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궁 건립
제22대 지증왕(智證王)註 009은 시조(始祖)註 010가 태어난 곳인 나을(奈乙)註 011에 처음으로 신궁(神宮)註 012을 세우고 제사지냈다.註 013
지증왕(智證王): 신라 제22대 왕이다.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지증마립간 즉위년조에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지대로(智大路)【혹은 지도로(智度盧) 또는 지철로(智哲盧)라고도 하였다.】이다.”라고 전한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서 제22대 지정마립간(智訂麻立干)이라 하였고, 또한 왕의 이름을 혹은 지철로(智哲老) 또는 지도로(智度路)라고도 부른다고 하였다. 본서 권제44 열전제4 이사부조에 지도로왕(智度路王)이라고 전한다.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 冷水里 新羅碑)」에서는 ‘사훼부(沙喙部)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이라 하였다. 지증왕의 재위 기간은 500~514년이다. 나물왕(奈勿王)의 증손(曾孫),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고, 소지왕의 재종(6촌) 동생이다. 어머니는 김씨 조생부인(鳥生夫人)으로 눌지왕(訥祗王)의 딸이고, 왕비는 박씨(朴氏) 연제부인(延帝夫人)으로 등흔(登欣) 이찬(伊飡)의 딸이다. 이밖에 지증왕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지증마립간 즉위년조 참조.
나을(奈乙): 신궁(神宮)이 설치된 곳이다. 현재 나을의 위치에 대하여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에 있는 나정(蘿井)으로 보는 견해와 기타 장소로 보는 견해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본서 권제37 잡지제6 지리4 고구려 한산주조에 천정구현(泉井口縣)은 또는 어을매곶(於乙買串)이라고, 우수주조에 천정군(泉井郡)은 또는 어을매(於乙買)라고 전한다. 여기서 천(泉)은 어을(於乙), 정(井)은 매(買)와 대응됨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4 황극천황(皇極天皇) 원년(642) 2월 정미조에 고구려의 대신(大臣)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 いりかすみ)가 나온다. 이는 바로 연개소문(淵蓋蘇文)을 가리킨다.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男生)이 당나라에 항복한 이후에 당(唐) 고조(高祖)의 이름에 ‘연(淵)[이연(李淵)]’자가 포함되었으므로 이를 피휘(避諱)하여 성씨를 ‘천(泉)’으로 변경하였다. 이 때문에 연개소문을 천개소문(泉蓋蘇文)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여기서 ‘이리(伊梨)’와 대응되는 것은 연(淵) 또는 천(泉)이 된다. 어을(於乙)을 음차(音借)하면, ‘얼’이 되고, 이것은 연(淵) 또는 천(泉)에 대응되는 ‘이리(伊梨)’와 음운상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종래에 이를 근거로 천(泉) 또는 정(井)의 고구려어 및 신라어가 ‘얼(이리)’이고, 나을(奈乙)은 나(奈)+을(乙; 얼, 이리)의 합성어이며, 나아가 나을은 바로 ‘나(蘿; 羅=那=奈=耶)정’을 가리킨다고 보고, 나(奈, 蘿)는 고대의 지명 어미 끝에 붙는 나(羅·那) 또는 야(耶), 로(盧), 량(良)과 같이 국읍(國邑)을 의미한 말이므로 나을·나정은 바로 국정(國井)이라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양주동, 1935, 16쪽; 이병도, 1977, 49쪽; 도수희, 1987, 66~73쪽).
또한 신라시대에 월출산(月出山)을 월나악(月奈岳)이라 하였고, 고려 초에는 월생산(月生山)이라 한 사실을 주목하여, ‘나(奈)’를 ‘출(出)’, ‘생(生)’의 뜻, 즉 ‘나다’, ‘태어나다’의 뜻으로 풀이하고, ‘을(乙)’을 ‘천(泉)’, ‘정(井)’의 고어인 ‘얼’과 연결시킨 다음, 나을은 ‘태어난 우물’을 뜻하므로, 나을을 신화상의 신라 시조왕 탄강지인 나정이라고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나희라, 2003, 151쪽). 나을을 나정으로 비정하는 연구자들은 신궁의 주신(主神)을 박씨의 시조인 혁거세로 이해한다. 한편 어을(於乙)의 경우 훈음차(訓音借)하여 ‘’로 독음하는 것이 올바르며, 결과적으로 천(泉)의 고구려어는 ‘얼’이 아니라 ‘(리)’이었다고 이해한 견해(김종택, 2002, 89~106쪽)를 수용하여 나을을 나정이라고 비정하기 어렵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제기되었고(전덕재, 2010, 16~17쪽), 나아가 나을을 김씨 시조가 태어난 곳이라고 이해한 다음, 그것은 김씨족단의 발상지인 날이(捺已), 나령(奈靈), 즉 지금의 영주 지역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강종훈, 2002, 99~100쪽).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강종훈, 2002,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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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수희, 1987, 「백제어의 ‘泉·井’에 대하여」, 『국어학』 16
김종택, 2002, 「於乙買(串)를 다시 해독함」, 『지명학』 7
전덕재, 2010, 「신라 상대 왕궁의 변화와 종묘」, 『신라문화』 36
또한 신라시대에 월출산(月出山)을 월나악(月奈岳)이라 하였고, 고려 초에는 월생산(月生山)이라 한 사실을 주목하여, ‘나(奈)’를 ‘출(出)’, ‘생(生)’의 뜻, 즉 ‘나다’, ‘태어나다’의 뜻으로 풀이하고, ‘을(乙)’을 ‘천(泉)’, ‘정(井)’의 고어인 ‘얼’과 연결시킨 다음, 나을은 ‘태어난 우물’을 뜻하므로, 나을을 신화상의 신라 시조왕 탄강지인 나정이라고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나희라, 2003, 151쪽). 나을을 나정으로 비정하는 연구자들은 신궁의 주신(主神)을 박씨의 시조인 혁거세로 이해한다. 한편 어을(於乙)의 경우 훈음차(訓音借)하여 ‘’로 독음하는 것이 올바르며, 결과적으로 천(泉)의 고구려어는 ‘얼’이 아니라 ‘(리)’이었다고 이해한 견해(김종택, 2002, 89~106쪽)를 수용하여 나을을 나정이라고 비정하기 어렵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제기되었고(전덕재, 2010, 16~17쪽), 나아가 나을을 김씨 시조가 태어난 곳이라고 이해한 다음, 그것은 김씨족단의 발상지인 날이(捺已), 나령(奈靈), 즉 지금의 영주 지역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강종훈, 2002, 99~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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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재, 2010, 「신라 상대 왕궁의 변화와 종묘」, 『신라문화』 36
신궁(神宮): 신라 때 설치된 국가적 제사 시설의 하나이다. 설치 시기와 성격을 둘러싸고 많은 주장이 있다.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소지마립간 9년(487) 봄 2월조에 ‘신궁(神宮)을 나을(奈乙)에 세웠다. 나을은 시조(始祖)가 처음 태어난 곳이다.’라고 전한다. 현재 신라본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소지마립간대에 신궁을 설치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본 기록을 주목하여 지증왕 때 건립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신형식, 1977, 38쪽; 이종태, 1992, 59~67쪽). 현재 대부분의 연구자는 소지마립간대에 신궁을 설치하였고, 지증왕대에 신궁 제사가 본격적으로 제도화 및 실행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한편 두 기록의 차이를 소지마립간대에 신궁을 설치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당시에 지증왕이 신궁의 설치를 주도하였던 것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강종훈, 1994, 187~192쪽).
신궁의 성격을 둘러싸고 시조묘(始祖廟)와 마찬가지로 신라 시조 혁거세를 제향하는 사당으로 보는 견해, 김씨의 시조를 제사하는 새로운 제의 시설로 보는 견해, 자연신으로서의 천지신(天地神)을 제사하는 곳으로 보는 견해 등이 제기되었다. 신궁의 주신(主神)을 혁거세로 이해하는 근거는 나을을 나정(蘿井)으로 비정할 수 있다는 사실과 박씨인 경애왕이 신궁에 친히 제사하였다고 전하는 신라본기의 기록에 의거하고 있다(今西龍, 1933; 1970, 232~233쪽; 이병도, 1977, 49쪽; 최재석, 1983, 152쪽; 박승범, 2002, 163~166쪽). 시조묘와 마찬가지로 신궁의 주신을 혁거세로 이해하면서, 시조묘와 신궁 제사의 장소가 혁거세왕릉과 나을(나정)로 차이가 있었고, 또한 제의과정에서도 후자에서 시조의 탄강(誕降)이 더 강조되는 방식으로 전자와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견해(나희라, 2003, 131~154쪽; 백동인, 2016, 204쪽), 시조묘와 신궁에 모두 국조(國祖)이면서 천신적 성격을 지닌 혁거세를 주신으로 모셨으면서도 김씨 왕실이 신궁을 설치하여 시조의 신성성을 시조묘 제사 때보다 신궁 제사 때에 더욱 부각시켰다고 이해한 견해(채미하, 2008, 80~87쪽), 소지마립간은 박씨 왕족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하여 신궁을 설치하고 혁거세와 천제(天帝)에 함께 제사지냈다고 이해한 견해(박남수, 2019, 483쪽) 등이 제기되었다. 또한 신궁의 주신을 혁거세와 알영(閼英)의 두 성인(聖人)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이종태, 1992, 74~75쪽; 김두진, 1994, 76~78쪽).
김씨 시조를 제사하는 새로운 제의 시설이라고 하는 주장은 신궁을 설치할 때에 재위한 소지마립간이 김씨였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를 제기한 연구자들은 혁거세를 모시는 사당으로는 시조묘라는 이름으로 신라 초기부터 존재해 왔기 때문에 소지마립간 시기에 그의 사당을 거듭 건립할 필요가 크지 않았을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이 시기에 김씨 왕실의 위상이 확고해짐에 따라 자신들의 시조를 제사하는 시설을 새롭게 건립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지금까지 신궁에 모신 김씨 시조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본서와 『삼국유사』 등의 문헌 자료에 김씨의 시조로 나오는 알지(閼智)로 보는 견해(小田省吾, 1937; 김병곤, 2000, 146~147쪽; 강진원, 2020, 168~169쪽; 박초롱, 2022, 24~25쪽), 김씨로서 처음 신라왕이 되었던 미추왕으로 보는 견해(변태섭, 1964, 63쪽; 김창호, 1983; 정연식, 2011), 소지마립간의 직계 조상으로 김씨 왕실을 본격적으로 개창한 나물왕으로 보는 견해(末松保和, 1954, 108~110쪽; 신종원, 1992, 84쪽), 「경주 문무왕릉비」 등 7세기 후반에 건립된 비석에서 김씨의 시조로 언급된 성한(星漢)으로 보는 견해(이기동, 1978, 30쪽; 강종훈, 1994, 193~212쪽), 관념상의 인물로 추정하는 견해(이문기, 1999), 구체적인 인물을 제시하지 않고 단지 김씨의 시조로 이해하는 견해(전덕재, 2010, 17~19쪽) 등으로 세분된다. 이외에 신라는 건국 초기에 국조(國祖)인 박씨 혁거세에 대한 제사(시조묘 제사)를 지냄과 동시에 석씨와 김씨 역시 각기 자신들의 조상에 대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김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계승한 마립간시기에 박씨의 혁거세는 국조로서 나름 제사에 대한 명분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석씨의 탈해는 산신으로만 남게 되었고, 김씨 시조에 대한 제사는 신궁을 설치하여 국가제의로서 수행되었다고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김나경, 2018, 10~18쪽).
그리고 자연신으로서의 천지신을 제사하는 곳이라고 이해한 연구자는 고대사회에서 수많은 신격(神格) 가운데 ‘천신(天神)’이 지니는 위상이 가장 높았음에 주목하여, 신궁을 인격신이 아닌 자연신으로서의 천지신을 제사하기 위해 새로 만든 시설로 파악하였다(최광식, 1983, 71~74쪽; 신종원, 1984, 이장웅, 2016, 236~237쪽). 본서 신라본기에 지증왕부터 경애왕까지 신왕(新王)이 즉위 2년 또는 3년 정월이나 2월에 신궁에 친히 제사하였다고 전하는데, 현재 이와 같은 신라본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지증왕대부터 시조묘 제사가 아니라 신궁 제사 때에 즉위의례를 거행하였고, 이를 통해 신왕은 신성한 시조로부터 이어지는 왕실의 존엄과 왕의 즉위에 대한 정통성을 표방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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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궁의 성격을 둘러싸고 시조묘(始祖廟)와 마찬가지로 신라 시조 혁거세를 제향하는 사당으로 보는 견해, 김씨의 시조를 제사하는 새로운 제의 시설로 보는 견해, 자연신으로서의 천지신(天地神)을 제사하는 곳으로 보는 견해 등이 제기되었다. 신궁의 주신(主神)을 혁거세로 이해하는 근거는 나을을 나정(蘿井)으로 비정할 수 있다는 사실과 박씨인 경애왕이 신궁에 친히 제사하였다고 전하는 신라본기의 기록에 의거하고 있다(今西龍, 1933; 1970, 232~233쪽; 이병도, 1977, 49쪽; 최재석, 1983, 152쪽; 박승범, 2002, 163~166쪽). 시조묘와 마찬가지로 신궁의 주신을 혁거세로 이해하면서, 시조묘와 신궁 제사의 장소가 혁거세왕릉과 나을(나정)로 차이가 있었고, 또한 제의과정에서도 후자에서 시조의 탄강(誕降)이 더 강조되는 방식으로 전자와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견해(나희라, 2003, 131~154쪽; 백동인, 2016, 204쪽), 시조묘와 신궁에 모두 국조(國祖)이면서 천신적 성격을 지닌 혁거세를 주신으로 모셨으면서도 김씨 왕실이 신궁을 설치하여 시조의 신성성을 시조묘 제사 때보다 신궁 제사 때에 더욱 부각시켰다고 이해한 견해(채미하, 2008, 80~87쪽), 소지마립간은 박씨 왕족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하여 신궁을 설치하고 혁거세와 천제(天帝)에 함께 제사지냈다고 이해한 견해(박남수, 2019, 483쪽) 등이 제기되었다. 또한 신궁의 주신을 혁거세와 알영(閼英)의 두 성인(聖人)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이종태, 1992, 74~75쪽; 김두진, 1994, 76~78쪽).
김씨 시조를 제사하는 새로운 제의 시설이라고 하는 주장은 신궁을 설치할 때에 재위한 소지마립간이 김씨였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를 제기한 연구자들은 혁거세를 모시는 사당으로는 시조묘라는 이름으로 신라 초기부터 존재해 왔기 때문에 소지마립간 시기에 그의 사당을 거듭 건립할 필요가 크지 않았을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이 시기에 김씨 왕실의 위상이 확고해짐에 따라 자신들의 시조를 제사하는 시설을 새롭게 건립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지금까지 신궁에 모신 김씨 시조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본서와 『삼국유사』 등의 문헌 자료에 김씨의 시조로 나오는 알지(閼智)로 보는 견해(小田省吾, 1937; 김병곤, 2000, 146~147쪽; 강진원, 2020, 168~169쪽; 박초롱, 2022, 24~25쪽), 김씨로서 처음 신라왕이 되었던 미추왕으로 보는 견해(변태섭, 1964, 63쪽; 김창호, 1983; 정연식, 2011), 소지마립간의 직계 조상으로 김씨 왕실을 본격적으로 개창한 나물왕으로 보는 견해(末松保和, 1954, 108~110쪽; 신종원, 1992, 84쪽), 「경주 문무왕릉비」 등 7세기 후반에 건립된 비석에서 김씨의 시조로 언급된 성한(星漢)으로 보는 견해(이기동, 1978, 30쪽; 강종훈, 1994, 193~212쪽), 관념상의 인물로 추정하는 견해(이문기, 1999), 구체적인 인물을 제시하지 않고 단지 김씨의 시조로 이해하는 견해(전덕재, 2010, 17~19쪽) 등으로 세분된다. 이외에 신라는 건국 초기에 국조(國祖)인 박씨 혁거세에 대한 제사(시조묘 제사)를 지냄과 동시에 석씨와 김씨 역시 각기 자신들의 조상에 대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김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계승한 마립간시기에 박씨의 혁거세는 국조로서 나름 제사에 대한 명분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석씨의 탈해는 산신으로만 남게 되었고, 김씨 시조에 대한 제사는 신궁을 설치하여 국가제의로서 수행되었다고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김나경, 2018, 10~18쪽).
그리고 자연신으로서의 천지신을 제사하는 곳이라고 이해한 연구자는 고대사회에서 수많은 신격(神格) 가운데 ‘천신(天神)’이 지니는 위상이 가장 높았음에 주목하여, 신궁을 인격신이 아닌 자연신으로서의 천지신을 제사하기 위해 새로 만든 시설로 파악하였다(최광식, 1983, 71~74쪽; 신종원, 1984, 이장웅, 2016, 236~237쪽). 본서 신라본기에 지증왕부터 경애왕까지 신왕(新王)이 즉위 2년 또는 3년 정월이나 2월에 신궁에 친히 제사하였다고 전하는데, 현재 이와 같은 신라본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지증왕대부터 시조묘 제사가 아니라 신궁 제사 때에 즉위의례를 거행하였고, 이를 통해 신왕은 신성한 시조로부터 이어지는 왕실의 존엄과 왕의 즉위에 대한 정통성을 표방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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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초롱, 2022, 「신라 국가예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末松保和, 1954, 「新羅上古世系考」,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小田省吾, 1937, 「半島廟制槪要」, 『朝鮮』 269
제22대 지증왕은 … 신궁(神宮)을 세우고 제사지냈다: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소지마립간 9년(487) 봄 2월조에 “신궁(神宮)을 나을(奈乙)에 세웠다. 나을은 시조(始祖)가 처음 태어난 곳이다.”고 전하고, 이어 소지마립간 17년(495) 봄 정월조에 “왕이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또한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지증왕 3년(502) 기록에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고 전한다. 일반적으로 소지마립간 9년(487) 2월에 시조가 탄강한 곳인 나을에 신궁을 설치하였고, 지증왕 때에 신궁 관련 제도를 완비하였으며, 그 이전까지 시조묘 제사 때에 신왕이 즉위의례를 거행하였다가 지증왕 때부터 신궁 제사 때에 신왕의 즉위의례를 거행하기 시작하였다고 이해하고 있다. 다만 신궁의 주신을 혁거세로 이해하는 학자는 신왕은 즉위의례를 통해 시조 혁거세의 신성성을 체득한 군주로 거듭났고, 이러한 측면에서 즉위의례는 농경의례이자, 조상제사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고 주장한 반면(나희라, 2002, 17~26쪽), 주신을 김씨 시조로 이해하는 학자는 신궁 제사 때에 즉위의례를 거행함으로써 신성한 시조로부터 이어지는 김씨 왕실의 존엄과 새로운 왕의 즉위에 대한 정통성을 표방하였다고 주장하였다(김나경, 2020, 116~119쪽).
〈참고문헌〉
김나경, 2020, 「신라 오묘제 수용의 의미」, 『한국고대사연구』 97
나희라, 2002, 「신라의 즉위의례」, 『한국사연구』 116
〈참고문헌〉
김나경, 2020, 「신라 오묘제 수용의 의미」, 『한국고대사연구』 97
나희라, 2002, 「신라의 즉위의례」, 『한국사연구』 116
註) 009
지증왕(智證王): 신라 제22대 왕이다.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지증마립간 즉위년조에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지대로(智大路)【혹은 지도로(智度盧) 또는 지철로(智哲盧)라고도 하였다.】이다.”라고 전한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서 제22대 지정마립간(智訂麻立干)이라 하였고, 또한 왕의 이름을 혹은 지철로(智哲老) 또는 지도로(智度路)라고도 부른다고 하였다. 본서 권제44 열전제4 이사부조에 지도로왕(智度路王)이라고 전한다.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 冷水里 新羅碑)」에서는 ‘사훼부(沙喙部)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이라 하였다. 지증왕의 재위 기간은 500~514년이다. 나물왕(奈勿王)의 증손(曾孫),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고, 소지왕의 재종(6촌) 동생이다. 어머니는 김씨 조생부인(鳥生夫人)으로 눌지왕(訥祗王)의 딸이고, 왕비는 박씨(朴氏) 연제부인(延帝夫人)으로 등흔(登欣) 이찬(伊飡)의 딸이다. 이밖에 지증왕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지증마립간 즉위년조 참조.
註) 010
註) 011
나을(奈乙): 신궁(神宮)이 설치된 곳이다. 현재 나을의 위치에 대하여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에 있는 나정(蘿井)으로 보는 견해와 기타 장소로 보는 견해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본서 권제37 잡지제6 지리4 고구려 한산주조에 천정구현(泉井口縣)은 또는 어을매곶(於乙買串)이라고, 우수주조에 천정군(泉井郡)은 또는 어을매(於乙買)라고 전한다. 여기서 천(泉)은 어을(於乙), 정(井)은 매(買)와 대응됨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4 황극천황(皇極天皇) 원년(642) 2월 정미조에 고구려의 대신(大臣)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 いりかすみ)가 나온다. 이는 바로 연개소문(淵蓋蘇文)을 가리킨다.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男生)이 당나라에 항복한 이후에 당(唐) 고조(高祖)의 이름에 ‘연(淵)[이연(李淵)]’자가 포함되었으므로 이를 피휘(避諱)하여 성씨를 ‘천(泉)’으로 변경하였다. 이 때문에 연개소문을 천개소문(泉蓋蘇文)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여기서 ‘이리(伊梨)’와 대응되는 것은 연(淵) 또는 천(泉)이 된다. 어을(於乙)을 음차(音借)하면, ‘얼’이 되고, 이것은 연(淵) 또는 천(泉)에 대응되는 ‘이리(伊梨)’와 음운상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종래에 이를 근거로 천(泉) 또는 정(井)의 고구려어 및 신라어가 ‘얼(이리)’이고, 나을(奈乙)은 나(奈)+을(乙; 얼, 이리)의 합성어이며, 나아가 나을은 바로 ‘나(蘿; 羅=那=奈=耶)정’을 가리킨다고 보고, 나(奈, 蘿)는 고대의 지명 어미 끝에 붙는 나(羅·那) 또는 야(耶), 로(盧), 량(良)과 같이 국읍(國邑)을 의미한 말이므로 나을·나정은 바로 국정(國井)이라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양주동, 1935, 16쪽; 이병도, 1977, 49쪽; 도수희, 1987, 66~73쪽).
또한 신라시대에 월출산(月出山)을 월나악(月奈岳)이라 하였고, 고려 초에는 월생산(月生山)이라 한 사실을 주목하여, ‘나(奈)’를 ‘출(出)’, ‘생(生)’의 뜻, 즉 ‘나다’, ‘태어나다’의 뜻으로 풀이하고, ‘을(乙)’을 ‘천(泉)’, ‘정(井)’의 고어인 ‘얼’과 연결시킨 다음, 나을은 ‘태어난 우물’을 뜻하므로, 나을을 신화상의 신라 시조왕 탄강지인 나정이라고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나희라, 2003, 151쪽). 나을을 나정으로 비정하는 연구자들은 신궁의 주신(主神)을 박씨의 시조인 혁거세로 이해한다. 한편 어을(於乙)의 경우 훈음차(訓音借)하여 ‘’로 독음하는 것이 올바르며, 결과적으로 천(泉)의 고구려어는 ‘얼’이 아니라 ‘(리)’이었다고 이해한 견해(김종택, 2002, 89~106쪽)를 수용하여 나을을 나정이라고 비정하기 어렵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제기되었고(전덕재, 2010, 16~17쪽), 나아가 나을을 김씨 시조가 태어난 곳이라고 이해한 다음, 그것은 김씨족단의 발상지인 날이(捺已), 나령(奈靈), 즉 지금의 영주 지역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강종훈, 2002, 99~100쪽).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강종훈, 2002,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나희라, 2003, 『신라의 국가제사』, 지식산업사
양주동, 1935, 「鄕歌の解讀ー特に願往生歌に就いて-」, 『靑丘學叢』 19, 靑丘學會
도수희, 1987, 「백제어의 ‘泉·井’에 대하여」, 『국어학』 16
김종택, 2002, 「於乙買(串)를 다시 해독함」, 『지명학』 7
전덕재, 2010, 「신라 상대 왕궁의 변화와 종묘」, 『신라문화』 36
또한 신라시대에 월출산(月出山)을 월나악(月奈岳)이라 하였고, 고려 초에는 월생산(月生山)이라 한 사실을 주목하여, ‘나(奈)’를 ‘출(出)’, ‘생(生)’의 뜻, 즉 ‘나다’, ‘태어나다’의 뜻으로 풀이하고, ‘을(乙)’을 ‘천(泉)’, ‘정(井)’의 고어인 ‘얼’과 연결시킨 다음, 나을은 ‘태어난 우물’을 뜻하므로, 나을을 신화상의 신라 시조왕 탄강지인 나정이라고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나희라, 2003, 151쪽). 나을을 나정으로 비정하는 연구자들은 신궁의 주신(主神)을 박씨의 시조인 혁거세로 이해한다. 한편 어을(於乙)의 경우 훈음차(訓音借)하여 ‘’로 독음하는 것이 올바르며, 결과적으로 천(泉)의 고구려어는 ‘얼’이 아니라 ‘(리)’이었다고 이해한 견해(김종택, 2002, 89~106쪽)를 수용하여 나을을 나정이라고 비정하기 어렵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제기되었고(전덕재, 2010, 16~17쪽), 나아가 나을을 김씨 시조가 태어난 곳이라고 이해한 다음, 그것은 김씨족단의 발상지인 날이(捺已), 나령(奈靈), 즉 지금의 영주 지역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강종훈, 2002, 99~100쪽).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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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재, 2010, 「신라 상대 왕궁의 변화와 종묘」, 『신라문화』 36
註) 012
신궁(神宮): 신라 때 설치된 국가적 제사 시설의 하나이다. 설치 시기와 성격을 둘러싸고 많은 주장이 있다.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소지마립간 9년(487) 봄 2월조에 ‘신궁(神宮)을 나을(奈乙)에 세웠다. 나을은 시조(始祖)가 처음 태어난 곳이다.’라고 전한다. 현재 신라본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소지마립간대에 신궁을 설치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본 기록을 주목하여 지증왕 때 건립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신형식, 1977, 38쪽; 이종태, 1992, 59~67쪽). 현재 대부분의 연구자는 소지마립간대에 신궁을 설치하였고, 지증왕대에 신궁 제사가 본격적으로 제도화 및 실행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한편 두 기록의 차이를 소지마립간대에 신궁을 설치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당시에 지증왕이 신궁의 설치를 주도하였던 것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강종훈, 1994, 187~192쪽).
신궁의 성격을 둘러싸고 시조묘(始祖廟)와 마찬가지로 신라 시조 혁거세를 제향하는 사당으로 보는 견해, 김씨의 시조를 제사하는 새로운 제의 시설로 보는 견해, 자연신으로서의 천지신(天地神)을 제사하는 곳으로 보는 견해 등이 제기되었다. 신궁의 주신(主神)을 혁거세로 이해하는 근거는 나을을 나정(蘿井)으로 비정할 수 있다는 사실과 박씨인 경애왕이 신궁에 친히 제사하였다고 전하는 신라본기의 기록에 의거하고 있다(今西龍, 1933; 1970, 232~233쪽; 이병도, 1977, 49쪽; 최재석, 1983, 152쪽; 박승범, 2002, 163~166쪽). 시조묘와 마찬가지로 신궁의 주신을 혁거세로 이해하면서, 시조묘와 신궁 제사의 장소가 혁거세왕릉과 나을(나정)로 차이가 있었고, 또한 제의과정에서도 후자에서 시조의 탄강(誕降)이 더 강조되는 방식으로 전자와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견해(나희라, 2003, 131~154쪽; 백동인, 2016, 204쪽), 시조묘와 신궁에 모두 국조(國祖)이면서 천신적 성격을 지닌 혁거세를 주신으로 모셨으면서도 김씨 왕실이 신궁을 설치하여 시조의 신성성을 시조묘 제사 때보다 신궁 제사 때에 더욱 부각시켰다고 이해한 견해(채미하, 2008, 80~87쪽), 소지마립간은 박씨 왕족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하여 신궁을 설치하고 혁거세와 천제(天帝)에 함께 제사지냈다고 이해한 견해(박남수, 2019, 483쪽) 등이 제기되었다. 또한 신궁의 주신을 혁거세와 알영(閼英)의 두 성인(聖人)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이종태, 1992, 74~75쪽; 김두진, 1994, 76~78쪽).
김씨 시조를 제사하는 새로운 제의 시설이라고 하는 주장은 신궁을 설치할 때에 재위한 소지마립간이 김씨였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를 제기한 연구자들은 혁거세를 모시는 사당으로는 시조묘라는 이름으로 신라 초기부터 존재해 왔기 때문에 소지마립간 시기에 그의 사당을 거듭 건립할 필요가 크지 않았을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이 시기에 김씨 왕실의 위상이 확고해짐에 따라 자신들의 시조를 제사하는 시설을 새롭게 건립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지금까지 신궁에 모신 김씨 시조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본서와 『삼국유사』 등의 문헌 자료에 김씨의 시조로 나오는 알지(閼智)로 보는 견해(小田省吾, 1937; 김병곤, 2000, 146~147쪽; 강진원, 2020, 168~169쪽; 박초롱, 2022, 24~25쪽), 김씨로서 처음 신라왕이 되었던 미추왕으로 보는 견해(변태섭, 1964, 63쪽; 김창호, 1983; 정연식, 2011), 소지마립간의 직계 조상으로 김씨 왕실을 본격적으로 개창한 나물왕으로 보는 견해(末松保和, 1954, 108~110쪽; 신종원, 1992, 84쪽), 「경주 문무왕릉비」 등 7세기 후반에 건립된 비석에서 김씨의 시조로 언급된 성한(星漢)으로 보는 견해(이기동, 1978, 30쪽; 강종훈, 1994, 193~212쪽), 관념상의 인물로 추정하는 견해(이문기, 1999), 구체적인 인물을 제시하지 않고 단지 김씨의 시조로 이해하는 견해(전덕재, 2010, 17~19쪽) 등으로 세분된다. 이외에 신라는 건국 초기에 국조(國祖)인 박씨 혁거세에 대한 제사(시조묘 제사)를 지냄과 동시에 석씨와 김씨 역시 각기 자신들의 조상에 대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김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계승한 마립간시기에 박씨의 혁거세는 국조로서 나름 제사에 대한 명분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석씨의 탈해는 산신으로만 남게 되었고, 김씨 시조에 대한 제사는 신궁을 설치하여 국가제의로서 수행되었다고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김나경, 2018, 10~18쪽).
그리고 자연신으로서의 천지신을 제사하는 곳이라고 이해한 연구자는 고대사회에서 수많은 신격(神格) 가운데 ‘천신(天神)’이 지니는 위상이 가장 높았음에 주목하여, 신궁을 인격신이 아닌 자연신으로서의 천지신을 제사하기 위해 새로 만든 시설로 파악하였다(최광식, 1983, 71~74쪽; 신종원, 1984, 이장웅, 2016, 236~237쪽). 본서 신라본기에 지증왕부터 경애왕까지 신왕(新王)이 즉위 2년 또는 3년 정월이나 2월에 신궁에 친히 제사하였다고 전하는데, 현재 이와 같은 신라본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지증왕대부터 시조묘 제사가 아니라 신궁 제사 때에 즉위의례를 거행하였고, 이를 통해 신왕은 신성한 시조로부터 이어지는 왕실의 존엄과 왕의 즉위에 대한 정통성을 표방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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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수, 2019. 「당의 사전 체계와 신라의 사전 정비」, 『신라사학보』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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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궁의 성격을 둘러싸고 시조묘(始祖廟)와 마찬가지로 신라 시조 혁거세를 제향하는 사당으로 보는 견해, 김씨의 시조를 제사하는 새로운 제의 시설로 보는 견해, 자연신으로서의 천지신(天地神)을 제사하는 곳으로 보는 견해 등이 제기되었다. 신궁의 주신(主神)을 혁거세로 이해하는 근거는 나을을 나정(蘿井)으로 비정할 수 있다는 사실과 박씨인 경애왕이 신궁에 친히 제사하였다고 전하는 신라본기의 기록에 의거하고 있다(今西龍, 1933; 1970, 232~233쪽; 이병도, 1977, 49쪽; 최재석, 1983, 152쪽; 박승범, 2002, 163~166쪽). 시조묘와 마찬가지로 신궁의 주신을 혁거세로 이해하면서, 시조묘와 신궁 제사의 장소가 혁거세왕릉과 나을(나정)로 차이가 있었고, 또한 제의과정에서도 후자에서 시조의 탄강(誕降)이 더 강조되는 방식으로 전자와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견해(나희라, 2003, 131~154쪽; 백동인, 2016, 204쪽), 시조묘와 신궁에 모두 국조(國祖)이면서 천신적 성격을 지닌 혁거세를 주신으로 모셨으면서도 김씨 왕실이 신궁을 설치하여 시조의 신성성을 시조묘 제사 때보다 신궁 제사 때에 더욱 부각시켰다고 이해한 견해(채미하, 2008, 80~87쪽), 소지마립간은 박씨 왕족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하여 신궁을 설치하고 혁거세와 천제(天帝)에 함께 제사지냈다고 이해한 견해(박남수, 2019, 483쪽) 등이 제기되었다. 또한 신궁의 주신을 혁거세와 알영(閼英)의 두 성인(聖人)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이종태, 1992, 74~75쪽; 김두진, 1994, 76~78쪽).
김씨 시조를 제사하는 새로운 제의 시설이라고 하는 주장은 신궁을 설치할 때에 재위한 소지마립간이 김씨였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를 제기한 연구자들은 혁거세를 모시는 사당으로는 시조묘라는 이름으로 신라 초기부터 존재해 왔기 때문에 소지마립간 시기에 그의 사당을 거듭 건립할 필요가 크지 않았을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이 시기에 김씨 왕실의 위상이 확고해짐에 따라 자신들의 시조를 제사하는 시설을 새롭게 건립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지금까지 신궁에 모신 김씨 시조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본서와 『삼국유사』 등의 문헌 자료에 김씨의 시조로 나오는 알지(閼智)로 보는 견해(小田省吾, 1937; 김병곤, 2000, 146~147쪽; 강진원, 2020, 168~169쪽; 박초롱, 2022, 24~25쪽), 김씨로서 처음 신라왕이 되었던 미추왕으로 보는 견해(변태섭, 1964, 63쪽; 김창호, 1983; 정연식, 2011), 소지마립간의 직계 조상으로 김씨 왕실을 본격적으로 개창한 나물왕으로 보는 견해(末松保和, 1954, 108~110쪽; 신종원, 1992, 84쪽), 「경주 문무왕릉비」 등 7세기 후반에 건립된 비석에서 김씨의 시조로 언급된 성한(星漢)으로 보는 견해(이기동, 1978, 30쪽; 강종훈, 1994, 193~212쪽), 관념상의 인물로 추정하는 견해(이문기, 1999), 구체적인 인물을 제시하지 않고 단지 김씨의 시조로 이해하는 견해(전덕재, 2010, 17~19쪽) 등으로 세분된다. 이외에 신라는 건국 초기에 국조(國祖)인 박씨 혁거세에 대한 제사(시조묘 제사)를 지냄과 동시에 석씨와 김씨 역시 각기 자신들의 조상에 대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김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계승한 마립간시기에 박씨의 혁거세는 국조로서 나름 제사에 대한 명분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석씨의 탈해는 산신으로만 남게 되었고, 김씨 시조에 대한 제사는 신궁을 설치하여 국가제의로서 수행되었다고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김나경, 2018, 10~18쪽).
그리고 자연신으로서의 천지신을 제사하는 곳이라고 이해한 연구자는 고대사회에서 수많은 신격(神格) 가운데 ‘천신(天神)’이 지니는 위상이 가장 높았음에 주목하여, 신궁을 인격신이 아닌 자연신으로서의 천지신을 제사하기 위해 새로 만든 시설로 파악하였다(최광식, 1983, 71~74쪽; 신종원, 1984, 이장웅, 2016, 236~237쪽). 본서 신라본기에 지증왕부터 경애왕까지 신왕(新王)이 즉위 2년 또는 3년 정월이나 2월에 신궁에 친히 제사하였다고 전하는데, 현재 이와 같은 신라본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지증왕대부터 시조묘 제사가 아니라 신궁 제사 때에 즉위의례를 거행하였고, 이를 통해 신왕은 신성한 시조로부터 이어지는 왕실의 존엄과 왕의 즉위에 대한 정통성을 표방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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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3
제22대 지증왕은 … 신궁(神宮)을 세우고 제사지냈다: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소지마립간 9년(487) 봄 2월조에 “신궁(神宮)을 나을(奈乙)에 세웠다. 나을은 시조(始祖)가 처음 태어난 곳이다.”고 전하고, 이어 소지마립간 17년(495) 봄 정월조에 “왕이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또한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지증왕 3년(502) 기록에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고 전한다. 일반적으로 소지마립간 9년(487) 2월에 시조가 탄강한 곳인 나을에 신궁을 설치하였고, 지증왕 때에 신궁 관련 제도를 완비하였으며, 그 이전까지 시조묘 제사 때에 신왕이 즉위의례를 거행하였다가 지증왕 때부터 신궁 제사 때에 신왕의 즉위의례를 거행하기 시작하였다고 이해하고 있다. 다만 신궁의 주신을 혁거세로 이해하는 학자는 신왕은 즉위의례를 통해 시조 혁거세의 신성성을 체득한 군주로 거듭났고, 이러한 측면에서 즉위의례는 농경의례이자, 조상제사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고 주장한 반면(나희라, 2002, 17~26쪽), 주신을 김씨 시조로 이해하는 학자는 신궁 제사 때에 즉위의례를 거행함으로써 신성한 시조로부터 이어지는 김씨 왕실의 존엄과 새로운 왕의 즉위에 대한 정통성을 표방하였다고 주장하였다(김나경, 2020, 116~119쪽).
〈참고문헌〉
김나경, 2020, 「신라 오묘제 수용의 의미」, 『한국고대사연구』 97
나희라, 2002, 「신라의 즉위의례」, 『한국사연구』 11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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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라, 2002, 「신라의 즉위의례」, 『한국사연구』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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