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외국전

왕망(王莽)이 흉노를 공격하고자 오한의 무리를 끌어들이니 오환이 원망을 품음

  • 국가
    오환(烏桓)
왕망(王莽) 주 001
각주 001)
王莽(전45~후23; 재위 5~23): 전한시대 魏郡 元城縣 사람으로, 字는 巨君이며, 漢元帝의 皇后 王政君의 조카이다. 黃門郞·射聲校尉를 지냈고 成帝 永始元年(전16)에 新都侯에 봉해졌다. 騎都尉 光祿大夫 給事中이 되어 외척 淳于長을 탄핵하여 정직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綏和元年(전8)에 大司馬에 임명되었다가 哀帝 즉위 후 外戚 丁氏와 傅氏에 밀려 면직되었다가 哀帝 사후 王政君이 太皇太后로서 臨朝稱制하자 다시 大司馬로 임명하여 平帝를 옹립할 것을 모의하여 安漢公에 제수되었다. 빈민구제와 博士 증원 등으로 민심을 얻었다. 元始 5년(후5)에 平帝 사후 孺子 嬰을 옹립한 후 周公의 예를 본떠 假皇帝라 자칭했다가 初始元年(8)에 자립하여 皇帝가 되고 國號를 ‘新’이라 칭하고, 年號를 始建國이라 하였다. 각종 개혁정책을 실시했으나 실패하였고, 대외정책에도 실패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地皇 4년(23)에 綠林軍이 長安을 점령하자 살해되었다.
닫기
이 제위(帝位)를 찬탈한 후 흉노를 공격하고자 하여 12부(部)의 군대를 일으켜주 002
각주 002)
『漢書』「匈奴傳」에도 12部의 장군을 임명하여 10道에서 동시에 匈奴를 공격하게 한 기사가 보인다(『漢書』권94上 「匈奴傳」: 3824, “莽新卽位, 怙府庫之富欲立威, 乃拜十二部將率, 發郡國勇士, 武庫精兵, 各有所屯守, 轉委輸於邊. 議滿三十萬衆, 齎三百日糧, 同時十道並出, 窮追匈奴, 內之于丁令, 因分其地, 立呼韓邪十五子.”).
닫기
동역장(東域將) 엄우(嚴尤) 주 003
각주 003)
嚴尤: 王莽이 세운 신의 무장으로 활동하였다. 納言, 納言將軍, 納言大將軍, 討穢將軍, 大司馬 등을 역임하였음, 武建伯에 봉해졌다. 匈奴·高句麗 등과의 전쟁에 참전하였고, 후에는 更始帝 劉玄의 군대를 막기 위해 陳茂와 함께 파견되었다가 潁川·昆陽·淯陽 등지에서 패하고 更始帝의 군대에 항복하였다. 23년 10월에 更始帝의 명령으로 陳茂와 함께 주살되었다.
닫기
에게 오환과 정령의 병사들을 지휘하여 대군(代郡) 주 004
각주 004)
代郡: 戰國時代 趙가 설치하였다. 秦과 前漢 때의 治所는 代縣(지금 河北省 蔚縣 서남)이었다. 前漢시대 관할구역은 지금 河北省 懷安, 蔚縣 이서, 山西省 陽高, 渾源 이동에 있는 장성 안팎의 땅과 함께 장성 밖에 있는 東洋河 유역이었다. 後漢時代에 高柳縣(지금 陽高縣 서남)으로 治所를 옮겼다가 西晉時代 말에 폐지되었다.
닫기
에 주둔하도록 하고 [오환과 정령 병사들의] 처자를 군현(郡縣)에 인질로 남겨두도록 하였다. 오환 사람들은 [대군의] 풍토(水土)에 적응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주둔하고 쉬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차례 되돌아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왕망이 그들을 보내주려 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오환은] 스스로 달아나거나 반란을 일으켰고, [원래 살던 곳에] 돌아와서는 약탈하고 도적질하였다. 그래서 여러 군(郡)에서는 그들이 억류해 놓았던 인질들을 모두 다 죽여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오환 사람들은] 왕망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흉노는 오환의 우두머리[豪帥]주 005
각주 005)
豪帥: 우두머리라는 뜻인데, 史書에서는 특히 무장반란을 일으킨 주모자나 부족의 首領을 지칭하였다.
닫기
를 유인하여 관리[吏]로 삼고 나머지는 [우두머리들을 통해] 고삐에 매어 끌어당기는 것처럼 속하도록 하였다.주 006
각주 006)
『三國志』에는 이 단락 전체의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닫기


  • 각주 001)
    王莽(전45~후23; 재위 5~23): 전한시대 魏郡 元城縣 사람으로, 字는 巨君이며, 漢元帝의 皇后 王政君의 조카이다. 黃門郞·射聲校尉를 지냈고 成帝 永始元年(전16)에 新都侯에 봉해졌다. 騎都尉 光祿大夫 給事中이 되어 외척 淳于長을 탄핵하여 정직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綏和元年(전8)에 大司馬에 임명되었다가 哀帝 즉위 후 外戚 丁氏와 傅氏에 밀려 면직되었다가 哀帝 사후 王政君이 太皇太后로서 臨朝稱制하자 다시 大司馬로 임명하여 平帝를 옹립할 것을 모의하여 安漢公에 제수되었다. 빈민구제와 博士 증원 등으로 민심을 얻었다. 元始 5년(후5)에 平帝 사후 孺子 嬰을 옹립한 후 周公의 예를 본떠 假皇帝라 자칭했다가 初始元年(8)에 자립하여 皇帝가 되고 國號를 ‘新’이라 칭하고, 年號를 始建國이라 하였다. 각종 개혁정책을 실시했으나 실패하였고, 대외정책에도 실패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地皇 4년(23)에 綠林軍이 長安을 점령하자 살해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漢書』「匈奴傳」에도 12部의 장군을 임명하여 10道에서 동시에 匈奴를 공격하게 한 기사가 보인다(『漢書』권94上 「匈奴傳」: 3824, “莽新卽位, 怙府庫之富欲立威, 乃拜十二部將率, 發郡國勇士, 武庫精兵, 各有所屯守, 轉委輸於邊. 議滿三十萬衆, 齎三百日糧, 同時十道並出, 窮追匈奴, 內之于丁令, 因分其地, 立呼韓邪十五子.”).
     바로가기
  • 각주 003)
    嚴尤: 王莽이 세운 신의 무장으로 활동하였다. 納言, 納言將軍, 納言大將軍, 討穢將軍, 大司馬 등을 역임하였음, 武建伯에 봉해졌다. 匈奴·高句麗 등과의 전쟁에 참전하였고, 후에는 更始帝 劉玄의 군대를 막기 위해 陳茂와 함께 파견되었다가 潁川·昆陽·淯陽 등지에서 패하고 更始帝의 군대에 항복하였다. 23년 10월에 更始帝의 명령으로 陳茂와 함께 주살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代郡: 戰國時代 趙가 설치하였다. 秦과 前漢 때의 治所는 代縣(지금 河北省 蔚縣 서남)이었다. 前漢시대 관할구역은 지금 河北省 懷安, 蔚縣 이서, 山西省 陽高, 渾源 이동에 있는 장성 안팎의 땅과 함께 장성 밖에 있는 東洋河 유역이었다. 後漢時代에 高柳縣(지금 陽高縣 서남)으로 治所를 옮겼다가 西晉時代 말에 폐지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豪帥: 우두머리라는 뜻인데, 史書에서는 특히 무장반란을 일으킨 주모자나 부족의 首領을 지칭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6)
    『三國志』에는 이 단락 전체의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왕망(王莽), 엄우(嚴尤), 왕망, 왕망
지명
대군(代郡), 대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왕망(王莽)이 흉노를 공격하고자 오한의 무리를 끌어들이니 오환이 원망을 품음 자료번호 : jo.k_0003_0120_001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