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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그 나라의 王이 자주 학생들을 京師의
○ 처음에 그 나라의 王이 자주 학생들을 京師의 太學註 076에 보내어 古今의 제도를 배우고 익혀 가더니, 이때에 이르러 드디어 海東盛國이 되었다.
국토는 5京·15府·62州이다.
肅愼의 옛 땅註 077으로 上京을 삼으니, [府名은] 龍泉府이며,註 078 龍[州]註 079·湖[州]·渤[州]註 080의 3州를 통치한다.
그 남부로 中京을 삼으니, [府名은] 顯德府이며,註 081 盧[州]註 082·顯[州]註 083·鐵[州]註 084·湯[州]註 085·榮[州]註 086·興[州]註 087의 6州를 통치한다.
𧴖貃의 옛 땅註 088으로 東京을 삼으니,[府名은] 龍原府로,註 089 柵城府라고도 한다. 慶[州]註 090·鹽[州]註 091·穆[州]註 092·賀[州]註 093의 4州를 통치한다.
沃沮의 옛 땅註 094으로 南京을 삼으니, [府名은] 南海府이며註 095 沃[州]註 096·晴[州]註 097·椒[州]註 098의 3州를 통치한다.
高[句]麗의 옛 땅註 099으로 西京을 삼으니, [府名은] 鴨淥府이며,註 100 神[州]·桓[州]註 101·豊[州]註 102·正[州]註 103의 4州를 통치한다.
長嶺府註 104는 瑕[州]註 105·河[州]註 106의 2州를 통치한다.
扶餘의 옛 땅註 107에 둔 扶餘府에는 늘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 契丹을 방어하는데, 扶[州]註 108·仙[州]註 109의 2州를 통치한다.
鄚頡府註 110는 鄚[州]註 111·高[州]註 112의 2州를 통치한다.
挹婁의 옛 땅에 둔 定理府註 113는 定[州]註 114·潘[州]註 115의 2州를 통치한다.
安邊府註 116는 安[州]·瓊[州]의 2州를 통치한다.
率賓의 옛 땅註 117에 둔 率賓府註 118 는 華[州]註 119·益[州]·建[州]註 120의 3州를 통치한다.
拂涅의 옛 땅註 121에 둔 東平府註 122는 伊[州]·蒙[州]·沱[州]·黑[州]·比[州] 5州를 통치한다.
鐵利의 옛 땅註 123에 둔 鐵利府註 124는 廣[州]·汾[州]·蒲[州]·海[州]·義[州]·歸[州]의 6州를 통치한다.
越喜의 옛 땅註 125에 둔 懷遠府註 126는 達[州]·越[州]·懷[州]·紀[州]·富[州]·美[州]·福[州]·邪[州]·芝[州]의 9州를 통치한다
安遠府註 127는 寧[州]·郿[州]·慕[州]·常[州]의 4州를 통치한다.
또 郢[州]註 128·銅[州]註 129·涑[州]註 130의 3州를 獨奏州註 131로 삼았다. 涑州는 그 곳이 涑沫江과 가까운데, [涑沫江은] 이른바 粟末水註 132인 듯하다.
龍原의 동남쪽 연해는 日本道이고,註 133 남해는 新羅道이다.註 134 鴨湪은 朝貢道이고,註 135 長嶺은 營州道이며,註 136 扶餘는 契丹道이다.註 137
註) 076
最高學府인 國子監을 말한다. 隋 以前에는 太學이라 칭하다가 隋 以後 淸代까지는 國子監이라 칭하였다. 國子監生을 太學生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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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77
지금의 滿洲 東北部에 居住하던 部族의 名稱이다.
『竹書紀年』에는 舜임금 25年條에 ‘息愼氏來條 貢弓矢’라 하고, 또 『史記』 「五帝本紀」舜임금의 條에 그 經略을 설명하여 ‘南撫交阯·北發·西戎·析枝 …… 北山·戎·發·息愼’이라고 하는 바 鄭玄이 ‘息’은 ‘肅’과 동일하며, ‘息愼’ 곧 ‘肅愼’이라고 하였던 것이 司馬遷의 『史記索隱』에 적혀 있다.
이에 의하면 肅愼이 이미 舜代에 漢民族에게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되는데, 이는 舜의 存在가 神話的인 것이기에 믿을 수 없다.『大戴禮少間篇』에 보이는 肅愼來服의 記事도 이와 다를 바 없다.
한편 『逸周書』 「王會解」에 보이는 稷愼·穢人을 비롯하여 白民에 이르기까지 열거된 다수의 部族中에서 ‘稷愼’은 ‘息愼’과 같은 ‘肅愼’의 同音異子로 보이나, 漢代에 있었다가 일시 없어지더니 3世紀 末인 晋 太康 年間에 再出土한 『逸周書』의 記事에 따라 周代 成王時 이들 部族들이 모두 存在하였다고 믿어 좋을런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이밖에도 肅愼의 명칭은 周代의 事件을 적어 남긴 『國語』의 「魯語」· 「孔子家語」와 『春秋左氏傳』·『史記』 「孔子世家」등에 보이고 있으나, 그 著作年代에 대하여 檢討되어야 하는 點이 적지 않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여기서 先秦時代의 古書로 믿어지고 있는 「魯語」와 『春秋左氏傳』에서 肅愼에 관한 記事를 살펴보면 「魯語」에는
仲尼在陳 有隼集于陳侯之庭而使 楛矢貫之 石砮其長尺有咫 陳惠公使人以隼 如仲尼之館問之 仲尼曰 隼之來也遠矣 此肅愼之楛矢也 ……
라고 하여 孔子의 博識을 보여 주고 있다. 또 『春秋左氏傳』昭公 9年條에는 ‘昔武王克殷 …… 肅愼·燕·亳·吾北土也’라고 하여 西紀前 11世紀 頃인 周初부터 漢民族의 北에 肅愼族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肅愼族이 과연 어떤 部族이며 또 어느 곳에 居住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戰國時代부터 싹트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中華中心의 世界觀에서 四夷의 來服과 聖王의 出現에 뒤따르게 되어 있는 著名한 事件으로서 後世에 追記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여하튼 春秋 末頃부터 肅愼族이 遠隔한 地域에 존재하고 있었던 사실만은 막연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肅愼族에 관한 古代 中國人의 이와 같은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일례가 『山海經』에 보이는 記事라고 하겠다. 즉, 『山海經』 「海外西經」에는 ‘肅愼之國 在白民北’이라고 하며 架空上의 部族인 白民의 北에 있다는 說明에 그치고 있으나, 「大荒北經」에서는 ‘大荒之中有山 名曰不咸 有肅愼之國 有蜚蛭四翼 有蟲獸首蛇身 名曰琴蟲’이라고 하여 그 所在地와 蜚蛭·琴蟲같은 正體不明名의 生物이 棲息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晋 郭璞이 撰한 『山海經』은 伯益이 禹의 治水에 從事하였을 때에 엮은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으나, 全篇이 일시에 엮어진 것이 아니고 最古의 부분인 「五臟山經」만이 戰國時代 以前의 古文이며, 「海內經」과 「海外經」은 漢 劉歆이 校訂할 때에 追加되었고, 「大荒經」같은 것은 郭璞이 註를 붙일 때 追加한 것이라는 사실이 諸學者의 硏究結果로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앞에서 引用한 肅愼에 관한 『山海經』의 記事는 漢代에서 晋代에 걸쳐 中國人이 지녔던 肅愼에 관한 인식을 보여준 예이며, 이에 따르면 漢 以後에 있어도 이 族名은 막연히 東北夷 또는 不咸山 附近이라는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肅愼의 部族名은 『後漢書』 「東夷列傳」挹婁條에 ‘挹婁 古肅愼之國 在夫餘東北千餘里 東濱大海’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後漢時부터 挹婁로 불리어지게 되었던 것이며, 그 居住地가 長春·農安을 중심으로 하였던 土民國인 夫餘 東北 千餘里이며 그 東의 海洋線까지 걸쳐 있었던 것 같으나 왜 肅愼의 部族名이 挹婁로 改稱되었는지 또 과연 肅愼과 挹婁가 名稱만 바뀌어지고 部族內의 變動같은 것은 없었는지 分明치 않다.
이와 같이 肅愼은 수수께끼에 가리어진 部分이 많은 古部族이나 그 居住地나마 어느 程度 中國人에게 具體的으로 認識되었던 것은 晋代 以後인 것 같다.
앞에서 引用한 『山海經』 「大荒北經」에 肅愼이 不咸山에 있다고 한 記事는 不咸山의 位置만 判明되면 곧 肅愼族의 居住區域을 알 수 있게 하는 실마리가 되는 것이었으나 『晋書』肅愼氏傳에
肅愼氏一名挹婁 在不咸山北 去夫餘可六十里行 東濱大海 西接寇漫汗國
이라는 記事로서 더 具體的으로 밝혀지는 것 같다.
이 기사에 보이는 寇漫汗國의 實體는 알 길 없으나 不咸山은 『山海經』 「大荒北經」에 보이는 不咸山과 同一한 山을 指稱한 것이라는 點은 疑心의 餘地가 없을 것이다.
‘不咸’·‘𥤱’은 蒙古語에서 ‘神’의 意인 “Burkhan”의 寫音인 것이며, 따라서 不咸山·𥤱山은 ‘ 神山’·‘神嶽’의 뜻인 것이나 『魏書』勿吉傳에는 지금의 白頭山을 指稱하고 있다.
蒙古에서 멀리 떨어진 滿洲東北部에서 韓半島와의 境界地인 이 白頭山名이 滿洲語가 아닌 蒙古語로 號稱되었다는 點에는 疑問의 餘地가 없지 않으나 『後漢書』나 『晋書』에 中國人에게 滿洲의 事情이 比較的 具體的으로 認識된 後漢以後 白頭山北의 挹婁의 居住地域과 同一地域視되어 있고 또 모두 ‘東濱大海’라 하고 있는 點으로 보아 대체로 白頭山北에서 東海에 걸쳐 居住하던 原始部族들을 總稱한 것 같다.
宋代의 洪皓가 滿洲東北僻地에서의 見聞을 적어남긴 『松漠紀聞』에
古肅愼城 四面約五里餘 遺堞尙在 在渤海國都三十里 以名累城脚
이라고 한 것으로 보면 北宋時에도 지금의 東京城 附近이 肅愼의 옛땅이라는 『新唐書』渤海傳의 記事와 같은 觀念이 漢民族에게 믿어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나 원래 肅愼이라고 하는 것은 部族名이며 어떤 地名을 가리킨 것이 아닌 것이기에 그 都城이 明白함을 指摘할 수는 없다. 따라서 『新唐書』渤海傳의 ‘肅愼古地’라는 記事는 肅愼族의 居地가 현재의 東京城을 中心으로 한 記事라는 것 뿐이며, 이 東京城이 곧 地名으로서의 肅愼이라는 뜻이 될 수는 없다.
여기서 再考되어야 하는 것은 『滿洲源流考』에 보이는 肅愼族에 관한 記事이다. 즉, 部族條의 ‘國初 舊稱所屬曰珠眞 域卽肅愼轉音’이라는 記事와 ‘大金國志 金國本名珠里眞(謹案 本朝舊稱滿珠 所屬曰珠申 與珠里眞音相近 但微有緩急之異 皆肅愼之轉音也) 後訛女眞 或曰慮眞 …… ’이라는 記事이다.
珠申·珠里眞이 모두 肅愼의 轉音이며, 後日의 女眞族도 옛날의 肅愼族과 同族同意라는 意味이다
이것은 淸朝가 원래 女眞族의 末裔이었던 까닭에 漢民族으로부터 蔑視된 女眞(Jurchen)·女直(Jurche)이라는 文字를 싫어하며, 珠申·珠里眞으로 써서 이를 옛 肅愼과 轉音同意라고 우겨본 데 지나지 않은 것이다.
滿洲에는 『爾雅』에 所謂 ‘九夷八狄七十六蠻’으로 表現되어 있는 바와 같이 黎明期에는 多數의 部族이 存在하고 있었으며, 先秦時代에 肅愼이라고 하는 部族이 白頭山北에서 東海에 걸쳐 一時 居住하여 그것이 燕의 東北方開拓과 그 商人들의 韓半島까지의 來往 등으로 部族名이 漢民族에게 斷片的으로 알려졌을 것이라는 點은 認定되나 『滿洲源流考』에 보이는 바와 같이 肅愼이 滿洲全域에 걸쳐 居住한 部族이라고는 볼 수 없다.
≪參考文獻≫
『國語』卷5 「魯語」
『春秋左氏傳』昭公 9年條.
『山海經』7 「海外西經」肅愼氏之國條;第17 「大荒北經」
『後漢書』卷85 「東夷列傳」挹婁條.
『晋書』卷97 「四夷列傳」肅愼氏條.
洪皓『松漠紀聞』
『滿洲源流考』卷1 部族條; 卷7 部族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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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78
現在의 中國 吉林省 寧安縣 東京城이다. 渤海王國의 第3代 文王 大欽茂(737~793)는 唐 天寶(742~755) 末頃에 지금의 海蘭河 流域인 西古城子에 있던 中京顯德府에서 上京으로 遷都하였다가 唐 貞元 年間(785~794)에 다시 그 東南인 東京龍原府로 遷都하였다.
그 후 第5代 成王 大華璵에 이르러 다시 上京龍泉府로 遷都하여(794) 渤海王國에 滅亡하는 926年까지 약 130年間 王都로서 번영을 누렸다.
契丹의 太祖 耶律阿保機는 上京龍泉府를 함락시켜 渤海王國을 멸망시킨 후, 그 옛 땅에 東丹國이라는 傀儡國을 세워 그 國王에 長男인 人皇王 倍를 즉위케 하고, 上京龍泉府를 天福城이라 改稱하게 하였다.
그러나 弟인 契丹國의 太宗과의 不和로 東丹國王 倍가 930年에 五代朝의 後唐으로 亡命하는 등의 분규기에 天福城의 名稱이 史上에서 사라지고 遼代에는 忽汗城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 都市가 忽汗河(瑚爾喀河 즉, 現在의 牧丹江)에 연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것이 지금 어떤 이유로 東京城으로 칭하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설명할만한 史料는 없다.
≪參考文獻≫
丁若鏞, 『我邦疆域考』卷5 「渤海考」
韓鎭書, 『續海東繹史』卷9 「渤海」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 卷, 1913.
鳥山喜一, 「北滿の二大古都市-東京城と白城-」『京城帝國大學滿蒙文化硏究會報告』1935; 「渤海國上京龍泉府の遺址に就いて」『滿鮮文化史觀』1943.
原田淑人·駒井知受, 『東京城』東方考古學叢刊 甲種 V,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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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79
上京龍泉府의 屬州로서의 龍州는 上京의 首州로서 지금의 東京城으로 推定되고 있다(金毓黻, 『渤海國志長編』 「地理考」; 和田淸, 「渤海國地理考」p.71).
그러나 그 屬縣인 永寧·豊水·扶羅·長平·富利·佐慕·肅愼·永平 등 8縣의 位置는 밝힐 길이 없다.
遼代에는 扶餘府故地에 黃龍府를 두어 龍州라고 칭하기도 하였으나, 渤海王國時代의 龍州와는 그 位置가 같지 않다.
≪參考文獻≫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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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0
湖州와 渤州의 位置에 대하여도 밝힐 수 있는 史料가 없다. 湖州는 그 名稱으로 보아 지금의 鏡泊湖 방면에 있었던 것이 거의 틀림없다. 그리하여 湖西의 額穆 또는 敦化인 것으로 比定되고 있다(金毓黻, 『渤海國志長編』 「地理考」; 和田淸, 「渤海國地理考」p.72).
한편 渤州는 지금의 寧安 부근일 것이라는 推斷이 있다(和田淸, 앞의 논문).
≪參考文獻≫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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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1
渤海 5京 中의 하나이며, 第3代 文王 大欽茂(737~793)時 上京으로 遷都하기에 앞서 잠시 渤海王國의 首都였다.
丁若鏞은 中京을 大祚榮이 建國의 據點으로 삼았던 上京龍泉府에서 300里 거리에 있는 ‘舊國’과 同一地로 단정하여 上京龍泉府로 比定한 寧古塔 부근에서 南으로 300里에 있는 額敦山을 中京顯德府로 比定한 바 있다(『我邦疆域考』 「渤海考」).
한편 韓鎭書도 『新唐書』에 보이는 ‘舊國’을 中京顯德府와 同一地點으로 보았던 것은 丁若鏞과 다를 바 없었으나, 『新唐書』에는 ‘舊國’이 上京龍泉府 西南 300里로 되어 있는 데 비하여 賈耽의『道里記』에 의하면 上京龍泉府에서 中京顯德府間의 거리는 600里가 되기에 그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하며, 中京은 虎爾河(忽汗河)의 西南, 鳥喇城 (吉林城)의 東南側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續海東繹史』 「渤海」).
이상은 渤海의 中京顯德府에 대한 朝鮮王朝學者들의 주된 견해였던 것이나, 淸朝時代 中國側의 硏究로서 대표적인 業績으로는 『吉林通志』를 들 수 있다. 즉 『吉林通志』 「沿革志」에서는 中京顯德府는 吉林府西南 280餘里地에 있는 蘇密城이라고 하면서 이를 賈耽의 『道里記』로서 그 타당성을 역설하였을 뿐 아니라 ‘ …… 蘇密爲粟末之對音 渤海本粟末之遺 中京爲始興之地 可無疑也’라고 하며 粟末靺鞨의 粟末과 蘇密城의 音이 같다고 主張하였던 것이다.
1900年代 이후 中京顯德府에 대한 日本學者의 의견을 살펴보면, ①蘇密城說 ②那丹佛勒城說 ③敦化縣說 ④和龍縣 西古城子說 등을 들 수 있다.
①蘇密城說:蘇密城說은 이미 上記한 바와 같이 『吉林通志』에서 역설된 바 있었으나 日本에서는 처음 小川琢治가 이를 提唱하여( 「長白山附近地勢及び松花江水源」), 그 후 1915年에는 鳥山喜一이 『渤海史考』에서 이를 추종한 바 있어 유력한 學說로 인정되고 있었다.
②那丹佛勒城說: 처음 樺甸縣 蘇密城에서 약 100里東인 輝發河流域의 那丹佛勒城을 中京顯德府로 比定한 것은 淸末의 學者인 曹廷杰이 엮은 『東三省輿地圖說』이었으나, 松井等은 賈耽의『道里記』를 이끌어 이 說이 가장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渤海國の疆域」pp.409~411).
③敦化縣說: 처음 津田左右吉이 이를 提唱하여( 「渤海考」pp.121~124) 池內宏도 이를 追從하였으며( 「鐵利考」p.47), 白鳥庫吉이 이를 定說視하게 되자( 「滿洲の地理を論じて渤海の五京に及ぶ」), 가장 유력한 說이 되었다.
津田左右吉의 敦化說은 大祚榮이 처음 建國의 터전을 이룩한 東牟 즉, ‘舊國’을 中京顯德府와 同一地로 본 데에서 나온 比定이었다.
④西古城子說: 이는 原田淑人이 이끄는 日本의 東亞考古學會에 의한 1933年과 1934年에 걸친 寧安縣 東京城의 渤海上京遺址發掘로서 敦化城 부근의 渤海故城이 首都로서는 규모가 너무 협소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渤海의 遺址에서 東京城과 都城規模에 있어 겨룰 수 있는 것을 찾게 된 데서 비롯한 것이다.
渤海上京遺址의 發掘에 참여하였던 鳥山喜一은 豆滿江 下流에 流入하는 海蘭河 流域의 和龍縣 西古城子에 있는 渤海古城址가 그 규모에 있어 초기의 渤海遺址에 어울린다고 보아, 渤海王國의 中京을 곧 이 西古城子일 것으로 比定하게 되었다( 「渤海中京考」).
그러나 蘇密城說이 學界에서 완전히 부인된 것은 아니었다. 즉, 金毓黻은 『新唐書』渤海傳에 보이는 上京龍泉府로의 遷都前의 ‘舊國’과 中京顯德府를 同一地點으로 볼 수 없다고 主張하며, 敦化 부근의 敖東城을 渤海의 ‘舊國’으로 比定하고, 다시 賈耽의『道里記』에 보이는 記事를 論據로 中京顯德府의 蘇密城說을 고수하였다(『渤海國志長編』 「地理考」).
西古城子說은 그 후 齊藤甚兵衛가 그의 發掘成果를 발표한 「間島省海蘭平野の渤海遺蹟」으로 더 굳어져 和田淸도 이를 定說視하기에 이르렀다( 「渤海國地理考」pp.65~66).
이와 같이 渤海의 中京顯德府는 日本學者들에 의하여 和龍縣 西古城子로 比定되어 거의 定說視되었던 것이나, 이 學說을 한층 확실케 하였던 것은 中國學者들에 의한 渤海遺址의 發掘成果였다. 즉, 敦化縣의 牛頂山에서 발굴된 渤海國 第3代 文王 大欽茂(737~793)의 次女 貞惠公主墓碑를 통하여 同一山系인 敖東城이 渤海의 이른바 ‘舊國’이었음이 확인되었다(金毓黻, 「渤海貞惠公主墓的硏究的補充」pp.75~78; 王承禮·曹正榕, 「吉林敦化六頂山渤海古墓」pp.298~301; 王承禮, 「吉林敦化牡丹江上流渤海遺址調査記」pp.575~584. 「敦化六頂山渤海墓淸理發掘記」pp.201~210).
이어 1980年~1981年의 2차에 걸친 和龍縣 龍水公社의 發掘에 의해 文王 大欽茂의 第4女 貞孝公主의 墓室에서 壁畵와 墓碑가 發見되어, 西古城子가 일시 渤海王國의 首都였으며, 곧 中京顯德府인 것이 확인되었다(延邊朝鮮族自治州博物館, 「渤海貞孝公主墓發掘淸理簡報」pp.174~180). 이 中京顯德府에서 北으로 上京龍泉府까지의 거리는 賈耽의『道里記』와 부합된다.
≪參考文獻≫
『新唐書』卷43下 「地理志」所引『道里記』
『吉林通志』卷10 「沿革志」上.
丁若鏞, 『我邦疆域考』卷5 「渤海考」
韓鎭書, 『續海東繹史』卷9 「渤海」
曹廷杰, 『東三省輿地圖說』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1; 「關于渤海貞惠公主墓碑硏究的補充」『考古學報』1956年 2期.
王承禮·曹正榕, 「吉林敦化六頂山渤海古墓」『考古』1961年 6期.
王承禮, 「吉林敦化牡丹江上流渤海遺址調査記」『考古』1962年 11期; 「敦化六頂山渤海墓淸理發掘記」『社會科學戰線』1979年 3月號.
延邊朝鮮族自治州博物館, 「渤海貞孝公主墓發掘淸理簡報」『社會科學戰線』1982年 1期.
小川琢治, 「長白山附近地勢及び松花江水源」『京大 史學硏究會 講演集』第2, 1909.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鳥山喜一, 『渤海史考』1915; 「渤海中京考」『考古學雜誌』24卷 1號, 1934.
津田左右吉, 「渤海史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池內宏, 「鐵利考」『滿鮮史硏究』(中世篇) 第1册, 1933.
白鳥庫吉, 「滿洲の地理を論じて渤海の五京に及ぶ」『史學雜誌』46編 12號, 1935.
齋藤甚兵衛, 「間島省海蘭平野の渤海遺蹟」『考古學雜誌』40卷 1號, 1954.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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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2
渤海王國時의 盧州에 대하여 『遼史』 「地理志」에는 ‘在京東一百三十里’로 되어 있으나, 여기에 보이는 ‘京’이 渤海王國時 中京顯德府에서의 거리인지, 그렇지 않으면 遼代의 東京龍原府로 기점으로 한 것인지에 따라서 그 位置比定이 크게 바뀌어진다.
遼代에 이르러 渤海王國時의 中京顯德府에 대한 徙民策을 강행하여 대부분의 民을 遼東方面으로 옮겨 東京龍原府를 建設하는 동시에, 거의 渤海王國時의 州縣名을 州縣民을 强揷한 곳의 地名으로 하였던 까닭이다.
盧州의 경우에도 遼代의 盧州는 東京龍原府 南 약 300里인 熊岳城으로 비정되어 있는 까닭에 『遼史』 「地理志」에 보이는 ‘京南一百三十里’이라는 記事의 ‘京’을 遼代의 東京龍原府로 할 경우 거리가 맞지 않게 된다. 이에 金毓黻은 그 位置의 比定을 유보하였던 것이나( 『渤海國志長編』 「地理考」), 和田淸은 『吉林通志』에서 궁여지책으로 『遼史』 「地理志」에 보이는 里數가 遼代의 東京龍原府를 기점으로 한 里數가 아니고, 渤海王國의 中京顯德府를 기점으로 한 里數라는 주장을 쫓아, 中京顯德府로 比定되는 西古城子에서 130里 地點인 龍井村으로 臆斷하고 있다( 「渤海國地理考」p.73).
≪參考文獻≫
『遼史』卷38 「地理志」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1.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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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3
渤海王國의 中京顯德府治의 소재지이므로 吉林省 和龍縣 西古城子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 金毓黻은 中京顯德府 즉, 蘇密城說에 따라 이를 輝發阿 北岸인 蘇이라고 主張한 바 있으나 이 說은 이제 中京顯德府의 位置가 판명됨에 따라 파기되어야 하기에 이르렀다(『渤海國志長編』 「地理考」).
한편 遼代에는 그 州治가 遼阿 流域인 醫巫閭山으로 移置되어 顯陵의 守護와 管理를 위한 奉陵邑이 되었다.
≪參考文獻≫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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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4
『遼史』 「地理志」에 ‘在京西南六十里’로 되어 있는 이 州에는 ‘位城의 鐵’로 유명한 鐵州를 비롯하여 河端·蒼山·龍珍의 4縣이 속해 있었으나, 遼代에 이르러 屬縣이 모두 廢한 것으로 되어 있다.
和田淸이 그 州名을 鐵州라고 하였던 것은 ‘位城의 鐵’에서였던 것이며, 西古城子의 西南인 咸鏡北道 茂山 西北이 지금도 鐵의 名産地인 것에서 이 地域을 渤海王國의 鐵州로 比定하고 있다( 「渤海國地理考」p.73).
그러나 滿洲에 있어서의 鐵生産地는 豆滿江 下流보다도 遼陽 附近에 史上 더 著聞되고 있어 반드시 鐵州를 豆滿江 下流에만 比定할 수는 없다(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pp.31~90).
≪參考文獻≫
『遼史』卷38 「地理志」
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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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5
『遼史』 「地理志」에 의하면 ‘在京西北一百里’로 되어 있으며, 屬縣으로는 靈峰·常豊·白石·均谷·嘉利의 5縣이 있었으나, 遼代에는 廢하고 湯州治는 北鎭縣과 黑山縣의 2縣 부근인 乾州로 되어 있다. 和田淸은 豆滿江 下流의 天寶山 부근으로 推定하고 있다( 「渤海國地理考」p.73).
≪參考文獻≫
『遼史』卷38 「地理志」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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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6
『遼史』 「地理志」에 의하면 ‘在京東北一百五十里’이며, 崇山·潙水·綠成의 3屬縣이 있었다. 『遼史』에는 ‘榮’이 ‘崇’으로 되어 ‘崇州’라 하고 있는데, 그 屬縣에 ‘崇山’이 있는 것으로 보아 榮州가 아니고 ‘崇州’가 옳을 것이라는 主張도 있다(金毓黻, 『渤海國志長編』 「地理考」; 和田淸, 「渤海國地理考」p.73).
和田淸은 그 위치를 지금의 延吉 부근으로 比定하고 있다(앞의 논문, p.73).
≪參考文獻≫
『遼史』卷38 「地理志」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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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7
『遼史』 「地理志」에 의하면 ‘在京西南三百里’이며, 盛吉·蒜山·鐵山의 3縣이 그 屬縣으로 되어 있다. 金毓黻은 그 位置比定을 유보하고 있으나(『渤海國志長編』 「地理考」), 和田淸은 이를 西古城子에서 西南으로 分水嶺을 넘어 豆滿江 下流 一帶일 것으로 推斷하고 있다( 「渤海國地理考」p.73).
『遼史』卷38 「地理志」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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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8
𧴖貊族에 대한 先秦時代의 記錄으로는 『詩經』 「大雅」韓奕篇에 ‘ …… 王(周)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因以其伯’이라 하고 또 『管子』輕重篇에 ‘發·朝鮮不明 淸文皮𣮇服 面以爲幣乎 …… ’라고 한 것을 비롯하여 『左傳』昭公 9年條의 ‘昔武王克殷 …… 肅愼·燕·毫吾土也’라고 한 記事에 보이는 ‘追’·‘貊’·‘發’·‘毫’이 모두 이 種族에 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金庠基에 의하면 ‘追’는 ‘되’·‘퇴’를 가지고 있어 ‘濊’가 ‘회’·‘외’의 音을 가진 것과 서로 넘나들며 轉化하기 쉬워 前揭한 『詩經』韓奕篇의 韓·追·貊은 곧 東夷系의 韓·濊·貊으로 보아야 한다고 主張한 바 있다( 「韓·濊·貊移動考」pp.356~357).
‘𧴖’와 ‘濊’가 같은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나, ‘發’·‘毫’등도 ‘貊’과 동일한 種族을 가리킨 同名異字인 것이 學界에서는 거의 定說로 되어 있다. 따라서 『逸周書』 「王會解」에 보이는 穢入·發人 등도 𧴖貊을 指稱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史記』 「五帝本紀」에는 帝舜의 記事 中 禹가 帝舜의 命에 따라 大洪水를 다스려 諸夷來貢의 길을 열게 되자 ‘南撫交阯 北發 …… 北山戎 發 息愼 …… ’이라고 하였던 것으로 보면, 古代부터 中國人은 息愼(肅愼)과 더불어 北方族으로 貊族의 존재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한편 ‘濊’에 대하여는 『史記』 「主父偃列傳」에 漢 武帝의 元光 年間(B.C.134~B.C.129)에 嚴安이 올린 書에 ‘今欲招南夷 朝夜郞 降羌燛 略濊州 …… ’라고 되어 있는데, 司馬貞은 『史記索隱』에서 이를 ‘濊州 地名 古濊貊國’이라 하여 옛 濊貊이 살던 地名으로 보고 있다.
漢初의 ‘𧴖’의 動態에 대하여 『漢書』 「武帝本紀」元朔 元年(B.C.128)12月條에 ‘東夷薉(濊)君南閭等 口二十八萬人降 置蒼海郡’이라고 한 것을 보면 東夷君長으로서 그 勢力이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단 蒼海郡이 設置되었던 地域에 대하여는 佟佳江 流域說(白鳥庫吉, 「漢代の滿洲」pp.6~7), 鴨綠江上·中流 및 渾江 流域說(李丙燾, 「玄菟郡及臨屯郡考」pp.96~100), 咸與 등 東海 地方說(和田淸, 「玄菟郡考」pp.16~17)등으로 엇갈려 있다. 그러나 이것이 韓半島 부근 또는 그 일부에 걸쳐 있었던 것은 『漢書』 「食貨志」에서 이 事件에 대하여 ‘彭吳穿穢貉·朝鮮置滄海郡 …… ’이라고 ‘穢’를 ‘貉’과 連稱하고, 다시 朝鮮과 관련짓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濊’는 韓半島와 근접한 지역 또는 그 地域의 住民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었다. 즉, 『三國志』 「東夷傳」夫餘條에 의하면 長春·農安 地方을 중심으로 하고 있던 夫餘는 漢帝國으로부터 받은 ‘濊王之印’을 쓰고 있었을 뿐 아니라 ‘國有故城 名濊城’이라 하고 있었다. 따라서 濊를 어떤 古代種族으로 볼 경우 夫餘도 또 그 一派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다시 貊을 살펴보면 先秦에서 漢代에 걸친 中國史書에 發(『管子』)·亳(『左氏傳』)등으로 적혀 있는 貊은 前揭한 『詩經』 「大雅」韓奕에 보일 뿐 아니라, 『書經』 「武成篇」·『論語』 「衛公篇」·『中肅』에는 中國族인 華夏에 대한 ‘蠻貊’이라는 이름으로 보이고 있다. ‘蠻 ’은 南方의 非漢族인 데 대하여, 貊은 北의 代表的인 非漢人이어서 이를 합쳐 蠻貊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漢代에 이르러서는 『史記』 「貨殖列傳」이나 「匈奴列傳」에는 ‘ …… 穢貉·朝鮮·眞番之利’ 또는 ‘東接穢貊·朝鮮’이라고 하여 ‘穢’와 ‘貉’·‘夷’가 합쳐 하나의 種族이 되어 朝鮮과 근접한 地域을 점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三國志』 「東夷傳」高句麗條에서는 鴨綠江(大水) 流域의 貊은 大小貊이라 하고 渾江(小水) 流域의 貊을 小水貊이라고 하여 貊族을 그 地域에 따라 구분하고 있으나, 모두 高句麗形成의 主體種族이었다는 점에 대하여는 거의 의심하지 않고 있다.
上記의 여러 記事를 종합하여 보면 穢와 貊은 처음 陜西의 北에서 東南下하여 秦漢時代에는 山西北部에서 遼東 方面으로 옮겨 이 地域을 중심으로 發展을 꾀하였던 것 같다(鳥山喜一, 「古代滿洲の民族と文化」pp.3~14; 金庠基, 앞의 논문, pp.355~368).
濊貊은 後漢·三國時代에는 다시 ‘濊’의 이름으로 지금의 江原道와 咸鏡南道의 일부에까지 걸쳐 거주하던 種族을 專稱하게 되었다.
『三國史記』 「地理志」에서 賈耽의『古今郡國志』를 引用하여 ‘今新羅北界溟州 今江原道江陵府 蓋濊之古國 前史以扶餘爲濊之 蓋誤’라고 하여 『三國志』에 보이는 夫餘王의 ‘濊王之印’을 사용한 記事조차 부인하고, 江陵만을 濊의 故地로 斷定하였던 것이라든가 『東國輿地勝覽』에서 江原道 全域을 濊 뿐 아니라 貊까지 합쳐 ‘濊貊之地’라고 단정한 것은 모두 後漢 以後 ‘濊貊’의 이름이 ‘濊’로 되어 江原道 一帶의 住民을 指稱하게 된 것에서의 斷定이며, 어떠한 確證이 있어서의 단정은 아니다.
한편 ‘濊’와 ‘貊’이 모두 Tungus族인 것은 인정되나, 그 內包外延을 완전히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려는 종래의 경향은 다시 검토되어야 할 것 같다.
이와 같은 점에 비추어 보아도 渤海王國의 東京龍原府와 같은 그 어는 특정지역만을 가리켜 ‘𧴖陌’의 옛 땅’이라고는 할 수 없다.
<참조>
『三國志』 濊傳 註 2)

濊의 종족적 계통과 濊·貊·濊貊의 상호관계에 관해선 다수의 논고가 있다. 이를 크게 大別해 보면 濊·貊同種說과 濊·貊異種說로 나뉘어진다. 前者로는 일찍이 丁若鏞이 貊은 種族名이고 濊는 地名 또는 水名이라고 보아, 濊貊은 九貊 중의 一種을 지칭한 것이라고 하였다. (『疆域考』 「濊貊考」) 凌純聲도 濊는 濊水地域에 거주하였던 貊族이라고 하여 동일하게 이해를 하였다. (『松花江下游的赫哲族』p.30)
三品彰英은 先秦文獻上의 貊은 北方族에 대한 汎稱이며, 濊는 秦代의 문헌에서 처음 보이는데, 漢代의 汎稱的인 濊는 고구려·부여·東濊를 포괄하는 民族名이고, 濊貊이라는 熟語的인 호칭은 濊라는 현실적인 民族名과 古典的인 北族에 대한 汎稱인 貊을 결합시킨 것이라고 보고, 고구려를 지칭한 貊은 民族名인 汎濊族內의 특정 部族名으로 보았다. 곧 漢代 이후의 貊은 濊와 同一한 系統이라고 보았다. ( 「濊貊族小考」) 尹武炳은 濊貊이라는 명칭은 『史記』에서부터 사용되었는데, 濊族과 貊族을 합친 汎稱이 아니라 貊族인 高句麗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漢代 이후의 濊와 (濊)貊을 同一系統 내에서 各各 구분되는 實體로 보았다.
한편 臺灣의 芮逸夫는 韓民族을 濊貊과 韓의 兩系로 구성되었다고 하면서, 濊貊族중 濊族은 한반도 중북부와 松花江·吉林·嫩江 등에 살았고, 貊族은 山東·遼東·渤海岸 등에 거주하여, 그 居住分布에 따라 구분되었다고 보았다. (『韓國古代民族考略』) 金貞培도 濊·貊·韓은 同一系 족속으로서 그 分布地域의 차이에 따라 각각으로 구분되어졌다고 보았다. ( 「濊貊族에 관한 硏究」)異種說의 대표로서 三上次男은 濊族은 有文土器文化를 영위하였고, 生活方式에 있어서 수렵·어로의 비율이 컸던 古아시아族 系統이고, 貊族은 無文土器文化를 남긴 퉁구스계통으로 파악하였다.( 「東北アジアの古代文化と穢人の民族的性格」)
三上次男說은 빗살문토기文化와 無文土器文化가 同時代의 것이 아니라 時代를 先後하는 文化였다는 것이 확실해짐에 따라 부정시된다. 그런데 高句麗族과 濊貊과의 관계에 대해 李玉은 독특한 입론을 제기하였다. 즉, 그는 貊族과 濊族은 中國의 山西省·河北省 방면에 각각 거주하다가 점차 東으로 이동해 왔는데, B.C. 3세기 무렵 장춘·농안 방면에 먼저 定着해 있던 濊族은 이어 貊族에게 밀려 南으로 왔다가 고조선에게 쫓겨 요동군에 예속된 것이 濊君 南閭의 집단이고, 이 濊의 일부가 貊族에 흡수되어 B.C. 2세기 무렵 새로운 종족인 濊貊이 成立되었으니, 이것이 高句麗族이라고 하였다.(『高句麗民族의 形成과 社會』)
≪參考文獻≫
丁若鏞, 『疆域考』卷2 「濊貊考」
尹武炳, 「濊貊考」『白山學報』1, 1966.
金貞培, 「濊貊族에 관한 硏究」『白山學報』5, 1968.
李 玉, 『高句麗 民族形成과 社會』1984, 敎保文庫.
凌純聲, 『松花江下游的赫哲族』1935.
芮逸夫, 「韓國古代民族考略」『中韓論集 』1, 1955.
三品彰英, 「濊貊族小考」『朝鮮學報』4輯, 1953.
三上次男, 「東北アジアの古代文化と穢人の民族的性格」『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參考文獻≫
『三國史記』卷35 「地理志」所引『古今郡國志』
『東國輿地勝覽』卷49.
『詩經』 「大雅」韓奕篇.
『管子』卷23 輕重篇.
『左傳』 昭公 9年條.
『史記』卷1 「五帝本紀」帝舜條; 卷110 「匈奴列傳」; 卷112 「主父偃列傳」; 卷129 「貨殖列傳」
『漢書』卷6 「武帝本紀」元朔 元年條; 卷24 「食貨志」
『三國志』卷30 「東夷傳」夫餘·高句麗條.
李丙燾, 「玄菟郡及臨屯郡考」『史學雜誌』41編 4號, 1940(『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金庠基, 「韓·濊·貊移動考」『東方史論叢』1974.
白鳥庫吉, 「漢代の滿洲」『滿洲歷史地理』 1卷, 1913.
鳥山喜一, 「古代滿洲の民族と文化」『滿鮮文化史觀』1935.
和田淸, 「玄菟郡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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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9
渤海王國의 東京龍原府에 대하여는 우리나라에서도 丁若鏞의 咸鏡北道 鏡城說(『我邦疆域考』 「渤海考」)·韓鎭書의 咸鏡北道 鏡城·富寧說(『續海東繹史』 「渤海」)등이 있었으나, 그 후 日本學界에서 다시 여러 說이 엇갈리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說로서는 ①那珂通世의 沿海州 Vladibostock說( 「古の滿洲」) ②內藤虎次郞의 Nikolisk說(稻葉岩吉, 『滿洲發達史』) ③池內宏의 間島 局子街說( 「鐵利考」p.126) ④松井等( 「渤海國の疆域」p.413~413)과 鳥山喜一의 (『渤海史考』pp.271~277)의 間島 琿春說이 있다.
東京龍原府에 관하여 이와 같이 여러 說이 엇갈리게 된 것은 『三國史記』 「地理志」에 引用되어 있는 賈耽의『古今郡國志』에 新羅의 泉井郡에서 龍原府의 別稱인 柵城府까지 39驛으로 되어 있고, 또 渤海王國에서 日本으로 가는 關門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新羅의 泉井郡은 『東國輿地勝覽』에는 지금의 咸鏡南道 德源으로 되어 있으며, 唐代의 一驛이 30里이기에 德源에서 北으로 1,170里(39驛) 地點이면서 黃海에 면하는 교통의 요충지를 찾게 되어 서로 의견을 달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여러 說에서 가장 유력시되어 온 것은 間島의 琿春說이었는데, 齊藤甚兵衛가 이 琿春縣의 渤海古城인 半拉城을 發掘하여 1942年 11月에 그 報告書가 發表되면서부터 定說로 되었다(『半拉城-渤海の遺蹟調査-』).
≪參考文獻≫
『東國輿地勝覽』卷49.
丁若鏞, 『我邦疆域考』卷5 「渤海考」
韓鎭書, 『續海東繹史』卷9 「渤海」
那珂通世 「古の滿洲」『地學雜誌』205號, 1906.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鳥山喜一, 『渤海史考』1915.
稻葉岩吉, 『滿洲發達史』 1915.
池內宏, 「鐵利考」『滿鮮史硏究』(中世篇) 第1册, 1933.
齋藤甚兵衛, 『半拉城-渤海の遺蹟調査-』1942, 琿春縣公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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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90
이 慶州의 屬縣으로 龍原·永安·鳥山·壁谷·熊山·白楊의 6縣이 있었다고 『遼史』 「地理志」에 보이는 바 慶州의 龍原縣이 곧 東京이 되었던 것이며, ‘壘石爲城周圍二十里’라고 한 都城은 지금의 半拉城이 그 遺址인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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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91
東京龍原縣에서의 方位와 거리 등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遼史』 「地理志」에서는 ‘一名 龍河郡’이라고 하며, 그 屬縣으로 海陽·接海·格川·龍河의 4縣이 있었다고 한다. 和田淸은 그 州明과 屬縣名으로 보아 海岸에 근접된 州인 것이 틀림없는 바 明·淸時代에 지금의 Possjet灣 北岸에 顔楚(Yen-Chu) 또는 眼春(Yen-Chun)이라는 地名이 있었던 것은 이 鹽州(Yen-Chou)의 轉訛일지도 모른다는 臆測을 하였던 바 있다( 「渤海國地理考」p.76).
≪參考文獻≫
『遼史』卷38 「地理志」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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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92
『遼史』 「地理志」에는 ‘一名 會農郡’이라고도 하며, 會農·水岐·順化·美縣의 4縣이 그 屬縣이었던 바 會農이 그 首縣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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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93
『遼史』 「地理志」에는 ‘一名 吉理郡’이라고도 하였으며, 洪賀·送誠·吉理·石山의 4縣이 그 屬縣이었던 것으로 吉理縣이 그 首縣이었다.
渤海王國이 東京龍原府로 遷都하였던 것은 第3代 文王 大欽茂時이며, 成王 大華璵의 卽位(795)와 동시에 다시 上京龍泉府로 復都하였기에 10年間의 일시적인 首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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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94
沃沮의 옛 땅에 대하여는 『遼史』 「地理志」東京道 海州條에 海州를 ‘本沃沮國’이라고 하여 遼東半島의 海城이 옛 沃沮에 세워진 州인 것 같은 記事를 싣고 있다.
『遼史』 「地理志」의 이 記事는 乾隆帝 敕撰인 『大淸一統志』같은 淸帝國의 綜合的 地理書 같은 것에도 그대로 답습되어 왔던 것이다.
이에 丁若鏞은 『三國志』 「東夷傳」과 「毋丘儉傳」을 비롯하여 『後漢書』·『三國史記』등의 史書에서 沃沮에 관한 關係記事를 널리 찾아서 그 잘못을 지적하고, 東沃沮는 지금의 咸興을 中心으로 한 咸鏡南道이며, 漢의 武帝時에 玄菟郡이 設置되었다가 昭帝時에 樂浪東部로 되었기에 이를 東沃沮라 칭하게 되었다 하고, 南沃沮라 한 것은 北沃沮가 있었기에 칭하게 되었던 것이며, 北沃沮는 咸鏡北道의 穩城·慶源·咸興 등 六鎭 一帶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說明한 바 있다(『我邦疆域考』 「沃沮考」).
한편 韓鎭書도 中國史書에 보이는 遼東半島 海城의 沃沮 故地說을 批判하고, 沃沮를 洪原·北靑 등의 咸鏡南道에서 北으로는 咸鏡北道의 豆滿江邊까지이며, 그 北界인 北沃沮는 丁若鏞과 같은 關北六鎭을 가리킨 것이라고 推斷한 바 있다(『續海東繹史』 「沃沮」).
日本學界에서 沃沮에 대한 代表的인 學說은 지금의 定平·咸興 以北의 咸鏡道가 『三國志』에 보이는 東沃沮와 부합되며, 北沃沮는 豆滿江口에 위치하여 北으로는 挹婁와 접하고, 西로는 長白山 부근에서 夫餘와 접하였던 것으로 推斷한 바 있다(白鳥庫吉·箭丙瓦 「漢代の朝鮮」pp.17~18).
<참조>
『三國志』東沃沮傳 註 2)
東沃沮
대체로 오늘날의 咸興에서 豆滿江에 이르는 지역에 비정된다. 沃沮란 말의 語源에 대해서『滿洲源流考』에서는 ‘森林’이라는 뜻의 滿洲語 ‘窩集(weji)'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원래 濊의 일부였던 夫租가 성장하여 沃沮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李丙燾, 「臨屯郡考」pp.206~207)
『三國史記』太祖王 4年條에서는 ‘秋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蕯水’라 하여 東沃沮가 A.D. 40年 高句麗에 복속되어 그 支配를 받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5 「高句麗本紀」3 太祖王 4年條.
『滿洲源流考』卷9 「疆域」2 沃沮·濊條.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參考文獻≫
丁若鏞, 『我邦疆域考』卷4 「沃沮考」
韓鎭書, 『續海東繹史』卷2 「沃沮」
白鳥庫吉·箭丙瓦, 「漢代の朝鮮」『滿洲歷史地理』1卷,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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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95
渤海王國의 南京南海府의 位置에 대하여는 丁若鏞의 咸興說(『我邦疆域考』 「渤海考」)과 韓鎭書의 北靑說(『續海東繹史』 「渤海」)등이 있었다.
그 후 日本에서는 內藤虎次郞의 咸鏡北道 鏡城說( 「日本滿洲交通略說」), 松井等의 咸鏡北道 鏡城說( 「渤海國の疆域」p.415) 및 처음에는 松井等의 鏡城說에 贊同하였다가(鳥山喜一, 『渤海史考』 p.265), 뒤에는 北靑說을 내놓은 鳥山喜一의 說( 「北滿の二大古都址」p.2)등이 서로 엇갈려 있었으나, 池內宏이 咸興說을 지지하고( 「蒲盧毛朶部について」pp.427~428), 이어 白鳥庫吉·和田淸 등도 咸興說을 찬동하게 되어 이 說은 거의 定說視되고 있다(白鳥庫吉, 「滿洲の地理を論じて渤海の五京に及ぶ」; 和田淸, 「渤海國地理考」p.67). 이밖에 金毓黻은 北靑 또는 鏡城의 兩說에 贊意를 보이고 있으나 단정을 하지는 않았다(『渤海國志長編』 「地理考」).
≪參考文獻≫
丁若鏞, 『我邦疆域考』卷5 「渤海考」
韓鎭書, 『續海東繹史』卷9 「渤海」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內藤虎次郞, 「日本滿洲交通略說」『叡山講演集』所收, 1907.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鳥山喜一, 『渤海史考』1915; 『北滿の二大古都址-東京城と白城-』1935, 京城帝國大學 滿蒙文化硏究會報告 2.
白鳥庫吉, 「滿洲の地理を論じて渤海の五京に及ぶ」『史學雜誌』46編 12號, 1935.
池內宏, 「蒲盧毛朶部について」『滿鮮史硏究』(中世篇) 第2册, 1937.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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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96
南京南海府의 首州이며, 沃沮·鷲巖·龍山·濱海·昇平·靈泉의 6縣을 領하고 있다.
이 首縣인 沃沮가 옛 沃沮城과 관계가 있다고 하면 지금의 咸興 부근이 아닌가 한다. 沃州는 『遼史』 「地理志」에는 南海府가 ‘壘石爲城 幅員九里’라고 하여 비록 그 規模가 東京龍原府보다 작다고 하지만, 築城되어 있어 그 遺址가 발견된다면 諸說이 엇갈리고 있는 南海府의 位置와 沃州와의 관계가 밝혀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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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97
南京南海府의 屬州이며, 天晴·神陽·蓮池·狼山·仙巖의 5縣이 이에 속하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位置를 밝힐 史料는 없다. 和田淸은 南京南海府인 沃州 沃沮縣의 위치가 옛 沃沮城인 것으로 推定되는 咸興이라고 한다면, 晴州는 지금의 城津일 것이라고 臆測한 바 있다( 「渤海國地理考」pp.76~77).
≪參考文獻≫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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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98
南京南海府의 屬州이며, 椒山·貂嶺·澌泉·尖山·巖淵의 5縣을 領하였다. 그 확실한 位置는 밝히기 어려우나, 和田淸은 南京 南海府인 沃州 沃沮縣의 位置가 지금의 咸興으로 比定될 경우, 이를 鏡城으로 比定할 수 있다고 臆測한 바 있다( 「渤海國地理考」 pp.76~77).
≪參考文獻≫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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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99
‘高[句]麗의 옛 땅’은 『三國史記』 「地理志」에 引用되어 있는 賈耽의『古今郡國志』에 ‘渤海國南海·鴨綠·扶餘·柵城四府 並是高句麗舊地也’라고 하는 바와 같이 北流松花江流域에서 南京南海府까지의 광대한 지역을 領有하고 있어 鴨綠府만을 ‘高麗의 옛 땅’이라고 하는 것은 不適한 記事이다. 이는 渤海人을 高句麗의 中心部로 본 데에서의 表現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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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00
西京鴨淥府에 대하여 『遼史』 「地理志」東京道條에
淥州 鴨淥軍 節度 本高麗故國 渤海號西京鴨淥府 城高三丈 廣輪二十里 都督 神·桓·豊·正四州事 ……
라고 한 것을 보면 遼의 淥州가 곧 渤海王國의 西京鴨淥府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遼史』 「地理志」에서 豊州·桓州·正州의 3州는 항목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면서 神州만은 따로히 항목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지 않는 것을 보아 遼代의 淥州와 渤海의 神州는 구분되지 않았던 것이며, 渤海時代의 神州에 遼의 淥州가 설치된 것 같다. 이상과 같은 점으로 보아 渤海王國의 西京鴨淥府의 首州는 神州였을 것이다. 丁若鏞은 이를 平安北道 慈城 北에서 鴨綠江 對岸으로 比定하였으며(『我邦疆域考』 「渤海考」), 韓鎭書는 江界府의 滿浦鎭 對岸으로 比定한 바 있다(『續海東繹史』 「渤海」).
한편 日本學界에서는 松井等의 奉天省 臨江縣帽兒山說( 「渤海國の疆域」p.410)과 鳥山喜一의 通溝說(『渤海史考』p.282)이 있으나, 臨江縣說을 지지하는 學者가 많다. 『遼史』 「地理志」에는 屬縣으로 神鹿·神化·劍門의 3縣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參考文獻≫
『遼史』卷38 「地理志」東京道條.
丁若鏞, 『我邦疆域考』卷5 「渤海考」
韓鎭書, 『續海東繹史』卷9 「渤海」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鳥山喜一, 『渤海史考』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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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01
『遼史』 「地理志」東京道條에
桓州 高麗中都城 故縣三 桓都·神鄕·淇水(『滿洲源流考』에는 浿水) 皆廢 高麗王於此創立宮闕 國人謂之新國 五世孫釗 晋康帝建元初爲慕容皝所敗 宮室焚蕩 …… 隷淥州 在西南二百里
라고 설명되어 있다.
高句麗 山上王이 國內城에서 遷都한 新國이라든가 또 故國原王時에 燕王 慕容皝의 侵略을 받았던 故事가 적혀 있는 점으로 보아 桓州州治의 桓都는 곧 丸都이며, 지금의 輯安인 것이 틀림없다. 屬縣인 神鄕·淇水의 現 位置는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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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02
『遼史』 「地理志」東京道에는 ‘豊州 渤海置盤安郡 …… 隷淥州 在東北二百一十里’라고 하며, 屬縣으로는 安豊·渤恪·隰壤·硤石의 4縣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和田淸은 鴨淥府의 東北 210里 地點에 있다고 한 것에서 松花江 上源의 撫松 방면이 아니면 ‘東北’이 ‘東南’의 誤記로서 鴨綠江 上源의 厚昌古邑方面 또는 長白·惠山鎭이 아닌가 臆測한 바 있다( 「渤海國地理考」p.78).
≪參考文獻≫
『遼史』卷38 「地理志」東京道條.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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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03
『遼史』 「地理志」東京道條에 ‘正州 本沸流王故地 國爲公孫康所倂 渤海置沸流郡 有沸流水 …… 隷淥州 在西北三百八十里’라고 되어 있다. 和田淸은 沸流水 즉, 渾江(佟佳江) 流域이며, 지금의 通化가 아니면 桓仁일 것이라고 推斷한 바 있다(渤海國地理考」p.78).
≪參考文獻≫
『遼史』卷38 「地理志」東京道條.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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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04
長嶺府의 位置에 대하여 『滿洲源流考』에서는 ‘今吉林西南五百里 有長嶺子 滿洲語稱果勒敏珠敦(Golmin Judun, 長嶺의 뜻)’이라고 하고, 그 상세한 位置에 대하여는 『盛京通志』 「山川」長嶺子條의 記事를 轉載하고 있다.
즉, 長嶺府는 渾河의 上流인 英額河를 거슬러 輝發河 流域으로 빠져나오는 긴 고개(『盛京通志』에는 長白山系)에서 지금의 英額門 부근으로 比定하고 있다.
韓鎭書도 渤海王國의 長嶺府를 長嶺子에 擬定하였으나 그 位置에 대하여는 ‘永吉州等地也’라는 막연한 比定을 하고 있다(『續海東繹史』 「渤海」).
韓鎭書에 의하여 長嶺府로 比定된 永吉州는 『盛京通志』에 따르면 ‘吉臨烏喇’이며, 지금의 吉林이다. 長嶺府를 이와 같이 ‘永吉州等地’로 比定한 論據는 『盛京通志』의 長嶺子條에서 南接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는 ‘納魯窩集’의 條에 대하여 『盛京通志』에서 다시 ‘永吉州城西南諸河 興京界內諸河 多發源於此’라 하고 있는 것에 依據한 것 같다.
한편 일본의 松井等은 『滿洲源流考』를 追從하여 長嶺府를 英額門 부근으로 比定하였으나( 「滿洲に於ける遼の疆域」p.46), 이 부근에는 그럴듯한 城蹟이 없다. 그리하여 津田左右吉은 고개를 넘어 輝發河畔으로 나와 그 上流에 있는 北山城子를 그 위치로 比定하였다( 「渤海考」pp.120~130).
≪參考文獻≫
『滿洲源流考』 卷10.
『盛京通志』 卷13 「山川」長嶺子條.
韓鎭書, 『續海東繹史』卷9 「渤海」
松井等, 「滿洲に於ける遼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津田左右吉,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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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05
瑕州에 대하여는 『遼史』 「地理志」東京道 長嶺府條에도 언급된 것이 없으며, 겨우 『滿洲源流考』 「疆域」長嶺府條에 ‘按瑕州無考 常爲附郭之州 遼廢’라는 설명이 보일 뿐이어서 그 位置는 比定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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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06
『遼史』 「地理志」東京道條에 ‘河州 德化軍 置軍器坊’이라고만 說明되어 있어 그 沿革이나 方向을 알 수 없다. 그 후 『滿洲源流考』 「疆域」 河州條의 附註에 ‘按明人地志云 廢河州在黃龍府北 遼置河州 有軍器坊’이라는 記事가 있다. 明代에는 지금의 開原을 黃龍府라고 칭하였기에 이 부근의 遼河 支流인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으나 분명치는 않다.
≪參考文獻≫
『遼史』卷38 「地理志」東京道條.
『滿洲源流考』卷10 「疆域」3 河州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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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07
‘扶餘의 옛 땅’에 대하여 『盛京通志』建置沿革 開原縣條에서 ‘ …… 後渤海大氏 取扶餘地 改爲扶餘府’라 하고, 다시 遼代의 黃龍府가 開原이라는 說이 있어 『大淸一統志』도 이를 따랐을 뿐 아니라, 韓鎭書는 ‘扶餘府 今開原縣也’라고 斷定하기에까지 이르렀다(『續海東繹史』 「渤海」).
이것은 元代에 遼의 黃龍府(즉, 옛 夫餘의 本據)에 開元路를 두었다가, 明代에 와서는 開元路를 開原으로 고치고 遼代의 咸州(지금의 開原)를 지칭한 데에서 일어난 혼동이다. 한편 日本學界에서는 松井等이 이를 農安으로 比定한 후(『滿洲に於ける遼の疆域』pp.32~42) 이를 追從하는 學者가 많아(稻葉岩吉, 「漢代の滿洲」pp.198~199) 農安·長春 부근으로 보는 것이 거의 定說化 되어 왔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異說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著例로 池內宏이 주장한 哈爾濱 東南의 阿城說이었다. 즉, 그에 의하면 渤海王國의 扶餘府址는 지금의 農安인 것이 틀림없을 것이나, 漢魏時代의 夫餘國은 5世紀末에 勿吉에 멸망당하여 唐初 渤海王國이 建國될 때까지 약 2세기동안의 時間的 懸隔이 있으니 비록 『新唐書』渤海傳에 ‘扶餘故地爲扶餘府’로 되어 있어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의 農安 方面은 東方의 滿洲民族과 西方의 滿洲民族의 境界地여서 紛爭地이기 때문에 이곳이 滿洲民族인 夫餘의 中心地가 될 수는 없다고 論定하고, 후일의 生女眞인 金帝國의 發祥地인 이 阿城 부근이야말로 夫餘의 本據로서 가장 적합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夫餘考」pp.76~84).
이밖에 金毓黻의 昌圖北의 四面城說이 있다. 즉, 그에 의하면 渤海王國의 扶餘府는 遼의 黃龍府이다. 遼는 聖宗 開泰 9年(1,020)에 이를 東北으로 옮겨 金이 이를 이어받아 隆安府로 하였던 것이 뒤에 다시 農安으로 轉하였으며, 지금 金代의 塔이 남아 있는 農安이 金代의 隆安府였다. 따라서 渤海王國의 扶餘府의 그 西南인 遼의 通州인 지금의 西面城이라는 主張이다( 「渤海扶餘府考」pp.355~367).
이와 같은 諸說에 대하여 和田淸은 漢魏時代의 夫餘는 伊通河畔의 要衝地인 農安·長春 방면이었으나, 그 후 西南으로 옮겼기에 高句麗末 渤海王國時代의 扶餘府는 上遼河 東岸의 四面城이었다가, 遼의 中葉에 다시 옮겨서 지금의 農安인 黃龍府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p.52).
≪參考文獻≫
『盛京通志』 卷10 建置沿革 開原縣條.
韓鎭書, 『續海東繹史』卷9 「渤海」
金毓黻, 「渤海夫餘府考」『服部先生古稀祝賀記念論文集』1936.
松井等, 「滿洲に於ける遼の疆域」『滿洲歷史地理』 2卷, 1913.
稻葉岩吉, 「漢代の滿洲」『滿洲歷史地理』 1卷, 1913.
池內宏, 「夫餘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3, 1932.
和田淸, 「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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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08
扶州의 屬縣으로는 『遼史』 「地理志」東京道 通州條에 의하면 扶餘·布多·顯義·鵲川의 4縣이 있었으며, 扶州와 扶餘縣은 물론 夫餘府와 同一地에 있었을 것이다.
『滿洲源流考』 「疆域」에는 지금의 開原 부근의 어느 地點으로 比定하고 있으나, 정확한 論據가 없다. 金毓黻은 이를 遼代의 歸仁縣인 지금의 昌圖 부근으로 比定하고 있다(『渤海國志長編』 「地理志」).
≪參考文獻≫
『遼史』卷38 「地理志」東京道 通州條.
『滿洲源流考』 卷10 「疆域」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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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09
『遼史』 「地理志」東京道 通州條에 渤海時의 仙州는 强師·新安·漁谷의 3縣을 統治한 것으로 되어 있다.
漁谷이라는 名稱이 있는 것으로 보아 和田淸은 이를 北流 松花江의 渡河點에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臆測을 한 바 있다( 「渤海國地理考」p.82).
扶餘府는 長嶺府의 北에 接한 府이며, 渤海王國에서 契丹으로 가는 交通의 要地였기에 이를 契丹道로 稱하였다. 契丹이 渤海를 멸망시켰을 때 최초로 함락시킨 것이 이 扶餘城이었다.
≪參考文獻≫
『遼史』卷38 「地理志」東京道 通州條.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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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10
鄚頡府는 『遼史』 「地理志」東京道 韓州條에 ‘ …… 本槀離國舊治柳河縣 高麗置鄚頡府 都督鄚·頡二州 渤海因之 …… ’라고 한 것으로 보아 高句麗 이래 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位置에 대하여 松井等은 그 名稱으로 보아 北魏 永興 5年(475)부터 史書에 보이는 勿吉族의 住地인 것으로 推斷한 바 있으나, 그 정확한 比定은 유보하였다( 「渤海國の疆域」p.418).
이에 대하여 金毓黻은 曹廷杰와 丁若鏞의 諸說을 검토하여 扶餘 北으로 보아야 하는 까닭에 지금의 農安 北으로 比定할 수 밖에 없다고 推斷한 바 있다(『渤海國志長編』 「地理考」).
이상과 같은 諸說을 검토한 和田淸은 鄚頡府가 勿吉의 住地였다는 說을 쫓아 勿吉의 住地에 대한 津田左右吉의 拉林河畔 石頭城子와 上常縣 附近說 및 池內宏의 哈爾濱東南 阿什阿畔의 阿城 附近說에서 池內宏說에 찬동하여 이를 阿城 부근으로 比定하였다( 「渤海國地理考」p.83).
≪參考文獻≫
『遼史』卷38 「地理志」東京道 韓州條.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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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11
屬縣에 奧喜·萬安의 2縣이 있었으며, 鄚州와 奧喜縣이 府와 同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現 位置를 比定할 記事를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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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12
『遼史』 「地理志」에는 頡州로 되어 있다. 遼代의 高州는『遼史』 「地理志」中京道 高州條에 ‘ …… 開泰中 聖宗伐高麗 以俘戶 置高麗 …… ’라고 한 바와 같이 遼河 上流인 老哈河 부근이므로 이에 比定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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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13
定理府의 位置에 대하여 韓鎭書는 『盛京通志』와 『大淸一統志』에서 이를 熱河의 承德城으로 比定한 것을 부인하고, 渤海王國의 上京龍泉府 東北인 牧丹江畔의 寧古塔 부근으로 比定하였다(『續海東繹史』 「渤海」).
松井等은 現在의 烏蘇里江畔으로 比定한 바 있으며( 「渤海國の疆域」p.418), 金毓黻도 이를 烏蘇里江 下流로 比定하였다(『渤海國志長編』 「地理考」). 이에 대하여 和田淸은 沿海州의 Olga 부근으로 臆斷한 바 있다( 「渤海國地理考」p.88).
≪參考文獻≫
韓鎭書, 『續海東繹史』卷5 「渤海」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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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14
定州는 一名 安定郡이라고 하며, 定理·平邱·巖城·慕美·安夷의 5縣을 領하고 있었다고 한다. 定州와 定理縣은 定理府의 治所와 同一地이며, 뒤의 雅攬路 즉, 지금의 沿海州 南部인 蘇城(Suchan)부근인 것으로 추측된다(和田淸, 「渤海國地理考」p.87).
≪參考文獻≫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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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15
潘州는『遼史』 「地理志」東京道條에 ‘瀋州’로 되어 있다. 『遼史』 「地理志」에는 그 屬縣이 9縣이었던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縣名이 알려져 있지 않다. 金毓黻은 『元一統志』등에서 瀋水·安定·保山·能利의 4縣만을 考定하였으나(『渤海國志長編』 「地理考」), 그 정확한 位置는 밝혀내지 못하였다.
≪參考文獻≫
『遼史』卷38 「地理志」東京道條.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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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16
松井等은 이 府가 定理府 부근에 있는 것으로 믿어지나 그 정확한 位置는 명확하지 않다고 比定을 하였던 바 있었으며( 「渤海國の疆域」p.418), 金毓黻은 이를 烏蘇里江 流域으로 比定하였다(『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이에 대하여 定理·安邊의 2府가 모두 挹婁의 故地인 점으로 미루어 定理府와 接近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한 데에서 이를 金代의 錫林路로서 Olga 地方인 것으로 推定한 견해가 있다(和田淸, 「渤海國地理考」p.88).
그 屬縣으로 되어 있는 安州·瓊州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參考文獻≫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 卷, 1913.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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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17
率賓의 이름이 처음 보이는 데에서 池內宏은 率賓府가 틀림없이 河水의 이름에 따라 붙여진 名稱일 것이며, 率賓이라고 불리우는 種族 또는 國名은 置府 以前에는 없었으니, 이 府名에 관계된 ‘率賓故地’는 의미없는 文字라고 斷定한 바 있다( 「夫餘考」p.451).
池內宏의 이와 같은 論斷에 대하여 和田淸은 그렇게 단정할 것이 아니고 이 때 率賓의 住民을 실제로 征伐하여 府를 두었던 것을 나타낸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池內宏, 「渤海國地理考」p.84).
≪參考文獻≫
池內宏, 「夫餘考」『滿鮮史硏究』(上世篇) 第1册, 1951.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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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18
率濱府의 位置에 대하여 『盛京通志』 「古蹟」率賓府條의 割注에는 率賓府의 屬州의 하나로 되어 있는 建州에 대해 ‘在興京界內 而華·益·建三州 皆在鳳凰城界內’라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韓鎭書는 그 오류를 지적하고 金代의 恤品路로 比定한 바 있다(『續海東繹史』 「渤海」).
韓鎭書에 이어 日本의 松井等도 현재의 烏蘇里江 西方에 있는 綏芬河는 率賓과 그 古名이 일치된다고 하여 率賓府를 金代의 恤品路 治所인 Nikolisk 부근으로 比定하였고( 「渤海國の疆域」p.418), 金毓黻도 이 說을 부연하여 설명하였다(『渤海國志長編』 「地理考」). 和田淸도 이를 추종하여 이 說은 지금 定說化되고 있다( 「渤海國地理考」pp.83~86).
率賓府의 名은 遼代에도 그대로 쓰여졌으나, 金·元代에는 恤品·速頻·蘇濱의 이름으로 史書에 보이게 되며, 淸代에는 綏芬路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渤海王國의 率賓府는 綏芬河 流域이었던 것이 거의 틀림없으며, Nikolist는 淸代에 雙城子라고 칭하였던 바 이곳에 渤海式의 城址가 2개 나란히 構築되어 있는 것을 鳥居龍藏도 이 地域의 踏査에서 확인한 바 있다(『西伯利亞から滿蒙へ』p.61).
≪參考文獻≫
『盛京通志』卷28 「古蹟」 率賓府條.
韓鎭書, 『續海東繹史』卷5 「渤海」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鳥居龍藏, 『西伯利亞から滿蒙へ』 1929.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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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19
『遼史』 「地理志」에도 보이지 않은 州名이어서 그 정확한 비정은 곤란하다. 金毓黻은 率賓府의 首州이며 廢한 후 그 民은 康州로 옮기게 한 것이 아닌가 臆測한 바 있다(『渤海國志長編』 「地理考」).
≪參考文獻≫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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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20
益州와 建州는 그 屬縣조차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 位置를 比定할 자료가 없다. 綏芬河를 거슬러 西北行하면 滿洲의 東寧에 到達하는데, 이곳은 三岔口로 불리웠던 곳이며 이 地域의 要衝地이다. 그 西北에는 大城子·小城子 등의 遺址도 있으며, 그 하나가 元의 開原城인 바 建·益 2州 中의 하나는 이곳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和田淸, 「渤海國地理考」p.84).
≪參考文獻≫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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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21
拂涅은 이른바 隋·唐時代의 靺鞨 7部中의 하나이다. 拂涅에 대한 最初의 記事인 『隋書』靺鞨傳에
靺鞨 在高麗之北 邑落俱有酋長 不相總一 凡有七種 其一號粟末部 與高麗相接 …… 其二曰伯咄部 在粟末之北 …… 其四曰拂涅部 在伯咄東 ……
이라고 한 바와 같이 伯咄靺鞨의 東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北史』 勿吉國傳도 대체로 『隋書』靺鞨傳을 거의 그대로 轉載하였으며, 『新唐書』黑水靺鞨傳에는 拂涅이 가끔 唐에 朝貢하였는데, 鯨睛·貂鼠·白兎皮등이 朝貢品으로 되어 있다.
金毓黻이 『册府元龜』를 검토한 바와 따르면 唐 玄宗 開元 2年에서 29年까지 실로 十數回에 걸친 遣唐이 있었음에도 (『渤海國志長編』 「屬部表」) 그 정확한 位置比定은 어렵다.
처음으로 拂涅의 位置比定을 하였던 것은 『吉林通志』인 바 지금 渤海王國의 上京龍泉府인 것으로 믿어지고 있는 東京城이 佛訥和城으로 칭하여지고 있어 그 音이 拂涅과 가까운 점으로 보아 東京城과 그 東北 80里인 寧古塔에서 三姓까지를 拂涅으로 比定한 바 있다.
音이 近似한 地點을 찾아 拂涅을 比定한 것으로는 다시 丁若鏞의 必兒漢說이 있다. 寧古塔의 西北 200里에 있는 必兒汗山에서 發源하는 必兒漢河의 西岸에 있는 必兒漢村 一帶가 拂涅의 故地라는 것이다(『我邦疆域考』 「渤海考」).
이와 같은 諸說에서 松井等은 『吉林通志』의 說을 거의 그대로 추종하였는데( 「渤海國の疆域」pp.429~430), 池內宏은 『遼史』 「地理志」遼州條에 遼州가 ‘本拂涅國城 渤海爲東平府 …… 太祖伐渤海 先破東平府 …… ’였다는 記事에서 契丹의 渤海征討에서 最初로 攻略한 것이 拂涅部였다면, 이 部는 당연히 契丹과 근접한 地點일 것이라고 믿어 이를 遼代의 寧江州 즉, 지금의 拉林河 上流인 大楡樹에 比定하였다( 「鐵利考」pp.25~35).
이에 대하여 다시 津田左右吉은 지금의 三姓 東인 螞蜒河 流域으로 比定하였으며( 「渤海考」pp.120~130) 日野開三郞은 그의 「靺鞨七部考」에서 緩芬河 上流를 그 中心地로 보고 西는 寧古塔方面에서 北은 穆稜河 流域에 이르고, 東은 海岸(沿海州)에까지 뻗혀 있었다는 見解를 피력하였다.
和田淸은 視角을 바꾸어 渤海國이 상당히 北方까지 發展한 뒤에도 唐과 接觸이 빈번하였던 것으로 보아 渤海國과는 比較的 遠距離이면서도 契丹에서는 가까운 距離를 찾아 지금의 哈爾濱 北岸인 呼蘭河 流域을 이에 比定한 바 있다( 「渤海國地理考」p.92).
<참조>
『隋書』靺鞨傳 註 6)
拂𣵀部
『吉林通志』에서는 寧安에서 依蘭에 이르는 寧古塔을 拂𣵀部의 居住地로 보았으며, 池內宏은 石頭城子·楡樹·五常을 포함한 地域으로( 「勿吉考」pp.1~70) , 松井等은 東京城 寧安地方을 포함하는 牧丹江 流域으로( 「渤海國の疆域」pp.429~430), 小川裕人은 張廣才嶺 以東의 森林地로( 「靺鞨史硏究に關する諸問題」pp.62~81), 日野開三郎은 張廣才嶺 以東의 森林地에서 瑚爾客河까지를( 「夫餘國考」pp.1~4), 鳥山喜一은 牧丹江 中流地域의 以東地城으로 각각 보았다( 「渤海王國の建設」p.53).
≪參考文獻≫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鮮歷史地理』卷1, 1913.
小川裕人, 「靺鞨史硏究に關する諸問題」『東洋史硏究』第2卷 5號, 1937.
日野開三郎, 「夫餘國考」『史淵』第34輯, 1946.
池內宏, 「勿吉考」『滿鮮史硏究』(上世篇) 第1册, 1951.
鳥山喜一, 「渤海王國の建設」『渤海史上の諸問題』1968.
≪參考文獻≫
『遼史』卷38 「地理志」遼州條.
『隋書』卷31 「東夷列傳」靺鞨條.
丁若鏞, 『我邦疆域考』卷5 「渤海考」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8 「屬部表」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津田左右吉,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915.
池內宏, 「鐵利考」『滿鮮史硏究』(中世篇) 第1册, 1933
日野開三郞, 「靺鞨七部考」『史淵』36·37合輯號.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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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22
拂涅部의 位置에 대해서는 諸說이 엇갈리고 있어 이곳에 세워진 東平府의 位置도 정확히 비정할 수 없다. 韓鎭書의 黑龍江 東端이며 海岸에 臨하였다는 比定(『續海東繹史』 「渤海」)도 『新唐書』黑水靺鞨傳의 誤讀에서이며 確證이 없다.
따라서 그 屬州인 伊·蒙·沱·黑·比의 5州에 대한 位置比定도 거의 불가능하며 金毓黻의 그 比定試圖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渤海國志長編』 「地理考」).
≪參考文獻≫
韓鎭書, 『續海東繹史』卷9 「渤海」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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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23
鐵利는 『新唐書』黑水靺鞨傳에
…… 又有拂涅·虞婁·越喜·鐵利等部 其地南距渤海 北·東際於海 西抵室韋 南北袤二千里 東西千里 拂涅·鐵利·虞婁·越喜時時通中國 …… 鐵利開元中六來 ……
라고 하여 唐代부터 中國에 처음으로 알려진 部族이다.
이 部族은 海上을 통하여 日本과도 往來하였을 뿐 아니라 『遼史』 「聖宗本紀」開泰 元年 丙申條에는 鐵驪의 이름으로 그 酋長 那沙가 遼에 佛像·儒書를 請하여 護國仁王像·易·詩·書·春秋·禮記 各 一部를 받아 갔다고 한다.
이 那沙는 또 『高麗史』顯宗 21年 夏四月 己亥條에 ‘鐵驪國王那沙 遣女眞計陀漠等來 獻貂鼠皮 淸曆日 許之’라고 한 것으로 보아 渤海國의 멸망 후에는 遼 및 高麗와 交涉이 있었던 部族이다.
丁若鏞은 宋의 開寶 5年에 鐵利王子가 馬·布·腽肭臍를 貢한 記事를 引用하여 豆滿江 北으로 興開(凱)湖의 南일지도 모른다고 臆測하고, 그들이 腽肭臍를 貢한 것을 그 證據로 제시한 바 있다(『我邦疆域考』 「渤海考」).
이에 대하여 松井等은 현재의 黑龍江과 烏蘇里江의 合流點으로 比定한 바 있다.( 「渤海國の疆域」p.418). 그 후 池內宏은 鐵利의 本據를 일찍이 夫餘·勿吉의 本據로 比定하여 生女眞 즉, 金朝의 發祥地인 阿勒楚喀河畔의 阿城 부근으로 比定한 바 있다( 「鐵利考」pp.15~177).
이와 같이 鐵利의 住地와 그 中心部에 대한 諸說이 엇갈리게 되었는데, 和田淸은 牧丹江이 松花江과 合流하는 地點의 左岸인 지금의 三姓對岸으로 比定하였다. 이 地方은 元明時代에는 斡朶里站으로서, 그 뒤에도 이 方面에 있어서의 要衝地였다( 「渤海國地理考」pp.99~100).
<참조>
『新唐書』黑水靺鞨傳 註 35)
鐵利〔部〕
鐵利部의 住地에 대해서는 異說이 많다. 즉, ① 圖們江北·與凱湖의 南說(丁若鏞, 「渤海考」)②黑龍·烏蘇里江下流 地域說(松井等, 『滿洲歷史地理』p.45 ; 鳥山喜一, 『渤海史考』 p.294) ③收丹江流域說(津田左右吉, 「遼の遼東經略」pp.282~285), ④ 阿什河流域說(池內宏, 「鐵利考」pp.43~53) ⑤ 松花江下流域의 依蘭地域說(小川裕人, 「鐵利の住地に就いて」)등이 있다. 이 중에서 小川裕人說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參考文獻≫
丁若鏞, 『我邦疆域考』卷5 「渤海考」
松井等, 『滿洲歷史地理』卷2, 1913
津田左右吉, 「遼の遼東經略」『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3, 1916.
池內宏, 「鐵利考」 『滿鮮史硏究』(中世篇) 第1册, 1933.
小川裕人, 「鐵利の住地に就いて」『史林』 22卷, 2號 1937.
烏山喜一, 『渤海史考』 1977, 原書房.
≪參考文獻≫
『高麗史』卷5 顯宗 21年條.
『新唐書』 卷219 「北狄列傳」 黑水靺鞨條.
『遼史』卷15 「聖宗本紀」開泰 元年條.
丁若鏞, 『我邦疆域考』卷5 「渤海考」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池內宏, 「鐵利考」『滿鮮史硏究』(中世篇) 第1册, 1933.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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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24
廣·汾·蒲·海·義·歸의 6州를 領하고 있었다는 鐵利部에 대하여 金毓黻은 各州의 位置比定을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渤海國志長編』 「地理考」).
和田淸도 鐵利府의 屬州에 대하여는 6州 모두 일체 밝힐 길이 없다고 하면서, 鐵利府가 拂涅故地의 東平府와 鄚頡府의 東에 接하여 그것이 斡朶里 附近에만 그치지 않고 松花江의 南北까지 포함하여 螞蟻河 流域까지 미치고, 南은 牧丹江의 流域을 거슬러 上京龍泉府와 접하고 있었던 것으로 比定한 바 있다( 「渤海國地理考」pp.99~100).
≪參考文獻≫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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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25
越喜는 『舊唐書』渤海靺鞨傳에는 振國 즉, 渤海建國 당시의 境域을 ‘其地在營州 之東二千里 南與新羅接 越喜靺鞨 東北至黑水靺鞨 地方二千里’라 하고 있다.
越喜靺鞨의 方向에 관하여 같은 史料를 전한 『册府元龜』의 ‘其地在營州之東二千里 …… 西接越喜靺鞨 …… ’이라는 記事를 보면 『舊唐書』의 記事에는 ‘西’字가 빠져있으며, 越喜가 渤海國에 西接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通典』安東府條에 ‘東至越喜部落二千五百里 …… 北至渤海一千九百五百里’라고 한 것에서 보면 唐에서 遠距離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 정확한 位置를 比定하려고 처음 시도하였던 『盛京通志』 「沿革志」鐵嶺條에 의하면 漢과 魏晋南北朝時代까지 鐵嶺은 挹婁國地였다가 隋代에 越喜國地가 되어 唐代에 이르러 ‘渤海大氏 取越喜也 改富州 屬懷遠府’라고 瀋陽 北인 지금의 鐵嶺을 옛 越喜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丁若鏞은 이와 같은 中國의 諸說을 批判否定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獨自的인 位置의 比定은 하지 않고 있다(『我邦疆域考』 「渤海考」).
한편 韓鎭書는 『遼史』 「地理志」東京道 信州條의 ‘ …… 本越喜故城 渤海置懷遠府今廢 聖宗以地鄰高麗 開泰初置州 …… ’라는 記事가 前揭한 『盛京通志』가 誤謬를 범한 根源이 되었다고 指摘하고, 鐵利와 더불어 越喜故地의 懷遠府는 모두 黑龍江地方에 있다고 臆測하고 있다(『續海東繹史』 「渤海」).
이상의 中國과 韓國學者의 主張과는 달리 松井等은 遼代의 兀惹이라는 部族은 唐代의 越喜이며, 또 兀惹의 西에 있는 越里吉이라는 部族도 어쩌면 越喜와 같은 部族이 아닌가 臆測하면서, 그 住地를 烏蘇里·松花江 兩江의 下流 地域으로 比定하였다( 「渤海國の疆域」p.419).
이에 대하여 池內宏는 지금의 長春 西南의 懷德 方面을 越喜의 옛 터로 比定하였으며( 「鐵利考」pp.35~43). 金毓黻은 沿海州의 海邊 地域으로 臆斷하였다(『渤海國志長編』 「地理考」). 즉 學者에 따라 그 方向에 엄청난 差異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和田淸은 『遼史』 「營衛志」에 보이는 盆奴里·剖阿里 등 遼代의 五國部中에 보이는 越里吉이 越喜이며, 金代의 胡里改路가 두어지기도 하였던 지금의 松花江 下流域 三姓 부근으로 比定하고 그 위치는 渤海國의 ‘西接’이 아니고 ‘北接’이나 『册府元龜』의 記事에서 ‘西接’이라 한 것은 ‘北接’의 誤記인 것으로 主張하고 있다( 「渤海國地理考」pp.101~106). 和田淸의 이 比定은 그 住地를 三姓부근으로 推斷하였던 鐵利의 住地와 그 境界가 명확히 그어지지 않는 결점이 있다.
<참조>
『新唐書』黑水靺鞨傳 駐 34)
越喜〔部〕
이 越喜部의 住地에 대해 地內宏은 지금의 長春 西南의 懹德 방면으로 비정하였고( 「鐵利考」pp.35~43), 金毓黻은 沿海州의 海邊 地域으로 비정하였으며(『渤海國志長編』 「地理考」), 和田淸은 지금의 松花江下流域 三姓 附近으로 비정하였다( 「渤海國地理考」pp.101~106).
≪參考文獻≫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池內宏, 「鐵利考」『滿鮮史硏究』(中世篇) 第1册, 1933.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參考文獻≫
『舊唐書』卷199下 「北狄列傳」渤海靺鞨條.
『遼史』卷33 「營衛志」; 卷38 「地理志」東京道 信州條.
『册府元龜』卷959 「外臣部」
『通典』卷180 安東府條.
『盛京通志』卷10 「沿革志」鐵嶺條.
丁若鏞, 『我邦疆域考』卷5 「渤海考」
韓鎭書, 『續海東繹史』卷9 「渤海」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池內宏, 「鐵利考」『滿鮮史硏究』(中世篇) 第1册, 1933.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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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26
府治를 비롯하여 그 屬州인 達·越·懷·紀·富·美·福·邪·芝의 9州에 대하여는 金毓黻 이 그 比定을 시도하였으나, 懷州가 首州였던 것으로 臆斷하였을 뿐 바람직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渤海國志長編』 「地理考」).
≪參考文獻≫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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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27
『遼史』 「地理志」東京道 慕州條에 ‘ …… 本渤海安遠府地 故縣二 慕化·崇平 …… 隷淥州 在西二百里’라고 하여 屬縣으로 慕化·崇平의 2縣을 領하고 있었으며, 渤海國의 西京鴨淥府의 府治인 淥州 西北, 200里 地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어 鴨綠江과 輝發河의 중간인 현재의 柳河縣 부근인 것 같다. 『大淸一統志』도 또 『遼史』 「地理志」의 記事를 거의 그대로 轉寫하고 있으나, 韓鎭書는 그 誤謬임을 指摘하고 이를 黑龍江 流域으로 比定한 바 있다(『續海東繹史』 「渤海」).
그 후 日本의 松井等도 『遼史』 「地理志」의 比定을 비판하고 安遠府를 松花江 下流로 推斷한 바 있다( 「渤海國の疆域」p.419). 金毓黻은 그 屬州인 郿州의 ‘郿’자가 ‘湄’와 通하며, 이는 현재의 興凱湖를 指稱한 湄沱湖에서 그 州名이 붙여진 것이므로, 安遠府와 郿州는 興凱湖 東岸인 것으로 推斷한 바 있다(『渤海國志長編』 「地理考」).
이상과 같은 諸說에 대하여 和田淸은 『新唐書』黑水靺鞨傳에 소위 北邊諸部中에 拂涅·鐵利·越喜등과 더불어 列記되어 있던 虞婁만이 湮滅하여 보이지 않게 된 것을 들어 黑水靺鞨과 接境하였던 虞婁가 黑水靺鞨에 擊滅되었다가 그 후 다시 渤海國에 倂呑되자 渤海國은 그 故地에 安遠府를 置한 것으로 臆斷하고, 그 住地는 松花江 下流인 것으로 比定하였다( 「渤海國地理考」pp.106~107).
≪參考文獻≫
『新唐書』卷219 「北狄列傳」黑水靺鞨條.
『遼史』卷38 「地理志」東京道 慕州條.
韓鎭書, 『續海東繹史』卷9 「渤海」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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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28
渤海國의 上記한 10府外에 다시 郢州·銅州·涑州의 3獨奏州가 있었으나, 郢州의 位置는 이를 比定할 수 있는 記事를 찾아볼 수 없다. 이에 和田淸은 狀況的인 判斷에 따라 渤海國 北方의 强藩인 鐵利·越喜와 上京龍泉府을 연결하는 大道上의 要衝으로 지금의 寧古塔 北方의 어느 地點에 置한 것이 아닌가 臆斷한 바 있다( 「渤海國地理考」p.109).
≪參考文獻≫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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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29
『遼史』 「地理志」咸州條에 ‘渤海置銅山郡 地在漢候城縣北 渤海龍泉府南 地多山險 寇盜以爲淵藪 …… ’라고 하여 渤海國이 銅山郡을 置한 지금의 開原인 遼金時代의 咸州로 比定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開原地方은 平地이므로 ‘地多山險’이라는 地勢에 맞지 않는다. 이에 金毓黻도 이를 開原 부근에 比定하는 데 의심을 품고 渤海國의 上京龍泉府 부근의 어느 地點에서 臆測한 바 있다(『渤海國志長編』 「地理考」). 和田淸도 金毓黻의 견해에 동조하면서 이를 上京龍泉府의 南과 中京顯德府의 北에서 兩京을 연결하는 交通路上의 險隘한 어느 地點으로 比定하였다( 「渤海國地理考」pp.108~109).
≪參考文獻≫
『遼史』卷38 「地理志」咸州條.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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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30
涑州에 대하여는 『吉林通志』 「沿革志」涑州條에서는 ‘今打牲烏拉城’이라고 하여 지금의 吉林에서 北으로 약 65里인 打牲烏拉으로 비정하였다. 松井等도 이를 추종하였으며( 「渤海國の疆域」p.421), 金毓黻도 지금의 吉林城 또는 烏拉城으로 臆斷한 바 있다. (『渤海國志長編』 「地理考」)
그 후 和田淸도 涑末江은 粟末水 즉, 지금의 松花江에 대한 渤海名이므로, 涑州는 지금의 吉林城 北인 烏拉街일 것이라고 斷定하여, 『吉林通志 沿革』說을 확인한 바 있다( 「渤海國地理考」p.108).
≪參考文獻≫
『吉林通志』卷10 「沿革志」上 涑州條.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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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31
『滿洲源流考』 「疆域」에서 獨奏州의 뜻에 대하여 ‘獨奏之義 猶今直隷州 不轄於府 而事得專達也’라고 하는 바와 같이 行政的으로 府에 屬하지 않고 中央政府에 直屬하는 直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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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32
南北朝時代에서 唐에 이르기까지 中國에서 지금의 松花江을 지칭한 水名이다. 『吉林通志』 「輿地志」山川 松花江條에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설명하고 있다.
長白山 在吉林東南 去府城六百餘里 去六百餘里 其巓有潭 曰闥門 周二十九里有奇 松花江出其北 松花江卽混同江也 本名松阿哩烏拉 魏曰速末水(『魏書』勿吉傳: 國有大水闊三里曰涑末水) 唐曰粟末(『新唐書』靺鞨傳: 粟末靺鞨水以居) 遼曰鴨子河改曰混同河(『遼史』 「地理志」: 本鴨子河 聖宗太平四年 改鴨子河爲混同江) 混同之名 始見於此 金元及明 皆曰宋瓦 明宣德時 始有松花江之名
<참조>
『魏書』 勿吉傳 註 13)
速末水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松花江을 지칭하는 말이다. 松花江의 歷代 名稱을 보면 三國시대에서 晋代까지는 弱水, 魏代에는 速末水, 隋·唐代에는 粟末水, 金代에는 宋瓦江·白江이라고 하였다. 金代에는 宋瓦江은 松阿里江과 같은 天河, 즉 은하수를 나타낸다고 하나, 실제로는 宋瓦·松阿里는 ‘희다(白)’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추측된다.
速末·粟末水의 速·粟은 ‘희다’의 뜻을 나타내는 土俗語이고, 末은 女眞語의 木克(Muke), 즉 물을 나타낸다. 따라서 速末은 ‘흰 물’이란 뜻인데, 고대의 弱水도 ‘희다’의 뜻을 가진 接頭語로 추측된다. 弱洛水·作樂水도 바로 이와 같은 예의 하나이다.
그러나 松花江도 上流의 北流 松花江과 中流·下流의 東流 松花江이 있는데, 本文의 ‘너비가 3리 남짓’한 松花江의 위치 비정에 따라 당시 勿吉의 居住地는 크게 달라진다. 勿吉의 居住地에 대해서는 두 가지 學說이 있는데, 津田左右吉은 速末水(粟末水)를 北流 松花江으로 보아 勿吉의 居住地를 石頭城子로 比定하였고, 池內宏은 速末水를 東流 松花江으로 보아, 夫餘가 멸망한 뒤 勿吉의 居住地를 哈爾賓 地方으로 比定하였다.
小川裕人은 弱水와 速末이 同一語라고 보는 推定이 가능하다면, 弱水는 晉代에 東流 松花江을 불렀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速末도 똑같이 東流 松花江의 명칭으로 되며, 따라서 勿吉國에 있었던 速末도 東流 松花江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池內宏의 勿吉 居住地가 哈爾賓 地方이란 說은 太魯水에서 동북쪽으로 가면 그 나라에 도착한다는 記事를 變改시키지 않고도 갈 수 있어 타당성이 많다고 하였다. ( 「靺鞨史硏究に關する諸問題」
일반적으로 勿吉의 居住地를 挹婁族의 居住地인 牧丹江 流域 이동지역이라고 보는 것이 通說인데, 이는 勿吉이 挹婁의 直系 後裔라고 보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挹婁와 勿吉을 同一系統의 種族이라고 보지 않는다면 勿吉의 居住地를 굳이 松花江 中流·下流 내지 牧丹江으로 比定할 수도 없다.
≪參考文獻≫
津田左右吉, 「勿吉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小川裕人, 「靺鞨史硏究に關する諸問題」『東洋史硏究』第 2 卷 5號, 1937.
池內宏, 「勿吉考」『滿鮮史硏究』(上),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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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33
渤海國에서 日本으로 가는 길은 東京龍原府인 지금의 琿春에서 그 東南인 Possjet 灣 附近에서 船便으로 日本의 能登·加賀 等郡에서 北으로 出羽·佐渡諸港에서 上陸하는 航路이다(『渤海國志長編』 「地理考」).
≪參考文獻≫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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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34
渤海國에서 新羅로 向하는 通路이다. 이 通路는 『三國史記』 「地理志」에 引用되어 있는 『古今郡國志』에 新羅의 泉井郡에서 柵城府 즉, 渤海國의 東京龍原府까지 무릇 39驛이었다고 하는 바, 唐制의 1驛間이 30里라는 計算에 따라 東京龍原府인 琿春에서 1,170里를 南下하여 대체로 元山의 西隣인 德源으로 比定되는 井泉郡까지이다(『渤海國志長編』 「地理考」).
≪參考文獻≫
『三國史記』卷37 「地理志」 所引 『古今郡國志』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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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35
渤海國의 朝貢使가 唐에 入貢하는 데 있어서의 通路이다. 『新唐書』 「地理志」에 引用되어 있는 賈耽의 『道里記』에
自鴨江口 舟行百餘里 及小舫泝流東北三十里 至泊汋口 得渤海之境 又泝流五百里 至丸都城·故高麗王都 又東北泝流二百里·至神州 又陸行四百里 至顯州 天寶中王所都 又正北如東六百里 至渤海王城
이라고 鴨淥江口에서 渤海國의 中京顯德府를 거쳐 上京龍泉府까지의 路程이 적혀 있다. 즉, 上京에서 中京·西京을 거쳐 鴨淥江口까지 나와 海路로 東海岸을 따라 旅順에 到達하고 다시 南으로 빠져 渤海灣을 질러 山東半島의 登州에서 上陸하여 陸路로 唐都 長安까지 가게 된다. 鴨淥江口에서의 海路利用은 唐의 先天 2年 渤海國에 派遣되었던 것으로 『舊唐書』渤海靺鞨傳에 적혀 있는 唐使 崔忻이 開元 2年(714)에 旅順에 들려 記念으로 샘(井) 2所를 팠다는 소위 鴻臚井의 碑가 露日戰爭時에 발견되어 日本帝寶로 所藏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渤海國에서 唐으로의 通路는 陸路로 營州(朝陽) 經由도 가능하였던 것이나, 이 通路는 突厥·契丹·奚 등에 의하여 梗塞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松井等, 「渤海國の疆域」pp.467~477; 金毓黻, 『渤海國志長編』 「地理考」).
≪參考文獻≫
『新唐書』卷43下 「地理志」所引 『道里記』.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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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36
渤海國에서 唐의 領土인 營州(朝陽)까지 가는 交通路를 말하는 것이다. 그 路順은 『新唐書』 「地理志」에 引用되어 있는 賈耽의 『道里記』에
營州東百八十里 至燕郡城 又經汝羅守提 渡遼水 至安東都護府五百里 府故漢襄平城也 …… 自都護府東北 經古蓋牟·新城, 又經渤海長嶺府千五百里 至渤海王城
이라고 되어 있다.
즉, 이 記事를 渤海國側에서 본다면 上京에서 輝發河의 流域에 있었던 것으로 比定되는 北山城子(長嶺府)를 거쳐 지금의 瀋陽근방으로 보이는 新城과 蓋牟에서 다시 그 西南인 遼陽을 경유하여 遼河를 건너 현재의 義州가 되는 燕郡城에 도달하고, 거기서 西로 180里인 營州에 도달하게 된다(鳥山喜一, 『渤海史考』pp.288~289; 和田淸, 「渤海國地理考」pp.68~69).
≪參考文獻≫
『新唐書』卷43下 「地理志」所引 『道里記』.
鳥山喜一, 『渤海史考』1915.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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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37
渤海國에서 契丹으로 가는 通路를 말한다. 渤海國의 扶餘가 松井等이 주장하여 거의 定說視 되었던 農安說에서 金毓黻이 主張한 昌圖 北의 四面城 부근으로 바뀌어지는 경향에 따라 이 路程도 달라진다.
즉, 上京龍泉府에서 지금의 嵩嶺(張廣才嶺)을 거쳐 扶餘府인 四面城 부근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懷德·梨樹·遼源 等地를 거쳐 契丹의 上京臨潢府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渤海國志長編』 「地理考」).
≪參考文獻≫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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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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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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