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로 지내는 지역
대사(大祀)註 070로 지내는 3산(三山)은 첫째는 나력(奈歷)註 071【습비부(習比部)註 072에 있다】, 둘째는 골화(骨火)註 073【절야화군(切也火郡)註 074에 있다】, 셋째는 혈례(穴禮)註 075【대성군(大城郡)註 076에 있다】이다.
대사(大祀): 신라의 국가적 제사로 산천에 대하여 행하는 것 중에 가장 큰 제사이다. 중국에서 대사는 천자가 행하는 가장 큰 제사였는데, 후한(後漢)의 정사농(鄭司農)과 정현(鄭玄)에 따르면, 주대(周代)에 천지(天地)와 종묘(宗廟)에 대한 제사를 대사(大祀)로 삼았다[鄭司農云 大祀 天地 … 鄭玄謂大祀又有宗廟(『주례주소(周禮註疏)』 권19 춘관종백제3)]고 한다. 한편 『구당서(舊唐書)』 권21 지1 예의(禮儀)1에서 당나라에서는 호천상제(昊天上帝)와 오방제(五方帝), 황지기(皇地祇), 신주(神州) 및 종묘(宗廟)를 대사로 삼았다고 하였고, 『신당서(新唐書)』 권11 지1 예악1에는 천지(天地), 종묘(宗廟), 오제(五帝), 추존(追尊)한 제(帝) 및 후(后) 등에 대한 제사를 대사로 삼았다고 전한다. 이를 통해 당나라 말기에 제사의례가 약간 개편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시조묘(始祖廟)와 신궁(神宮), 오묘(五廟) 및 사직단(社稷壇), 팔자(八䄍), 선농(先農) 등에 대한 제사를 대·중·소사에 편제하지 않고, 명산과 대천에 대한 제사만을 대·중·소사로 구분하였으며, 특히 신라 왕경(王京)과 그 인근에 위치하여 신라 호국신(護國神)이 주석하는 나력(奈歷)과 골화(骨化), 혈례(穴禮) 등 삼산(三山)에 대한 제사를 대사로 삼았는데, 대사의 경우는 대체로 국왕이 친히 제사지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채미하, 2008, 『신라 국가제사와 왕권』, 혜안, 319~320쪽). 고려시대에 원구(圜丘)·방택(方澤)·종묘(宗廟)·사직(社稷)·별묘(別廟), 경령전(景靈殿), 제릉(諸陵)을 대사의 대상으로 삼았고, 조선시대에는 종묘와 사직, 영녕전(永寧殿) 제사만을 대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시조묘(始祖廟)와 신궁(神宮), 오묘(五廟) 및 사직단(社稷壇), 팔자(八䄍), 선농(先農) 등에 대한 제사를 대·중·소사에 편제하지 않고, 명산과 대천에 대한 제사만을 대·중·소사로 구분하였으며, 특히 신라 왕경(王京)과 그 인근에 위치하여 신라 호국신(護國神)이 주석하는 나력(奈歷)과 골화(骨化), 혈례(穴禮) 등 삼산(三山)에 대한 제사를 대사로 삼았는데, 대사의 경우는 대체로 국왕이 친히 제사지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채미하, 2008, 『신라 국가제사와 왕권』, 혜안, 319~320쪽). 고려시대에 원구(圜丘)·방택(方澤)·종묘(宗廟)·사직(社稷)·별묘(別廟), 경령전(景靈殿), 제릉(諸陵)을 대사의 대상으로 삼았고, 조선시대에는 종묘와 사직, 영녕전(永寧殿) 제사만을 대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나력(奈歷): 신라 삼산(三山)의 하나로 왕경(王京) 6부의 하나인 습비부(習比部)에 위치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제1 기이제1 김유신조에는 나림(奈林)으로 전한다. 일찍이 습비부를 경주시 동쪽 및 동남쪽에 걸쳐 있었다고 이해한 다음, 나력을 경주 낭산(狼山)으로 비정하고, 나림을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문호왕법민조에 낭산 남쪽에 있었다고 전하는 신유림(神遊林)으로 추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7, 498~499쪽; 홍순창, 1983, 39쪽). 또한 낭산(狼山)의 ‘낭’과 나력(奈歷)의 ‘나’가 서로 상통하는 발음이라는 점, 나림(奈林)이 신유림(神遊林)이라는 뜻과 통한다는 점 등을 주목하여 나력을 낭산으로 비정한 견해도 있다(주보돈, 2014, 14~15쪽).
한편 삼국통일 이전에 습비부는 경주에서 포항과 안강에 이르는 방면, 즉 천북면과 강동면, 그리고 현곡면·안강읍의 일부 지역을 포괄하였다가 통일 이후 신문왕대에 오늘날 경주 시내로 왕경의 범위를 축소 조정하였는데, 이때 습비부는 북천 이북의 황성동이나 동천동지역, 그리고 소금강산지구를 망라하는 범위였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전덕재, 2009, 73~74쪽 및 81~82쪽, 92~95쪽). 이 견해에 따른다면, 나력은 통일신라시대의 습비부 영역에 위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금강산이나 또는 그 근처에 소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홍순창, 1983, 「신라 삼산·오악에 대하여」,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4
주보돈, 2014, 「신라 낭산의 역사성」, 『신라문화』 44
한편 삼국통일 이전에 습비부는 경주에서 포항과 안강에 이르는 방면, 즉 천북면과 강동면, 그리고 현곡면·안강읍의 일부 지역을 포괄하였다가 통일 이후 신문왕대에 오늘날 경주 시내로 왕경의 범위를 축소 조정하였는데, 이때 습비부는 북천 이북의 황성동이나 동천동지역, 그리고 소금강산지구를 망라하는 범위였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전덕재, 2009, 73~74쪽 및 81~82쪽, 92~95쪽). 이 견해에 따른다면, 나력은 통일신라시대의 습비부 영역에 위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금강산이나 또는 그 근처에 소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홍순창, 1983, 「신라 삼산·오악에 대하여」,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4
주보돈, 2014, 「신라 낭산의 역사성」, 『신라문화』 44
습비부(習比部):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유리이사금 9년조에 따르면, 명활부(明活部)를 습비부(習比部)로 삼고, 설씨(薛氏) 성(姓)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의 촌장(村長)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 금강산에 내려오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고려]은 임천부(臨川部)라 부르니, 물이촌(勿伊村)·잉구며촌(仍仇旀村)·궐곡(闕谷)【또는 갈곡(葛谷)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의 촌들이 이에 속한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 고려 태조 23년(940)에 습비부를 임천부로 고쳤음을 알 수 있다.
503년(지증왕 4)에 건립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 사피(斯彼)로 나온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습부(習部), 경주 월지(안압지) 등에서 출토된 와전에는 습부(習部), 습부(習府)라 전한다. ‘본피부(本彼部)’에서 ‘본(本)’은 ‘본래(本來)’의 뜻으로, 사피부(斯彼部)에서 ‘사(斯)’는 ‘사훼(沙喙)’의 ‘사(沙)’와 마찬가지로 ‘새롭다[新]’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신라(新羅) 또는 신로(新盧)를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 표기한 것에서 이러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종래에 이와 같은 사실을 주목하여, 이사금시대에 (급)훼[(及)喙], (본)피[(本)彼], (한)기[(韓)岐]의 3부가 존재하였다가 김씨지배체제가 확립되는 마립간시기에 이르러 (급)훼에서 사훼(沙喙), 잠훼(岑喙)[또는 모훼(牟喙)]가 분화되고, (본)피에서 사피(斯彼)가 분화되어 비로소 6부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주보돈, 1992, 3∼22쪽). 한편 기원 전후 시기에 고조선 유민이 경주로 이주하여 본피집단을 형성하였고, 이후 2~3세기에 본피집단에 대응되는 ‘새로운 피집단’, 즉 ‘사피집단’이 성장하여 단위정치집단으로서 사로국에 편입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전덕재, 2016, 81~84쪽).
임천부의 속촌(屬村) 가운데 하나인 궐곡촌(闕谷村)을 갈곡촌(葛谷村)이라고도 하였는데, 이곳은 현재의 경주시 천북면 갈곡리(葛谷里)에 해당한다. 이밖에 종래에 임천부 속촌의 하나인 물이촌(勿伊村)을 오늘날의 천북면 물천리(勿川里)라고 주장하였는데(末松保和, 1954, 260쪽; 三品彰英, 1975, 431쪽), 이것은 갈곡리의 바로 남쪽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임천부는 경주에서 포항과 안강에 이르는 방면, 즉 천북면과 강동면, 그리고 현곡면·안강읍의 일부 지역을 포괄하였다고 볼 수 있다. 통일 이전 습비부의 영역은 대체로 고려시대 임천부의 영역과 비슷하였고, 통일 이후 신문왕대에 오늘날 경주시내로 왕경의 범위를 축소 조정하였는데, 이때 습비부는 북천 이북의 황성동이나 동천동지역, 그리고 소금강산지구를 망라하는 범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전덕재, 2009, 73~74쪽 및 81~82쪽, 92~95쪽). 한편 근래에 통일 이전과 이후 6부의 영역은 변하지 않았다고 이해한 다음, 오늘날 북천 이북의 황성동과 동천동지역, 천북면과 강동면지역이 습비부의 영역이었다고 주장한 견해가 제기되었다(박성현, 2019, 16~25쪽). 왕경의 행정구역단위로 전환된 6부를 관할하기 위하여 육부소감전(六部少監典)을 설치하였는데, 습비부에는 관원으로 감신(監臣) 1명, 대사(大舍) 1명, 사지(舍知) 1명, 감당(監幢) 명, 사(史) 1명을 두었다.
〈참고문헌〉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末松保和, 1954,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三品彰英, 1975, 『三國遺事考證 上』, 塙書房
주보돈, 1992, 「삼국시대의 귀족과 신분제-신라를 중심으로-」, 『한국사회발전사론』, 일조각
전덕재, 2016, 「사로국의 건국 주체세력과 그 과정」, 『한국고대사연구』 82
박성현, 2019, 「신라 6부의 경계에 대한 연구」, 『대구사학』 134
503년(지증왕 4)에 건립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 사피(斯彼)로 나온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습부(習部), 경주 월지(안압지) 등에서 출토된 와전에는 습부(習部), 습부(習府)라 전한다. ‘본피부(本彼部)’에서 ‘본(本)’은 ‘본래(本來)’의 뜻으로, 사피부(斯彼部)에서 ‘사(斯)’는 ‘사훼(沙喙)’의 ‘사(沙)’와 마찬가지로 ‘새롭다[新]’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신라(新羅) 또는 신로(新盧)를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 표기한 것에서 이러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종래에 이와 같은 사실을 주목하여, 이사금시대에 (급)훼[(及)喙], (본)피[(本)彼], (한)기[(韓)岐]의 3부가 존재하였다가 김씨지배체제가 확립되는 마립간시기에 이르러 (급)훼에서 사훼(沙喙), 잠훼(岑喙)[또는 모훼(牟喙)]가 분화되고, (본)피에서 사피(斯彼)가 분화되어 비로소 6부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주보돈, 1992, 3∼22쪽). 한편 기원 전후 시기에 고조선 유민이 경주로 이주하여 본피집단을 형성하였고, 이후 2~3세기에 본피집단에 대응되는 ‘새로운 피집단’, 즉 ‘사피집단’이 성장하여 단위정치집단으로서 사로국에 편입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전덕재, 2016, 81~84쪽).
임천부의 속촌(屬村) 가운데 하나인 궐곡촌(闕谷村)을 갈곡촌(葛谷村)이라고도 하였는데, 이곳은 현재의 경주시 천북면 갈곡리(葛谷里)에 해당한다. 이밖에 종래에 임천부 속촌의 하나인 물이촌(勿伊村)을 오늘날의 천북면 물천리(勿川里)라고 주장하였는데(末松保和, 1954, 260쪽; 三品彰英, 1975, 431쪽), 이것은 갈곡리의 바로 남쪽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임천부는 경주에서 포항과 안강에 이르는 방면, 즉 천북면과 강동면, 그리고 현곡면·안강읍의 일부 지역을 포괄하였다고 볼 수 있다. 통일 이전 습비부의 영역은 대체로 고려시대 임천부의 영역과 비슷하였고, 통일 이후 신문왕대에 오늘날 경주시내로 왕경의 범위를 축소 조정하였는데, 이때 습비부는 북천 이북의 황성동이나 동천동지역, 그리고 소금강산지구를 망라하는 범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전덕재, 2009, 73~74쪽 및 81~82쪽, 92~95쪽). 한편 근래에 통일 이전과 이후 6부의 영역은 변하지 않았다고 이해한 다음, 오늘날 북천 이북의 황성동과 동천동지역, 천북면과 강동면지역이 습비부의 영역이었다고 주장한 견해가 제기되었다(박성현, 2019, 16~25쪽). 왕경의 행정구역단위로 전환된 6부를 관할하기 위하여 육부소감전(六部少監典)을 설치하였는데, 습비부에는 관원으로 감신(監臣) 1명, 대사(大舍) 1명, 사지(舍知) 1명, 감당(監幢) 명, 사(史) 1명을 두었다.
〈참고문헌〉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末松保和, 1954,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三品彰英, 1975, 『三國遺事考證 上』, 塙書房
주보돈, 1992, 「삼국시대의 귀족과 신분제-신라를 중심으로-」, 『한국사회발전사론』, 일조각
전덕재, 2016, 「사로국의 건국 주체세력과 그 과정」, 『한국고대사연구』 82
박성현, 2019, 「신라 6부의 경계에 대한 연구」, 『대구사학』 134
골화(骨火): 신라 대사(大祀)의 대상이었던 삼산(三山)의 하나로서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대의리와 범어동 경계에 위치한 금강산이다.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임고군조에 “임천현(臨川縣)은 조분왕(助賁王) 때에 골화소국(骨火小國)을 쳐서 얻어서 현을 두었다.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영주(永州)에 합하여 속해 있다.”고 전한다. 본서 권제2 신라본기제2 조분이사금 7년(236) 2월조에 “골벌국왕(骨伐國王) 아음부(阿音夫)가 휘하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해 왔으므로, 그에게 집과 토지를 하사하여 안치하고, 골벌국 지역을 군(郡)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또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지증마립간 5년(504) 9월조에는 골화성(骨火城)을 쌓았다고 하였다. 골화(骨火)를 골벌(骨伐)이라고도 불렀음을 알려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경상도 영천군 고적조에 “임천폐현(臨川廢縣)이 고을 동남쪽 5리에 있다.”라고 전한다. 임천폐현의 중심지는 완산동고분군이 있는 완산동 일대로 비정된다(박성현, 2017, 2017, 「통일신라시대 금호강 유역의 공간 구조 개편」, 『백제문화』 56, 36~38쪽).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경상도 영천군 산천조에 금강성산(金剛城山)이 군(郡)의 동쪽 8리(里)에 있다고 전하는데, 종래에 현재 완산동의 뒷산으로 영천시 고경면 대의리와 범어동 경계에 위치한 금강산이 바로 대사를 지낸 골화로 추정하였다. 골화현(임천현)은 영천시 완산동과 범어동 일대에 해당하지만, 본 기록에서 금강산 가운데 대사를 지낸 곳이 절야화군의 영역에 속하였기 때문에 골화는 절야화군에 위치한다고 밝힌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경상도 영천군 고적조에 “임천폐현(臨川廢縣)이 고을 동남쪽 5리에 있다.”라고 전한다. 임천폐현의 중심지는 완산동고분군이 있는 완산동 일대로 비정된다(박성현, 2017, 2017, 「통일신라시대 금호강 유역의 공간 구조 개편」, 『백제문화』 56, 36~38쪽).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경상도 영천군 산천조에 금강성산(金剛城山)이 군(郡)의 동쪽 8리(里)에 있다고 전하는데, 종래에 현재 완산동의 뒷산으로 영천시 고경면 대의리와 범어동 경계에 위치한 금강산이 바로 대사를 지낸 골화로 추정하였다. 골화현(임천현)은 영천시 완산동과 범어동 일대에 해당하지만, 본 기록에서 금강산 가운데 대사를 지낸 곳이 절야화군의 영역에 속하였기 때문에 골화는 절야화군에 위치한다고 밝힌 것으로 보인다.
절야화군(切也火郡):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시(永川市)이다.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조에 “임고군(臨臯郡)은 본래 절야화군(切也火郡)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영주(永州)이다.”라고 전한다. 고려 초에 임고군과 도동(道同)·임천(臨川)의 두 현(縣)을 합하여 영주(永州)라고 하였다. 성종 14년(995)에 영주자사(永州刺史)를 두었고, 현종 9년(1018)의 주현(主縣)-속현(屬縣) 체제에서 경주(慶州, 현 경상북도 경주시)의 속현이 되었다.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승격시켜 지주사(知州事)가 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예(例)에 의하여 영천군(永川郡)으로 고쳤다. 고려 영주, 조선 영천군의 중심지는 읍성이 있었던 현재의 영천시 문내동 일대이다. 이외에 절야화군에 대한 더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임고군조 참조.
혈례(穴禮): 신라에서 대사(大祀)를 지낸 삼산(三山) 가운데 하나로 대성군(大城郡)에 위치하였다. 본서 제사지에 중사(中祀)를 지낸 토함산과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에 위치한 북형산성(北兄山城), 소사(小祀)를 지낸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에 있는 삼기(三岐)가 대성군에 위치하였다고 전하는 사실과 경주시 양남면에 위치한 약장현(約章縣)이 대성군의 영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성군의 영역은 토함산과 그 동쪽의 감포읍, 문무대왕면과 강동면, 천북면과 안강읍 두류리 이남 지역을 망라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전덕재, 2009, 57~61쪽). 따라서 혈례산은 바로 이 범위 안에 위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찍이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 제5 선덕왕(宣德王) 계해조에 혈례를 지금[조선]의 청도에 위치하였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대성군(지금의 경북 청도군)의 오례산(烏禮山)[또는 오야산(烏也山) 또는 오혜산(烏惠山)], 즉 청도와 밀양 중간에 있는 유천(楡川) 동북의 부산(鳧山, 오리산)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7, 497쪽). 또한 대성군의 위치와 관계없이 경주시 건천읍에 위치한 단석산(斷石山)에 있는 상인암석굴(上人岩石窟)을 김유신(金庾信)이 입산수도하였다는 중악(中岳) 석굴로 비정하여 단석산을 혈례산으로 비정한 견해도 제기되었다(김상기, 1969; 1974, 62~64쪽; 홍순창, 1983, 42쪽). 그러나 부산과 단석산을 통일신라시대 대성군의 영역에 속하였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견해들을 수용하기 어렵다.
이밖에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대성군조에 “본래 구도성(仇刀城) 경내(境內)의 솔이산성(率伊山城), 가산현(茄山縣)【혹은 경산성(驚山城)이라고도 한다.】, 오도산성(烏刀山城) 등 세 성인데 지금 청도군(淸道郡)에 합쳐 속하게 하였다.”고 전하는 구절은 본래 밀성군(密城郡)조에 들어갈 것이 잘못 기록된 것으로 이해한 다음, 대성군은 경주 동쪽 명활산성 일대를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에 걸쳐 위치하였던 행정구역이라고 하여, 혈례산을 현재 경주시 안강읍 북부와 포항시 북구 기계면 남부의 경계에 위치한 어래산(魚來山)으로 비정한 견해도 제기되었다(김윤우, 1987, 60~61쪽).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의창군조에 “안강현(安康縣)은 본래 비화현(比火縣)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고 전한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 흥덕왕릉이 안강(安康)의 북쪽 비화양(比火壤)에 있다고 전하는데, 현재 흥덕왕릉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번지에 위치하였음이 확인된다. 두 기록을 종합하면, 흥덕왕릉이 위치한 육통리는 본래 비화현, 즉 안강현의 영역에 위치하였다고 볼 수 있고, 흥덕왕릉 서북쪽에 위치한 어래산도 역시 통일신라시대에 안강현에 속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혈례산을 어래산으로 비정하는 견해 역시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현재로서는 혈례산이 대성군의 영역에 위치하였다는 사실 이외에 더 이상의 고증은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김상기, 1974, 『동방사논총』, 서울대학교 출판부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김상기, 1969, 「화랑과 미륵신앙에 대하여-신선사유구의 조사를 기틀로-」, 『이홍직박사회갑기념한국사학논총』, 신구문화사
홍순창, 1983, 「신라 삼산·오악에 대하여」,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4
김윤우, 1987, 「신라시대 대성군에 관한 고찰-신라 왕도 주위의 소재군현에 대한 일고찰-」, 『신라문화』3·4합
일찍이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 제5 선덕왕(宣德王) 계해조에 혈례를 지금[조선]의 청도에 위치하였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대성군(지금의 경북 청도군)의 오례산(烏禮山)[또는 오야산(烏也山) 또는 오혜산(烏惠山)], 즉 청도와 밀양 중간에 있는 유천(楡川) 동북의 부산(鳧山, 오리산)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7, 497쪽). 또한 대성군의 위치와 관계없이 경주시 건천읍에 위치한 단석산(斷石山)에 있는 상인암석굴(上人岩石窟)을 김유신(金庾信)이 입산수도하였다는 중악(中岳) 석굴로 비정하여 단석산을 혈례산으로 비정한 견해도 제기되었다(김상기, 1969; 1974, 62~64쪽; 홍순창, 1983, 42쪽). 그러나 부산과 단석산을 통일신라시대 대성군의 영역에 속하였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견해들을 수용하기 어렵다.
이밖에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대성군조에 “본래 구도성(仇刀城) 경내(境內)의 솔이산성(率伊山城), 가산현(茄山縣)【혹은 경산성(驚山城)이라고도 한다.】, 오도산성(烏刀山城) 등 세 성인데 지금 청도군(淸道郡)에 합쳐 속하게 하였다.”고 전하는 구절은 본래 밀성군(密城郡)조에 들어갈 것이 잘못 기록된 것으로 이해한 다음, 대성군은 경주 동쪽 명활산성 일대를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에 걸쳐 위치하였던 행정구역이라고 하여, 혈례산을 현재 경주시 안강읍 북부와 포항시 북구 기계면 남부의 경계에 위치한 어래산(魚來山)으로 비정한 견해도 제기되었다(김윤우, 1987, 60~61쪽).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의창군조에 “안강현(安康縣)은 본래 비화현(比火縣)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고 전한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 흥덕왕릉이 안강(安康)의 북쪽 비화양(比火壤)에 있다고 전하는데, 현재 흥덕왕릉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번지에 위치하였음이 확인된다. 두 기록을 종합하면, 흥덕왕릉이 위치한 육통리는 본래 비화현, 즉 안강현의 영역에 위치하였다고 볼 수 있고, 흥덕왕릉 서북쪽에 위치한 어래산도 역시 통일신라시대에 안강현에 속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혈례산을 어래산으로 비정하는 견해 역시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현재로서는 혈례산이 대성군의 영역에 위치하였다는 사실 이외에 더 이상의 고증은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김상기, 1974, 『동방사논총』, 서울대학교 출판부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김상기, 1969, 「화랑과 미륵신앙에 대하여-신선사유구의 조사를 기틀로-」, 『이홍직박사회갑기념한국사학논총』, 신구문화사
홍순창, 1983, 「신라 삼산·오악에 대하여」,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4
김윤우, 1987, 「신라시대 대성군에 관한 고찰-신라 왕도 주위의 소재군현에 대한 일고찰-」, 『신라문화』3·4합
대성군(大城郡): 중대에 신라에서 왕경(王京) 근처에 설치한 군이다.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조에 “대성군은 본래 구도성(仇刀城) 경내(境內)의 솔이산성(率伊山城), 가산현(茄山縣)【혹은 경산성(驚山城)이라고도 한다.】, 오도산성(烏刀山城) 등 세 성인데 지금 청도군(淸道郡)에 합쳐 속하게 하였다. 약장현(約章縣)은 원래 악지현(惡支縣)이었던 것을 경덕왕(景德王)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 경주(慶州)에 병합되었다. 동기정(東畿停)은 원래 모지정(毛只停)을 경덕왕(景德王)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 경주(慶州)에 병합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본서 지리지의 기록은 엄밀한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종래에 한기(漢岐)·한지(漢只)·한지원(閑只原)·구도(仇刀)는 모두 ‘큰 성’, 즉 대성(大城)을 뜻한다고 이해한 다음, 구도성은 바로 명활산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 견해(김윤우, 1987, 57쪽)가 제기되었으나,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밀성군(密城郡: 경남 밀양시)의 영현인 오구산현(烏丘山縣)의 본래 이름이 오야산현(烏也山縣) 또는 구도(仇道), 오례산(烏禮山)이라고 전하는데, 구도성은 오구산현의 별칭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밀성군의 영현인 형산현(荊山縣)이 본래 경산현(驚山縣)이었고, 소산현(蘇山縣)의 본래 이름이 솔이산현(率已山縣)이었으며, 이들 3현과 오구산현은 모두 고려시대에 청도군에 합속(合屬)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찬자는 솔이산성, 가산현[茄山縣, 가산은 형산(荊山)의 오기로 추정; 경산성(驚山城)], 오도산성 등이 고려시대에 청도군에 합속되었기 때문에, 이들 세 성으로 이루어진 대성군도 청도군에 합속되었다고 표기한 것으로 이해된다. 종래에 신라 통일기 왕도(王都, 현 경주시내) 주변의 6부(六部) 지역 동반부에 설치된 군으로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 외곽 지역(읍·면 지역)의 동쪽 부분. 그 중심지는 명활성으로 추정하기도 하였지만(김윤우, 1987, 57~59쪽) 분명하지 않다.
본서 제사지에 중사(中祀)를 지낸 토함산과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에 위치한 북형산성(北兄山城), 소사(小祀)를 지낸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에 있는 삼기(三岐)가 대성군에 위치하였다고 전하고, 또한 경주시 양남면에 위치한 약장현(約章縣)이 대성군의 영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성군의 영역은 토함산과 그 동쪽의 감포읍, 문무대왕면과 강동면, 천북면과 안강읍 일부 지역을 망라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전덕재, 2009, 57~61쪽). 이처럼 대성군이 오늘날 경주시 범위 내에 망라되었으므로, 그것은 고려시대에 청도군이 아니라 경주에 합속(合屬)되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본서 지리지에 대성군을 설치한 시기에 관한 언급이 없다. 김정호는 『대동지지(大東地志)』 권7 경주 고읍조에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한 후에 대성군을 설치하였다.”고 언급하였는데,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으나 나름 일리가 있는 언급으로 판단된다. 구체적으로 신문왕대에 안강읍을 제외한 경주시 일원과 울산광역시 북부지역, 울주군 두동면과 두서면지역을 망라하던 왕경의 범위를 오늘날 경주 시내로 축소 조정하였는데, 이때 6부를 관할한 6부소감전(六部少監典)을 전읍서(典邑署)로 개편함과 동시에 기존 왕경지역에 대성군과 서형산군(西兄山郡), 모화군(毛火郡), 대성군 악지현(惡支縣)을 설치한 것으로 이해된다(전덕재, 2009, 82~85쪽).
〈참고문헌〉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김윤우, 1987, 「신라시대 대성군에 관한 고찰-신라 왕도 주위의 소재군현에 대한 일고찰-」, 『신라문화』3·4합
종래에 한기(漢岐)·한지(漢只)·한지원(閑只原)·구도(仇刀)는 모두 ‘큰 성’, 즉 대성(大城)을 뜻한다고 이해한 다음, 구도성은 바로 명활산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 견해(김윤우, 1987, 57쪽)가 제기되었으나,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밀성군(密城郡: 경남 밀양시)의 영현인 오구산현(烏丘山縣)의 본래 이름이 오야산현(烏也山縣) 또는 구도(仇道), 오례산(烏禮山)이라고 전하는데, 구도성은 오구산현의 별칭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밀성군의 영현인 형산현(荊山縣)이 본래 경산현(驚山縣)이었고, 소산현(蘇山縣)의 본래 이름이 솔이산현(率已山縣)이었으며, 이들 3현과 오구산현은 모두 고려시대에 청도군에 합속(合屬)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찬자는 솔이산성, 가산현[茄山縣, 가산은 형산(荊山)의 오기로 추정; 경산성(驚山城)], 오도산성 등이 고려시대에 청도군에 합속되었기 때문에, 이들 세 성으로 이루어진 대성군도 청도군에 합속되었다고 표기한 것으로 이해된다. 종래에 신라 통일기 왕도(王都, 현 경주시내) 주변의 6부(六部) 지역 동반부에 설치된 군으로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 외곽 지역(읍·면 지역)의 동쪽 부분. 그 중심지는 명활성으로 추정하기도 하였지만(김윤우, 1987, 57~59쪽) 분명하지 않다.
본서 제사지에 중사(中祀)를 지낸 토함산과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에 위치한 북형산성(北兄山城), 소사(小祀)를 지낸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에 있는 삼기(三岐)가 대성군에 위치하였다고 전하고, 또한 경주시 양남면에 위치한 약장현(約章縣)이 대성군의 영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성군의 영역은 토함산과 그 동쪽의 감포읍, 문무대왕면과 강동면, 천북면과 안강읍 일부 지역을 망라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전덕재, 2009, 57~61쪽). 이처럼 대성군이 오늘날 경주시 범위 내에 망라되었으므로, 그것은 고려시대에 청도군이 아니라 경주에 합속(合屬)되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본서 지리지에 대성군을 설치한 시기에 관한 언급이 없다. 김정호는 『대동지지(大東地志)』 권7 경주 고읍조에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한 후에 대성군을 설치하였다.”고 언급하였는데,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으나 나름 일리가 있는 언급으로 판단된다. 구체적으로 신문왕대에 안강읍을 제외한 경주시 일원과 울산광역시 북부지역, 울주군 두동면과 두서면지역을 망라하던 왕경의 범위를 오늘날 경주 시내로 축소 조정하였는데, 이때 6부를 관할한 6부소감전(六部少監典)을 전읍서(典邑署)로 개편함과 동시에 기존 왕경지역에 대성군과 서형산군(西兄山郡), 모화군(毛火郡), 대성군 악지현(惡支縣)을 설치한 것으로 이해된다(전덕재, 2009, 82~85쪽).
〈참고문헌〉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김윤우, 1987, 「신라시대 대성군에 관한 고찰-신라 왕도 주위의 소재군현에 대한 일고찰-」, 『신라문화』3·4합
註) 070
대사(大祀): 신라의 국가적 제사로 산천에 대하여 행하는 것 중에 가장 큰 제사이다. 중국에서 대사는 천자가 행하는 가장 큰 제사였는데, 후한(後漢)의 정사농(鄭司農)과 정현(鄭玄)에 따르면, 주대(周代)에 천지(天地)와 종묘(宗廟)에 대한 제사를 대사(大祀)로 삼았다[鄭司農云 大祀 天地 … 鄭玄謂大祀又有宗廟(『주례주소(周禮註疏)』 권19 춘관종백제3)]고 한다. 한편 『구당서(舊唐書)』 권21 지1 예의(禮儀)1에서 당나라에서는 호천상제(昊天上帝)와 오방제(五方帝), 황지기(皇地祇), 신주(神州) 및 종묘(宗廟)를 대사로 삼았다고 하였고, 『신당서(新唐書)』 권11 지1 예악1에는 천지(天地), 종묘(宗廟), 오제(五帝), 추존(追尊)한 제(帝) 및 후(后) 등에 대한 제사를 대사로 삼았다고 전한다. 이를 통해 당나라 말기에 제사의례가 약간 개편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시조묘(始祖廟)와 신궁(神宮), 오묘(五廟) 및 사직단(社稷壇), 팔자(八䄍), 선농(先農) 등에 대한 제사를 대·중·소사에 편제하지 않고, 명산과 대천에 대한 제사만을 대·중·소사로 구분하였으며, 특히 신라 왕경(王京)과 그 인근에 위치하여 신라 호국신(護國神)이 주석하는 나력(奈歷)과 골화(骨化), 혈례(穴禮) 등 삼산(三山)에 대한 제사를 대사로 삼았는데, 대사의 경우는 대체로 국왕이 친히 제사지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채미하, 2008, 『신라 국가제사와 왕권』, 혜안, 319~320쪽). 고려시대에 원구(圜丘)·방택(方澤)·종묘(宗廟)·사직(社稷)·별묘(別廟), 경령전(景靈殿), 제릉(諸陵)을 대사의 대상으로 삼았고, 조선시대에는 종묘와 사직, 영녕전(永寧殿) 제사만을 대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시조묘(始祖廟)와 신궁(神宮), 오묘(五廟) 및 사직단(社稷壇), 팔자(八䄍), 선농(先農) 등에 대한 제사를 대·중·소사에 편제하지 않고, 명산과 대천에 대한 제사만을 대·중·소사로 구분하였으며, 특히 신라 왕경(王京)과 그 인근에 위치하여 신라 호국신(護國神)이 주석하는 나력(奈歷)과 골화(骨化), 혈례(穴禮) 등 삼산(三山)에 대한 제사를 대사로 삼았는데, 대사의 경우는 대체로 국왕이 친히 제사지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채미하, 2008, 『신라 국가제사와 왕권』, 혜안, 319~320쪽). 고려시대에 원구(圜丘)·방택(方澤)·종묘(宗廟)·사직(社稷)·별묘(別廟), 경령전(景靈殿), 제릉(諸陵)을 대사의 대상으로 삼았고, 조선시대에는 종묘와 사직, 영녕전(永寧殿) 제사만을 대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註) 071
나력(奈歷): 신라 삼산(三山)의 하나로 왕경(王京) 6부의 하나인 습비부(習比部)에 위치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제1 기이제1 김유신조에는 나림(奈林)으로 전한다. 일찍이 습비부를 경주시 동쪽 및 동남쪽에 걸쳐 있었다고 이해한 다음, 나력을 경주 낭산(狼山)으로 비정하고, 나림을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문호왕법민조에 낭산 남쪽에 있었다고 전하는 신유림(神遊林)으로 추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7, 498~499쪽; 홍순창, 1983, 39쪽). 또한 낭산(狼山)의 ‘낭’과 나력(奈歷)의 ‘나’가 서로 상통하는 발음이라는 점, 나림(奈林)이 신유림(神遊林)이라는 뜻과 통한다는 점 등을 주목하여 나력을 낭산으로 비정한 견해도 있다(주보돈, 2014, 14~15쪽).
한편 삼국통일 이전에 습비부는 경주에서 포항과 안강에 이르는 방면, 즉 천북면과 강동면, 그리고 현곡면·안강읍의 일부 지역을 포괄하였다가 통일 이후 신문왕대에 오늘날 경주 시내로 왕경의 범위를 축소 조정하였는데, 이때 습비부는 북천 이북의 황성동이나 동천동지역, 그리고 소금강산지구를 망라하는 범위였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전덕재, 2009, 73~74쪽 및 81~82쪽, 92~95쪽). 이 견해에 따른다면, 나력은 통일신라시대의 습비부 영역에 위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금강산이나 또는 그 근처에 소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홍순창, 1983, 「신라 삼산·오악에 대하여」,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4
주보돈, 2014, 「신라 낭산의 역사성」, 『신라문화』 44
한편 삼국통일 이전에 습비부는 경주에서 포항과 안강에 이르는 방면, 즉 천북면과 강동면, 그리고 현곡면·안강읍의 일부 지역을 포괄하였다가 통일 이후 신문왕대에 오늘날 경주 시내로 왕경의 범위를 축소 조정하였는데, 이때 습비부는 북천 이북의 황성동이나 동천동지역, 그리고 소금강산지구를 망라하는 범위였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전덕재, 2009, 73~74쪽 및 81~82쪽, 92~95쪽). 이 견해에 따른다면, 나력은 통일신라시대의 습비부 영역에 위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금강산이나 또는 그 근처에 소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홍순창, 1983, 「신라 삼산·오악에 대하여」,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4
주보돈, 2014, 「신라 낭산의 역사성」, 『신라문화』 44
註) 072
습비부(習比部):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유리이사금 9년조에 따르면, 명활부(明活部)를 습비부(習比部)로 삼고, 설씨(薛氏) 성(姓)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의 촌장(村長)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 금강산에 내려오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고려]은 임천부(臨川部)라 부르니, 물이촌(勿伊村)·잉구며촌(仍仇旀村)·궐곡(闕谷)【또는 갈곡(葛谷)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의 촌들이 이에 속한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 고려 태조 23년(940)에 습비부를 임천부로 고쳤음을 알 수 있다.
503년(지증왕 4)에 건립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 사피(斯彼)로 나온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습부(習部), 경주 월지(안압지) 등에서 출토된 와전에는 습부(習部), 습부(習府)라 전한다. ‘본피부(本彼部)’에서 ‘본(本)’은 ‘본래(本來)’의 뜻으로, 사피부(斯彼部)에서 ‘사(斯)’는 ‘사훼(沙喙)’의 ‘사(沙)’와 마찬가지로 ‘새롭다[新]’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신라(新羅) 또는 신로(新盧)를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 표기한 것에서 이러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종래에 이와 같은 사실을 주목하여, 이사금시대에 (급)훼[(及)喙], (본)피[(本)彼], (한)기[(韓)岐]의 3부가 존재하였다가 김씨지배체제가 확립되는 마립간시기에 이르러 (급)훼에서 사훼(沙喙), 잠훼(岑喙)[또는 모훼(牟喙)]가 분화되고, (본)피에서 사피(斯彼)가 분화되어 비로소 6부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주보돈, 1992, 3∼22쪽). 한편 기원 전후 시기에 고조선 유민이 경주로 이주하여 본피집단을 형성하였고, 이후 2~3세기에 본피집단에 대응되는 ‘새로운 피집단’, 즉 ‘사피집단’이 성장하여 단위정치집단으로서 사로국에 편입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전덕재, 2016, 81~84쪽).
임천부의 속촌(屬村) 가운데 하나인 궐곡촌(闕谷村)을 갈곡촌(葛谷村)이라고도 하였는데, 이곳은 현재의 경주시 천북면 갈곡리(葛谷里)에 해당한다. 이밖에 종래에 임천부 속촌의 하나인 물이촌(勿伊村)을 오늘날의 천북면 물천리(勿川里)라고 주장하였는데(末松保和, 1954, 260쪽; 三品彰英, 1975, 431쪽), 이것은 갈곡리의 바로 남쪽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임천부는 경주에서 포항과 안강에 이르는 방면, 즉 천북면과 강동면, 그리고 현곡면·안강읍의 일부 지역을 포괄하였다고 볼 수 있다. 통일 이전 습비부의 영역은 대체로 고려시대 임천부의 영역과 비슷하였고, 통일 이후 신문왕대에 오늘날 경주시내로 왕경의 범위를 축소 조정하였는데, 이때 습비부는 북천 이북의 황성동이나 동천동지역, 그리고 소금강산지구를 망라하는 범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전덕재, 2009, 73~74쪽 및 81~82쪽, 92~95쪽). 한편 근래에 통일 이전과 이후 6부의 영역은 변하지 않았다고 이해한 다음, 오늘날 북천 이북의 황성동과 동천동지역, 천북면과 강동면지역이 습비부의 영역이었다고 주장한 견해가 제기되었다(박성현, 2019, 16~25쪽). 왕경의 행정구역단위로 전환된 6부를 관할하기 위하여 육부소감전(六部少監典)을 설치하였는데, 습비부에는 관원으로 감신(監臣) 1명, 대사(大舍) 1명, 사지(舍知) 1명, 감당(監幢) 명, 사(史) 1명을 두었다.
〈참고문헌〉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末松保和, 1954,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三品彰英, 1975, 『三國遺事考證 上』, 塙書房
주보돈, 1992, 「삼국시대의 귀족과 신분제-신라를 중심으로-」, 『한국사회발전사론』, 일조각
전덕재, 2016, 「사로국의 건국 주체세력과 그 과정」, 『한국고대사연구』 82
박성현, 2019, 「신라 6부의 경계에 대한 연구」, 『대구사학』 134
503년(지증왕 4)에 건립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 사피(斯彼)로 나온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습부(習部), 경주 월지(안압지) 등에서 출토된 와전에는 습부(習部), 습부(習府)라 전한다. ‘본피부(本彼部)’에서 ‘본(本)’은 ‘본래(本來)’의 뜻으로, 사피부(斯彼部)에서 ‘사(斯)’는 ‘사훼(沙喙)’의 ‘사(沙)’와 마찬가지로 ‘새롭다[新]’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신라(新羅) 또는 신로(新盧)를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 표기한 것에서 이러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종래에 이와 같은 사실을 주목하여, 이사금시대에 (급)훼[(及)喙], (본)피[(本)彼], (한)기[(韓)岐]의 3부가 존재하였다가 김씨지배체제가 확립되는 마립간시기에 이르러 (급)훼에서 사훼(沙喙), 잠훼(岑喙)[또는 모훼(牟喙)]가 분화되고, (본)피에서 사피(斯彼)가 분화되어 비로소 6부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주보돈, 1992, 3∼22쪽). 한편 기원 전후 시기에 고조선 유민이 경주로 이주하여 본피집단을 형성하였고, 이후 2~3세기에 본피집단에 대응되는 ‘새로운 피집단’, 즉 ‘사피집단’이 성장하여 단위정치집단으로서 사로국에 편입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전덕재, 2016, 81~84쪽).
임천부의 속촌(屬村) 가운데 하나인 궐곡촌(闕谷村)을 갈곡촌(葛谷村)이라고도 하였는데, 이곳은 현재의 경주시 천북면 갈곡리(葛谷里)에 해당한다. 이밖에 종래에 임천부 속촌의 하나인 물이촌(勿伊村)을 오늘날의 천북면 물천리(勿川里)라고 주장하였는데(末松保和, 1954, 260쪽; 三品彰英, 1975, 431쪽), 이것은 갈곡리의 바로 남쪽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임천부는 경주에서 포항과 안강에 이르는 방면, 즉 천북면과 강동면, 그리고 현곡면·안강읍의 일부 지역을 포괄하였다고 볼 수 있다. 통일 이전 습비부의 영역은 대체로 고려시대 임천부의 영역과 비슷하였고, 통일 이후 신문왕대에 오늘날 경주시내로 왕경의 범위를 축소 조정하였는데, 이때 습비부는 북천 이북의 황성동이나 동천동지역, 그리고 소금강산지구를 망라하는 범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전덕재, 2009, 73~74쪽 및 81~82쪽, 92~95쪽). 한편 근래에 통일 이전과 이후 6부의 영역은 변하지 않았다고 이해한 다음, 오늘날 북천 이북의 황성동과 동천동지역, 천북면과 강동면지역이 습비부의 영역이었다고 주장한 견해가 제기되었다(박성현, 2019, 16~25쪽). 왕경의 행정구역단위로 전환된 6부를 관할하기 위하여 육부소감전(六部少監典)을 설치하였는데, 습비부에는 관원으로 감신(監臣) 1명, 대사(大舍) 1명, 사지(舍知) 1명, 감당(監幢) 명, 사(史) 1명을 두었다.
〈참고문헌〉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末松保和, 1954,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三品彰英, 1975, 『三國遺事考證 上』, 塙書房
주보돈, 1992, 「삼국시대의 귀족과 신분제-신라를 중심으로-」, 『한국사회발전사론』, 일조각
전덕재, 2016, 「사로국의 건국 주체세력과 그 과정」, 『한국고대사연구』 82
박성현, 2019, 「신라 6부의 경계에 대한 연구」, 『대구사학』 134
註) 073
골화(骨火): 신라 대사(大祀)의 대상이었던 삼산(三山)의 하나로서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대의리와 범어동 경계에 위치한 금강산이다.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임고군조에 “임천현(臨川縣)은 조분왕(助賁王) 때에 골화소국(骨火小國)을 쳐서 얻어서 현을 두었다.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영주(永州)에 합하여 속해 있다.”고 전한다. 본서 권제2 신라본기제2 조분이사금 7년(236) 2월조에 “골벌국왕(骨伐國王) 아음부(阿音夫)가 휘하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해 왔으므로, 그에게 집과 토지를 하사하여 안치하고, 골벌국 지역을 군(郡)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또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지증마립간 5년(504) 9월조에는 골화성(骨火城)을 쌓았다고 하였다. 골화(骨火)를 골벌(骨伐)이라고도 불렀음을 알려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경상도 영천군 고적조에 “임천폐현(臨川廢縣)이 고을 동남쪽 5리에 있다.”라고 전한다. 임천폐현의 중심지는 완산동고분군이 있는 완산동 일대로 비정된다(박성현, 2017, 2017, 「통일신라시대 금호강 유역의 공간 구조 개편」, 『백제문화』 56, 36~38쪽).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경상도 영천군 산천조에 금강성산(金剛城山)이 군(郡)의 동쪽 8리(里)에 있다고 전하는데, 종래에 현재 완산동의 뒷산으로 영천시 고경면 대의리와 범어동 경계에 위치한 금강산이 바로 대사를 지낸 골화로 추정하였다. 골화현(임천현)은 영천시 완산동과 범어동 일대에 해당하지만, 본 기록에서 금강산 가운데 대사를 지낸 곳이 절야화군의 영역에 속하였기 때문에 골화는 절야화군에 위치한다고 밝힌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경상도 영천군 고적조에 “임천폐현(臨川廢縣)이 고을 동남쪽 5리에 있다.”라고 전한다. 임천폐현의 중심지는 완산동고분군이 있는 완산동 일대로 비정된다(박성현, 2017, 2017, 「통일신라시대 금호강 유역의 공간 구조 개편」, 『백제문화』 56, 36~38쪽).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경상도 영천군 산천조에 금강성산(金剛城山)이 군(郡)의 동쪽 8리(里)에 있다고 전하는데, 종래에 현재 완산동의 뒷산으로 영천시 고경면 대의리와 범어동 경계에 위치한 금강산이 바로 대사를 지낸 골화로 추정하였다. 골화현(임천현)은 영천시 완산동과 범어동 일대에 해당하지만, 본 기록에서 금강산 가운데 대사를 지낸 곳이 절야화군의 영역에 속하였기 때문에 골화는 절야화군에 위치한다고 밝힌 것으로 보인다.
註) 074
절야화군(切也火郡):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시(永川市)이다.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조에 “임고군(臨臯郡)은 본래 절야화군(切也火郡)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영주(永州)이다.”라고 전한다. 고려 초에 임고군과 도동(道同)·임천(臨川)의 두 현(縣)을 합하여 영주(永州)라고 하였다. 성종 14년(995)에 영주자사(永州刺史)를 두었고, 현종 9년(1018)의 주현(主縣)-속현(屬縣) 체제에서 경주(慶州, 현 경상북도 경주시)의 속현이 되었다.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승격시켜 지주사(知州事)가 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예(例)에 의하여 영천군(永川郡)으로 고쳤다. 고려 영주, 조선 영천군의 중심지는 읍성이 있었던 현재의 영천시 문내동 일대이다. 이외에 절야화군에 대한 더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임고군조 참조.
註) 075
혈례(穴禮): 신라에서 대사(大祀)를 지낸 삼산(三山) 가운데 하나로 대성군(大城郡)에 위치하였다. 본서 제사지에 중사(中祀)를 지낸 토함산과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에 위치한 북형산성(北兄山城), 소사(小祀)를 지낸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에 있는 삼기(三岐)가 대성군에 위치하였다고 전하는 사실과 경주시 양남면에 위치한 약장현(約章縣)이 대성군의 영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성군의 영역은 토함산과 그 동쪽의 감포읍, 문무대왕면과 강동면, 천북면과 안강읍 두류리 이남 지역을 망라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전덕재, 2009, 57~61쪽). 따라서 혈례산은 바로 이 범위 안에 위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찍이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 제5 선덕왕(宣德王) 계해조에 혈례를 지금[조선]의 청도에 위치하였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대성군(지금의 경북 청도군)의 오례산(烏禮山)[또는 오야산(烏也山) 또는 오혜산(烏惠山)], 즉 청도와 밀양 중간에 있는 유천(楡川) 동북의 부산(鳧山, 오리산)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7, 497쪽). 또한 대성군의 위치와 관계없이 경주시 건천읍에 위치한 단석산(斷石山)에 있는 상인암석굴(上人岩石窟)을 김유신(金庾信)이 입산수도하였다는 중악(中岳) 석굴로 비정하여 단석산을 혈례산으로 비정한 견해도 제기되었다(김상기, 1969; 1974, 62~64쪽; 홍순창, 1983, 42쪽). 그러나 부산과 단석산을 통일신라시대 대성군의 영역에 속하였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견해들을 수용하기 어렵다.
이밖에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대성군조에 “본래 구도성(仇刀城) 경내(境內)의 솔이산성(率伊山城), 가산현(茄山縣)【혹은 경산성(驚山城)이라고도 한다.】, 오도산성(烏刀山城) 등 세 성인데 지금 청도군(淸道郡)에 합쳐 속하게 하였다.”고 전하는 구절은 본래 밀성군(密城郡)조에 들어갈 것이 잘못 기록된 것으로 이해한 다음, 대성군은 경주 동쪽 명활산성 일대를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에 걸쳐 위치하였던 행정구역이라고 하여, 혈례산을 현재 경주시 안강읍 북부와 포항시 북구 기계면 남부의 경계에 위치한 어래산(魚來山)으로 비정한 견해도 제기되었다(김윤우, 1987, 60~61쪽).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의창군조에 “안강현(安康縣)은 본래 비화현(比火縣)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고 전한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 흥덕왕릉이 안강(安康)의 북쪽 비화양(比火壤)에 있다고 전하는데, 현재 흥덕왕릉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번지에 위치하였음이 확인된다. 두 기록을 종합하면, 흥덕왕릉이 위치한 육통리는 본래 비화현, 즉 안강현의 영역에 위치하였다고 볼 수 있고, 흥덕왕릉 서북쪽에 위치한 어래산도 역시 통일신라시대에 안강현에 속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혈례산을 어래산으로 비정하는 견해 역시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현재로서는 혈례산이 대성군의 영역에 위치하였다는 사실 이외에 더 이상의 고증은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김상기, 1974, 『동방사논총』, 서울대학교 출판부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김상기, 1969, 「화랑과 미륵신앙에 대하여-신선사유구의 조사를 기틀로-」, 『이홍직박사회갑기념한국사학논총』, 신구문화사
홍순창, 1983, 「신라 삼산·오악에 대하여」,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4
김윤우, 1987, 「신라시대 대성군에 관한 고찰-신라 왕도 주위의 소재군현에 대한 일고찰-」, 『신라문화』3·4합
일찍이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 제5 선덕왕(宣德王) 계해조에 혈례를 지금[조선]의 청도에 위치하였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대성군(지금의 경북 청도군)의 오례산(烏禮山)[또는 오야산(烏也山) 또는 오혜산(烏惠山)], 즉 청도와 밀양 중간에 있는 유천(楡川) 동북의 부산(鳧山, 오리산)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7, 497쪽). 또한 대성군의 위치와 관계없이 경주시 건천읍에 위치한 단석산(斷石山)에 있는 상인암석굴(上人岩石窟)을 김유신(金庾信)이 입산수도하였다는 중악(中岳) 석굴로 비정하여 단석산을 혈례산으로 비정한 견해도 제기되었다(김상기, 1969; 1974, 62~64쪽; 홍순창, 1983, 42쪽). 그러나 부산과 단석산을 통일신라시대 대성군의 영역에 속하였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견해들을 수용하기 어렵다.
이밖에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대성군조에 “본래 구도성(仇刀城) 경내(境內)의 솔이산성(率伊山城), 가산현(茄山縣)【혹은 경산성(驚山城)이라고도 한다.】, 오도산성(烏刀山城) 등 세 성인데 지금 청도군(淸道郡)에 합쳐 속하게 하였다.”고 전하는 구절은 본래 밀성군(密城郡)조에 들어갈 것이 잘못 기록된 것으로 이해한 다음, 대성군은 경주 동쪽 명활산성 일대를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에 걸쳐 위치하였던 행정구역이라고 하여, 혈례산을 현재 경주시 안강읍 북부와 포항시 북구 기계면 남부의 경계에 위치한 어래산(魚來山)으로 비정한 견해도 제기되었다(김윤우, 1987, 60~61쪽).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의창군조에 “안강현(安康縣)은 본래 비화현(比火縣)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고 전한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 흥덕왕릉이 안강(安康)의 북쪽 비화양(比火壤)에 있다고 전하는데, 현재 흥덕왕릉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번지에 위치하였음이 확인된다. 두 기록을 종합하면, 흥덕왕릉이 위치한 육통리는 본래 비화현, 즉 안강현의 영역에 위치하였다고 볼 수 있고, 흥덕왕릉 서북쪽에 위치한 어래산도 역시 통일신라시대에 안강현에 속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혈례산을 어래산으로 비정하는 견해 역시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현재로서는 혈례산이 대성군의 영역에 위치하였다는 사실 이외에 더 이상의 고증은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김상기, 1974, 『동방사논총』, 서울대학교 출판부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김상기, 1969, 「화랑과 미륵신앙에 대하여-신선사유구의 조사를 기틀로-」, 『이홍직박사회갑기념한국사학논총』, 신구문화사
홍순창, 1983, 「신라 삼산·오악에 대하여」,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4
김윤우, 1987, 「신라시대 대성군에 관한 고찰-신라 왕도 주위의 소재군현에 대한 일고찰-」, 『신라문화』3·4합
註) 076
대성군(大城郡): 중대에 신라에서 왕경(王京) 근처에 설치한 군이다.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조에 “대성군은 본래 구도성(仇刀城) 경내(境內)의 솔이산성(率伊山城), 가산현(茄山縣)【혹은 경산성(驚山城)이라고도 한다.】, 오도산성(烏刀山城) 등 세 성인데 지금 청도군(淸道郡)에 합쳐 속하게 하였다. 약장현(約章縣)은 원래 악지현(惡支縣)이었던 것을 경덕왕(景德王)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 경주(慶州)에 병합되었다. 동기정(東畿停)은 원래 모지정(毛只停)을 경덕왕(景德王)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 경주(慶州)에 병합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본서 지리지의 기록은 엄밀한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종래에 한기(漢岐)·한지(漢只)·한지원(閑只原)·구도(仇刀)는 모두 ‘큰 성’, 즉 대성(大城)을 뜻한다고 이해한 다음, 구도성은 바로 명활산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 견해(김윤우, 1987, 57쪽)가 제기되었으나,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밀성군(密城郡: 경남 밀양시)의 영현인 오구산현(烏丘山縣)의 본래 이름이 오야산현(烏也山縣) 또는 구도(仇道), 오례산(烏禮山)이라고 전하는데, 구도성은 오구산현의 별칭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밀성군의 영현인 형산현(荊山縣)이 본래 경산현(驚山縣)이었고, 소산현(蘇山縣)의 본래 이름이 솔이산현(率已山縣)이었으며, 이들 3현과 오구산현은 모두 고려시대에 청도군에 합속(合屬)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찬자는 솔이산성, 가산현[茄山縣, 가산은 형산(荊山)의 오기로 추정; 경산성(驚山城)], 오도산성 등이 고려시대에 청도군에 합속되었기 때문에, 이들 세 성으로 이루어진 대성군도 청도군에 합속되었다고 표기한 것으로 이해된다. 종래에 신라 통일기 왕도(王都, 현 경주시내) 주변의 6부(六部) 지역 동반부에 설치된 군으로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 외곽 지역(읍·면 지역)의 동쪽 부분. 그 중심지는 명활성으로 추정하기도 하였지만(김윤우, 1987, 57~59쪽) 분명하지 않다.
본서 제사지에 중사(中祀)를 지낸 토함산과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에 위치한 북형산성(北兄山城), 소사(小祀)를 지낸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에 있는 삼기(三岐)가 대성군에 위치하였다고 전하고, 또한 경주시 양남면에 위치한 약장현(約章縣)이 대성군의 영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성군의 영역은 토함산과 그 동쪽의 감포읍, 문무대왕면과 강동면, 천북면과 안강읍 일부 지역을 망라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전덕재, 2009, 57~61쪽). 이처럼 대성군이 오늘날 경주시 범위 내에 망라되었으므로, 그것은 고려시대에 청도군이 아니라 경주에 합속(合屬)되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본서 지리지에 대성군을 설치한 시기에 관한 언급이 없다. 김정호는 『대동지지(大東地志)』 권7 경주 고읍조에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한 후에 대성군을 설치하였다.”고 언급하였는데,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으나 나름 일리가 있는 언급으로 판단된다. 구체적으로 신문왕대에 안강읍을 제외한 경주시 일원과 울산광역시 북부지역, 울주군 두동면과 두서면지역을 망라하던 왕경의 범위를 오늘날 경주 시내로 축소 조정하였는데, 이때 6부를 관할한 6부소감전(六部少監典)을 전읍서(典邑署)로 개편함과 동시에 기존 왕경지역에 대성군과 서형산군(西兄山郡), 모화군(毛火郡), 대성군 악지현(惡支縣)을 설치한 것으로 이해된다(전덕재, 2009, 82~85쪽).
〈참고문헌〉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김윤우, 1987, 「신라시대 대성군에 관한 고찰-신라 왕도 주위의 소재군현에 대한 일고찰-」, 『신라문화』3·4합
종래에 한기(漢岐)·한지(漢只)·한지원(閑只原)·구도(仇刀)는 모두 ‘큰 성’, 즉 대성(大城)을 뜻한다고 이해한 다음, 구도성은 바로 명활산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 견해(김윤우, 1987, 57쪽)가 제기되었으나,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밀성군(密城郡: 경남 밀양시)의 영현인 오구산현(烏丘山縣)의 본래 이름이 오야산현(烏也山縣) 또는 구도(仇道), 오례산(烏禮山)이라고 전하는데, 구도성은 오구산현의 별칭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밀성군의 영현인 형산현(荊山縣)이 본래 경산현(驚山縣)이었고, 소산현(蘇山縣)의 본래 이름이 솔이산현(率已山縣)이었으며, 이들 3현과 오구산현은 모두 고려시대에 청도군에 합속(合屬)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찬자는 솔이산성, 가산현[茄山縣, 가산은 형산(荊山)의 오기로 추정; 경산성(驚山城)], 오도산성 등이 고려시대에 청도군에 합속되었기 때문에, 이들 세 성으로 이루어진 대성군도 청도군에 합속되었다고 표기한 것으로 이해된다. 종래에 신라 통일기 왕도(王都, 현 경주시내) 주변의 6부(六部) 지역 동반부에 설치된 군으로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 외곽 지역(읍·면 지역)의 동쪽 부분. 그 중심지는 명활성으로 추정하기도 하였지만(김윤우, 1987, 57~59쪽) 분명하지 않다.
본서 제사지에 중사(中祀)를 지낸 토함산과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에 위치한 북형산성(北兄山城), 소사(小祀)를 지낸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에 있는 삼기(三岐)가 대성군에 위치하였다고 전하고, 또한 경주시 양남면에 위치한 약장현(約章縣)이 대성군의 영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성군의 영역은 토함산과 그 동쪽의 감포읍, 문무대왕면과 강동면, 천북면과 안강읍 일부 지역을 망라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전덕재, 2009, 57~61쪽). 이처럼 대성군이 오늘날 경주시 범위 내에 망라되었으므로, 그것은 고려시대에 청도군이 아니라 경주에 합속(合屬)되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본서 지리지에 대성군을 설치한 시기에 관한 언급이 없다. 김정호는 『대동지지(大東地志)』 권7 경주 고읍조에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한 후에 대성군을 설치하였다.”고 언급하였는데,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으나 나름 일리가 있는 언급으로 판단된다. 구체적으로 신문왕대에 안강읍을 제외한 경주시 일원과 울산광역시 북부지역, 울주군 두동면과 두서면지역을 망라하던 왕경의 범위를 오늘날 경주 시내로 축소 조정하였는데, 이때 6부를 관할한 6부소감전(六部少監典)을 전읍서(典邑署)로 개편함과 동시에 기존 왕경지역에 대성군과 서형산군(西兄山郡), 모화군(毛火郡), 대성군 악지현(惡支縣)을 설치한 것으로 이해된다(전덕재, 2009, 82~85쪽).
〈참고문헌〉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김윤우, 1987, 「신라시대 대성군에 관한 고찰-신라 왕도 주위의 소재군현에 대한 일고찰-」, 『신라문화』3·4합
주제분류
- 사회>의례>제사>祭壇
- 사회>의례>제사>천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