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해인사를 세우고 삽량주가 붉은 까마귀를 바치다
(
802년
08월
)
〔3년(802)〕 8월에 가야산(加耶山)註 001 해인사(海印寺)註 002를 창건하였다.
삽량주(歃良州)註 003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해인사(海印寺):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에 소재한 사찰로, 사적 제50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의상(義相)이 일으킨 화엄종(華嚴宗) 10찰의 하나이며, 현재 국보 제32호이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을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의상의 제자 상원(相元)에게 배우고 당으로 유학 가 융순(融順)에게 수학하고 귀국하여, 8세기 중엽 황엄을 대표하는 승려로 활동한 신림(神琳)의 제자 순응(順應)이 가야산에서 정진하면서 해인사 창건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성목태후(聖穆太后)가 불사를 돕고자 전지 2,500결을 하사하였다. 순응이 갑자기 죽자 이정(利貞)이 뒤를 이어 완성하였다. 사찰의 학풍은 종래 의상 계통의 화엄사상을 계승하면서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신라 사회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선(禪) 사상에 대해서 융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왕실의 후원 아래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였으며, 진성여왕대 이후 격동기에는 사찰 소속의 인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자체적으로 승군(僧軍)을 조직하였다. 신라 말에는 화엄종단의 중심 도량이었고, 신라가 후삼국으로 분열하자 승려들도 그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따라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지지하는 희랑(希朗) 중심의 북악파(北岳派)와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을 지지하는 관혜(觀惠) 중심의 남악파(南岳派)로 분열하였다. 고려가 후삼국 통일을 달성한 후에 자신을 지지한 희랑의 해인사를 후원하여,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불교계의 중심사찰로서 그 기능을 수행하였다(崔源植, 1985, 「新羅 下代의 海印寺와 華嚴宗」, 『韓國史硏究』 49). 최치원(崔致遠)이 말년에 은거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삽량주(歃良州)註 003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註) 002
해인사(海印寺):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에 소재한 사찰로, 사적 제50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의상(義相)이 일으킨 화엄종(華嚴宗) 10찰의 하나이며, 현재 국보 제32호이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을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의상의 제자 상원(相元)에게 배우고 당으로 유학 가 융순(融順)에게 수학하고 귀국하여, 8세기 중엽 황엄을 대표하는 승려로 활동한 신림(神琳)의 제자 순응(順應)이 가야산에서 정진하면서 해인사 창건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성목태후(聖穆太后)가 불사를 돕고자 전지 2,500결을 하사하였다. 순응이 갑자기 죽자 이정(利貞)이 뒤를 이어 완성하였다. 사찰의 학풍은 종래 의상 계통의 화엄사상을 계승하면서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신라 사회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선(禪) 사상에 대해서 융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왕실의 후원 아래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였으며, 진성여왕대 이후 격동기에는 사찰 소속의 인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자체적으로 승군(僧軍)을 조직하였다. 신라 말에는 화엄종단의 중심 도량이었고, 신라가 후삼국으로 분열하자 승려들도 그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따라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지지하는 희랑(希朗) 중심의 북악파(北岳派)와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을 지지하는 관혜(觀惠) 중심의 남악파(南岳派)로 분열하였다. 고려가 후삼국 통일을 달성한 후에 자신을 지지한 희랑의 해인사를 후원하여,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불교계의 중심사찰로서 그 기능을 수행하였다(崔源植, 1985, 「新羅 下代의 海印寺와 華嚴宗」, 『韓國史硏究』 49). 최치원(崔致遠)이 말년에 은거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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