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4. 임나사 > 위치 비정 > 0391 7국 > 加羅 > 0513 己汶 분쟁
 
 0289 삼국지(晉·陳壽)
已柢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冉奚國·弁辰半路(반로)國·弁[辰]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이 있어서, 弁韓과 辰韓의 합계가 24國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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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70-05 일본서기(720)
천웅장언과 구저 등이 백제로부터 이르렀다. 이 때 황태후가 기뻐하며 구저에게 “바다 서쪽의 여러 한(韓)을 이미 너희 나라에 주었는데 지금 무슨 일로 이리 자주 오느냐”고 물었다. 구저 등이 “...”라고 아뢰었다. 황태후가 명령하여 “너의 말이 훌륭하구나. 이는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라 하고 다사성(多沙城)을 더 주어 오고 가는 길의 역(驛)으로 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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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3 기문(己汶) 분쟁
한편, 일본서기에는 513년부터 백제와 반파가 기문(己汶)을 놓고 분쟁을 벌이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기문은 괄지지(618)의 기록으로 보아 섬진강 유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섬진강 상류의 고고학적 양상은 고령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고령의 고분을 축조한 세력이 섬진강 유역까지 장악하였고 그것이 기록에 나오는 반파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고령의 고분을 축조한 세력은 삼국사기에 대가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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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3 기문(己汶) 분쟁
일본서기에는 가라(加羅)와 반파(伴跛)가 모두 나온다. 그러나 두 나라가 한 사건에 동시에 등장한 적은 없다. 그래서 가라와 반파가 별개의 나라가 아닐 가능성이 생긴다. '가라'는 임나 초기부터 말기까지 자주 등장하는데 '반파'는 기문분쟁과 관련하여 6차례 나올 뿐 그 이외의 시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일본서기는 백제의 여러 기록을 편집하여 만들었는데 기문분쟁과 관련한 백제의 기록에서는 백제가 자신과 대립한 가라를 반파로 낮춰 표기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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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3 기문(己汶) 분쟁
일본서기 외에는 반파가 중국의 양직공도에 유일하게 등장하는데 이것도 백제 사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적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런 추정에 더욱 심증이 간다. 그렇지 않고서야 혼자서 백제, 신라 및 왜와 맞섰던 강한 나라가 기문분쟁이 일어난 짧은 기간 이외의 기록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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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3 일본서기(720)
513년 백제는 문귀장군 등을 왜(倭)에 보내 오경박사를 바치며 반파국(伴跛國)이 기문(己汶)의 땅을 빼앗아갔다고 호소하였다. 몇 달 후에는 반파국도 왜(倭)에 진기한 보물을 바치며 기문의 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왜(倭)는 이를 들어주지 않고 백제, 신라, 안라 그리고 반파의 신하들을 불러놓고 은칙을 선포하여 기문과 체사(滯沙)을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크게 반발한 반파는 이듬해 성을 쌓고 봉수와 군창을 설치하며 왜(倭)와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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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3 기문 분쟁
기문 분쟁은 우리에게 몇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왜(倭)는 백제를 좋아했다는 점이다. 일본서기는 가라가 백제로부터 기문을 빼앗았다고 적고 있지만 가라가 나라의 생존을 걸고 저항했던 것으로 보아 억울한 점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또 이후의 영토분쟁을 살펴보아도 왜(倭)는 일관되게 백제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려주는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왜(倭)가 백제 편을 드는 이유는 왜(倭)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대륙의 문화를 백제가 전해줄 수 있었기 때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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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3 반파
일본서기에는 가라(加羅)와 반파(伴跛)가 모두 나온다. 그러나 두 나라가 한 사건에 동시에 등장한 적은 없다. 그래서 가라와 반파는 별개의 나라가 아닐 가능성이 생긴다. 가라는 임나 초기부터 말기까지 자주 등장하는데 반파는 기문분쟁과 관련하여 6차례 나올 뿐 그 이외의 시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일본서기는 백제의 여러 기록을 편집하여 만들었는데 기문분쟁과 관련한 백제의 기록에서는 백제가 자신과 대립한 가라를 반파로 낮춰 표기한 것이 아닐까? 반파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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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3-06 일본서기(720)
백제가 저미문귀 장군과 주리즉이 장군을 수적신압산에 딸려 보내어 오경박사 단양이를 바쳤다. 따로 아뢰기를 “반파국(伴跛國)이 저희 나라 기문(己汶)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엎드려 청하옵건대 천은으로 본래 속했던 곳으로 되돌려 주게 해주십시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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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3-11 일본서기(720)
이 달 반파국(伴跛國)이 집지를 보내어 진기한 보물을 바치고 기문(己汶)의 땅을 요구했으나 끝내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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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3-11 일본서기(720)
조정에서 백제의 저미문귀 장군과 사라의 문득지, 안라의 신이해와 분파위좌, 반파(伴跛)의 기전해와 죽문지 등을 불러놓고 은칙을 선포하여 기문(己汶)과 체사(滯沙)를 백제국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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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4-03 일본서기(720)
반파(伴跛)가 자탄과 대사(帶沙)에 성을 쌓아 만해와 이어서 봉수와 군창을 설치하여 일본에 대비했다. 또 이열비와 마수비에 성을 쌓아 마차해와 추봉에 걸치게 했다. 사졸과 병기를 모아 신라를 핍박하여 백성을 약탈하고 촌읍을 노략질하였으니 흉악한 세력이 가해진 곳은 남겨진 것이 거의 없었다. 포학하고 사치하였으며 괴롭혀 해를 끼치고 침략하여 죽인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이루 다 실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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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5-02 일본서기(720)
이 달 사도도에 이르러 반파(伴跛)인이 한을 품고 독을 머금었으며 강성함을 믿고 사납기 이를 데 없음을 전해 들었다. 물부련은 수병 5백 명을 이끌고 곧바로 대사(帶沙)강으로 나아갔으며 문귀장군은 신라로부터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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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5-04 일본서기(720)
물부련이 대사(帶沙)에서 6일 동안 머물렀는데, 반파(伴跛)가 군사를 일으켜 가서 정벌했다. 옷을 벗기고 가지고 간 물건들을 빼앗고 막사를 모두 불태우자, 물부련 등이 두려워 도망해 숨어서 겨우 목숨을 보존하여 문모라(섬 이름이다)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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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6-05 일본서기(720)
백제가 전부의 목리부마갑배를 보내어 물부련 등을 기문(己汶)에서 맞이하여 위로하고 이끌어서 나라로 들어왔다. 여러 신하들이 각각 옷과 부월·옷감을 내어 국물에 더하여 조정에 쌓아놓고 은근하게 위로했으며 상과 녹이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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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6-09 일본서기(720)
백제가 주리즉차장군을 보냈는데 물부련을 따라 와서 기문(己汶)의 땅을 내려준 것에 사례하였다. 따로 오경박사 한고안무를 보내어 박사 단양이와 교대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청에 따라 교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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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26-539 양직공도(梁職貢圖)
백제 주변에는 소국이 있는데 반파(叛波)·탁·다라·전라·사라·지미·마련·상기문(上己文)·하침라 등이 백제에 부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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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62 이전 삼국사기(1145)
우륵이 지은 12곡은 첫째 하가라도, 둘째 상가라도, 셋째 보기, 넷째 달이, 다섯째 사물, 여섯째 물혜, 일곱째 하기물(下奇物), 여덟째 사자기, 아홉째 거열, 열째 사팔혜, 열한째 이사, 열두째 상기물(上奇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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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18-907 괄지지
基汶河源出其國南山東南流入大海 기문하(基汶河)는 그 나라(백제)의 남쪽 산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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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37 속일본후기(869)
우경인 좌경량 종5위상 길전숙니서주, 월중개 종5위하 길전숙니고세 등에게 흥세조신의 성을 내려 주었다. 시조 염승진은 왜인이었는데, 후에 나라의 명에 따라 삼기문(三己汶)에 가서 살았다. 그 땅은 마침내 백제에게 예속되었다. 염승진의 8대손인 달솔 길대상과 그의 아우 소상 등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 잇달아 우리 조정에 왔다. 대대로 의술을 전수하였고 아울러 문예에 통달하였다. 자손은 내량경 전촌리에 거주하였으므로 길전련의 성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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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5 삼국사기
기문현(己汶縣)은 본래 금물(今勿)이다. -- 여기서의 기문은 통상 충남 예산으로 비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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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5 삼국사기
하동군은 본래 한다사군(韓多沙郡)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셋이다. 악양현은 본래 소다사현(小多沙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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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 지산동 44호분
고령 지산동 44호분은 5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돌방무덤이다. 이 고분에는 32기의 순장 돌덧널무덤이 중앙의 주피장자를 들러싸고 있어 주피장자가 대단한 힘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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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말 중국제 닭머리 주전자와 쇠자루솥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M5호분은 무덤방의 길이가 9.6m로 최대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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