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직공도(梁職貢圖 526-539)에는 백제가 521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자신을 소개했는데, 지방을 22담로로 나누어 통치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660년에 백제가 망할 때는 지방에 37군이 있었다. 한국통일 이후 신라는 옛 백제 지역을 웅주, 전주 그리고 무주로 나누고 각각 13개, 10개 그리고 14개의 군을 두었다. 모두 합하면 37개로 백제가 망할 때의 군과 숫자가 같다. 웅주와 전주만 놓고 보면 23개의 군으로 양직공도에 나오는 담로와 숫자가 비슷하다. 여기서 22담로는 웅주와 전주의 23군에 대응하고 무주 14개 군은 521년 당시 백제의 영토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나온다. 이것은 그때까지 영산 지역이 백제에 통합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지역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4읍(四邑), 송서에 나오는 모한(慕韓) 그리고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설치한 5도독부 중의 마한(馬韓)에 대응된다.
529년에 있었던 다사진 분쟁 때 백제는 왜(倭)와 통하는 가까운 항구를 얻는다는 명분을 내세웠는데, 이것으로 보아 이때까지 백제는 영산 지역을 차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산 지역을 확보했다면 그런 핑계가 통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사진 분쟁 이후 영산 지역의 전방후원분은 백제식 고분으로 교체되기 시작하는데 정확히 언제 백제의 영역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