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라, 가라, 다라, 임나가 백제에 가서 임나 재건에 대해 논의함
여름 4월에 안라(安羅)의 차한기(次旱岐)주 001
이탄해(夷呑奚), 대불손(大不孫), 구취유리(久取柔利) 등과 가라(加羅)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
주 002, 졸마한기(卒麻旱岐)
주 003, 산반해한기(散半奚旱岐)
주 004의 자식, 다라(多羅)의 하한기(下旱岐) 이타(夷他), 사이기한기(斯二岐旱岐)
주 005의 자식, 자타한기(子他旱岐)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미마나야마토노미코토모치)주 006
성명왕은 “옛날 우리 선조 속고왕(速古王), 귀수왕(貴首王) 주 013의 치세 때에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 등이 처음 사신을 파견하여 통교하고 두텁고 친밀한 우호관계를 맺어 자제(子弟)가 되어 항상 번영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금 신라에 속아 천황의 분노를 사고 임나의 원한을 산 것은 과인의 잘못이다. 나는 깊이 후회하고 하부(下部) 중좌평(中佐平) 마로(麻鹵) 주 014, 성방(城方) 갑배매노(甲背昧奴) 주 015 등을 보내 가라주 016에 가서 임나의 일본부를 만나 서로 맹세하게 하였다. 이후 이 일을 계속 염두에 두어 임나를 세우는 계획을 조석으로 잊지 않았다. 지금 천황이 조를 내려 ‘속히 임나를 세워라’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그대들과 함께 모의하여 임나 등의 나라를 수립하고자 한다. 마땅히 잘 계획해야 한다. 또한 임나의 국경에 신라를 불러 조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 묻겠다. 동시에 사자를 보내 천황에게 주상하여 삼가 교시를 받겠다. 만약 사자가 돌아오기 전에 신라가 틈을 엿보아 임나를 침공하면 나는 반드시 가서 구할 것이다. 걱정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방비를 잘하고 조심하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그대들이 탁순 등이 화를 입은 것이 두렵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신라가 스스로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탁기탄은 가라와 신라의 경계에 있어서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망한 것이다. 임나도 구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멸망한 것이다. 남가라는 땅이 협소하여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할 수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탁순은 임금과 신하가 나뉘어 뿔뿔이 흩어져 왕 스스로가 귀부하려는 생각으로 신라에 내통하였다. 이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삼국이 패망한 것은 모두 이유가 있었다. 옛날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여 임나와 백제를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그러니 신라가 어찌 홀로 임나를 멸망시키겠는가? 지금 과인이 그대들과 힘과 마음을 합쳐 천황의 힘을 빌리면 임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각각 차등있게 주었다. 모두 기뻐하며 돌아갔다.
번역주 006)
의 길비신(吉備臣;키비노오미)주 007 任那日本府의 初出이다. 安羅에 있었기 때문에 安羅日本府로도 나온다. 『日本書紀』에서 임나일본부 기사는 흠명천황 2년조(541)부터 15년조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임나일본부가 언제 설치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흠명천황 2년 4월조에서 성명왕이 계체천황대의 일을 회고하면서 근강모야신을 임나일본부라 부르고 있다. 즉 백제 측은 근강모야신을 임나일본부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흠명 14년 일본부경 적신이 사망한 후 일본부경은 다시 임명되지 않았으며, 同 15년의 ‘在安羅諸倭臣’을 최후로 임나일본부 기사는 보이지 않아 임나일본부의 하한은 554년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日本府’라는 명칭은 6세기 중엽에 실재한 명칭은 아니다. ‘日本’과 ‘府’는 7세기 말 이후의 것으로 후대 왜에서 일본으로 국호가 바뀐 후에 가필 수정된 것이다. 그럼에도 ‘日本府’의 ‘府’자 때문에 종래 일본학계에서는 이를 기관적인 성격으로 이해해 왔다. 그런데 현존 최고의 『日本書紀』 주석서인 『釋日本紀』에서는 임나일본부를 일본음으로 ‘미마나노야마토노미코토모치’로 읽고, ‘任那之倭宰’라는 주석을 달고 있다. ‘야마토’는 왜를 의미하여, ‘미코토모치’는 천황의 의지를 전달하는 사람 즉 사신을 의미한다. 따라서 ‘임나일본부’는 임나에 파견된 ‘왜의 사신’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에 흠명천황 15년 12월조 보이는 ‘在安羅諸倭臣(안라에 주재한 왜신들)’이 임나일본부의 실태에 가깝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임나일본부의 실체 및 성격규정에 관한 연구의 흐름을 시대적으로 보면 왜왕권의 가야지배설, 백제의 가야지배설(백제군사령부설), 왜왕권이 파견한 사신설, 외교기관설, 가야의 독립를 위한 기관설, 교역설 등이 등장하였다. 임나일본부 문제는 6세기 전반대 가야제국이 자국에 침투해 오는 주변제국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먼저 가야제국의 정치외교사적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번역주 007)
[이름이 빠졌다.]이 백제에 가서 함께 조서(詔書)를 들었다. 백제의 성명왕(聖明王)
주 008이 임나의 한기들에게 “일본 천황이 조를 내린 바는 오로지 임나를 재건하라는 것이다. 이제 어떤 책략으로 임나를 재건할 수 있겠는가. 모두 각자 충성을 다하여 천황의 뜻이 펼쳐지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임나 한기들은 “이전에 두세 차례 신라와 의논하였으나 회답이 없었습니다. 의도하는 바를 다시 신라에 알린다고 해도 여전히 대답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함께 사신을 천황에게 보내 보고해야 할 것입니다. 무릇 임나를 재건하는 것은 대왕(大王)주 009의 뜻에 달려있습니다. 삼가 교지를 받드는 것에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하지만 임나의 국경이 신라와 접해있기 때문에 탁순주 010 등이 화를 입을까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등이라는 것은 탁기탄(㖨己呑)주 011, 가라(加羅)주 012를 말한다. 탁순 등의 나라처럼 망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日本府의 중심인물로 나온다. 『日本書紀』 흠명천황 5년 3월조에 吉備弟君臣이란 인물이 보이는데 吉備臣이 이 吉備弟君臣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日本書紀』에는 吉備氏의 활약상이 여러 곳에 걸쳐 기록되어 있는데, 주로 한반도에서 활약한 내용을 담고 있다. 任那國司였던 吉備上道臣田狹이나 신라정토에 파견된 田狹의 아들 弟君(『日本書紀』 웅략천황 7년 시세조), 日本府行軍元帥의 한 사람인 吉備臣小梨(웅략천황 8년조), 신라정토의 장군이었던 吉備臣尾代(웅략천황 23년조) 등이 보인다. 吉備氏는 5세기대에 현재 岡山縣과 廣島縣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철과 소금 교역 등 瀨戶內海의 해상교통을 장악하여 세력을 넓혔고, 大王家와 혼인관계를 맺고 국내 군사행동에도 깊이 관여함으로써 번영을 누린 씨족이다. 5세기 중엽 이후 길비씨의 반란전승 및 둔창 설치는 이전에 길비씨가 갖고 있었던 한반도 남부와의 외교 교섭권을 大和政權이 장악해가는 과정의 사건들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성명왕은 “옛날 우리 선조 속고왕(速古王), 귀수왕(貴首王) 주 013의 치세 때에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 등이 처음 사신을 파견하여 통교하고 두텁고 친밀한 우호관계를 맺어 자제(子弟)가 되어 항상 번영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금 신라에 속아 천황의 분노를 사고 임나의 원한을 산 것은 과인의 잘못이다. 나는 깊이 후회하고 하부(下部) 중좌평(中佐平) 마로(麻鹵) 주 014, 성방(城方) 갑배매노(甲背昧奴) 주 015 등을 보내 가라주 016에 가서 임나의 일본부를 만나 서로 맹세하게 하였다. 이후 이 일을 계속 염두에 두어 임나를 세우는 계획을 조석으로 잊지 않았다. 지금 천황이 조를 내려 ‘속히 임나를 세워라’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그대들과 함께 모의하여 임나 등의 나라를 수립하고자 한다. 마땅히 잘 계획해야 한다. 또한 임나의 국경에 신라를 불러 조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 묻겠다. 동시에 사자를 보내 천황에게 주상하여 삼가 교시를 받겠다. 만약 사자가 돌아오기 전에 신라가 틈을 엿보아 임나를 침공하면 나는 반드시 가서 구할 것이다. 걱정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방비를 잘하고 조심하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그대들이 탁순 등이 화를 입은 것이 두렵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신라가 스스로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탁기탄은 가라와 신라의 경계에 있어서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망한 것이다. 임나도 구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멸망한 것이다. 남가라는 땅이 협소하여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할 수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탁순은 임금과 신하가 나뉘어 뿔뿔이 흩어져 왕 스스로가 귀부하려는 생각으로 신라에 내통하였다. 이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삼국이 패망한 것은 모두 이유가 있었다. 옛날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여 임나와 백제를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그러니 신라가 어찌 홀로 임나를 멸망시키겠는가? 지금 과인이 그대들과 힘과 마음을 합쳐 천황의 힘을 빌리면 임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각각 차등있게 주었다. 모두 기뻐하며 돌아갔다.
- 번역주 001)
- 번역주 002)
- 번역주 003)
- 번역주 004)
- 번역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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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6)
任那日本府의 初出이다. 安羅에 있었기 때문에 安羅日本府로도 나온다. 『日本書紀』에서 임나일본부 기사는 흠명천황 2년조(541)부터 15년조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임나일본부가 언제 설치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흠명천황 2년 4월조에서 성명왕이 계체천황대의 일을 회고하면서 근강모야신을 임나일본부라 부르고 있다. 즉 백제 측은 근강모야신을 임나일본부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흠명 14년 일본부경 적신이 사망한 후 일본부경은 다시 임명되지 않았으며, 同 15년의 ‘在安羅諸倭臣’을 최후로 임나일본부 기사는 보이지 않아 임나일본부의 하한은 554년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日本府’라는 명칭은 6세기 중엽에 실재한 명칭은 아니다. ‘日本’과 ‘府’는 7세기 말 이후의 것으로 후대 왜에서 일본으로 국호가 바뀐 후에 가필 수정된 것이다. 그럼에도 ‘日本府’의 ‘府’자 때문에 종래 일본학계에서는 이를 기관적인 성격으로 이해해 왔다. 그런데 현존 최고의 『日本書紀』 주석서인 『釋日本紀』에서는 임나일본부를 일본음으로 ‘미마나노야마토노미코토모치’로 읽고, ‘任那之倭宰’라는 주석을 달고 있다. ‘야마토’는 왜를 의미하여, ‘미코토모치’는 천황의 의지를 전달하는 사람 즉 사신을 의미한다. 따라서 ‘임나일본부’는 임나에 파견된 ‘왜의 사신’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에 흠명천황 15년 12월조 보이는 ‘在安羅諸倭臣(안라에 주재한 왜신들)’이 임나일본부의 실태에 가깝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임나일본부의 실체 및 성격규정에 관한 연구의 흐름을 시대적으로 보면 왜왕권의 가야지배설, 백제의 가야지배설(백제군사령부설), 왜왕권이 파견한 사신설, 외교기관설, 가야의 독립를 위한 기관설, 교역설 등이 등장하였다. 임나일본부 문제는 6세기 전반대 가야제국이 자국에 침투해 오는 주변제국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먼저 가야제국의 정치외교사적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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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7)
日本府의 중심인물로 나온다. 『日本書紀』 흠명천황 5년 3월조에 吉備弟君臣이란 인물이 보이는데 吉備臣이 이 吉備弟君臣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日本書紀』에는 吉備氏의 활약상이 여러 곳에 걸쳐 기록되어 있는데, 주로 한반도에서 활약한 내용을 담고 있다. 任那國司였던 吉備上道臣田狹이나 신라정토에 파견된 田狹의 아들 弟君(『日本書紀』 웅략천황 7년 시세조), 日本府行軍元帥의 한 사람인 吉備臣小梨(웅략천황 8년조), 신라정토의 장군이었던 吉備臣尾代(웅략천황 23년조) 등이 보인다. 吉備氏는 5세기대에 현재 岡山縣과 廣島縣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철과 소금 교역 등 瀨戶內海의 해상교통을 장악하여 세력을 넓혔고, 大王家와 혼인관계를 맺고 국내 군사행동에도 깊이 관여함으로써 번영을 누린 씨족이다. 5세기 중엽 이후 길비씨의 반란전승 및 둔창 설치는 이전에 길비씨가 갖고 있었던 한반도 남부와의 외교 교섭권을 大和政權이 장악해가는 과정의 사건들로 이해해 볼 수 있다.
- 번역주 008)
- 번역주 009)
- 번역주 010)
- 번역주 011)
- 번역주 012)
- 번역주 013)
- 번역주 014)
- 번역주 015)
- 번역주 016)
색인어
- 이름
- 이탄해(夷呑奚), 대불손(大不孫), 구취유리(久取柔利), 고전해(古殿奚), 졸마한기(卒麻旱岐), 산반해한기(散半奚旱岐), 이타(夷他), 사이기한기(斯二岐旱岐), 자타한기(子他旱岐), 길비신, 성명왕(聖明王), 성명왕, 속고왕(速古王), 귀수왕(貴首王), 마로(麻鹵), 갑배매노(甲背昧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