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통치를 일본에 넘기기로 한 것은 이씨왕조의 조정에서 결정된 것이고 이완용은 그 실무적인 협상을 했을 뿐이다. 왕국의 주인은 왕이니 이는 당연한 것이다. 이완용은 이후 고종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게 되는데 이것도 그가 고종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한일합방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이씨왕조에게 물어야 한다.
일한병합조약문을 읽어보면 그 주요 내용이 이씨왕가의 신분보장과 금전지급에 관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것 또한 이씨조선이 왕국이었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이해가 된다. 왕국의 주인인 왕이 자신의 통치권을 아무런 댓가도 받지 않고 넘길 리는 없는 것이다. 한일합방을 통하여 왕과 몇몇 왕족은 일본 황족으로 편입되고 나머지 주요 왕족과 대신들도 조선귀족으로 편입되어 신분을 보장받고 은사금도 받았다.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표현을 흔히 쓰는데 일본으로부터 가장 큰 댓가를 받은 사람이 누구이고 왕국의 주인이 누구였던가를 생각해 본다면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 누구인지도 분명해 진다.
한일합방은 이조의 요청을 일본이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대다수 한국의 백성들은 한일합방을 반대했다. 한일합방 직전의 매천야록 기록을 보면 전국 각지에서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의병활동이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대다수 한국의 백성들은 한일합방을 반대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왕국의 주인은 왕이며 백성은 왕국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다. 한일합방의 체결과정을 살펴보아도 백성들의 뜻을 반영하는 과정이 전혀 없었고 체결된 조약문의 내용을 읽어보아도 백성들의 안위는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의 최대 관심사는 종묘사직이지 백성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고종과 순종은 나라를 팔아먹은 나쁜 사람들일까?
그렇지 않다. 한일합방에 대한 책임은 정치적 책임일 뿐이지 '좋다'와 '나쁘다'로 구분되는 도덕적 책임이 아니다. 한일합방에 대해 책임논란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일본통치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만약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하지 않고 일본통치가 지속되어 한국인이 일본인으로 완전히 동화가 되었다면 이씨조선의 순종은 신라 경순왕과 비슷한 평가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또 한반도를 둘러싼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고종과 순종이 아니라 그 누가 왕이었다 하더라도 이씨조선이 독립을 유지하기는 힘들었다고 보는 것이 객관적이다. 고종 대신에 당나라의 지배야욕을 물리친 신라 문무왕을 넣고, 순종 대신에 원나라의 간섭을 물리친 왕씨고려의 공민왕을 넣고, 이완용 대신에 목숨을 걸고 왕씨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킨 정몽주를 넣으면 한일합방이 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한일합방은 몇몇 사람들의 특수한 성향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당시의 국제적인 역학관계에서 나온 필연적인 결과라고 봐야 한다. 굳이 조상탓을 하자면, 그러한 국제적인 역학관계가 도래할 것을 미리 예측하고 일본처럼 개항과 근대화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하지 못했던 이씨조선의 지도자들을 탓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