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독부와 그 속현
도독부(都督府) 13현(縣).註 888 우이현(嵎夷縣).註 889 신구현(神丘縣).註 890 윤성현(尹城縣)註 891은 본래 열이(悅已)이다. 인덕현(麟德縣)註 892은 본래 고량부리(古良夫里)이다. 산곤현(散昆縣)註 893은 본래 신촌(新村)이다. 안원현(安遠縣)註 894은 본래 구시파지(仇尸波知)이다. 빈문현(賓汶縣)註 895은 본래 비물(比勿)註 896이다. 귀화현(歸化縣)註 897은 본래 마사량(麻斯良)註 898이다. 매라현(邁羅縣).註 899 감개현(甘蓋縣)註 900은 본래 고막부리(古莫夫里)이다. 나서현(奈西縣)은 본래 나서혜(奈西兮)이다. 득안현(得安縣)註 901은 본래 덕근지(德近支)註 902이다. 용산현(龍山縣)註 903은 본래 고마산(古麻山)註 904이다.
도독부 13현 이하 분차주 4현까지 ‘1도독부(都督府)・7주(州)・51현(縣)’ 체제는 백제 멸망 시의 ‘5도독 37주 250현’ 체제를 개편한 것으로 실시 시기는 664년(인덕 2)~671년(문무왕 11)까지이며, 47개의 주현에 백제 당시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노중국, 1995, 153~163쪽). ‘1도독부(都督府)・7주(州)・51현(縣)’ 체제로의 재편 시기를 663년경 이후로 보는 견해가 있다(방향숙, 1994, 318~320쪽). 도독부 목록은 함께 수록된 669년 이적의 상주문과 당 고종의 칙서, 압록수 이북의 성 현황 목록 등과 유기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669~670년경 당이 웅진도독부의 영역을 재편・확대하고자 했던 계획이 반영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문다성, 2020, 210~223쪽). 한편 7주 51현 기사는 백제 당시의 지명만을 기록했을 뿐 그것이 군인지 성(현)인지 여부를 전하지 않았으며, 백제고지 중 일부 지역에만 해당할 뿐 멸망 때까지 백제 영역으로 남아있던 가야고지는 제외되었다는 주장도 있다(박종욱, 2021, 193~200쪽)
〈참고문헌〉
노중국, 1995, 「『삼국사기』의 백제 지리관계 기사 내용」, 『삼국사기의 원전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방향숙, 1994, 「백제고토에 대한 당의 지배체제」, 『李基白先生 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
문다성, 2020, 「당의 웅진도독부 지배체제의 실상」, 『신라사학보』 49
박종욱, 2021, 「백제 사비기 신라와의 전쟁과 영역 변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참고문헌〉
노중국, 1995, 「『삼국사기』의 백제 지리관계 기사 내용」, 『삼국사기의 원전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방향숙, 1994, 「백제고토에 대한 당의 지배체제」, 『李基白先生 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
문다성, 2020, 「당의 웅진도독부 지배체제의 실상」, 『신라사학보』 49
박종욱, 2021, 「백제 사비기 신라와의 전쟁과 영역 변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우이현(嵎夷縣): 도독부 직속 13현 중에 맨 처음 나열된 것으로 보아, 백제의 옛 수도였던 사비성(충남 부여군 부여읍)을 개칭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660년 나당 연합군의 백제 침공 당시에 당 고종은 신라 태종무열왕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으로 임명한 적이 있었다. 우이(嵎夷)는 『서경(書經)』 요전(堯典)과 『후한서』 권85 동이전 서문 등에 나오는 것으로서, 본래 뜻은 ‘해가 뜨는 동이의 땅’이다. 산동반도의 내이(萊夷)를 가리키기도 하고 중국 동쪽 방면의 구이(九夷)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한반도를 말한다. 종래 우이현을 백제의 지명으로 보지 않았으나, 부여 관북리 출토 286번 목간에서 ‘우이(嵎夷)’라는 지명이 확인되어 도독부 하의 행정단위 명칭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윤선태, 2006, 「백제 사비도성과 ‘嵎夷’ -목간으로 본 사비도성의 안과 밖-」, 『동아고고논단』 2, 충청문화재연구원, 253~254쪽).
신구현(神丘縣): 부여읍 부근인 듯하나,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당시에, 당 고종은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總管)으로 임명했다. ‘신구(神丘)’는 연연산(燕然山)을 높여 말한 것인데(『文選』 권56 封燕然山銘 참조), 연연산은 외몽고 삼음약안부(三音若顔部)의 항애산(杭愛山)의 옛 이름으로서, 후한의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이 영원(永元) 원년(89)에 흉노(北單于)를 정벌하기 위해 이곳까지 출정한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신구도(神丘道)・신구현(神丘縣)이라는 이름은 한나라 때의 흉노 북벌 성공을 기려 당의 백제 원정을 수식코자 한 것으로 보인다. 『구당서』 권83 열전33 소정방(蘇定方) 및 『구당서』 권199 신라전에는 ‘웅진도대총관(熊津道大摠管)’으로,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신구우이마한웅진등십사도대총관(神丘嵎夷馬韓熊津等十四道大摠管)’이라 하였다(정구복 외, 182~183쪽). 한편 신구를 우이와 함께 이종족(異種族) 출신으로서 백제에 귀화하여 도성에 거주하던 집단 또는 행정구역으로 보기도 한다(윤선태, 2006, 253~254쪽). 사비도성의 동쪽과 서쪽에 우이와 신구를 의도적으로 배치하여 사비도성을 천하를 통섭하는 세계의 중심공간으로 표상하려 한 특별행정구역으로 만들고자 했다는 것이다(윤선태, 2007, 210~212쪽).
〈참고문헌〉
윤선태, 2007, 『목간이 들려준 백제 이야기』, 주류성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윤선태, 2006, 「백제 사비도성과 ‘嵎夷’-木簡으로 본 사비도성의 안과 밖-」, 『東亞考古論壇』 2
〈참고문헌〉
윤선태, 2007, 『목간이 들려준 백제 이야기』, 주류성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윤선태, 2006, 「백제 사비도성과 ‘嵎夷’-木簡으로 본 사비도성의 안과 밖-」, 『東亞考古論壇』 2
윤성현(尹城縣): 본래 백제 열기현(悅己縣)이었고, 다른 기록에는 두릉윤성(豆陵尹城), 두량윤성(豆良尹城), 두량이성(豆良伊城) 또는 두관성(豆串城) 또는 윤성(尹城)이라고도 나온다. 지금의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이다(정구복 외, 433쪽). 두량윤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남 청양군 정산면의 계봉산성으로 특정하기도 하고(今西龍, 1934, 38쪽; 盧道陽, 1980, 16~19쪽; 심정보, 1983, 162~165쪽). 금산군 부리면(富利面)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李丙燾 역주, 1977, 101쪽).
〈참고문헌〉
李丙燾 역주,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今西龍, 1934, 『百濟史硏究』, 近澤書店
노도양, 1980, 「百濟周留城考」, 『明知大學論文集』 12
심정보, 1983, 「백제 부흥군의 주요거점에 관한 연구」, 『백제연구』 14
〈참고문헌〉
李丙燾 역주,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今西龍, 1934, 『百濟史硏究』, 近澤書店
노도양, 1980, 「百濟周留城考」, 『明知大學論文集』 12
심정보, 1983, 「백제 부흥군의 주요거점에 관한 연구」, 『백제연구』 14
마사량(麻斯良): 당나라가 백제의 옛 땅에 설치하려던 도독부 귀화현(歸化縣)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6 지리지 신라 무주 보성군 대로현(代勞縣, 전남 보성군 회천면)의 백제 때 지명인 마사량현(馬斯良縣)과 지명이 비슷하나, 도독부로 추정되는 부여읍과 거리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를 신라 전주 임피군(臨陂郡) 옥구현(沃溝縣, 전북 군산시 옥구읍)의 백제 때 지명인 마서량현(馬西良縣)으로 봐야 한다.
매라현(邁羅縣): 매라의 위치에 대해서는 ① 마한 소국 중의 하나인 만로국(萬盧國)의 후세 이름으로 보아, 현재의 충남 보령시 남포면(藍浦面)에 비정한 견해(이병도, 1976, 265쪽), ② 『남제서(南齊書)』 백제전에 전하는 백제왕 모대(牟大)의 건무(建武) 2년(495) 상표문에 사법명(沙法名)을 행정로장군(行征虜將軍) 매라왕(邁羅王)으로 제수해달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때의 매라를 전북 군산시 옥구읍(옛 지명 마서량현(馬西良縣)) 또는 전남 보성군 회천면(옛 지명 마사량현(馬斯良縣))으로 비정하는 견해(末松保和, 1961; 천관우, 1989, 381쪽) 등이 있다. 부여 궁남지에서 출토된 목간에도 매라성(邁羅城)이 나오는데, 이 매라성은 부여 인근 지역으로 여겨진다(김영심, 2003, 121쪽). 따라서 매라는 부여와의 접근성과 해상활동에 유리한 입지조건 등을 고려해 볼 때 현재 충남 보령 남포가 될 가능성이 높은데, 이곳을 사씨세력의 근거지로 보는 견해도 있다(서정석, 2002, 118쪽). 도독부 하의 군현명에 그 이전의 백제 지명이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참고문헌〉
末松保和, 1961,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이병도, 1976,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서정석, 2002, 『백제의 성곽』, 학연문화사
천관우, 1989, 「마한제국의 위치시론」, 『고조선사・삼한사연구』, 일조각
김영심, 2003, 「웅진・사비시기 백제의 영역」, 『고대 동아세아와 백제』, 서경
〈참고문헌〉
末松保和, 1961,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이병도, 1976,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서정석, 2002, 『백제의 성곽』, 학연문화사
천관우, 1989, 「마한제국의 위치시론」, 『고조선사・삼한사연구』, 일조각
김영심, 2003, 「웅진・사비시기 백제의 영역」, 『고대 동아세아와 백제』, 서경
득안현(得安縣):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660) 6월조에 당이 백제 멸망 후 이곳에 덕인도독부(德安都督府)를 설치한 것이다. 득안현은 본래 백제 덕근지(德近支) 또는 덕근군(德近郡)이었고, 뒤에 신라 전주 덕은군(德殷郡, 충남 논산시 은진면)이 되었다.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論山市) 은진면(恩津面)(李丙燾 역주, 1977, 571쪽) 또는 가야곡면(可也谷面)으로 비정된다(정구복 외, 1997, 434쪽).
〈참고문헌〉
李丙燾 역주,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참고문헌〉
李丙燾 역주,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용산현(龍山縣): 백제 때 지명은 고마산(古麻山)이었으나,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본서 권36 지리지 신라 무주 용산현(龍山縣, 광주광역시 광산구 복룡동)과 이름이 같으나, 다른 곳이다.
고마산(古麻山): 당나라가 백제의 옛 땅에 설치하려던 도독부 용산현(龍山縣, 위치 미상)의 백제 때 지명이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남포현(藍浦縣, 충남 보령시 남포면)의 백제 때 지명인 마산(馬山) 또는 그곳에 있는 구룡산(九龍山)의 이름과 비교하기도 하고, 혹자는 가림군(嘉林郡) 마산현(馬山縣, 충남 서천군 한산면)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또한 이를 금마저(金馬渚, 전북 익산시 금마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본 견해도 있고, 조선시대의 충청수군절도사영(忠淸水軍節度使營, 보령시 오천면)을 고마 수영(水營)이라고 하여, 그곳에 비정한 견해가 있으나, 모두 분명하지 않다.
註) 888
도독부 13현 이하 분차주 4현까지 ‘1도독부(都督府)・7주(州)・51현(縣)’ 체제는 백제 멸망 시의 ‘5도독 37주 250현’ 체제를 개편한 것으로 실시 시기는 664년(인덕 2)~671년(문무왕 11)까지이며, 47개의 주현에 백제 당시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노중국, 1995, 153~163쪽). ‘1도독부(都督府)・7주(州)・51현(縣)’ 체제로의 재편 시기를 663년경 이후로 보는 견해가 있다(방향숙, 1994, 318~320쪽). 도독부 목록은 함께 수록된 669년 이적의 상주문과 당 고종의 칙서, 압록수 이북의 성 현황 목록 등과 유기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669~670년경 당이 웅진도독부의 영역을 재편・확대하고자 했던 계획이 반영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문다성, 2020, 210~223쪽). 한편 7주 51현 기사는 백제 당시의 지명만을 기록했을 뿐 그것이 군인지 성(현)인지 여부를 전하지 않았으며, 백제고지 중 일부 지역에만 해당할 뿐 멸망 때까지 백제 영역으로 남아있던 가야고지는 제외되었다는 주장도 있다(박종욱, 2021, 193~200쪽)
〈참고문헌〉
노중국, 1995, 「『삼국사기』의 백제 지리관계 기사 내용」, 『삼국사기의 원전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방향숙, 1994, 「백제고토에 대한 당의 지배체제」, 『李基白先生 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
문다성, 2020, 「당의 웅진도독부 지배체제의 실상」, 『신라사학보』 49
박종욱, 2021, 「백제 사비기 신라와의 전쟁과 영역 변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참고문헌〉
노중국, 1995, 「『삼국사기』의 백제 지리관계 기사 내용」, 『삼국사기의 원전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방향숙, 1994, 「백제고토에 대한 당의 지배체제」, 『李基白先生 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
문다성, 2020, 「당의 웅진도독부 지배체제의 실상」, 『신라사학보』 49
박종욱, 2021, 「백제 사비기 신라와의 전쟁과 영역 변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註) 889
우이현(嵎夷縣): 도독부 직속 13현 중에 맨 처음 나열된 것으로 보아, 백제의 옛 수도였던 사비성(충남 부여군 부여읍)을 개칭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660년 나당 연합군의 백제 침공 당시에 당 고종은 신라 태종무열왕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으로 임명한 적이 있었다. 우이(嵎夷)는 『서경(書經)』 요전(堯典)과 『후한서』 권85 동이전 서문 등에 나오는 것으로서, 본래 뜻은 ‘해가 뜨는 동이의 땅’이다. 산동반도의 내이(萊夷)를 가리키기도 하고 중국 동쪽 방면의 구이(九夷)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한반도를 말한다. 종래 우이현을 백제의 지명으로 보지 않았으나, 부여 관북리 출토 286번 목간에서 ‘우이(嵎夷)’라는 지명이 확인되어 도독부 하의 행정단위 명칭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윤선태, 2006, 「백제 사비도성과 ‘嵎夷’ -목간으로 본 사비도성의 안과 밖-」, 『동아고고논단』 2, 충청문화재연구원, 253~254쪽).
註) 890
신구현(神丘縣): 부여읍 부근인 듯하나,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당시에, 당 고종은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總管)으로 임명했다. ‘신구(神丘)’는 연연산(燕然山)을 높여 말한 것인데(『文選』 권56 封燕然山銘 참조), 연연산은 외몽고 삼음약안부(三音若顔部)의 항애산(杭愛山)의 옛 이름으로서, 후한의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이 영원(永元) 원년(89)에 흉노(北單于)를 정벌하기 위해 이곳까지 출정한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신구도(神丘道)・신구현(神丘縣)이라는 이름은 한나라 때의 흉노 북벌 성공을 기려 당의 백제 원정을 수식코자 한 것으로 보인다. 『구당서』 권83 열전33 소정방(蘇定方) 및 『구당서』 권199 신라전에는 ‘웅진도대총관(熊津道大摠管)’으로, 「부여 당평백제국비(扶餘 唐平百濟國碑)」에는 ‘신구우이마한웅진등십사도대총관(神丘嵎夷馬韓熊津等十四道大摠管)’이라 하였다(정구복 외, 182~183쪽). 한편 신구를 우이와 함께 이종족(異種族) 출신으로서 백제에 귀화하여 도성에 거주하던 집단 또는 행정구역으로 보기도 한다(윤선태, 2006, 253~254쪽). 사비도성의 동쪽과 서쪽에 우이와 신구를 의도적으로 배치하여 사비도성을 천하를 통섭하는 세계의 중심공간으로 표상하려 한 특별행정구역으로 만들고자 했다는 것이다(윤선태, 2007, 210~212쪽).
〈참고문헌〉
윤선태, 2007, 『목간이 들려준 백제 이야기』, 주류성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윤선태, 2006, 「백제 사비도성과 ‘嵎夷’-木簡으로 본 사비도성의 안과 밖-」, 『東亞考古論壇』 2
〈참고문헌〉
윤선태, 2007, 『목간이 들려준 백제 이야기』, 주류성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윤선태, 2006, 「백제 사비도성과 ‘嵎夷’-木簡으로 본 사비도성의 안과 밖-」, 『東亞考古論壇』 2
註) 891
윤성현(尹城縣): 본래 백제 열기현(悅己縣)이었고, 다른 기록에는 두릉윤성(豆陵尹城), 두량윤성(豆良尹城), 두량이성(豆良伊城) 또는 두관성(豆串城) 또는 윤성(尹城)이라고도 나온다. 지금의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이다(정구복 외, 433쪽). 두량윤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남 청양군 정산면의 계봉산성으로 특정하기도 하고(今西龍, 1934, 38쪽; 盧道陽, 1980, 16~19쪽; 심정보, 1983, 162~165쪽). 금산군 부리면(富利面)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李丙燾 역주, 1977, 101쪽).
〈참고문헌〉
李丙燾 역주,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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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도양, 1980, 「百濟周留城考」, 『明知大學論文集』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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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도양, 1980, 「百濟周留城考」, 『明知大學論文集』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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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892
註) 893
註) 895
註) 896
註) 897
註) 898
마사량(麻斯良): 당나라가 백제의 옛 땅에 설치하려던 도독부 귀화현(歸化縣)의 백제 때 지명이다. 본서 권36 지리지 신라 무주 보성군 대로현(代勞縣, 전남 보성군 회천면)의 백제 때 지명인 마사량현(馬斯良縣)과 지명이 비슷하나, 도독부로 추정되는 부여읍과 거리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를 신라 전주 임피군(臨陂郡) 옥구현(沃溝縣, 전북 군산시 옥구읍)의 백제 때 지명인 마서량현(馬西良縣)으로 봐야 한다.
註) 899
매라현(邁羅縣): 매라의 위치에 대해서는 ① 마한 소국 중의 하나인 만로국(萬盧國)의 후세 이름으로 보아, 현재의 충남 보령시 남포면(藍浦面)에 비정한 견해(이병도, 1976, 265쪽), ② 『남제서(南齊書)』 백제전에 전하는 백제왕 모대(牟大)의 건무(建武) 2년(495) 상표문에 사법명(沙法名)을 행정로장군(行征虜將軍) 매라왕(邁羅王)으로 제수해달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때의 매라를 전북 군산시 옥구읍(옛 지명 마서량현(馬西良縣)) 또는 전남 보성군 회천면(옛 지명 마사량현(馬斯良縣))으로 비정하는 견해(末松保和, 1961; 천관우, 1989, 381쪽) 등이 있다. 부여 궁남지에서 출토된 목간에도 매라성(邁羅城)이 나오는데, 이 매라성은 부여 인근 지역으로 여겨진다(김영심, 2003, 121쪽). 따라서 매라는 부여와의 접근성과 해상활동에 유리한 입지조건 등을 고려해 볼 때 현재 충남 보령 남포가 될 가능성이 높은데, 이곳을 사씨세력의 근거지로 보는 견해도 있다(서정석, 2002, 118쪽). 도독부 하의 군현명에 그 이전의 백제 지명이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참고문헌〉
末松保和, 1961,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이병도, 1976,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서정석, 2002, 『백제의 성곽』, 학연문화사
천관우, 1989, 「마한제국의 위치시론」, 『고조선사・삼한사연구』, 일조각
김영심, 2003, 「웅진・사비시기 백제의 영역」, 『고대 동아세아와 백제』, 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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末松保和, 1961,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이병도, 1976,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서정석, 2002, 『백제의 성곽』, 학연문화사
천관우, 1989, 「마한제국의 위치시론」, 『고조선사・삼한사연구』, 일조각
김영심, 2003, 「웅진・사비시기 백제의 영역」, 『고대 동아세아와 백제』, 서경
註) 900
註) 901
득안현(得安縣):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660) 6월조에 당이 백제 멸망 후 이곳에 덕인도독부(德安都督府)를 설치한 것이다. 득안현은 본래 백제 덕근지(德近支) 또는 덕근군(德近郡)이었고, 뒤에 신라 전주 덕은군(德殷郡, 충남 논산시 은진면)이 되었다.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論山市) 은진면(恩津面)(李丙燾 역주, 1977, 571쪽) 또는 가야곡면(可也谷面)으로 비정된다(정구복 외, 1997, 434쪽).
〈참고문헌〉
李丙燾 역주,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참고문헌〉
李丙燾 역주,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903
용산현(龍山縣): 백제 때 지명은 고마산(古麻山)이었으나,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본서 권36 지리지 신라 무주 용산현(龍山縣, 광주광역시 광산구 복룡동)과 이름이 같으나, 다른 곳이다.
註) 904
고마산(古麻山): 당나라가 백제의 옛 땅에 설치하려던 도독부 용산현(龍山縣, 위치 미상)의 백제 때 지명이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남포현(藍浦縣, 충남 보령시 남포면)의 백제 때 지명인 마산(馬山) 또는 그곳에 있는 구룡산(九龍山)의 이름과 비교하기도 하고, 혹자는 가림군(嘉林郡) 마산현(馬山縣, 충남 서천군 한산면)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또한 이를 금마저(金馬渚, 전북 익산시 금마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본 견해도 있고, 조선시대의 충청수군절도사영(忠淸水軍節度使營, 보령시 오천면)을 고마 수영(水營)이라고 하여, 그곳에 비정한 견해가 있으나, 모두 분명하지 않다.
주제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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