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는 그 시초가 東夷의 三韓國인데 [三韓國의] 하나는 馬韓이요,
○ 百濟註 081
『梁書』百濟傳의 이 記事들은『三國志』 「東夷傳」韓條의 記錄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 資料의 出處는『三國志』보다는『後漢書』의 資料를 引用하였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馬韓이 ‘五十四國’이라는 것은『後漢書』 「東夷列傳」韓條에 나오는 記錄이며, 『三國志』에서는 그렇게 기술하지 않고 馬韓이 ‘五十餘國’이라고만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梁書』百濟傳에는 百濟가 馬韓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는 바 이것은 아마도『後漢書』에서 언급한 부분을 採用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結果인 것 같다.『後漢書』에서는 韓傳에서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이라 하여 伯濟가 그 중에 하나라는 것을 밝혀주고 있다.『梁書』百濟傳에서도 百濟가 그 중에 하나라고 언급하고 있으니 여기에서 伯濟와 百濟를 同一視하였음을 보게 된다. 사실 馬韓의 한 나라로서의 伯濟國과 三國의 百濟가 同一한 實體인가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현재 學界에서는 같은 性格의 것으로 파악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이들이 같다고 證明할 만한 자료는 없다. 다만 伯濟와 百濟가 音이 유사하고 또한 伯濟가 諸小國을 合倂하였기 때문에 百濟라고 이름이 바뀌었을 可能性은 있으나 이것도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參考文獻≫
『後漢書』卷85 「東夷列傳」韓條.
『三國志』卷30 「東夷傳」韓條.
千寬宇, 「南北의 古代國家」『新東亞』97, 1972; 「馬韓諸國의 位置 試論」『東洋學』9, 1979.
金貞培, 「古代社會에 있어 馬韓의 性格」『晧園』2, 1974; 「百濟建國의 諸問題」『百濟文化』7·8合輯, 1976.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李鍾旭, 「百濟의 國家形成」『大丘史學』11, 1976.
坂元義種, 「譯註中國史書百濟傳」『百濟史の硏究』1979, 塙書房.
≪參考文獻≫
『後漢書』卷85 「東夷列傳」韓條.
『三國志』卷30 「東夷傳」韓條.
千寬宇, 「南北의 古代國家」『新東亞』97, 1972; 「馬韓諸國의 位置 試論」『東洋學』9, 1979.
金貞培, 「古代社會에 있어 馬韓의 性格」『晧園』2, 1974; 「百濟建國의 諸問題」『百濟文化』7·8合輯, 1976.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李鍾旭, 「百濟의 國家形成」『大丘史學』11, 1976.
坂元義種, 「譯註中國史書百濟傳」『百濟史の硏究』1979, 塙書房.
百濟註 082는 그 시초가 東夷의 三韓國인데 [三韓國의] 하나는 馬韓이요, 다른 하나는 辰韓이요, 또 하나는 弁韓이었다. 弁韓과 辰韓은 각각 12國이 있었고 馬韓은 54國이 있었다. 大國은 1萬餘家, 小國은 數千家로서 모두 10餘萬戶가 되었는데, 百濟는 곧 그 중의 한 나라였다. 뒤에 점점 강대하여져서 여러 작은 나라들을 합쳤다.
백제 왕실은 원래 부여족으로 晋의 太康 6·7년경(285~286)에 만주에서 慕容氏에게 멸망된 부여의 일파가 남하하여 함경도 지방의 沃沮로 들어가고, 다시 서남쪽으로 내려와서 마한의 1국인 伯濟國에 정착하여, 마한을 결합하고 통일의 주도권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참조>
『魏書』百濟傳 註 2)
百濟國
(가) 國號
國號와 관련, 參考할 史料는 다음과 같다.
①『後漢書』 「東夷列傳」韓條: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②『梁書』 「東夷列傳」百濟條 및『南史』 「夷貊列傳」百濟條: 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辰韓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卽其一也
③『隋書』 「東夷列傳」百濟條: …… (中略) ……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④『北史』 「列傳」百濟條 …… (中略) …… 初以百家濟 因號百濟
⑤『三國史記』 「百濟本紀」始祖溫祚王條: …… (中略) ……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城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이러한 史料를 採用, 語源的으로 해석하여 ‘伯濟=百濟=찻=밝은 성’이라고 한 견해도 있고, (李丙燾, 「歷代國號의 變遷」pp.22~23) 歷史的·國家段階의 發展으로 把握하여 ‘伯濟=百濟=部族國家=部族聯盟國家(征服的 팽창단계)로 발전했다고 한 硏究도 있다.(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p.48; 李萬烈, 「三國의 抗爭」p.463)
(나) 建國說話
百濟 建國說話와 關係있는 史料는『三國史記』外에 中國·日本의 史書에도 기재되어 있다. 百濟의 建國始祖說話는 대체로 아래의 네 가지로 分類할 수 있다.
① 始祖 溫祚說(『三國史記』 「百濟本紀」)
② 始祖 沸流說(同上 割註)
③ 始祖 都慕說(『續日本記』 「桓武紀」延歷 9년(790) 7월조)
④ 始祖 仇台說(『周書』및『隋書』百濟傳)
이 중 ③의 始祖 都慕說은 百濟 멸망 후 日本에 이주한 왕실의 後裔氏族인 이른바 百濟王 仁貞이 百濟의 太祖를 都慕王이라 하였는데 이 都慕는 鄒牟(朱蒙)를 가리키는 것과, 『新撰姓氏錄』에 수록되어 있는 百濟계통 후예씨족들의 系譜에 그들 각자의 中始祖인 貴首王·毘有王·武寧王을 모두 都慕王의 후손이라 기록하고 있어, 日本에 망명한 百濟왕족의 후예들이 시조를 都慕王으로 여기고 있는 데서 百濟가 본래 高句麗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어떤 族團에 의해서 건국된 나라임을 짐작케 해주고 있으며, (李基東, 『韓國史講座』p.131) 이는 全 扶餘族이 共通으로 가지는 始祖 東明說이다.(金哲埈, 「百濟建國考」p.8)
④의 始祖 仇台說은 建國說話가 아니라 古爾王代에 百濟國家가 성장하여 이를 인식하게 된 中國側의 史實 記錄의 성격을 가지는 것인 바 이에 대해서는『周書』및『隋書』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①과 ②의 始祖 溫祚說과 始祖 沸流說은 建國主體勢力·出身·建國年代·王室系譜 등의 문제로까지 발전되어지기 때문에 百濟史硏究에 있어서 始發點이 된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복잡성을 띄고 있는데, 金哲埈은 百濟의 溫祚 始祖說話는 東明神話의 成立期間보다는 뒤늦은 그 다음 단계에서 東明神話가 再生産되는 형태로 성립되었던 까닭에 東明神話의 附屬的인 性格을 면치 못하나, 그것이 神話的 性格의 것이 아니라, 說話 傳承의 性格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 說話의 歷史性이 보다 信憑되는 면이 있는데, 北扶餘·高句麗(卒本扶餘)·東濊(東扶餘)·百濟(南扶餘)가 分裂하기 이전 段階에 北中國 어느 地域 原住地에(『魏書』에 보이는 ‘昔北方有槀離之國者’의 槀離之國도 原住地는 아닌 것 같고, 지금으로서는 山東省 방면으로 추측함) 있었던 全 扶餘族의 生活圈이 무너지면서 各部族別로 東으로 移動할 때에 東明神話의 發生이 있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原住地에 있었을 적에도 그 原貌를 알 수는 없으나 다른 形態의 神話가 따로 있었는데, 第1次 分裂이 있었을 적의 神話가 古之亡人인 北扶餘族의 東明神話로 나타났고, 第2次 分裂時의 所産은 高句麗系의 東明神話로서, 이것은 1次 所産인 北扶餘의 槀離國說話와 高句麗 太祖王系 이후의 高句麗 王系神話를 연결시킨 것이며, 그 다음 第3次로서는 高句麗의 傍系로서의 百濟의 溫祚說話가 성립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始祖 溫祚說話 자체는 始祖 沸流說話보다 後期에 成立되면서 뒷 時代의 윤색을 받았다고 하였다.(金哲埈, 앞의 논문, pp.10~45)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3 「百濟本紀」1 始祖溫祚王條.
『後漢書』卷85 「東夷列傳」韓條.
『梁書』卷54 「東夷列傳」百濟條.
『隋書』卷81 「東夷列傳」百濟條.
『南史』卷79 「東夷列傳」下 百濟條.
『北史』卷94 「列傳」百濟條.
『續日本記』卷40 「桓武紀」延歷 9年條.
李弘稙, 「百濟建國說話에 대한 再檢討」『韓國古代史의 硏究』1971, 新丘文化社.
李丙燾, 「歷代國號의 變遷」『斗室餘滴』1975, 博英社.
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韓國古代社會硏究』1975, 知識産業社; 「百濟建國考」『百濟硏究』13, 1983.
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三韓攷-」『韓國學報』2·3合輯, 1976.
李鍾旭, 「百濟의 國家形成」『大丘學報」11, 1976; 「百濟王國의 成立」『大丘學報』12·13合輯, 1977.
李萬烈, 「三國의 抗爭」『韓國史』2, 1978, 국사편찬위원회.
車勇杰, 「百濟의 祭天祀地와 政治體制의 變化」『韓國學報』11, 1978.
盧明鎬,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歷史學硏究』X, 1981.
李基東, 「百濟 王室交代論에 대하여」『百濟硏究』12, 1981(『百濟硏究』13 再收錄, 1983.
盧重國, 「百濟國의 成立과 發展」『震檀學報』60(韓國文化심포지움『百濟初期文化의 綜合的 檢討』1985)
<참조>
『魏書』百濟傳 註 2)
百濟國
(가) 國號
國號와 관련, 參考할 史料는 다음과 같다.
①『後漢書』 「東夷列傳」韓條: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②『梁書』 「東夷列傳」百濟條 및『南史』 「夷貊列傳」百濟條: 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辰韓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卽其一也
③『隋書』 「東夷列傳」百濟條: …… (中略) ……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④『北史』 「列傳」百濟條 …… (中略) …… 初以百家濟 因號百濟
⑤『三國史記』 「百濟本紀」始祖溫祚王條: …… (中略) ……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城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이러한 史料를 採用, 語源的으로 해석하여 ‘伯濟=百濟=찻=밝은 성’이라고 한 견해도 있고, (李丙燾, 「歷代國號의 變遷」pp.22~23) 歷史的·國家段階의 發展으로 把握하여 ‘伯濟=百濟=部族國家=部族聯盟國家(征服的 팽창단계)로 발전했다고 한 硏究도 있다.(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p.48; 李萬烈, 「三國의 抗爭」p.463)
(나) 建國說話
百濟 建國說話와 關係있는 史料는『三國史記』外에 中國·日本의 史書에도 기재되어 있다. 百濟의 建國始祖說話는 대체로 아래의 네 가지로 分類할 수 있다.
① 始祖 溫祚說(『三國史記』 「百濟本紀」)
② 始祖 沸流說(同上 割註)
③ 始祖 都慕說(『續日本記』 「桓武紀」延歷 9년(790) 7월조)
④ 始祖 仇台說(『周書』및『隋書』百濟傳)
이 중 ③의 始祖 都慕說은 百濟 멸망 후 日本에 이주한 왕실의 後裔氏族인 이른바 百濟王 仁貞이 百濟의 太祖를 都慕王이라 하였는데 이 都慕는 鄒牟(朱蒙)를 가리키는 것과, 『新撰姓氏錄』에 수록되어 있는 百濟계통 후예씨족들의 系譜에 그들 각자의 中始祖인 貴首王·毘有王·武寧王을 모두 都慕王의 후손이라 기록하고 있어, 日本에 망명한 百濟왕족의 후예들이 시조를 都慕王으로 여기고 있는 데서 百濟가 본래 高句麗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어떤 族團에 의해서 건국된 나라임을 짐작케 해주고 있으며, (李基東, 『韓國史講座』p.131) 이는 全 扶餘族이 共通으로 가지는 始祖 東明說이다.(金哲埈, 「百濟建國考」p.8)
④의 始祖 仇台說은 建國說話가 아니라 古爾王代에 百濟國家가 성장하여 이를 인식하게 된 中國側의 史實 記錄의 성격을 가지는 것인 바 이에 대해서는『周書』및『隋書』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①과 ②의 始祖 溫祚說과 始祖 沸流說은 建國主體勢力·出身·建國年代·王室系譜 등의 문제로까지 발전되어지기 때문에 百濟史硏究에 있어서 始發點이 된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복잡성을 띄고 있는데, 金哲埈은 百濟의 溫祚 始祖說話는 東明神話의 成立期間보다는 뒤늦은 그 다음 단계에서 東明神話가 再生産되는 형태로 성립되었던 까닭에 東明神話의 附屬的인 性格을 면치 못하나, 그것이 神話的 性格의 것이 아니라, 說話 傳承의 性格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 說話의 歷史性이 보다 信憑되는 면이 있는데, 北扶餘·高句麗(卒本扶餘)·東濊(東扶餘)·百濟(南扶餘)가 分裂하기 이전 段階에 北中國 어느 地域 原住地에(『魏書』에 보이는 ‘昔北方有槀離之國者’의 槀離之國도 原住地는 아닌 것 같고, 지금으로서는 山東省 방면으로 추측함) 있었던 全 扶餘族의 生活圈이 무너지면서 各部族別로 東으로 移動할 때에 東明神話의 發生이 있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原住地에 있었을 적에도 그 原貌를 알 수는 없으나 다른 形態의 神話가 따로 있었는데, 第1次 分裂이 있었을 적의 神話가 古之亡人인 北扶餘族의 東明神話로 나타났고, 第2次 分裂時의 所産은 高句麗系의 東明神話로서, 이것은 1次 所産인 北扶餘의 槀離國說話와 高句麗 太祖王系 이후의 高句麗 王系神話를 연결시킨 것이며, 그 다음 第3次로서는 高句麗의 傍系로서의 百濟의 溫祚說話가 성립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始祖 溫祚說話 자체는 始祖 沸流說話보다 後期에 成立되면서 뒷 時代의 윤색을 받았다고 하였다.(金哲埈, 앞의 논문, pp.10~45)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3 「百濟本紀」1 始祖溫祚王條.
『後漢書』卷85 「東夷列傳」韓條.
『梁書』卷54 「東夷列傳」百濟條.
『隋書』卷81 「東夷列傳」百濟條.
『南史』卷79 「東夷列傳」下 百濟條.
『北史』卷94 「列傳」百濟條.
『續日本記』卷40 「桓武紀」延歷 9年條.
李弘稙, 「百濟建國說話에 대한 再檢討」『韓國古代史의 硏究』1971, 新丘文化社.
李丙燾, 「歷代國號의 變遷」『斗室餘滴』1975, 博英社.
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韓國古代社會硏究』1975, 知識産業社; 「百濟建國考」『百濟硏究』13, 1983.
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三韓攷-」『韓國學報』2·3合輯, 1976.
李鍾旭, 「百濟의 國家形成」『大丘學報」11, 1976; 「百濟王國의 成立」『大丘學報』12·13合輯, 1977.
李萬烈, 「三國의 抗爭」『韓國史』2, 1978, 국사편찬위원회.
車勇杰, 「百濟의 祭天祀地와 政治體制의 變化」『韓國學報』11, 1978.
盧明鎬,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歷史學硏究』X, 1981.
李基東, 「百濟 王室交代論에 대하여」『百濟硏究』12, 1981(『百濟硏究』13 再收錄, 1983.
盧重國, 「百濟國의 成立과 發展」『震檀學報』60(韓國文化심포지움『百濟初期文化의 綜合的 檢討』1985)
그 나라는 본래 [高]句驪와 더불어 遼東의 동쪽에 있었다. 晋나라 때에 이르러 [高]句驪가 이미 遼東을 경략하자, 百濟 역시 遼西·晋平 2郡의 땅을 점거하여 스스로 百濟郡을 설치하였다.註 083
『宋書』伯濟國傳에 이에 관한 사실이 기술되어 있는데, 百濟의 遼西經略은 近肖古王代(346~374)의 일로 보인다.
<참조>
『宋書』百濟傳 註 4)
百濟略有遼西
百濟가 遼西地方을 占有하였다는 事實은 『宋書』·『梁書』 등의 中國史書에 등장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百濟의 遼西경략에 대해서는 여기의 『宋書』 보다 『梁書』 百濟傳에서 한층 자세한 전말을 읽을 수 있다. 『梁書』 百濟傳에는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晋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이라는 句節이 있다.
이 자료를 『宋書』와 비교하여 보면 百濟郡까지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梁書』의 기술은 당시 사신들의 來往이 잦았던 점에서 신빙성이 있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百濟의 遼西경략설은 『南史』의 百濟傳에도 同一하게 보이고 있으나, 『晋書』에서는 馬韓傳으로 대치시켜 놓았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들이 除外되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 이야기해야 할 것은 『職貢圖』의 百濟國使條에 보이는 記錄들이다. 이 記錄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百濟는 원래 來夷였던 馬韓에 속했던 나라이다. 晋末에 高句麗가 遼東 樂浪을 略有하였고 (百濟가) 遼西의 晋平縣을 略有하였다. 晋나라 시기부터 中國에 대하여 늘 貢物을 바쳐 常朝하였다.
『職貢圖』에 보이는 百濟國使의 記錄은 百濟를 說明하는 조항이지 高句麗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高句麗가 遼東 樂浪을 점유하였고 또한 遼西의 晋平縣을 略有하였다고 서술해 놓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본 『梁書』의 구체적인 記錄이나 여기『宋書』의 記錄과 차이가 나고 있다. 따라서 『職貢圖』百濟國使條에 보이는 記錄에는 百濟라는 두 글자가 빠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遼西의 晋平縣을 점유한 것은 高句麗가 아니고 百濟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우리나라측의 史書인 『三國史記』나 『三國遺事』에는 이러한 사실이 실려 있지 않은데 이것은 新羅 中心의 歷史서술에서 나타난 결과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료의 누락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사항은 百濟가 晋나라 때 遼西·晋平 2郡을 차지하였다고 하는 바 바로『晋書』에 그러한 記錄이 없다는 점에서 이를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參考文獻≫
『梁書』 卷54 「諸夷列傳」 百濟條.
『職貢圖』 百濟國使條.
申采浩, 『朝鮮上古史』 1948.
金庠基, 「百濟의 遼西經略에 對하여」『白山學報』3, 1967.
李弘稙, 「梁職貢圖論攷」『韓國古代史硏究』1971, 新丘文化社.
方善柱,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白山學報』11, 1971; 「薉·百濟關係虎符에 대하여」『史叢』17·18合輯, 1973.
成周鐸, 「對外關係에서 본 百濟文化의 發達」『百濟硏究』2, 1971.
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武寧王陵發掘調査報告書』1973.
李萬烈, 「百濟의 成立과 發展」『講座三國時代史』1976.
盧泰敦, 「古代國家의 成立과 發展」『韓國史』2, 1978, 國史編纂委員會.
李玟洙, 「百濟의 遼西經略에 關한 考察」『韓社大論文集』10, 1980.
徐榮洙, 「古代韓中關係硏究試論」『學術論叢』5, 1981.
李明揆, 「百濟對外關係에 關한 一試論-大陸進出說 考察을 위한 하나의 假說로서-」『史學硏究』37, 1983.
朴京哲, 「高句麗軍事行動에 關한 一考察- 5~7C 高句麗大陸政策과 關聯하여-」『高大大學院碩士學位論文』1985.
김세익, 「중국 요서지방에 있었던 백제의 군에 대하여」『력사과학』1, 1967.
<참조>
『宋書』百濟傳 註 4)
百濟略有遼西
百濟가 遼西地方을 占有하였다는 事實은 『宋書』·『梁書』 등의 中國史書에 등장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百濟의 遼西경략에 대해서는 여기의 『宋書』 보다 『梁書』 百濟傳에서 한층 자세한 전말을 읽을 수 있다. 『梁書』 百濟傳에는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晋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이라는 句節이 있다.
이 자료를 『宋書』와 비교하여 보면 百濟郡까지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梁書』의 기술은 당시 사신들의 來往이 잦았던 점에서 신빙성이 있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百濟의 遼西경략설은 『南史』의 百濟傳에도 同一하게 보이고 있으나, 『晋書』에서는 馬韓傳으로 대치시켜 놓았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들이 除外되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 이야기해야 할 것은 『職貢圖』의 百濟國使條에 보이는 記錄들이다. 이 記錄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百濟는 원래 來夷였던 馬韓에 속했던 나라이다. 晋末에 高句麗가 遼東 樂浪을 略有하였고 (百濟가) 遼西의 晋平縣을 略有하였다. 晋나라 시기부터 中國에 대하여 늘 貢物을 바쳐 常朝하였다.
『職貢圖』에 보이는 百濟國使의 記錄은 百濟를 說明하는 조항이지 高句麗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高句麗가 遼東 樂浪을 점유하였고 또한 遼西의 晋平縣을 略有하였다고 서술해 놓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본 『梁書』의 구체적인 記錄이나 여기『宋書』의 記錄과 차이가 나고 있다. 따라서 『職貢圖』百濟國使條에 보이는 記錄에는 百濟라는 두 글자가 빠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遼西의 晋平縣을 점유한 것은 高句麗가 아니고 百濟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우리나라측의 史書인 『三國史記』나 『三國遺事』에는 이러한 사실이 실려 있지 않은데 이것은 新羅 中心의 歷史서술에서 나타난 결과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료의 누락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사항은 百濟가 晋나라 때 遼西·晋平 2郡을 차지하였다고 하는 바 바로『晋書』에 그러한 記錄이 없다는 점에서 이를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參考文獻≫
『梁書』 卷54 「諸夷列傳」 百濟條.
『職貢圖』 百濟國使條.
申采浩, 『朝鮮上古史』 1948.
金庠基, 「百濟의 遼西經略에 對하여」『白山學報』3, 1967.
李弘稙, 「梁職貢圖論攷」『韓國古代史硏究』1971, 新丘文化社.
方善柱,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白山學報』11, 1971; 「薉·百濟關係虎符에 대하여」『史叢』17·18合輯, 1973.
成周鐸, 「對外關係에서 본 百濟文化의 發達」『百濟硏究』2, 1971.
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武寧王陵發掘調査報告書』1973.
李萬烈, 「百濟의 成立과 發展」『講座三國時代史』1976.
盧泰敦, 「古代國家의 成立과 發展」『韓國史』2, 1978, 國史編纂委員會.
李玟洙, 「百濟의 遼西經略에 關한 考察」『韓社大論文集』10, 1980.
徐榮洙, 「古代韓中關係硏究試論」『學術論叢』5, 1981.
李明揆, 「百濟對外關係에 關한 一試論-大陸進出說 考察을 위한 하나의 假說로서-」『史學硏究』37, 1983.
朴京哲, 「高句麗軍事行動에 關한 一考察- 5~7C 高句麗大陸政策과 關聯하여-」『高大大學院碩士學位論文』1985.
김세익, 「중국 요서지방에 있었던 백제의 군에 대하여」『력사과학』1, 1967.
註) 081
『梁書』百濟傳의 이 記事들은『三國志』 「東夷傳」韓條의 記錄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 資料의 出處는『三國志』보다는『後漢書』의 資料를 引用하였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馬韓이 ‘五十四國’이라는 것은『後漢書』 「東夷列傳」韓條에 나오는 記錄이며, 『三國志』에서는 그렇게 기술하지 않고 馬韓이 ‘五十餘國’이라고만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梁書』百濟傳에는 百濟가 馬韓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는 바 이것은 아마도『後漢書』에서 언급한 부분을 採用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結果인 것 같다.『後漢書』에서는 韓傳에서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이라 하여 伯濟가 그 중에 하나라는 것을 밝혀주고 있다.『梁書』百濟傳에서도 百濟가 그 중에 하나라고 언급하고 있으니 여기에서 伯濟와 百濟를 同一視하였음을 보게 된다. 사실 馬韓의 한 나라로서의 伯濟國과 三國의 百濟가 同一한 實體인가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현재 學界에서는 같은 性格의 것으로 파악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이들이 같다고 證明할 만한 자료는 없다. 다만 伯濟와 百濟가 音이 유사하고 또한 伯濟가 諸小國을 合倂하였기 때문에 百濟라고 이름이 바뀌었을 可能性은 있으나 이것도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參考文獻≫
『後漢書』卷85 「東夷列傳」韓條.
『三國志』卷30 「東夷傳」韓條.
千寬宇, 「南北의 古代國家」『新東亞』97, 1972; 「馬韓諸國의 位置 試論」『東洋學』9, 1979.
金貞培, 「古代社會에 있어 馬韓의 性格」『晧園』2, 1974; 「百濟建國의 諸問題」『百濟文化』7·8合輯, 1976.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李鍾旭, 「百濟의 國家形成」『大丘史學』11, 1976.
坂元義種, 「譯註中國史書百濟傳」『百濟史の硏究』1979, 塙書房.

≪參考文獻≫
『後漢書』卷85 「東夷列傳」韓條.
『三國志』卷30 「東夷傳」韓條.
千寬宇, 「南北의 古代國家」『新東亞』97, 1972; 「馬韓諸國의 位置 試論」『東洋學』9, 1979.
金貞培, 「古代社會에 있어 馬韓의 性格」『晧園』2, 1974; 「百濟建國의 諸問題」『百濟文化』7·8合輯, 1976.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李鍾旭, 「百濟의 國家形成」『大丘史學』11, 1976.
坂元義種, 「譯註中國史書百濟傳」『百濟史の硏究』1979, 塙書房.
註) 082
백제 왕실은 원래 부여족으로 晋의 太康 6·7년경(285~286)에 만주에서 慕容氏에게 멸망된 부여의 일파가 남하하여 함경도 지방의 沃沮로 들어가고, 다시 서남쪽으로 내려와서 마한의 1국인 伯濟國에 정착하여, 마한을 결합하고 통일의 주도권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참조>
『魏書』百濟傳 註 2)
百濟國
(가) 國號
國號와 관련, 參考할 史料는 다음과 같다.
①『後漢書』 「東夷列傳」韓條: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②『梁書』 「東夷列傳」百濟條 및『南史』 「夷貊列傳」百濟條: 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辰韓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卽其一也
③『隋書』 「東夷列傳」百濟條: …… (中略) ……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④『北史』 「列傳」百濟條 …… (中略) …… 初以百家濟 因號百濟
⑤『三國史記』 「百濟本紀」始祖溫祚王條: …… (中略) ……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城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이러한 史料를 採用, 語源的으로 해석하여 ‘伯濟=百濟=찻=밝은 성’이라고 한 견해도 있고, (李丙燾, 「歷代國號의 變遷」pp.22~23) 歷史的·國家段階의 發展으로 把握하여 ‘伯濟=百濟=部族國家=部族聯盟國家(征服的 팽창단계)로 발전했다고 한 硏究도 있다.(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p.48; 李萬烈, 「三國의 抗爭」p.463)
(나) 建國說話
百濟 建國說話와 關係있는 史料는『三國史記』外에 中國·日本의 史書에도 기재되어 있다. 百濟의 建國始祖說話는 대체로 아래의 네 가지로 分類할 수 있다.
① 始祖 溫祚說(『三國史記』 「百濟本紀」)
② 始祖 沸流說(同上 割註)
③ 始祖 都慕說(『續日本記』 「桓武紀」延歷 9년(790) 7월조)
④ 始祖 仇台說(『周書』및『隋書』百濟傳)
이 중 ③의 始祖 都慕說은 百濟 멸망 후 日本에 이주한 왕실의 後裔氏族인 이른바 百濟王 仁貞이 百濟의 太祖를 都慕王이라 하였는데 이 都慕는 鄒牟(朱蒙)를 가리키는 것과, 『新撰姓氏錄』에 수록되어 있는 百濟계통 후예씨족들의 系譜에 그들 각자의 中始祖인 貴首王·毘有王·武寧王을 모두 都慕王의 후손이라 기록하고 있어, 日本에 망명한 百濟왕족의 후예들이 시조를 都慕王으로 여기고 있는 데서 百濟가 본래 高句麗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어떤 族團에 의해서 건국된 나라임을 짐작케 해주고 있으며, (李基東, 『韓國史講座』p.131) 이는 全 扶餘族이 共通으로 가지는 始祖 東明說이다.(金哲埈, 「百濟建國考」p.8)
④의 始祖 仇台說은 建國說話가 아니라 古爾王代에 百濟國家가 성장하여 이를 인식하게 된 中國側의 史實 記錄의 성격을 가지는 것인 바 이에 대해서는『周書』및『隋書』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①과 ②의 始祖 溫祚說과 始祖 沸流說은 建國主體勢力·出身·建國年代·王室系譜 등의 문제로까지 발전되어지기 때문에 百濟史硏究에 있어서 始發點이 된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복잡성을 띄고 있는데, 金哲埈은 百濟의 溫祚 始祖說話는 東明神話의 成立期間보다는 뒤늦은 그 다음 단계에서 東明神話가 再生産되는 형태로 성립되었던 까닭에 東明神話의 附屬的인 性格을 면치 못하나, 그것이 神話的 性格의 것이 아니라, 說話 傳承의 性格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 說話의 歷史性이 보다 信憑되는 면이 있는데, 北扶餘·高句麗(卒本扶餘)·東濊(東扶餘)·百濟(南扶餘)가 分裂하기 이전 段階에 北中國 어느 地域 原住地에(『魏書』에 보이는 ‘昔北方有槀離之國者’의 槀離之國도 原住地는 아닌 것 같고, 지금으로서는 山東省 방면으로 추측함) 있었던 全 扶餘族의 生活圈이 무너지면서 各部族別로 東으로 移動할 때에 東明神話의 發生이 있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原住地에 있었을 적에도 그 原貌를 알 수는 없으나 다른 形態의 神話가 따로 있었는데, 第1次 分裂이 있었을 적의 神話가 古之亡人인 北扶餘族의 東明神話로 나타났고, 第2次 分裂時의 所産은 高句麗系의 東明神話로서, 이것은 1次 所産인 北扶餘의 槀離國說話와 高句麗 太祖王系 이후의 高句麗 王系神話를 연결시킨 것이며, 그 다음 第3次로서는 高句麗의 傍系로서의 百濟의 溫祚說話가 성립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始祖 溫祚說話 자체는 始祖 沸流說話보다 後期에 成立되면서 뒷 時代의 윤색을 받았다고 하였다.(金哲埈, 앞의 논문, pp.10~45)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3 「百濟本紀」1 始祖溫祚王條.
『後漢書』卷85 「東夷列傳」韓條.
『梁書』卷54 「東夷列傳」百濟條.
『隋書』卷81 「東夷列傳」百濟條.
『南史』卷79 「東夷列傳」下 百濟條.
『北史』卷94 「列傳」百濟條.
『續日本記』卷40 「桓武紀」延歷 9年條.
李弘稙, 「百濟建國說話에 대한 再檢討」『韓國古代史의 硏究』1971, 新丘文化社.
李丙燾, 「歷代國號의 變遷」『斗室餘滴』1975, 博英社.
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韓國古代社會硏究』1975, 知識産業社; 「百濟建國考」『百濟硏究』13, 1983.
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三韓攷-」『韓國學報』2·3合輯, 1976.
李鍾旭, 「百濟의 國家形成」『大丘學報」11, 1976; 「百濟王國의 成立」『大丘學報』12·13合輯, 1977.
李萬烈, 「三國의 抗爭」『韓國史』2, 1978, 국사편찬위원회.
車勇杰, 「百濟의 祭天祀地와 政治體制의 變化」『韓國學報』11, 1978.
盧明鎬,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歷史學硏究』X, 1981.
李基東, 「百濟 王室交代論에 대하여」『百濟硏究』12, 1981(『百濟硏究』13 再收錄, 1983.
盧重國, 「百濟國의 成立과 發展」『震檀學報』60(韓國文化심포지움『百濟初期文化의 綜合的 檢討』1985)

<참조>
『魏書』百濟傳 註 2)
百濟國
(가) 國號
國號와 관련, 參考할 史料는 다음과 같다.
①『後漢書』 「東夷列傳」韓條: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②『梁書』 「東夷列傳」百濟條 및『南史』 「夷貊列傳」百濟條: 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辰韓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卽其一也
③『隋書』 「東夷列傳」百濟條: …… (中略) ……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④『北史』 「列傳」百濟條 …… (中略) …… 初以百家濟 因號百濟
⑤『三國史記』 「百濟本紀」始祖溫祚王條: …… (中略) ……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城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이러한 史料를 採用, 語源的으로 해석하여 ‘伯濟=百濟=찻=밝은 성’이라고 한 견해도 있고, (李丙燾, 「歷代國號의 變遷」pp.22~23) 歷史的·國家段階의 發展으로 把握하여 ‘伯濟=百濟=部族國家=部族聯盟國家(征服的 팽창단계)로 발전했다고 한 硏究도 있다.(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p.48; 李萬烈, 「三國의 抗爭」p.463)
(나) 建國說話
百濟 建國說話와 關係있는 史料는『三國史記』外에 中國·日本의 史書에도 기재되어 있다. 百濟의 建國始祖說話는 대체로 아래의 네 가지로 分類할 수 있다.
① 始祖 溫祚說(『三國史記』 「百濟本紀」)
② 始祖 沸流說(同上 割註)
③ 始祖 都慕說(『續日本記』 「桓武紀」延歷 9년(790) 7월조)
④ 始祖 仇台說(『周書』및『隋書』百濟傳)
이 중 ③의 始祖 都慕說은 百濟 멸망 후 日本에 이주한 왕실의 後裔氏族인 이른바 百濟王 仁貞이 百濟의 太祖를 都慕王이라 하였는데 이 都慕는 鄒牟(朱蒙)를 가리키는 것과, 『新撰姓氏錄』에 수록되어 있는 百濟계통 후예씨족들의 系譜에 그들 각자의 中始祖인 貴首王·毘有王·武寧王을 모두 都慕王의 후손이라 기록하고 있어, 日本에 망명한 百濟왕족의 후예들이 시조를 都慕王으로 여기고 있는 데서 百濟가 본래 高句麗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어떤 族團에 의해서 건국된 나라임을 짐작케 해주고 있으며, (李基東, 『韓國史講座』p.131) 이는 全 扶餘族이 共通으로 가지는 始祖 東明說이다.(金哲埈, 「百濟建國考」p.8)
④의 始祖 仇台說은 建國說話가 아니라 古爾王代에 百濟國家가 성장하여 이를 인식하게 된 中國側의 史實 記錄의 성격을 가지는 것인 바 이에 대해서는『周書』및『隋書』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①과 ②의 始祖 溫祚說과 始祖 沸流說은 建國主體勢力·出身·建國年代·王室系譜 등의 문제로까지 발전되어지기 때문에 百濟史硏究에 있어서 始發點이 된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복잡성을 띄고 있는데, 金哲埈은 百濟의 溫祚 始祖說話는 東明神話의 成立期間보다는 뒤늦은 그 다음 단계에서 東明神話가 再生産되는 형태로 성립되었던 까닭에 東明神話의 附屬的인 性格을 면치 못하나, 그것이 神話的 性格의 것이 아니라, 說話 傳承의 性格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 說話의 歷史性이 보다 信憑되는 면이 있는데, 北扶餘·高句麗(卒本扶餘)·東濊(東扶餘)·百濟(南扶餘)가 分裂하기 이전 段階에 北中國 어느 地域 原住地에(『魏書』에 보이는 ‘昔北方有槀離之國者’의 槀離之國도 原住地는 아닌 것 같고, 지금으로서는 山東省 방면으로 추측함) 있었던 全 扶餘族의 生活圈이 무너지면서 各部族別로 東으로 移動할 때에 東明神話의 發生이 있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原住地에 있었을 적에도 그 原貌를 알 수는 없으나 다른 形態의 神話가 따로 있었는데, 第1次 分裂이 있었을 적의 神話가 古之亡人인 北扶餘族의 東明神話로 나타났고, 第2次 分裂時의 所産은 高句麗系의 東明神話로서, 이것은 1次 所産인 北扶餘의 槀離國說話와 高句麗 太祖王系 이후의 高句麗 王系神話를 연결시킨 것이며, 그 다음 第3次로서는 高句麗의 傍系로서의 百濟의 溫祚說話가 성립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始祖 溫祚說話 자체는 始祖 沸流說話보다 後期에 成立되면서 뒷 時代의 윤색을 받았다고 하였다.(金哲埈, 앞의 논문, pp.10~45)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3 「百濟本紀」1 始祖溫祚王條.
『後漢書』卷85 「東夷列傳」韓條.
『梁書』卷54 「東夷列傳」百濟條.
『隋書』卷81 「東夷列傳」百濟條.
『南史』卷79 「東夷列傳」下 百濟條.
『北史』卷94 「列傳」百濟條.
『續日本記』卷40 「桓武紀」延歷 9年條.
李弘稙, 「百濟建國說話에 대한 再檢討」『韓國古代史의 硏究』1971, 新丘文化社.
李丙燾, 「歷代國號의 變遷」『斗室餘滴』1975, 博英社.
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韓國古代社會硏究』1975, 知識産業社; 「百濟建國考」『百濟硏究』13, 1983.
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三韓攷-」『韓國學報』2·3合輯, 1976.
李鍾旭, 「百濟의 國家形成」『大丘學報」11, 1976; 「百濟王國의 成立」『大丘學報』12·13合輯, 1977.
李萬烈, 「三國의 抗爭」『韓國史』2, 1978, 국사편찬위원회.
車勇杰, 「百濟의 祭天祀地와 政治體制의 變化」『韓國學報』11, 1978.
盧明鎬,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歷史學硏究』X, 1981.
李基東, 「百濟 王室交代論에 대하여」『百濟硏究』12, 1981(『百濟硏究』13 再收錄, 1983.
盧重國, 「百濟國의 成立과 發展」『震檀學報』60(韓國文化심포지움『百濟初期文化의 綜合的 檢討』1985)
註) 083
『宋書』伯濟國傳에 이에 관한 사실이 기술되어 있는데, 百濟의 遼西經略은 近肖古王代(346~374)의 일로 보인다.
<참조>
『宋書』百濟傳 註 4)
百濟略有遼西
百濟가 遼西地方을 占有하였다는 事實은 『宋書』·『梁書』 등의 中國史書에 등장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百濟의 遼西경략에 대해서는 여기의 『宋書』 보다 『梁書』 百濟傳에서 한층 자세한 전말을 읽을 수 있다. 『梁書』 百濟傳에는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晋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이라는 句節이 있다.
이 자료를 『宋書』와 비교하여 보면 百濟郡까지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梁書』의 기술은 당시 사신들의 來往이 잦았던 점에서 신빙성이 있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百濟의 遼西경략설은 『南史』의 百濟傳에도 同一하게 보이고 있으나, 『晋書』에서는 馬韓傳으로 대치시켜 놓았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들이 除外되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 이야기해야 할 것은 『職貢圖』의 百濟國使條에 보이는 記錄들이다. 이 記錄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百濟는 원래 來夷였던 馬韓에 속했던 나라이다. 晋末에 高句麗가 遼東 樂浪을 略有하였고 (百濟가) 遼西의 晋平縣을 略有하였다. 晋나라 시기부터 中國에 대하여 늘 貢物을 바쳐 常朝하였다.
『職貢圖』에 보이는 百濟國使의 記錄은 百濟를 說明하는 조항이지 高句麗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高句麗가 遼東 樂浪을 점유하였고 또한 遼西의 晋平縣을 略有하였다고 서술해 놓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본 『梁書』의 구체적인 記錄이나 여기『宋書』의 記錄과 차이가 나고 있다. 따라서 『職貢圖』百濟國使條에 보이는 記錄에는 百濟라는 두 글자가 빠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遼西의 晋平縣을 점유한 것은 高句麗가 아니고 百濟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우리나라측의 史書인 『三國史記』나 『三國遺事』에는 이러한 사실이 실려 있지 않은데 이것은 新羅 中心의 歷史서술에서 나타난 결과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료의 누락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사항은 百濟가 晋나라 때 遼西·晋平 2郡을 차지하였다고 하는 바 바로『晋書』에 그러한 記錄이 없다는 점에서 이를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參考文獻≫
『梁書』 卷54 「諸夷列傳」 百濟條.
『職貢圖』 百濟國使條.
申采浩, 『朝鮮上古史』 1948.
金庠基, 「百濟의 遼西經略에 對하여」『白山學報』3, 1967.
李弘稙, 「梁職貢圖論攷」『韓國古代史硏究』1971, 新丘文化社.
方善柱,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白山學報』11, 1971; 「薉·百濟關係虎符에 대하여」『史叢』17·18合輯, 1973.
成周鐸, 「對外關係에서 본 百濟文化의 發達」『百濟硏究』2, 1971.
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武寧王陵發掘調査報告書』1973.
李萬烈, 「百濟의 成立과 發展」『講座三國時代史』1976.
盧泰敦, 「古代國家의 成立과 發展」『韓國史』2, 1978, 國史編纂委員會.
李玟洙, 「百濟의 遼西經略에 關한 考察」『韓社大論文集』10, 1980.
徐榮洙, 「古代韓中關係硏究試論」『學術論叢』5, 1981.
李明揆, 「百濟對外關係에 關한 一試論-大陸進出說 考察을 위한 하나의 假說로서-」『史學硏究』37, 1983.
朴京哲, 「高句麗軍事行動에 關한 一考察- 5~7C 高句麗大陸政策과 關聯하여-」『高大大學院碩士學位論文』1985.
김세익, 「중국 요서지방에 있었던 백제의 군에 대하여」『력사과학』1, 1967.

<참조>
『宋書』百濟傳 註 4)
百濟略有遼西
百濟가 遼西地方을 占有하였다는 事實은 『宋書』·『梁書』 등의 中國史書에 등장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百濟의 遼西경략에 대해서는 여기의 『宋書』 보다 『梁書』 百濟傳에서 한층 자세한 전말을 읽을 수 있다. 『梁書』 百濟傳에는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晋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이라는 句節이 있다.
이 자료를 『宋書』와 비교하여 보면 百濟郡까지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梁書』의 기술은 당시 사신들의 來往이 잦았던 점에서 신빙성이 있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百濟의 遼西경략설은 『南史』의 百濟傳에도 同一하게 보이고 있으나, 『晋書』에서는 馬韓傳으로 대치시켜 놓았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들이 除外되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 이야기해야 할 것은 『職貢圖』의 百濟國使條에 보이는 記錄들이다. 이 記錄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百濟는 원래 來夷였던 馬韓에 속했던 나라이다. 晋末에 高句麗가 遼東 樂浪을 略有하였고 (百濟가) 遼西의 晋平縣을 略有하였다. 晋나라 시기부터 中國에 대하여 늘 貢物을 바쳐 常朝하였다.
『職貢圖』에 보이는 百濟國使의 記錄은 百濟를 說明하는 조항이지 高句麗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高句麗가 遼東 樂浪을 점유하였고 또한 遼西의 晋平縣을 略有하였다고 서술해 놓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본 『梁書』의 구체적인 記錄이나 여기『宋書』의 記錄과 차이가 나고 있다. 따라서 『職貢圖』百濟國使條에 보이는 記錄에는 百濟라는 두 글자가 빠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遼西의 晋平縣을 점유한 것은 高句麗가 아니고 百濟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우리나라측의 史書인 『三國史記』나 『三國遺事』에는 이러한 사실이 실려 있지 않은데 이것은 新羅 中心의 歷史서술에서 나타난 결과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료의 누락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사항은 百濟가 晋나라 때 遼西·晋平 2郡을 차지하였다고 하는 바 바로『晋書』에 그러한 記錄이 없다는 점에서 이를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參考文獻≫
『梁書』 卷54 「諸夷列傳」 百濟條.
『職貢圖』 百濟國使條.
申采浩, 『朝鮮上古史』 1948.
金庠基, 「百濟의 遼西經略에 對하여」『白山學報』3, 1967.
李弘稙, 「梁職貢圖論攷」『韓國古代史硏究』1971, 新丘文化社.
方善柱,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白山學報』11, 1971; 「薉·百濟關係虎符에 대하여」『史叢』17·18合輯, 1973.
成周鐸, 「對外關係에서 본 百濟文化의 發達」『百濟硏究』2, 1971.
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武寧王陵發掘調査報告書』1973.
李萬烈, 「百濟의 成立과 發展」『講座三國時代史』1976.
盧泰敦, 「古代國家의 成立과 發展」『韓國史』2, 1978, 國史編纂委員會.
李玟洙, 「百濟의 遼西經略에 關한 考察」『韓社大論文集』10, 1980.
徐榮洙, 「古代韓中關係硏究試論」『學術論叢』5, 1981.
李明揆, 「百濟對外關係에 關한 一試論-大陸進出說 考察을 위한 하나의 假說로서-」『史學硏究』37, 1983.
朴京哲, 「高句麗軍事行動에 關한 一考察- 5~7C 高句麗大陸政策과 關聯하여-」『高大大學院碩士學位論文』1985.
김세익, 「중국 요서지방에 있었던 백제의 군에 대하여」『력사과학』1,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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