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4. 임나사
 
 영산 복강 동조현상
영산과 복강은 선사시대에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에도 영산은 삼한의 역사에서 빠져있고 복강도 대화왜의 역사에서 비껴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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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北亞 古代史 槪念圖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가 설치한 군현은 일시적이나마 차령에서 죽령으로 이어지는 선까지 내려온 듯하고 391년에 왜가 임나를 점령할 때도 이 선까지 올라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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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9 삼국지 韓 요약
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삼고 남쪽은 倭와 접해 있다. 마한, 진한 그리고 弁韓 세 종족이 있다. 진한과 변한은 모두 24국인데 已柢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冉奚國·弁辰半路國·弁[辰]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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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9 삼국지 韓 요약
이 중 열 두 나라는 진왕에게 소속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사람을 앉혀 대대로 세습하게 하였으며 스스로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변한의 독로국은 왜(倭)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변한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韓), 예(濊) 그리고 왜(倭)의 사람들이 모두 와서 사 가며 낙랑과 대방에도 공급되었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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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9 삼국지 倭 요약
대방에서 倭에 가려면 해안을 따라 한국을 지나 남쪽으로 간 다음 다시 동쪽으로 가면 북쪽 해안에 있는 구야한국(狗邪韓國)에 이르는데 거기에서 바다를 건너 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對馬國)에 도착한다. 이 시기에 倭는 30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중 야마대국은 7만여 호나 되었다. 韓이 78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마한이 10여만 호고 변진이 4-5만 호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倭가 韓보다 규모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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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90-0390 三韓의 재편
중국에서 진나라(司馬晋)가 중원에서 밀려나면서 한반도도 재편되었다. 낙랑과 대방이 고려에 흡수되고 백제와 신라가 성장하여 각각 마한과 진한을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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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90-0390 三韓의 재편
倭의 여왕 비미호는 238년부터 대방을 통해 위(曹魏)에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았다. 그러나 韓에는 뚜렷한 중심 국가나 왕이 없었고 낙랑과 대방의 통제를 받았다. 이후 낙랑과 대방은 약화되어 각각 313년과 314년에 고려에 병합되고 만다. 그리고 마한의 한강 유역과 진한은 각각 백제와 신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변한과 마한의 차령 이남은 미처 고대왕국으로 발전하기 전에 倭의 지배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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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69 日本大百科全書
왜의 임나 점령을 일본서기의 기록에 맞춰 369년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는 광개토왕릉비의 기록과 맞지 않는다.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에 맞추어 391년으로 설정하는 게 다른 여러 기록들과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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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 倭의 韓國개입
광개토왕릉비(414)와 일본서기(720)의 기록을 종합하면, 왜는 391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백제의 지원을 받으며 신라를 치고 7국과 4읍 그리고 침미다례를 복속시켰다. 신라는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동북아는 고려-신라와 왜-백제의 두 진영으로 갈라져 대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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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414)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려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391년에 건너와 백제를 격파하고 ... 신라 ...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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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249) 일본서기
황전별과 녹아별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탄순국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사백·개로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오”라 하였다. 곧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에게 (이 두 사람은 그 성을 모르는데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 장군이다) 정병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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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249) 일본서기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남가라·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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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7-03(<-277) 일본서기(720)
백제인이 내조하였다, 백제기에는, “아화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우리의 침미다례 및 현남·지침·곡나·동한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를 천조에 보내어 선왕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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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7-03(<-277) 일본서기(720)
앞서 391년에 倭가 한반도에 진출할 때 협력의 대가로 침미다례를 백제에게 주었다. 이후에도 倭가 백제에게 땅을 떼어주며 힘을 실어주는 기록은 405년과 477년 기록에 나온다. 그러나 이 기록처럼 자신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을 때는 주었던 땅을 도로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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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0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414)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安羅人) 수병 … 신라성 ...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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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0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414)
이즈음에는 변한지역이 임나(任那)로 불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나는 광개토왕릉비(414) 뿐만 아니라 송서(488), 남제서(537), 양서(636), 남사(659), 일본서기(720), 봉림사진경대사비(924), 삼국사기(1145) 등 광범위한 기록에 등장한다. 이에 비해 가야(加耶)는 삼국사기 이전의 기록에서 사용된 예를 아직 보지 못했다. 여기서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의 모형을 따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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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3(<-283) 일본서기(720)
궁월군이 백제로부터 와서 귀화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신은 우리나라 120현의 인부를 이끌고 귀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에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갈성습진언을 파견하여 궁월의 인부를 가라에서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습진언(襲津彦)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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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5(<285)-02~08 일본서기(720)
백제의 아화왕이 죽었다. 천황은 직지왕을 불러,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동한의 땅을 주어 보냈다. 동한은 감라성·고난성·이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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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5-08(<-285) 일본서기(720)
평군목토숙니·적호전숙니를 가라에 보냈다. 그리고 날랜 군사를 주면서 조를 내려, “습진언(襲津彦)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틀림없이 신라가 막고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를 공격하여 그 길을 열라”고 하였다. 이에 목토숙니 등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신라의 국경에 다다르자, 신라왕은 두려워하며 그 죄를 자복하였다. 그래서 궁월의 인부를 거느리고 습진언과 함께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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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5-08(<-285) 습진언의 고립
이 사건은 일본 열도에서 바다 건너 한반도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보여준다. 왜인이 상주하며 한반도 남부의 여러 나라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기구를 한반도에 설치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국사(任那國司)나 일본부(日本府)는 그러한 필요에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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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63 일본서기(720)
길비상도신 전협은 궁중에서 시종하고 있었는데 큰 소리로 친구들에게 치원에 대하여 말하기를, "천하의 미인들 중에서 내 아내만한 이가 없다. 빼어나게 아름다워 온갖 좋은 점을 갖추었고 환히 빛나고 온화하여 여러 가지 좋은 용모를 구비하였다. 화장도 필요 없으며 향수를 바를 것까지도 없다. 넓은 세상에서 견줄 만한 이가 드무니 이 시대에 홀로 빼어난 사람이다" (웅략)천황이 귀를 기울여 멀리서 듣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天皇 傾耳遙聽 而心悅焉).  곧 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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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63 전협과 제군의 반란
이 사건은 한반도 남부를 통제할 목적으로 설치한 기구가 오히려 왜(倭)에 대한 반란의 근거지로 이용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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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64-02 일본서기(720)
웅략천황이 즉위한 때부터 이 해에 이르기까지 신라국은 천황의 명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하며 공물을 보내지 않았는데 지금 8년째가 된다. 그리고는 중국(倭)의 마음을 몹시 두려워하여 고려와 우호를 맺었다. 이로 말미암아 고려왕이 날랜 병사 100명을 보내어 신라를 지켜 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 고려 군사 한 사람이 말미를 얻어 자기 나라에 돌아갈 때 신라 사람을 말몰이로 삼았는데 돌아보면서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게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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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64-02 신라 구원
이 기록에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당시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릉비에는 399년에 신라가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자 이듬해에 고려가 구원병을 보내 왜(倭)를 격퇴시켜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사건과는 고려와 왜(倭)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이다. 또 신라 내에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별로 어색한 것이 아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418년에 박제상이 미사흔을 구하러 왜(倭)에 갔을 때 고려군이 신라의 국경 바깥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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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75-0561 百濟의 남하
백제가 고려에 의해 한성에서 밀려나 차령 이남으로 내려오자 기존의 임나 소국들을 잠식해 들어가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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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77-03 일본서기(720)
천황이 백제가 고려에게 패배했음을 듣고 구마나리를 문주왕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원해 일으키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백제국은 비록 거의 망해 창하에 모여 근심하고 있으나, 실로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이다. 일본구기에서는 “구마나리를 말다왕에게 주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구마나리는 임나국의 하치호리(下哆呼唎)현의 별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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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77-03 일본서기(720)
구마나리는 오늘날의 공주다. 따라서 이 시기 왜(倭)의 영역은 명목상으로나마 금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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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87 일본서기(720)
이 해 기생반숙니가 임나를 점거하고 고려와 교통하였으며, 서쪽에서 장차 삼한의 왕노릇하려고 관부를 정비하고 스스로 신성이라고 칭하였다. 임나의 좌로·나기타갑배 등이 계책을 써서 백제의 적막이해를 이림에서 죽이고(爾林은 고려의 땅이다) 帶山城을 쌓아 동쪽 길을 막고 지켰으며,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군대를 굶주려 고생하도록 하였다. 백제의 왕이 크게 화가 나, 령군 고이해·내두 막고해 등을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대산성에 나아가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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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2 4현 분쟁
백제는 왜국에 임나 4현의 할양을 요청하였고 왜국은 이를 수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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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2 4현의 위치 비정
4현은 상치리, 하치리, 사타 그리고 모루다. 각각 대전, 논산, 익산 그리고 금산으로 설정해 보았다. 백제는 이 4현을 차지하기 전에 주로 웅진강과 왜국으로 이어지는 교역로와 황해안를 장악하고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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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2-12 일본 역사교과서
4현을 영산강 유역에 비정했다. 그러나 이곳은 사서에 나오는 4현의 이야기와 맞지 않는다. 이곳은 영산강 마한으로 보는 게 기록이나 고고학적 양상과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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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3 己汶 분쟁
백제는 513년에 가라가 점유하고 있던 기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왜는 백제의 손을 들어주었고 가라는 이에 반발하여 신라를 공격하고 일전을 준비하였다. 왜군이 가라를 침공하였으나 패하였고 백제의 장수는 신라로부터 나아가 가라를 공격하였다. 결국 기문은 백제가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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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6 己汶 분쟁 직후
백제는 새로 획득한 4현과 기문을 추가해서 영토를 22담로로 묶었다. 이때의 영토는 신라시대의 웅주와 전주를 합한 것과 같다. 영산강 마한은 신라시대의 무주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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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6 영산강 마한
양직공도(梁職貢圖 526-539)에는 백제가 521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자신을 소개했는데, 지방을 22담로로 나누어 통치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660년에 백제가 망할 때는 지방에 37군이 있었다. 한국통일 이후 신라는 옛 백제 지역을 웅주, 전주 그리고 무주로 나누고 각각 13개, 10개 그리고 15개의 군을 두었다. 모두 합하면 28개로 백제가 망할 때의 군과 숫자가 비슷하다. 웅주와 전주만 놓고 보면 23개의 군으로 양직공도에 나오는 담로와 숫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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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21 梁職貢圖
백제 주변에는 소국이 있는데 반파(叛波)·탁(卓)·다라(多羅)·전라(前羅)·사라(斯羅)·지미(止迷)·마련(麻連)·상기문(上己文)·하탐라(下枕羅) 등이 백제에 부용하였다. 신라 국왕은 스스로 사신을 보내 조빙할 수 없었다. 521년에 처음으로 백제 사신을 따라와서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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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27 근강모야신의 실패
527년 왜(倭)는 근강모야신으로 하여금 6만의 군사를 이끌고 임나에 나아가 남가라와 녹기탄을 다시 세워 임나에 합치게 하려 했다. 그러나 가는 도중 축자국조 반정이 방해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축자는 오늘날의 구주 북부에 있던 나라로 일본 열도의 관문과 같은 곳이었다.  529년 왜(倭)는 다시 모야신을 안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이 문제의 해결을 맡겼다. 모야신은 안라에 큰 당을 세워 백제와 신라의 사신을 불러 칙을 전했다. 임나왕 아리사등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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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27 근강모야신의 실패
여기서 임나에 대한 왜(倭)의 개입이 어떤 양상이었는지 대략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임나에는 '한기'라고 불리는 여러 왕들이 있었고 그들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영토를 보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아 임나의 여러 나라는 기본적으로 여느 왕국과 다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왜(倭)가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임나의 여러 나라와 주변의 왕국 사이에서 질서를 주도하였는데 이 점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임나와 왜(倭)는 바다로 갈라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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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29 多沙津 분쟁
가라에는 倭로 건너가기에 좋은 다사진이라는 나루터가 있었다. 백제가 이 진을 탐내자 倭가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반발한 가라는 신라와 가까워졌고 마침내 가라왕은 신라의 왕녀와 혼인까지 하였다. 신라는 이것을 기회로 가라의 일부 영토를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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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29 백제의 팽창
임나에 설치한 기구를 통해 이루어지던 倭의 간섭은 이후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모야신의 실패로 임나에 설치한 통치기구에 대해 회의가 들었으며 둘째, 백제 편향으로 인해 임나의 倭에 대한 거부감이 커져갔으며 셋째, 백제가 다사진을 확보하여 사신교환의 용이한 통로가 확보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백제는 倭를 이용하여 임나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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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38 ᑅ 나주 송제리 백제 고분
사비 천도 전후의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고분이 나주 송제리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으로 영산강 마한이 백제에 통합된 시기는 538년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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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38 ᑀ 남해 남치리 백제 고분
부여 일대에서 발견되는 백제 사비기 귀족 무덤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춘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백제가 529년에 다사진을 확보한 것과 연결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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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41-04 일본서기(720)
안라의 차한기 이탄해, 대불손, 구취유리 등과 가라의 상수위 고전해, 졸마의 한기, 산반해의 한기의 아들, 다라의 하한기 이타, 사이기의 한기의 아들, 자타의 한기 등이 임나 일본부의 길비신과 더불어 백제에 가서 함께 조칙을 들었다. 백제의 성왕이 임나의 한기들에게, “지금 과인이 그대들과 더불어 힘을 다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천황에게 의지하면 임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기뻐하며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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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41-07 일본서기(720)
백제는 안라의 일본부가 신라와 더불어 계책을 공모한다는 말을 듣고 전부 나솔 비리막고, 나솔 선문, 중부 나솔 목리미순, 기신 나솔 미마사 등을 보내 안라에 가서 신라에 온 임나의 집사를 불러 임나를 세울 것을 도모하게 하였다. 따로 안라 일본부의 하내직이 신라와 공모한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 그리고 왕은 임나에게, “경(卿) 등이 번번이 감언을 믿고 경솔하게 거짓말에 속아서 임나국을 멸하고 천황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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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45-09 일본서기(720)
백제가 중부 호덕 보제 등을 임나에 사신으로 보내어 오(吳, 중국 남조를 가리킨다)나라의 재화를 일본부의 신하와 여러 한기에게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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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48 馬津城 전투
백제가 중부간솔 약엽례 등을 보내어 "마진성(馬津城)의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가 ‘안라국과 일본부가 불러 들여 벌줄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사정으로 미루어 상황을 보더라도 진실로 서로 비슷합니다."라고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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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51 백제와 신라의 고려 침공
백제 성명왕이 몸소 군사 및 신라와 임나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여 한성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평양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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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52-05 일본서기(720)
백제, 가라 그리고 안라가 중부 덕솔 목례금돈, 하내부 아사비다 등을 보내어 “고려가 신라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도모합니다. 그러므로 삼가 구원병을 청해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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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52_ 일본서기(720)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과 니미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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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53-07 삼국사기(1145)
(신라)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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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53-10 일본서기(720)
백제의 왕자 여창이 나라 안의 모든 군대를 내어 고려국을 향했는데 백합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백제는 고려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머리를 창끝에 찔러 들고 돌아와 군사들에게 보이니 고려군 장수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였다. 이 때 백제군의 환호 소리에 천지가 찢어질 듯하였다. 다시 그 부장이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 고려왕을 동성산(東聖山) 위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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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54 관산성 전투
554년 백제 성왕은 고려와 신라가 힘을 합쳐 백제와 임나를 멸망시키려 한다며 거듭 왜(倭)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다. 마침내 왜(倭)의 지원군이 오자 왕자 여창은 가라의 지원군까지 합쳐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위기에 처한 신라는 한강 하류 지역에 있던 김무력의 군대까지 끌어와 이에 대응하였다. 이때 성왕이 여창을 격려하러 가다가 신라군에 포위되어 살해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전세가 역전되어 백제 연합군은 크게 패하고 여창은 파병온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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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62 신라, 임나 병합
562년 신라는 임나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에 격분한 왜(倭)는 대장군 기남마려숙녜와 부장군 하변신 경부를 보내어 각각 치리와 거증산으로부터 출동하여 신라를 치도록 하였다. 신라도 군사를 모아 대응하였으나 패하고 만다. 이에 기남마려숙녜는 백제로 돌아갔으나 하변신 경부는 이곳 저곳을 다니며 성들을 함락시키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러다 한때 실수를 하는 바람에 신라군에 패하고 따라간 부인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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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62-01 일본서기(720)
신라가 임나관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어떤 책에서는 560년에 임나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임나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찬국(乞湌國), 염례국(稔禮國) 등 모두 열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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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71-03 일본서기(720)
반전이자랑군을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임나를 멸망시킨 사유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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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71-04 일본서기(720)
천황이 병환으로 자리에 누웠다. 황태자는 밖에 나가 없었으므로 역마로 불러들였다. 누워 있는 내전에 불려 들어가니, 그의 손을 잡고 명하기를 “내 병이 심하니 이후의 일을 너에게 맡긴다. 너는 반드시 신라를 쳐서 임나를 세워 봉하라. 다시 서로 화합하여 옛날과 같이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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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학적 양상
구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독널무덤이 한국에서는 영산강 유역에서 유독 발달하였고 일본 전역에서 많이 만들어진 전방후원분이 한국에서는 영산강 유역에서만 발견된다. 무덤방 벽을 붉게 칠한다든가 돌방 안에 돌널을 넣는 것 등은 일본에서 많이 발견되는 무덤양식인데 이런 무덤까지 포함하면 왜계 무덤의 분포는 기록을 통해 추정한 임나의 영역과 비슷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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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적 양상
• 가라계    독널무덤   • 왜계   • 전방후원분    한반도 출토 왜계 갑주(倭係 甲冑)의 분포와 의미  

기타
• 용어별   • 이조 사서    고등학교 교과서    고등학교 교과서   • 임나 지도 비교    임나경영설 설문  

위치 비정
 0391-0474 倭의 韓國개입   • 0366 탁순(卓淳)   • 0391 7국   • 0391 고해진 침미다례   • 0391 4읍   • 0397 현남·지침·곡나·동한   • 0512 4현   • 0529 4촌   • 0541 하한(下韓)   • 0562 임나10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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