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화친을 청하다
(
541년
)
〔2년(541)〕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서 화친을 청하므로 허락하였다.註 001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요청하자, 허락하였다: 본서 권제26 백제본기제4 성왕 19년(541) 기록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전하지 않는다. 이때 백제 성왕은 신라, 가야, 왜와 연합하여 한강 고토(故土)의 실지(失地)회복을 이루려는 목적에서 신라와의 관계를 중시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신라 진흥왕은 고구려와 백제 간의 대결구도를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본격적으로 가야지역으로의 영역확대를 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 발전의 관건이 되는 한강유역의 확보도 넘볼 수 있고, 나아가 백제와의 화호를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백제가 신라에 화친을 요청하자, 신라가 이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이해된다(梁起錫, 1994; 2013). 한편 신라가 541년 3월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가야의 탁순(卓淳)을 병합하고, 백제군이 주둔한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을 공격하여 차지하자, 백제 성왕이 이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위가야, 170~171쪽).
〈참고문헌〉
梁起錫, 1994, 「5~6世紀 前半 新羅와 百濟의 關係」,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 15,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13, 「5세기 백제의 대외관계」 『백제의 국제관계』, 서경문화사
위가야, 2018, 「5∼6世紀 百濟와 新羅의 ‘軍事協力體制' 硏究」,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참고문헌〉
梁起錫, 1994, 「5~6世紀 前半 新羅와 百濟의 關係」,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 15,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13, 「5세기 백제의 대외관계」 『백제의 국제관계』, 서경문화사
위가야, 2018, 「5∼6世紀 百濟와 新羅의 ‘軍事協力體制' 硏究」,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註) 001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요청하자, 허락하였다: 본서 권제26 백제본기제4 성왕 19년(541) 기록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전하지 않는다. 이때 백제 성왕은 신라, 가야, 왜와 연합하여 한강 고토(故土)의 실지(失地)회복을 이루려는 목적에서 신라와의 관계를 중시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신라 진흥왕은 고구려와 백제 간의 대결구도를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본격적으로 가야지역으로의 영역확대를 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 발전의 관건이 되는 한강유역의 확보도 넘볼 수 있고, 나아가 백제와의 화호를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백제가 신라에 화친을 요청하자, 신라가 이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이해된다(梁起錫, 1994; 2013). 한편 신라가 541년 3월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가야의 탁순(卓淳)을 병합하고, 백제군이 주둔한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을 공격하여 차지하자, 백제 성왕이 이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위가야, 170~171쪽).
〈참고문헌〉
梁起錫, 1994, 「5~6世紀 前半 新羅와 百濟의 關係」,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 15,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13, 「5세기 백제의 대외관계」 『백제의 국제관계』, 서경문화사
위가야, 2018, 「5∼6世紀 百濟와 新羅의 ‘軍事協力體制' 硏究」,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참고문헌〉
梁起錫, 1994, 「5~6世紀 前半 新羅와 百濟의 關係」,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 15,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13, 「5세기 백제의 대외관계」 『백제의 국제관계』, 서경문화사
위가야, 2018, 「5∼6世紀 百濟와 新羅의 ‘軍事協力體制' 硏究」,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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