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삼한 연대기 > 475년부터 561년 사이 > 0513 己汶
 
 임나
 
 기문 주변의 지명과 고고학적 양상
남원은 섬진강의 상류고 장수는 금강의 상류며 운봉은 낙동강의 상류다. 금강과 섬진강의 경계는 水分峴이고 섬진강과 낙동강의 경계는 女院峙며 낙동강과 금강의 경계는 六十嶺이다. 섬진강 유역 가라계 고분의 특징은 집단화된 유적군과 최고 위계의 고분, 가라계 목곽묘가 없다는 점인데, 이는 일찍부터 마한 또는 백제의 영향을 받은 정치세력의 존재로 인해 가라계 세력의 성장이 억제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판단된다.
 
 0470 일본서기(720)
천웅장언과 구저 등이 백제로부터 이르렀다. 이 때 황태후가 기뻐하며 구저에게 “바다 서쪽의 여러 韓을 이미 너희 나라에 주었는데 지금 무슨 일로 이리 자주 오느냐”고 물었다. 구저 등이 “...”라고 아뢰었다. 황태후가 명령하여 “너의 말이 훌륭하구나. 이는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라 하고 ●多沙城을 더 주어 오고 가는 길의 역으로 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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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95 남제서(537)
녕삭장군 面中王 저근은 정치를 두루 잘 보좌하였고 무공 또한 뛰어났으니 이제 가행관장군 도장군 都漢王이라 하였고, 건위장군 八中侯 여고는 젊을 때부터 임금을 도와 충성과 공로가 진작 드러났으므로 이제 가행녕삭장군 阿錯王이라 하였고, 건위장군 여력은 천성이 충성되고 정성스러워 문무가 함께 두드러졌으므로 이제 가행용양장군 邁盧王이라 하였으며, 광무장군 여고는 정치에 공로가 있고 국정을 빛내고 드날렸으므로 이제 가행건위장군 ●弗斯侯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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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95 남제서(537)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 賛首流爲行安國將軍辟中王 ●解禮昆爲行武威將軍●弗中侯 木干那前有軍功又拔臺舫爲行廣威將軍面中侯 사법명을 가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찬수류를 가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해례곤을 가행무위장군 불중후로 삼고, 목간나는 과거에 군공이 있는 데다 또 성문과 선박을 때려 부수었으므로 행광위장군 면중후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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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3 일본서기(720)
513년 백제는 문귀장군 등을 倭에 보내 오경박사를 바치며 반파국(伴跛國)이 기문(己汶)의 땅을 빼앗아갔다고 호소하였다. 몇 달 후에는 반파국도 倭에 진기한 보물을 바치며 기문의 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倭는 이를 들어주지 않고 백제, 신라, 안라 그리고 반파의 신하들을 불러놓고 은칙을 선포하여 기문과 체사(滯沙)을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크게 반발한 반파는 이듬해 성을 쌓고 봉수와 군창을 설치하며 倭와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신라를 침략하여 약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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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3-06 일본서기(720)
백제가 저미문귀 장군과 주리즉이 장군을 수적신압산에 딸려 보내어 오경박사 단양이를 바쳤다. 따로 아뢰기를 “반파국(伴跛國)이 저희 나라 기문(己汶)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엎드려 청하옵건대 천은으로 본래 속했던 곳으로 되돌려 주게 해주십시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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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3-11 일본서기(720)
이 달 반파국(伴跛國)이 집지를 보내어 진기한 보물을 바치고 기문(己汶)의 땅을 요구했으나 끝내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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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3-11 일본서기(720)
조정에서 백제의 저미문귀 장군과 사라의 문득지, 안라의 신이해와 분파위좌, 반파(伴跛)의 기전해와 죽문지 등을 불러놓고 은칙을 선포하여 기문(己汶)과 ●滯沙를 백제국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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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4-03 일본서기(720)
반파(伴跛)가 자탄과 ●帶沙에 성을 쌓아 만해와 이어서 봉수와 군창을 설치하여 일본에 대비했다. 또 이열비와 마수비에 성을 쌓아 마차해와 추봉에 걸치게 했다. 사졸과 병기를 모아 신라를 핍박하여 백성을 약탈하고 촌읍을 노략질하였으니 흉악한 세력이 가해진 곳은 남겨진 것이 거의 없었다. 포학하고 사치하였으며 괴롭혀 해를 끼치고 침략하여 죽인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이루 다 실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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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5-02 일본서기(720)
이 달 사도도에 이르러 반파(伴跛)인이 한을 품고 독을 머금었으며 강성함을 믿고 사납기 이를 데 없음을 전해 들었다. 물부련은 수병 5백 명을 이끌고 곧바로 ●帶沙강으로 나아갔으며 문귀장군은 신라로부터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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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5-04 일본서기(720)
물부련이 ●帶沙에서 6일 동안 머물렀는데, 반파(伴跛)가 군사를 일으켜 가서 정벌했다. 옷을 벗기고 가지고 간 물건들을 빼앗고 막사를 모두 불태우자, 물부련 등이 두려워 도망해 숨어서 겨우 목숨을 보존하여 문모라(섬 이름이다)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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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6-05 일본서기(720)
백제가 전부의 목리부마갑배를 보내어 물부련 등을 기문(己汶)에서 맞이하여 위로하고 이끌어서 나라로 들어왔다. 여러 신하들이 각각 옷과 부월·옷감을 내어 국물에 더하여 조정에 쌓아놓고 은근하게 위로했으며 상과 녹이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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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6-09 일본서기(720)
백제가 주리즉차장군을 보냈는데 물부련을 따라 와서 기문(己汶)의 땅을 내려준 것에 사례하였다. 따로 오경박사 한고안무를 보내어 박사 단양이와 교대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청에 따라 교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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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26~0539 양직공도(梁職貢圖)
백제 주변에는 소국이 있는데 반파(叛波)·탁·다라·전라·사라·지미·마련·상기문(上己文)·하침라 등이 백제에 부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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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44 삼국사기(1145)
十停(혹은 三千幢이라고도 이른다). 첫째는 音里火停, 둘째는 古良夫里停, 셋째는 居斯勿停으로 금장은 청색이다. 넷째는 參良火停, 다섯째는 召參停, 여섯째는 未多夫里停으로 금장은 흑색이다. 일곱째는 南川停, 여덟째는 骨乃斤停으로 금장은 황색이다. 아홉째는 伐力川停, 열째는 伊火兮停으로 금장은 녹색이다. 모두 진흥왕 5년에 두었다. -- 진흥왕 5년의 상황과는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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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62 ᑅ 삼국사기(1145)
干所製十二曲 一曰下加羅都(하가라도) 二曰上加羅都(상가라도) 三曰寳伎(보기) 四曰逹已(달이) 五曰思勿(사물) 六曰勿慧(물혜) 七曰下竒物(하기물) 八曰師子伎(사자기) 九曰居烈(거열) 十曰沙八兮(사팔혜) 十一曰爾赦(이사) 十二曰上竒物(상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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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18~0907 괄지지
括地志曰熊津河源出國東界西南流經國北百里又西流入海廣處三百步其水至清又有基汶河源出其國南山東南流入大海其中水族與中夏同 괄지지에 말하기를 '웅진하는 나라의 동쪽 경계로부터 나오고 서남으로 나라의 북쪽을 가로질러 흐르는데 백리이다.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강폭이 넓은 곳은 30보이다. 물이 지극히 맑다. 또 기문하가 나라 안에 있는데 수원은 나라의 남쪽 산으로부터 나오고 동남쪽으로 흘러 큰 바다에 이른다. 그 水族은 중국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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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60 ᑅ 백제 주군현
임실군(任實郡) 마돌현(馬突縣 한편 馬珍이라고도 이른다) 거사물현(居斯勿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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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60 ᑀ 웅진도독부 주현
支潯州의 9현 己汶縣(본래 今勿이다) 支潯縣(본래 只彡村이다) 馬津縣(본래 孤山이다) 子來縣(본래 夫首只다) 解禮縣(본래 皆利伊다) 古魯縣(본래 古麻只다) 平夷縣(본래 知留다) 珊瑚縣(본래 沙好薩이다) 隆化縣(본래 居斯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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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63 삼국사기(1145)
居勿城과 沙平城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고, 德安城을 공격하여 1천 7십 명의 목을 베었다. -- 이 居勿이 居斯勿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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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57 신라 9주5소경
南原小京은 본래 백제의 古龍郡이었다. 신라는 이를 병합하여 신문왕 5년에 처음으로 소경을 설치했다. 경덕왕 16년에 南原小京을 설치했다. 지금은 南原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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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57 신라 9주5소경
任實郡은 본래 백제의 군이었는데, 경덕왕이 주군의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도 그대로 쓴다. 馬靈縣은 본래 백제의 馬突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靑雄縣은 본래 백제의 居斯勿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巨寧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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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15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
任那國奏曰 臣國東北有三己汶地 上己汶 中己汶 下己汶 地方三百里 土地人民亦富饒 與新羅國相争 彼此不能攝治 兵戈相尋 民不聊生 臣請將軍令治此地 即為貴國之部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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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15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
임나국에서 아뢰기를 저희들의 나라 동북에 삼기문이 있는데 상기문, 중기문 그리고 하기문입니다. 지방은 삼백리인데, 토지는 비옥하고 인민 또한 많습니다. 그런데 이 땅을 두고 신라와 더불어 서로 다투지만 서로 간에 능히 잘 다스리지 못하고 싸우기만 하니 백성들이 겨우 생만 유지할 뿐입니다. 저희가 청하는 것은 장군으로 하여금 이 곳을 다스리게 하여 귀국의 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 동북이라는 표현은 다른 기록들과 모순되므로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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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37 속일본후기(869)
우경인 좌경량 종5위상 길전숙니서주, 월중개 종5위하 길전숙니고세 등에게 흥세조신의 성을 내려 주었다. 시조 염승진은 왜인이었는데, 후에 나라의 명에 따라 삼기문(三己汶)에 가서 살았다. 그 땅은 마침내 백제에게 예속되었다. 염승진의 8대손인 달솔 길대상과 그의 아우 소상 등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 잇달아 우리 조정에 왔다. 대대로 의술을 전수하였고 아울러 문예에 통달하였다. 자손은 내량경 전촌리에 거주하였으므로 길전련의 성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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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5 삼국사기
하동군은 본래 한다사군(韓多沙郡)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거느리는 현은 셋이다. 악양현은 본래 소다사현(小多沙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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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적 양상
 임나의 고고학적 양상    섬진강 유역의 고고학적 양상    가라계 고분    고령 지산동   • 고분의 널방   • 고분의 입지   • 껴묻거리    남원 두락리    남원 초촌리    남해 남치리    순천 운평리    여수 죽림리    영암 옥야리    운봉 고원의 가야 기문    임실 금성리    임실금성리가야고분긴급발굴조사    장수    장수 동촌리    장수 삼봉리    장수 삼봉리    전북의 가야 1    전북의 가야 2    전북의 가야 3    제철 유적    제철 유적   • 토기    호남과 영남 경계의 가야  
 
지명 고증
 支潯州    任實 > 平夷 > 任實    任實 > 平夷 > 任實    任實郡 居斯勿 > 隆化 > 靑雄    任實郡 馬突 > 馬津 > 馬靈    古龍 > 己汶 > 南原    道實 > ○ > 淳化 > 淳昌    道實郡 堗坪 > ○ > 九皐    道實郡 礫坪 > ○ > 磧城  
 
 ¦伴跛
일본서기에는 513년부터 백제와 伴跛가 己汶을 놓고 분쟁을 벌이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반파는 일본서기에 기문 분쟁과 관련하여 6차례 나올 뿐, 그 이외의 시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는 가라가 임나 초기부터 말기까지 꾸준히 나오는 것과 대조적이다. 혼자서 백제, 왜 그리고 신라와 맞섰던 강한 나라가 불과 몇년 사이에 생겨났다 사라질 수는 없다. 따라서 반파라는 명칭은, 원래 있던 나라에 대해 기문 분쟁의 시기에만 사용했던 이칭일 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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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己汶
백제 완산주 임실군에는 馬突縣(馬珍)과 居斯勿縣이 있었다. 각각 웅진도독부 지심주의 馬津縣과 융화현(본래 居斯勿)이 되었다가, 신라 전주 임실군의 馬靈縣(본래 馬突縣)과 청웅현(본래 居斯勿縣)이 되었다. 임실과 마령은 지금도 섬진강 상류에 지명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웅진도독 지심주의 위치를 대략 짐작할 수 있고 지심주에 들어있는 己汶縣 또한 마찬가지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1997년에 출간한 역주 삼국사기에는 웅진도독부 지심주 己汶縣이 충청남도 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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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문 분쟁
495년에 동성왕이 남제에 보낸 국서를 보면, 그가 解禮昆을 弗中侯에 봉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解禮昆은 解禮縣과 관련이 있는 인물로 보이고, 解禮縣은 훗날 기문과 함께 웅진도독부 지심주에 속했다. 그렇다면 495년의 시점에서 기문은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512년에 백제 또한 기문을 뺏앗겼다고 주장했고 왜도 그러한 백제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기문 분쟁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倭는 백제를 좋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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