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번역서

여헌집(旅軒集)

여헌선생문집 제9권

기(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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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암 정사(不知巖精舍)에 대한 기문
무릇 물건이 진실로 있으면 반드시 알려지게 된다. 형체가 있으면 눈으로 보는 자가 알고, 소리가 있으면 귀로 듣는 자가 알고, 냄새가 있으면 코로 맡는 자가 알고, 맛이 있으면 입으로 맛보는 자가 알고, 성(性)과 정(情)이 있으면 마음으로 생각하는 자가 안다. 이미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 성(性)과 정(情)이 있으면 어찌 귀와 눈, 입과 냄새 또는 마음과 생각이 미치는 바에 도피할 수 있겠는가.
아는 것은 있는 데에서 연유하고 알지 못하는 것은 없는 데에서 연유한다. 그러므로 있으면 알고 없으면 알지 못하는 것이 떳떳한 이치이니, 혹 있는데도 알지 못하여 본래 없는 것과 다름이 없다면 이는 바로 알지 못하는 자의 잘못이다. 그러나 있는 것은 그대로 있는 것이니, 사람이 알지 못한다 하여 어찌 감손(減損)이 되겠는가.
정사(精舍)는 부지암(不知巖)의 동남쪽 벼랑 위에 있으므로 인하여 이름하였다. 형체가 있는 것 중에 가장 확고하고 드러난 것이 바위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이 바위를 부지(不知)라고 이름한 까닭을 나는 과연 알지 못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 바위가 본래 언덕의 흙 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강물이 충돌하여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흙이 다 없어져 바위가 나오니, 이 언덕에 흙이 있을 때에 사람들이 바위가 있음을 알지 못했다 하여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며, 혹자는 말하기를, “이 바위가 만약 강물이 크게 범람하여 침몰되면 파도 가운데에 감추어져 있다가 홍수가 지나가 물이 줄어든 뒤에야 바위가 비로소 나오니, 이는 물이 크게 불어났을 때에 사람들이 바위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하여 이름한 것이다.”라고 한다. 이는 모두 바위가 숨고 드러남을 가지고 이름한 것이다.
그리고 혹자는 말하기를, “바위가 깊은 못 위와 끊긴 산기슭 아래에 있어 사방(四方)이 모두 보기 좋은 경치이고 사시(四時)가 모두 취미가 뛰어나다. 강에 배를 띄워도 절경(絶景)이고 바위에 자리를 깔고 앉아도 절경이어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 오는 낮과 밝은 달이 비추는 밤이 모두 좋은 경치이다. 강가의 위아래에 무릇 경치가 좋은 지역으로 이름난 곳이 여러 군데가 있지만 오직 이 곳이 가장 뛰어난 절경이다. 그리하여 이 바위와 비견할 만한 곳이 드문데, 심상한 가운데에 매몰되어 있고 물고기와 산새들의 마당으로 버려져 있어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지 않으므로 일을 만들기 좋아하는 자들이 그 실제를 가지고 이름한 것이다.”라고 한다.
다만 정사(精舍)를 설치한 것은 비단 바위만을 취한 것이 아니다. 큰 강과 여러 산악, 먼 숲과 가까운 숲, 흰 모래와 아름다운 풀, 연기와 구름, 나는 새와 물 속의 고기가 있어 위아래와 좌우에 취할 만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굳이 홀로 바위에서 뜻을 취하여 그 이름을 따라 명칭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는 진실로 ‘부지(不知)’의 뜻이 풍부하고 원대하여 우리들이 이름을 취한 이유가 있으니, 한번 ‘부지’를 가지고 자신에게 있어서와 남에게 있어서의 경우를 나누어 말하겠다.
자신에게 있어서 알지 못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마땅히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 중에 좋은 것이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 중에 나쁜 것이다.
무엇을 마땅히 알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이르는가? 기이한 재주를 부리고 지나치게 공교로운 일과 사사로움을 경영하고 이익을 도모하는 방법으로 무릇 세상에 잡되고 자질구레한 일이 이것이니,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어찌 알지 못하는 것 중의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무엇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라고 이르는가? 천지(天地), 인물(人物)의 성(性)과 삼강(三綱), 오상(五常)의 도(道)로 크게는 천하가 다 싣지 못하고 작게는 천하가 깨뜨릴 수 없는 것이 이것이니,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귀와 눈, 입과 코를 지니고 지각(知覺)을 갖춘 인간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자신에게 있는 두 가지의 알지 못하는 것 중에 마땅히 선택을 잘 하여야 할 것이다.
남에게 있어서 알지 못하는 것 역시 두 가지가 있으니, 내가 알아줌을 받을 만한 실재가 없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 남이 아니요 알아줌을 받을 만함이 없는 것이 나이니, 내가 남에게 어찌 괴이하게 여기겠는가. 그리고 내 이미 알아줌을 받을 만한 실재가 있는데도 사람들이 마침내 알지 못한다면 알지 못하는 것이 남에게 있다. 내 스스로 간직하고 있는 실재는 남이 알지 못한다 해서 상실되는 것이 아니니, 사람들이 알지 못함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무엇을 알아줌을 받을 만한 실재라고 이르는가? 곧 천지(天地), 인물(人物)의 성(性)을 연구하고 삼강(三綱), 오상(五常)의 도(道)를 다하여, 천하가 실을 수 없도록 커서 밖이 없고 천하가 깨뜨릴 수 없도록 작아서 안이 없는 것이 이것이다. 이 도(道)를 내 몸에 행하고 이 덕(德)을 내 마음에 간직한다면 사람의 능사(能事)가 이에 다하니, 과연 남에게 알아줌을 받는다면 이 도와 이 덕의 공용(功用)이 온 세상에 입혀져서 천지가 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길러지는 효과를 이루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혹 알아주지 못하면 이 도를 한 몸에 간직하고 이 덕을 한 마음에 즐거워하여 또한 천지와 만물의 사이에 부끄러움이 없고 홀로 서 있는 경지에 호연(浩然)할 것이다.
우리들은 남에게 있는 두 가지의 알지 못함에 있어 한결같이 자신에게 있는 것을 스스로 힘쓸 뿐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알지 못함을 가지고 학문에 나아가고 세상에 대처하는 도로 삼는 것이 가(可)할 것이다.
학문에 나아가는 방도는, 안다고 자처하는 자는 알지 못하는 데로 돌아가고, 알지 못한다고 자처하는 자는 아는 데로 돌아간다. 안다고 자처하면 하나를 알면 하나를 아는 것을 만족하게 여겨 다시는 둘 이상의 분수(分數)를 알려고 하지 않고, 둘을 알면 둘을 아는 것을 만족하게 여겨 다시는 셋 이상의 분수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설령 여덟을 알고 아홉을 안다 하더라도 이에 그치고 다시는 아홉과 열의 분수를 알 수 없을 것이니, 하물며 여덟과 아홉의 분수에 미치지 못하고 스스로 만족해하는 자에 있어서랴. 이는 작은 것을 이루는 데 안주하여 한 귀퉁이만을 지키는 자이니, 알지 못하는 데로 돌아감이 당연하다.
만약 알지 못한다고 자처하면 항상 의리를 무궁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앎이 이미 넓더라도 스스로 넓게 여기지 않고 더욱 넓히려고 노력하며, 앎이 이미 높더라도 스스로 높게 여기지 않고 더욱 높이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는 대순(大舜)이 묻기를 좋아하고 천근(淺近)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며, 안자(顔子)가 능함으로써 능하지 못한 이에게 묻고 많음으로써 적은 이에게 물은 것이다. 그 앎의 큼을 진실로 이루 측량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 대처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알려지기를 바라는 자는 끝내 알려지지 못하고, 알아주지 않음에 숨는 자는 끝내 반드시 알려지고 만다. 알려지기를 바랄 경우 잠시라도 작은 선(善)이 있으면 남에게 알려지기를 바라고, 겨우 한 재주에 능하면 세상에 자랑하려고 힘쓰는바, 알려지기를 바라고 자랑하기를 힘쓰는 사사로운 마음이 곧 천리(天理)의 올바름을 해친다. 그리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작은 선과 자신이 능한 한 가지 재주도 단지 남을 기쁘게 하고 세상에 팔아먹는 자료가 될 뿐이니, 어찌 다시 길게 전진할 희망이 있겠는가. 이는 재주를 자랑하고 선을 드러내며 이름을 구하고 명예를 바라는 자는 일시에는 비록 반짝하나 날로 없어지는 이유이다.
만약 알려지지 않음에 숨는 자는 학문이 천하에서 제일 높더라도 어리석음으로 지키고, 도덕이 한 세상에 으뜸이더라도 겸손함으로써 자처하여, 이름을 이루려 하지 않고 세상에 따라 바뀌지 아니하여 세상에 은둔하여도 근심하지 않고 남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여도 근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하 사람들이 모두 인(仁)을 허여(許與)하여 백세(百世)에 사표(師表)가 되니, 이는 비단옷을 입고 그 위에 홑옷을 더하며 빛을 감추고 광채를 가리우는 자는 은은하면서도 날로 드러나는 이유이다.
이 바위가 처음에는 언덕의 흙 속에 묻혀 있어 사람들이 알지 못하다가 마침내 흙이 다 없어진 뒤에 드러났고, 중간에는 강물이 불어났을 때에 매몰되어 사람들이 알지 못하다가 마침내 강물이 줄어든 뒤에 나타났고, 부지(不知)라고 이름함에 이르러서는 또 버려지고 매몰된 가운데에 감추어져 알지 못하다가 지금 또 정사(精舍)를 건립함으로 말미암아 크게 드러났으니, 처음에 알려지지 못한 것은 진실로 일찍이 끝내 알려지지 않음이 없고, 부지(不知)라고 이름한 것은 또한 일찍이 실제로 알려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떳떳한 진리가 아니겠는가.
바위는 무지(無知)한 돌이 어지럽게 쌓인 것이다. 강의 물결 속에 숨었다 나타났다 한 것이 몇만 년일 터인데 물건의 선악(善惡)과 성쇠(盛衰), 세상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에 관여한 바가 없었으니, 그렇다면 바위에게 어찌 마땅히 알아야 하고 마땅히 알지 않아야 할 일을 책하겠는가. 우뚝 솟아 있고 이리저리 벌여 있어 만고(萬古)에 응정(凝定)되어 비록 지각(知覺)과 언어(言語)와 운동(運動)이 없으나, 구름과 비를 일으켜 만물을 윤택하게 하고 물고기와 자라를 감추어 사람을 이롭게 하니, 이는 바위의 능사(能事)로서 그 공용(功用)을 크게 한 것이다. 사람들이 반드시 이것을 알지 못할 것이나 바위 또한 어찌 알아주고 알아주지 못함을 알겠는가.
이는 혈기(血氣)와 지각이 있는 것들은 정(情)이 조급히 동(動)하기 쉽고 마음이 자랑하거나 빛내려는 데에 있어 그 본성을 잃는 경우가 많고, 안정되어 조용히 버티고 있는 것들은 기이한 공을 나타내면서도 스스로 자랑하거나 과시하지 아니하여 그 본성을 온전히 하는 것이니, 정사(精舍)의 명칭을 취한 것이 어찌 이유가 없겠는가.
이제 정사가 이미 이루어졌고 이름을 이미 게시하였다. 이 당(堂)에 거처하면서 이 당의 이름을 돌아보고 부지(不知)의 뜻을 다하여, 자신에게 있어서는 마땅히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고 하지 아니하여 알지 못함을 한하지 말고,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알려고 하여 알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는다.
그리고 남에게 있어서는 항상 자신에게 있는 실재를 돌이켜 도가 과연 내 몸에 극진하지 못하고 덕이 과연 내 마음에 지극하지 못하면 마땅히 생각하기를,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은 나의 도와 나의 덕이 극진하지 못하고 지극하지 못함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없는 것을 있게 하려고 노력하고 작은 것을 크게 하려고 노력하며, 낮은 것을 높게 하려고 노력하고 얕은 것을 깊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하여 이미 있고 이미 크고 이미 높고 이미 깊은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사람들이 또 알아주지 않으면 내 마땅히 노여워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 저상(沮喪)하지 않고 중지하지 않을 뿐이다.
성인(聖人)은 천지(天地)와 덕이 합하여 천지가 알아주고, 일월(日月)과 밝음이 합하여 일월이 알아주고, 사시(四時)와 차례가 합하여 사시가 알아주고, 귀신(鬼神)과 길흉이 합하여 귀신이 알아준다. 나를 알아주는 자가 천지이고 일월이고 사시이고 귀신이니, 한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이 과연 성인에게 감손(減損)이 될 수 있겠는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는 당시에 알아줌을 받지 못하였으나 만세(萬世)에 알아줌을 받고 있으니, 그 알아줌의 크고 또 장구함이 어찌 공자와 맹자보다 더한 분이 있겠는가. 우리들은 이것을 잘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또 공부를 하는 요점으로 말하면 모름지기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자신만이 홀로 아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대학(大學)》에 “악(惡)을 싫어하기를 악취(惡臭)를 미워하듯이 하고, 선(善)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여색(女色)을 좋아하듯이 한다.[如惡惡臭 如好好色]”는 것과 《중용(中庸)》에 “숨은 곳보다 더 드러남이 없고 작은 일보다 더 나타남이 없다.[莫見乎隱 莫顯乎微]”는 것이 모두 신독(愼獨)을 맺는 한 말씀이다.
무릇 옛날 성인과 현인(賢人), 군자(君子)들이 공부한 것은 진실로 일찍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는 진실로 우리들이 함께 삼가야 할 바이다. 이것을 삼가 그치지 않는다면 학문에 나아감은 알지 못한다고 자처하나 끝내는 알지 못하는 바가 없음에 이르고, 세상에 대처함은 항상 알지 못하는 것으로 스스로 감추나 끝내 반드시 알려짐을 스스로 가리울 수 없을 것이니, 노여워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 지극한 공부에 이르는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당(堂) 아래에 흐르는 강물은 바로 낙동강(洛東江)의 하류인데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는 송(宋) 나라 제현(諸賢)들이 일어나신 지역이다. 강의 이름이 우연히 그와 같으니, 정맥(正脈)이 흐르는 물줄기를 생각하여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의 연원(淵源)을 거슬러 올라가며, 서쪽은 금오산(金烏山)인데 바로 길야은(吉冶隱 야은은 길재(吉再)의 호)이 은둔하신 곳으로 깨끗한 풍도(風度)와 높은 절개가 곧바로 수양산(首陽山)의 고죽(孤竹)과 서로 비추니, 이에 우러러보면 참으로 늠름함이 있다.
당을 지은 것은 대명(大明) 만력(萬曆) 경술년(1610,광해군2)이었다.
[주-D001] 고죽(孤竹) : 
은(殷) 나라 말기 중국의 열하(熱河) 일대에 있었던 나라.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바로 이 나라 왕자였는데, 은 나라가 망하고 주(周) 나라가 천자국이 되자, 주 나라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수양산(首陽山)에 은둔하였으므로 곧 이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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