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이 매리포성 전투에서 승리하다
(
645년
01월
)
을사년(乙巳年; 645년; 선덕여왕 14) 정월에 〔유신이 왕경으로〕 돌아와 왕을 뵙기도 전에 변경을 지키던 관리[封人]가 급하게 백제의 대군이 와서 우리 매리포성(買利浦城)註 127을 공격한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또한 유신을 상주장군(上州將軍)註 128으로 임명하고, 〔백제 대군의 공격을〕 막도록 하였다. 유신은 명을 받자마자 곧바로 말을 타고 아내와 자식을 만나지 않고 〔매리포성으로 가〕 백제군을 맞아 싸워 물리쳐 2,000명의 목을 베었다.註 129
매리포성(買利浦城):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7 경상도 영산현 산천조에 “매포진(買浦津)은 ‘(영산)현의 남쪽 23리에 있다. 또 멸포(蔑浦)라고도 하는데, 곧 칠원현 우질포(亏叱浦) 하류이다.”라고 전한다. 또한 권32 경상도 칠원현 산천조에 “멸포(蔑浦)는 일명(一名) 매포(買浦)이며, (칠원)현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곧 우질포 하류이다.”라고 전한다. 매리포는 바로 매포, 즉 멸포를 가리킨다고 보인다. 매포는 경남 창녕군 길곡면 오호리와 경남 함안군 칠북면 봉촌리 외봉촌을 연결하는 나루였다. 조선시대에 매포는 대구와 현풍, 창녕, 영산을 지나 함안의 칠원과 창원, 마산, 진주 등지를 연결하던 대로상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였다(전덕재, 2007, 63~65쪽). 매리포성은 매포 근처에 위치한 성이었는데, 그것이 신라의 성이었다고 전하므로, 낙동강 동쪽에 위치하였다고 짐작된다. 한편 매리포를 현재 경남 밀양시 삼량진읍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김태식, 1997, 65쪽).
〈참고문헌〉
전덕재, 2007, 「삼국시대 황산진과 가야진에 대한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47
김태식, 1997, 「백제의 가야지역 관계사-교섭과 정복-」, 『백제의 중앙과 지방』,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참고문헌〉
전덕재, 2007, 「삼국시대 황산진과 가야진에 대한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47
김태식, 1997, 「백제의 가야지역 관계사-교섭과 정복-」, 『백제의 중앙과 지방』,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상주장군(上州將軍):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상주(尙州)조와 본서 권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8년(557)조에 따르면, 법흥왕 11년(525)에 상주(上州)를 설치하였다가 진흥왕 18년(557)에 상주(사벌주)를 폐하고 감문주를 설치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진흥왕 22년(561)에 건립된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에 상주(上州)가 확인되고, 본서 권34 잡지제3 지리1 양주(良州)조에 문무왕 5년(665)에 상주와 하주(下州)의 땅을 분할하여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하였다고 전하는 것을 볼 때, 상주(上州)는 진흥왕 22년(561) 이전에 설치되어 문무왕 5년(665)까지 존속하였다고 이해된다. 전국을 상주와 하주로 구분한 시기는 대체로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완비한 530년대의 법흥왕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전덕재, 2000, 287~289쪽). 상주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법흥왕 12년 봄 2월조가 참조된다.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1) 봄 2월조에 이찬(伊湌) 품일(品日)을 대당장군(大幢將軍), 잡찬 문충(文忠)을 상주장군(上州將軍), 아찬 의복(義服)을 하주장군(下州將軍), 무훌(武欻)과 욱천(旭川)을 남천대감(南川大監), 문품(文品)을 서당장군(誓幢將軍), 의광(義光)을 낭당장군(郎幢將軍)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이때 상주장군은 당시 상주(上州)의 주치(州治)인 일선(一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에 주둔한 정군단(停軍團)과 상주 예하의 군(郡)을 단위로 편성된 법당군당(法幢軍團)을 중심으로 구성된 행군군단(行軍軍團)을 지휘한 것으로 이해된다. 선덕왕 14년(645)에 김유신은 압량(주)군주였는데, 당시 압량(경북 경산시)은 하주(下州)의 영역에 위치하였다. 이때 선덕왕이 압량군주였던 김유신을 상주장군에 임명함에 따라, 김유신은 압량에 주둔한 정군단(停軍團)뿐만 아니라 당시 상주(上州)를 단위로 하여 편성된 행군군단도 함께 지휘하였다고 볼 수 있다(전덕재, 2001, 76~77쪽).
〈참고문헌〉
전덕재, 2000, 「6세기 초반 신라 6부의 성격과 지배구조」, 『한국고대사연구』 17
전덕재, 2001, 「신라 중고기 주의 성격 변화와 군주」, 『역사와 현실』 40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1) 봄 2월조에 이찬(伊湌) 품일(品日)을 대당장군(大幢將軍), 잡찬 문충(文忠)을 상주장군(上州將軍), 아찬 의복(義服)을 하주장군(下州將軍), 무훌(武欻)과 욱천(旭川)을 남천대감(南川大監), 문품(文品)을 서당장군(誓幢將軍), 의광(義光)을 낭당장군(郎幢將軍)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이때 상주장군은 당시 상주(上州)의 주치(州治)인 일선(一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에 주둔한 정군단(停軍團)과 상주 예하의 군(郡)을 단위로 편성된 법당군당(法幢軍團)을 중심으로 구성된 행군군단(行軍軍團)을 지휘한 것으로 이해된다. 선덕왕 14년(645)에 김유신은 압량(주)군주였는데, 당시 압량(경북 경산시)은 하주(下州)의 영역에 위치하였다. 이때 선덕왕이 압량군주였던 김유신을 상주장군에 임명함에 따라, 김유신은 압량에 주둔한 정군단(停軍團)뿐만 아니라 당시 상주(上州)를 단위로 하여 편성된 행군군단도 함께 지휘하였다고 볼 수 있다(전덕재, 2001, 76~77쪽).
〈참고문헌〉
전덕재, 2000, 「6세기 초반 신라 6부의 성격과 지배구조」, 『한국고대사연구』 17
전덕재, 2001, 「신라 중고기 주의 성격 변화와 군주」, 『역사와 현실』 40
을사년(乙巳年; 645년; 선덕여왕 14) 정월에 … 2,000명의 목을 베었다: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선덕왕 14년(645) 봄 정월조에 “유신(庾信)이 백제를 치고 돌아와서 아직 왕을 뵙지도 않았는데, 백제의 대군이 다시 와서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왕이 명하여 막게 하였으므로 〔김유신은〕 끝내 집에 이르지도 못하고 가서 이를 공격하여 깨뜨리고 2,000명의 목을 베었다.”고 전한다.
註) 127
매리포성(買利浦城):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7 경상도 영산현 산천조에 “매포진(買浦津)은 ‘(영산)현의 남쪽 23리에 있다. 또 멸포(蔑浦)라고도 하는데, 곧 칠원현 우질포(亏叱浦) 하류이다.”라고 전한다. 또한 권32 경상도 칠원현 산천조에 “멸포(蔑浦)는 일명(一名) 매포(買浦)이며, (칠원)현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곧 우질포 하류이다.”라고 전한다. 매리포는 바로 매포, 즉 멸포를 가리킨다고 보인다. 매포는 경남 창녕군 길곡면 오호리와 경남 함안군 칠북면 봉촌리 외봉촌을 연결하는 나루였다. 조선시대에 매포는 대구와 현풍, 창녕, 영산을 지나 함안의 칠원과 창원, 마산, 진주 등지를 연결하던 대로상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였다(전덕재, 2007, 63~65쪽). 매리포성은 매포 근처에 위치한 성이었는데, 그것이 신라의 성이었다고 전하므로, 낙동강 동쪽에 위치하였다고 짐작된다. 한편 매리포를 현재 경남 밀양시 삼량진읍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김태식, 1997, 65쪽).
〈참고문헌〉
전덕재, 2007, 「삼국시대 황산진과 가야진에 대한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47
김태식, 1997, 「백제의 가야지역 관계사-교섭과 정복-」, 『백제의 중앙과 지방』,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참고문헌〉
전덕재, 2007, 「삼국시대 황산진과 가야진에 대한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47
김태식, 1997, 「백제의 가야지역 관계사-교섭과 정복-」, 『백제의 중앙과 지방』,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註) 128
상주장군(上州將軍):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상주(尙州)조와 본서 권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8년(557)조에 따르면, 법흥왕 11년(525)에 상주(上州)를 설치하였다가 진흥왕 18년(557)에 상주(사벌주)를 폐하고 감문주를 설치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진흥왕 22년(561)에 건립된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에 상주(上州)가 확인되고, 본서 권34 잡지제3 지리1 양주(良州)조에 문무왕 5년(665)에 상주와 하주(下州)의 땅을 분할하여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하였다고 전하는 것을 볼 때, 상주(上州)는 진흥왕 22년(561) 이전에 설치되어 문무왕 5년(665)까지 존속하였다고 이해된다. 전국을 상주와 하주로 구분한 시기는 대체로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완비한 530년대의 법흥왕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전덕재, 2000, 287~289쪽). 상주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법흥왕 12년 봄 2월조가 참조된다.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1) 봄 2월조에 이찬(伊湌) 품일(品日)을 대당장군(大幢將軍), 잡찬 문충(文忠)을 상주장군(上州將軍), 아찬 의복(義服)을 하주장군(下州將軍), 무훌(武欻)과 욱천(旭川)을 남천대감(南川大監), 문품(文品)을 서당장군(誓幢將軍), 의광(義光)을 낭당장군(郎幢將軍)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이때 상주장군은 당시 상주(上州)의 주치(州治)인 일선(一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에 주둔한 정군단(停軍團)과 상주 예하의 군(郡)을 단위로 편성된 법당군당(法幢軍團)을 중심으로 구성된 행군군단(行軍軍團)을 지휘한 것으로 이해된다. 선덕왕 14년(645)에 김유신은 압량(주)군주였는데, 당시 압량(경북 경산시)은 하주(下州)의 영역에 위치하였다. 이때 선덕왕이 압량군주였던 김유신을 상주장군에 임명함에 따라, 김유신은 압량에 주둔한 정군단(停軍團)뿐만 아니라 당시 상주(上州)를 단위로 하여 편성된 행군군단도 함께 지휘하였다고 볼 수 있다(전덕재, 2001, 76~77쪽).
〈참고문헌〉
전덕재, 2000, 「6세기 초반 신라 6부의 성격과 지배구조」, 『한국고대사연구』 17
전덕재, 2001, 「신라 중고기 주의 성격 변화와 군주」, 『역사와 현실』 40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1) 봄 2월조에 이찬(伊湌) 품일(品日)을 대당장군(大幢將軍), 잡찬 문충(文忠)을 상주장군(上州將軍), 아찬 의복(義服)을 하주장군(下州將軍), 무훌(武欻)과 욱천(旭川)을 남천대감(南川大監), 문품(文品)을 서당장군(誓幢將軍), 의광(義光)을 낭당장군(郎幢將軍)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이때 상주장군은 당시 상주(上州)의 주치(州治)인 일선(一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에 주둔한 정군단(停軍團)과 상주 예하의 군(郡)을 단위로 편성된 법당군당(法幢軍團)을 중심으로 구성된 행군군단(行軍軍團)을 지휘한 것으로 이해된다. 선덕왕 14년(645)에 김유신은 압량(주)군주였는데, 당시 압량(경북 경산시)은 하주(下州)의 영역에 위치하였다. 이때 선덕왕이 압량군주였던 김유신을 상주장군에 임명함에 따라, 김유신은 압량에 주둔한 정군단(停軍團)뿐만 아니라 당시 상주(上州)를 단위로 하여 편성된 행군군단도 함께 지휘하였다고 볼 수 있다(전덕재, 2001, 76~77쪽).
〈참고문헌〉
전덕재, 2000, 「6세기 초반 신라 6부의 성격과 지배구조」, 『한국고대사연구』 17
전덕재, 2001, 「신라 중고기 주의 성격 변화와 군주」, 『역사와 현실』 40
註) 129
을사년(乙巳年; 645년; 선덕여왕 14) 정월에 … 2,000명의 목을 베었다: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선덕왕 14년(645) 봄 정월조에 “유신(庾信)이 백제를 치고 돌아와서 아직 왕을 뵙지도 않았는데, 백제의 대군이 다시 와서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왕이 명하여 막게 하였으므로 〔김유신은〕 끝내 집에 이르지도 못하고 가서 이를 공격하여 깨뜨리고 2,000명의 목을 베었다.”고 전한다.
주제분류
-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