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주와 그 속현
노산주(魯山州)註 928 6현(縣). 노산현(魯山縣)註 929은 본래 감물아(甘勿阿)이다. 당산현(唐山縣)註 930은 본래 구지지산(仇知只山)이다. 순지현(淳遲縣)註 931은 본래 두시(豆尸)註 932이다. 지모현(支牟縣)은 본래 지마마지(只馬馬知)註 933이다. 오잠현(鳥蚕縣)은 본래 마지사(馬知沙)이다. 아착현(阿錯縣)註 934은 본래 원촌(源村)註 935이다.
노산현(魯山縣): 당나라 도독부 노산주(魯山州)의 치소로 추정된다. 본래 백제 감물아현(甘勿阿縣)이고, 뒤에 신라 전주 임피군(臨陂郡) 함열현(咸悅縣)이 되었다.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이다(정구복 외, 1997, 438쪽). 667년 11월 웅진도독부를 거쳐 돌아가는 왜의 견당사를 송환하는 일을 맡은 ‘웅진도독부 웅산현령 상주국 사마(熊津都督府熊山縣令上柱國司馬)’ 법총(法聰)이 672년에는 ‘증산사마(曾山司馬)’로 나오는데, 도독부 목록에는 웅산과 증산이 나오지 않아 이를 동일시하여 노산주 소속의 노산현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이도학, 1989, 95~96쪽).
〈참고문헌〉
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도학, 1989, 「웅진도독부의 지배조직과 대일본정책」, 『백산학보』 34
〈참고문헌〉
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도학, 1989, 「웅진도독부의 지배조직과 대일본정책」, 『백산학보』 34
두시(豆尸): 두시와 비교될 수 있는 지명은 본서 권36 지리지에 나오는 백제 두시이현(豆尸伊縣, 전북 무주군 부남면)과 권37 지리지 두이현(豆伊縣, 전북 완주군 이서면)인데, 무주군 부남면의 두시이현은 익산과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에 두시는 완주군 이서면 두이현을 달리 칭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아착현(阿錯縣): 옛 지명은 원촌(源村)이었으나,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남제서(南齊書)』 권58 백제전에 전하는 백제왕 모대(牟大)의 상표문에 건위장군(建威將軍) 팔중후(八中侯) 여고(餘古)에게 행영삭장군(行寧朔將軍) 아착왕(阿錯王)이라는 작호를 임시로 제수하였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여기서의 아착(阿錯)에 대해서는 전남 여수시에 비정하거나(『大東地志』 方輿總志 百濟條), 신안군 압해읍(옛 지명 아차산군(阿次山郡))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末松保和, 1961,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이곳의 아차현은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북도 일대이기 때문에 신안군 압해읍(옛 지명 아차산군)으로 보기에는 거리상 맞지 않는다.
원촌(源村): 원촌이 신라 전주의 옛 이름인 완산(完山)의 다른 호칭이라고 보아, 현재의 전북 전주시에 비정하거나(정구복 외, 2012, 446쪽), 완주군 봉동읍 일원으로 비정하고 있다(천관우, 1989, 402쪽 ; 지원구, 2022, 87쪽). 신라 무주 승평군(昇平郡) 해읍현(海邑縣, 여수시)의 백제 때 지명인 원촌현(猿村縣)과 음운상으로는 같으나 거리상 맞지 않는다.
〈참고문헌〉
천관우, 1989, 『고조선사·삼한사연구』, 일조각
정구복 외, 2012,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지원구, 2022, 『백제 5방성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참고문헌〉
천관우, 1989, 『고조선사·삼한사연구』, 일조각
정구복 외, 2012,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지원구, 2022, 『백제 5방성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註) 928
註) 929
노산현(魯山縣): 당나라 도독부 노산주(魯山州)의 치소로 추정된다. 본래 백제 감물아현(甘勿阿縣)이고, 뒤에 신라 전주 임피군(臨陂郡) 함열현(咸悅縣)이 되었다.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이다(정구복 외, 1997, 438쪽). 667년 11월 웅진도독부를 거쳐 돌아가는 왜의 견당사를 송환하는 일을 맡은 ‘웅진도독부 웅산현령 상주국 사마(熊津都督府熊山縣令上柱國司馬)’ 법총(法聰)이 672년에는 ‘증산사마(曾山司馬)’로 나오는데, 도독부 목록에는 웅산과 증산이 나오지 않아 이를 동일시하여 노산주 소속의 노산현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이도학, 1989, 95~96쪽).
〈참고문헌〉
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도학, 1989, 「웅진도독부의 지배조직과 대일본정책」, 『백산학보』 34
〈참고문헌〉
정구복 외, 1997,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도학, 1989, 「웅진도독부의 지배조직과 대일본정책」, 『백산학보』 34
註) 930
註) 931
註) 932
두시(豆尸): 두시와 비교될 수 있는 지명은 본서 권36 지리지에 나오는 백제 두시이현(豆尸伊縣, 전북 무주군 부남면)과 권37 지리지 두이현(豆伊縣, 전북 완주군 이서면)인데, 무주군 부남면의 두시이현은 익산과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에 두시는 완주군 이서면 두이현을 달리 칭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註) 933
註) 934
아착현(阿錯縣): 옛 지명은 원촌(源村)이었으나,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남제서(南齊書)』 권58 백제전에 전하는 백제왕 모대(牟大)의 상표문에 건위장군(建威將軍) 팔중후(八中侯) 여고(餘古)에게 행영삭장군(行寧朔將軍) 아착왕(阿錯王)이라는 작호를 임시로 제수하였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여기서의 아착(阿錯)에 대해서는 전남 여수시에 비정하거나(『大東地志』 方輿總志 百濟條), 신안군 압해읍(옛 지명 아차산군(阿次山郡))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末松保和, 1961,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이곳의 아차현은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북도 일대이기 때문에 신안군 압해읍(옛 지명 아차산군)으로 보기에는 거리상 맞지 않는다.
註) 935
원촌(源村): 원촌이 신라 전주의 옛 이름인 완산(完山)의 다른 호칭이라고 보아, 현재의 전북 전주시에 비정하거나(정구복 외, 2012, 446쪽), 완주군 봉동읍 일원으로 비정하고 있다(천관우, 1989, 402쪽 ; 지원구, 2022, 87쪽). 신라 무주 승평군(昇平郡) 해읍현(海邑縣, 여수시)의 백제 때 지명인 원촌현(猿村縣)과 음운상으로는 같으나 거리상 맞지 않는다.
〈참고문헌〉
천관우, 1989, 『고조선사·삼한사연구』, 일조각
정구복 외, 2012,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지원구, 2022, 『백제 5방성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참고문헌〉
천관우, 1989, 『고조선사·삼한사연구』, 일조각
정구복 외, 2012,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지원구, 2022, 『백제 5방성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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