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양왕이 사망하다
(
392년
05월
)
〔9년(392)〕 여름 5월에 왕이 세상을 떠나니 고국양(故國壤)註 001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고국양왕이라 하였다
고국양(故國壤) : 고국양왕의 장지이다. ‘국(國)’자는 ‘나라’나 ‘도성’을 뜻하는데, 여기에서는 ‘도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고국(故國)’은 ‘옛 도읍’이라는 뜻으로 본서의 고구려본기에서는 평양 천도 이후 그 이전 도성이었던 국내성 지역을 일컫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고국양’이나 고국양왕은 평양 천도 이후에 사용된 표현이며, 국내성 시기에 고국원왕의 왕호는 국양왕(國壤王), 장지는 ‘국양’이었다(鄭早苗, 96쪽; 이병도 1977: 2012, 292쪽; 高寬敏, 115~119쪽; 임기환, 34~39쪽). 고국양왕릉은 우산하540호분, 천추총, 태왕릉 등으로 비정되는데, 최근 태왕릉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늘고 있다(정호섭, 73-74쪽 〈표9〉 참조). 본서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 ‘고국양’이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 찬자도 고국곡의 정확한 의미나 구체적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이병도, 2012, 『(두계이병도전집 11) 국역 삼국사기』, 한국학술정보
정호섭, 2011, 『고구려 고분의 조영과 제의』, 서경문화사
高寬敏, 1996, 『“三国史記”原典的硏究』, 雄山閣
임기환, 2002, 「고구려 王號의 변천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28
鄭早苗, 1979, 「高句麗王系小考」, 『旗田巍博士古稀朝鮮歷史論集』 (上), 龍溪書舍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이병도, 2012, 『(두계이병도전집 11) 국역 삼국사기』, 한국학술정보
정호섭, 2011, 『고구려 고분의 조영과 제의』, 서경문화사
高寬敏, 1996, 『“三国史記”原典的硏究』, 雄山閣
임기환, 2002, 「고구려 王號의 변천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28
鄭早苗, 1979, 「高句麗王系小考」, 『旗田巍博士古稀朝鮮歷史論集』 (上), 龍溪書舍
註) 001
고국양(故國壤) : 고국양왕의 장지이다. ‘국(國)’자는 ‘나라’나 ‘도성’을 뜻하는데, 여기에서는 ‘도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고국(故國)’은 ‘옛 도읍’이라는 뜻으로 본서의 고구려본기에서는 평양 천도 이후 그 이전 도성이었던 국내성 지역을 일컫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고국양’이나 고국양왕은 평양 천도 이후에 사용된 표현이며, 국내성 시기에 고국원왕의 왕호는 국양왕(國壤王), 장지는 ‘국양’이었다(鄭早苗, 96쪽; 이병도 1977: 2012, 292쪽; 高寬敏, 115~119쪽; 임기환, 34~39쪽). 고국양왕릉은 우산하540호분, 천추총, 태왕릉 등으로 비정되는데, 최근 태왕릉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늘고 있다(정호섭, 73-74쪽 〈표9〉 참조). 본서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 ‘고국양’이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 찬자도 고국곡의 정확한 의미나 구체적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이병도, 2012, 『(두계이병도전집 11) 국역 삼국사기』, 한국학술정보
정호섭, 2011, 『고구려 고분의 조영과 제의』, 서경문화사
高寬敏, 1996, 『“三国史記”原典的硏究』, 雄山閣
임기환, 2002, 「고구려 王號의 변천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28
鄭早苗, 1979, 「高句麗王系小考」, 『旗田巍博士古稀朝鮮歷史論集』 (上), 龍溪書舍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이병도, 2012, 『(두계이병도전집 11) 국역 삼국사기』, 한국학술정보
정호섭, 2011, 『고구려 고분의 조영과 제의』, 서경문화사
高寬敏, 1996, 『“三国史記”原典的硏究』, 雄山閣
임기환, 2002, 「고구려 王號의 변천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28
鄭早苗, 1979, 「高句麗王系小考」, 『旗田巍博士古稀朝鮮歷史論集』 (上), 龍溪書舍
주제분류
- 정치>왕실>국왕>신상
- 정치>법률>행정>시호
- 사회>의례>관혼상제>상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