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번역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충청도(忠淸道)
자료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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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현(報恩縣)
동쪽으로 경상도 상주(尙州) 경계까지 44리에 이르렀고, 남쪽으로 옥천군(沃川郡) 경계까지 26리요, 청산현(靑山縣) 경계까지 25리에 이르렀고, 서쪽으로 회인현(懷仁縣) 경계까지 14리에 이르렀고, 북쪽으로 청주(淸州) 경계까지 28리에 이르렀으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新羅)의 삼년산군(三年山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삼년(三年)이라고 고쳤으며, 고려 때에 보령(保齡) 령(齡)은 뒤에 영(令)으로 변해졌음. 으로 고쳐서 현종(顯宗) 9년에 상주(尙州)에 소속시켰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6년에 보령현(保寧縣)과 음(音)이 서로 비슷하다 해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감(縣監)을 삼았다. 13년에 경상도에서 본도로 예속되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삼년산(三年山)ㆍ보령(保齡)ㆍ삼산(三山)ㆍ보령(保令).
【성씨】 본현 김(金)ㆍ이(李)ㆍ손(孫)ㆍ박(朴)ㆍ최(崔)ㆍ송(宋)ㆍ한(韓) 모두 내성(來姓)이다.임언(林堰) 홍(洪)ㆍ석(石)ㆍ방(方) 촌성(村姓)이다.
【산천】 속리산(俗離山) 고을 동쪽 44리에 있다.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九峯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속리악(俗離岳)이라고 일컽고 중사(中祀)에 올렸다. 산마루에 문장대(文藏臺)가 있는데, 층이 쌓인 것이 천연으로 이루어져 높게 공중에 솟았고, 그 높이가 몇 길인지 알지 못한다. 그 넓이는 사람 3천 명이 앉을 만하고, 대(臺) 위에 구덩이가 가마솥 만한 것이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불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뉘어서 반공(半空)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錦江)이 되고, 또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가서 달천(達川)이 되어 김천(金遷)으로 들어 갔다.
○ 산 아래에 8교(橋)와 9요(遙)의 이름이 있는데, 산 양쪽 언덕이 빙빙 둘러 넓어져서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다 보면 멀고 멀어서 마치 땅이 끝인 것처럼 의심스럽다가 거기까지 가서 바라보면 또 멀고 멀어서 이렇게 아홉 번 구불어지다가 비로소 법주사(法住寺)에 닿기 때문에 이름을 9요(遙)라고 한다. 9요 속에 물 한 줄기가 돌고 돌아 굽이쳐 꺾이는데, 한 굽이마다 다리가 있어 그 다리가 도합 여덟이기 때문에 이름하여 팔교(八橋)라고 했다. 맨 첫다리는 수정교(水精橋)이니, 다리 위에 비각(飛閣)이 있어 사람들이 이 각(閣) 속으로 다녔는데, 지금은 각은 무너지고 다리만 남아 있다. 중 신여(信如)가 다리 위에 시를 썼는데, “삼청동(三淸洞)에 아홉 겹 요(遙)가 있고, 한 줄기 시냇물에 여덟 다리가 있네. 다리 아래 물 맑은데 붉은 것이 푸른빛을 시기하니, 산에 가득한 단풍잎, 소나무 가지에 의지해 있네.” 하였다.
함림산(含林山)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구봉산(九峯山) 고을 동쪽 43리에 있다. 사산(蛇山)ㆍ와산(蛙山)ㆍ서산(鼠山) 모두 고을 안에 있다. 금적산(金積山) 고을 남쪽 25리에 있다. 검단산(儉丹山) 고을 북쪽 37리에 있으니 청주(淸州) 경계이다. 백제의 중 검단(儉丹)이 살던 곳이므로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오정산(烏頂山) 고을 동쪽 5리에 있다. 웅현(熊峴) 고을 북쪽 27리에 있다. 차의현(車衣峴) 고을 서쪽 15리에 있으니 회인현(懷仁縣)의 경계이다. 용천(龍川) 고을 동쪽 3리에 있다. 병풍연(屛風淵) 속리산(俗離山) 아래 있으니 고을 동쪽으로 거리가 25리이다.
【토산】 송이[松蕈]ㆍ주철[水鐵] 웅현(熊峴)과 차의현에서 생산됨. 꿀[蜂蜜]ㆍ잣[海松子]ㆍ영양(羚羊)ㆍ안식향(安息香)ㆍ지황(地黃)ㆍ웅담(熊膽)ㆍ석이버섯[石蕈].
【누정】 삼산루(三山樓)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원암역(元巖驛)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복주(福州 안동을 말함)에서 청주(淸州)에 올 적에 이 역(驛)에서 머물렀다. ○ 이색(李穡)의 〈칠로연집시서(七老讌集詩序)〉에, “옛날 군자는 그 임금을 보좌하는데 있어서 그 의(義)를 다했기 때문에, 그 임금이 그를 예우(禮遇)하는 데 있어서도 지극히 풍성하였다. 예우를 풍성히 하는 것과 의를 극진히 함은 뜻이 같고 기운이 합하여 마치 구름이 용(龍)을 따르는 것과 같고, 물고기가 물에 있는 것과 같다. 늙음에 이르러서는 번갈아 쉬게 하고 번갈아 써서 백발(白髮)의 나이에 한가롭게 놀고 편안히 즐기게 하되, 그 벼슬 자리를 떠났다고 하여 하루라도 국가를 잊지 않고, 의논할 일이 있으면 물어서 결정짓고, 국가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달려가니, 임금과 신하 사이에 어찌 이렇게도 사이가 좋았던가. 나는 원암(元巖) 여러 늙은이들의 연집서(讌集序)를 씀에 있어서 세 번 탄식하노라. 임금이 남쪽으로 거둥했을 적에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염제신(廉悌臣)과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암(李巖),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환(尹桓), 회산부원군(檜山府院君) 황석기(黃石奇),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 홍원철(洪元哲), 수춘군(壽春君) 이수산(李壽山), 계성군(啓城君) 왕재(王梓)가 임금을 따르니 임금이 심히 가상히 여겨서 또한 극진히 대우하였다. 8월 병술일에 원암(元巖)에 행차하고 정해일에 속리산(俗離山)에 거둥했는데, 이튿날 큰비가 와서 다시 원암으로 돌아와서 하루를 묵었다. 여러 늙은이들은 이미 평안히 집에 있어 또 환도(還都)할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즐겨하여 이에 술을 들어 서로 권하고 노래를 불러 즐기는데, 대장군(大將軍) 김하적(金何赤)은 피리를 불고 장군(將軍) 김사혁(金斯革)은 쟁(箏)을 타서 창안백발(蒼顔白髮)로 웃으며 이야기하고 수작하는 것이 바라보기에 마치 신선과 같았다. 아, 난리 평정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또 태평의 빛남이 이 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여러 늙은이는 이미 늙었으나 임금께서 부소산(扶蘇山) 남쪽 궁궐 속에 계시지 못한 것을 아프게 생각하여 몸소 갑옷과 화살통을 가지고 번갈아 들에서 숙직(宿直)하며 비바람과 춥고 더운 것을 가리지 않으매, 백관(百官)들도 이것을 법으로 본받아 감히 각각 그 직책을 빠짐없이 닦았으니, 조석으로 주선하는 사이에 인심을 감동시키고 국가의 사체에 유익함이 많게 되어, 조정에 앉아 호령을 내는 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도연명(陶淵明)과 죽림칠현(竹林七賢)들은 명교(名敎)의 죄인이로되, 일을 좋아하는 자들이 오히려 그림으로 그리고 시로 읊었거든 하물며 원암(元巖)의 성한 모임이 국가의 원기(元氣)가 됨에 있어서랴. 다만 알지 못하거니와 지금 세상에 그림을 잘 그리는 자가 누구이며, 시를 잘 읊조리는 자는 또 누구인가. 그림을 그릴 적에 비록 자제(子弟)의 역할을 맡아서 쟁(箏)을 타고 피리를 부는 반열에 끼려해도 이미 할 수 없는 일이나, 시를 읊는 데는 불초한 내가 앞장 서지 않고 누가 하겠는가. 이곳 경치를 보면 속리산(俗離山)은 우뚝 솟아 있어 높기가 하늘에 닿은 것이 우리 후생(後生)들이 우러러볼 바가 아닌가. 여러 늙은이들의 풍류(風流)와 문채(文彩)가 이 산과 서로 높은 것을 다툰다 해도 옳을 것이니, 어찌 시 짓고 그림 그릴 필요가 있을 것인가.” 하였다.
○ 전 사람(이색)의 시(詩)에, “현릉(玄陵)이 남쪽으로 거둥해 멀리 갔다가 돌아올 때, 원암(元巖)에 머무르니 산은 높고 높았네. 나무는 가리울 듯 비칠 듯 들이 넓게 되었는데, 천막집[氈廬] 가운데 솟아서 가는 티끌도 없었네. 당시 일곱 늙은이 좌우에 있었으니, 높은 큰 덕(德)에 웅재(雄才)를 겸했었네. 여러 사람의 마음 여기 주석(柱石)과 같고, 단청(丹靑)이 빛나는 동량(棟樑)의 재목일세. 흔연한 기쁜 빛으로 송악(松岳)을 향하니, 참으로 능묘(陵廟)를 소제하는 때로다. 즐겁게 술 마시고 노래소리 들으니, 태평(太平)의 환한 기운 한창 밀려오네. 회산(檜山)이 먼저 글 쓰자 주옥이 떨어져, 반짝반짝 금 소반에 무더기로 쌓여 여러 공(公)의 화답하는 글 모두 훌륭한데, 익재(益齋)의 익숙한 붓 삼태성(三台星)에 빛나도다. 곡성(曲城)의 생각 어찌 그리 깊고 장구한가. 그림 그려 전하니 운대(雲臺)와 같네. 목동(牧童)은 피리 부는 반열에 있지 못했고, 서문을 짓자 와부(瓦釜)가 우레같이 울리네. 그 이름 그림 뒤에 거는 것 또 소원이 아니니, 당세에 글 잘 하는 이들, 아예 시기하지 마소. 대신(大臣)이란 국가에 원기(元氣)라, 혈맥에 흐르고 통해야 화(禍)의 근본 없애리. 뒷사람들 그림이라 보지 말고, 절의를 지켜 삼강(三綱) 무너지는 것 붙들어 일으키게. 더구나 자제들이야 감히 자기(自棄)하리, 돌아가서 무성한 뜰 가운데 홰나무를 보게 하소.” 하였다.
○ 황석기(黃石奇)의 시(詩)에, “푸른 옥잔은 깊고 술맛 아름다운데, 거문고 소리 느리고 피리소리 길도다. 그 중에 또 가느다란 노래 소리 들리니, 일곱 늙은이 서로 즐기는데 수염은 서리 같네.” 하였다.
○ 고려 윤택(尹澤)의 시(詩)에, “소년은 꽃 밑 침향정(沈香亭)에 취하여 청평사(淸平祠) 지어 바치니, 광염(光熖)이 길게 뻗쳤네. 쇠퇴한 지금에 무고(武庫)를 보니 부질없이 자전(紫電)과 청상(淸霜)만이 남았네.” 하였다.
○ 이암(李巖)의 시(詩)에, “가을 바람 임금 행차 길에 벼꽃[稻花] 향기로우니, 당일 백성 생각하던 마음 또한 길었어라. 다시 술 한 잔 대해 성상의 수명을 비니, 앉아서 오골(鰲骨)이 여러 번 서리빛 되는 것 보옵소서.” 하였다.
○ 이제현(李齊賢)의 시(詩)에, “국화꽃 철 늦게 향기로운 것 사랑하노니, 잔 들어 서로 권하여 뜻 또한 깊고 길었네. 안위(安危)나 고락(苦樂)은 돌고 도는 것, 아이들에게 말하노니, 서리 밟을 제 조심하라.” 하였다.
○ 염제신(廉悌臣)의 시에, “붓에서 구슬이 떨어져 글자마다 향기로우니, 맑은 노래소리에 술잔 길게 드네. 반쯤 취하자 다시 임금의 은혜 중대함을 깨달으며, 밤 늦도록 앉았으니 서리 내릴 듯 밤도 차네.” 하였다.
함림역(含林驛) 함림산(含林山) 밑에 있다. 마분원(馬分院) 고을 동쪽 13리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고을 동쪽 29리에 있다. 왕내원(王來院) 구봉산(九峯山) 밑에 있으니 또한 공민왕(恭愍王)이 머물렀던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남원(南院) 고을 남쪽 1리에 있다. 병원(竝院) 고을 서쪽 7리에 있다. 문라원(門羅院) 고을 북쪽 13리에 있다. 추원(樞院) 고을 북쪽 27리에 있다.
【불우】 속리사(俗離寺) 속리산 서쪽에 있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詩)에, “달마암(達磨巖) 곁에 등불 하나 밝았는데, 문 열고 향 피우니 마음 다시 맑아라. 혼자 깊은 밤에 앉아 잠 못 이루니, 창 앞에 흐르는 물, 솔바람 소리와 섞여 들리네.” 하였다.
법주사(法住寺) 속리산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신라의 중 의신(義信)이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성덕왕(聖德王)이 중수했는데, 석조(石槽)와 석교(石橋)ㆍ석옹(石翁)ㆍ석확(石鑊)이 있으며, 절 안 산호전(珊瑚殿)에는 금신장육상(金身丈六像 불상)이 있으며, 문 앞에는 구리로 부어 만든 깃대[幢]가 있는데, 모양이 몹시 높고 그 한 쪽에 통화(統和) 24년에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또 고려 밀직대언(密直代言) 이숙기(李叔琪)가 지은 중 자정(慈淨)의 비명(碑銘)이 있다. ○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높다란 사면 푸른 연꽃 같은 봉우리, 장갑(長岬)의 신령스러운 근원 몇 겹인고. 문장대(文藏臺)는 천고(千古)의 이끼 그대로 있고, 우타굴(于陀窟) 그늘 만 그루 소나무일세. 용이 탑 속으로 돌아가니 진골(眞骨)이 남았고, 나귀가 바위 앞에 누웠으니 성종(聖蹤)을 찾네. 길이 삼한(三韓)을 복 되게 하는 건 누가 주인인가. 산호전(珊瑚殿) 위에 자금용(紫金容)일세.” 하였다.
○ 함부림(咸傅霖)의 시에, “계원(鷄園)의 한가로운 일월(日月)이요, 안탑(雁塔)에 구름과 연기 자욱하네. 우연히 삼청동(三淸洞)에 들렸더니, 세상일 시끄러운 것 모두 잊었네.” 하였다.
복천사(福泉寺) 법주사(法住寺) 동쪽 7리쯤 되는 곳에 있다. 절 동쪽에 샘물이 있어 돌 사이에서 쏟아져 나와 식수(食水)로 쓰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 천순(天順) 갑신년에 우리 세조대왕(世祖大王)이 속리산에 거둥했을 때 병풍연(屛風淵)에 잠시 들렸다가, 이튿날 법주사에서 이 절까지 두루 경치를 구경한 다음 호종(扈從)하는 문신(文臣) 김수온(金守溫)에게 명해서 이 일을 기록하게 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 속리산(俗離山) 마루에 있다. 그 신(神)이 매년 10월 인일(寅日)에 법주사에 내려오면, 산중 사람들이 풍류를 베풀고 신(神)을 맞이하여 제사지내는데 신(神)은 45일을 머물다가 돌아간다 한다. 여단(厲壇)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구석(龜石) 법주사 서쪽 봉우리에 구석(龜石)이 있는데, 천연으로 하늘이 만든 것 같아 그 등에 사람 50명이 앉을 만하고 그 머리는 우뚝하게 서쪽으로 들고 있다. 속세에서 전하기를, “중국(中國) 술사(術士)가 와서 보고 하는 말이, ‘중국의 재물과 비단이 날마다 동쪽으로 넘어오는 것을 나는 무슨 까닭인지 몰랐더니, 이제 알고 보니 이 물건이었구나.’ 하고, 그 머리를 잘라 방술(方術)을 하였다.” 한다. 마현박석(馬峴薄石)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고개 위에 얇은 돌이 3, 4리에 깔려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는 말로는 “고려 태조가 일찍이 속리산에 거둥했을 적에 닦은 어로(御路)다.” 한다. 오정산성(烏頂山城) 고을 동쪽 5리에 있으니, 바로 삼년산성(三年山城)인데, 쌓은지 3년만에 완성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6백 99척이요, 높이가 18척이며, 성안에 우물 다섯 개가 있는데, 지금은 반은 무너졌다.
○ 고려 태조 11년에 몸소 이 성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드디어 청주(淸州)로 거둥했었는데, 산 아래 군장동(軍藏洞)이 있었으니, 세상에서 전하기를, “태조가 군사를 주둔시킨 곳이라.” 한다.
함림산성(含林山城)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1천 4백 88척이요, 높이가 6척이며, 성안에 큰 못이 있었는데 지금은 반쯤 무너졌다.
임언부곡(林堰部曲) 혹은 임단(臨壇)이라고도 한다.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명환】 신라 열기(裂起) 삼년산군(三年山郡)의 태수(太守).
【우거】 고려 한유문(韓有紋) 우리 태종(太宗)과 동년진사(同年進士)요, 벼슬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이르렀다. 김타(金沱) 두 번 과거에 뽑혀 여러 번 요직을 거쳐 벼슬이 청주 목사(淸州牧使)에 이르렀다.
『신증』 【효자】 본조 막동(莫同) 사천(私賤)이다. 자기 집에 불이 나서 자기 어머니와 자기 딸이 모두 불속에 들어 있는데, 막동(莫同)은 급히 들어가 어머니를 업고 나오면서 딸은 돌아다 보지도 않고, 오직 그 어머니 살린 것을 기쁘게 여겼다. 금상(今上) 14년에 정문을 내렸다.
【제영】 산천방불무릉천(山川髣髴武陵天) 권진(權軫)의 시(詩)에, “산과 시내가 무릉(武陵)과 비슷하니, 하필 다시 봉래도(蓬萊島)의 신선을 구하리오.” 했다. 요양연천휴(沃壤連千畦) 이맹균(李孟畇)의 시(詩)에, “새벽밥 먹고 회인(懷仁)을 떠나니, 만첩 산을 뚫고 왔네. 갑자기 평평한 들 보이니, 넓적하여 내 마음에 드네. 관사(館舍)는 굉장하고, 여러 봉우리 모두 읍(揖)하는 것 같네. 기름진 땅 천 이랑이 이어 있으니, 백성들 살기 편안하네. 또 듣건대 풍속이 순후하여 불러 음식을 서로 대접한다네. 황홀하게 도원(桃源)에 노는 것 같아서, 다시 찾을 때 길 잃을까 두렵도다. 신라 때 삼년성(三年城)은, 당시에 몇 번이나 습격당했던가. 고려 말년에 바다 도둑이 잦아서, 전쟁이 오랫동안 쉬지 않았네. 지금은 임금의 은택 깊으니, 안심하고 살면서 명절을 즐기네. 왕명(王命) 받들고 와서 무엇하였나, 부질없이 길을 달리네.” 하였다. 산원취연부(山遠翠煙浮) 이정령(李正寧)의 시(詩)에, “뜰은 비었는데 푸른 풀 우거졌고, 산은 먼데 푸른 연기 떠 있네.” 하였다. 유협다기빈주마(幽峽多奇頻駐馬) 서거정(徐居正)의 시(詩)에, “푸른 산 두 언덕 강물을 끼고 있으니, 나루터에 돌아와 작은 배에 의지했네. 깊은 산골에 기이한 것 많아 자주 말을 멈추고, 석양(夕陽)이 보기 좋아 다시 누(樓)에 오르네. 누런 구름 뭉게뭉게 벼가 처음 익었고, 붉은 비단 나부끼니 단풍이 시름이네. 바쁜 이 한 몸 물에 뜬 나무토막 같아서, 내일 아침에 또 다시 영남(嶺南) 향해 떠나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순조(純祖)조에 군수(郡守)로 올렸다. 고종(高宗)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내북(內北) 처음은 3리, 끝은 30리. 외북(外北) 동북쪽으로 처음은 3리, 끝은 30리. 속리(俗離) 동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45리. 왕래(王來) 동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마로(馬老) 동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5리. 삼승(三升) 남쪽으로 처음은 17리, 끝은 30리. 탄부(炭釜)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40리. 서니(西尼) 서쪽으로 처음은 3리, 끝은 20리. 수한(水汗) 서쪽으로 처음은 3리, 끝은 30리. 사각(思角) 북쪽으로 처음은 4리, 끝은 20리.
【토산】 대추ㆍ감.
【사원】 상현서원(象賢書院) 명종 기유년에 세웠고, 광해군 경술년에 사액했다. 김정(金淨) 청주에 보인다. 성운(成運) 자는 건숙(建叔)이고, 호는 대곡(大谷)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벼슬은 사담시(司膽寺)의 정(正)이었는데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성제원(成悌元) 공주(公州)에 보인다. 조헌(趙憲) 금포에 보인다. 송시열 문묘에 보인다.
[주-D001] 명교(名敎)의 죄인 : 
유교(儒敎)는 명분(名分)을 중히 여기므로 명교라 한다. 진(晉)나라 완적(阮籍)의 무리 7인이 죽림(竹林)에 모여 놀면서 노장(老莊)의 청담(淸談)을 일삼으므로 당시에 죽림칠현이라 하였는데, 그들은 자연주의(自然主義)를 주장하고 예법에 구애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완적은 어머니가 죽었단 말을 듣고도 바둑 한 판을 끝까지 두었으며 상중(喪中)에 술과 고기를 여전히 먹었다. 그러므로 명교의 죄인이라 한다.
[주-D002] 능묘(陵廟)를 소제하는 때로다 : 
전란에 적병에게 서울을 빼앗겼다가 다시 수복하면 왕릉(王陵)과 종묘(宗廟)에 먼저 참배하고 소제한다.
[주-D003] 삼태성(三台星) : 
인간의 3정승을 하늘에 있는 3태성에 비유한다.
[주-D004] 운대(雲臺) :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빼앗겼던 나라를 중흥시켰는데 그 아들 명제(明帝)가 중흥공신 이십팔 장(二十八將)을 남궁운대(南宮雲臺)에 초상을 그려서 붙였다.
[주-D005] 목동(牧童) :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목동(牧童)이라 자칭하였다.
[주-D006] 와부(瓦釜)가 우레 같이 울리네 : 
초사(楚辭)에, “황종은 헐어 버려지고 질그릇 가마[瓦釜]가 우뢰처럼 울린다.”는 귀절이 있다. 황종은 음악에 십이률(十二律)의 처음 소리다. 이 글의 뜻은 좋은 음악 대신에 시원치 않은 소리를 울린다는 뜻이다.
[주-D007] 자기(自棄) : 
《맹자》에 나온 말인데 자기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단념하는 것을 뜻함.
[주-D008] 무성한 뜰……보게 하소 : 
송나라 왕호(王祜)가 뜰에다 삼괴(三槐)를 심으면서, “내 자손이 반드시 삼공(三公)이 되는 자가 있으리라.” 하더니, 과연 그 아들 왕단(王旦)이 정승이 되었다. 소동파(蘇東坡)가 〈삼괴당명(三槐當銘)〉을 지으면서, “집에 돌아와서 보니 홰나무 그늘이 뜰에 찼네.” 하는 귀절이 있었다.
[주-D009] 광염이……뻗쳤네 : 
당명황(唐明皇)이 양귀비(楊貴妃)를 데리고 모란꽃을 구경하다가 이태백(李太白)을 시켜 새 악장(樂章)을 지으라 하니, 이태백이 청평사를 지어 바쳤다. 그 뒤에 한유(韓愈)의 시에, “이태백ㆍ두자미(杜子美)의 문장은 광염(光焰)이 만길이나 길다.” 한 귀절이 있다.
[주-D010] 자전(紫電)과 청상(淸霜) : 
당나라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자전ㆍ청상은 왕장군의 무고(武庫)로다.” 한 구절이 있는데 자전과 청상은 보검(寶劍)이다.
[주-D011] 오골이……보옵소서 : 
동해 바다 가운데 자라[鰲]가 삼신산(三神山)을 머리에 이고 있다 하는데, 여기서는 그 자라가 죽어 흰 뼈가 되도록 오래 살라는 말이다.
[주-D012] 자금용(紫金容) : 
부처의 몸 빛이 자금색이었다.
[주-D013] 계원(鷄園) : 
인도(印度)에 있는 절 이름인데, 무우왕(無憂王)이 세운 것이다.
[주-D014] 안탑(雁塔) : 
인도의 왕사성(王舍城)에 안탑이 있는데 중들이 기러기가 공중에 날아 가는 것을 보고 희롱하는 말로, “우리들이 배가 고프니, 보살(菩薩)이 기러기를 가리킨 말은 몸으로 보시(布施)하시오.” 하였더니, 기러기가 스스로 죽어서 떨어졌다. 중들이 감동되어 기러기의 탑을 세웠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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