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과의 우호관계가 단절되다
(
기원전
11년
07월
)
〔8년(B.C. 11)〕 가을 7월에 마수성(馬首城)註 001을 쌓고 병산책(甁山柵)註 002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사신이 다음과 같이 아뢰어 말하였다.註 003
병산책(甁山柵) : 마수성과 인접한 포천 부근의 특정 지역으로 보는 견해(金起燮, 6~13쪽; 이용빈, 37쪽)와 이천, 평강, 김화 등의 교통로 상에 위치한 것으로 보는 견해(文安植, 2006)가 있다. 본서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11년(B.C. 8)조와 다루왕 7년(34)조에도 말갈이 병산책을 습격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참고문헌〉
金起燮, 1994, 「百濟 近肖古王代의 北境」, 『軍史』 29
이용빈, 2002, 『百濟 地方統治制度 硏究』, 서경문화사
文安植, 2006, 「백제 한성기 北界와 東界의 변천」, 『百濟硏究』 44
〈참고문헌〉
金起燮, 1994, 「百濟 近肖古王代의 北境」, 『軍史』 29
이용빈, 2002, 『百濟 地方統治制度 硏究』, 서경문화사
文安植, 2006, 「백제 한성기 北界와 東界의 변천」, 『百濟硏究』 44
낙랑태수의 사신이 다음과 같이 아뢰어 말하였다 : 마수산은 본서 권23 백제본기1 다루왕 3년(30) 10월조를 보면 백제의 동부를 방어하고 있다. 『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 예조에 따르면 춘천을 비롯한 영서예(嶺西濊) 지역은 B.C. 75년 이후 평양에 위치한 낙랑군이 직접 관할했기 때문에 낙랑군의 태수가 백제가 동쪽으로 영서예 지역에 접근하여 방어시설을 쌓는 것을 질책한 것이다. 초기백제는 말갈세력으로 인해 북쪽으로는 평양의 낙랑군과 직접 만날 수 없었고, 영서예 지역으로 뻗어내려온 낙랑군의 변경과 서로 맞닿아 있는 백제의 동계를 통해 낙랑군과 우호 또는 적대관계를 유지했다고 본다(尹善泰, 2001, 「馬韓의 辰王과 臣濆沽國」, 『百濟硏究』 34, 21쪽).
“지난번에는 서로 예를 갖추어 방문하고, 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의 강역을 핍박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고 있으니, 혹시 야금야금 먹어 들어올 계책이 있어서인가? 만일 옛날의 우호를 저버리지 않고 성을 허물고 목책을 부수어 버린다면 시기하고 의심할 바가 없겠지만, 혹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청컨대 한 번 싸워서 승부를 결정짓도록 하자.”
註) 001
註) 002
註) 003
낙랑태수의 사신이 다음과 같이 아뢰어 말하였다 : 마수산은 본서 권23 백제본기1 다루왕 3년(30) 10월조를 보면 백제의 동부를 방어하고 있다. 『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 예조에 따르면 춘천을 비롯한 영서예(嶺西濊) 지역은 B.C. 75년 이후 평양에 위치한 낙랑군이 직접 관할했기 때문에 낙랑군의 태수가 백제가 동쪽으로 영서예 지역에 접근하여 방어시설을 쌓는 것을 질책한 것이다. 초기백제는 말갈세력으로 인해 북쪽으로는 평양의 낙랑군과 직접 만날 수 없었고, 영서예 지역으로 뻗어내려온 낙랑군의 변경과 서로 맞닿아 있는 백제의 동계를 통해 낙랑군과 우호 또는 적대관계를 유지했다고 본다(尹善泰, 2001, 「馬韓의 辰王과 臣濆沽國」, 『百濟硏究』 3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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