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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고군
임고군(臨臯郡)註 255은 본래 절야화군(切也火郡)註 256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영주(永州)註 257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다섯이다.
장진현(長鎭縣)註 258은 지금[고려]의 죽장이부곡(竹長伊部曲)註 259이다.
임천현(臨川縣)註 260은 조분왕(助賁王) 때에 골화소국(骨火小國)註 261을 쳐서 얻어서 현을 두었다.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영주(永州)에 합하여 속해 있다.
도동현(道同縣)註 262은 본래 도동화현(刀冬火縣)註 263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영주(永州)에 합하여 속해 있다.
신녕현(新寧縣)註 264은 본래 사정화현(史丁火縣)註 265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맹백현(黽白縣)註 266은 본래 매열차현(買熱次縣)註 267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신녕현(新寧縣)에 합하여 속해 있다.
註) 255
임고군(臨臯郡):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시(永川市).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절야화군(切也火郡)을 임고군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초에 임고군과 도동(道同)·임천(臨川)의 두 현(縣)을 합하여 영주(永州)라고 하였다. 성종 14년(995)에 영주자사(永州刺史)를 두었고, 현종 9년(1018)의 주현(主縣)-속현(屬縣) 체제에서 경주(慶州, 현 경상북도 경주시)의 속현이 되었다.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승격시켜 지주사(知州事)가 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예(例)에 의하여 영천군(永川郡)으로 고쳤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경상도 경주 영주; 『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영천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경상도 영천군). 고려 영주, 조선 영천군의 중심지는 읍성이 있었던 현재의 영천시 문내동 일대이다. 고려 초 임고군, 임천현, 도동현이 합하여 영주가 되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영천군 고적조에 임천폐현, 도동폐현의 위치만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통합 영주의 읍치는 임고군의 그것을 계승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임고군(절야화군)의 중심지와 다른 곳에 새로 읍치가 정해졌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이 경우 신라 임고군의 중심지는 제3의 장소에서 찾아야 할 것인데, 현재로서는 더 이상 추적이 불가능하다(박성현, 2017, 「통일신라시대 금호강 유역의 공간 구조 개편」, 『百濟文化』 56, 36~38쪽).바로가기
註) 256
절야화군(切也火郡): 신라 임고군(臨臯郡, 현 경상북도 영천시)의 경덕왕 때 고치기 전 이름.바로가기
註) 257
영주(永州): 고려 초에 임고군(臨臯郡, 현 경상북도 영천시)과 도동(道同)·임천(臨川)의 두 현(縣)을 합하여 영주(永州)라고 하였다. 위의 임고군에 대한 주석 참조.바로가기
註) 258
장진현(長鎭縣): 현재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竹長面) 현내리(縣內里) 일대. 장진현의 경우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고친 이름으로 판단된다(윤경진, 2012, 『高麗史 地理志의 分析과 補正』, 여유당, 135쪽). 이 경우 고치기 전 이름을 알 수 없다. 고려에서 죽장(竹長)으로 고치고 부곡(部曲)으로 만들어 경주(慶州, 현 경상북도 경주시)에 소속시켰다(『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상도 경주부). 그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부의 북쪽 60리 청송부(靑松府)와 경계에 있다’고 하였다. 현재의 포항시 북구 죽장면 현내리 일대에 해당한다.바로가기
註) 259
죽장이부곡(竹長伊部曲): 신라 장진현(長鎭縣, 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의 고려 태조 23년(940) 이후 이름. 죽장부곡(竹長部曲)이라고도 하였다. 위의 장진현에 대한 주석 참조.바로가기
註) 260
임천현(臨川縣):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시 완산동 일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골화현(骨火縣)을 임천현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초에 임고군(臨臯郡, 현 경상북도 영천시 문내동 일대)과 도동(道同)·임천(臨川)의 두 현(縣)을 합하여 영주(永州)라고 하였다. 성종 14년(995)에 영주자사(永州刺史)를 두었고, 현종 9년(1018)의 주현(主縣)-속현(屬縣) 체제에서 경주(慶州, 현 경상북도 경주시)의 속현이 되었다.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승격시켜 지주사(知州事)가 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예(例)에 의하여 영천군(永川郡)으로 고쳤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경상도 경주 영주; 『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영천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경상도 영천군). 고려 영주, 조선 영천군의 중심지는 읍성이 있었던 현재의 영천시 문내동 일대이다. 한편 신라 임천현의 중심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영천군 고적조에 “임천폐현이 고을 동남쪽 5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즉 완산동고분군이 있는 완산동 일대였음을 알 수 있다(박성현, 2017, 「통일신라시대 금호강 유역의 공간 구조 개편」, 『百濟文化』 56, 36~38쪽).바로가기
註) 261
골화소국(骨火小國): 신라 임천현(臨川縣, 현 경상북도 영천시 완산동 일대)의 경덕왕 때 고치기 전 이름이 골화현(骨火縣)이다. 골화소국은 그 자리에 있었던 ‘국(國)’으로 골벌국(骨伐國)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조분이사금 7년(236) 2월조에 “골벌국왕(骨伐國王) 아음부(阿音夫)가 휘하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해 왔으므로, 그에게 집과 토지를 하사하여 안치하고, 골벌국 지역을 군(郡)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또 본서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5년(504) 9월조에는 골화성(骨火城)을 쌓았다고 하였다. 대사(大祀)를 지내는 3산(三山) 중에 둘째가 골화(骨火)이며(본서 권32 잡지1 제사 대사, 김유신이 18세에 국선이 되었을 때 고구려인 백석(白石)의 유인에 걸려들자 3산의 호국신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도 전한다. 여기에 관련 지명으로 골화천(骨火川)과 골화관(骨火館)이 나타나 있다(『삼국유사』 권1 기이2 김유신).바로가기
註) 262
도동현(道同縣):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시 도동(道洞) 일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도동화현(刀冬火縣)을 임고군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초에 임고군(臨臯郡, 현 경상북도 영천시 문내동 일대)과 도동(道同)·임천(臨川)의 두 현(縣)을 합하여 영주(永州)라고 하였다. 성종 14년(995)에 영주자사(永州刺史)를 두었고, 현종 9년(1018)의 주현(主縣)-속현(屬縣) 체제에서 경주(慶州, 현 경상북도 경주시)의 속현이 되었다.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승격시켜 지주사(知州事)가 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예(例)에 의하여 영천군(永川郡)으로 고쳤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경상도 경주 영주; 『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영천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경상도 영천군). 고려 영주, 조선 영천군의 중심지는 읍성이 있었던 현재의 영천시 문내동 일대이다. 한편 신라 도동현의 중심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영천군 고적조에 “도동폐현이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즉 현재의 영천시 도동 일대였음을 알 수 있다(박성현, 2017, 「통일신라시대 금호강 유역의 공간 구조 개편」, 『百濟文化』 56, 36~38쪽).바로가기
註) 263
도동화현(刀冬火縣): 신라 도동현(道同縣, 현 경상북도 영천시 도동 일대)의 경덕왕 때 고치기 전 이름. 본서 권32 잡지1 악(樂)에 ‘석남사내(石南思內)가 도동벌군(道同伐郡)의 음악’이라고 되어 있다. 정확한 표현이 맞다면 도동벌, 즉 도동화가 특정 시기에 군치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바로가기
註) 264
신녕현(新寧縣):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대천리 일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사정화현(史丁火縣)을 신녕현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이후에도 그대로 불렀으며, 현종 9년(1018)의 주현(主縣)-속현(屬縣) 체제에서 경주(慶州, 현 경상북도 경주시)의 속현이 되었다. 공양왕 2년(1390)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조에 들어 예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치고 장수역(長壽驛)으로 치소(治所)를 옮겼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경상도 경주 신녕현; 『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신녕현;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7 경상도 신녕현). 장수역, 즉 현재의 영천시 신녕면으로 옮기기 전의 치소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신녕현 고적조에 “고신녕(古新寧)이 지금 고을의 동쪽 25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대체로 화남면 대천리 일대로 추정되는데, 여기를 흐르는 하천의 이름이 고현천으로 되어 있다. 대천리에서 고현천를 건너면 거기에 가상리성지가 있는데 신녕현과 관련된 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박성현, 2017, 「통일신라시대 금호강 유역의 공간 구조 개편」, 『百濟文化』 56, 38쪽).바로가기
註) 265
사정화현(史丁火縣): 신라 신녕현(新寧縣, 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대천리 일대)의 경덕왕 때 고치기 전 이름.바로가기
註) 266
맹백현(黽白縣): 민백현으로 읽기도 한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정구복 외, 200쪽) 혹은 영천시 신녕면(박성현, 38~39쪽)에 비정된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매열차현(買熱次縣)을 맹백현으로 개명하였다. 대체로 고려 초에 신녕현(新寧縣, 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대천리 일대)에 합속되었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경상도 경주 신녕현; 『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신녕현;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7 경상도 신녕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위치가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조선 말 『대동지지』에서 그것이 신녕현 ‘동쪽 30리’에 있다고 하였고, 삼국사기 에서도 그것을 근거로 맹백현의 위치를 화북면으로 추정하였는데(정구복 외, 200쪽)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대동지지 의 맹백현 위치는 하나의 비정일 뿐이지, 근거를 가진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둘째, 맹백현을 화북면에 위치시키면 신녕현과 지역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화북면은 고현천 상류 지역에 해당하며, 반면 현재의 화산면, 신녕면 지역이 공백으로 남게 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민백현은 신녕현의 영역 안에서 고신녕과 구별되는 지역에 위치시키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되는데, 오히려 현재의 신녕면 지역이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몇 가지 근거를 덧붙이자면, 먼저 그 지점은 경주에서 군위, 선산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직선 도로가 경유하는 곳으로 임고군의 영역에서 중요한 방면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신녕면 화남리에 화남리성지와 화남리고분군이 위치한다는 점도 중요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맹백현은 신녕면 화남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가 고려 초 신녕현에 통합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박성현, 38~39쪽).
〈참고문헌〉
정구복 외, 2012,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박성현, 2017, 「통일신라시대 금호강 유역의 공간 구조 개편」, 『百濟文化』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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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67
매열차현(買熱次縣): 신라 맹백현(黽白縣, 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혹은 신녕면)의 경덕왕 때 고치기 전 이름.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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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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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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