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흔을 구하기 위해 왜국으로 향하다
〔고구려에서 두 사람이〕 귀국하기에 이르자, 대왕이 기뻐하며 위로하고 말하기를, “나는 두 아우를 좌우의 팔과 같이 생각하였는데, 이제 단지 한쪽 팔만을 얻었으니,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제상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이 비록 노둔한 재주를 가졌음에도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끝내 왕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대국(大國)이고, 왕 역시 어진 임금이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신(臣)이 한마디 말로 깨우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왜인 같은 경우는 말로 깨우칠 수 없습니다. 마땅히 거짓 계략을 써서 왕자를 돌아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저곳에 가면, 나라를 배반하여 논죄(論罪)하였음을 저들이 듣게 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죽기를 스스로 맹세하여 아내와 자식도 만나지 않고 율포(栗浦)에註 185 다다라 배를 타고 왜국으로 향하였다. 그 아내가 〔소식을〕 듣고 달려와 포구에 이르러 배를 바라보며 대성통곡하며 말하기를, “잘 다녀오십시오.”라고 하였다. 제상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장차 명을 받아 적국(敵國)에 들어갈 것이니, 당신은 다시 만날 기약을 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註 186
율포(栗浦):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임관군조에 “동진현(東津縣)은 본래 율포현(栗浦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울주(蔚州)에 합쳐져 속하였다.”고 전한다. 동진현은 현재 울산광역시 북구 강동동과 구유동, 정자동 일대[옛 울주군 강동면]에 해당한다. 따라서 율포는 옛 강동면에 위치한 포구로 이해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2 경상도 울주군 산천조에 “유포(柳浦)는 고을 동쪽 30리 바다 어구에 있다.”라고 전한다. 유포는 현재 울산광역시 북구 구유동에 위치한 포구이다. 종래에 조선시대의 유포가 신라의 율포에 해당한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고석규 외, 2005, 『장보고시대의 포구조사』, 재단법인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568쪽).
이에 죽기를 스스로 맹세하여 … 기약을 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나물왕 김제상조에는 “이때 제상은 〔눌지왕의 말을〕 듣고 재배하며 조정과 하직하고, 말을 타고 집에 들르지도 않은 채, 길을 떠나 곧장 율포(栗浦) 해변에 이르렀다. 그 아내가 소문을 듣고 율포까지 쫓아가 보니, 남편은 이미 배 위에 있었다. 아내가 안타깝게 불렀으나, 제상은 다만 손만 흔들고 〔배를〕 멈추지 않았다.”고 전한다. 또한 여기에 “처음에 제상이 〔왜로〕 떠날 때 부인이 소문을 듣고 뒤쫓았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망덕사(望德寺)의 문 남쪽 모래 위에 이르러 넘어져 길게 절규하였던 까닭에, 그 모래사장을 장사(長沙)라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돌아오려 하였는데, 부인이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나지 않으므로, 그 지명을 벌지지(伐知旨)라고 하였다. 오랜 뒤에도 부인이 그 사모함을 이기지 못해 세 딸을 이끌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었다. 그리하여 〔부인은〕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으니, 지금도 사당(祠堂)이 있다.”고 전한다. 이 기록은 후대에 장사와 벌지지 등의 지명 유래를 제상의 아내와 관련하여 부회한 사실 및 제상의 아내를 치술신모로 숭배한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라고 볼 수 있다. 현재 경북 경주시 외동면에 있는 치술령에 박제상의 부인과 관련된 민간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그 내용은 박제상의 아내가 딸들을 데리고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몸은 변하여 돌이 되고, 영혼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그 돌을 현재 망부석(望夫石)이라 부르고, 영혼이 변한 새는 은을암(隱乙庵)이라는 절의 법당 뒤에 큰 동굴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또 은을암의 동굴로부터 매일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쌀이 조금씩 흘러나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강인구 외, 2002, 『역주 삼국유사』 Ⅰ, 이회문화사, 284쪽).
註) 185
율포(栗浦):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임관군조에 “동진현(東津縣)은 본래 율포현(栗浦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울주(蔚州)에 합쳐져 속하였다.”고 전한다. 동진현은 현재 울산광역시 북구 강동동과 구유동, 정자동 일대[옛 울주군 강동면]에 해당한다. 따라서 율포는 옛 강동면에 위치한 포구로 이해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2 경상도 울주군 산천조에 “유포(柳浦)는 고을 동쪽 30리 바다 어구에 있다.”라고 전한다. 유포는 현재 울산광역시 북구 구유동에 위치한 포구이다. 종래에 조선시대의 유포가 신라의 율포에 해당한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고석규 외, 2005, 『장보고시대의 포구조사』, 재단법인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568쪽).
註) 186
이에 죽기를 스스로 맹세하여 … 기약을 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나물왕 김제상조에는 “이때 제상은 〔눌지왕의 말을〕 듣고 재배하며 조정과 하직하고, 말을 타고 집에 들르지도 않은 채, 길을 떠나 곧장 율포(栗浦) 해변에 이르렀다. 그 아내가 소문을 듣고 율포까지 쫓아가 보니, 남편은 이미 배 위에 있었다. 아내가 안타깝게 불렀으나, 제상은 다만 손만 흔들고 〔배를〕 멈추지 않았다.”고 전한다. 또한 여기에 “처음에 제상이 〔왜로〕 떠날 때 부인이 소문을 듣고 뒤쫓았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망덕사(望德寺)의 문 남쪽 모래 위에 이르러 넘어져 길게 절규하였던 까닭에, 그 모래사장을 장사(長沙)라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돌아오려 하였는데, 부인이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나지 않으므로, 그 지명을 벌지지(伐知旨)라고 하였다. 오랜 뒤에도 부인이 그 사모함을 이기지 못해 세 딸을 이끌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었다. 그리하여 〔부인은〕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으니, 지금도 사당(祠堂)이 있다.”고 전한다. 이 기록은 후대에 장사와 벌지지 등의 지명 유래를 제상의 아내와 관련하여 부회한 사실 및 제상의 아내를 치술신모로 숭배한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라고 볼 수 있다. 현재 경북 경주시 외동면에 있는 치술령에 박제상의 부인과 관련된 민간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그 내용은 박제상의 아내가 딸들을 데리고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몸은 변하여 돌이 되고, 영혼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그 돌을 현재 망부석(望夫石)이라 부르고, 영혼이 변한 새는 은을암(隱乙庵)이라는 절의 법당 뒤에 큰 동굴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또 은을암의 동굴로부터 매일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쌀이 조금씩 흘러나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강인구 외, 2002, 『역주 삼국유사』 Ⅰ, 이회문화사, 2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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