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기문 분쟁
by Silla on 2024-03-11
495년에 동성왕이 남제에 보낸 국서를 보면, 그가 解禮昆을 弗中侯에 봉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解禮昆은 解禮縣과 관련이 있는 인물로 보이고, 解禮縣은 훗날 기문과 함께 웅진도독부 지심주에 속했다. 그렇다면 495년의 시점에서 기문은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512년에 백제 또한 기문을 뺏앗겼다고 주장했고 왜도 그러한 백제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기문 분쟁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倭는 백제를 좋아했다는 점이다.
일본서기는 가라가 백제로부터 기문을 빼앗았다고 적고 있지만 가라가 나라의 생존을 걸고 저항했던 것으로 보아 억울한 점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또 이후의 영토분쟁을 살펴보아도 倭는 일관되게 백제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려주는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倭가 백제 편을 드는 이유는 倭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대륙의 문화를 백제가 전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倭는 진기한 보물보다 오경박사를 더 원했던 건지도 모른다. 또 391년에 공동으로 출병하여 낙동강 서쪽 차령 이남을 차지하고 나눠가질 때부터 백제와 倭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었었다. 일본서기에는 기문 분쟁이 시작되던 513년에 倭에 머물던 무령왕의 아들 순타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당시 백제와 倭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둘째, 임나에 대한 倭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이 사건 이전에는 倭에 대해 임나의 어떤 나라도 반기를 들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로는 倭에 대해 반발하는 나라가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倭의 장악력이 이전에 비해 약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4현 분쟁에서 볼 수 있듯이 공정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신라는 527년 이전 어느 때인가 임나의 남가라(南加羅)와 녹기탄(㖨己呑)을 멸망시켰다. 541년 백제의 성왕은 이 사건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녹기탄은 가라와 신라의 경계에 있어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는데, 임나도 구원할 수가 없었고, 이로 말미암아 망하게 되었다. 남가라는 땅이 협소하여 불의의 습격에 방비할 수 없었고 의지할 바도 알지 못하여, 이로 인하여 망하였다.’

이 사건 이후 ‘임나재건’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작은 나라 두 개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임나의 핵심적 구성요소가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倭는 임나재건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