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연산군(燕山郡)註 101은 본래 백제(百濟)의 일모산군(一牟山郡)註 102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2개이다.
연산군(燕山郡): 현재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11~312쪽). 신라 경덕왕 때 연산군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에 이르러 청주(淸州)의 속군으로 삼았다.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종 46년(1259)에 문의(文義)로 이름을 고치고 현령(縣令)으로 승격시켰다. 충렬왕 때 가림(嘉林, 부여군 임천면)에 병합시켰다가 얼마 뒤에 복구되었다(『고려사』 권56 지10 지리1 양광도 〈청주목〉 연산군). 조선 선조 때 청주(淸州)에 병합되었고, 광해군 때 다시 현(縣)을 설치하였다. 고종 때 청주에 병합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었고, 뒤에 군(郡)으로 개편되었다. 현재의 청주시 문의면 문산리 일대에 해당한다.
일모산군(一牟山郡): 신라 웅주 연산군(燕山郡,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의 백제 때 이름. 웅주 소속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른 시기에 신라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신라가 백제에 이어서 일모성(一牟城, 문의지역)에 진출한 것은 자비마립간 17년(474)이었다. 자비마립간 13년(470)에 삼년산성(三年山城, 충북 보은)을 축조한 기사를 볼 때(본서 권3 신라본기 자비마립간 13년) , 신라는 자비마립간 때 소백산맥 남단을 넘어 일모산군 방면으로 진출했다. 일모산군은 삼년산군 개척의 연장에서 진출한 신라의 서북 전선이었다(윤경진, 2012a, 40쪽). 청원 문의 지역에는 덕류리(德留里)의 구룡산산성(九龍山山城), 미천리(米川里)의 양성산성(壤城山城), 문덕리(文德里)의 장군봉산성(將軍峰山城, 성재산성) 등의 성곽이 있고, 신라계의 미천리고분군과 상장리고분군 등이 분포되어 있다. 그 가운데 474년 신라가 쌓은 일모성과 관련이 있는 산성은 미천리의 양성산성[一牟山城, 또는 燕山城]이다. 양성산성은 양성산(378m)과 계곡을 둘러쌓은 토·석축의 산성으로 둘레는 845.5m이다. 이곳에서 신라계의 토기와 기와편, 고려시대의 토기와 자기편, 조선시대의 백자편이 출토되어 삼국 항쟁기와 후삼국시대에 요충지로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성과 관련하여 미천리고분군에서는 모두 14기의 신라 석곽묘가 발굴 조사되었다. 신라계의 수혈식 석곽묘에서 대부장경호·고배·단경호 등의 토기류와 철제 무기류 및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는데 5세기 후반~6세기에 조성되었다. 이를 통해 백제가 475년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남천할 무렵에 신라가 이 지역을 영유한 것으로 추정한다. 인근에 바로 475년 이후 고구려가 남천하던 백제를 쫓아 금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한 남성골 유적이 있을 정도로 삼국이 대치하던 군사적 요충지였다(양기석, 1999, 366~370쪽).
〈참고문헌〉
양기석, 1999, 「신라의 청주지역 진출」, 『문화사학』11·12·13합집
윤경진, 2012a, 「『三國史記』地理志 수록 군현의 三國 分屬」, 『한국사학보』 47
〈참고문헌〉
양기석, 1999, 「신라의 청주지역 진출」, 『문화사학』11·12·13합집
윤경진, 2012a, 「『三國史記』地理志 수록 군현의 三國 分屬」, 『한국사학보』 47
연기현(燕岐縣)註 103은 본래 백제(百濟)의 두잉지현(豆仍只縣)註 104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연기현(燕岐縣): 현재의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연기리(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12쪽). 고려 현종 9년(1018)에 청주(淸州, 청주시)의 속현이 되었다.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뒤에 목주(木州, 천안시 목천면) 감무가 와서 겸임하도록 하였다(『고려사』 권56 지10 지리1 양광도 〈청주목〉 연기현). 조선 태종 6년에 이를 나누어 감무를 두었고, 14년에 전의(全義, 연기군 전의면)에 병합시켜 전기(全岐)라고 칭하였다가 다시 나누어 현감(縣監)을 두었다. 숙종 때 문의(文義,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에 병합시켰다가 다시 현(縣)으로 삼았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충청도 연기현).
매곡현(昧谷縣)註 105은 본래 백제(百濟)의 미곡현(未谷縣)註 106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회인현(懷仁縣)註 107이다.
매곡현(昧谷縣): 현재 충청북도 보은군 회북면(이병도 역주, 1996, 『삼국사기』 하, 을유문화사, 242~243쪽). 매곡현(昧谷縣)을 고려 초에 회인현(懷仁縣)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 때 청주(淸州, 청주시)의 속현이 되었다. 뒤에 회덕(懷德, 대전광역시 대덕구)겸임관(兼任官)으로 삼았으며, 우왕 때 따로 監務를 두었다(『고려사』 권56 지10 지리1 양광도 청주목 회인현). 조선 태종 13년에 현감(縣監)으로 삼았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충청도 회인현).
미곡현(未谷縣): 신라 웅주 연산군(燕山郡) 매곡현(昧谷縣, 보은군 회북면)의 백제 때 이름. 『세종실록』 권149 지리지 회인(懷仁)조에 미곡성(未谷城)이 나오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회인현조에는 매곡산(昧谷山)이 현 동쪽 1리에 있고 매곡산성(昧谷山城)은 석축으로서 1,152척이었다고 나온다. 현재의 위치는 보은군 회북면 부수리이며, 지표로부터 70미터 정도(해발 187미터)의 독립 구릉에 1차 축조의 토·석성 300미터, 2차 증축의 석성 6∼700미터의 규모이며, 군데군데 석축이 남아 있고 그 안에서 백제 토기와 고신라 토기편이 발견되었다(成周鐸·車勇杰, 1987, 597∼610쪽). 회인지역인 보은군 회북면과 회남면 일대에는 신라계의 매곡산성(昧谷山城)과 호점산성(虎岾山城)이 있다. 호점산성은 보은군 회남면 용고리에 위치한 석축산성으로 매곡산성(일명 아미산성)이 매곡현 당시의 치소로 추정된다(양기석·강민식, 2000, 118쪽).
〈참고문헌〉
成周鐸·車勇杰, 1987, 「百濟未谷縣과 昧谷山城의 歷史地理的 管見」, 『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 Ⅱ
양기석·강민식, 2000, 「신라 서원경성의 위치와 운용」, 『충북사학』 11·12합
〈참고문헌〉
成周鐸·車勇杰, 1987, 「百濟未谷縣과 昧谷山城의 歷史地理的 管見」, 『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 Ⅱ
양기석·강민식, 2000, 「신라 서원경성의 위치와 운용」, 『충북사학』 11·12합
註) 101
연산군(燕山郡): 현재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11~312쪽). 신라 경덕왕 때 연산군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에 이르러 청주(淸州)의 속군으로 삼았다.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종 46년(1259)에 문의(文義)로 이름을 고치고 현령(縣令)으로 승격시켰다. 충렬왕 때 가림(嘉林, 부여군 임천면)에 병합시켰다가 얼마 뒤에 복구되었다(『고려사』 권56 지10 지리1 양광도 〈청주목〉 연산군). 조선 선조 때 청주(淸州)에 병합되었고, 광해군 때 다시 현(縣)을 설치하였다. 고종 때 청주에 병합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었고, 뒤에 군(郡)으로 개편되었다. 현재의 청주시 문의면 문산리 일대에 해당한다.
註) 102
일모산군(一牟山郡): 신라 웅주 연산군(燕山郡,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의 백제 때 이름. 웅주 소속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른 시기에 신라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신라가 백제에 이어서 일모성(一牟城, 문의지역)에 진출한 것은 자비마립간 17년(474)이었다. 자비마립간 13년(470)에 삼년산성(三年山城, 충북 보은)을 축조한 기사를 볼 때(본서 권3 신라본기 자비마립간 13년) , 신라는 자비마립간 때 소백산맥 남단을 넘어 일모산군 방면으로 진출했다. 일모산군은 삼년산군 개척의 연장에서 진출한 신라의 서북 전선이었다(윤경진, 2012a, 40쪽). 청원 문의 지역에는 덕류리(德留里)의 구룡산산성(九龍山山城), 미천리(米川里)의 양성산성(壤城山城), 문덕리(文德里)의 장군봉산성(將軍峰山城, 성재산성) 등의 성곽이 있고, 신라계의 미천리고분군과 상장리고분군 등이 분포되어 있다. 그 가운데 474년 신라가 쌓은 일모성과 관련이 있는 산성은 미천리의 양성산성[一牟山城, 또는 燕山城]이다. 양성산성은 양성산(378m)과 계곡을 둘러쌓은 토·석축의 산성으로 둘레는 845.5m이다. 이곳에서 신라계의 토기와 기와편, 고려시대의 토기와 자기편, 조선시대의 백자편이 출토되어 삼국 항쟁기와 후삼국시대에 요충지로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성과 관련하여 미천리고분군에서는 모두 14기의 신라 석곽묘가 발굴 조사되었다. 신라계의 수혈식 석곽묘에서 대부장경호·고배·단경호 등의 토기류와 철제 무기류 및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는데 5세기 후반~6세기에 조성되었다. 이를 통해 백제가 475년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남천할 무렵에 신라가 이 지역을 영유한 것으로 추정한다. 인근에 바로 475년 이후 고구려가 남천하던 백제를 쫓아 금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한 남성골 유적이 있을 정도로 삼국이 대치하던 군사적 요충지였다(양기석, 1999, 366~370쪽).
〈참고문헌〉
양기석, 1999, 「신라의 청주지역 진출」, 『문화사학』11·12·13합집
윤경진, 2012a, 「『三國史記』地理志 수록 군현의 三國 分屬」, 『한국사학보』 47
〈참고문헌〉
양기석, 1999, 「신라의 청주지역 진출」, 『문화사학』11·12·13합집
윤경진, 2012a, 「『三國史記』地理志 수록 군현의 三國 分屬」, 『한국사학보』 47
註) 103
연기현(燕岐縣): 현재의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연기리(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12쪽). 고려 현종 9년(1018)에 청주(淸州, 청주시)의 속현이 되었다.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뒤에 목주(木州, 천안시 목천면) 감무가 와서 겸임하도록 하였다(『고려사』 권56 지10 지리1 양광도 〈청주목〉 연기현). 조선 태종 6년에 이를 나누어 감무를 두었고, 14년에 전의(全義, 연기군 전의면)에 병합시켜 전기(全岐)라고 칭하였다가 다시 나누어 현감(縣監)을 두었다. 숙종 때 문의(文義,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에 병합시켰다가 다시 현(縣)으로 삼았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충청도 연기현).
註) 105
매곡현(昧谷縣): 현재 충청북도 보은군 회북면(이병도 역주, 1996, 『삼국사기』 하, 을유문화사, 242~243쪽). 매곡현(昧谷縣)을 고려 초에 회인현(懷仁縣)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 때 청주(淸州, 청주시)의 속현이 되었다. 뒤에 회덕(懷德, 대전광역시 대덕구)겸임관(兼任官)으로 삼았으며, 우왕 때 따로 監務를 두었다(『고려사』 권56 지10 지리1 양광도 청주목 회인현). 조선 태종 13년에 현감(縣監)으로 삼았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충청도 회인현).
註) 106
미곡현(未谷縣): 신라 웅주 연산군(燕山郡) 매곡현(昧谷縣, 보은군 회북면)의 백제 때 이름. 『세종실록』 권149 지리지 회인(懷仁)조에 미곡성(未谷城)이 나오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회인현조에는 매곡산(昧谷山)이 현 동쪽 1리에 있고 매곡산성(昧谷山城)은 석축으로서 1,152척이었다고 나온다. 현재의 위치는 보은군 회북면 부수리이며, 지표로부터 70미터 정도(해발 187미터)의 독립 구릉에 1차 축조의 토·석성 300미터, 2차 증축의 석성 6∼700미터의 규모이며, 군데군데 석축이 남아 있고 그 안에서 백제 토기와 고신라 토기편이 발견되었다(成周鐸·車勇杰, 1987, 597∼610쪽). 회인지역인 보은군 회북면과 회남면 일대에는 신라계의 매곡산성(昧谷山城)과 호점산성(虎岾山城)이 있다. 호점산성은 보은군 회남면 용고리에 위치한 석축산성으로 매곡산성(일명 아미산성)이 매곡현 당시의 치소로 추정된다(양기석·강민식, 2000, 118쪽).
〈참고문헌〉
成周鐸·車勇杰, 1987, 「百濟未谷縣과 昧谷山城의 歷史地理的 管見」, 『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 Ⅱ
양기석·강민식, 2000, 「신라 서원경성의 위치와 운용」, 『충북사학』 11·12합
〈참고문헌〉
成周鐸·車勇杰, 1987, 「百濟未谷縣과 昧谷山城의 歷史地理的 管見」, 『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 Ⅱ
양기석·강민식, 2000, 「신라 서원경성의 위치와 운용」, 『충북사학』 11·12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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