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날 주몽이 부여에 있었을 때, 부인이
○ 지난 날 주몽이 부여에 있었을 때, 부인이 잉태하였었는데, 주몽이 도망한 뒤에 한 아들을 낳으니, 字를 처음에는 閭諧라 하였다. 성장하여 주몽이 國王이 되었음을 알고는 곧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오니 이름을 閭達註 015이라 하고, 나라 일을 그에게 맡겼다.註 016
주몽이 죽자 여달이 왕이 되었다. 여달이 죽자 아들 如栗註 017이 왕이 되었고, 여율이 죽자 아들 莫來註 018가 왕이 되어 부여를 정벌하니, 부여는 크게 패하여 마침내 고구려에 통합·복속되었다.註 019
莫來는 그 世系上으로 보아 閔中王 또는 慕本王에 비정되기도 한다. 本傳에서 如粟에 대응하는 大武神王의 다음 代는 閔中王이다. 그러나『三國史記』의 경우에는 그를 大武神王의 弟로 기록하고 있으며, 『三國遺事』 「王曆」에서는 大武神王의 子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의 慕本王은『三國史記』와『三國遺事』모두 大武神王의 子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大武神王의 다음 代이며 그 子가 되는 경우는 閔中王이 유력하나 또한 선뜻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한편 一說에는 莫來와 慕本이 그 字形이 유사함을 들어 同一人으로 보는 예도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4 「高句麗本紀」2 閔中王·慕本王條.
『三國遺事』卷1 「王曆」1.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4 「高句麗本紀」2 閔中王·慕本王條.
『三國遺事』卷1 「王曆」1.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막래의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이어 후손 宮註 020에 이르렀다.註 021 궁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보았으므로 國人들이 미워하였다. 성장함에 흉악하고 사나워, 나라가 그로 말미암아 쇠잔해지고 파멸하게 되었다.
궁의 증손 位宮註 022이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보니, 사람들은 그가 증조부 宮을 닮았다하여 이름을 位宮이라 지었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位’라 한다. 위궁도 용감하고 힘이 세며, 말과 활에 익숙하였다.註 023
高句驪 제11代 東川王을 가리킨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44)
位宮
位宮은 高句麗 제11대 東川王이다. 그는『三國史記』에는 ‘諱憂位居 小名郊彘’라 하여 憂位居라고도 불리웠다. 『三國史記』 東川王 卽位條에 의하면 東川王의 母는 酒桶村의 女人이었다. 山上王과 그 妃 于氏 사이에 아이가 없었는데, 山上王 12年(208) 하늘에 제사지낼 때 쓰기 위해 기르던 돼지가 달아나 酒桶村으로 들어간 것을 한 女人이 쉽게 잡아 돌려주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王이 관계해 아들을 낳고 그 여인을 小后로 삼았다. 東川王의 兒名이 郊彘인 것도 그로부터 비롯한다.
東川王의 출생과 돼지에 얽힌 說話的 이야기는 古代 이래로 돼지는 福을 가져다주고 幸運을 인도해주는 瑞獸라고 믿어왔던 우리 先人들의 관념을 반영하는 바이다. 位宮은 山上王 17년에 太子로 봉해졌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44)
位宮
位宮은 高句麗 제11대 東川王이다. 그는『三國史記』에는 ‘諱憂位居 小名郊彘’라 하여 憂位居라고도 불리웠다. 『三國史記』 東川王 卽位條에 의하면 東川王의 母는 酒桶村의 女人이었다. 山上王과 그 妃 于氏 사이에 아이가 없었는데, 山上王 12年(208) 하늘에 제사지낼 때 쓰기 위해 기르던 돼지가 달아나 酒桶村으로 들어간 것을 한 女人이 쉽게 잡아 돌려주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王이 관계해 아들을 낳고 그 여인을 小后로 삼았다. 東川王의 兒名이 郊彘인 것도 그로부터 비롯한다.
東川王의 출생과 돼지에 얽힌 說話的 이야기는 古代 이래로 돼지는 福을 가져다주고 幸運을 인도해주는 瑞獸라고 믿어왔던 우리 先人들의 관념을 반영하는 바이다. 位宮은 山上王 17년에 太子로 봉해졌다.
이 부분은『三國志』高句麗傳에서 位宮에 대한 설명으로 쓰여진 내용을 宮과 位宮의 설명으로 바꾸어 전재한 것이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44)
位宮
位宮은 高句麗 제11대 東川王이다. 그는『三國史記』에는 ‘諱憂位居 小名郊彘’라 하여 憂位居라고도 불리웠다. 『三國史記』 東川王 卽位條에 의하면 東川王의 母는 酒桶村의 女人이었다. 山上王과 그 妃 于氏 사이에 아이가 없었는데, 山上王 12年(208) 하늘에 제사지낼 때 쓰기 위해 기르던 돼지가 달아나 酒桶村으로 들어간 것을 한 女人이 쉽게 잡아 돌려주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王이 관계해 아들을 낳고 그 여인을 小后로 삼았다. 東川王의 兒名이 郊彘인 것도 그로부터 비롯한다.
東川王의 출생과 돼지에 얽힌 說話的 이야기는 古代 이래로 돼지는 福을 가져다주고 幸運을 인도해주는 瑞獸라고 믿어왔던 우리 先人들의 관념을 반영하는 바이다. 位宮은 山上王 17년에 太子로 봉해졌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44)
位宮
位宮은 高句麗 제11대 東川王이다. 그는『三國史記』에는 ‘諱憂位居 小名郊彘’라 하여 憂位居라고도 불리웠다. 『三國史記』 東川王 卽位條에 의하면 東川王의 母는 酒桶村의 女人이었다. 山上王과 그 妃 于氏 사이에 아이가 없었는데, 山上王 12年(208) 하늘에 제사지낼 때 쓰기 위해 기르던 돼지가 달아나 酒桶村으로 들어간 것을 한 女人이 쉽게 잡아 돌려주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王이 관계해 아들을 낳고 그 여인을 小后로 삼았다. 東川王의 兒名이 郊彘인 것도 그로부터 비롯한다.
東川王의 출생과 돼지에 얽힌 說話的 이야기는 古代 이래로 돼지는 福을 가져다주고 幸運을 인도해주는 瑞獸라고 믿어왔던 우리 先人들의 관념을 반영하는 바이다. 位宮은 山上王 17년에 太子로 봉해졌다.
註) 015
註) 016
註) 017
註) 018
莫來는 그 世系上으로 보아 閔中王 또는 慕本王에 비정되기도 한다. 本傳에서 如粟에 대응하는 大武神王의 다음 代는 閔中王이다. 그러나『三國史記』의 경우에는 그를 大武神王의 弟로 기록하고 있으며, 『三國遺事』 「王曆」에서는 大武神王의 子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의 慕本王은『三國史記』와『三國遺事』모두 大武神王의 子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大武神王의 다음 代이며 그 子가 되는 경우는 閔中王이 유력하나 또한 선뜻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한편 一說에는 莫來와 慕本이 그 字形이 유사함을 들어 同一人으로 보는 예도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4 「高句麗本紀」2 閔中王·慕本王條.
『三國遺事』卷1 「王曆」1.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4 「高句麗本紀」2 閔中王·慕本王條.
『三國遺事』卷1 「王曆」1.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註) 019
註) 020
註) 021
註) 022
高句驪 제11代 東川王을 가리킨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44)
位宮
位宮은 高句麗 제11대 東川王이다. 그는『三國史記』에는 ‘諱憂位居 小名郊彘’라 하여 憂位居라고도 불리웠다. 『三國史記』 東川王 卽位條에 의하면 東川王의 母는 酒桶村의 女人이었다. 山上王과 그 妃 于氏 사이에 아이가 없었는데, 山上王 12年(208) 하늘에 제사지낼 때 쓰기 위해 기르던 돼지가 달아나 酒桶村으로 들어간 것을 한 女人이 쉽게 잡아 돌려주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王이 관계해 아들을 낳고 그 여인을 小后로 삼았다. 東川王의 兒名이 郊彘인 것도 그로부터 비롯한다.
東川王의 출생과 돼지에 얽힌 說話的 이야기는 古代 이래로 돼지는 福을 가져다주고 幸運을 인도해주는 瑞獸라고 믿어왔던 우리 先人들의 관념을 반영하는 바이다. 位宮은 山上王 17년에 太子로 봉해졌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44)
位宮
位宮은 高句麗 제11대 東川王이다. 그는『三國史記』에는 ‘諱憂位居 小名郊彘’라 하여 憂位居라고도 불리웠다. 『三國史記』 東川王 卽位條에 의하면 東川王의 母는 酒桶村의 女人이었다. 山上王과 그 妃 于氏 사이에 아이가 없었는데, 山上王 12年(208) 하늘에 제사지낼 때 쓰기 위해 기르던 돼지가 달아나 酒桶村으로 들어간 것을 한 女人이 쉽게 잡아 돌려주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王이 관계해 아들을 낳고 그 여인을 小后로 삼았다. 東川王의 兒名이 郊彘인 것도 그로부터 비롯한다.
東川王의 출생과 돼지에 얽힌 說話的 이야기는 古代 이래로 돼지는 福을 가져다주고 幸運을 인도해주는 瑞獸라고 믿어왔던 우리 先人들의 관념을 반영하는 바이다. 位宮은 山上王 17년에 太子로 봉해졌다.
註) 023
이 부분은『三國志』高句麗傳에서 位宮에 대한 설명으로 쓰여진 내용을 宮과 位宮의 설명으로 바꾸어 전재한 것이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44)
位宮
位宮은 高句麗 제11대 東川王이다. 그는『三國史記』에는 ‘諱憂位居 小名郊彘’라 하여 憂位居라고도 불리웠다. 『三國史記』 東川王 卽位條에 의하면 東川王의 母는 酒桶村의 女人이었다. 山上王과 그 妃 于氏 사이에 아이가 없었는데, 山上王 12年(208) 하늘에 제사지낼 때 쓰기 위해 기르던 돼지가 달아나 酒桶村으로 들어간 것을 한 女人이 쉽게 잡아 돌려주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王이 관계해 아들을 낳고 그 여인을 小后로 삼았다. 東川王의 兒名이 郊彘인 것도 그로부터 비롯한다.
東川王의 출생과 돼지에 얽힌 說話的 이야기는 古代 이래로 돼지는 福을 가져다주고 幸運을 인도해주는 瑞獸라고 믿어왔던 우리 先人들의 관념을 반영하는 바이다. 位宮은 山上王 17년에 太子로 봉해졌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44)
位宮
位宮은 高句麗 제11대 東川王이다. 그는『三國史記』에는 ‘諱憂位居 小名郊彘’라 하여 憂位居라고도 불리웠다. 『三國史記』 東川王 卽位條에 의하면 東川王의 母는 酒桶村의 女人이었다. 山上王과 그 妃 于氏 사이에 아이가 없었는데, 山上王 12年(208) 하늘에 제사지낼 때 쓰기 위해 기르던 돼지가 달아나 酒桶村으로 들어간 것을 한 女人이 쉽게 잡아 돌려주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王이 관계해 아들을 낳고 그 여인을 小后로 삼았다. 東川王의 兒名이 郊彘인 것도 그로부터 비롯한다.
東川王의 출생과 돼지에 얽힌 說話的 이야기는 古代 이래로 돼지는 福을 가져다주고 幸運을 인도해주는 瑞獸라고 믿어왔던 우리 先人들의 관념을 반영하는 바이다. 位宮은 山上王 17년에 太子로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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