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식민사관과 민족사관
by Silla on 2020-02-09
일본의 역사 정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마다 정치적 필요에 의해 단계적으로 심화되어 왔다. 이 역사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는 한국통일, 원의 침공, 이조 침공, 명치유신 그리고 한일합방을 들 수 있다.

676년에 완료된 한국통일은 백제를 멸망시켜 일본과 한국 사이의 오랜 연결고리를 끊어 버렸고 일본으로 하여금 당나라와 신라의 침공을 걱정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 대응하여 일본은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편찬하였는데, 여기에는 수나라의 중국통일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일본의 독자적 천하관도 반영되었다. 이 두 사서에 나타난 역사관을 기기사관이라 한다. 그 내용은 천황가의 권위를 높이고 신라를 비하하며 임나에 대한 연고권과 백제와의 친밀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1274년과 1281년에 있었던 원나라의 일본 침공은 우연하게도 태풍으로 모두 좌절되었다. 이것는 일본인들로 하여금 선민사상을 가지게 하였다. 이 침공에는 왕고의 부추김이 있었고 왕고의 병력과 물자도 동원되었는데, 이것은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를 병합한 사실과 함께 풍신수길의 이조 침공을 정당화하는 재료가 되었다. 1592년에 있었던 풍신수길의 이조 침공은 명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1868년에는 천황의 실권을 회복시키는 명치유신이 있었다. 여기에 맞춰 일본은 전 인민을 황국신도화하는 작업을 하고 근대화와 부국강병에 박차를 가하였다. 역량이 커진 일본은 마침내 1910년에 이조를 합병하였다. 이 합병은 반복되어 온 침공의 연장선 상에 있었다. 일본은 이 한일합방을 유지하기 위해 식민사관을 만들어 냈다. 식민사관은 한국사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성격들 중에서 일본의 한국 통치를 합리화하기에 유리한 면만 부각시킨 역사관으로 한일동조론, 정체성론, 타율성론, 당파성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일동조론은 한민족과 일본민족이 조상이 같다는 주장이다. 

전 세계의 모든 민족은 조상이 같다. 한일동조론에서 말하는 같은 조상이란 주변의 민족들과 차별될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근래에 민족분화가 일어났다는 뜻이다. 이 주장 자체로는 크게 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민족과 일본민족의 경계가 뚜렷하게 구분된 것은 한국통일 이후이기 때문이다. 한일동조론은 한민족과 일본민족이 다시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내선일체로 나아갔다.

정체성론은 한반도의 역사가 발전하지 못하고 계속 제자리에 머물러 왔다는 주장이다.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더 발전한 일본이 이끌어주면 좋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회유하는 논리로 이용되었다.

타율성론은 한민족이 역사를 주체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중국, 몽골, 만주, 일본 등 외세의 개입에 의해 타율적으로 변화해 왔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 또한 일본의 개입을 합리화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타율성론은 반도사관과 사대주의론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당파성론은 한민족이 개인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파벌을 만들어 싸우는데 몰두하는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사회가 발전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사화와 당쟁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이것은 한민족으로 하여금 스스로에 대해 자책감을 가지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 통치에 대한 저항을 누그러뜨리는 데 이용되었다.

이러한 식민사관의 오류는 성급한 일반화에 있다.

한민족사를 되돌아보면 식민사관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이 어느 정도 들어맞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민족사의 한쪽 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일 뿐 한민족사 전체를 다 그렇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한민족사가 서양의 역동적인 역사와 비교해서 정체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라에서 왕고로의 체제교체나 왕고에서 이조로의 체제교체를 생각해 볼 때 한민족사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역사를 발전시켜온 측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당파성론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한민족만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인류사회의 보편적인 속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집단 사이에 대립과 분쟁이 없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식민사관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은 현대에 와서 깨끗이 부정되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이 초기의 여러 가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5.16 과 6.29를 거치며 주체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하여 지금은 세계 무대에서 선도적인 역활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은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 천황제가 남아있는 일본을 오히려 앞서고 있다.

식민사관은 사실관계를 말하는 존재와 마땅히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로 구성되어 있다.

한일동조론을 예로 들면, 한민족과 일본 민족이 조상이 같다는 것은 존재이고 두 민족이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것은 당위다. 조상이 같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로 합쳐야 하는 것은 아니니, 존재는 반드시 당위로 이어진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당위 부분만을 식민사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민족사관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한민족의 패기와 한국사의 위대함을 강조한 역사관이다. 박은식과 신채호 등에 의해 발전되었다. 박은식은 '나라가 형(形)이라면 역사는 혼(魂)'이라고 하여 민족사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신채호는 중세 이후 사대주의에 빠져들었지만 한민족사는 고대국가 때까지만 해도 민족적 패기가 있었다고 보았으며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조선역사 1천년 내 제1대 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식민사관은 식민통치를 보다 원활하게 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민족사관은 그러한 식민사관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역시 정치적인 역사관이다. 따라서 두 역사관 모두 정치적인 필요성이 사라지면 그 설득력 또한 힘을 잃게 되는 시대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