를 보내려 하나 보낼 만한 사람을 얻기가 어려웠다. 이에 중한 상(賞)을 걸고 영리(營吏) 하경해(河景海)를 얻어서 부탁하여, 경해가 밤을 타서 가만히 가서 성 밑에 도달하자, 문을 열고 들여서 장전(長箭) 백여 부(部)를 얻어서 뒤이어 쓰게 되니 군사들이 기운이 배나 나다.
○ 고성(固城) 의병장 최강(崔堈)ㆍ이달(李達) 등이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진주를 응원하다. 최강이 밤에 망진산(網陣山)에 올라서 군사들로 하여금 각기 4, 5개의 횃불을 들고 혹 나갔다 물러갔다 하며 북을 두드리고 고함을 치매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하니 적병이 놀라다. 성중의 군사들이 듣고는 기뻐 날뛰며, “이는 반드시 고성 의병장 최강ㆍ이달이 와서 응원하는 것이다.” 하다. 이달이 또한 군사를 거느리고 두골평(頭骨坪)에 진을 치고 마구 공격하여 베어 죽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곽재우가 심대승(沈大承)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를 응원하다. 아래 장계에 나왔다.
○ 강원도 도순찰사의 종사관 겸 소모대장(召募大將) 홍인상(洪麟祥)인데, 뒤에 이름을 이상(履祥)으로 고쳤다. 의 통문은 다음과 같다.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왜적이 가득 찼는데 백성들이 전쟁을 몰랐다가 소문만 듣고 흩어졌으며, 마침내 거가(車駕)가 파천하고 종묘는 폐허가 되었으며, 옛 도읍의 산천이 달라졌고 백 년의 문물이 모두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 이에 미치매 원통함이 뼈에 사무치도다. 다행히 하늘의 뜻이 난리를 싫어하고 인심이 한(漢)을 생각하여 창의(倡義)하는 무리가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회복의 시기를 날짜를 정하고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임금 없고 부모 없다던 중들도 오히려 의기를 분발하여 무리를 모아 몽둥이로 적을 치거늘 하물며 도포 입은 우리 선비들은 국가 교육의 은택에 오래 젖어서 임금을 섬기는 대의를 아는 자들임이랴. 서쪽 국경은 일찍 추워져 전하께서 반드시 고생스러우실 것이며, 능(陵)에는 풀이 우거져 제사가 오랫동안 끊어졌으니 이것은 신자(臣子)로서 눈물을 뿌리며 팔을 걷고서 창을 베개 삼아 적을 쳐야 할 때이다. 대저 추운 겨울을 겪어야 소나무ㆍ잣나무가 늦도록 푸르름을 알 수 있고, 결이 좋지 않은 재목을 만나야 연장이 잘 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무릇 우리 충의의 선비가 어찌 힘쓰지 아니하랴. 당직(當職)은 일찍이 제독(提督 지방의 학관(學官))의 직에 있어 외람되게 스승의 자리에 앉았으나 평시에 강론(講論)할 때 대의(大義)로써 가르치지 못하고서, 이제 난리의 때를 당하여서야 무리를 불러 모으고자 의병의 선창이 되어 강토에 요망한 기운을 맑히기를 맹세하고 회복의 큰일을 성취하려고 생각하니, 이것은 자신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아! 한강 남쪽 새재[鳥嶺] 북쪽에 왜놈의 진(陣)이 바둑판처럼 벌여 있어 민생이 어육이 되니 분탕한 즈음에 불러 모으기 실로 어려우나, 여주(驪州) 한 고을은 적의 속에 끼어 있어 동쪽으로 원주, 서쪽으로 죽산(竹山), 남쪽으로 충주(忠州), 북쪽으로 광주(廣州) 사면으로 적이 충만하여 한 지경이 쓸어 없어졌으니, 여주가 보존되지 못하면 죽산의 적을 도모할 수 없고 죽산의 적을 도모하지 못하면 경성을 수복할 수 없게 되므로, 여주 한 고을의 성패는 실로 국가 흥망이 관계된 바이다. 이것은 마땅히 밤낮으로 속을 태우고 뒤에 통곡할 바이다. 충청ㆍ전라 두 도는 겨우 완전하고 선비들이 많아 평소 부고(府庫)라고 칭하여졌으니 무릇 우리 충의의 선비들은 반드시 우리보다 먼저 의병의 깃발을 들었을 것이나 각 고을에 흩어져 있어 통일된 데가 없으니, 원컨대 통문을 돌려 모여서 날짜를 약속하고 의병을 일으켜서 중국의 군사와 호응하여 의각(犄角)의 형세를 이루어 흉한 무리를 섬멸하고 경성을 수복한다면 어찌 조정에서 그 공을 가상히 여길 뿐이랴. 그대들 조상의 혼령이 또한 모두, “내가 후손이 있구나.” 할 것이다. 당직은 지금 강원 도순찰사의 명령이다 을 받들어 이 소모 대장의 임무를 맡아서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각 고을에 군사를 모집하고 각 관에서 군량을 판출(辦出)하노니, 무릇 각 고을의 생원ㆍ진사ㆍ교생(校生)들은 맨 먼저 대의를 내세우고 모든 선비들도 또한 용략(勇略)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한 달씩 분번(分番)하여 안성에 방어진을 치고, 유사(有司)를 많이 정하여 양식과 기계를 판출하여 배에 실어 충청도 평택현(平澤縣)으로 운반하기에 마음을 다하여 각기 함께 일어나 한가지로 원수를 갚을 일이다. 이상을 충청ㆍ전라에 통문하노라.
이상(履祥)이 두 도에 돌아다니며 모집하나 두 도의 사람들이 각기 의병을 일으키므로 응하는 자가 적다.
10일. 진주 목사 김시민이 적병을 성 밑에서 크게 부수니 남은 적이 도망하여 본진으로 돌아가므로 추격하여 소촌역(召村驛)에까지 이르렀다가 돌아오다. 본도 우순찰사 김성일이 거창에 있다가 승전의 보고가 이르매 본주로 달려와서, 적의 송장이 서로 베개 삼아 깔렸고 피비린내가 땅에 가득한 것을 보고 탄복하기를 마지아니하고 이어 성에 들어가 목사가 누워 있는 방 안 탄환에 맞아 안에 누워 있었다. 으로 들어가 위로하고 감탄하기를 한참이나 하였으며,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元)으로 가목사(假牧使)를 삼아서 그 군사를 대신 거느리게 하고 즉일로 장계를 올리니, 다음과 같다.
김해ㆍ부산(釜山)에 유둔하던 적이 3만여 명을 모아 합쳐서 마구 몰아 함께 전진하여 9월 24일에 세 패로 나누어 노현(露峴)의 군사를 습격해 부수고, 27일에 또 창원부를 범하매 병사(兵使)가 다시 패하여 전후에 죽은 자가 1천 5백여 명이나 되니, 군사의 마음이 저상되고 백성들은 무너져 흩어졌으며, 적병은 승세를 타서 마치 회오리바람과 같았습니다. 본원 2일에는 나아가 함안을 함락시키고 5일에 선봉으로 말 탄 왜놈 1천여 명이 진주의 동쪽 마현(馬峴)의 북봉(北峯)에 바로 이르러 형세를 두루 보고 가로질러 달리면서 뽐내었으나, 목사는 성중에 전령하여 못 본 척하고 화살 한 개 총알 한 개를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고, 다만 성내에 잘 바라보이는 곳에 용대기(龍大旗)를 세우고 장막들을 많이 치고 성중의 노약자와 남녀를 다 모아서 모두 남자 옷을 입혀서 군세(軍勢)를 웅장하게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이날 신시에 적들이 온 길로 도로 향하자 목사가 곧 날래고 건장한 사람을 시켜서 산에 올라 바라보았는데, 적병 수만 명이 진주 동쪽 10리 되는 임연대(臨淵臺) 등지에 진을 쳤습니다. 6일 이른 아침에 적이 대탄(大灘)으로부터 일시에 마구 몰아 말을 타고 가로 달리는 놈들이, 혹은 자루가 긴 둥근 금부채를 휘두르고, 혹은 흰 바탕 누른 무늬의 금 삽선[翣翁]을 짊어졌는데 온갖 채색으로 그려서 바람을 따라 펄럭이매 광채가 번쩍거리며, 혹은 닭털로 만든 관을 쓰고, 혹은 머리를 풀어 헤친 가면을 썼으며, 혹은 뿔이 있는 금색 가면을 쓰고 각기 잡색 기(旗)를 짊어졌는데 길거나 넓은 것이 그 수효를 알 수 없었고, 혹은 푸른 일산을 받쳤거나 붉은 일산을 들고 흰 칼날이 햇빛에 번쩍거리매 살기가 하늘에 뻗치니, 무릇 기괴한 형상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세 패로 갈라 산을 덮어 내려 와서 한 패는 동문 밖 순천당산(順川堂山)에 진을 치고서 성중을 내려다보고, 또 한 패는 개경원(開慶院)으로부터 바로 동문을 지나서 봉명루(鳳鳴樓) 앞에 벌여 섰으며, 또 한 패는 향교 뒷산으로부터 바로 순천당산을 넘어서 봉명루의 왜놈들과 합하여 한 진이 되고, 기타 각 봉우리에 둘러선 왜놈은 벌처럼 개미처럼 둔취하였습니다. 왜놈 장수 6명은 모두 검정 단의(單衣)를 입고 쌍견마(雙牽馬)를 타고 창과 칼을 가진 자가 앞뒤에 끼고 섰으며, 희거나 검은 옷을 입은 여자들 역시 쌍견마를 타고서 시종하는 왜놈을 많이 거느리고 장수 왜놈의 앞에 섰으며, 걸어서 따르는 여자들 또한 그 수가 많았습니다. 순천당산에 진을 친 왜놈은 총수(銃手)가 1천여 명쯤 되는데 성중을 향하여 총알을 일제히 쏘니 뇌성이 진동하고 우박이 날리는 것 같으며, 3만여 왜놈이 일시에 크게 소리치니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중에서는 전연 동요하지 않고 고요하기가 사람이 없는 것 같다가 그놈들의 기운이 쇠하기를 기다려서 또한 소리 지르고 북을 두드리고 포를 쏘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적들이 흩어져 민가로 들어가서 문판(門板)이나 관판(棺板)을 혹은 마루판을 가져와서 성밖 백 보 밖에 벌여 세워 놓고 판목(板木) 안에 가만히 엎드려 총 쏘기를 끊이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서편의 민가에 분탕질하고 또 동편의 초가지붕을 걷으며, 혹은 촌락의 대[竹]를 베고 혹은 짚을 실어 와서 일시에 만들어 6, 7리에 뻗쳤는데 모두 푸른 장막으로 둘렀습니다. 장수 왜놈은 혹은 향교 안에 들어가고 혹은 민간의 큰 집에 거처하였습니다. 이날 소와 말에 짐을 싣고 점심부터 저물녘까지 연락을 끊이지 않고 동쪽으로부터 들어오더니, 초경(初更)에 적이 한 곳에서 호각을 불자 곳곳에서 서로 응하고 뭇 왜놈들이 소리를 높이다가 식경(食頃)에 그치고, 총 쏘는 소리는 밤새도록 끊이지 않고 막사를 지은 곳곳에 밤새도록 불을 피웠습니다. 이날 밤에 곽재우가 심대승(沈大承)을 보내 군사 2백여 명을 거느리고 향교 뒷산에 올라서 호각을 불고 횃불을 들자 성중 사람들이 또한 호각을 불어 서로 응하니, 적들이 크게 놀라 소란하여 횃불을 들고 산에 올라 밤새도록 자지 못하였습니다. 7일에 적들이 아침부터 저물 때까지 총을 쏘아 그치지 않고 또 장편전(長片箭)으로 어지럽게 성중에 쏘고 군사를 나누어 사방으로 적들이 흩어져 불태우고 약탈하니 수십 리 안에 민가가 모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먼 곳 가까운 곳의 긴 대를 죄다 꺾어서 묶거나 엮고 솔가지를 많이 모아서 진 밖에 높이 쌓았으며 큰 나무를 베어다가 끊이지 않고 실어 들이는데 어디 쓸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목사는 군사의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힘써서 밤이면 악공을 시켜 문루 위에서 피리를 불어 한가로움을 보였습니다. 적진 가운데 조선 아이들이 많은데 혹은 서울말을 하고 혹은 시골말을 하면서 매양 성에 돌아다니며 크게 외치기를, “경성이 이미 함락되었고 8도가 붕괴되었는데 새장 같은 진주성을 네가 어찌 지키랴. 속히 항복하는 것만 못하다. 오늘 저녁에 개산 아빠[介山父]가 오면 너희 장수의 세 머리를 마땅히 깃대 위에 달 것이다.” 하니, 성중 사람들이 분노하여 소리를 높여 꾸짖고자 하나 목사가 금지하여 말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날 밤에 달이 떨어진 뒤에 적이 대 엮은 것[竹編]을 가만히 동문 밖에 세웠는데 수 백보에 뻗쳤으며 그 안에 판자를 벌여 세우고 빈 섬[石]에다 흙을 담아 포개어 언덕을 만들어서 성을 내려다보아 총을 쏘고 화살을 피할 처소를 만들었는데, 대 엮은 것이 앞을 가렸으므로 우리 군사가 처음에는 몰랐다가 아침에 보니 이미 토성(土城)이 되었습니다. 8일에 적이 대나무 사닥다리[竹梯]를 많이 만들었는데 수천 개나 되었으며 또 넓은 사닥다리를 만들어 대를 심히 빽빽하게 엮었는데 넓이가 한 칸쯤이나 되었으며, 멍석을 덮어서 비늘처럼 연달아 배열하여 여러 군사가 바로 올라올 길을 만들고, 또 3층의 산대(山臺)를 만들어 윤전(輪轉)하여 성을 누를 계책을 하였습니다. 목사가 현자총통(玄字銃筒)을 세 번 쏘아서 산대 만드는 왜놈을 관통하니, 놀라고 두려워하여 물러갔습니다. 목사는 적이 솔가지를 많이 쌓은 것이 성을 넘으려 함이며 대나무 엮은 것으로 앞을 막은 것은 성에 맞닿으려 함인 줄을 추측해 알고 불 지를 도구를 미리 준비하되, 생나무가 젖어서 태우기 어려울 것을 염려하여 종이에다 화약을 싸서 묶은 마른 섶 속에 넣어서 성밖으로 던져 솔가지를 태울 준비를 하였습니다. 성 위에는 진천뢰(震天雷)ㆍ질려포(蒺藜砲)ㆍ큰 돌덩이를 설치하여 성에 붙는 적을 치려 하고 또 자루가 긴 도끼와 낫 등 물건을 준비함은 윤전산대(輪轉山臺)를 부수기 위함이요, 여장(女墻) 안에는 또 가마솥을 많이 설비하여 물을 끓여서 적에 끼얹으려 하였습니다. 낮에는 여장 안에 군사를 매복시켜 서서 내다보지 못하게 하고 풀 인형을 많이 만들어서 활에다 화살을 메기고 성 위에 나왔다 숨었다 하게 하였으며, 군사에게 엄하게 단속하여 헛되게 화살을 쏘지 말게 하고 상시에 돌을 던져 적으로 하여금 성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날 밤에 적이 대 엮은 것을 많이 만들어 점차로 성에 가까이 오고 흙을 쌓기를 점점 높이 하였으며, 두 곳의 산대는 4층을 만들고 앞에는 목판을 달아 화살과 돌을 가리면서 총 쏘는 처소를 만들었습니다. 밤 2경에 고성 가현령(假縣令) 조응도(趙凝道)와 본주 복병장 정유경(鄭惟敬)이 군사 5백여 명을 거느리고 각기 십자횃불을 가지고 남강(南江) 밖 진현(晉峴) 위에 벌여 서서 호각을 불자 성중 사람들이 구원병이 이른 것을 바라보고 곧 큰 쇠북을 울리며 호각을 불어 호응하니, 적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떠들면서 곧 각 막사에다 불을 피우고 각기 복병을 보내어 강변에 가로막고 벌여 서서 구원병을 막았습니다. 9일 새벽에 적 2천여 명이 단성으로 향하는 길에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하고 한 떼는 단계현(丹溪縣)으로 향하다가 합천 가장 김준민에게 쫓기고, 한 떼는 단성 읍내를 분탕질하다가 역시 김준민에게 쫓겼으며, 한 떼는 살천(薩川)으로 향하다가 정기룡(鄭起龍)ㆍ조경형(曺敬亨)에게 쫓겨서 해가 저물자 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대로 남아 있던 왜놈들은 총을 쏘고 화살을 발사하여 종일토록 그치지 아니하고 흙을 지고 나르는 역사를 전일에 비하여 더욱 급하게 하였습니다. 적이 산대에 올라 무수히 총을 쏘자, 성중에서는 현자총통을 세 번 쏘아 대 엮은 것을 뚫고 또 큰 목판을 뚫었으며 한 화살은 적의 가슴을 뚫어 즉사하니 그 뒤에는 적이 감히 다시 산대에 오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복병장 정유경이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진현으로부터 사천(沙遷)에 이르러 벌여 서서 열병(閱兵)하고, 또 용사 20여 명을 뽑아서 남강 밖에서 분탕질하는 적과 대[竹] 베는 놈들을 무찔렀습니다. 본진에 남아 있던 왜놈 2백여 명이 강을 건너 추격하자, 정유경이 퇴각하였습니다. 이날 저녁 때에 적이 횃불을 들고 열을 지어 왕래하면서 서로 약속하는 형상을 하였습니다. 한 아이가 달아나 신북문(新北門)에 이르니 바로 본주에서 포로가 되었던 자였습니다. 불러들여 적의 실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일 새벽에 적이 힘을 합하여 성을 공격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10일 4경 초에 각 막사에 불을 밝히고 짐을 싣고 나가 거짓으로 퇴각하는 형상을 보여 우리 군사를 태만하게 하고 그런 뒤에 불을 끄고 가만히 돌아왔습니다. 4경 중에 두 떼로 갈라서, 한 떼는 1만여 명이 동문 새 성에 육박하여 각기 긴 사닥다리를 가지고 혹은 방패를 지고 혹은 향교에 제사지내는 대그릇을 쓰며 혹은 멍석을 베어 머리를 싸고 혹은 쑥대나 엮은 풀로 관을 만들어 써서 화살과 돌을 피하고, 3층의 가면을 쓴 풀 인형을 만들어서 차례로 사닥다리에 올라 우리 군사를 속였습니다. 그런 뒤에 적이 성에 기어오르고 말 탄 왜놈 1천여 명이 뒤를 따라 돌진하면서 비 오듯이 탄환을 쏘아대고 뇌성과 같이 소리를 지르며 장수 왜놈은 말을 달려 횡행하면서 칼을 휘둘러 독전(督戰)하였습니다. 목사는 동문 북격대(北隔臺)에 있고 판관은 동문 옹성(擁城)에 있어 활 쏘는 군사를 거느리고 결사적으로 싸우는데 혹은 진천뢰와 질려포를 쏘고 혹은 큰 돌을 던지며, 혹은 불에 달군 쇠[火鐵]를 던지고 혹은 짚을 태워 어지럽게 던지며 끓는 물로 적에게 끼얹으니, 적이 물밤쇠[菱鐵]을 밟거나 활에 맞고, 돌과 화살에 맞아 죽거나 머리와 얼굴이 불에 탄 자가 수없이 많았으며, 또 진천뢰에 부딪쳐 엎어져 죽은 것이 삼[麻]처럼 쌓였습니다. 성 동쪽에서 한창 싸울 때에 또 한 떼 1만여 명이 어둠을 타고 가만히 와서 돌연히 구 북문(舊北門) 밖에 이르러 긴 사닥다리를 가지고 방패를 짊어지고 형세가 장차 뛰어들 듯하였는데, 성가퀴를 지키는 군사들이 모두 놀라 무너졌다가 전 만호 최덕량(崔德良), 목사의 군관(軍官)인 이납(李納)ㆍ윤사복(尹思復)이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싸웠습니다. 무너졌던 군사가 다시 모여 방법대로 적을 방어하기를 동문과 한결같이 하여 노약과 남녀까지도 돌을 던지고 불을 던져 성중에 기왓장 돌과 초가지붕이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한참 만에 동방이 밝으려 하자 적세가 조금 누그러지는데 목사가 왼편 이마에 탄환을 맞아 정신을 잃었습니다.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이 북격대를 대신 지키며 활 쏘는 군사를 거느리고 용맹을 떨쳐 힘껏 싸워서 쌍견마를 탄 왜장을 죽였고, 4경부터 교전하여 진사시(辰巳時)나 되자 적이 비로소 퇴군하였습니다. 두 곳 싸움터에 죽은 자가 수없이 많았는데 적들이 곧 송장을 끌고 가서 촌락에서 불 속에 태웠으므로 머리를 벤 것은 겨우 30여 개에 불과하였습니다. 적이 물러간 후에 촌락에 불태운 뼈가 곳곳에 쌓여 있고 장수 왜놈의 송장은 농에 넣어 가지고 메고 갔으며 포로가 되었던 사람과 우마를 버리고 창황히 도망해 가는 데도, 목사가 총알에 맞고 장수와 군사가 힘이 다되었으며 또 계속 응원하는 군사가 없어서 추격해 다 죽이지를 못하였으니 지극히 통분합니다. 목사는 난이 난 후에 국사에 마음을 다하여 염초(焰硝) 5백 10여 근을 미리 제조하여 두고 왜놈의 제도를 대략 모방하여 총통 70여 자루를 새로 제조하여 경내(境內)에 재간 있는 사람들을 따로 뽑아서 상시로 총 쏘기를 익혔습니다. 그 때문에 싸움에 임하여 화약을 물 쓰듯 하고 섶 속에 화약을 싸서 성 밖에 던지며 연달아 총을 쏘아 큰 적을 꺾었습니다. 대개 온 나라가 붕괴된 나머지에 한 사람도 감히 성을 지킬 계책을 못하는데, 목사만은 능히 외로운 성을 굳게 지켜서 바깥 응원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능히 큰 적을 물리쳐서 한 도를 보전할 뿐만이 아니라 또 호남을 보호하여 적으로 하여금 내지에 달려들지 못하게 하였으니, 목사의 공은 이것이 큽니다.
○ 처음에 진주가 여러 진(陣)에 급함을 고하였더니 정인홍(鄭仁弘)이 가장 김준민과 중위장(中衛將) 정방준(鄭邦俊) 등으로 하여금 스스로 정예한 사수(射手) 5백여 명을 선택하게 하여 달려 보내어 구원하다. 본월 9일에 단계에 이르니 해가 이미 뜨다. 큰 마을 하나가 시내의 동편에 있는데 앞에 대숲이 있다. 사람도 피곤하고 말도 피곤하므로 머물러 밥을 짓다. 전라 우의병대장 최경회(崔慶會)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단성에 머물러서 합천 군사와 합세하여 진주로 전진하려 하다. 단성의 피란하는 남녀들이 산에 올라서 바라보고는, “전라도 대군이 본현에 머물러 있고 또 합천 군사가 잇달아 올 것이니 다행히 잠깐이나마 죽음을 면하겠구나.” 하다. 밥 먹은 뒤에 장수와 군사들이 출발하니 짐수레가 앞에 섰다. 몇 리쯤 가자 앞서 가던 자가 뛰어와 외치기를, “많은 적이 여기 이르렀다.” 하였다. 준민이 놀라 일어나 보니 단성 청고개(靑古介)로부터 단계에 이르기 까지 산과 들의 촌락을 일시에 분탕질하여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자욱하고 포성이 땅을 진동하다. 준민 등이 불의에 이것을 당하자 사세가 심히 창황하여 몸을 날려 말에 뛰어올라 대숲 밖에 나가서 아래위로 달리며 충돌하는 즈음에 군관 윤경남(尹慶南) 등이 또한 달려와서 크게 외치기를, “두 장수가 이미 포위 속에 들었는데 너희들은 와서 구하지 않느냐.” 하다. 이에 5백여 명이 고함을 치며 함께 나가니 적이 우리 군사를 바라보고는 대숲 속으로부터 차차로 나왔는데 큰 군사의 매복이 있을까 겁내어 접전한지 얼마 안 되어 퇴각하여 시냇물을 건너다. 두 진이 상대하고 있는 곳에 화살은 비 오듯 하고 총소리는 뇌성과 같다. 적이 아직도 용감히 싸우고 퇴각하지 않다가 마침 승의장(僧義將) 신열(信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잇달아 이르매 세력이 더욱 장하여 사기(士氣)가 절로 배나 되어 일시에 어울려 공격하니 적이 드디어 퇴각하여 달아나다.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청고개에 이르니 적이 기를 버리고 산으로 달아나다. 또 서쪽으로 읍내를 바라보니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가리고 총소리는 폭죽과 같다. 정방준이 준민을 불러 말하기를, “저것은 반드시 전라도 군사가 적과 싸우는 것이니 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곧 단성으로 달려가니 엎어진 송장이 길에 서로 잇달았다. 전라 의병장은 이미 붕괴되어 물러가고 남은 적이 뒤에 떨어져서 분탕질을 하고 있다가 우리 군사가 돌진하는 것을 보고 관망하며 물러가다. 군사들이 물을 길어 창고의 불을 끄고 불에 타다 남은 쌀 6백여 석을 수합하여 관인(官人)을 불러 지키게 하고 이튿날 진양(晉陽)으로 진군하니, 성은 이미 포위가 풀려 있다. 성중 사람들이 모두 합천 군사에게 말하기를, “어제 적이 갑옷을 버리고 칼을 끌고 달아나는 자가 많더니 이제 곧 퇴각해 도망하기에 우리들 생각에, ‘아마도 모처(某處)에서 접전하는 이들이 그놈들의 예기(銳氣)를 꺾어서 그런 것이리라.’ 하였더니, 반드시 그대들이었구나.” 하다. 준민 등이 추격하여 함안까지 이르렀다가 미치지 못하고 돌아오다. 최강(崔崗)ㆍ이달(李達)이 또한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반성(班城)에 이르러 머리 20여 개를 베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왜적이 당초에 국경에 침범할 때에 크게 성세를 떠벌리고 척후병을 곳곳에 나누어 보내 우리 군사로 하여금 서로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고, 깊은 산골까지 수색한 연후에 각처의 작은 진을 철수하고 부산(釜山)으로부터 경성에 이르기까지 다만 일로(一路)에 거진(巨鎭)을 벌여 놓다. 사방으로 흩어져 죽이고 약탈하는 데 군사가 부족하므로, 경상도에서 점거한 것이 좌도에는 오직 부산ㆍ동래(東萊)ㆍ경주(慶州)ㆍ밀양(密陽)ㆍ청도(淸道)ㆍ대구(大丘)ㆍ영천(永川)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ㆍ현풍(玄風) 등 열 고을이요, 우도에는 오직 웅천(熊川)ㆍ김해(金海)ㆍ창원(昌原)ㆍ진해(鎭海)ㆍ고성(固城)ㆍ성주(星州)ㆍ금산(金山)ㆍ개령(開寧)ㆍ선산(善山)ㆍ상주(尙州)ㆍ함창(咸昌)ㆍ문경(聞慶) 등 열두 고을인데, 한 곳에 유둔한 왜놈은 적으면 수백 명을 밑돌지 아니하고 많아도 1천 명을 넘지 않거늘 오직 고성 근처에 모여 유둔한 적이 거의 수천에 가깝다. 이것으로 헤아리건대 영남의 적은 반드시 5만 명에 불과할 것이요, 그 장기(長技)는 조총ㆍ단총에 불과하여 엄습하는 외에는 다시 다른 재주가 없다. 밤이면 갔던 놈들이 도로 와 길을 점차 가득 채워서 수효가 많다는 것을 보이는데, 우리 군사는 왜적 열 놈만 보면 으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하여 적을 토벌할 뜻이 없고 나머지 6도도 그렇지 않은 데가 없거늘, 하물며 평안ㆍ경기ㆍ함경 3도의 왜놈 수효가 이 도보다 두서너 배가 되는데 우리 군사의 힘은 이 도보다 약하여 소문만 듣고는 먼저 무너져서 방어할 뜻이 없으니 온 나라가 함몰됨이 괴이할 것도 없다. 아! 통분하도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각 진에 복수하기를 타이르는 교서를 내리니, 다음과 같다.
왕세자는 이렇게 말하노라. 이 왜적과 한 하늘 밑에서 함께 살 수 없고, 만세에 잊을 수 없다. 우리 종묘사직을 폐허로 만들고 우리 승여(乘輿 임금의 행차)를 거리로 파천하게 하였으며, 우리 능을 범하고 우리 도시와 촌락을 잿더미로 만들어서, 우리 조종께서 수백 년 길러 놓은 백성을 도륙하고 닭 울고 개 짖으며,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던 강토 천 리를 하루아침에 갈대와 띠풀로 가득 차 쓸쓸하게 만들었으니, 말이 이에 미치매 문득 살기를 잊고 창을 베게삼아 밤새도록 잠 못 든다. 슬프다 ! 우리 장수와 군사들아! 누가 부모가 없으리오. 이끌고 잡고 받들고 업어서 오직 오래 살지 못할까 걱정하고, 또한 부부가 있어 죽으나 사나 함께하기로 맹세하였으며, 형제는 사랑하여 손이나 발과 같고 아들 딸 어린 것은 살펴 주는 것인데, 난리가 극도에 이르러 국가가 함몰되어 혹은 칼날에 걸리어 피가 풀밭을 적시고 혹은 포로로 잡혀 참혹함과 악독함을 당하였으며, 더럽히고 욕을 보여 인도(人道)가 땅에 떨어졌다. 지금 이 오랑캐는 나라의 원수일 뿐 아니라 너희의 사사 원수다. 복수하겠다는 일념을 밥 먹고 숨쉬는 동안인들 어찌 잊으랴. 내가 듣건대 옛말에 어버이의 원수는 날을 넘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는 마땅히 하늘을 부르짖고 땅을 두드려 통곡하면서 날을 넘기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인데 세월이 이럭저럭 지나 한 해가 또한 저물었다. 슬프다! 너희들의 마음을 나는 헤아린다. 창을 잡고 싸움에 따라 다니며 피를 뿜고 울음을 삼키어 기회를 살펴 분발하여 이적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리라. 속담에 이르기를, “새끼 가진 개는 범을 습격하고, 알을 품은 닭은 삵괭이를 친다.” 하였으니, 지극한 정이 발동하는 바에 강함과 약함이 아주 달라진다. 비겁하던 사나이도 의를 사모하면 용맹이 맹분(孟賁 옛날 중국의 용사)보다 지나치는 것이니, 이것으로써 적을 치면 누구인들 한 사람이 백 놈을 당해내지 못하랴. 사방에 둘러있는 3백 고을 중에 원한을 품은 자가 적어도 만 명을 밑돌지 않을 것이니 한 사람이 1백 명을 당하면 진실로 1백만의 강적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곰을 두들기고 표범을 잡는 장수와 뇌성처럼 무섭고 바람처럼 날랜 군사가 또 따라서 몰아줌이랴. 내가 감무(監務)의 명을 받고 편안히 처할 겨를이 없이 제군들과 함께 난을 평정하기를 원하고 이에 천병이 국토를 제압하였으니, 소탕할 것이 기약이 있다. 그러나 한 집의 원수를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스스로 손을 대지 않는다면 이것은 효자 인인(仁人)의 마음이 아니요, 예의(禮義)의 나라가 장차 오랑캐가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사람에게 크게 고하노니 너의 마음을 가다듬고 너의 기운을 떨쳐서 각자 제 원수를 갚고 사람마다 힘껏 싸워서 평행장(平行長)의 머리를 베어 음기(飮器)를 하고 또 현소(玄蘇)의 피를 가지고 흔고(釁鼓)한다면 어찌 마음에 쾌하지 않겠는가. 아! 인(仁)한 이는 어버이를 버리지 않는 것이며 의로운 이는 임금을 뒤로 하지 않는 것이니, 《춘추(春秋)》에는 백대의 법을 밝혀 원수 갚음이 위대하였다. 충성과 효도가 두 가지 길이 아니니 기특한 공을 일찍 세우라.
○ 전라 좌의병장 임계영(任啓英)의 상소는 다음과 같다.
왜적의 화가 어느 시대엔들 없었으리오마는 뜻밖에 흉하고 독한 것들이 성세(盛世)에 나왔으니 나라가 수렁에 빠진 욕은 참혹하여 차마 말할 수도 없나이다. 파천하신 행차가 지금까지 체류하였으나 한 사람도 칼날을 내밀고 적에게로 향하는 이가 없고 각 고을은 소문만 듣고 달아나서 인심이 붕괴된 것이 물이 가로 흐름과 같으니, 만약 의를 선창한 모든 신하들이 한(漢)을 생각하는 마음을 고동시켜 넘치는 내를 막아 물길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나라가 나라로 남아 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신은 멀리 바다 구석에 처하여 하늘을 깁기[補天]에 힘이 부족하여 원수 놈들과 한 하늘 밑에서 살기를 모두 부끄러워하면서도 죽을 처소를 얻지 못하여 서쪽을 바라보고 통곡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적의 화가 호남에 침입하자 의장신(義將臣) 고경명이 금산(錦山)에서 패하여 죽자, 한 도의 선비와 백성의 마음으로 흐느끼고 간담이 서늘하여 새처럼 보고 짐승처럼 숨쉬면서 적의 칼날이 짓밟는 것을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신은 그윽히 생각건대, 이때를 당하여 요행히 살 수 없으니 다같이 죽을 바에는 차라리 나라에 목숨을 바치리라 하였더니, 고을 사람 아무 아무 등이 먼저 신의 마음을 알고 의론이 서로 합하여 고을의 자제들을 권면하여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빠진 장정을 불러 모집하여 향병(鄕兵) 2백여 명을 얻었으며, 장흥(長興)의 아무 아무 등이 또한 정예한 군사 2백여 명을 모집하여 와서 신에게 소속하고 좌도를 거쳐 적의 초소로 향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다 위의 교만한 장수와 게으른 군사, 토호 백성과 비겁한 사나이들이 모두 유병(儒兵)을 오활(迕闊)하다 하여 헐뜯는 자도 있고 방해한 자도 또한 많아서 기꺼이 서로 도와주려고 하지 않으니, 군량과 무기를 사사로이 판출하기가 심히 군색하였습니다. 행하여 남원에 이르자 부사 윤안성(尹安性)이 의거를 장려하여 마음을 다해 주선하여 부중의 선비들이 자원하여 날라다 주는 자가 약간이었고 옆 고을의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호응한 연후에 양식이 부족함이 없고 병력이 차차 강화되었습니다. 전 부사 최경회 또한 경명의 흩어진 군사를 수합하여 우도로부터 나오매 신이 더불어 합세하여 장수현(長水縣)에 함께 주둔하여 혹은 기병(騎兵)으로 침략하고 혹은 달려 들어가 충돌하면서 어지러이 쏘니 무주(茂朱)의 적이 지탱하지 못하여 먼저 도망하였습니다. 신이 그들이 반드시 금산의 적과 서로 합쳐서 도망할 것을 헤아리고 부장(副將) 장윤(張潤)을 보내어 선봉으로 달려가게 하였더니 그날 밤중이 못 되어 적이 이미 도망하였고, 신이 보낸 장사(壯士)들 1백여 명이 추격하여 경계 밖으로 나가 영동(永同) 등지에까지 이르렀으나 흉적의 자취가 이미 멀어 추한 종자들을 섬멸하지 못하였으니, 실로 신들이 군사를 쓰는데 기회를 잃은 죄는 만 번 죽어도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방을 돌아보매 모두 비린내에 물들었고 홀로 이 호남이 겨우 완전히 보존되었으니, 아마도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보아서 우리가 회복할 터전을 열어준 것입니다. 신이 곧 마땅히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가서 승여를 호위할 것이나, 다만 생각건대 이 지방이 비록 서울에서 머나 군사며 말이며 부고(府庫)를 운반하는 근본이니 한 나라에 있어서 관중(觀中)과 같은 관계입니다. 그런데 지금 병사(兵使)는 군사를 끌고 멀리 갔으며 순찰사는 군사를 전부 가지고 근왕하였으므로 적이 허한 틈을 탈는지 흉한 꾀를 헤아리기가 어렵거늘, 하물며 경상도 우감사 신 김성일이 급히 글을 보내어 위급한 사정을 말하기를, “김해ㆍ부산의 적이 합세하여 멀리 몰아 이미 단성을 함락시키고 호남의 경계에 가까이 왔다.” 하기로, 신이 부득이 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 나아가서 요해지를 끼고 싸움도 하고 방어도 하여서 한편으로 영남의 응원을 하고 한편으로 호남 경계의 충돌을 방어하여 국가의 중흥을 만에 하나라도 보존하려 하나이다. 신이 매양 교서를 받들어 읽으매, 울며 피를 뿌려서 마음은 더욱 붉어지고 한 몸은 더욱 가벼우나 문전에 박두하는 왜적 때문에 서쪽으로 향하여 군부(君父)의 위급함에 달려가지 못하니 오활하고 늦춘 죄는 만 번 죽어도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다를 향하여 흐르는 물은 일만 번 굽이를 꺾어도 반드시 동쪽으로 가는 것이니 신의 몸은 비록 먼 데 있어도 마음은 왕실에 있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장차 한 지방이 염려 없는 사세를 본 연후에 호남ㆍ영남 여러 의병과 힘을 합하고 꾀를 같이하여 길에 걸리는 적을 소탕하고 경성을 수복하려는 것이 신의 망령된 계책입니다. 신은 일개 오활한 선비로 본시 재주와 책략이 부족하나 구구히 이 의거를 하는 것은 뜻이 바다를 메우려는 새와 같고 어리석기가 산을 옮기려는 사나이보다 더하여 충성의 격동된 바에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요,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돌아보지 못하는 바입니다. 호걸의 선비들로 하여금 소문을 듣고 계속해 일어나게 하여 인심을 진정시키고 적의 기운을 탄압하여, 하늘을 떠받치고 해를 목욕시켜 중흥을 도우겠다는 것이 또한 신의 망령된 계책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조금이나마 굽어 살피소서. 행재소(行在所)가 멀고 먼 데 난리로 막히고 떨어져서 간절한 정성을 아뢰지 아니할 수 없어 삼가 종사관 신(臣) 모를 보내어 소를 받들어 올리니 통곡하고 눈물이 흘러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 8도에 교서를 내려 방학(放學)하게 하다. 이보다 먼저 병술년(1586, 선조 19)년에 지방 장관 밑에 제독(提督)을 두어 부속된 향교를 순시하며 독려하여 날로 학문을 힘쓰게 하였더니, 이때에 이르러 교훈하는 관원을 모두 혁파하고 봄ㆍ가을의 석전(釋奠)을 폐하며, 유생을 몰아서 군대에 편입하고 교노(校奴)를 관노(官奴)로 삼다.
○ 태인(泰仁)의 전 주부 민여운(閔汝雲)이 향병 2백여 명을 모집하여 웅(熊) 자로써 장표(章標)를 삼고, 기계를 마련하고 양식을 마련하여 영남으로 향하다.
○ 임계영(任啓英)이 거창에 주둔하니, 최경회가 군사를 끌고 잇달아 이르러 장윤(張潤)ㆍ고득뢰(高得賚) 등을 보내어 본도 의병장 김면(金沔)과 더불어 협력하여 개령의 적을 토벌하여 베고 사로잡은 것이 많다.
○ 체찰사 정철(鄭澈)이 아산(牙山)에 배를 대었는데 전라 감사 권율이 지나는 길에 찾아가 만나서 근왕하러 간다는 뜻을 말하였더니, 정철이 말하기를, “행재소는 길이 멀어 도달하기가 쉽지 않고 또 임금의 기체가 평안하시며, 천병이 크게 이르러 군사는 많고 먹을 것은 적어 자용(資用)이 심히 군색하니, 먼 지방의 군사가 가벼이 나아가지 말 것이요 맡은 지방으로 물러가 보존하는 것이 오늘날의 상책이다.” 하다. 권율이 듣지 않고 전진하여 수원부의 독성(禿城)에 진을 치다.
○ 소모어사(召募御史) 변이중(邊以中)을 충청도ㆍ전라도에 보내어 군사를 모집하여 근왕하게 하다. 이중은 호남 사람이다. 서해를 거쳐 본도로 향하다.
○ 전라도 해남의 진사 임희진(任希進)과 영광(靈光)의 전 첨정(僉正) 심우신(沈友信) 이 각기 향병 수백 명을 뽑아서 군량과 기계를 마련하여 아울러 영남으로 달려가다. 희진은 표(彪) 자로 장표를 삼고, 우신은 의(【義】)자로 장표를 삼다. 이때 전후에 의병을 일으킨 이가 호남에 무릇 28여 장수요 8도가 모두 그러하였는데, 나머지 소소하게 스스로 모집한 장수들은 이루다 기록할 수도 없다.
○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을 익산 군수(益山郡守)로 승진시키다. 이현(梨峴)에서 승전한 보고가 올라오자 또 충청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시키고 절충 장군(折衝將軍)으로 가자하다.
○ 적괴(賊魁) 평수길(平秀吉)이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왜장들에게 말을 전하기를, “한 해가 이미 저물었는데, 겨울이 매우 차니 추위를 막을 준비를 어떻게 하는가?” 하다. 청정(淸正) 등이 답하기를, “겨울 추위는 족히 걱정할 것이 없으나 다만 잔당(殘黨)인 전라도가 항거하여 굴복하지 않으므로, 내년 봄에는 협력하여 공격할 계책을 하고 있으니 급급히 군사를 더 보내어 원조하여 주소서.” 하다.
18일. 세 개의 해가 함께 나왔다. 국가가 함몰되고 임금이 파천하였으니, 변괴가 나오는 것이 괴이할 것도 없다.
○ 함경 감사 유영립(柳永立)의 온 가족이 포로가 되었으므로 윤탁연(尹卓然)으로 대신하였더니, 그 뒤에 영립은 도망해 왔는데 그 어머니는 아직 왜적의 수중에 있었다. 영립이 충성과 효도에 다 어긋났다 하여 매[鷹]를 왜적에게 바치고 어머니를 돌려주기를 빌었더니 적이 허락하였다 하다.
○ 전라 감사 권율이 수원 독성에 있으면서 행조(行朝)에 장계하니 임금이 찼던 칼을 풀어 전하여 보내 주며 말하기를, “모든 장수 중에 명령을 받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처치하라.” 하다. 이때에 경성의 적이 호남 군사가 또 수원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군사 수만 명을 내어 길을 나누어서 침범하였다. 권율이 성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않으니 적은 오산(烏山) 등지에 세 군데 병영을 만들고 날마다 도전하였으나, 권율이 또한 응하지 않고 때때로 기병(奇兵)을 내어 매복시켰다가 쏘고 베니 적이 밤에 병영을 불태우고 도로 경성으로 들어가다. 바야흐로 적이 침범할 때에 권율이 날마다 체찰사에게 보고하여 본도에 응원병을 처하니, 정철이 전라 도사에게 급히 글을 보내기를, “흉한 적이 수원 땅에 가득하여 청회(靑回) 오산의 들판에 적진이 퍼져 있고, 독성 밑에는 날마다 싸우지 않을 때가 없다. 한 도의 주장이 바야흐로 적병의 포위 속에 있는데 사방을 돌아보아도 응원이 없으므로 날마다 3번씩이나 급히 보고하니, 본도의 관군과 의병을 성화(星火)같이 발송하여 수원성의 군사를 구하라.” 하다. 도사 최철견(崔鐵堅)과 변사정(邊士貞)ㆍ임희진 등 의병이 달려가 응원하다.
○ 평안도 묘향산의 늙은 중 휴정(休靜)이 중 1천여 명을 모집하고 유정(惟政)으로 부장(副將)을 삼아 양식과 기계를 마련하여 적을 토벌하다.
○ 진주 목사 김시민이 졸하다. 시민이 총알에 맞은 뒤로부터 그자신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더욱 국사만을 생각하여 머리를 들고 때때로 북쪽을 향하여 눈물을 흘렸는데, 총알에 맞은 데가 낫지 않아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군중에서는 적이 알까 겁내어 숨기고 발상(發喪)하지 않다. 그러나 부모의 상을 당한 것 같아서 곡하는 소리가 서로 들리었고, 1년이 넘도록 남녀들이 소찬을 먹다. 행상(行喪)이 함양(咸陽)에 이르자 조정에서 표창하여 우병사로 승진시킨 것이 알려지다. 감사의 장계로 인하여 서예원(徐禮元)으로 대신 목사를 삼다. 그 뒤에 포로가 된 사람으로 왜국에 있는 자가 우감사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왜적이 매양 진주 목사를 일컫고 또 그때의 왜장으로 우시등원랑(羽柴藤元郞)이라는 자는 수길의 종질로서 병력이 가장 강하였는데, 패하여 창원으로 도망가서 분하고 한스러움이 병이 되어 죽었다.” 하다.
○ 천조의 병부(兵部)에서 군사를 내어 조선을 구할 것을 아뢰어 청하고, 또 말값[馬價]은 2만 냥을 청하여 참장(參將) 곽몽징(郭夢徵)으로 하여금 본국의 사신 신점(申點)과 함께 조선에 가져다주다. 황제의 성지를 받드니 그 내용에, “조선이 본시 공순함을 바쳐서 우리의 속국이 되었으니, 왜적의 침략을 받고 있는데 어찌 앉아서 보랴. 요동진무관(遼東鎭撫官)을 시켜 곧 정예한 군사 2지(枝)를 보내어 응원하게 하고 인하여 은 2만 냥을 내어 그 나라에 가져가서 군사를 먹이게 하며, 대홍저사(大紅紵絲) 안팎 두 벌로 국왕을 위로하라.” 하다. 병부에서 참장 낙상지(駱尙志)를 보내어 남방 군사를 거느리고 강 언덕에 둔치다. 본국에서는 계속하여 심희수(沈喜壽)ㆍ윤근수(尹根壽) 등을 보내어 속히 요광(遼廣)에 구하여 주기를 청하느라고 행차가 길에 잇달았으나 대병(大兵)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또 정곤수(鄭崑壽)를 보내어 북경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다.
○ 적개의병장(敵愾義兵將) 변사정(邊士貞)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향하다. 이보다 먼저 사정이 단기(單騎)로 달려가 정철을 보았더니, 정철이 군과 이잠(李潛)을 내주며 부장으로 삼게 하다. 사정이 더불어 같이 돌아와서 부장으로 삼다. 이때에 이르러 행군하여 공주까지 이르렀다가 체찰사의 분부로 인하여 돌아와 옥천으로 가서 군사를 주둔하고 적을 토벌하다.
○ 충청도의 노상(老相) 심수경(沈守慶)이 의병을 일으켜 조대곤(曺大坤)으로 부장을 삼고, 건의(健義)로서 장표를 삼다. 대곤이 먼저 경상도 우병사로 있다가 탈직(奪職)되고, 김수(金睟)를 따라 행조로 가다가 충청도에 이르렀는데 수경이 만류하여 부장을 삼다. 그 뒤에 행조에서 건의장(健義將)으로 8도 의병 도대장을 삼고 인(印)과 어도(御刀)를 주다.
○ 천장(天將) 조승훈(祖承訓)ㆍ사유(史儒) 등이 평양[箕城]을 포위하여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가다. 처음에 승훈 등이 의주로부터 순안(順安)에 진군하여 적의 형세를 알지 못하고 빨리 교전하려 하였으나, 다만 군사가 적으므로 잇달아 올 구원병을 기다리다. 이때에 이르러 승훈이 군사를 4초(哨)로 나누어 군대마다 각기 우리나라 사람 1백 명을 시켜 길잡이를 삼고, 사유는 선봉장이 되어 밤에 60여 리를 행군하여 새벽에 평양에 도달하여 성문을 쳐서 부수는데 고함소리가 하늘에 뻗치고 화살과 돌이 비 오듯 하다. 적병이 거짓으로 대동문(大同門)으로 나오자 사유가 급히 성에 들어갔더니, 행장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맞아 싸워서 남김없이 마구 죽이고 사유도 거기서 죽다. 조승훈 등이 남은 군사를 수합하여 달아나 요동으로 돌아가다.
○ 강우(江右)의 사우(士友)에게 통문한 것은 다음과 같다.
슬프다! 우리의 종묘사직이 잿더미가 되고 폐허가 된 지가 지금 몇 달이며, 우리 성상께서 평안도로 파천하여 계신 지는 지금 몇 달인고. 난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 속으로 생각하기를, ‘추한 오랑캐들이 우리의 예악 문물을 더럽혔으니, 하늘이 장차 앙화내린 것을 뉘우쳐 인심을 계발해 줄 것이다.’ 하였는데, 저놈들은 이미 우리의 동족이 아니요, 또 죽이고 약탈하기를 함부로 하니 사람들이 누가 한(漢)을 생각하지 아니하리오. 요망한 기운을 소탕하여 양경(兩京 경성과 평양)을 평정함이 마땅히 오래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니, 슬프다! 사직의 신하로 능히 봉천(奉天)의 거가(車駕)를 돌아오시게 하고 간성(干城)의 장수로 능히 이(李)ㆍ곽(郭)의 충성을 나타내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자고로 변란의 때에는 반드시 세상에 대처할 인재가 있는 것인데 지금에는 유독 그렇지 못한 것은 무슨 연유인가. 슬프다! 종거(鍾簴 악기)가 땅에 던져졌고 준조(尊爼 제기)가 먼지를 뒤집어썼으니, 하늘에 오르내리는 조종의 신령이 떠돌아 어디 의탁할꼬. 원수의 적이 오히려 떨치니, 섬멸할 날이 기약이 없다. 주상께서 창을 베개 삼는 뜻이 어찌 잠깐인들 조금이라도 해이하리오. 근자에 내리신 교서를 엎드려 읽으매 끝에 이르기를, “땅의 한계는 이미 다되었는데 나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랴. 돌아가고파 하는 한 생각이 물의 흐름과 같도다.” 하셨으니, 무릇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누가 비감하여 눈물을 뿌리지 아니하랴. 인홍(仁弘) 등은 어리석은 생각에 격동되어 스스로 힘을 헤아리지 않고 창의하여 군사를 모아 회복을 도모하였으나 군사를 거느린 지 반 년에 근근이 한 구역만을 지키고, 아직도 유둔한 적을 섬멸하지 못하니, 슬프고 분함이 더욱 괴로워 마음이 타는 듯하도다. 지금 임계영(任啓英)ㆍ최경회(崔慶會) 두 사람이, “적을 토벌하는 데는 처음부터 피차의 구별이 없다.” 하고, 정예한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가까운 땅에 와서 주둔하면서 인홍 등과 더불어 성주ㆍ개령의 적을 치고자 하여 열렬한 의기가 보고 듣는 이를 감동시키니, 실로 하늘이 국가를 도와 강토를 회복할 징조로다. 다만 군량이 부족한데 판출할 계책이 없으니, 저 수천의 군사를 무엇으로 먹일꼬. 영남 50여 고을이 모두 적지 천리(赤地千里)가 되었고 오직 강우 6, 7고을이 추수가 좀 잘되었으나 관에서 새로 팔아 들인 곡식은 다만 우리 군사만 먹여도 오히려 넉넉지 못할까 염려되거늘, 하물며 호남의 군사에게 공급할 수 있으리오. 옛글에 이르기를, “양식이 부족하면 굳게 지킬 땅이 없다.” 하였으니, 양식과 물자가 계속 공급되지 못하면 비록 호남의 의병이라도 붕괴되어 흩어짐을 면치 못할 것이니, 회복을 하려는 자로서 어찌 군량을 판출하기를 생각지 않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사우들은 이미 말 타고 활 쏘는 재주에 부족하니, 시석(矢石)의 전장에 달려가서 왜놈 하나라도 쏘아서 적개의 충성을 바치려 한다면 그만이지마는 만분의 일이나마 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군량을 공급하는 일일 것이다. 엎드려 원하노니, 제군들이 동지에게 두루 타일러서 성의를 다하여 곡식을 낸다면 적은 것을 쌓아 많은 것이 되어 호남 군사의 수개월 양식을 공급하여 그들로 하여금 회복할 계책을 성취시키게 하리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임금이 욕되면 신하가 죽어야 하는 것이니, 제 몸도 족히 아끼지 못하거든 하물며 감히 그 재물을 아끼랴. 들은즉 호남의 의사들은 행재에 경비가 부족할 것을 생각하여 서로 권면하여 쌀 수만 석을 모아서 의곡(義穀)이라 이름하여 배에 싣고 수레로 운반하여 평안도로 보내 바치었으니 그 충성이 지극하다. 돌아보건대, 강우의 많은 선비들은 그 재력(財力)이 진실로 호남의 전성(全盛)함에 미치지 못하므로 비록 의곡의 장한 일은 본받지 못하지만, 감히 그 아름다운 뜻을 본받아 힘이 미치는 데에 따라서 바다에 한 방울의 물을 보태고 태산에 한 티끌을 보태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또 각 고을 중에 능히 선창하는 이가 있으면 같은 뜻으로 응하는 자가 절로 기약하지 않고도 이르는 이가 있을 것이다. 이러므로 감히 각 고을에 유사(有司)를 정하여 성명을 기록하였으니, 선창에 도가 있으면 그 지성이 귀신도 감동시키거늘 하물며 사람이리오. 하물며 의리를 아는 사람이리오. 제군은 힘쓸지어다. 정인홍 등.
○ 전라 좌의병장 임계영이 본도의 여러 의병에게 보내는 격문은 다음과 같다.
의거로 군사를 일으킴은 오로지 국가를 위하여 적을 토벌함이다. 흉하고 추한 놈들이 침범한 지 이제 이미 한 달이 넘었는데 관군이 여러 번 붕괴되어 소탕할 기약이 없다. 7도의 생령이 이미 어육이 되었고 다만 호남 한둘만이 겨우 보전함을 얻었으니, 지금 만약 기회를 잃으면 어찌 회복의 공을 성취하여 남아 있는 백성을 구하랴. 이때가 바로 의기 분발한 선비가 몸을 잊고 나라에 보답할 때이다. 우리들은 용성(龍城)으로부터 거창(居昌)에 와 주둔하여 바야흐로 영남의 여러 어진 분들과 협력하여 개령ㆍ성주 등지의 적을 치려 하나,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와 형세가 고단하고 힘이 약하여 바로 흉한 칼날을 치기가 어려워서 백가지로 생각하여도 상책을 얻지 못하고 있다. 공사(公私)가 모두 군색하여 앉아서 응원병만을 기다려도 아직까지 먼저 소리치는 장수가 이 경계에 이르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비록 반드시 까닭이 있다고야 하겠지마는 왜 그리 더딘지 또한 부끄러움이 없지 못하다. 개령의 험한 데가 지켜지지 못하면 운봉(雲峯)을 지키기 어렵고 운봉을 한번 잃으면 다시는 군사를 쓸 땅이 없을 것이니, 만일 흉한 오랑캐가 마구 몰아 빈다면 그 뒤에는 제군이 비록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가득 찬 적을 막으려 한들 피곤한 군사를 거느리고 굳센 적에게 항거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엎드려 원하노니, 제군은 각기 정예한 군사를 통솔하고 시기에 맞추어 와 응원하여 좌우의 어금니처럼 서로 의뢰하고 고기비늘처럼 잇달아 나온다면, 위엄이 미치는 곳에 적이 반드시 간담이 꺾어질 것이니 합세하여 일제히 치면 어떤 견고한 적인들 꺾지 못하리오. 비린내와 누린내를 소탕하고 씻어서 멀리 개령의 지경까지 막으면, 호남은 절로 완전하여져서 국가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의 기미가 이와 같은데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으리오. 다시 원하노니, 제군은 좋은 계책을 힘써 생각하여 후회가 있게 하지 말지어다. 임기응변은 병가(兵家)에서 귀히 여기는 바이며, 급한 데로 달려가 형세를 타는 것은 지사(志士)가 숭상하는 바이다. 만약 머뭇거리고 핑계하다가 늦어서 기회에 미치지 못하면 다만 모든 벗의 꾸짖음을 받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반드시 조정의 법이 있을 것이니, 두렵지 아니하리오.
○ 성주ㆍ개령에 점거한 적이 더욱 치성하므로 관군과 의병이 연달아 싸워 불리하다. 본도의 감사와 모든 의병장이 여러 번 체찰사에게 보고하여 간절히 구원병을 청하였더니, 정철이 운봉 현감 남간(南侃)과 구례 현감 이원춘(李元春) 등을 영장(領將)으로 삼아서 본도의 관군 5천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개령ㆍ성주의 전투를 돕게 하다. 남간 등이 해인사(海印寺)에 진군하여 영남의 여러 장수들과 협력하여 성주성을 치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왔는데 죽은 자가 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다.
○ 조정이 용만(龍灣)에 오래 체류하매, 성을 버리고 거둥한 것을 후회하니, 따라가 있는 여러 신하들이 모두 당시의 수상이던 이산해(李山海)에게 허물을 돌렸다. 이때에 산해가 강원도 평해군(平海郡)에 귀양가 있으면서 시를 지어 스스로 해명하기를, “성난 물결에 함께 빠지는 것은 자식이 달갑게 여기는 바이나, 몰래 업고 깊은 산으로 가는 것은 어떠한가. 백성들의 충의가 응당 무수하리니, 1려(旅)로 중흥함이 반드시 어려운 것만은 아니리.” 하다.
○ 영유(永柔)에서 무과를 보여서 무신 5천 명을 얻고, 또 의주에서 문무과를 함께 보여 문신 13명과 무신 6백 명을 얻다.
○ 휴정(休靜)을 가선대부로 승진시켜 팔도 승병 도총섭(八道僧兵都摠攝)을 삼고, 유정(惟政)은 절충장군으로 승진시켜 부총섭을 삼다. 적을 토벌하여 공이 많으므로 이런 승진이 있다.
11월. 경기 조방장 첨지 홍계남(洪季男)이 복수할 일로 격문을 전하니, 다음과 같다.
하늘이 돌보지 않아 난이 이와 같이 심하여 승여가 서쪽으로 파천하니, 만백성이 의탁할 데가 없도다. 눈을 들어 강산을 보매 그 누가 간장이 찢어지지 아니하랴. 이 땅에서 먹고 살고 혈기를 가진 자들은 모두 마땅히 창을 베개 삼고 모든 간고(艱苦)를 참으며 임금과 아버지를 위하여 복수해야 할 것인데, 내가 불행히 이 참혹한 처지를 당하여 흉한 칼날 아래 아버지와 형이 모두 목숨을 잃었으니, 어찌 구차스럽게 살기를 원하여 이 적들과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있겠는가. 인하여 생각건대, 원근의 선비와 백성들이 나와 같이 참혹하고 비통한 일을 당한 이가 반드시 백이나 천으로 헤아리는 정도에만 그치지 아니할 것이므로 이에 여러 장사들을 모집하여 한 군대를 만들어 복수하는 군사[復讐之軍]라고 이름 하여 부형의 깊은 원수를 갚으려 하는데, 제군들은 어떻다 하겠는지 모르겠다. 그대의 아버지ㆍ형ㆍ아내ㆍ자식이 참살당하여 해골이 들판에 드러나서 원흔이 의탁할 데 없이 황천이 아득한데, 우리가 홀로 편안히 물러나서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원수를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황천에 혼령이 있건대 감히 내가 아들이 있고 아우가 있다 하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털끝이 쭈뼛하다. 제군들이 만약 이 말을 옳다고 한다면, 부형과 처자의 원수가 있는 이들은 마땅히 각기 징발하고 모집하여 무기를 준비하여 날짜를 약속하고 발정(發程)하여 종천(終天)의 원통함을 조금 풀어서 《춘추》의 의를 저버리지 아니함이 어떠하겠는가. 이상을 8도에 통문함.
○ 통문은 다음과 같다.
때를 불행히 만나서 가화(家禍)가 망극한데 불초한 고자(孤子 아버지가 죽은 상주의 자칭)는 초토(草土 상중에 있다는 뜻)에 병들어 아직도 이 적과 한 하늘을 이고 있었더니, 이제 첨지 홍계남(洪季男)이 먼저 대의로 주창하여 여러 도에 전해 타일러서 원통함을 참고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같이 적을 쳐서 원수 갚을 일을 도모하니, 사람의 마음은 같은 바이거늘 누가 흥기하지 아니하리오. 조완도(趙完堵) 군은 아사(亞使) 조헌(趙憲)의 아들이라 반드시 장차 아버지의 군사를 수습하여 호서에서 깃발을 들 것이다. 고자는 비록 못났으나 친상(親喪)이 이미 땅 속에 들어갔으니 이 몸은 죽어도 또한 유감이 없으므로 애통함을 무릅쓰고 병든 몸을 붙들고 본도의 동지 제군들과 군사와 기계를 모집하여 북으로 가서 적에게 죽을 계책을 하려 하노니, 엎드려 생각하건대, 여러분도 역시 즐겨 들을 바일 것이다. 슬프다! 구차히 살아 이에 이르매 윤기(倫紀)가 멸하였다. 다만 인품이 미천하고 힘이 약하여 일을 선창하지 못함이 한이더니, 홍공(洪公)이 이미 선창하였는데 고자 등이 또 손을 소매 속에 넣고서 따라 일어나지 않고 늙어서 방구석에서 죽는다면 장차 어찌 선인(先人)을 지하에서 뵈오리오. 홍공은 명성과 위엄이 이미 드러나서 그를 빌려 일할 만하고, 태인(泰仁)ㆍ진원(珍原)ㆍ장성(長城)의 3사군(使君 지방의 수령)이 또한 종천(終天)의 원통함을 품어서 이 적과 함께 살지 않기를 맹세하였으며, 도체찰상공(都體察相公)이 군사를 합쳐 원수 갚을 것을 허락하여 법규로써 구속하지 않기로 하였고, 군량과 무기도 뒷날의 걱정이 없으니, 다만 제공이 호응하느냐의 여하에 달려 있다. 아! 호남 사람이라야만 일을 같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생각하건대 서울에서 남장으로 적을 피해온 사람인들 어찌 부자 형제의 원수가 없겠는가! 비록 적의 칼날에는 요행히 면하였으나 풍상을 겪어 고생으로 부모를 잃은 이도 또한 이 적을 잊지 못하리라. 부모의 원수와는 한 하늘 밑에 살지 않으며, 형제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하지 않으며, 벗의 원수는 칼을 돌리지 않는다는 의리를 거듭 생각하라. 망친(亡親)께서 추성(秋城)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에 남방의 제공이 국사에 같이 죽기로 기약하여 향을 태우고 하늘에 맹세하여 대장으로 추대하였을 때에는 진실로 형제의 의가 있었으니, 불행히 공업(功業)을 마치지 못하였으나 제공이 어찌 차마 길가는 사람을 보는 것같이 하겠는가. 당일에 부하로 있던 무사들은 다 이미 의병으로 달려갔을 것이나 혹시 일로써 집에 있거나 혹시 진터에 나누어 수자리하는 자들은, 원컨대 고자를 불초하다고 하지 말고 추성에서 피를 마시며 맹세하던 것을 생각하여 큰일을 같이 성취시킴이 어떠하오. 제공들이 만약 가하다고 생각하거든, 엎드려 비노니 일제히 광주(光州)에 모여서 면대하여 맹세와 약속을 맺고 출병할 기일을 정하기를 지극히 비나이다. 월일에 전 임피 현감(臨陂縣監) 고종후(高從厚).
후록(後錄) 1. 비록 원수 갚는 데 뜻이 있어도 병들고 약하여 능히 종사하지 못할 자는 무기로 서로 부조하든지 혹은 건장한 종을 대신 보내든지 혹은 쌀과 베를 내든지 혹은 전마(戰馬)나 짐 싣는 말을 내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할 것이니, 하천(下賤)ㆍ빈궁(貧窮)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비록 한 되의 쌀 한 치의 쇠라도 모두 서로 부조함이 가하다. 아! 정위(精衛)가 바다를 메우고 한 삼태기로 산을 만드나니, 다만 그 정성에 있지 많은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1. 한갓 피난하여 온 사람으로서 앞장서서 맨손으로 서로 도울 만한 것이 없는 이는 혹은 자신이 군중에 따르든지 혹은 군량을 모집하되, 수수방관하지 말고 한 팔의 힘이라도 같이 들어줌이 어떠하오.
○ 전라 좌의병장 임계영이 거창으로부터 합천 해인사로 진을 옮겨서 영남 의병장 정인홍과 협력하여 성주의 적을 쳤다. 자세한 것은 계사년 5월 조에 나타나 있다. 최경회는 그대로 거창에 머물러서 김면과 개령에서 같이 일하다.
○ 심유경(沈惟敬)이 중국 조정에 갔다 와서 다시 평양의 적진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가 가지고 간 병부의 칙서에 중국 군사가 와서 구원한다는 말이 있다.
○ 복수 의병장 전 현령 고종후가 한 것은 다음과 같다.
제주(濟州)ㆍ정의(旌義)ㆍ대정(大靜) 3고을, 고성(高姓)ㆍ양성(梁姓)ㆍ문성(文姓) 3가 문호의 모든 어른에게 고하나이다. 옛적 태고 때에 인물이 생기기 전인 시초에 하늘이 세 신을 한라산 밑에 내려 보내시건대 고씨ㆍ양씨ㆍ부(夫)씨요, 또 아름다운 여인과 망아지ㆍ송아지의 종자를 함께 주어 한 지방에 터를 여는 조상이 되었으니, 이제에 이르러 인구의 번성함과 말을 많이 길러냄이 대개 세 신인의 덕택이 아님이 없습니다. 그 후세에 자손이 혹은 바다에 떠서 이리저리 옮겨 여러 곳에 흩어져 사니, 세상에서 이른바 제주 고씨, 제주 양씨는 모두 그 후손입니다. 고자의 선대도 고려 말기에 장흥(長興)의 고씨가 되었고, 부성(夫姓)의 후예는 지금에 문씨가 되어 처음의 부씨는 세상에 알려진 이가 없습니다. 지금 비록 분파(分派)가 되고 세계(世系)가 멀어서 경사와 조문에 통하지 않으나, 최초에 세 신인이 탄생한 상서와 형제의 의리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이목을 비추어 세상에서 말하는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게 칭도하는데, 하물며 그 자손이 된 자들이야 어찌 차마 그 옛날을 생각지 아니하고 원수 갚는 사람을 대번에 길가는 사람처럼 보겠습니까. 근일에 망친이 적이 경성을 범하고 7도가 붕괴된 초기에 먼저 의병을 선창하였는데, 몸이 흉한 칼날에 죽어 하루에 부자(父子)가 국사에 함께 죽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슬퍼하고 애석히 여겨 표장과 증직을 더하고 길 가던 사람도 듣고는 절로 눈물이 흐르거늘, 하물며 우리 한 뿌리에서 나온 사람이야 어찌 깊이 마음에 감동되지 않겠습니까. 불초한 고자는 비록 지혜와 재주가 얕고 짧아서 족히 망부(亡父)의 일을 이을 만하지는 못하나, 종천의 원통함을 씻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감히 사노(寺奴)의 군사를 거느리고 복수의 싸움을 하려 하나 본도에는 공사(公私)간에 파멸되어 군기와 전마(戰馬)를 마련할 도리가 없습니다. 생각건대 귀주(貴州) 3고을에는 물력(物力)이 홀로 완전합니다. 이에 격문을 가지고 사노와 대소 신민에 타이르는 동시에, 다시 생각한즉 동성(同姓)의 친함은 만세에 잊지 못할 의가 있으며 양성ㆍ문성 두 집도 또한 그 처음에 함께 생겼으니 한마디 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간담을 헤쳐 고하니, 소문을 듣고 의를 사모하기 바랍니다. 바라건대 3성(姓) 여러 어른들은 개연히 탄식하고 함께 불쌍히 여기시어 그 재력에 따라서 혹은 전마를 내고 혹은 힘을 합해 서로 부조하여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하여서, 위로는 하늘에 오르내리는 선조의 뜻을 맞추고 아래로는 고자 한 집의 죽은 이와 산 이가 바라는 바를 위로해 주심이 어떠하오. 정은 넘치고 말은 움츠러져 여쭐 바를 모르겠나이다. 《정기록(正氣錄)》에서 나옴.
○ 사노 의병장(寺奴義兵將) 전 현령 고종후가 운운한 것은 다음과 같다.
삼가 여러 고을 의병청 제공과 고을 안의 여러 군자에게 고하나이다. 고자는 저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바야흐로 첨지 홍계남, 조아사의 아들 완도와 더불어 함께 복수할 계책을 도모하던 차에 도체찰 상공께서 또 사노장(寺奴將)으로 임명하셨습니다. 고자가 비록 지혜와 재주가 얕고 짧아서 망부의 뜻을 계승할 수는 없으나 종천의 원통함을 한번 씻지 아니할 수 없으므로 감히 금혁(金革)의 변례(變禮)를 좇아 이 적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지 않기로 맹서하니 여러 군자께서도 들으시면 또한 반드시 마음에 슬프게 여기실 것입니다. 생각건대 사노의 수효는 비록 명부는 만들었으나 늙고 약한 자를 추려내는 것을 오로지 아전들의 손에 맡기고 보니, 속이고 협잡하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고자가 일을 일으키는 공효(功效)는 이것을 중하게 믿었는데 만약 징발한 것이 실지와 다르면 군사의 모양이 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제공께서 살피고 관리해 주시어 아전들로 하여금 농간을 하지 못하게 해 주시면, 건당한 자가 뇌물을 써서 빠질 수 없을 것이니 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자는 비록 사사 원수를 갚는 것이지만 실로 나라의 적을 치는 것이니, 여러 군자께서 그 수고를 꺼리지 않으시고 저의 뜻을 이루어 주시면 어찌 다만 고자 한 집의 죽은 이와 산 이가 감사할 뿐이겠습니까. 다시 바라건대, 조금이나마 불쌍히 여겨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후록. 오늘날 나라 안이 임금의 땅 아님이 없고 사해(四海)의 안이 모두 형제이니, 고자의 일을 사정(私情)으로나 공의(公義)로 헤아려 보건대 모두 예사로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각 고을 제공 중에 의병을 모집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본래부터 친밀한 사이라야만 힘을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생각건대 널리 통문을 보내니 일정하게 지정한 데가 없으면 서로 미루고 사양할 염려가 있고 또 평소에 서로 아는 사이에는 한마디 간청이 없을 수 없으므로, 감히 의병청 제공 외에 또 따로 제공의 성명을 기록하면서 혹 비록 평소에 안면이 없이 명성만 서로 들은 분 또한 감히 외람되이 성명을 쓰니 협력해 함께 싸우기를 바라나이다. 《정기록》에 나오지 아니하였으니 상세히 알 수 없다.
○ 경상도 인동(仁同)의 향병장 장사진(張士珍)이 본현의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다. 사진이 날래고 용맹스럽고 담략(膽略)이 있어 처음부터 열성으로 적을 토벌하다가 그의 아우 사규(士珪)가 전사하자 더욱 스스로 분발하여 별장(別將)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요해지를 지키다. 하루는 동현(同縣)에 둔쳤던 적 수백 명이 불의에 덮쳤는데 사진이 다만 용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힘껏 싸워 먼저 비단옷 입고 은 투구 쓴 적을 쏘고 머리를 베어 창 끝에 꽂으니 적도들이 부르짖고 울며 도망해 갔다. 사진이 이긴 기세를 타서 추격해 쏘아 죽인 것이 수없이 많았다. 그 후 10일 만에 왜놈이 군사를 있는 대로 몰아 다시 이르러서 먼저 10여 기병(騎兵)으로 유인하여 도전하므로, 사진이 또 돌격하여 적을 쏘매 활시위 소리에 응하여 적이 넘어지다. 드디어 이긴 기세를 타서 추격해 죽였는데, 매복하였던 적이 돌연히 사방에서 쏟아져 나와 사진이 앞뒤로 적에게 쌓여 좌편으로 치고 오른편으로 항거하다가 힘이 다하여 죽다. 일이 조정에 보고 되니 통정대부로 증직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정곤수(鄭崑壽) 등이 북경에서 돌아오다. 병부에서 황제에게 청하여 말값 은 3천 냥을 주어서 궁면(弓面)과 화약 등을 사서 운반해 가기를 허락하다. 고사(攷事)에서 나옴.
○ 황제가 병부시랑 정3품이다.송응창(宋應昌)으로 경략군문제독(經略軍門提督)을 삼고, 동지(同知) 종1품이다 이여송(李如松)으로 제독군무(提督軍務)를 삼아서 남북 관병(官兵) 4만여 명을 통솔하여 와서 본국을 구원하다.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은 좌협대장(左協大將)이 되었는데 부총병 왕유익(王有翼)ㆍ왕유정(王維貞), 참장 이여매(李如梅)ㆍ이여오(李如梧)ㆍ양소선(楊紹先) 및 선봉 부총병 사대수(査大受)ㆍ손수렴(孫守廉), 참장 이영(李寧), 유격(遊擊) 갈봉하(葛逢夏) 등이 다 통솔되다. 부총병 이여백(李如栢)은 중협대장이 되었는데 부총병 임자강(任自强), 참장 이방춘(李芳春), 유격 고책(高策)ㆍ전세정(錢世禎)ㆍ척금주(戚金周)ㆍ주홍모(周弘謨)ㆍ방시휘(方時輝)ㆍ고승(高昇)ㆍ왕문(王問) 등이 모두 통솔되다. 부총병 장세작(張世爵)은 우협대장이 되었는데 부총병 조승훈(祖承訓)ㆍ오유충(吳惟忠)ㆍ왕필적(王必迪)ㆍ참장 조지목(趙之牧)ㆍ장응충(張應种)ㆍ낙상지(駱尙志)ㆍ진방철(陳邦哲), 유격 곡수(谷遂)ㆍ양심(梁心) 등이 다 통솔되다. 참장 방시춘(方時春)은 중군(中軍)이 되고, 비어(備禦) 한종공(韓宗功)은 기고관(旗鼓官)이 되며,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종5품이다. 유황상(劉黃裳)과 병부 주사(兵部主事) 정6품이다.원황(袁黃)은 찬획(贊劃)이 되고, 호부 주사(戶部主事) 애유신(艾惟薪)은 군량을 감독하니, 특명으로 길을 배로 재촉하여 달려와 구원하게 하다. 고사(考事)에서 나옴.
○ 성지(聖旨)로 유격 장기공(張奇功) 등을 시켜 은을 내어 군량과 마초를 사서 의주로 옮기는데 연로(沿路)로 운반하여 군량을 대주다. 고사에서 나옴.
○ 호남 의병을 청하는 글은 다음과 같다.
슬프도다. 바다 도적이 세력을 믿고 침범하매 경계에서 막아낼 사람이 없어 7도의 강산이 적의 손에 모두 함몰되었는데, 오직 우리 호남만이 잠식됨을 면하여 조종의 강토가 지금까지 그대로 있는 것은 한두 의병장들이 충의를 분발하고 격려하여 의사를 모아 합한 힘이 아니었던가. 용성(龍城)ㆍ금산(錦山) 두어 성이 이미 적의 소굴이 되었다가 곧 도리어 섬멸되고 완산(完山) 한 부(府)가 거의 먹힐 뻔하다가 결국 보존되어 승전의 보고가 여러 번 날아와, 추한 무리가 넋을 잃어 한 도의 생령이 안심하고 살게 되매 다른날의 회복이 여기에서 근거가 될 것이니, 적개(敵愾)의 큰 공이 태상(太常 시호와 훈공을 정하는 곳)에 기록할 만하다. 그들의 고풍(高風)이 미치는 곳에 누가 감동되어 사모하지 않으리오. 인홍(仁弘) 등은 각 고을이 붕괴된 나머지에 분기하고 장수와 군사들이 흩어진 뒤에 수습하여 간신히 불러모아 겨우 1 려(旅)를 얻어 조개와 도요새처럼 서로 버티어[鷸蚌相持] 여름부터 겨울까지 이르니, 군사는 피곤하고 양식은 부족한데 여러 성을 점령한 적은 좌우에 벌여 있고 길에 왕래하는 왜놈은 먼 데나 가까운 데에 가득하다. 부상당하고 굶주린 군사를 거느리고 한창 날뛰는 적을 항거하자니 또한 어렵도다. 근일 이래로 적의 세력이 더욱 치성하여 이웃 고을에 개미처럼 모였던 놈이나 상도(上道)에서 후퇴한 놈들이 모두 성주로 모여서 실로 수효가 많으니, 마구 침입할 염려가 아침이 아니면 곧 저녁에 닥칠 것이다. 오늘 혹 방어에 실책하면 겨우 남은 8, 9고을도 장차 차례로 지키지 못할 것이니, 왜적들이 몰아 짓밟을 걱정은 역시 호남 지방에서도 같이 염려되는 바이다. 하양(下陽)이 한번 함락되매 우(虞)와 괵(虢)이 따라서 망하고, 한단(邯鄲)이 굳게 지켜지니 조(趙)와 위(魏)가 함께 온전하였다. 본도가 호남에 대해서는 곧 우ㆍ괵의 하양이요 조ㆍ위의 한단이니 영남이 없으면 호남도 없을 것인데, 막부에서 어찌 영남의 존망을 멀거니 쳐다보고 염려를 하지 않는가. 오직 생각건대 막부에서 평원군(平原君)의 사자[使]를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강황(江黃)의 위태로움을 구원하고 저 무용스러운 군사들이 와서 한쪽에 주둔한다면, 이것이 실로 순치(脣齒)의 형세를 살펴서 능히 남의 곤란함을 급히 여기는 의리라 할 것이다. 그러나 형(邢)을 구원하는 부분에 ‘머문다[次]’ 라고 쓴 것은 《춘추[麟經]》에서 비방한 바이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됨은 옛 사서(史書)에 경계한 바입니다. 만약 혹시 군사를 끼고 주저하여 멀리 성원(聲援)만 할 뿐이라면, 비록 나물을 캐는 것은 산에 있는 호랑이 때문에 꺼린다지만 장호(張鎬)의 구원병은 수양(睢陽)의 패함에 유익이 없었으니, 늦추어서 기회를 잃었다는 책임이 돌아가는 데가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임(任)ㆍ최(崔) 두 장수가 멀리 이웃 도의 위급함을 구원하여 새로 칼날이 한창 날래고 피곤한 군사도 용기를 솟구치니 크게 승리할 기약은 날짜를 정하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삼가 원컨대 막부에서는 웅장한 계책을 쾌히 결단하여《시경》〈무의편〉을 읊고 와서 두 장수와 더불어 계책을 맞추고 힘을 한 가지로 하면, 본도의 사기(士氣)가 믿는 바가 있어 스스로 배나 될 것이며 충청도의 군사도 또한 서로 의지하여 떨칠 것이다. 그리하면 소륵(疏勒)의 외로운 성이 추한 오랑캐에게 삼켜지지 않고, 즉묵(卽墨)의 남은 성이 망한 제(齊) 나라의 업(業)을 수복할 것이니 어찌 장하지 아니하리오. 슬프다! 종묘가 바람과 먼지를 뒤집어썼는데 깨끗이 소제할 기약이 없고, 금여(金輿)가 서리 이슬을 맞는데 돌아오실 날이 언제이뇨. 서쪽으로 바라보고 통곡하니, 눈물도 더 뿌릴 것이 없어라. 송 나라 강왕(康王)이 금(金) 나라 병영에 억류를 당하였고, 승상(丞相)이 오파(五坡)에 포로가 되었도다. 임금의 욕됨이 이와 같으니 의리가 진실로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다. 창을 베개로 삼는 분함은 피차에 같은 바이요 경계는 비록 호남ㆍ영남으로 갈리었으나 형세는 보거(輔車)처럼 서로 의지하였으니, 때를 놓쳐서 미치지 못하면 배꼽을 물어뜯은들[噬臍]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부로(父老)들이 이마에 손을 얹고 바야흐로 고자(高子)가 오기를 기다리니, 숙(叔)ㆍ백(伯)은 여러 날이 걸리는지라 위(衛) 나라 사람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라. 깊은 마음속에서 나온 말이니, 선생들께서는 힘쓸지어다. 정인홍 등.
○ 좌의병 통문은 다음과 같다.
군량의 급한 것을 글월을 써서 달려가 고한 지가 여러 번인데도 아직 답장을 보지 못하였으니, 깊이 부끄럽고 괴이하게 여긴다. 혹시 중간에 지체되어 여러분에게 보여지지 못하였는가 걱정되므로 번독함을 잊고 다시 말씀을 드리노라. 대저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치는 것은 오로지 국가를 위함이니, 군량 한 가지는 피차를 구별함이 없이 오직 넉넉한가 급한가를 볼 뿐이다. 지금 우리 군사가 처한 곳은 곧 호남ㆍ영남의 목구멍인 격으로 성산(星山)에 웅거한 적이 세력을 길러 치성해지려 하고 있다. 만약 여기가 지켜지지 못하면 운봉(雲峯) 이하에는 다시 험하고 막혀 방어할 만한 데가 없으니, 우리 도의 위태로움을 장차 구할 수가 없고 회복의 터전도 또한 의지할 데가 없으니, 기회의 중대함이 진실로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우리들이 이 때문에 여기에 힘을 써서 싸움도 하고 지키기도 하여 쳐서 죽인 것이 많으니 추한 놈들을 섬멸할 형세가 이미 우리의 눈앞에 있다. 다만 영남이 함몰된 나머지에 군량을 공급할 계책이 없고 우리들의 준비한 것은 또한 이미 다되어 거의 이룬 공이 하루아침에 폐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우리들만이 담당할 걱정이리오. 동도(同道)의 유식자로서 마땅히 한심히 여길 바이다. 대저 먹는 것이 군사보다 먼저이니 먹을 것이 없으면 군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므로 한(漢) 나라를 일으킨 공이 소하(蕭何)에게 갈 것인저. 하물며 지금 유림에서 거사하는데 나가는 자는 군대에서 힘을 다하고 위에 머물러 있는 자는 군사를 위해 양식을 준비함이 한결같이 공의(公義)이니, 기회에 나아가 싸움을 이기는 것은 내가 그 책임을 감당하려니와 양식을 끊이지 않게 함은 누가 그 중책을 맡을꼬. 여러분이 공사(公事)를 위하는 마음으로 응당 경영하고 도모하여 널리 거두고 모았을 것이며 또 들은즉 청(廳)을 세울 지시와 준비가 있어 장차 기다리는 바가 있다 들었다. 우리 군사의 급함이 이미 이와 같고 여러분이 계책하는 바도 역시 이와 같으니, 한 마음으로 서로 도울 것이요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그 몸도 생각지 않거늘 하물며 그 재물을 생각하랴. 사재(私財)도 감히 생각하지 않거늘 하물며 향교나 서원의 소유는 곧 유가(儒家)의 공물(公物)인데도 지금 쓸데없이 둔다는 말인가. 삼가 원하건대 제공이 혹은 공(公)이거나 혹은 사(私)이거나 있는 대로 그에 따라서 번개처럼 싣고 별처럼 운반하여 목마른 이가 물을 바라는 듯한 바람은 풀어 주면 이 일을 능히 끝낼 것이니, 어느 것이 여러분의 덕택이 아님이 있겠는가. 삼가 원하건대 여러분은 자세히 살펴 힘써 도모하소서. 이상은 호남에 보낸 통문이다.
○ 합천 군수 김면을 본도 우병사로 임명하고, 전라 우의병장 최경회를 통정대부로 가자하다.
○ 충청도 사람 이산겸(李山謙)이 조헌(趙憲)의 남은 군사를 수합하여 일어나 양식과 무기를 준비하여 적을 토벌하다.
○ 경기도 진사 원연(元埏)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가 용인(龍仁) 금령(金嶺)의 적에게 크게 패하다. 원연은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의 아우이다. 적령은 역의 이름인데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이 적은 곧 30리마다 일둔(一屯)씩을 둔 적이다.
○ 상의대장(尙義大將)이 합세할 일로 통문 하니, 다음과 같다.
오랑캐가 침범한 때를 당하여 군웅(群雄)이 병립할 수 없는[連鶴不栖] 걱정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감히 어리석은 계책으로써 만전의 계책을 돕고자 하나이다. 그윽히 생각건대, 적을 토벌하는 방법이 비록 한두 가지가 아니지마는 오늘날의 사세로 헤아려 본즉 가장 급선무는 합세하여 힘껏 싸우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바야흐로 이제 관군과 의병이 곳곳마다 벌 떼처럼 일어나는데 각기 맹주(盟主)가 있어서 깃발을 나누어 세워 군령에 통솔이 없고 여럿의 마음이 일치하지 못하니, 좌를 치려고 하면 갑(甲)이 달려와 원조하기를 꺼리고 우(右)를 치려고 하면 을(乙)이 경계를 넘을 수 없다고 핑계합니다. 피차의 사이에 전혀 입술과 이[脣齒]가 서로 의지하는 듯한 형세가 없고, 앞뒤의 진(陣)에 손발이 머리와 눈을 보호하듯 함이 없으며, 심지어 월(越) 나라 사람이 진(秦) 나라 사람의 수척함을 보듯 하여 앉아서 구원하지 않는 자도 있고, 서로 의지할 데가 없어 마침내 패하는 자도 있습니다. 때를 끌고 날을 끌어 적의 세력을 점점 기르고 오늘에 싸우지 아니하고 내일에 싸우지 않아 우리는 점차로 약해져서 마치 불이 기름을 태우듯 합니다. 마침내 전란이 오래 끌어 북풍의 눈비가 박두하는데 대가(大駕)가 파천하여 서쪽 국경에서 오랫동안 고생하고 계시니, 어찌 국가의 깊은 수치가 아니며 신민의 오랜 슬픔이 아니리오. 대저 우리와 적의 강하고 약한 것이 비록 현격하게 다른 것 같으나 만약 두어 진(陣)의 힘을 가지고 한 떼의 적을 섬멸한다면, 이것은 활활 타는 불을 들고 마른 풀에 날아 들어 태우는 것과 같아서 저 죽음을 앞에 둔 적의 무리를 한번 휘두르는 깃발에 다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고 오히려 매복을 설치하는 것으로써 급선무를 삼고 소굴을 질러 끊는 거조가 없다면, 비록 한두 가지의 공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모래사장의 사람이 흙을 짓이겨 맹진(孟津)을 막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찌 날로 치성하는 적의 화에 효과가 있으리오. 큰 공을 도모하는 자는 눈앞의 작은 이익을 생각지 않는 것이며 기특한 계책을 내는 자는 반드시 뜻밖의 깊은 생각이 있는 것이니, 적을 치는 방법이 어찌 매복을 설치하는 데만 그칠 따름이리오. 세가 약하면 힘이 큰 자에게 압제를 당하고 원조가 고단하면 많은 군사에 좌절을 당함은 어리석은 이나 지혜 있는 이나 한 가지로 아는 바이거늘, 오히려 성패(成敗)에 요리조리 의심하고 이롭고 불리한 형세에 앞뒤로 오도가도 못하고서 1년의 오랜 세월을 끌면서 구벌(九伐)의 쾌함을 본받지 못하고 한갓 양식을 운반하는 허비만 있고 승리를 보고하는 기약을 보지 못하여 온 나라가 반이나 오랑캐의 땅이 되고 만백성이 전부 불타는 막사의 제비꼴이 되었소. 만약 이러기를 그치지 않으면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국사가 이루어질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옛날 충의의 선비는 국사가 위급할 즈음을 당하면 꺾이고 패함으로 저상(沮喪)하지 아니하고 세가 약하다고 싸우지 않는 일은 없었습니다. 우선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일을 가지고 판단하건대 한구석 탄환만한 지역을 3국이 솥발처럼 맞선 즈음을 당하여 동으로 치고 서로 쳐서 앞뒤로 백 번 싸웠으므로 그의 말에, “우리와 적이 양립하지는 못할 것이요, 왕업이 한쪽에서 편안할 수는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치는 것이 낫다.” 하였습니다. 하물며 10배의 군사로써 한 귀퉁이의 적을 질러 끊는 것은 애당초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데, 이것을 버리고 달리 구한다면 다시는 할일이 없습니다. 적이 와서 범할 때를 당하면 극력으로 방비하고 적이 물러갈 제는 합세하여 나아가 공격하여, 번갈아 싸워서 적을 애먹이는 공을 세우고 적을 구경이나 하여 길러 주는 걱정이 없게 하는 이것이 실로 지금의 급무입니다. 조개와 도요새처럼 서로 버티어 아직까지 섬멸하는 것을 늦추고 있으니 하루이틀 지나 다시 몇 달이나 더 걸린다면 군량은 이미 다되고 백성은 모두 흩어져서 비록 굳게 지키려 하여도 되지 못하고 적이 우리 땅을 점령한 것은 전일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리 군사의 양식이 다 된뒤를 타서 저 적의 물고 삼키는 화를 마구 저지른다면, 누가 다시 활을 당겨 적에게 항거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말이 이에 미치매 꿈에도 놀라고 먹다가도 목에 걸립니다. 원하건대, 모든 군자는 의리로 임금을 버리지 말고 충성으로 목숨을 바쳐, 하늘을 쏘는 흉한 놈들에게 마음을 분격하여 해를 취하는 공을 이루려 한다면 이는 실로 국가의 간성(干城)이요 중류의 지주(砥柱)일 것입니다. 제군의 하루가 없으면 인도(人道)의 하루가 없는 것이니, 온 나라 사람들 중에 누군들, “관중(管仲)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오랑캐의 옷을 입었으리라.” 하지 않으리오. 신포서(申包胥)의 한 몸이 오히려 능히 초(楚) 나라를 보존하였고 1려(旅)의 군사가 족히 하(夏) 나라를 일으켰으니, 지금의 병력이 전일보다 10배가 되는데 여러 군자의 충성을 분발하는 절개는 또 어찌 옛사람보다 뒤지리오. 다만 군사를 거느린 지는 시일이 경과되었는데 성공을 고하는 기약이 없는 것은 진실로 군사를 거느린 사람들이 각기 제 마음대로 하고 능히 합세하여 힘껏 싸우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군사를 쓰는 것은 졸렬하더라도 빠른 것이 좋지, 교묘하더라도 더딘 것을 숭상하지는 않습니다. 시사의 위급함은 불타는 것을 구하는 것과 같으니, 원컨대 주저하지 말고 속히 큰 계책을 내십시오. 풍문에 들은즉 근지에 유둔하던 적이 여러 번 야습을 당하고는 도망한 놈이 반이 넘는다 하고, 더구나 가을이 지나 날씨가 차가워지는데 적들의 거처는 서늘하고 엷게 되어 있으며 본래 벗고 사는 놈들이라 견디기에 익숙지 못하여 알몸으로 얼어 죽은 놈이 길에 서로 잇다랐다 합니다. 아마도 흉하고 교활하며, 사납고 추한 놈들이 죄악이 쌓일 대로 쌓였는데도 우리가 기회를 잃어 섬멸할 기약이 없으니 하늘이 반드시 추위를 빌려서 남김없이 죽이려 하심일 것입니다. 그러고 본즉 미친 적들이 우리 땅에 오래 지체하다가 겨울을 넘기는 것이 또한 국가의 불행 중 다행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악한 자에게 앙화를 주는 하늘의 뜻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천시(天時)에 할 만한 기회가 왔으니 적이 어찌 그 목숨을 오래 끌 수 있으리오. 이러한 심한 추위를 당하여 급히 공격하고 놓치 말아야 할 기회가 이때입니다. 양쪽 진에서 통신하는데 편지 한 장이면 족하겠지마는 소모관(召募官)에게 부탁하여 간절한 뜻을 전달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전일에 회맹(會盟)할 때에 마침 사기(事機)로 인하여 크게 거사하지 못한 것이 지금 생각하면 통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다시 고충(苦衷)을 가지고 감히 이렇게 전하니, 상세한 것은 전하는 이의 입으로 다할 것입니다. 각기 개미 힘을 다하고 함께 닭ㆍ개의 피를 마시어, 성하(城下)의 맹세로 하여금 패상(㶚上)의 희롱에 돌아가지 말게 합시다. 삼가 바라노니, 제군은 각기 힘쓰소서.
○ 전라 좌ㆍ우의병이 오래 영남에 있어서 성주ㆍ개령의 적과 여러 번 싸웠으나 한번도 전승(全勝)한 때는 없고 비록 몇몇 베어 죽인 공은 있으나 정병과 용사들의 피해가 너무 많으므로 두 장수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철병하여 북으로 가서 근왕할 계책을 하는 이가 많으니, 영우(嶺右)의 선비와 백성들이 그들에게 머물러서 살려 달라고 굳이 청하다. 인동 선비 장봉한(張鳳翰)이 임계영에게 글을 올리니, 다음과 같다.
군사를 의병이라고 이름한 것이 어찌 우연함이리오. 그 충성과 용맹이 다른 관군과 견줄 바가 아니요 의기에 분발함이 또 중들의 유가 아닙니다. 의로운 소리와 높은 절개가 늠름하여 창졸의 사이에 계책을 결단하고, 위태롭고 망하는 즈음에 자신을 잊고서 기회에 나아가 싸우는 것은 오직 의일 뿐이요 크고 작은 것과 강하고 약한 것은 논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의병의 앞에는 강한 적도 강함이 되지 못하고 많은 적들도 많은 것이 되지 못하여 부딪치면 부서지고 범하면 타버려서 그 형세가 마른 가지나 썩은 가지를 꺾은 것과 같이 쉬운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옛날 주(周) 나라에 있어서는 정 무공(鄭武公)과 위 문후(魏文侯)요 당 나라에 있어서는 곽자의(郭子儀)ㆍ이광필(李光弼)이 이런 분들입니다. 그런 시대에도 얻기가 어렵거늘 하물며 하대(下代)이겠습니까. 대저 이와 같이 얻기가 어려운데 우리나라의 많은 선비들은 태학관(太學館)에 올빼미가 낢을 통분히 여기고 태원(太原)을 침략당한 욕을 부끄럽게 여겨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개미 같은 군사를 모은 자가 곳곳마다 일어나지 아니한 곳이 없어 정신으로 싸우니, 기운이 산하(山河)를 웅장하게 하고 충과 의가 모두 열렬하여 정성이 금석(金石)을 꿰뚫은 것은 전라도가 제일입니다. 이것이 어찌 우리 조종 2백 년의 교화가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난리를 당한 즈음에 분발하게 하고, 호남의 의사들이 더욱 그 가운데 흥기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므로 임금께서 파천하시고 백관이 도망해 숨으며 빛나던 종묘사직이 이미 기장이 우거진 폐허가 되었는데도, 임금께서 다행히 여기시는 바는 전라도의 군사가 완전한 것입니다. 피란하는 백성들이 도마 위의 고기와 솥 속의 물고기를 면하지 못하고 유리(流離)하는 고생이 이미 극도에 달하였는데도, 백성들이 믿는 바는 전라도가 그 지킴이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위와 아래의 희망이 모두 전라도에 있을 뿐 아니라 왜적이 두려워하는 바도 역시 호남 한 도이니,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는 진실로 물러앉아서 매우 위급한 오늘날에 기대를 저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대가(大駕)를 눈과 서리 같은 모진 고생 가운데서 맞아 모셔올 것을 생각해야 하고 백성이 물과 불 같은 재난에 빠진 것을 보고 건져낼 것을 생각하여, 밤낮으로 힘을 다하여 국사에 절충하는 절개를 지켜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선등(先登)하는 용맹을 바치는 이것이 장군이 바라는 바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도 60고을의 남은 백성 중에 산골에 숨은 자가 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언제나 끝남이 있을 것인가.” 하는 글귀를 읊고, 호남을 바라보고는 매양, “왜 날을 지체하는고.” 하는 시를 읊조리면서 피란한 가운데서 목을 늘이고 바라는 것이 여후(黎侯)가 숙백(叔白)을 바라는 것보다 심함이 있습니다. 이제 겨울철이 닥쳐 추위의 위엄이 치성하니 각기 나라에 보답한 마음을 열렬히 가지고 앞다투어 원수 갚을 칼날을 갈아서 멀리 풍상의 고생을 무릅쓰고 발섭(跋涉)하는 괴로움을 꺼리지 말아서, 금릉(金陵)의 달밤에 깃발이 펄럭이고 감문(甘門)의 서리에 북소리가 들리어 즐거이 부르짖는 소리는 산이 무너지고 물이 뒤집는 듯 뛰고 날치는 기운은 번개가 번쩍거리고 뇌성이 달리는 듯하여, 그 뜻이 장차 길보(吉甫)의 토벌을 따르고,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의 전진을 좇아 궁금(宮禁)을 숙청하고 왕국을 평정하리니, 이것이 어찌 헛되게 갔다가 헛되게 돌아오는 자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남은 우리 백성이 북치는 소리를 듣고는 비록 바구니의 밥과 병에 넣은 장[簞食壺漿]을 가지고 서로 앞 다투어 영접하지는 못하나마 모두 기쁜 빛으로 서로 고하기를, “우리 장군은 위무(威武)와 용략(勇略)이 의를 제일로 삼는 분이로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렇게 장사(將士)가 구름처럼 모이고 호령이 엄숙하게 행하며 군세(軍勢)가 이와 같이 장할까.” 하여, 이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자주 이기기를 간절히 바라고 적을 죽이는 데는 모두 일곱 발자국 안에 허물없기를 기약하여 대를 쪼개는 형세와 매[鷹]처럼 드날리는 공을 하루아침에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근일에 전도(前導)가 밤에 놀라 망녕되이 대군이 별처럼 흩어지게 만들어 적을 잡을 기세를 놓쳤으니 이것이 어찌 장군의 실책이리오. 실로 영남의 군사들이 미친 개 같은 왜놈들에게 겁을 내는 것이 벌써 하루아침 하루저녁의 일이 아니므로, 적이 우리를 추격한다는 말을 그릇 전하여 퇴군한 죄를 가지고 마침내 장군의 군사로 하여금 회군할 의사가 있게 한 것입니다. 아! 백 번 싸워 백 번 패하여도 마지막에 한 번 이기는 것만 같지 못하거늘 어찌 한 번 놀란 일로 가고 머무는 것을 결정하리오. 대저 근왕한다는 것은 반드시 근왕하는 실제를 다한 연후에야 그 명칭에 맞추어 그 직책을 저버리지 아니한다 할 것입니다. 강회(江淮)의 외로운 성으로 감히 반역한 갈노(羯奴)를 항거하고 죄를 성토하는 한 장의 편지로 능히 백만의 군사를 물리쳤으니, 만고 이래로 의병이라 칭함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무릇 이 몇 사람이 만일 혹 적세의 강약을 비교하고 한 몸의 이해를 헤아렸다면 그 이름을 듣건대는 의사(義士)와 같은 점 이 있지마는 그 실지를 돌아보면 도리어 겁쟁이와 같으니 의에 다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군자는 그 실지를 다함을 귀하게 여깁니다. 지금 장군은 맹렬하기가 범과 같은 용사와 곰과 같은 군사를 끼고 하늘에 뻗치는 칼을 짚으며 해를 휘두르는 창을 잡고서 의병으로 이름하고 호남의 의사를 끼고 왔으니 그 이름이 장하지 않습니까. 난을 평정하여 바른 데로 돌림이 이 한 걸음에 있고, 엎어지는 것을 붙들고 위태로움을 유지하는 것도 이 한 걸음에 있으니, 그 맡은 것이 중하고 그 책임이 큽니다. 그렇다면 어찌 소장부(小丈夫)처럼 싸워서 이기면 의기가 등등하고 싸워서 패하면 군세가 움츠러들어서 한 번의 승부 사이에 진퇴를 가벼이 하겠습니까. 반드시 의병의 군문에 위엄이 사랑함보다 앞서고 군령이 엄숙하여 오직 의(義)를 따른다면, 방숙(方叔)의 계책이 장하여 매우 치성하던 적세가 스스로 위축되어 날로 위축된 강토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맹시사(孟施舍)의 용맹을 굽히거나 조괄(趙括)의 겁(怯)을 내어 도끼가 이지러지지도 않았는데 오던 길로 수레를 속히 돌린다면 어찌 환영하였던 백성이 실망할 뿐이겠습니까. 또한 성상이 회복하실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되고 적에게 약함을 보임이 또한 심할 것입니다. 생(生)은 날뛰는 적의 세력이 이로부터 모진 독을 함부로 뿜고 유리(流離)하는 백성들이 더욱 물과 불에 빠진 고통을 당할까 염려합니다. 그런즉 장군이 이번에 가시는 것을 혹자는 국가의 불행이라 합니다. 애당초 사방에 두루 의론하여 의기를 떨쳐 군사를 모집하던 실제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그 이름과 그 실지가 현저히 다르니 혹자가 의병이라 말하더라도 나는 믿지 않겠나이다. 바라건대 장군은 생각하소서. 또 가는 것을 속히 할 수 없는 이유는, 지난 7월에 성상께서 손수 쓰신 조서를 만 리나 되는 평안도에 반포하시어 도탄에 빠진 남은 백성을 위로하고 군사를 모집한 의사들을 표창하셨습니다. 한 장의 윤음으로 신자의 정성을 격려하고 충의를 가상히 여김이 호남의 장수와 군사에게 더욱 극진하시니, 전하의 명철하심으로 어찌 모르고 이같이 칭찬하겠습니까. 과감한 기풍이 이미 무사할 때에 증험되었으므로 충성과 의분은 세상이 요란한 뒤에 더욱 미더웠던 것인데, 이제 적의 굴혈에 와서 벤 머리를 조정에 바치지 못하고 창과 칼을 거두어 넣으며 빠진 이를 건지러 왔던 수레를 장차 돌리려 하니, 비록 젖을 바라고 우는 어린애는 돌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파천해 계신 전하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모구(旄丘 앞이 높고 뒤가 낮은 언덕)의 칡이 서도의 풍상에 마디가 변하였고 깃발이 오기를 바라는 기대는 한갓 경동의 부로들에게만 간절하니, 처량한 기상이 기하(岐下)의 천도(遷都)에 견줄 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중흥을 생각하는 형세는 다만 호남의 의사들을 믿는데, 군사를 주둔한 지 10일 만에 혈전(血戰)하는 정성을 바치지 아니하니 장차 하늘이 돌보지 않음인가. 어찌 불행함이 이에 이르는가. 영남의 군사는 흩어지고 도망한 중에 불러 모았으니 흙 무너지듯 붕괴되던 나머지에 여러 번 물러감이 진실로 형세가 그러하지마는, 장군의 군사는 강하고 날래며 용감함이 견줄 데 없는데 윗사람을 위해 죽는 데 대한 의리를 알면서도 오히려 장한 기운이 꺾이어 도리어 군사를 돌리겠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전일에 올 때에는 한갓 아녀(兒女)들의 슬퍼함만 있었고 지금 돌아갈 때에는 피리와 북으로 환송함이 없으리니, 내일 아침 호남으로 가는 길에는 산하(山河)에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부로들이 물어보면 장차 무슨 말로 답하시렵니까. 다만 부로에게 답할 말이 없을 뿐 아니라 호남 의사의 낙담함이 장차 장군으로부터 비롯할 것입니다. 상가 원하건대, 장군은 종묘사직이 폐허가 될 것을 깊이 애통히 여겨서 다시 근왕의 정성을 굳게 할 것이요 돌아가는 걸음을 빨리하지 마소서. 남도를 수복하여 소목공(召穆公)의 경영을 성취하고 이수(李收)의 토벌이 성공할 때는 지금이 그때입니다. 저는 무(武)로는 적을 막을 재주가 모자라니 창을 메고 싸우는 노력도 감당할 수 없고, 문(文)으로는 적을 퇴각시킬 수 없으니 어찌 무의(無衣)의 시를 화답하겠습니까. 장차 신포서(申包胥)의 정성을 본받아서 진(秦) 나라 뜰에 통곡 하고저 하나 갈 길이 아득하니 누구에게 의탁하리오. 멀리 북극(北極 임금의 별을 상징함)을 쳐다보니 슬픈 눈물이 하늘에 사무칩니다.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는 바는 우뚝한 우리 장군이 지금 세상의 곽자의와 이광필로 기린각(麒麟閣) 위에 공이 반드시 제일이 되어 개선(凱旋)하는 날에 문무(文武)의 덕을 칭송하여 다시 〈6월편〉을 노래하기를 원하나이다. 장군은 장한 기운을 더하시어 곤이(昆夷)의 주둥이를 무찔러 주소서. 도망해 숨어 다니는 중에 소리를 삼키는 울음을 견딜 수 없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생각하소서.
○ 호종 전연서 별좌(扈從典涓署別坐) 경상도 고령 사람 김응정(金應禎)이 전하는 변란 후의 소식은 다음과 같다.
당초에 사변을 듣고는 모든 일이 창황하였고, 또 한 사람도 장수될 만한 사람이 없어 이일(李鎰)은 함부로 싸워서 처음은 대군이 패하였고, 신립은 한신도 아니면서 배수진(背水陣)을 쳐서을 쳐서 또 온 나라의 장사(壯士)를 다 죽였다. 주상과 조정은 항상 신(申)ㆍ가(李)를 장성(長城)처럼 믿었다가, 두 장수가 패한 것을 듣고는 인심이 놀라고 당황하였고 한두 정승이 처음으로 서도로 파천할 의론을 내어 경성이 지켜지지 못하고 대가가 도성을 떠나시게 되었다. 온 성중의 남녀들이 거리를 메워 물결처럼 달려서 길에 엎어지듯 자빠져서 구렁에 가득 찼는데, 대가를 호위하여 따르는 자가 겨우 수십 인이었다. 평양에 행차를 멈추시고 강변 7고을의 토병(土兵)을 긁어모아 임진강에서 방어하였더니, 적이 산곡에 군사를 감추고 수일 동안 약한 형세를 보였다. 이때에 신할(申硈)이 중군이 되고 이빈(李薲)ㆍ이천(李薦)이 좌우군이 되었는데, 좌우군이 이르기 전에 중위(中衛)가 먼저 돌진하였다. 적의 복병이 사면에서 일어나자 우리 군사가 혹은 물 속에 던져지고 혹은 칼날과 탄환에 죽어서 흐르는 송장이 강물을 막았고, 남은 군사들은 낙담하고 정신이 없어 투구를 떨어뜨리고 말을 버리고서 모두 무너져 흩어졌다. 적이 송경(松京)과 황해도를 함락시키고 대동강 가에 세 군데 진을 쳤다. 호종해 온 모든 신하들이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아 성을 지키고 매복을 설치하며 명주 30여 동(同)과 포목 40여 동, 군량 7만여 석을 거두어들이니 군세가 조금 떨치고 인심이 분발하기를 생각하였다. 창성(昌城)의 관인(官人) 임욱경(任旭慶)이 모집한 용사들이 자원하여 먼저 올라서 군사를 거느리고 밤에 쳐서 적의 중위를 섬멸시키고 적의 선봉장을 베니 적의 세력이 크게 꺾이고 양곡이 다하여 물러가려 하였는데, 중화(中和) 사람이 향도(向導)가 되고 경통사(京通事) 김덕겸(金德謙)이 계책을 도와주어 왕성탄(王城灘)으로부터 인도하여 오니, 수장(守將) 김억추(金億秋)ㆍ성취(成鷲)ㆍ박석명(朴錫命)ㆍ김응서(金應瑞) 및 감사 송언신(宋言愼), 병사 이윤덕(李潤德) 등이 모두 달아났다. 그러나 성을 지키기를 심히 엄히 하였다. 임금이 울면서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나의 한 몸은 상관할 바 아니나 차마 아녀들이 욕을 당하는 것을 앉아서 볼 수 없다.” 하고, 거가가 장차 출발하려고 성문을 열도록 명하니 재상들이 굳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는데, 듣자니 두어 사람이 출성하기를 청하는 이가 있었다 한다. 윤좌상(尹左相)은 혼자 성 위에 앉았다가 적이 성을 포위한 연후에 단기(單騎)로 나갔다. 임금이 요동으로 건너가기로 계책을 결정하여 중전(中殿)을 강계(江界)로 보내고 동궁(東宮)을 강원도로 보내며, 임금은 하루 밤낮에 수백 리를 달려서 용천(龍川)에 멈추었다. 여러 신하들이 붕괴되어 흩어진 두어 장수를 잡아 베고 김명원(金命元)으로 원수(元帥)를 삼아서 순안(順安)에서 방어하여 여러 번 싸워 다 이겼으므로 적이 감히 마구 몰아가지 못하였다. 조정에서 요양(遼陽)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더니, 중국의 유격 장군 사유(史儒)ㆍ왕유정(王惟貞)ㆍ왕수관(王守官) 대조변(戴朝弁)ㆍ서일현(徐一賢) 및 부총병(副總兵) 수양정(修養正)과 관전보 참장(寬典堡參將) 조승훈(祖承訓) 등이 나오고, 광녕위 총병(廣寧衛摠兵) 양소(楊紹)가 동요(東遼) 동양참(東陽站)을 출동시켜 감독하였다. 형양성 밑에는 논이 많다. 또 비가 왔다. 사유가 군사를 나누어 4초(哨)로 만들어서 매 초마다 각기 우리 군사 백 명으로서 전도를 삼아서 밤을 무릅쓰고 성을 부수어 일시에 돌입하니 적이 놀라서 대동문(大同門)으로 나왔다. 우리 군사가 1초는 인도해 들어가고 나머지 3초는 들어가진 아니하니, 적이 다시 싸워서 사유가 죽고 중국의 말 5천 필과 중국 병사 4백여 명을 상실하였으며 나머지는 다 돌아왔다. 예조 판서를 보내어 요동에 청병하였더니, 구련성(九蓮城) 양 총병(楊總兵)이 인하여 북경의 조정에 아뢰었다. 절강(浙江) 장수 낙상지(駱尙志)는 손으로 천 근의 무게를 들어 호를 낙천근이라 하는 자인데 그와 송응창(宋應昌) 등이 포수(砲手) 3천을 거느리고 근일에 구원하러 나올 것이라 하였다. 황제가 사신 설번(薛蕃)을 보내어 주상을 위로하고 하루를 머물다가 돌아가고 중국 병사 수만이 왔는데, 모두 평지에서 달리기만 일삼고 활 쏘는 것은 훌륭하지 못하므로 당분간 포수가 오기만 기다렸다. 동궁은 한 달 여를 이천(伊川)에 머물다가 적병이 사방에서 오자 성천(成川)으로 옮겨서 머물렀다. 바야흐로 영변(寧邊)으로 향하려 할 때에 동궁을 모신 신하는 영상 최흥원(崔興元), 우상 유홍(兪泓), 이상상(二上相) 최황(崔滉)이요 임금을 모신 여러 신하는 풍원군(豐原君) 유성룡(柳成龍), 좌상 윤두수(尹斗壽)ㆍ이조 판서 이산보(李山甫),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 예조 판서 윤근수(尹根壽), 형조 판서 한응인(韓應寅)과 구사맹(具思孟)ㆍ유은(柳垠)ㆍ심충겸(沈忠謙)ㆍ박충간(朴忠侃)ㆍ정사위(鄭士偉)ㆍ이충원(李忠元)ㆍ심희수(沈喜壽)ㆍ오억령(吳億齡)ㆍ이국(李𥕏)ㆍ이정립(李廷立)ㆍ홍인상(洪麟祥)ㆍ박응복(朴應福)ㆍ정곤수(鄭崑壽)ㆍ민준(閔濬)ㆍ홍성민(洪聖民)ㆍ이해수(李海壽)ㆍ백유함(白惟諴)뿐이었다. 임금이 평양을 나올 때에 김귀영(金貴榮)으로 함경도 도체찰사를 삼아서 이양원(李陽元)ㆍ황정욱(黃廷彧) 부자 등과 더불어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가게 하였다. 임금이 요동으로 건너가게 될 경우에 행차를 따를 이를 물으니, 위에 열기한 신하들이었다. 유홍과 최황으로 하여금 종묘의 5신주를 모시고 동궁과 더불어 영동(嶺東)으로 들여보냈다. 적병이 함경도로 침입하자, 김귀영이 남병사(南兵使) 이영(李榮)이 우수하다 하여 도순찰사로 정하여 남ㆍ북병사를 통제하게 하였더니, 북병사 한극함(韓克諴)이 그 밑에 있기를 부끄러워하여 나이를 다투고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군졸들이 단결되지 아니하고 겸하여 함흥(咸興)의 생원 진대유(陳大猷)가 처음으로 반역하였다. 왕자와 여러 재신(宰臣)들이 함께 회령으로 들어가자 관노(官奴) 국경인(鞠景仁)이 공모하고 적을 끌어들여 두 왕자와 그의 부인, 기타 조신(朝臣)들을 잡아서 왜장에게 항복하였다. 왜장이 가마에 왕자 및 여러 재신들의 부인을 메고서 가는 곳마다 객사에 거처시키고 문천(文川)에 이른 지가 지금 거의 한 달이나 되었으니, 지금은 아마 낙양(洛陽)에 이르렀을 것이다. 함경 감사 유영립(柳永立) 및 판관과 그의 가족들이 포로가 되었다가 유영립은 도망해 나왔고, 새 감사 윤탁연(尹卓然)은 겨우 평안도 경계 설한령(薛罕嶺) 밑에 별하소보(別河小堡)를 보존하였다. 적이 회령을 포위하고 6진을 치고서 강을 건너 호(胡)를 치자, 모든 호들이 멀리 도망하고 그 부락을 다 불태우고 돌아왔다. 전일에 청원사(請援使)가 요동에 이르러 수양정(修養正)의 말을 들었는데, 우리 사신이 중국 병사가 패한 데 대해 사과하니, 답하기를, “군사는 사지(死地)인데 어찌 우리만 살고 저들만 죽으란 이치가 있는가. 그리고 천시(天時)ㆍ지리(地利)ㆍ인화(人和)가 귀한 것인데 전해 들은즉 평양의 지세는 모두 진흙땅이요 또 논이 많다 하니 이것은 지리를 얻지 못한 것이다. 계절이 한창 장마비가 왔으니 이것은 천시를 얻지 못한 것이요 상국(上國)과 본국이 언어가 통하지 못하여 뜻이 통하지 못하니 이것은 인화가 없음이니, 그 때문에 패한 것이다. 반드시 남병(南兵)이 오고 겸하여 들판이 마르기를 기다린 연후에야 달리어 적을 쫓을 수 있을 것이니, 군량을 준비하여 근일에 나가서 구원하리라.” 하였다. 옛날 주 나라 말기에 천자가 7국의 전쟁을 구하기 어려웠거늘, 하물며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로 북으로는 오랑캐에 인접하고 남으로 섬 왜놈[島夷]에 이웃하여 전쟁이 늘 연달았어도 중국 병사가 와서 구원함이 이런 극진함에 이른 적이 없었다. 이로써 본다면 회복할 수 있는 일맥의 희망을 이것으로 알 수 있고, 남쪽에서 의병이 곳곳에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것이 큰 기회이다. 다만 들은즉 적이 경영한 지 여러 해 만에 그 소굴을 거의 비우고 온 것은 재물을 도둑질하고자 한 것만이 아니라, 처음 나올 때에는 여러 장수에게 부서를 나누어 각도에 흩어져 들어가서 분탕하고 전복시킨 연후에 명년 2월에는 요동을 범하기로 계획을 하였다는데, 지금은 평양에서 항거하고 각도에서 근왕하는 군사와 중국 병사가 구름처럼 모이니, 적의 계획이 아마도 중간에 저지될 것이다. 다만 함경도와 강원도의 모든 적이 경성과 평양의 모든 적과 더불어 성세가 서로 응하여 동래로부터 평양에 이르기까지 길에 막힘이 없어 적들이 모두 큰 도회지를 점령하였고 우리 군사는 곳곳의 들에 둔쳐서, 주인과 객이 바뀌어 괴로움과 편함이 형세가 다르다. 또 행재소를 호위하는 이, 동궁을 따르는 이, 순안에 있는 원수의 소관, 강동(江東)에 있는 이일(李鎰)이 거느린 바, 삼현(三縣)에 있는 김응서(金應瑞)가 거느린 바, 최원ㆍ김천일의 의병 만여 명과 호서(湖西)ㆍ삼포(三浦)ㆍ해서(海西)에 각기 감사ㆍ순찰사ㆍ방어사 등이 모두 군관 수천 명씩을 거느리니, 군사는 작고 장수는 많아서 여러 도에 의병을 일으켜 근왕하는 장수와 군사가 무려 수십만이다. 군사와 말이 한 달 동안 먹을 양식과 콩이 적어도 수만 석은 되어야 하는데도 각 고을의 창고는 타버려서 저축이 없고, 도망한 백성과 싸우는 군사는 농사를 짓지 못해 수확이 없어 얼마간의 시일에 복구할 수 없을 듯하니, 군량을 판출하기 어렵다. 하늘이 만약 우리를 돕는다면 평양을 수복하고 경성에 환도할 수 있으련만 통곡한들 어찌하랴. 대가는 중국 병사가 나와서 구원하여 평양의 적을 물리친다면 정주(定州)로 향하여 점차 연안(延安)에 머무를 것이다. 이정암(李廷馣)ㆍ김대정(金大鼎)ㆍ전현룡(田見龍)이 함께 연안을 지켰는데, 적이 7일 밤낮을 온갖 방법으로 성을 공격하였으나 능히 성을 잘 지켜서 마침내 완전히 보존하였다.
○ 구례(求禮)의 석주(石柱)와 운봉(雲峯)의 팔량(八良) 등에 새로 성을 쌓다. 두 곳은 호남의 요해지로 전에 성터가 있었다. 이때에 본도 방어사 곽영(郭榮)이 9월부터 항시 남원에 주둔하면서 조방장ㆍ별장 등을 영남 경계에 나누어 보내어 성을 쌓아 지키게 하였다. 석주에는 별장 및 구례 현감 이원춘(李元春)이 지키고, 팔량에는 조방장 이복남(李福男)과 운봉 현감 남간(南侃)이 지키며, 정동(井洞)의 육십치(六十峙)에도 모두 지키는 장수가 있어 매복을 설치하여 방비하다. 이복남은 곰티[熊峴]에서 힘껏 싸운 공으로 당상에 승진하다.
○ 소모관 안민학(安敏學)이 동궁에게 명령을 받아서 호서에서 군사와 말을 조달하다.
○ 경상도 군량 차사원(軍糧差使員)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敎) 오운(吳澐)의 통문은 다음과 같다.
금년의 왜변은 개국 이래로 우리 동방에서 있지 않던 바이니, 군부(君父)의 욕됨과 사사 가문의 화는 말하면 통분하다. 어찌 차마 다 말하랴. 흉한 놈들을 제거하고 원수를 갚는 것이 하루가 급한데, 우리와 적이 서로 버티어 지금 벌써 8개월이란 오랜 시일이 되었다. 온 나라가 함몰되어 착수할 땅이 없으니, 우선 우리 영남 우도로 말한다면 전란을 면하여 심히 파멸되지 않은 데가 겨우 7, 8고을 인데 앞뒤로 적을 맞아 조석을 보장할 수 없어, 불타는 처마의 제비요 솥 속에 든 물고기에 불과할 뿐이로다. 다행히 의병 제군과 적개(敵愾)한 장사(壯士)들의 힘을 입어 오늘날까지 보전하였는데, 군량이 다되고 군사들이 붕괴되어 흩어짐이 서로 잇달아서 손을 묶은 것처럼 방책이 다되고 군사들이 붕괴되어 흩어짐이 서로 잇달아서 손을 묶은 것처럼 방책이 없다. 신농(神農)이 이른바, ‘비록 돌성 천 길과 탕지(湯池) 백 보가 있더라도 곡식이 없으면 능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이 진실로 오늘날의 급한 걱정이로다. 전란을 참혹히 겪었으매 칼날에 죽은 자가 거의 반이나 되고 남은 군사는 아직도 놀라 산곡에 숨어서 굶주리며 죽음을 기다리는 자가 많으니, 만약 양식을 쌓아 놓고 불러 모으면 10일 동안에 모두 다시 모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일은 곡식이 있으면 군사가 있고, 군사가 있으면 적을 없앨 수 있는 것이다. 관가의 곡식은 탕진되고, 6월 이후에는 오로지 민간의 곡식에 의뢰하였는데 그것이 다되어 계속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전일의 납속(納粟)은 관에서 지명하여 정한 것이요 자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지금 본즉 3석으로부터 1백 50석에 이르기까지 차등이 있게 관직으로 상을 주고 허통(許通)하고 면천(免賤)하게 되었으니 압입하는 바에 따라서 사목(事目)이 분명하고, 만약 납입한 것이 규격에 꼭 맞지 않는 것도 반드시 받아들이면 공사(公私)에 서로 이익될 것이다. 대저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는 것은 각기 신자의 의리를 다하는 것이니, 어찌 상을 내리기를 기대하겠는가. 다만 관직의 임명에 응하여 국가의 수용에 보조하는 것은 도리에 합당한 것으로 더욱 부득이한 것이다. 하물며 양식이 다되어 군사가 흩어져 만약 마구 쳐들어오는 적을 막지 못하여 약간 보존되었던 땅도 끝내 적의 소굴이 된다면, 몸도 또한 보존하지 못할 것인데 비록 곡식이 있다 한들 먹을 수나 있겠는가. 일의 득실은 다른 이가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니 보수를 받지 못할까 의심하지 말고 당분간 내 곡식을 가졌다고 다행으로 여기지도 말며 서로서로 권유하여 기회를 잃지 말라. 비인(鄙人)은 이 급하고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국가에 보답할 방법이 없다가 마침 군량을 판출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진실로 원하건대 제군 중에 납입하기를 원하는 자와 더 납입하는 자는 힘의 미치는 데 따라서 서명(署名)하고 아울러 석수(石數)를 기록하라.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12월. 행재(行在)에서 동요로 불리는 시가 있으니,
부슬비 서울 거리에 버들빛이 푸르니 / 細雨天街柳色靑
봄바람이 불어들매 말발굽이 가벼워라 / 東風吹入馬蹄輕
전일 대관들 환도하는 날에 / 舊時名宦還朝日
즐거운 개가 소리 한양성에 가득하리 / 奏凱歡聲滿洛城
하다. 혹자는 회복될 징조라고 말하였다.
○ 주상전하께서 먼 변방에 오래 체류하니 비감하여 시를 읊기를,
국사가 창황한 날에 / 國事蒼黃日
누가 곽ㆍ이의 충성을 능히 하랴 / 誰能郭李忠
빈을 떠남은 큰 계책을 위함이요 / 去邠存大計
회복은 제공을 믿네 / 恢復仗諸公
관산의 달에 통곡이요 / 慟哭關山月
합수의 바람에 상심일세 / 傷心鴨水風
조신들아 금일 후에도 / 朝臣今日後
오히려 다시 서인이니 동인이니 하려나 / 尙可更西東
하였다.
○ 최원(崔遠)은 노쇠하였으므로 면직되고, 진도 군수(珍島郡守) 선거이(宣居怡)로 전라 병사를 삼다. 곽준(郭峻)의 관직을 삭탈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하고 조방장 이복남(李福男)으로 전라 방어사를 삼다. 거이는 이때에 수원(水源)에 있었는데, 최원이 강화(江華)로부터 나와서 인부(印符)와 군사를 인계하다.
○ 남원 진사 방처인(房處仁)이 군사를 모집하여 광양(光陽)의 도탄(陶灘) 진주(晉州)와의 접계이다. 에 매복을 설치하고, 도탄의복(陶灘義伏)이라는 네 글자를 전사(篆寫)로 새겨서 군장(軍章)을 삼다.
○ 군사가 일어난 지 1년 만에 국가의 재정이 부족하여 약간의 남은 저축도 모두 탐관(貪官)의 손에 들어갔으므로 벼슬을 파는 것이 사세가 부득이하게 되다. 1백 석을 내면 3품의 되고 30석을 내면 5품을 주다. 계사년ㆍ갑오년에 이르러서는 120석만 내면 가선당상(嘉善堂上)에 승진시켰으나 응모하는 사람이 없었다.
○ 경상 좌순찰사 한효순(韓孝純)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도내에 유둔한 적이 인동(仁同)ㆍ대구(大邱)ㆍ청도(淸道)ㆍ밀양(密陽)ㆍ기장(機張)ㆍ동래(東萊) 및 함창(咸昌)으로부터 당교(唐橋) 등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유둔하고 있는데 당교의 적은 좌우도의 인후(咽喉)가 되는 곳에 있어 그 세력이 심히 치성하니, 신은 비록 한 도의 힘을 다하여서라도 반드시 이 적을 먼저 치는 것으로 목표를 삼겠습니다. 병사 박진(朴晉)과 우후(虞侯) 권응수(權應銖), 밀양 부사 이수일(李守一) 및 부장(部將) 정대임(鄭大任) 등 모든 장수가 모두 안동ㆍ예천(醴泉) 등지에 모여서 경영하고 살핀 지가 이미 수개월이 가까우나, 적이 편리한 지점을 점거하고 있고 더구나 중간에 큰 내가 가로막혀 장수들이 모두 어렵게 여기어 아직까지 한 번도 공격하지 못하니, 통분하고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여 정예한 군사 2천 명을 선발하여 응수에게 맡겨서 기회를 보아 밤에 습격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장차 10여 고을의 군사와 말을 징발하여 의성(義城)ㆍ안덕(安德) 등지에 주둔하여 인동의 적세를 엿보아 만약 기회만 오면 크게 한번 공격할 것이며, 만약 불편하면 날랜 군사를 가지고 밤에 습격하려 합니다. 또 병사로 하여금 대구의 적을 밤에 공격하게 하여 이미 약속을 정하였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군량이 매우 어려워서 군사들로 하여금 스스로 싸가지고 오도록 하자니 민간에 한되 한말의 저축이 없어 굶어 죽은 송장이 길에 잇달았으며, 관량(官糧)을 주자 하니 각 고을의 창고가 간 곳마다 비었으니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도 안동 향병 대장(鄕兵大將) 김해(金垓)ㆍ이정백(李廷栢)ㆍ배용길(裴龍吉) 등이 좌순찰사에게 올린 글은 다음과 같다.
1. 기율(紀律)을 세울 것입니다. 무기는 흉한 기구요, 싸움은 위태로운 일인데 쟁기로 밭 갈고 호미로 밭 매던 백성들을 합하여 흉하고 위태로운 땅으로 가게 하면서 먼저 기율을 세우지 않으면, 비유컨대 양떼를 몰아서 맹수를 치는 것과 같으니 어찌 능히 성공이 있으리오. 옛말에 이르기를, “군사가 장수를 두려워하는 자는 이기고 적을 겁내는 자는 패한다.” 하였으니, 만약 군사가 적을 겁내지 않는다면 그 두려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기율을 세우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기율을 버리고서 군사들이 흩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사닥다리 없이 하늘에 오르고, 배를 버리고서 바다를 건너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지금에 패전한 장수들은 모두 분명한 벌을 피하고 가르치지 못한 백성만이 엄한 벌을 당하니, 도망한 군사만을 베어도 군정(軍政)이 날로 해이해지는 것보다는 한 장수를 베어 기강이 절로 서는 것이 낫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한 사람을 베는 것은 만 사람을 온전히 하는 바이다.” 하였으니, 원컨대 상공(相公)은 기율을 세워서 붕괴되어 흩어짐이 없게 하소서.
2. 관하 수령의 출척(黜陟)을 엄하게 할 것입니다. 천지 사이에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은 모두 도적이라 하는데, 밖에 있는 도적은 그 해가 얕고 안에 있는 도적은 그 해가 깊으니, 밖에 있는 도적을 치려 하면 먼저 안의 도적을 제거하여야 합니다. 무릇 지금에 민심을 잃어서 붕괴하게 만든 것은 실로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수령들이 토색질하고 빼앗아 먹기를 혹독히 하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나, 대궐이 아득하고 멀어서 상벌(賞罰)이 일정하지 못하고 겸하여 상공께서 남의 허물을 용서하고 덕으로써 사람을 감화시키려 하는 까닭에, 저 큰 쥐들이 윗사람의 용서하는 도량을 가만히 엿보아 스스로 벌을 면할 꾀를 쓰고 반이나 죽게 된 백성들의 피를 날로 짜내어 더욱 몸을 살찌울 교묘한 꾀를 부리니, 그 해독이 도리어 왜보다도 심함이 있습니다. 가까운 고을에 몇몇 수령의 죄상이 현저한 것은 상공께서 이미 환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옛날 범방(范滂)이 천하를 깨끗이 맑힐 뜻이 있자 소문만 듣고 인끈[印綬]을 풀어 놓고 가는 자가 서로 잇달았으니, 원컨대 상공은 수령의 출척을 엄히 하여 민적(民賊)을 제거하소서.
3. 좋아함과 미워함을 밝힐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좋아함과 미워함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착한 것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바이요 악한 것은 사람들의 미워하는 바입니다. 천하에 어찌 좋아함과 미워함이 분명치 않고서 능히 국가를 보존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지금에는 위로 임금과 신하에서 아래로 친구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용서하는 것으로 덕을 삼고 충고하는 것을 잘못으로 보아서, 할 말을 하니 않고 구차스럽게 날을 보내어 좋아함과 미워함이 분명하지 않고 시비가 정하여지지 못하여 인심이 의혹하여 좇을 바를 알지 못하니, 국가가 위태로움이 대개 여기에서 말미암았습니다. 《춘추(春秋)》에 이르기를, “곽공(郭公)이 착한 것을 착하게 여기면서도 능히 쓰지 못하고, 악한 것을 악하게 여기면서도 능히 제거하지 못하여 망하는 데 이르렀다.” 하였습니다. 옛글에 이르기를, “어진 이를 보고도 등용하지 못하고, 착하지 못한 이를 보고도 멀리하지 못하는 것은 태만함이다. 사람이 좋아하는 바에 반대되면 재앙이 반드시 몸에 미친다.” 하였으니, 원컨대 상공께서는 좋아함과 미워함을 밝혀서 인심을 일정하게 하소서.
4. 비용을 절약할 것입니다. 이 난리를 당하여 각 고을이 텅 비었는데, 사신을 접대하는 것이 모두 백성에게서 나오니 군관이 많아서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상시에 있어서도 또한 감당하기 어렵다 하거늘 지금 이 난리에 어찌 당하겠습니까. 소위 군관이란 것은 비록 없을 수는 없으나 반드시 쓸 때가 있는 것이요 보통 출입에는 인도하고 따르는 이가 없는 것이 아니니, 군관이 비록 적더라도 위의를 갖출 만합니다. 상공께서 만일 싸움터로 달려갈 뜻이 있다면 병사 이하가 모두 상공의 군관인데, 하필 잡되고 지저분한 무리들을 써야 하겠습니까. 원하건대 상공은 비용을 절약하여 한 폐단을 제거하소서. 무릇 이 네 가지 조건은 비록 훌륭한 계책은 아니라도 진실로 난을 평정하려면 이것을 버리고는 계책이 없습니다. 다만 적을 토벌하는 방책은 이 네 가지보다 급한 것이 있는 줄을 알기 때문에 전일에는 군사를 뽑는 방법을 건의하여 전구(前驅)에 쓰게 하였더니, 도리어 사패(射牌)의 항오에 편입하여 마침내 행차를 호위하는 것으로 삼으니 몸을 부지하는 데도 겨를이 없는데 용맹을 뽐낼 것은 어느 때이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상공이 능히 이 네 가지 조건에 반드시 먼저 유의한 연후에야 군사를 가르치고 적을 토벌할 수 있는 것이요, 만약 이 말을 좋다고만 하고 깊이 살피지 아니하여 썩은 선비의 말이라고 본다면, 한신(韓信)ㆍ백기(白起 진(秦) 나라의 명장)가 장수가 되고 군사를 1백만이나 거느린다 해도 상공이 장차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대저 건의하는 것이 어려움이 아니라 실용에 적합함이 어렵고, 말을 구하는 것이 어려움이 아니라 채택하여 시행하기가 어려운 것이니, 어리석은 저희들은 이미 건의는 하였으나 그 말이 실용에 적합할지 않을지는 알지 못합니다. 혹시 상공께서 전일에 말을 구하던 성의를 그대로 지니어 반드시 채용하여 시행하시면, 국가를 위해 수치와 욕을 씻는 데에 아마도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상공은 굽어 살피소서.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도 함창 의병 소모관 전 봉교(奉敎) 정경세(鄭經世)는 좌도 각 고을 수령 및 사림 제군자(士林諸君子)에게 격문으로 고하나이다.
하늘이 돌보지 않아 난리가 평정되지 않은 때 세 계절이 이미 다 지났으나 원수의 적이 아직 치성하여 평정하고 회복하기가 거의 기약이 없으니, 신하와 백성 된자로서 적과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통분함은 피차가 마음이 한 가지 일 것이니, 차마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대개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인이라 스스로 헤아려 보매 유위(有爲)할 수가 없는 줄을 극히 잘 알고 있으나, 분격한 뜻으로 능히 힘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의병으로 모이는 거사를 초가을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사의 세력이 고단하고 약하여 아직도 성 하나 공격하여 부수지 못하고 진 하나 섬멸하지 못하였으며 구구이 베어 죽인 것이 비록 반백(半百)에 이르렀으나, 정위새[精衛鳥]가 돌을 물어다 바다를 메우매 바다는 메워지지 아니하니 이 사이에 통분하고 민망한 생각을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수년 동안 전란의 나머지에 연로(沿路) 일대에는 공사(公私)가 텅 비어 군량이 땅을 쓴 듯 떨어졌는데 판출할 길이 없어 온갖 방법으로 경영하여 근근이 지탱한 지가 지금 이미 6개월입니다. 사방으로 망연히 돌아보아도 호소할 곳이 없어 장수와 군사가 굶주리고 피곤하여 용맹을 베풀 곳이 없으니, 수양(睢陽)의 군사는 겨우 쥐를 파먹는 것을 면하였고 동군(東郡)의 군사는 겨우 아직 투구를 삶아 먹을 지경에만 이르지 않았을 뿐입니다. 왼쪽에 밥이 있고 오른쪽에 죽이 있는 낙(樂)은 없고 아침에 흩어지고 저녁에 무너질 걱정이 있는데, 이러고도 여러 군자에게 고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의 죄입니다. 그윽히 생각건대, 좌도[江左]의 여러 주변에는 비록 전란을 겪었으나 적이 오래 머물지 아니하여 농사의 풍년이 평일과 다름이 없거늘 하물며 적이 가지 않은 고을도 있음이겠습니까. 남은 것을 나누어 위급한 이를 구해주고 가산을 탕진하여 군비를 돕는 것은 이것이 정히 여러 군자가 힘을 다할 시기입니다. 아,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고 승여가 진흙과 이슬을 맞으며 고생하시며 남은 백성이 거의 죽어가니, 연(燕) 나라의 점령을 당한 제(齊) 나라의 땅 중에 보존된 것이 몇 성이었습니까. 수천 리 조총의 강토와 2백 년 의관과 문물이 모두 왜놈[卉服]의 손과 불꽃 속에 들어갔으니, 무릇 이 땅에서 먹고 살아 이씨의 신하와 백성이 된 자라면 누구인들 창을 베고 쓸개를 맛보아 하늘에 사무치는 통분을 조금이나마 풀려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여러 군자께서 피눈물을 삼키는 정성을 가지신 지가 오래일 것입니다. 위청(衛靑)은 일개 천한 종의 출신이로되 오히려, “흉노를 멸하지 못하였는데 집을 가질 수 없다.” 하였고, 복식(卜式)은 한 평민이로되 오히려, “재물이 있는 자는 관에 납입하고, 용맹이 있는 자는 변방에서 죽으면 흉노를 멸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한 나라 때에 흉노는 반드시 토벌해야 할 죄가 없었지마는 신하된 이가 능히 그 임금을 위하여 뜻을 가다듬음이 이와 같았으므로 무제(武帝)가 오랑캐를 물리쳐서 땅을 개척한 공이 예전 역사에서 견줄 자가 없거늘, 하물며 오늘날의 욕됨은 실로 신자로서 차마 말하지 못할 바가 있는데 이겠습니까. 닥쳐올 걱정이 또 오늘보다 심함이 있을 터인즉 오늘의 일은 진실로 조금도 늦출 수가 없는데, 우리들의 정성이 능히 옛사람과 같다면 또 어찌 적을 멸하지 못하고 공을 세우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원컨대 격문이 이르는 날에는 많으나 적으나 힘에 따라 각기 양식을 내어 군향(軍餉)을 도와주어서 이 모집된 군사로 하여금 붕괴되어 흩어지는데 이르지 않고 불러 모은 군사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하게 하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아, 북궐(北闕)의 애통한 교서는 모두 신자가 피눈물을 뿌려야 할 말씀이니 동해에 빠져 죽기 전에는 우리들이 목숨을 바칠 날이 이를 것입니다. 기꺼이 들으실 것이라 생각하므로 이에 충고하나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도 안동의 전 검열 김용(金涌)이 군사를 모집하는 통문은 다음과 같다.
아, 이것이 어떠한 때인가. 이 어찌 몸을 숨기고 해를 피하여 제 몸만 편안하기를 도모할 날이랴. 승여가 파천하고 경성이 함몰되며, 열한대의 왕릉이 먼지를 뒤집어썼고 억만 백성의 피가 땅에 흘렀다. 신하가 되고 자식이 되어 군부의 수치와 욕됨이 무궁하고, 부모가 되고 형제가 되고 부부가 되어 골육의 원통함이 이미 지극한데, 아, 죽지 않고 남은 우리가 어찌 차마 환한 대낮에 낯을 들고 팔짱을 낀 채 요망한 적을 보면서 원한을 씻을 도리를 생각하지 아니하랴. 하물며 혹독한 불길이 사방에서 치성하여 누에가 뽕잎을 점차 먹어 들어오는 것 같고, 우리들이 어육이 될 걱정은 비늘처럼 차례로 겹쳐 오니 비록 한 구석에서 구차히 살려하여도 역시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이 짐승이 된다면 모르거니와 진실로 우리 군부를 생각하여 원수와는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는 것을 안다면 어찌 한번 죽음을 결단하고 일어나지 않겠는가. 생등(生等)은 복수를 결심하여 쓸개를 맛보기 여러 달이 어서 밤중에 주먹을 불끈 쥐고 관병을 모으려 하니 관병이 이미 흩어졌고, 막부(幕府)에 협력하려 하니 막부는 제 직임이 아니었다. 썩은 선비의 오활한 계책이 시설(施設)할 데 없는 줄을 오래 전부터 알았지마는 오히려 목숨을 버릴 각오를 잊지 아니함은 참으로 원수를 갚아야 할 의리가 있고 헛되게 죽어서는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용감한 사람을 얻어 심복의 동지를 삼는다면 바다를 굴리고 산을 돌리는 것도 모두 어려울 바가 없을 것이니, 저 적이 비록 많은들 무엇이 두려우랴. 이에 감히 남은 장정들에게 두루 타이르고 옆으로 중들을 모았더니 수십 일이 못 되어 수백 명이 되었다. 장차 몸을 잊고 약속에 달려가서 마음과 힘을 일치하여 나아가 죽는 것이 영광이 되고, 퇴각하여 사는 것이 욕이 되는 줄을 알 것이니, 저 도망하고 붕괴된 군사가 오직 두려워 쥐처럼 숨기에 겨를이 없는 자들과 비교해 볼 때에 그 용감함과 비겁함이 또한 현저하지 아니한가. 다만 난을 겪은 뒤에 이미 도두 탕진되어 양식은 콩 반쪽의 저축이 없고 기계는 활촉 한 개도 남은 것이 없어 우레처럼 달리고 번개처럼 칠 군사가 거의 다 빈 전대[橐]만 가졌고, 기를 들고 힘을 뽐낼 무리들이 반은 빈주먹이라, 한갓 왜놈을 잡을 뜻은 간절하나 용맹을 쓸 곳이 없으니 이것이 실로 오늘의 한 가지 큰 걱정이다. 그윽히 생각건대, 열 집 사는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한 사람이 있는 것이요, 흙덩이의 보탬도 태산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한두 이웃 고을은 집이 모두 열 집이 넘고 선비가 모두 의리를 아니 적이 경계에 들어오기 전에 준비할 길이 있다. 윗사람을 위해 죽는 데에 어찌 을가(乙可)의 종이 없겠는가. 대대로 농사에 힘썼으니 또한 차달(車達)의 곡식이 많을 것이다. 진실로 원하건대, 글이 이르는 날에는 각기 정성을 다하여 충성을 바치기를 생각하여, 향병에 이미 나갔다고 핑계대지 말고 관군에 다 맡겼다고 어렵게 알지 말라. 힘이 미치는 데는 응모하기를 메아리[響]처럼 하여 혹은 자제를 보내고 혹은 종을 보내며, 혹은 군량의 소용으로 쌀이나 콩, 피곡(皮穀)이나 필목(匹木), 혹은 군기에 소용되는 것으로 아교나 깃, 전죽[箭]이나 철물 같은 것을 가지고 갖가지로 서로 도와 한번 승낙에 변함이 없으면 여러분이 가진 것 중에서 내놓기는 어렵지 않고 군수(軍需)에 쓰이는 데는 심히 관계되어 나라를 중흥시키는 정성이 이 한 번의 도움에 의뢰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어찌 장하지 않겠는가. 만약 웅번(雄藩)과 거진(巨鎭)도 간 곳마다 흙 무너지듯 하고 용사와 명장(名將)도 모두 바람처럼 쓰러지는데 ‘백면 서생(白面書生)이 무엇을 하랴.’ 하고 한 번 웃기만 하고 힘을 써주지 아니한다면 자못 여러분에게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니, 마음을 맞추어 원수를 갚겠다는 원을 또 장차 어디에 기대하랴. 아, 이제부터는 죽고 사는 것이 마땅히 적을 치고 치지 못하는 데서 결정되리니,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 어찌 국록을 먹고 먹지 않음으로 인하여 차별이 있으리오. 일이 성공하면 신명과 사람에게 설분(雪憤)이 될 수 있고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또한 헛된 죽음에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니 여러 군자들은 힘쓸지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소모사(召募使) 변이중(邊以中)이 완산(完山)에서 각 고을에서 징발한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 길로 향하다.
○ 송응창(宋應昌)ㆍ이여송(李如松)이 대군을 거느리고 중국 조정에서 우리나라로 오는데 주사관(主事官) 원황(袁黃) 등이 먼저 강을 건너 용만(龍灣)에 이르러 권유문(勸諭文)을 내니, 다음과 같다.
흠차 경략방해어 왜군 병부무고 청리직방청리사 원외랑(欽差經略防海禦倭軍兵部武庫淸吏職方淸吏司員外郞) 유황상(劉黃裳)과 사주사(司主事) 원황은 의병을 권유하여 광복(匡復)을 함께 도모하노라. 살피건대 그대 나라가 본시 문물을 숭상하고 대대로 충성을 돈독히 하더니 근자에 왜이(倭夷)가 무도하여 마구 몰아와 집어삼켜 임금과 신하가 풀밭에 파천하여 유리(流離)함이 어찌 이리도 곤한고. 대명 황제께서는 그대들이 2백 년간 신하의 직분을 삼가 지켜온 것을 생각하여 만금의 비용을 아끼지 아니하고 장수를 명령하여 와서 토벌하게 하신다. 그대 나라 가운데 어찌 종척(宗戚)으로 중한 소임을 맡아 충성과 의분이 마음에 가득한 이가 없겠으며, 어찌 현관(縣官)으로 지방을 지켜 강개히 목숨을 바치는 이가 없겠으며, 어찌 충신으로 임금이 욕되면 신하가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은 이가 없겠으며, 어찌 의사로 몸을 버려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이가 없으리오. 마땅히 황제께서 떨친 위엄을 받들어 속히 의병을 불러 각기 일려(一旅)의 군사를 이끌고 함께 아홉 번 토벌[九伐]할 뜻을 펴라. 지금 왜구는 비록 강성하나 그 형세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요, 그대 나라는 비록 미약하나 그 형세는 반드시 이긴다. 시험 삼아 헤아려 보자. 우선 천도(天道)로써 말하겠다. 조선의 분야는 석목(析木)의 부분에 해당하고 지난해부터 세성[木星]이 인방(寅方)에 왔는데 일본이 와서 침범하니, 이것은 우리가 득세하였는데 저놈들이 침범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역행(逆行)하면 비록 강성하더라도 반드시 약해질 것이 첫째이다. 왜구는 추위를 겁내는 것인데 금년은 궐음(厥陰)이라 풍목(風木)이 하늘을 맡아서 양명조금(陽明燥金)이 초(初)의 기(氣)가 되니, 입춘(立春) 뒤에도 오히려 2, 30일 동안은 한기가 녹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시(天時)를 꾀할 수 있는 것이 둘째이다. 그대 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함께 이 성중에 있는데 새벽에 일어나 기상을 바라본즉 아름다운 서기(瑞氣)가 비단과도 같고 그림과도 같다. 그러므로 왕기(王氣)가 우리한테 있으매 형세가 반드시 회복된 것이 셋째이다. 다음에는 인사(人事)로써 논하겠다. 대국의 웅장한 군사가 범과 같고 곰과 같으며, 무적(無敵)의 대포를 한 번 쏘면 한 발(發)에 천보씩 가니 저들이 힘을 헤아리지 않다가 마땅히 가루가 될 것이 첫째이다. 경략 송(經略宋 소응창)은 지혜가 깊고 꾀가 감추어져 있어 귀신도 측량하기 어렵고, 제독 이(提督李 이여송)는 가슴속에 가득한 충의와 백 번 싸움을 겪은 용맹으로 옛 명장의 기풍이 있다. 본직(本職)이 본래 충성을 가지고 그들과 마음을 한가지로 하고 힘을 맞추어 이 적을 멸하여 천자에게 보답하기를 맹세하고 두 나라의 군사를 합하였으니, 궁한 적을 몰아내기는 떨어지는 것을 떨치는 것과 같이 쉬울 것이 둘째이다. 관백(關白)이 포악하여 위로는 그 임금을 협박하고 아래로는 그 백성을 혹사하니 하늘이 그들을 망치려고 우리에게 손을 빌리는 것이다. 어제 국왕을 뵈었는데 거동이 안상(安詳)하고 얼굴이 준수하고 장하니 형세가 반드시 중흥할 것이요, 그대 나라에서 전에 보낸 여러 사신이 천조에 청병할 적에 성의가 간측(懇側)하여 눈물이 쏟는 듯하여 신포서(申包胥)가 초국(楚國)을 위해 우는 충성과 방불하니 임금과 신하가 이러한데 어찌 끝내 함몰되리오. 이것으로 적을 토벌하면 어느 공인들 이루지 못하랴. 왜놈이 믿는 바는 오직 조총(鳥銃)인데 세 번 쏜 뒤에는 곧 계속하기 어렵고, 그 군사가 비록 많으나 강한 놈은 얼마 없어 앞에 오는 1, 2백 명만 죽이면 나머지는 모두 바람을 따라 도망할 것이니 이것이 가히 이길 기회요, 정히 지사(志士)의 공을 세울 시기이다. 우리 조정에서 영을 내리기를 우리나라 그대 나라 사람을 물론하고 다만 평수길(平秀吉) 및 중 현소(玄蘇)를 사로잡거나 베는 자는 은 1만 냥을 상으로 주고 백작(伯爵)을 봉하여 세습하며 수길의 가신(家臣) 평행장(平行長)ㆍ평의지(平義智)ㆍ평조신(平調信) 등 이름있는 여러 추장(酋長)을 사로잡거나 베이는 자는 매번 은 5천 냥을 상주고 지휘사(指揮使)를 세습하며, 그 이하에 무릇 베이고 포로로 잡은 데는 각각 상격(賞格)이 있을 것이다. 그대 나라 신하와 백성이 다만 능히 때를 타고 군사를 모아서 함께 큰 공을 세우면, 이미 본국의 사직을 회복하고 또 천조의 후한 상을 받아서 쇠한 나라의 남은 백성으로서 집안을 일으키는 시조가 될 것이니 어찌 유쾌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하여 글을 내리니 모름지기 속히 각 도의 신하와 백성에게 전해 보여서 의병으로 이미 일어난 자는 곧바로 전진하고, 일어나지 않은 자는 속히 불러 모아 혹은 협력하여 적의 위세를 꺾고 혹은 번갈아 나가 싸워서 적의 세력을 분산되게 하며, 혹은 그 물러가는 길을 막고 혹은 그 양식 운반의 길을 끊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모두 스스로 편리한 데에 따라 하기를 허락하노라. 이를 위하여 글을 내니 꼭 도착하게 하라.
25일.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이 대군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의주(義州)에 들어와서 곧 본국에 격문을 보내니, 다음과 같다.
흠차 경략계요 보정 산동 등처 방해어 왜군무 병부시랑 송(欽差經略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兵部侍郞宋)은 조선 국왕에게 격문을 보낸다. 동해에 개국하여 천조에 정삭(正朔 정월 초하루)과 조공을 받든 지 2백 년간에 충성과 공순함을 바치기를 하루같이 하였다. 시서(詩書)를 외우고 법받아 학사(學士)와 유자(儒者)의 풍도가 빛나니 다른 나라와 견줄 바가 아니다. 지금 황제께서 신성하사 사해를 어루만져 편안케 하여 만이(蠻夷)를 복종시킬 적에 유독 왕의 나라의 책봉에는 덕의가 심히 두터웠다. 지금 북으로는 달단(韃靼)에 이르고, 남으로는 안남(安南)ㆍ섬라(暹羅) 등 모든 나라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합밀(哈密) 여러 민족에 이르기까지 모두 향화(向化)되어 머리를 조아리고 토산물을 바쳐 앞다투어 뒤질까 저어하는데, 저 일본은 조그만 미꾸라지처럼 섬 안에 있으므로 다시 묻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찌 왕의 나라와 이웃하여 왕이 선량한 종족으로 풍속이 무(武)를 익히지 않았음을 업신여기고 문득 마구 엄습하여 전란을 일으켜서 이미 왕경(王京)을 빼앗고 평양을 점령하며, 왕의 두 아들을 포로로 하고 왕의 선영[先墳]을 파헤치며, 충신을 찢고 열녀를 죽이니 극히 악하고 참혹하고 독함은 신명과 사람이 함께 분히 여긴다. 왕이 이미 파천하여 의주에 거처하고 세력이 부족하고 힘이 약하여 천조에 구원을 청하니 폐하께서 깊이 측은히 여기시고 크게 성내시어 본부(本部 병부)에 명령하여 소사마(少司馬)로 하여금 깃발과 도끼를 잡게 하시었다. 군사가 일어나매 꾀있는 신하와 맹렬한 장사가 비바람처럼 모여들어 활을 당기고 창을 뽐내며 말을 달리고 수레를 몰아, 비단 깃발은 하늘의 해를 가리고 우레 같은 북소리는 바다 물결을 진동하여 모두 강한 놈을 베고 약한 이를 붙들며 곤란한 이를 건지고 충성된 이를 보전케 하여 천하에 대의를 펴고 큰 이름을 만세에 날리려 하고 있다. 왜놈이 비록 우둔하나 역시 지각이 있는 것들이니, 우리 군사가 동으로 와서 토벌하는 것을 듣고 곧 머리를 숙여 땅에 엎드리고 헐떡이는 주둥이로 밤에 도망하여 저의 본국에 돌아가 평정하여 한다면, 이것은 그들이 형세를 헤아리고 힘을 비교하여 화(禍)를 바꿔 복을 만들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매하여 마음을 바꾸지 않고 자신들이 견고하다고 믿는 것이 전과 같다면, 곧 불수레를 몰고 귀신의 채찍을 갈겨서 번개처럼 달리고 뇌성처럼 빨리 평양을 포위하고 함락시켜 선봉을 피칠할 것이다. 하물며 이미 민(閩)ㆍ광(廣)의 장수로 하여금 섬라(暹羅)와 유구(琉球) 여러 나라의 군사와 연락하여 배를 젓고 돛대를 날려 바로 일본의 소굴을 두들기고 다시 진(秦 섬서(陝西))의 정예(精銳)와 촉(蜀 사천(四川))의 극모(僰矛), 연(燕 북경 이북)의 철기(鐵騎)와 제(齊 산동(山東))의 지극(枝戟), 삭방(朔方 요동(遼東))의 건아(健兒)를 징발하여 봉황성(鳳凰城)에 진을 쳤는데이겠는가. 압록강을 건너 대마도에 도달하여 맹세하기를, 왜놈의 종족을 벌하여 피가 바다에 뜨고 골수는 산에 발라 귀역(鬼蜮)이 모두 소멸되고 이무기와 고래들을 끊어 죽여서 왕으로 하여금 왕경에 돌아가서 옛 땅을 안정시켜 폐하에게 보답하고 우러러 빛나는 기운을 펴기로 하였다. 왕은 지금 마땅히 복수의 일념으로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보아 그대 나라의 사대부와 더불어 남은 군사를 수합하여 용맹을 떨쳐 힘껏 싸워서 회복하기를 도모할 것이니, 저 평양 제도(諸道)에 어찌 충의와 호기(豪氣)로 내응하는 이가 없겠는가. 가만히 꾀하고 묵묵히 통하여 지혜를 깊이하고 정신을 길러서 그 형편을 보아 요해지를 굳게 지키라. 천병이 이르기를 기다려 한 곳에 군사를 합하여 왕에게 음부(陰符)를 주고 장수들에게 분포하여 진군할 차례를 지시하여 비린내를 깨끗이 씻어 함께 기이한 공을 바랄 것이니 폐하의 신령하심을 드러내고 기자(箕子)의 옛 땅을 보존하도록 하라. 불과 같이 해외에 공을 세운 것은 성탕(成湯)의 군사요, 일려로 하(夏) 나라의 왕업을 중흥시킨 것은 소강(小康)의 어짊이니, 왕은 힘써서 대대로 떨치게 할지어다. 격문이 이르거든 자세히 생각하여 마땅히 율령(律令)과 같이하라.
○ 체찰사(體察使) 정철(鄭澈)이 종사관(從事官) 송영구(宋英耈)로 하여금 군사와 말을 충청ㆍ전라에서 수합하여 천병에 합세하라는 격문에 응하기로 하다. 이때에 남정(男丁)은 노약(老弱)한 자들까지 모두 징발되어 싸움터로 나갔으므로, 영구가 지경에 들어가자 군사를 수합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이르는 고을마다 품관(品官)과 교생(校生)으로 하여금 각기 한 명씩을 바치게 하고 바치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 군대에 가게 하였더니, 선비들이 종사관의 앞에 들어와서 명단을 바치는 것이 모두 부호(浮戶)였으므로 문득 도망하여 흩어지기에 다시 선비들을 군사에 충당하여 각 고을의 수령들이 친히 데려다가 전주(全州)에 바치는데 정철이 듣고 중지시켰다. 영구는 다만 산졸(散卒) 수백 명만 얻어서 경성으로 향하였다. 당시에 남원 판관 노종령(盧從齡)이 이미 파면되고 홍영(洪嶸)을 임명하였더니, 이에 이르러 홍영이 영구를 따라 경성으로 가는데 각 고을 수령이 따르는 자 또한 많았다. 계사년 3월 경성 수복 후에 모두 돌아왔다.
○ 개령(開寧)에 주둔한 왜장이 본현의 백성에게 고한 것은 다음과 같다.
우시안예(羽柴安藝)와 재상(宰相) 휘원(輝元)은 일본의 관백(關白)인 수길(秀吉)에게 명을 받았다. 우리 왕이 대명(大明)에 뜻이 있어 이 나라에 길을 빌리려 하였더니 이 나라 국왕이 듣지 않았으므로 이에 장수들을 명령하여 모든 장수를 8도에 나누었다. 유악(帷幄) 가운데서 계획을 하여 천 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하니, 그 성을 함락하고 그 마을을 불태워 없고 이미 조선 국왕을 손바닥 속에 쥐었다. 개령 백성에게 고하노니, 개령 백성들은 왜 돌아오지 아니하는가. 돌아와서 각기 그 직업에 안정하여 농부는 제 농사를 지어 혹은 물을 대고 풀을 매며, 장사꾼은 장사하여 혹은 그 재물을 교통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옳다. 비록 깊은 산골에 있어 종적을 숨기고 1백 년을 지낸들 또한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재물을 좋아하고 처자를 위하는 자는 큰일을 이루지 못하나니 너희들이 속히 산에서 내려와 항복하면 상관(上官)이 알아서 재물을 빼앗고 처자를 포로하는 자를 금할 것이다. 그 사이에 비록 법을 범하는 자가 있더라도 그 죄에 중벌을 줄 것이니 주면 무슨 거리낄 것이 있겠느냐. 이 글을 보매 더욱 그놈들의 고기를 먹고 싶다.
경기 감사 권징(權澄)이 파면되고 심대(沈岱)가 대신하여 삭녕(朔寧)에 와 있었는데 적병이 불의에 야습하여 드디어 죽임을 당하였다. 적이 심대의 머리를 가져다가 서울에서 효시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보이다. 심대의 아들이 은을 가지고 가만히 들어가서 아버지의 머리를 가지고 나와 몸에 연결하여 장사지냈다.
[주-D001] 급(汲) : 
적병의 머리 하나 베는 것을 급이라 한다. 그것은 적의 머리 하나에 벼슬[爵] 1급을 주던 옛날의 예에 의해서 부른다.
[주-D002] 봉비(封臂) : 
종을 심부름시킬 때에 빨리 돌아오도록 하기 위하여 종의 팔에다 노끈으로 아프게 묶고 거기다 도장을 찍어 봉하여 돌아와서야 풀어주는 방법이니, 종이 그 아픔을 못 견디어 빨리 돌아오게 된다.
[주-D003] 근왕(勤王) : 
왕실의 일에 군사로써 힘을 다하여 근로하는 것이다.
[주-D004] 임시 섭정[權攝] : 
선조(宣祖)가 의주로 파천하면서 세자인 광해군(光海君)을 후방에 머물게 하여 임시로 섭정하게 하였다.
[주-D005] 이극(貳極) : 
임금의 자리를 극(極)이라 하므로 세자는 이극이라 한다. 이(貳)는 부(副)의 뜻이다.
[주-D006] 분조(分朝)의 책임 : 
임금이 파천해 가면서 세자에게 분조의 권한을 준 것이니, 분조는 조정의 지부(支部)란 말이다. 즉 조정의 권한을 대행할 수 있는 것이다.
[주-D007] 나 홀로 고생한다는 슬픔 : 
《시경(詩經)》에 “나만 홀로 현명하여 노고하네[我獨賢勞].” 하였으니, 국사(國事)에 혼자 오래 고생한다는 의미이다.
[주-D008] 술을 쏟아 …… 마시게 하니 : 
진(晉) 나라와 초(楚) 나라가 전쟁할 때에 어느 사람이 임금에게 술 한 병을 바쳤는데, 임금이 전쟁하는 군사에게 나누어 마시게 하고 싶으나 술이 적어서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술을 하수(河水)에 쏟아서 군사들로 하여금 그 물을 마시게 하니, 군사들이 감격하여 힘껏 싸워서 초 나라가 크게 이겼다.
[주-D009] 신릉군(信陵君) : 
전국 시대(戰國時代) 위(魏) 나라의 신릉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秦) 나라의 침략을 받은 조(趙) 나라를 구하였다.
[주-D010] 적개(敵愾) :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왕의 노함을 적대한다[敵王所愾].”는 말이 있는데, 신하가 임금의 적을 공격한다는 뜻이다.
[주-D011] 관중(關中) : 
한 고조(漢高祖)가 항우(項羽)와 싸워서 천하를 통일하였을 때에 지금의 서안(西安)인 관중을 근거지로 하였다.
[주-D012] 궁금(宮禁)을 숙청 : 
당(唐) 나라 덕종(德宗)이 주자(朱泚)의 난을 만나 지방으로 파천하고 주자가 서울을 점령하였는데, 이성(李晟)이 주자를 쳐서 멸하고 서울을 수복한 뒤에 덕종에게 아뢰는 글에 “신이 이미 궁금을 숙청하였습니다[臣已肅淸宮禁].” 하였다. 궁금은 곧 궁궐을 말한다.
[주-D013] 소하(蕭何) : 
한 고조가 항우와 싸울 때에 관중을 지키고 있던 소하가 군량을 끊이지 않고 전지에 보급하였으므로 뒤에 공신이 되었다.
[주-D014] 문교(文巧)로 ……그치리라 :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초기에 어떤 사람이 한 나라 초연수(焦延壽)가 《주역(周易)》의 학자로서 지은 점치는 책인 《초씨림(焦氏林)》으로 점을 치니, 그 중에 이 문구가 있었다. 원문에는, 「文巧俗敝, 將反大質, 僵死如麻, 血流漂杵, 民知其母, 不知其父, 然後乃止.」라고 되어 있다.
[주-D015] 하늘을 쏘려는 꾀 : 
은(殷) 나라 임금 무을(武乙)이 가죽 주머니에다 피를 담아 놓고서 활로 쏘면서, “내가 하늘을 쏘아서 이겼다.” 하였는데, 그 뒤 들에 나갔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 여기서는 왜놈이 명(明) 나라를 침범하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D016] 장소가 …… 바라노라 : 
송(宋) 나라가 중원(中原)을 금(金) 나라에 빼앗기고 남방에 쫓겨 와 있을 때, 상소가 북으로 중원에 들어가서 선대의 능들을 살펴보고 보고를 올렸다.
[주-D017] 한관의 위의를 어디서 볼꼬 : 
전한(前漢) 말기에 왕망(王莽)을 쳐부수려고 의병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유수(劉秀)가 왕망의 의관 제도를 버리고 다시 한 나라 제도를 썼더니, 백성들이 보고 환영하며, “오늘날에 다시 한 나라 관(官)의 위의(威儀)를 볼 줄 몰랐다.” 하였다.
[주-D018] 주운(朱雲)의 칼을 청하였으니 : 
한(漢) 나라의 주운이 임금에게 아첨한 신하를 베라고 곧은 말을 한 일이다. 임금이 노하여 어사(御史)를 시켜 끌고 가서 죽이게 하니 주운이 크게 소리 지르기를, “장차 땅 밑에 가서, 옛날에 곧은 말 하다가 죽은 충신인 용봉(龍逄)ㆍ비간(比干)과 놀겠다.” 하고, 난간을 잡고 놓지 않자, 난간이 꺾어졌다.
[주-D019] 호방형(胡邦衡)의 봉사(封事) : 
남송(南宋)의 호전(胡銓)의 자가 방형이니, 금(金) 나라와 강화하여서는 안 된다는 유명한 상소를 올리고 귀양갔다.
[주-D020] 역적 정 …… 착(浞)에게 비하였는데 : 
하(夏) 나라 때에 유궁후 예(有窮后羿)는 한착(寒浞)이 극히 흉악한 역적이었다. 전주(全州) 사람 정여립(鄭汝立)이 처음에는 큰 선비로 이름이 나서 이이(李珥) 등이 추천하고 이발(李潑) 등이 친하였는데, 조헌(趙憲)이 그를 장차 예나 착과 같은 자이다 하였고, 그 뒤에 정여립이 역적의 죄로 죽었다.
[주-D021] 신하는 큰 강이 있으니 : 
삼강(三綱)에, “아버지는 아들의 강(綱 그물의 벼리줄)이 되고 임금은 신하의 강이 되며, 지아비는 아내의 강이 된다.” 하였다.
[주-D022] 용사의 해 : 
임진년과 계사년의 왜란이므로 용(龍 辰)과 사(蛇 巳)의 해라 하였다.
[주-D023] 운이 양구를 당하여 : 
음양가(陰陽家)에 백륙 양구(百六陽九)라는 말이 있으니, 1백 6년 중에 심한 재난의 해가 있다고 한다.
[주-D024] 초수(楚水)에서 깨어 있음을 읊었으니 : 
초(楚) 나라의 굴원(屈原)이 강호(江湖)에 추방을 당하여 글을 짓기를, “온 세상이 다 취하였는데 나 홀로 깨어 있네.” 하였다.
[주-D025] 지혜는 병을 이끄는 데 :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비록 병을 이끌어 물을 긷는 조그만 지혜만 있어도 제 그릇을 지켜서 남에게 주지 아니한다.” 한 말이 있다.
[주-D026] 종을 단 듯한 집 : 
《춘추좌전》에, “집이 달아 놓은 종과 같다[室如懸磬].” 한 말이 있으니, 그것은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왜적의 분탕질로 그런 빈 집도 없어졌다는 말이다.
[주-D027] 모래를 말질하는 민망함 : 
남북조 시대 송(宋) 나라 장수 단도제(檀道濟)가 군중에서 양식이 떨어지자 적이 그 틈을 노릴까 염려하여 군량이 새로 도착된 것처럼 꾸미느라고 밤에 모래를 말질[斗]하여 헤아리는 소리를 외쳐 적을 속였더니, 아침에 적들이 양식 더미가 쌓인 것을 보고는 퇴각하였다.
[주-D028] 땔나무를 끄는 뜻 : 
《춘추 좌전》에, 진(晉) 나라가 초(楚) 나라와 싸울 때에 진 나라 장수 난지(欒枝)가 땔나무를 끌고서 거짓 도망하는 척하다가 옆으로 공격하여 승전하였다.
[주-D029] 한 삼태기에 공이 무너져서 : 
공자(孔子)의 말에, “아홉 길[九仭]의 산을 만드는 데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해서 공이 무너진다.” 하였다.
[주-D030] 구공을 빌려 달라는 소 : 
한(漢) 나라 구순(寇恂)이 하내 태수(河內太守)로 있다가 갈렸는데, 광무제(光武帝)가 하내를 지나자 백성들이 길을 막고 구공(寇公)을 1년만 더 살려 달라 하였다.
[주-D031] 학익진(鶴翼陣) : 
진법(陣法)의 하나이니, 학이 날개를 벌리는 형상으로 진을 치는 것이다.
[주-D032] 가장(假將) : 
조정의 명령이 빨리 통하지 못하므로 각 도의 순찰사 등이 임시로 장수를 임명하니, 이를 가장이라 한다.
[주-D033] 친구가 …… 끊으려 하네 : 
옛날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매 종자기(鍾子期)가 곡조를 잘 알았는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를 줄을 끊어 버리고 다시 타지 않았다.
[주-D034] 출사표(出師表) : 
제갈량(諸葛亮)이 위(魏)를 치려고 출병하면서 임금에게 올린 표문(表文)을 출사표(出師表)라 하였다.
[주-D035] 중악(中岳)에서 달에 …… 뛰어나왔고 : 
김유신이 소년 시절에 나라를 구할 큰 뜻을 품고 경주 중악의 석굴에 들어가 기도하였다. 뒤에 대장이 되어 당 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치는데 당 나라 대장과 말다툼이 있어 유신이 성을 내니 칼이 절로 칼집에서 뛰어나왔다.
[주-D036] 죄기(罪己)의 교서 : 
나라 일이 위급하면 임금이 민심을 위로하기 위하여 자기에게 죄를 돌려 스스로 꾸짖고 뉘우치는 글을 발표한다.
[주-D037] 손인갑이 강물에 빠져 죽었음 : 
손인갑은 창녕 사람으로 낙동강에서 왜적과 싸워 크게 이긴 뒤에, 달아나는 왜놈을 추격하다 모래 속에 빠져 죽었다.
[주-D038] 관백 : 
한(漢) 나라 소제(昭帝)가 어리므로 곽광(霍光)이 정무를 맡았으므로 모든 정부는 곽광에게 먼저 경유하여 여쭈었다〔關白〕. 일본의 막부(幕府)가 정무를 마음대로 하므로, 관백(關白)이라 칭하였다.
[주-D039] 내소(來蘇) : 
《서경(書經)》에, “우리 임금을 기다렸더니 임금이 오니 살아났다[待我后后來其蘇].” 하였다.
[주-D040] 옥석구분(玉石俱焚) : 
《서경》에, “곤강에 불이 붙으면 옥과 돌이 함께 탄다[火炎崑岡玉石俱焚].” 하였으니, 곤강은 옥이 생산되는 산이므로 불이 나면 옥과 돌이 구별 없이 탄다는 말이다. 대개 난리에 양민과 적이 한꺼번에 죽는 경우를 비유한 것이다.
[주-D041] 진정(秦庭)에서 통곡함은 …… 가진 것 : 
오(吳) 나라가 초(楚) 나라에 침입하매 임금이 도망하였다. 초 나라 신하 신포서(申包胥)가 진(秦) 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매 진 나라에서 얼른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신포서는 진 나라 궁전의 뜰에 서서 7일 7야로 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으니 진왕이 감동되어 군사를 내 주었다.
[주-D042] 업(鄴)의 군사가 …… 주기 위함 : 
진(秦) 나라가 조(趙) 나라를 침노할 때에 위(魏) 나라 신릉군(信陵君)이 업(鄴)에 주둔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조 나라를 구하였다.
[주-D043] 오창(敖倉)의 곡식이 …… 보존하기 어려웠을 것이요 : 
한 고조(漢高祖)가 성고에 있는 오창에 쌓인 곡식을 먼저 점령하여 전쟁에 이기는 기본이 되었다.
[주-D044] 견아(犬牙) : 
옛날에 지방을 나눌 때에 이 군(郡)과 저 군과의 경계를 평행으로 하지 않고 개의 어금내[犬牙]처럼 서로 교착되게 하였다.
[주-D045] 화유(火維) : 
화유는 남방의 분야이니, 남방이 화(火)에 속한 까닭이다.
[주-D046] 금성(金城)과 천부(天府) : 
금성은 쇠로 만든 것처럼 견고한 성이란 말이요, 천부는 하늘이 자연적으로 만든 부(府)라는 뜻이다.
[주-D047] 추로(鄒魯) : 
맹자가 추(鄒)에 살았고 공자가 노(魯)에 살았으므로 그 후세에 그 지방에 학자가 많다.
[주-D048] 금탕(金湯) : 
금성탕지(金城湯池)란 말이다. 탕지는 끓는 못이니, 사람들이 건너지 못하는 것이므로 험한 방어 지대에 비유한다.
[주-D049] 봄 제비가 …… 짓는 것 : 
《남사(南史)》에 나온 말이니, 참혹한 난리를 겪어서 인가가 없으므로 봄 제비가 집 지을 곳이 없어 숲 속 나무에 집을 지었다 하였다.
[주-D050] 제 나라 …… 고을만이 남았고 : 
연(燕) 나라가 제 나라를 전부 짓밟았는데 거ㆍ즉묵 두 성이 남아서 수복하는 근거가 되었다.
[주-D051] 삼천 리 …… 두보(杜甫)가 슬퍼하였습니다 : 
당 나라 시인 두보가 난리를 만나 촉중(蜀中)에 피해 있으면서 지은 시가 많으니, 검각은 촉중의 높은 산이다.
[주-D052] 하(夏) 나라의 일려(一旅) : 
하(夏) 나라 소강(少康)이 일려의 남은 군사로 중흥하였다.
[주-D053] 강회(江淮)의 보장(保障) : 
당 나라 안녹산(安祿山)의 난리에 장순이 수양성을 굳게 지켜서 적세를 막아 강회에 보장이 되었다.
[주-D054] 누가 한 나라 …… 신이라 칭하겠으며 : 
한 나라 경공(耿恭)이 북선우(北單于)와 싸울 때에 화살에 독약을 발라서 쏘며, “한 나라 화살은 신(神)이 있으니 맞으면 이상한 징조가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 화살을 맞은 자는 상처가 부풀어 올랐다 한다.
[주-D055] 경계(庚癸)의 소리 : 
경계는 양식이 떨어졌다는 암호이니, 《춘추좌씨전》에 나온다. 양식이 떨어지면 밤에 ‘경계’ 하고 외치라 하였으니, 곡식은 서방[庚方]에 속하고 물은 북방[癸方]에 속하므로 곡식을 청하는 암호로 쓴 말이다.
[주-D056] 회서(淮西)의 소범(小范) : 
송 나라에서 서하(西夏)를 방어하기 위하여 회서를 지키는 이가 전에는 범옹(范雍)이 있고 뒤에는 범중엄(范仲淹)이 있으므로 중엄을 소범이라 하였는데, 서하에서 범중엄을 두려워하였다.
[주-D057] 강좌(江左)의 이오(夷吾) : 
이오는 춘추시대 제 나라 관중(管仲)의 자이다. 진(晉) 나라가 중국을 빼앗기고 강좌(江左 강동(江東))로 옮아갔을 때에 왕도(王道)가 승상(丞相)으로 있었다. 환이(桓彛)가 처음 강동에 가서 조정이 미약한 것을 보고 실망하였으나, 왕도를 보고는, “내가 관이오(管夷吾)를 보았으니 다시 걱정이 없다.” 하였다.
[주-D058] 이공(二公)이 섬(陝)을 나누기는 하였으나 : 
주공(周公)은 섬의 서쪽을 맡고 소공(召公)은 섬의 동쪽을 맡았다.
[주-D059] 적벽(赤壁)의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날고 : 
조조(曹操)가 80만 군사를 거느리고 강동(江東)을 치려고 적벽강(赤壁江)에 군사를 끌고 가서 군중에서 시를 짓기를, “달 밝고 별 드문데 까막까치가 남으로 나네.” 하였다. 곧 싸움에 패하여 도망하여 돌아왔다.
[주-D060] 곤양(昆陽)의 무소와 …… 흩어질 것이요 : 
한 나라를 회복하려는 군사들이 곤양(昆陽)에서 왕망(王莽)의 백만 군사와 싸우는데 왕망의 군사는 물소[犀] 코끼리[象] 호랑이들을 몰고 와서 싸움을 돕게 하였다. 비가 크게 오매 모진 짐승들이 벌벌 떨면서 흩어지고 왕망의 군사는 패하고 말았다.
[주-D061] 요(堯)의 의미를 …… 될 것을 : 
어느 사람이 공자를 보고, “그의 이마는 요(堯)와 같다.” 하였다. 여기서는 임금의 얼굴을 말한 것이다.
[주-D062] 촉으로 가는 잔도(棧道) : 
당 명황(唐明皇)이 안녹산의 난을 피하여 촉(蜀)으로 파천하였는데 촉에는 산길이 험하여 잔도(棧道 사닥다리 길)로 통행하였다.
[주-D063] 한궁(漢宮)에 풀이 푸르며 : 
이것은 서울의 궁궐이 풀밭이 된 것을 말한다.
[주-D064] 숙(叔)ㆍ백(伯)이 귀먹은 듯함 : 
《시경》에 〈모구편(旄丘篇)〉에, 여(黎)의 임금이 나라를 잃고 위국(衛國)에 와 있으매 그 신하들이 시를 짓기를, “높은 언덕[旄丘]의 칡덩굴이 벌써 마디가 컸구나. 우리가 여기 온 지 세월이 오래되었는데, 위국의 신하인 숙(叔)ㆍ백(伯)들은 귀먹은 듯 우리의 말을 들어 주지 않는구나.” 하였다.
[주-D065] 궁금(宮禁)을 숙청하고 …… 볼 만하였고 : 
당 나라 이성(李晟)이 주자(朱泚)난을 평정하고 임금에게 올린 글에, “신이 궁금을 숙청하고 종묘에 공경히 뵈니, 악기도 옮기지 않았으며 종묘의 모양이 전일과 같습니다.” 한 문구가 있었다.
[주-D066] 신정에 모여서 ……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 
진(晉) 나라가 강동 한구석으로 쫓겨간 뒤에 하루는 여러 사람들이 신정에 모여서 놀다가 주이(周顗)가 눈물을 흘리며 고국을 생각하였다. 왕도(王導)가, “마땅히 힘을 다하여 국사를 할 것이지, 초수(楚囚)처럼 서로 대해 우는가.” 하였다. 초수는 초 나라의 종의(鍾儀)가 진 나라에 포로가 된 것을 인용한 말이다.
[주-D067] 음기(飮器) : 
춘추 시대에 진(晉) 나라 지백(智伯)이 조 양자(趙襄子)를 멸하려 하다가 도로 패하여 죽었다. 조 양자는 지백의 두골(頭骨)에 옻칠을 하여 마시는 그릇으로 만들었다.
[주-D068] 흔고(釁鼓) : 
옛날에 북을 새로 만들면 짐승의 피로 발라서 틈[釁]을 메우는데, 전시에는 적을 잡아 죽여서 쓰기도 하였다.
[주-D069] 하늘을 깁기 : 
옛날 전설에 하늘이 기울어지는 것을 여와씨(女媧氏)가 돌을 다듬어서 하늘을 기웠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는 기울어지는 나라를 붙든다는 뜻이다.
[주-D070] 사직의 신하로 …… 돌아오시게 하고 : 
당 덕종(唐德宗)이 주자(朱泚)의 난에 봉천(奉天)으로 파천하였는데 이성(李晟)이 장안(長安)을 수복하여 임금을 모셔왔다. 덕종은, “하늘이 이성을 낳은 것은 사직을 위함이로다.” 하였다.
[주-D071] 간성(干城)의 장수 : 
무인(武人)은 국가를 방어하고 보호하는 방패[干]와 성(城)이다 하였다. 《시경(詩經)》
[주-D072] 이(李)ㆍ곽(郭)의 충성 : 
당 나라 안녹산(安祿山)의 난은 이광필(李光弼)ㆍ곽자의(郭子儀) 두 장수의 공으로 평정되었다.
[주-D073] 종천(終天)의 원통함 : 
하늘이 끝날 때까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부모의 원수를 말한다.
[주-D074] 정위(精衛) : 
새의 이름이니, 옛날 염제(炎帝)의 딸이 바다에 빠져 새로 변하여 동해를 메우려 하였다 한다.
[주-D075] 금혁(金革)의 변례(變禮) : 
상주가 국가의 난을 당하였을 때에는 상례를 지키지 못하고 변례로 무기[金]를 들고 갑옷[革]을 입고 나오는 것이다.
[주-D076] 맹진(孟津)을 막는 것 : 
작은 흙으로 맹진(孟津)의 세찬 물결을 막는 데 비유하였다.
[주-D077] 중류의 지주(砥柱) : 
황하의 중류에 지주라는 바위 기둥이 있으니, 홍수가 아무리 범람하여도 지주는 우뚝 서 있다.
[주-D078] 태원(太原)을 침략당한 욕 : 
주 선왕(周宣王) 때에 북방 오랑캐가 태원을 침범하였다.
[주-D079] 기운이 산하(山河)를 웅장하게 하고 : 
조(趙) 나라 충신 조정(趙鼎)이 분하게 죽으면서, “나의 기운이 산하가 되어 본조(本朝)를 웅장하게 하리라.” 하였다.
[주-D080] 길보(吉甫) : 
주 선왕(周宣王)의 신하로 오랑캐를 축출하였다.
[주-D081] 곽거병(霍去病) : 
한 무제의 명장으로 흉노를 토벌하였다.
[주-D082] 일곱 발자국 …… 없기를 기약하여 : 
《서경(書經)》에 군령(軍令)을 선포하는 서사(誓辭)에, “세 발자국 다섯 발자국 일곱 발자국 안에 군령을 범치 말라.” 하였다.
[주-D083] 매처럼 드날리는 공 : 
강태공(姜太公)이 목야(牧野)의 싸움에 매처럼 드날렸다[鷹揚] 한다.
[주-D084] 갈노(羯奴) : 
오호(五胡)의 하나로 흉노의 별종이니, 산서성(山西省)에 살았다.
[주-D085] 방숙(方叔) : 
주 선왕의 장수로 북방 오랑캐를 쳐서 쫓았다.
[주-D086] 맹시사(孟施舍)의 용맹 : 
《맹자》에, “맹시사의 용맹은 적을 헤아린 뒤에 나아가고, 이길 것을 생각한 뒤에 시작한다.” 하였다.
[주-D087] 조괄(趙括)의 겁 : 
조(趙) 나라 장수 조괄은 겁이 많아서 진(秦) 나라 군사에게 패하였다.
[주-D088] 도끼가 이지러지지도 : 
주공(周公)이 동방을 정벌하고 돌아오면서, “나의 도끼가 이미 이지러졌네.” 하였다.
[주-D089] 기하(岐下)의 천도(遷都) : 
주(周) 나라 태왕(太王)이 적(狄)의 침략을 피하여 기산 밑으로 옮기었다.
[주-D090] 이수(李收) : 
전국 시대 조 나라의 명장으로 흉노를 토벌하였다.
[주-D091] 기린각 : 
한 나라 선제(宣帝)가 공신(功臣)들을 기린각(麒麟閣)에 초상을 그려 붙였다.
[주-D092] 6월편 : 
《시경》의 편명(篇名)으로, 주 선왕이 흉노를 토벌한 일을 읊은 시다.
[주-D093] 곤이(昆夷) : 
주 문왕(周文王)이 곤이의 강함을 당하지 못하여 섬겼었다.
[주-D094] 배수진(背水陣) : 
임진 왜란 때 신립이 조령(鳥嶺)을 지키자는 김여물(金汝物)의 말을 듣지 않고 한신(韓信)의 병법을 본받는다고 충주의 달천(撻川)을 뒤에 두고 배수진을 쳤다가 패하였다. 한신이 조(趙) 나라와 싸울 때에 배수진을 쳐서 이기자, 싸운 뒤에 여러 장수들이 묻기를, “병법에, ‘오른쪽과 등 뒤에는 산과 언덕을 두고 앞과 왼편에는 물을 끼고 진을 친다.’ 하였는데, 오늘 장군이 물을 등 뒤에 두고 진을 쳐서 이긴 것은 어떤 까닭입니까?” 하였다. 한신이 말하기를, “내가 한 방법도 병법에 있으니, 군사를 죽을 땅에 집어넣어야 힘껏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 제군들은 내가 평소부터 어루만져 길러온 부하들이 아니니 장판의 사람을 몰아서 싸우는 것과 같다. 편리한 땅에 진을 치면 모두 도망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등 뒤에 물이 있어 갈 데가 없으니 전진이 있었을 뿐이다.” 하였다. 신립은 경우와 사세가 다른 데도 이 병법을 잘못 썼다가 패하여 죽었다.
[주-D095] 천시(天時)ㆍ지리(地理) …… 귀한 것인데 : 
《맹자》에, “천시가 지리보다 못하고 지리가 인화보다 못하다.” 하였다.
[주-D096] 허통 : 
서얼이나 문벌이 낮은 자는 문과에 올라 청직(淸職)을 할 수 없었는데, 여기서는 곡식을 바친 자에게 청직의 길을 터준 것이다.
[주-D097] 면천 : 
천인(賤人)에게 신분의 구속을 풀어 주어 천역(賤役)의 기록에서 빼준 것이다.
[주-D098] 빈을 떠남 : 
주 나라 태왕(太王)이 적을 피하여 도읍인 빈을 버리고 옮겨갔다.
[주-D099] 범방(范滂)이 천하를 …… 서로 잇달았으니 : 
후한(後漢) 말기에 각 지방에 탐관이 많으므로 안찰(按察)하는 사자(使者)를 나누어 보냈다. 범방이 수레에 오르면서 천하를 맑힐 뜻이 있자, 탐관오리들이 소문만 듣고도 인수를 풀어 놓고 가는 자가 많았다.
[주-D100] 곽공(郭公)이 착한 …… 망하는 데 이르렀다 : 
제 환공(齊桓公)이 놀러 나갔다가 한 노인을 만나서 그 지방의 역사를 물은즉 노인은, “저기가 곽공이 망한 터입니다.” 하였다. 제 환공이, “곽공은 어찌하여 망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곽공은 착한 것을 착하게 여기고 악한 것을 악하게 여겼습니다.” 하였다. 제 환공이, “그런데 왜 망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착한 것을 착하게 여기면서 쓰지를 못하고, 악한 것을 악하게 여기면서도 제거하지 못하므로 망하였습니다.” 하였다.
[주-D101] 수양(睢陽)의 군사는 …… 것을 면하였고 : 
당 나라 장순(張巡)이 수양을 치는데, 오래 포위되어 양식이 없으므로 나는 새를 그물로 잡아먹고 사람까지 수만 명을 잡아먹었다.
[주-D102] 아홉 번 토벌 : 
촉한(蜀漢)의 강유(姜維)가 한(漢) 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여 중원(中原)을 아홉 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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