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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와 구칠이 바다로 가다 ( 587년 07월 )
9년(587) 가을 7월에 대세(大世)註 001와 구칠(仇柒)註 002 두 사람이 바다로 갔다. 대세는 나물왕(奈勿王) 7세손(世孫) 이찬(伊飡) 동대(冬臺)註 003의 아들이다. 자질이 매우 뛰어났고, 어려서부터 속세를 떠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註 004 함께 사귀며 놀던 승려 담수(淡水)註 005에게 말하기를, “이 신라의 산골짜기에 살면서 한 평생을 마친다면, 못에 사는 물고기와 새장에 갇힌 새가 대해(大海)의 크나큼, 산림의 드넓음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장차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오(吳)·월(越)註 006에 이르러서 차차 스승을 좇아 명산(名山)에서 도(道)를 구하려고 한다. 만약 평범한 속인(俗人)에서 벗어나 신선술(神仙術)을 배울 수 있다면, 청명한 하늘에서 훨훨 바람을 탈 테니, 이야말로 천하의 기이한 유람이자 장대한 광경일 것이다. 그대는 나를 따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담수가 따르려 하지 않자, 대세는 물러나 다시 벗을 구하였다.
때마침 구칠(仇柒)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성품이 바르고 곧았으며 절조가 남달랐다. 그와 함께 남산(南山)의 사찰註 007에 놀러 갔는데, 홀연히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나뭇잎이 떨어져 뜰의 고인 물에 떠다녔다. 대세가 구칠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대와 함께 서쪽으로 유람할 뜻을 가지고 있다. 지금 각자 나뭇잎 하나씩 취하여 그것으로 배를 만들어서 누구의 것이 앞서 가고 뒤에 가는지를 보자.”라고 하였다. 조금 후에 대세의 나뭇잎이 앞서 가니, 대세가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구칠이 벌컥 화를 내며 말하기를, “나도 역시 사내대장부[男兒]인데 어찌 홀로 갈 수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대세가 함께 할 수 있음을 알고, 은밀하게 자신의 뜻을 말하였다. 구칠이 말하기를, “이것이야말로 나의 소원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서로 벗이 되어, 남해에서 배를 타고 갔는데, 후에 〔그들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註 008
註) 001
대세(大世): 나물왕의 후손으로서 진평왕 9년(587) 7월에 구칠(仇柒)과 함께 신선(神仙)이 되기 위해 남해에서 배를 타고 중국 남쪽으로 간 인물이다. 아버지는 이찬 동대(冬臺)이다.바로가기
註) 002
구칠(仇柒): 진평왕 9년(587) 7월에 대세(大世)와 함께 신선(神仙)이 되기 위해 남해에서 배를 타고 중국 남쪽으로 간 인물이다.바로가기
註) 003
동대(冬臺): 관등이 이찬이고, 신선이 되기 위해 남해에서 배를 타고 중국 남쪽으로 간 대세(大世)의 아버지이다. 대세가 나물왕의 7세손인지, 동대가 나물왕 7세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바로가기
註) 004
속세를 떠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 원문 “方外之志”는 속세를 떠나 불문(佛門)에 들어가고자 하는 뜻을 가리킨다.바로가기
註) 005
담수(淡水): 대세(大世)와 함께 어울려 놀았던 승려이다. 대세가 신선술을 배우기 위해 함께 떠나자고 제안하였으나 거절하였다.바로가기
註) 006
오(吳)·월(越): 구체적인 국명이 아니라 중국의 장강(長江) 이남의 남중국에 대한 범칭(汎稱)으로 사용되었다.바로가기
註) 007
남산(南山)의 사찰: 지금 경주 남산에 위치했던 사찰을 지칭한다고 추정되지만, 당시 사찰 명칭이 무엇이었는지 이 기록만으로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상도 경주부 고적조나 『동경잡기』 권2 고적조에서 대세(大世)와 구칠(仇柒)이 찾아간 사찰의 이름이 남산사(南山寺)였다고 하였는데, 이를 근거로 남산의 사찰을 남산동으로 불리는 경주 동남산 일대에 위치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박방룡, 2013, 『신라 도성』, 학연문화사, 140쪽).바로가기
註) 008
마침내 서로 …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대세(大世)가 중국 오(吳)·월(越)로 떠나 명산에서 도사를 만나 신선을 배워 환골탈태하여 신선이 되고자 한 것을 주목하여, 대세와 구칠(仇柒)이 상청파(上淸派)의 본산이 있는 강소성 모산(茅山) 등지를 찾아가려고 하였을 가능성이 높고, 이를 통해 진평왕대 신라의 신선사상은 남조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 견해가 있다(김윤수). 한편 일반 또는 하위의 진골귀족인 대세가 핵심 또는 상위의 진골귀족 중심의 골품제와 국정 운영에 불만을 품고 중국으로 망명하려 하였다고 보는 견해(申東河; 金杜珍; 金瑛河; 朴海鉉; 金德原, 106쪽), 대세가 출국한 사실을 주목하여 진평왕대에 신라사회에서 중국에 유학하여 중국의 수준 높은 문화를 배우려는 분위기가 팽배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李基白, 1954; 1986, 42쪽) 등이 제기되었다.
〈참고문헌〉
李基白, 1954, 「三國時代 佛敎傳來와 그 社會的 性格」, 『歷史學報』 6; 1986, 『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 재수록
申東河, 1979, 「新羅 骨品制의 形成過程」, 『韓國史論』 5,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金杜珍, 1988, 「新羅 眞平王代의 釋迦佛信仰」, 『韓國學論叢』 1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金瑛河, 1988, 「新羅 中古期의 政治過程試論 ; 中代王權成立의 理解를 위한 前提」, 『泰東古典硏究』 4
朴海鉉, 1988, 「新羅 眞平王代 政治勢力의 推移-王權强化와 관련하여-」, 『全南史學』 2
김윤수, 2006, 「신라시대 國仙의 사상적 성격」, 『道敎文化硏究』 25
金德原, 2007, 『新羅中古政治史硏究』, 경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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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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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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