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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날 주몽이 부여에 있었을 때, 부인이
○ 지난 날 주몽이 부여에 있었을 때, 부인이 잉태하였었는데, 주몽이 도망한 뒤에 한 아들을 낳으니, 字를 처음에는 閭諧라 하였다. 성장하여 주몽이 國王이 되었음을 알고는 곧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오니 이름을 閭達註 015이라 하고, 나라 일을 그에게 맡겼다.註 016
주몽이 죽자 여달이 왕이 되었다. 여달이 죽자 아들 如栗註 017이 왕이 되었고, 여율이 죽자 아들 莫來註 018가 왕이 되어 부여를 정벌하니, 부여는 크게 패하여 마침내 고구려에 통합·복속되었다.註 019
막래의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이어 후손 宮註 020에 이르렀다.註 021 궁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보았으므로 國人들이 미워하였다. 성장함에 흉악하고 사나워, 나라가 그로 말미암아 쇠잔해지고 파멸하게 되었다.
궁의 증손 位宮註 022이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보니, 사람들은 그가 증조부 宮을 닮았다하여 이름을 位宮이라 지었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位’라 한다. 위궁도 용감하고 힘이 세며, 말과 활에 익숙하였다.註 023
註) 015
여기서 閭達은 朱蒙의 子라고 하였음이나 그가 夫餘로부터 南來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제2대 琉璃王을 일컫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三國史記』 「高句麗本紀」에서는 琉璃王의 諱를 類利 또는 孺留라고 한다고 전하고, 『三國遺事』 「王曆」에서는 累利라고 한다고 하며, 여타 문헌에서도 마찬가지로 閭達은 물론 本書에서 그의 始名으로 나오는 閭諧와도 전혀 음이 다르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3 「高句麗本紀」1 琉璃王條.
『三國遺事』卷1 「王曆」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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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6
이 기사에 대응하는 기사는『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및 「東明王詩篇」에 나오며, 특히『舊三國史』의 내용을 전재하였다고 하는『東明王詩篇』의 註記의 내용으로 볼 때 당초에는 그 또한 說話的인 형태도 존재하여 왔다고 생각된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3 「高句麗本紀」1 琉璃王條.
『東國李相國集』卷3 「古律詩」東明王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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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7
여기서 如粟은 閭達의 子라고 하였음으로 보아 제3대 大武神王에 대응된다. 그러나『三國史記』 「高句麗本紀」에서는 大武神王의 諱를 無恤이라 하여 如粟에 해당하는 王名이 없다.『三國遺事』 「王曆」에서는 大武神王의 諱가 無恤 또는 味留라고 하여 그 음이 전혀 다르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4 「高句麗本紀」2 大武神王條.
『三國遺事』卷1 「王曆」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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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8
莫來는 그 世系上으로 보아 閔中王 또는 慕本王에 비정되기도 한다. 本傳에서 如粟에 대응하는 大武神王의 다음 代는 閔中王이다. 그러나『三國史記』의 경우에는 그를 大武神王의 弟로 기록하고 있으며, 『三國遺事』 「王曆」에서는 大武神王의 子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의 慕本王은『三國史記』와『三國遺事』모두 大武神王의 子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大武神王의 다음 代이며 그 子가 되는 경우는 閔中王이 유력하나 또한 선뜻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한편 一說에는 莫來와 慕本이 그 字形이 유사함을 들어 同一人으로 보는 예도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4 「高句麗本紀」2 閔中王·慕本王條.
『三國遺事』卷1 「王曆」1.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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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9
『三國史記』 「高句麗本紀」大武神王條에 의하면 莫來에 해당할 수 있는 閔中王 또는 慕本王代에는 夫餘征伐의 사실이 나타나지 않으며, 如粟에 해당하는 大武神王 五年에 대대적인 夫餘征伐의 기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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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0
高句驪 제6代 太祖王을 가리킨다.
<참조>
『後漢書』高句驪傳 註 17)

宮은 高句麗의 제6대 太祖大王이다.『三國史記』 「高句麗本紀」에서는 ‘大祖大王或云國祖王 諱宮 小名於漱 琉璃王子古鄒加再思之子也 母大后夫餘人也’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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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1
『三國史記』 「高句麗本紀」太祖王條에 전하는 바 그 世系에 따르면 宮 즉, 太祖大王은 古鄒加 再思의 아들로 莫來에 대응되는 閔中王과는 三寸間이며 慕本王과는 四寸間으로 나타나고 있어 本 기사와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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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2
高句驪 제11代 東川王을 가리킨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44)
位宮
位宮은 高句麗 제11대 東川王이다. 그는『三國史記』에는 ‘諱憂位居 小名郊彘’라 하여 憂位居라고도 불리웠다. 『三國史記』 東川王 卽位條에 의하면 東川王의 母는 酒桶村의 女人이었다. 山上王과 그 妃 于氏 사이에 아이가 없었는데, 山上王 12年(208) 하늘에 제사지낼 때 쓰기 위해 기르던 돼지가 달아나 酒桶村으로 들어간 것을 한 女人이 쉽게 잡아 돌려주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王이 관계해 아들을 낳고 그 여인을 小后로 삼았다. 東川王의 兒名이 郊彘인 것도 그로부터 비롯한다.
東川王의 출생과 돼지에 얽힌 說話的 이야기는 古代 이래로 돼지는 福을 가져다주고 幸運을 인도해주는 瑞獸라고 믿어왔던 우리 先人들의 관념을 반영하는 바이다. 位宮은 山上王 17년에 太子로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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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3
이 부분은『三國志』高句麗傳에서 位宮에 대한 설명으로 쓰여진 내용을 宮과 位宮의 설명으로 바꾸어 전재한 것이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44)
位宮
位宮은 高句麗 제11대 東川王이다. 그는『三國史記』에는 ‘諱憂位居 小名郊彘’라 하여 憂位居라고도 불리웠다. 『三國史記』 東川王 卽位條에 의하면 東川王의 母는 酒桶村의 女人이었다. 山上王과 그 妃 于氏 사이에 아이가 없었는데, 山上王 12年(208) 하늘에 제사지낼 때 쓰기 위해 기르던 돼지가 달아나 酒桶村으로 들어간 것을 한 女人이 쉽게 잡아 돌려주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王이 관계해 아들을 낳고 그 여인을 小后로 삼았다. 東川王의 兒名이 郊彘인 것도 그로부터 비롯한다.
東川王의 출생과 돼지에 얽힌 說話的 이야기는 古代 이래로 돼지는 福을 가져다주고 幸運을 인도해주는 瑞獸라고 믿어왔던 우리 先人들의 관념을 반영하는 바이다. 位宮은 山上王 17년에 太子로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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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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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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