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이 즉위하다
(
346년
09월
)
근초고왕(近肖古王)註 001은 비류왕(比流王)의 둘째 아들이다. 몸 생김새가 기이하고 컸으며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 계왕(契王)이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었다.註 002
근초고왕(近肖古王) : 백제 제13대 왕으로서 재위 기간은 346~375년이다. 본서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근초고왕, 일본의 『고사기(古事記)』 中卷 응신(應神)조에는 조고왕(照古王), 『일본서기(日本書紀)』 권9 신공기(神功紀) 섭정 46년(246; 수정연대 366)·49년(249; 수정연대 369)·55년(255; 수정연대 375)에는 초고왕(肖古王), 권19 흠명기(欽明紀) 2년(541) 4월에는 속고왕(速古王),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권22 左京諸蕃下와 권23 右京諸蕃上 및 권24 右京諸蕃下에는 속고왕(速古王)·근속고왕(近速古王) 등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중국의 『진서(晉書)』 권9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2년(372)에는 여구(餘句)라는 이름으로 적혀 있다. 여구는 부여구(扶餘句)라는 이름을 줄인 것으로 보이며, 구(句)는 근초고의 마지막 글자 고(古)만 중국식으로 표현한 것일 수 있다. 근초고왕의 ‘근(近)’에 대해서는 ‘크다’라는 뜻의 ‘큰’을 한자 음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과 제5대 초고왕을 ‘닮았다’는 뜻에서 ‘가까울 근(近)’을 덧붙여 표현했다는 해석이 있으며, 흔히 초고왕 계통의 왕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2년(541) 4월조 및 7월조에 보이는 성왕의 발언 중에서 속고왕(速古王)‧귀수왕(貴須王)이 등장하기 때문에 성왕 이후에야 근초고왕‧근구수왕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보기도 한다(李根雨, 1994, 『《日本書紀》에 引用된 百濟三書에 관한 硏究』, 韓國精神文化硏究院 博士學位論文, 44쪽).
근초고왕은 재위기간에 옛 대방지역 영유권을 두고 고구려와 치열하게 다투었으며, 371년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일본서기』에는 가야를 통해 바다 건너 왜와 교류하고 유교 및 각종 문물을 전해준 것으로 적혀 있다. 『일본서기』 권9 신공기 섭정 49년(249; 수정연대 369)에 실린 기록을 근거로 근초고왕 때 백제가 지금의 전라도지역을 경략하고 복속시켰다고 보기도 한다.
근초고왕은 재위기간에 옛 대방지역 영유권을 두고 고구려와 치열하게 다투었으며, 371년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일본서기』에는 가야를 통해 바다 건너 왜와 교류하고 유교 및 각종 문물을 전해준 것으로 적혀 있다. 『일본서기』 권9 신공기 섭정 49년(249; 수정연대 369)에 실린 기록을 근거로 근초고왕 때 백제가 지금의 전라도지역을 경략하고 복속시켰다고 보기도 한다.
계왕(契王)이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었다 : 제12대 계왕은 제10대 분서왕의 아들이고, 제13대 근초고왕은 제11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하였으므로, 비류왕‧계왕‧근초고왕의 즉위를 직계와 방계 사이의 경쟁 또는 왕실 내부의 갈등으로 해석하기도 하고(李道學, 1991), 왕실 교대로 보기도 한다(金起燮, 1993; 李基東, 1996).
〈참고문헌〉
李道學, 1991, 「百濟 集權國家形成過程 硏究」, 漢陽大學校 博士學位論文
金起燮, 1993, 「漢城時代 百濟의 王系에 대하여」, 『韓國史硏究』 83
李基東, 1996, 『百濟史硏究』, 一潮閣
〈참고문헌〉
李道學, 1991, 「百濟 集權國家形成過程 硏究」, 漢陽大學校 博士學位論文
金起燮, 1993, 「漢城時代 百濟의 王系에 대하여」, 『韓國史硏究』 83
李基東, 1996, 『百濟史硏究』, 一潮閣
註) 001
근초고왕(近肖古王) : 백제 제13대 왕으로서 재위 기간은 346~375년이다. 본서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근초고왕, 일본의 『고사기(古事記)』 中卷 응신(應神)조에는 조고왕(照古王), 『일본서기(日本書紀)』 권9 신공기(神功紀) 섭정 46년(246; 수정연대 366)·49년(249; 수정연대 369)·55년(255; 수정연대 375)에는 초고왕(肖古王), 권19 흠명기(欽明紀) 2년(541) 4월에는 속고왕(速古王),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권22 左京諸蕃下와 권23 右京諸蕃上 및 권24 右京諸蕃下에는 속고왕(速古王)·근속고왕(近速古王) 등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중국의 『진서(晉書)』 권9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2년(372)에는 여구(餘句)라는 이름으로 적혀 있다. 여구는 부여구(扶餘句)라는 이름을 줄인 것으로 보이며, 구(句)는 근초고의 마지막 글자 고(古)만 중국식으로 표현한 것일 수 있다. 근초고왕의 ‘근(近)’에 대해서는 ‘크다’라는 뜻의 ‘큰’을 한자 음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과 제5대 초고왕을 ‘닮았다’는 뜻에서 ‘가까울 근(近)’을 덧붙여 표현했다는 해석이 있으며, 흔히 초고왕 계통의 왕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2년(541) 4월조 및 7월조에 보이는 성왕의 발언 중에서 속고왕(速古王)‧귀수왕(貴須王)이 등장하기 때문에 성왕 이후에야 근초고왕‧근구수왕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보기도 한다(李根雨, 1994, 『《日本書紀》에 引用된 百濟三書에 관한 硏究』, 韓國精神文化硏究院 博士學位論文, 44쪽).
근초고왕은 재위기간에 옛 대방지역 영유권을 두고 고구려와 치열하게 다투었으며, 371년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일본서기』에는 가야를 통해 바다 건너 왜와 교류하고 유교 및 각종 문물을 전해준 것으로 적혀 있다. 『일본서기』 권9 신공기 섭정 49년(249; 수정연대 369)에 실린 기록을 근거로 근초고왕 때 백제가 지금의 전라도지역을 경략하고 복속시켰다고 보기도 한다.
근초고왕은 재위기간에 옛 대방지역 영유권을 두고 고구려와 치열하게 다투었으며, 371년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일본서기』에는 가야를 통해 바다 건너 왜와 교류하고 유교 및 각종 문물을 전해준 것으로 적혀 있다. 『일본서기』 권9 신공기 섭정 49년(249; 수정연대 369)에 실린 기록을 근거로 근초고왕 때 백제가 지금의 전라도지역을 경략하고 복속시켰다고 보기도 한다.
註) 002
계왕(契王)이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었다 : 제12대 계왕은 제10대 분서왕의 아들이고, 제13대 근초고왕은 제11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하였으므로, 비류왕‧계왕‧근초고왕의 즉위를 직계와 방계 사이의 경쟁 또는 왕실 내부의 갈등으로 해석하기도 하고(李道學, 1991), 왕실 교대로 보기도 한다(金起燮, 1993; 李基東, 1996).
〈참고문헌〉
李道學, 1991, 「百濟 集權國家形成過程 硏究」, 漢陽大學校 博士學位論文
金起燮, 1993, 「漢城時代 百濟의 王系에 대하여」, 『韓國史硏究』 83
李基東, 1996, 『百濟史硏究』, 一潮閣
〈참고문헌〉
李道學, 1991, 「百濟 集權國家形成過程 硏究」, 漢陽大學校 博士學位論文
金起燮, 1993, 「漢城時代 百濟의 王系에 대하여」, 『韓國史硏究』 83
李基東, 1996, 『百濟史硏究』, 一潮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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