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을 공격하려 구곡까지 행차하다
(
기원전
1년
11월
)
〔18년(B.C. 1)〕 11월에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註 001을 습격하려고 구곡(臼谷)註 002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우두산성(牛頭山城) : 춘천을 일컫는 우두주‧우수주‧우두군 등과 연계시켜 현재의 춘천지방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千寬宇, 118쪽; 김병남, 107쪽). 이와 달리 낙랑이 백제의 북쪽에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황해도 금천군 우봉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356쪽), 춘천의 맥국을 낙랑군의 부용국으로 보는 입장에서 낙랑의 우두산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견해(金澤均, 135쪽) 등이 있다. 본서 권37 잡지6 지리4에도 우수주가 나오는데 우수주는 우두주라고도 하고 수차약(首次若) 또는 오근내(烏根乃)라고도 한다고 되어 있다.
〈참고문헌〉
千寬宇,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下)」, 『韓國學報』 3, 一志社
李丙燾,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金澤均, 1985, 「春川 貊國說에 關한 硏究」, 『白山學報』 30·31
김병남, 2001, 「百濟 領土變遷史 硏究」, 全北大學校 博士學位論文
〈참고문헌〉
千寬宇,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下)」, 『韓國學報』 3, 一志社
李丙燾,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金澤均, 1985, 「春川 貊國說에 關한 硏究」, 『白山學報』 30·31
김병남, 2001, 「百濟 領土變遷史 硏究」, 全北大學校 博士學位論文
註) 001
우두산성(牛頭山城) : 춘천을 일컫는 우두주‧우수주‧우두군 등과 연계시켜 현재의 춘천지방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千寬宇, 118쪽; 김병남, 107쪽). 이와 달리 낙랑이 백제의 북쪽에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황해도 금천군 우봉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356쪽), 춘천의 맥국을 낙랑군의 부용국으로 보는 입장에서 낙랑의 우두산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견해(金澤均, 135쪽) 등이 있다. 본서 권37 잡지6 지리4에도 우수주가 나오는데 우수주는 우두주라고도 하고 수차약(首次若) 또는 오근내(烏根乃)라고도 한다고 되어 있다.
〈참고문헌〉
千寬宇,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下)」, 『韓國學報』 3, 一志社
李丙燾,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金澤均, 1985, 「春川 貊國說에 關한 硏究」, 『白山學報』 30·31
김병남, 2001, 「百濟 領土變遷史 硏究」, 全北大學校 博士學位論文
〈참고문헌〉
千寬宇,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下)」, 『韓國學報』 3, 一志社
李丙燾,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金澤均, 1985, 「春川 貊國說에 關한 硏究」, 『白山學報』 30·31
김병남, 2001, 「百濟 領土變遷史 硏究」, 全北大學校 博士學位論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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