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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가 아진포에 도착하다
제4대 탈해왕(第四 脫解王)
탈해치질금 한편 토해니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한다.. 남해왕(南解王) 때고본에 임인년(壬寅年)에 도착하였다는 것은 오류이다. 가깝게는노례왕의 즉위 이후이므로 양위를 놓고 다투던 일이 없게 되며,註 454 그 이전에는 혁거세의 재위기이므로註 455 임인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가락국의 바다에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신하 및 백성들과 더불어 북을 치고 환호하며 맞이해 장차 가락국에 머무르게 하려 했으나註 456 배가 급히 나는 듯이 달려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註 457 아진포 註 458 지금도 상서지와 하서지촌명이 있다에 이르렀다. 당시 포구의 해변에 한 할멈註 459이 있었으니 이름은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 하였는데, 이가 바로 혁거세왕 때의 고기잡이[海尺]의 모(母)였다. [아진의선이] 배를 바라보며 말하기를 “본시 이 바다 가운데에 바위가 없는데 어찌해서 까치가 모여서 울고 있는가?” 하고 배를 끌어당겨 살펴보니 까치가 배 위로 모여들고 배 안에 상자 하나가 있었다. 길이는 20자이고 넓이는 13자였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밑에 매어두고 이것이 흉한 일인지 길한 일인지를 몰라 하늘을 향해 고하였다. 잠시 후 궤를 열어보니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가 있고, 또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가 그 속에 가득하였다. 칠일 동안 잘 대접하였더니 이에 [사내아이가] 말하기를 “나는 본시 용성국 註 460 한편 정명국(正明國) 혹은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는 혹 화하국(花廈國)이라고도 한다. 용성은 왜의 동북 일천리에 있다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일찍이 이십팔 용왕이 있는데, 모두 다 사람의 태(胎)에서 태어나 5~6세 때부터 왕위에 올라 만민을 가르치고 정성(正性)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팔품(八品)의 성골(姓骨)註 461이 있지만 선택하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우리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註 462의 왕녀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자식 구하기를 기도하여 7년 만에 커다란 알 한 개를 낳았습니다. 이에 대왕이 군신들을 불러 모아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니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넣고 더불어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후, 바다에 띄워놓고 축언하여 이르기를, ‘인연이 있는 곳에 닿는 대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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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54
가까운 임인년이란 42년에 해당하는 해를 가리킨다. 이는 노례왕 즉위 19년에 해당하는 해이므로 석탈해가 이 해에 신라에 이르렀다면 이미 노례왕이 즉위한 이후가 되므로 그와 왕위를 놓고 다툴 수 없음을 설명한 것이다. ≪삼국유사≫ 기이 제3 노례왕조에는 제2대 왕인 남해왕이 죽었을 때, 차기 왕위를 둘러싸고 탈해와 노례가 서로 양보하다가 노례가 즉위한 사실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삼국유사≫ 권1 기이1 기이 제3 노례왕).바로가기
註) 455
그 전의 임인년은 기원전 19년이다. 이 해는 혁거세 즉위 39년에 해당한다.바로가기
註) 456
가락국의 신민들이 수로왕과 더불어 탈해의 도착을 기뻐했다는 본 기록과는 달리 ≪삼국유사≫ 기이 가락국기조에 따르면 수로왕과 탈해가 왕권을 두고 술법으로 서로 겨루다가 결국 탈해가 패하여 계림으로 도망쳤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 한편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조(脫解尼師今條)에는 처음에 탈해의 궤짝이 금관국 해변에 닿았으나 금관국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취하지 않았다고 하였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바로가기
註) 457
≪삼국유사≫ 기이 시조혁거세마립간조에서 금산 가리촌(한기부)에 속하는 동쪽 마을 중 하나로 그 명칭이 확인된다(≪삼국유사≫ 권1 기이1 시조혁거세마립간).바로가기
註) 458
현재의 경북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 일대로 비정하거나(三品彰英, ≪三國遺史考證≫ (上), 1975, 488쪽), 경북 경주시 감포(甘浦)의 옛 지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천관우, ≪고조선사·삼국사연구≫, 1989, 283쪽).바로가기
註) 459
노구(老嫗)는 고대사회에서 보호령(保護靈)으로서 신모(神母)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무(巫)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노구의 기사는 상대에 집중되어 나타나는데, 이는 고대인이 보호령으로서 먼저 모성적 존재인 거모(巨母)를 상상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정치체제가 완비되어 나가는 과정과 함께 정복전쟁의 단계에 돌입하게 되면 노구의 여성성은 남성성으로 변화하여 노옹 또는 노인으로 정립되게 된다. 이후 나타나는 노구는 기록이 미미하여 설사 나타난다 하더라도 불교와 융합되어 나타나고 그 지위 또한 매우 미약한 존재로 변화하였다(최광식, 「삼국사기 소재 노구의 성격」, ≪사총≫ 25, 1981, 22~23쪽).바로가기
註) 460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조(脫解尼師今條)에서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이라고 하여 본 기사와 차이를 보인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바로가기
註) 461
신라 초기에 있었던 8품을 여기에 부회한 듯하다(강인구 외,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50쪽).바로가기
註) 462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역금(女國)’으로 기록하고 있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이 나라의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 동옥저조에서 동해 가운데 있다고 한 여인국을 가리킨다고도 하고(三品彰英, ≪日鮮神話傳說の硏究≫, 1963, 273쪽), 혹은 어떤 특정한 나라를 지칭한다기 보다는 지신족 계통의 여가장국으로 이해하기도 한다(김두진, 「신라 석탈해신화의 성립 기반」, ≪한국학논총≫ 1986, 8~9쪽).바로가기
주제분류
  • 정치>왕실>국왕>활동(결혼·통치)
  • 사회>인구>생로병사>출산
  • 정치>신이>생물>사람·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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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2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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