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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원성 등 여러 성을 쌓다 ( 673년 09월 )
9월에 국원성(國原城)註 001 옛날의 완장성(薍長城)이다.註 002, 북형산성(北兄山城)註 003, 소문성(召文城)註 004, 이산성(耳山城)註 005, 수약주(首若州)註 006의 주양성(走壤城)註 007 또는 질암성(迭巖城)註 008이라고도 하였다., 달함군(達含郡)註 009의 주잠성(主岑城)註 010, 거열주(居烈州)註 011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註 012, 삽량주(歃良州)註 013의 골쟁현성(骨爭峴城)註 014을 쌓았다.註 015
註) 001
국원성(國原城): 국원성은 현재의 충청북도 충주지역에 위치한 성이다. 본서 권제37 잡지제6 지리4 고구려 한산주조에 “국원성은 혹은 미을성(未乙城) 또는 탁장성(託長城)이라고 하였다.”라고 전한다. 또한 『고려사』 권56 지10 지리1 충주목조에 충주목(忠州牧)이 본래 고구려 국원성(國原城)이며, 혹은 말을성(末乙省; 미을성(未乙省)) 또는 완장성(薍長城)이라고 부른다고 전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국원성을 미을성 또는 말을성, 탁장성, 완장성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국원소경(國原小京)은 진흥왕 18년(557)에 설치되었고, 그 이듬해인 진흥왕 19년(558)에 왕도(王都)의 귀척(貴戚) 자제와 육부(六部) 호민(豪民)을 사민시켜 국원소경을 충실화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야의 일부 왕족을 포함한 상당수의 지배층도 집단 사민되었다고 파악된다. 국원성(국원소경성)을 현재 충주시 교현동 일대에 위치한 봉현성지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박태우, 1987, 67쪽; 양기석, 2001, 79쪽). 국원성(國原城)의 축조 시기는 대체로 673년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충주분지 내 도시구획의 양상으로 보아 7세기 이후로 추정되기도 한다. 충주분지는 남한강과 그 지류인 달천이 합류하는 서쪽을 제외하고, 대림산(남), 남산(남동), 계명산(북동), 계명산에서 서쪽으로 분기한 구릉(북)에 의해 삼면이 둘러싸여 있다. 더욱이 계명산과 남산에서 분지의 중심부로 향해 나지막한 구릉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어서, 실제 시가지를 이룰 수 있는 공간은 매우 한정적이다. 이러한 제약으로 인해 주변 지형에 맞춰 가급적 넓은 평지를 확보하고자 국원소경(중원경)의 시가지 구획의 남북축은 북에서 서쪽으로 약 9도 가량 기울어져 있다고 보기도 한다(황인호, 2014, 133쪽).
〈참고문헌〉
박태우, 1987, 「통일신라시대의 지방도시에 대한 연구」, 『백제연구』 18
양기석, 2001, 「신라 5소경의 설치와 서원소경」, 『신라서원소경연구』, 서경문화사
황인호, 2014, 「신라 9주 5소경의 도시구조 연구」, 『중앙고고연구』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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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2
완장성(薍長城): 본서 권제37 잡지제6 지리4 고구려 한산주조에는 “국원성은 혹은 미을성(未乙城) 또는 탁장성(託長城)이라고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또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문무왕 13년 9월조에는 국원성(國原城)이 고완장성(古薍長城)이었다고 전한다. 『고려사(高麗史)』 권제56 지10 지리1 충주목조에 충주목(忠州牧)이 본래 고구려 국원성(國原城)이며, 혹은 말을성(末乙省; 미을성(未乙省)) 또는 완장성(薍長城)이라고 부른다고 전한다.바로가기
註) 003
북형산성(北兄山城): 지금의 경북 경주시 강동면(江東面)에 국당2리의 형산(兄山)에 쌓은 성을 가리킨다. 본 기록에는 673년에 처음 축조된 것처럼 되어 있다. 하지만 지표 채집된 토기편들이 6세기 토기편인 것으로 볼 때, 문무왕대에 처음 축조된 것이 아니라 이때 수축(修築) 혹은 개축(改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박방룡, 1992, 28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제21 경상도 경주부(慶州府) 산천조(山川條)에는 ‘형산(兄山)’은 본래 ‘북형산(北兄山)’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북형산은 신라시대 중사(中祀)의 대상지였을 만큼 중요한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정구복 외, 2012, 238쪽). 북형산성의 경우 전형적인 육로 접근로와는 거리가 멀다. 경주 북방에서 육로로 내려오는 세력은 구성(龜城)과 양동리성(良洞里城)을 경유하게 되어 있다. 북형산성이 구성 및 양동리성과 일부 연계는 가능하지만, 지형상, 그리고 거리상 유기적이라 보기는 어렵다. 북형산성의 입지는 형산강(兄山江)으로 진입하는 적을 막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강종훈, 2006, 9쪽). 구성과 양동리성이 포항의 청하 또는 흥해 방면에서 남하하는 적을 방어하는데 유리한 반면에, 북형산성은 형산강을 타고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던 것이다.
〈참고문헌〉
박방룡, 1992, 「신라왕도의 수비 -경주지역 산성을 중심으로-」, 『신라문화』 9
강종훈, 2006, 「신라 왕경의 방어체제」, 『신라문화제학술회의논문집』 27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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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4
소문성(召文城): 본서 권제50 열전제10 견훤조에 “동광(同光) 2년(924) 가을 7월에 (견훤이)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보내 대야성(大耶城; 경남 합천)과 문소성(聞韶城) 두 성의 군사를 일으켜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하였으나 성의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지키고 싸웠으므로 수미강이 손해를 보고 돌아갔다”고 전한다. 본 기록에 전하는 소문성과 문소성은 동일한 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5 경상도 의성현 고적조에 “금성산고성(金城山古城)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9,000척(尺), 높이 13척으로 아주 높고 험하다.”고 전한다. 금성산고성은 경북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북동쪽에 위치한 금성산의 금성산성을 가리킨다. 금성산고성이 소문성(문소성)으로 추정된다.바로가기
註) 005
이산성(耳山城): 경북 고령군 고령읍 중화동에 있는 삼국시대 토석혼축산성(土石混築山城)으로 주산성(主山城)이라고도 불린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39쪽). 내성(內城) 둘레 710m, 외성(外城) 둘레 1,035m의 내외성을 갖추고 있는 산성으로 대가야의 중심지로 추정되고 있다.바로가기
註) 006
수약주(首若州):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원년 7월 17일조 참조.바로가기
註) 007
주양성(走壤城): 주양성은 지금의 강원 춘천시에 있는 봉산고성(鳳山古城)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병도, 1986, 120쪽; 정구복 외, 2012, 239쪽). 본서 권제23 백제본기제1 온조왕 13년 8월조에는 백제가 마한(馬韓)에 사신을 보내어 천도를 알리고 강역을 확정하였는데, 북으로는 패하(浿河) 남으로는 웅천(熊川) 서로는 대해(大海) 동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또 온조왕 38년 2월조에는 온조왕이 동쪽으로 순무(巡撫)하여 동쪽으로는 주양(走壤),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는데 50일이 지나서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주양이 백제 초기 수도였던 위례성에서 볼 때 동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참고문헌〉
이병도, 1986,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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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8
질암성(迭巖城): 질암성은 수약주에 위치했던 주양성(走壤城)의 또 다른 이름이다.바로가기
註) 009
달함군(達含郡): 달함군은 대체로 지금의 강원 고성군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39쪽). 본서 권제35 잡지제4 지리2 신라 고성군조에 고성군은 원래 고구려의 달홀(達忽)이라고 전한다.바로가기
註) 010
주잠성(主岑城): 주잠성은 본서 지리지에도 전하지 않는 지명이다. 다만 본문에 달함군에 위치한 것으로 되어 있어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성으로 추정되고 있다.바로가기
註) 011
거열주(居烈州): 거열주는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으로 비정된다. 거타(居陁)라고도 하였다. 원래 가야지역으로서, 우륵(于勒)이 만든 12곡(曲) 중 아홉 번째가 거열(居烈)이다. 이후 진흥왕(眞興王) 23년(562) 무렵 신라에 병합되었다가, 선덕왕(善德王) 11년(642) 대야성(大耶城) 전투 이후 백제에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 3년(663) 2월에 김흠순(金欽純)과 김천존(金天存)이 백제로부터 다시 빼앗았고, 이후 하주(下州)의 주치(州治)와 정군단(停軍團)의 주둔지를 거열(居列)로 옮겼는데, 후대에 이를 거열주를 설치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문무왕 13년(673)에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을 쌓았다. 신문왕 5년(685)에 주치(州治)를 청주(菁州)로 옮기면서 거열군(居烈郡)이 되었으며, 경덕왕 때 이름을 거창군(居昌郡)으로 바꾸어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다.바로가기
註) 012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거열주(居列州)에 만흥사산성을 쌓았다고 했으므로, 현재의 거창지역에 위치한 성이라고 할 수 있다. 만흥사산성은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거창 거열산성으로 비정되고 있는데, 이 거열산성은 삼국시대 내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거열산성에서는 신라 성곽의 축조수법 가운데 하나인 외벽기단보축과 품자형 쌓기, 수평줄눈맞추기 등이 확인되고 있다(이일갑, 2014, 「양산 신기리산성에 대한 소고」, 『문물연구』 26, 59쪽).바로가기
註) 013
삽량주(歃良州): 오늘날 경남 양산시에 해당한다.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良州)조에 “문무왕 5년, 인덕(麟德) 2년(665)에 상주(上州)·하주(下州)의 땅을 분할하여 삽량주를 설치하였다.”고 전하는데, 문무왕 5년(665)에 상주와 하주의 땅 가운데 일부를 분할하여 삽량주를 설치하였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이후 상주의 옛 지역을 일선주(一善州), 하주의 옛 지역을 거열주(居㤠州)라고 불렀다(전덕재, 2001, 「신라 중고기 주의 성격 변화와 군주」, 『역사와 현실』 40). 경덕왕 때에 양주(良州)로 고쳤다. 경덕왕 16년(757)에 광역의 지방행정단위인 양주에는 소경 1개 군 12개 현 34개가 예속되어 있었다.바로가기
註) 014
골쟁현성(骨爭峴城): 673년에 삽량주의 골쟁현성이 축성되었는데, 삼국시대 삽량주에는 세 개의 성이 축조되었다. 본서에는 자비마립간 6년(463)에 왜인이 삽량성(歃良城)을 침입하였고, 문무왕 13년(673)에 골쟁현성을 축조하였으며, 신문왕 7년(687)에 또 삽량주에 성을 쌓았다고 전한다. 또한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조에는 “신문왕 7년(687)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1,260보(步)였다.”고 전한다. 일찍이 둘레가 약 2km에 달하고, 현재 양산시에서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북부동산성을 삽량주성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고(박태우, 1987, 71~72쪽), 근래에 1,260보인 삽량주성의 둘레와 거의 유사한 신기리산성을 삽량주성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이일갑, 2014, 59쪽).
〈참고문헌〉
박태우, 1987, 「통일신라시대의 지방도시에 대한 연구」, 『백제연구』 18
이일갑, 2014, 「양산 신기리산성에 대한 소고」, 『문물연구』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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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5
9월에 국원성(國原城) …… 골쟁현성(骨爭峴城)을 쌓았다: 문무왕 12년(672) 8월에 석문전투(石門戰鬪) 이후 신라 전역에 축조된 성은 모두 11개이다. 새롭게 축성이 이루어지면서 신라 왕경의 외곽 방어망이 완성되고 지방 주요 요충지의 축성이 완료되었다고 평가된다(차용걸, 2006, 185쪽). 그런데 시간상으로 볼 때 모든 성들이 한꺼번에 새롭게 축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강종훈, 2008, 16~17쪽). 기존의 성을 활용하여 개·보수하고 일부는 신축하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문무왕 13년(673)에 축조된 10여 개의 성들은 신라의 방어 전략을 엿볼 수 있는 중요 지표가 된다. 방어하는 측에서 부족한 곳을 보완하기 위해 방어성들을 지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성의 분포를 보면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경주 일대에 이르기까지 신라 전역에 걸쳐 있다. 당시 신라는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당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신라는 임진강 방어선 후방에 주장성(晝長城)·주양성(走壤城)·주잠성(主岑城) 등을 신축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설정하였고, 국원성(國原城)·사열산성(沙熱山城)·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등을 신축하여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하는 방어선을 강화하였다. 또한 소문성(召文城)·이산성(耳山城)·골쟁현성(骨爭峴城) 등을 신축하여 경상도 내륙 방어를 보완하였으며, 서형산성(西兄山城)·북형산성(北兄山城) 등을 신축하여 수도 방어를 완비하였다(이상훈, 2016, 99쪽). 신라는 673년 대대적인 축성작업을 통해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전방위에 걸쳐 방어망을 보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강종훈, 2006, 「신라 왕경의 방어체제」, 『신라문화제학술회의논문집』 27
차용걸, 2008, 「신라 석축 산성의 성립과 특징」, 『석당논총』 41
이상훈, 2016, 「나당전쟁기 신라의 대규모 축성과 그 의미」, 『한국고대사탐구』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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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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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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