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경
열전(列傳) 권제17(卷第十七) 고려사104(高麗史一百四)
정헌대부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正憲大夫 工曹判書 集賢殿大提學 知經筵春秋館事 兼 成均大司成) 【신(臣)】 정인지(鄭麟趾)가 교(敎)를 받들어 편수하였다.
김방경(金方慶)【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김흔(金忻) 김순(金恂) 김영돈(金永旽) 김영후(金永煦) 김사형(金士衡) 박구(朴球)】
김방경(金方慶)의 자는 본연(本然)이고 안동(安東) 사람이며,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원손(遠孫)이다. 아버지 김효인(金孝印)은 성격이 엄하고 의지가 강하여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세우고 글씨를 잘 써 등제(登第)하고서는 관직이 병부상서 한림학사(兵部尙書 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처음에 김방경의 어머니가 임신하게 되었을 때, 여러 번 운하(雲霞)를 먹는 꿈을 꾸자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운기(雲氣)가 항상 나의 입과 코에 있으니 아이가 필시 신선 중에서 오는 것이리라.”라고 하였다. 태어나자 조부 김민성(金敏成)의 집에서 길렀는데, 조금이라도 화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길거리에서 누워 울었으나, 우마가 〈그를〉 위해 피하니 사람들이 이를 기이해 하였다. 고종 때 나이 16세가 되자, 음서(蔭敍)로 산원 겸 식목녹사(散員 兼 式目錄事)에 보임되었다.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성스럽게 바른 말 하는 것을 아껴 예(禮)로 대우하고, 크게 책임질 일이 있으면, 모두 그에게 위임하였다. 누천(累遷)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이르자 우창(右倉)을 감사하면서, 청탁이 있어도 행하지 않으니 어떤 재상이 권신(權臣)에게 헐뜯어 말하기를, “지금의 어사(御史)는 지난번 어사가 한 봉공(奉公)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 김방경이 이르자, 권신이 그를 꾸짖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지난번 어사처럼 하고자 하면 나도 또한 능합니다. 나에게는 나라 창고의 저장이 더 중요하므로,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조절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니, 헐뜯었던 자가 크게 부끄럽게 여겼고, 권신 또한 안색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