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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신라가 사신을 보내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을 신라로 데려감

5년 봄 3월 경묘삭 기유(7일)에 신라왕주 001
번역주 001)
미질허지벌한이 『삼국사기』의 마사흔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때의 신라왕은 訥祗王(재위:417~457)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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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례사벌(汙禮斯伐)주 002
번역주 002)
신공황후 섭정전기(중애천황 9년 12월조) 一書에 나오는 宇流助富利(智干)와 음이 비슷하지만(宇流=汙禮, 助富利=斯伐) 명확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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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주 003
번역주 003)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朴堤上(毛末:생몰연대 미상)을 가리킨다. 아래 微叱許智伐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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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라모지(富羅母智)주 004
번역주 004)
여기에서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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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전에 질(質)이 되었던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주 005
번역주 005)
내물마립간의 셋째 아들인 未斯欣(?~433)을 가리킨다. 신공황후 섭정전기 微叱己知波珍干岐 참조. 본조와 유사한 구조의 설화는 『삼국사기』 열전 박제상전, 『삼국유사』 기이 김제상 관련 기사에 보인다. 자세한 내용에는 차이가 있지만, 倭에 인질로 가 있던 未斯欣(微叱許智伐旱)을 구출하기 위해 박제상이 활동한 사실은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측 기록에서는 모두 5세기 전반의 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日本書紀』의 경우는 신공황후 전설 속에 편입되어 내용상의 윤색, 편년의 설정 등 많은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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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데려 오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허지벌한에게 다음과 같이 거짓말하도록 시켰다. “사자 오례사벌, 모마리질지들이 저에게 ‘우리 왕은 허지벌한이 오래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의 처자를 모두 관노로 하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원컨대 잠시 본국에 돌아가서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황태후가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彥;카즈라키노소츠비코)주 006
번역주 006)
武內宿禰의 자손으로 葛城氏의 조상이다. 여기서 彦(日子라고도 한다)은 別과 함께 존칭이다. 『日本書紀』에 의하면 襲津彦은 신공황후 섭정 5년부터 웅략천황 7년에 이르는 긴 기간 동안 활동한 인물로 나오며 『古事記』에 의하면 그의 계보가 缺史八代에 속하는 孝元天皇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실존한 인물로 보기에는 의문점이 많다. 그런데 신공황후 섭정 62년조에 인용된 『백제기』에는 襲津彦이 ‘沙至比跪’로 나온다. 이에 대해서 『日本書紀』의 편찬자가 『백제기』의 沙至比跪라는 인명을 일본식으로 고쳐 襲津彦으로 표기한 것이라는 견해와, 『日本書紀』 편찬자에게는 『백제기』와는 별로도 襲津彦이라는 인명 자료가 있었으며 『백제기』에는 沙至比跪, 일본에는 襲津彦으로 각각 전해지고 있던 것이 편자에 의해 서로 연결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葛城氏는 4세기에서 5세기 전반에 大和國葛城지방(현 奈良 縣 御所市 서남부)에서 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대두한 씨족으로 大王家의 외척씨족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5세기 말 웅략천황즉위전기에 葛城円이 安康천황을 살해한 眉輪王과 함께 제거되는 것을 계기로 葛城氏는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葛城氏의 몰락 후에는 蘇我氏가 그 기반을 계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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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함께 보냈다. 대마(對馬;쓰시마)에 이르러 서해(鉏海;사히노우미)주 007
번역주 007)
對馬島 북쪽의 鰐浦, 즉 和珥津 혹은 그 근방의 바다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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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항구에서 묵었는데, 그때 신라의 사자 모마리질지들이 몰래 배와 뱃사공을 나누어 미질한기를 태우고 신라로 도망가게 하였다. 그리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미질허지의 침상에 놓고, 거짓으로 병에 걸린 척하며 습진언에게 “미질허지가 갑자기 병에 걸려 죽어간다.”고 말하였다. 습진언은 사람을 보내 병자를 보게 하였다. 곧 속은 것을 알고 신라의 사신 3인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 이에 신라로 가서 도비진(蹈鞴津)주 008
번역주 008)
부산의 남쪽인 多大浦로 추정된다. 계체천황 23년(529) 4월조에는 多多羅原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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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진을 치고, 초라성(草羅城)주 009
번역주 009)
신공황후 섭정 47년 춘4월조에는 沙比, 웅략천황 9년 3월조에는 匝羅로 나온다. 경남 양산의 옛이름인 歃良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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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함락하고 돌아왔다. 이때의 포로들은 지금의 상원(桑原;쿠하하라)주 010
번역주 010)
『和名類聚抄』에는 大和國 葛上郡 桑原鄕이라고 적혀있다. 현재 奈良縣 御所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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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미(佐糜;사비)주 011
번역주 011)
大和國 葛上郡 佐味와 河內國 石川郡 佐備鄕의 두 곳 가운데 한 곳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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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궁(高宮;타카미야)주 012
번역주 012)
『和名類聚抄』에는 大和國 葛上郡 高宮鄕이라고 적혀있다. 현재 奈良縣 御所市 西佐味 지역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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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해(忍海;오시누미)주 013
번역주 013)
『和名類聚抄』에는 大和國 忍海郡이라고 적혀있다. 현재 奈良縣 葛城市 일부가 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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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4읍(四邑) 한인(漢人)들의 시조이다주 014
번역주 014)
桑原 이하 4읍 漢人들의 도래전승은 『日本書紀』 편찬과정에서 박제상 관련 전승과 결합되어 한인들이 신라 정벌에 의해 도래한 것처럼 윤색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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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주 001)
    미질허지벌한이 『삼국사기』의 마사흔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때의 신라왕은 訥祗王(재위:417~457)이 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신공황후 섭정전기(중애천황 9년 12월조) 一書에 나오는 宇流助富利(智干)와 음이 비슷하지만(宇流=汙禮, 助富利=斯伐) 명확히 알 수 없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朴堤上(毛末:생몰연대 미상)을 가리킨다. 아래 微叱許智伐旱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04)
    여기에서만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내물마립간의 셋째 아들인 未斯欣(?~433)을 가리킨다. 신공황후 섭정전기 微叱己知波珍干岐 참조. 본조와 유사한 구조의 설화는 『삼국사기』 열전 박제상전, 『삼국유사』 기이 김제상 관련 기사에 보인다. 자세한 내용에는 차이가 있지만, 倭에 인질로 가 있던 未斯欣(微叱許智伐旱)을 구출하기 위해 박제상이 활동한 사실은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측 기록에서는 모두 5세기 전반의 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日本書紀』의 경우는 신공황후 전설 속에 편입되어 내용상의 윤색, 편년의 설정 등 많은 문제가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武內宿禰의 자손으로 葛城氏의 조상이다. 여기서 彦(日子라고도 한다)은 別과 함께 존칭이다. 『日本書紀』에 의하면 襲津彦은 신공황후 섭정 5년부터 웅략천황 7년에 이르는 긴 기간 동안 활동한 인물로 나오며 『古事記』에 의하면 그의 계보가 缺史八代에 속하는 孝元天皇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실존한 인물로 보기에는 의문점이 많다. 그런데 신공황후 섭정 62년조에 인용된 『백제기』에는 襲津彦이 ‘沙至比跪’로 나온다. 이에 대해서 『日本書紀』의 편찬자가 『백제기』의 沙至比跪라는 인명을 일본식으로 고쳐 襲津彦으로 표기한 것이라는 견해와, 『日本書紀』 편찬자에게는 『백제기』와는 별로도 襲津彦이라는 인명 자료가 있었으며 『백제기』에는 沙至比跪, 일본에는 襲津彦으로 각각 전해지고 있던 것이 편자에 의해 서로 연결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葛城氏는 4세기에서 5세기 전반에 大和國葛城지방(현 奈良 縣 御所市 서남부)에서 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대두한 씨족으로 大王家의 외척씨족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5세기 말 웅략천황즉위전기에 葛城円이 安康천황을 살해한 眉輪王과 함께 제거되는 것을 계기로 葛城氏는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葛城氏의 몰락 후에는 蘇我氏가 그 기반을 계승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對馬島 북쪽의 鰐浦, 즉 和珥津 혹은 그 근방의 바다를 지칭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부산의 남쪽인 多大浦로 추정된다. 계체천황 23년(529) 4월조에는 多多羅原으로 나온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신공황후 섭정 47년 춘4월조에는 沙比, 웅략천황 9년 3월조에는 匝羅로 나온다. 경남 양산의 옛이름인 歃良에 해당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和名類聚抄』에는 大和國 葛上郡 桑原鄕이라고 적혀있다. 현재 奈良縣 御所市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11)
    大和國 葛上郡 佐味와 河內國 石川郡 佐備鄕의 두 곳 가운데 한 곳으로 추정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2)
    『和名類聚抄』에는 大和國 葛上郡 高宮鄕이라고 적혀있다. 현재 奈良縣 御所市 西佐味 지역에 해당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3)
    『和名類聚抄』에는 大和國 忍海郡이라고 적혀있다. 현재 奈良縣 葛城市 일부가 이에 해당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4)
    桑原 이하 4읍 漢人들의 도래전승은 『日本書紀』 편찬과정에서 박제상 관련 전승과 결합되어 한인들이 신라 정벌에 의해 도래한 것처럼 윤색된 것이다.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오례사벌, 모마리질지, 부라모지, 미질허지벌한, 허지벌한, 오례사벌, 모마리질지, 허지벌한, 갈성습진언, 모마리질지, 미질한기, 미질허지, 습진언, 미질허지, 습진언
지명
대마, 도비진, 초라성, 상원, 좌미, 고궁, 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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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사신을 보내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을 신라로 데려감 자료번호 : ns.k_0017_0060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