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궐의 장막에서 수 양제와 마주치고 입조를 요구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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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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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607) 애초에 양제(煬帝)註 001가 계민(啓民)註 002의 장막에 행차하였는데, 우리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었다.註 003 계민이 감히 숨길 수 없어서 우리 사신과 함께 황제를 만났다. 황문시랑(黃門侍郞)註 004 배구(裵矩)註 005가 황제를 달래며 말하기를, “고구려는 본래 기자(箕子)를 봉한 땅으로, 한(漢)·진(晉)대에는 모두 군현(郡縣)으로 삼았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신하〔의 도(道)〕를 지키지 않고 별개의 다른 지역(異域)이 되어버렸는데, 선제(先帝)가 그들을 정복하려 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양량(楊諒)이 못나고 어리석어 군대를 내었지만 공이 없었습니다. 폐하의 시절을 맞이하여 어찌 취하지 않아 예의가 바른 지역[冠帯之境]을 끝내 오랑캐의 소굴이 되게 하겠습니까? 지금 저 〔고구려〕 사신은 계민이 나라를 들어〔수를〕따르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가 몹시 두려워함을 이용해 사신을 위협하여 입조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우홍(牛弘)註 006에게 칙서를 내려 널리 선포하며 말하기를, “짐은 계민이 성심으로 〔우리〕 나라[隋]를 받들었기 때문에 친히 그의 장막에 왔는데, 내년에는 마땅히 탁군(涿郡)註 007으로 갈 것이오. 그대는 돌아가는 날에 그대의 왕에게 말하여 마땅히 빠른 시일 내에 와서 조알하고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오. 살피어 길러주는 예는 마땅히 계민과 같게 할 것이오. 만약에 혹여 조알하지 않는다면 계민을 거느리고 그대의 땅을 돌아볼 것이오.”라고 하였다. 왕은 번(藩)의 예가 자못 이지러져서 황제가 토벌해올까 두려워하였다.註 008 계민은 돌궐의 가한(可汗)이다
양제(煬帝) : 수(隋)의 제2대 황제로 중국 역대 왕조상 최악의 폭군 가운데 한 명으로 뽑힌다. 이름은 ‘양광(楊廣)’ 혹은 ‘양영(楊英)’이다. 604~618년에 재위하였고, 연호는 ‘대업(大業)’이다. 581년 수가 건국된 후 진왕(晉王)에 봉해졌고, 589년에는 행군원수(行軍元帥)로서 진(陳) 원정에 참여하여 진을 멸망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수 문제의 두 번째 아들이었으나 600년에 양소(楊素)와 결탁해 형인 양용(楊勇)을 몰아내고 황태자가 되었고, 604년에 수 문제가 죽자 황제로 즉위하였다. 양제는 전내성(殿内省)을 설치하여 5성(省)을 두는 등 관제(官制) 개혁을 실시하였고, 606년에는 대업률(大業律)을 선포하며 율령을 정비하였다. 특히 그는 여러 차례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는데, 장성을 수축하였고 대운하를 완성하였으며 동도(東都, 뤄양[洛陽])를 건설하였고 서원(西苑)을 조영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돌궐 순행을 나섰고 서쪽으로 토욕혼, 남쪽으로 임읍(林邑)과 유구(流求)를 정벌하였다. 그리고 612~614년에 걸쳐 세 차례 고구려 원정에 나섰지만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백성에 대한 과도한 의무 부여 그리고 사치 생활 등으로 인해 농민 봉기를 야기했고, 결국 618년에 강도(江都) 순행을 나갔다가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시해되었다.
계민(啓民) : 동돌궐의 가한(可汗)이다. 성씨는 ‘아사나(阿史那)’이고 이름은 염간(染干)으로, 막하가한(莫何可汗)의 아들이다. 원래는 돌리가한(突利可汗)이었으나, 도람가한(都藍可汗)과 동돌궐을 나누어 다스리는 상황 속에서 상대적인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수에 혼인을 요청하였고 이에 수가 597년에 종실인 안의공주(安義公主)를 시집보내며 ‘계민가한(啓民可汗)’이라는 칭호를 내리면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계민가한이 수의 지원을 받자 이에 분노한 도람가한은 서돌궐의 달두가한(達頭可汗)과 연합하여 599년에 계민가한을 공격하였는데, 이 때 계민가한은 수의 지원을 받아 전세를 역전시키고 내부 권력까지 장악하였다. 하지만 이로써 계민가한이 다스리는 동돌궐은 완전히 수에 편입되었다.
배구(裵矩) : 자(字)는 홍대(弘大)이다. 북제(北齊) 출신으로 북주(北周)·수(隋)·당(唐)대까지 활약하였다. 수(隋) 문제(文帝)시기에는 왕중선(王仲宣)의 반란을 토벌하였고, 북주 황실의 후손으로 수에 앙심을 품고 있던 도람가한(都藍可汗)의 처 대의공주(大義公主)를 죽이라고 황제에게 조언하여 결국 죽게 만들었다. 수(隋) 양제(煬帝)시기에는 장액(張掖)에서 서역과의 교류를 담당하면서 상인들로부터 그 나라의 풍속과 산천 등을 알아내어 『서역도기(西域圖記)』 3권을 편찬하였고, 서역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각 지도자들을 황제에 알현케 하였다. 돌궐 계민가한(啓民可汗)의 장막을 방문하였다가 고구려 사신을 본 수 양제에게 고구려왕의 입조를 요구하라고 조언하며 고구려 원정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고, 강성해지는 돌궐의 시필가한(始畢可汗)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분열책을 제시하며 시필가한의 측근인 사촉호실(史蜀胡悉)을 죽이기도 하였다. 수 양제가 죽은 후에는 그를 죽인 우문화급(宇文化及), 우문화급을 죽인 두건덕(竇建德), 그리고 당(唐)에게 차례로 귀부하였고, 624년에는 구양순(歐陽詢), 진숙달(陳叔達) 등과 함께 『예문유취(藝文類聚)』를 편찬하였다. 627년 71세의 나이로 죽었다.
우홍(牛弘) : 자(子)는 이인(里人)이다. 본래 성은 요씨(寮氏)였으나, 서위(西魏)대에 부친 요윤(寮允)이 우씨(牛氏)를 하사받음으로써 우씨(牛氏)가 되었다. 북주시기에는 사지절(使持節)·대장군(大將軍)·의동삼사(儀同三司)를 제수받았다. 수(隋)가 건국된 후에는 전적(典籍)들이 유실되는 문제를 인식하면서 수(隋) 문제(文帝)에게 서책을 바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하였고, 583년에는 『오례(五禮)』를 찬수하였다. 그리고 옛 제도에 의거한 명당(明堂) 건립을 요청하였고, 음악 관련 제도나 예법에 대해 논하면서 새로이 정립하기도 하였다. 610년 수(隋) 양제(煬帝)를 따라 강도(江都) 순행에 나섰다가 죽었는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광록대부(光祿大夫)·문안후(文安侯)로 추증되었다. 『수서』에는 우홍에 대해 수(隋)대 대신 가운데 황제의 총애를 잃지 않으면서 죄에 연루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애초에 양제가 계민의 장막에 행차하였는데 …… 황제가 토벌해올까 두려워하였다 : 『자치통감』 권181 수기5 수양제 대업 6년(610) 12월조를 옮긴 듯하다. 『자치통감』에는 610년 12월 기미일에 있었던 것으로 나오지만, 『수서』 권3 제기3 양제상 대업(大業) 3년(607) 8월조, 『북사』 권12 수본기12 하 양제 대업(大業) 3년(607) 8월조, 『책부원귀』 권990 외신부35 비어(備禦)3 대업(大業) 3년(607) 8월조를 보면 수 양제가 계민가한(啓民可汗)의 장막에 도착한 시기는 607년 8월이다. 『수서』 권84 열전49 북적 돌궐과 『수서』 권67 열전32 배구(裴矩), 『북사』 권99 열전87 돌궐, 『북사』 권38 열전26 배구(裴矩), 『구당서』 권63 열전13 배구(裴矩), 『신당서』 권100 열전25 배구(裴矩)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註) 001
양제(煬帝) : 수(隋)의 제2대 황제로 중국 역대 왕조상 최악의 폭군 가운데 한 명으로 뽑힌다. 이름은 ‘양광(楊廣)’ 혹은 ‘양영(楊英)’이다. 604~618년에 재위하였고, 연호는 ‘대업(大業)’이다. 581년 수가 건국된 후 진왕(晉王)에 봉해졌고, 589년에는 행군원수(行軍元帥)로서 진(陳) 원정에 참여하여 진을 멸망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수 문제의 두 번째 아들이었으나 600년에 양소(楊素)와 결탁해 형인 양용(楊勇)을 몰아내고 황태자가 되었고, 604년에 수 문제가 죽자 황제로 즉위하였다. 양제는 전내성(殿内省)을 설치하여 5성(省)을 두는 등 관제(官制) 개혁을 실시하였고, 606년에는 대업률(大業律)을 선포하며 율령을 정비하였다. 특히 그는 여러 차례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는데, 장성을 수축하였고 대운하를 완성하였으며 동도(東都, 뤄양[洛陽])를 건설하였고 서원(西苑)을 조영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돌궐 순행을 나섰고 서쪽으로 토욕혼, 남쪽으로 임읍(林邑)과 유구(流求)를 정벌하였다. 그리고 612~614년에 걸쳐 세 차례 고구려 원정에 나섰지만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백성에 대한 과도한 의무 부여 그리고 사치 생활 등으로 인해 농민 봉기를 야기했고, 결국 618년에 강도(江都) 순행을 나갔다가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시해되었다.
註) 002
계민(啓民) : 동돌궐의 가한(可汗)이다. 성씨는 ‘아사나(阿史那)’이고 이름은 염간(染干)으로, 막하가한(莫何可汗)의 아들이다. 원래는 돌리가한(突利可汗)이었으나, 도람가한(都藍可汗)과 동돌궐을 나누어 다스리는 상황 속에서 상대적인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수에 혼인을 요청하였고 이에 수가 597년에 종실인 안의공주(安義公主)를 시집보내며 ‘계민가한(啓民可汗)’이라는 칭호를 내리면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계민가한이 수의 지원을 받자 이에 분노한 도람가한은 서돌궐의 달두가한(達頭可汗)과 연합하여 599년에 계민가한을 공격하였는데, 이 때 계민가한은 수의 지원을 받아 전세를 역전시키고 내부 권력까지 장악하였다. 하지만 이로써 계민가한이 다스리는 동돌궐은 완전히 수에 편입되었다. 
註) 003
註) 004
註) 005
배구(裵矩) : 자(字)는 홍대(弘大)이다. 북제(北齊) 출신으로 북주(北周)·수(隋)·당(唐)대까지 활약하였다. 수(隋) 문제(文帝)시기에는 왕중선(王仲宣)의 반란을 토벌하였고, 북주 황실의 후손으로 수에 앙심을 품고 있던 도람가한(都藍可汗)의 처 대의공주(大義公主)를 죽이라고 황제에게 조언하여 결국 죽게 만들었다. 수(隋) 양제(煬帝)시기에는 장액(張掖)에서 서역과의 교류를 담당하면서 상인들로부터 그 나라의 풍속과 산천 등을 알아내어 『서역도기(西域圖記)』 3권을 편찬하였고, 서역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각 지도자들을 황제에 알현케 하였다. 돌궐 계민가한(啓民可汗)의 장막을 방문하였다가 고구려 사신을 본 수 양제에게 고구려왕의 입조를 요구하라고 조언하며 고구려 원정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고, 강성해지는 돌궐의 시필가한(始畢可汗)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분열책을 제시하며 시필가한의 측근인 사촉호실(史蜀胡悉)을 죽이기도 하였다. 수 양제가 죽은 후에는 그를 죽인 우문화급(宇文化及), 우문화급을 죽인 두건덕(竇建德), 그리고 당(唐)에게 차례로 귀부하였고, 624년에는 구양순(歐陽詢), 진숙달(陳叔達) 등과 함께 『예문유취(藝文類聚)』를 편찬하였다. 627년 71세의 나이로 죽었다. 
註) 006
우홍(牛弘) : 자(子)는 이인(里人)이다. 본래 성은 요씨(寮氏)였으나, 서위(西魏)대에 부친 요윤(寮允)이 우씨(牛氏)를 하사받음으로써 우씨(牛氏)가 되었다. 북주시기에는 사지절(使持節)·대장군(大將軍)·의동삼사(儀同三司)를 제수받았다. 수(隋)가 건국된 후에는 전적(典籍)들이 유실되는 문제를 인식하면서 수(隋) 문제(文帝)에게 서책을 바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하였고, 583년에는 『오례(五禮)』를 찬수하였다. 그리고 옛 제도에 의거한 명당(明堂) 건립을 요청하였고, 음악 관련 제도나 예법에 대해 논하면서 새로이 정립하기도 하였다. 610년 수(隋) 양제(煬帝)를 따라 강도(江都) 순행에 나섰다가 죽었는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광록대부(光祿大夫)·문안후(文安侯)로 추증되었다. 『수서』에는 우홍에 대해 수(隋)대 대신 가운데 황제의 총애를 잃지 않으면서 죄에 연루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註) 007
註) 008
애초에 양제가 계민의 장막에 행차하였는데 …… 황제가 토벌해올까 두려워하였다 : 『자치통감』 권181 수기5 수양제 대업 6년(610) 12월조를 옮긴 듯하다. 『자치통감』에는 610년 12월 기미일에 있었던 것으로 나오지만, 『수서』 권3 제기3 양제상 대업(大業) 3년(607) 8월조, 『북사』 권12 수본기12 하 양제 대업(大業) 3년(607) 8월조, 『책부원귀』 권990 외신부35 비어(備禦)3 대업(大業) 3년(607) 8월조를 보면 수 양제가 계민가한(啓民可汗)의 장막에 도착한 시기는 607년 8월이다. 『수서』 권84 열전49 북적 돌궐과 『수서』 권67 열전32 배구(裴矩), 『북사』 권99 열전87 돌궐, 『북사』 권38 열전26 배구(裴矩), 『구당서』 권63 열전13 배구(裴矩), 『신당서』 권100 열전25 배구(裴矩)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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