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
허재(許載)는 자가 수강(壽康)이며 공암현(孔巖縣) 사람이다. 도필리(刀筆吏)에서 일어나 공적을 쌓아 철주방어판관(鐵州防禦判官)에 뽑혀 나갔다.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결백하였고 은혜로운 정치를 베풀었다. 9성의 역(役)에 중군녹사(中軍錄事)로서 길주성(吉州城)을 지키다가 여진이 와서 공격하니, 허재는 병마부사(兵馬副使) 이관진(李冠珍) 등과 함께 수개월을 굳게 지켰다. 성이 거의 함락되려고 하자 사졸을 독려하여 하룻밤에 다시 중성(重城)을 쌓고 그들을 막아내니 적이 마침내 물러났다. 그 공으로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되었으며, 또 행영병마판관(行營兵馬判官)이 되어 김의원(金義元) 등과 함께 여진을 길주관(吉州關) 밖에서 공격하여 30명의 목을 베고 그들의 갑옷, 병장기, 소, 말을 노획하였다. 〈이후〉 잡단(雜端)으로 승진하였다. 예종(睿宗)이 일찍이 팔관회(八關會)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와 합문(閤門) 앞에 이르러 어가(御駕)를 잠시 멈추고 창화(唱和)하였다. 광대[倡優]에게 명령하여 의장(儀仗) 안에서 노래하고 춤추도록 하니 밤이 거의 삼경[三鼓]에 이르렀다. 허재가 어사대부(御史大夫) 최지(崔贄)와 함께 나아가 간언하니 왕이 기쁘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세 번이나 양계병마사(兩界兵馬使)가 되어 오랫동안 변방에 있으면서 적의 정세를 〈잘〉 알아 변방을 지킬 대책을 아뢰니, 왕이 양계(兩界)의 여러 진사(鎭)에게 내려 보내어 그대로 좇아 사용하도록 하였다.
허재는 배우지 못하고 재주도 없었다. 인종(仁宗) 때 이자겸(李資謙)과 척준경(拓俊京)이 권력을 장악하자 허재가 마음을 기울여 그들에게 아부하니, 드디어 재상[宰輔]에 올라 벼슬이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왕이 그 붕당[朋比]을 싫어하여 여러 번 측근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였다. 이자겸이 패하자 간관(諫官)이 상소하여 그 죄에 대하여 극언(極言)하였으나 척준경이 비호하였다. 오랜 뒤에 지풍주방어사(知豊州防禦使)로 폄출되었고, 또 그 아들인 허순(許純)도 폄출되어 전주방어판관(全州防禦判官)이 되니 여론이 그것을 통쾌하게 여겼다. 허재의 임기가 끝나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제수하고 그대로 치사(致仕)하게 하니 대간(臺諫)이 논박(論駁)하였다. 마침 서해도안찰사(西海道按察使)가 아뢰기를, “허재는 풍주(豊州)에 있으면서 정사에 업적이 있으니 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임명되어 치사하였다가 곧이어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開府儀同三司 檢校太尉)를 더하였다. 죽으니 83세였다.
허재는 배우지 못하고 재주도 없었다. 인종(仁宗) 때 이자겸(李資謙)과 척준경(拓俊京)이 권력을 장악하자 허재가 마음을 기울여 그들에게 아부하니, 드디어 재상[宰輔]에 올라 벼슬이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왕이 그 붕당[朋比]을 싫어하여 여러 번 측근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였다. 이자겸이 패하자 간관(諫官)이 상소하여 그 죄에 대하여 극언(極言)하였으나 척준경이 비호하였다. 오랜 뒤에 지풍주방어사(知豊州防禦使)로 폄출되었고, 또 그 아들인 허순(許純)도 폄출되어 전주방어판관(全州防禦判官)이 되니 여론이 그것을 통쾌하게 여겼다. 허재의 임기가 끝나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제수하고 그대로 치사(致仕)하게 하니 대간(臺諫)이 논박(論駁)하였다. 마침 서해도안찰사(西海道按察使)가 아뢰기를, “허재는 풍주(豊州)에 있으면서 정사에 업적이 있으니 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임명되어 치사하였다가 곧이어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開府儀同三司 檢校太尉)를 더하였다. 죽으니 8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