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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지악 아래의 땅이 불에 타다 ( 609년 01월 )
31년(609) 봄 정월에 모지악(毛只嶽)註 001 아래의 땅이 불에 탔는데, 너비가 4보(步)이고 길이가 8보이며, 깊이가 5척이었다. 10월 15일에 이르러서야 불이 꺼졌다.註 002
註) 001
모지악(毛只嶽):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대성군조에 동기정(東畿停)은 본래 모지정(毛只停)이었다고 전한다. 종래에 동기정은 신라 왕경, 즉 오늘날 경주의 동남쪽에서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를 거쳐 울산광역시 북구에 이르는 도로 근처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견해(전덕재, 63~65쪽), 명활산성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견해(金侖禹), 경주시 동방동 일대에 위치하였다고 이해하는 견해(정구복 외, 213쪽)가 제기되었고, 외동읍 모화리에 있었던 모화관문(毛火關門) 근처에 위치하였다고 주장한 견해(이문기)도 제기되었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2 김유신조에 김유신의 무덤이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 북쪽에 위치하였다고 전하는데, 현재 김유신묘는 경주시 충효동 산7-10번지에 있다. 모지악을 모지정과 연관시킨다면, 경주의 동쪽이나 동남쪽에 위치하였다고 볼 수 있고, 모지사와 연관시킨다면, 모지악은 김유신묘 근처에 위치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金侖禹, 1987, 「新羅時代 大城郡에 관한 考察: 新羅王都 周圍의 所在郡縣에 대한 一考察」, 『新羅文化』 3·4合
이문기, 2009, 「新羅 景德王代에 再編된 王都 防禦 軍事組織과 城郭의 活用」, 『新羅文化』 34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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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2
모지악(毛只嶽) 아래의 땅이 … 불이 꺼졌다: 모지악 아래의 땅이 정월부터 10월 15일까지 불에 탔다는 것은 아마도 땅속의 천연가스가 분출하였는데, 신라인들이 그것을 불에 탄 것으로 이해하였다고 판단된다.바로가기
주제분류
  • 정치>신이>자연현상>땅·산·돌·물·바다
  • 경제>경제정책>재해>재해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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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2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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