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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都城을 固麻라 하고 邑을 檐魯라 하는데,
○ [백제는] 都城을 固麻註 102라 하고 邑을 檐魯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郡縣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에는 22檐魯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宗族에게 나누어 웅거케 하였다.
百濟人의 키는 크며 의복은 깨끗하다. 그 나라 가까이에 倭가 있어서, 文身註 103한 사람들도 꽤 있다.
지금의 언어와 복장은 高[句]驪와 거의 같지만, 걸을 때 두 팔을 벌리지 않는 것과 절할 때 한 쪽 다리를 펴지 않는 것은 다르다. 帽를 冠이라 부르고, 襦를 複衫, 袴를 褌이라 한다. 그 나라 말에는 중국의 말이 뒤섞여 있으니, 이것 또한 秦나라와 韓나라의 習俗이 남은 때문이라고 한다.註 104
註) 102
公州의 古名인 고마나루를 의미하며 熊津이 바로 이것이다.『周書』百濟傳의 固麻城, 『隋書』百濟傳의 居拔城, 『日本書紀』雄略天皇 二十一年條의 久麻那利가 모두 같은 뜻이다.
<참조>
『周書』百濟傳 註 7)
固麻城
熊津은 ‘곰나루’의 漢字譯이며 지금의 公州이다.
『日本書紀』 「雄略天皇紀」21年 春3月條에는 文周王이 國都를 熊川(公州)으로 옮긴 데 대하여 ‘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 以久麻那利賜汶州王救興其國’이라 하였는데, ‘久麻那利’는 熊川의 古名 古麻城 또는 ‘固麻那禮(利)’이다.
‘北方은 熊津城이다’라는 구절과 관련하여 李弘稙은 이 記事는 百濟의 南遷 즉, 熊津都邑時代의 일임이 명료한 사실인데, 『周書』以來의 中國正史에서는 百濟가 扶餘로 南遷한 末期까지의 상태와 혼동하고 있다고 주장 하였다. ( 「梁職貢圖論考」pp.404~405) 즉, 『周書』에서 ‘治固麻城 其外更有五方 …… 北方曰熊津城’이라고 한 것은 부여(所夫里 泗沘: 原註)로 國都를 옮긴 이후 地方을 5方으로 나눈 시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國都를 여전히 ‘固麻城’이라 하고 5方時代에 北方의 중심을 熊津城으로 삼은 것은 熊津城을 固麻와 別城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隋書』에서는 泗沘城을 ‘其都曰居拔城’이라고 明記하고 있는데, 『北史』에서 ‘其都曰居拔城 亦曰固麻城’이라 하고, 5方 중 ‘北方曰熊津城’이라 한 것은 『周書』以來의 기사를 답습하여 固麻城이 곧 熊津城이라는 것을 인식치 못한 소산이라고 하였다. (앞의 논문, pp.404~405)
한편 坂元義種은 『隋書』百濟傳에는 ‘居拔城’이라 되어 있고, 當時의 國都는 泗沘(忠淸南道 扶餘의 地)이므로 固麻城은 大城(王城)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譯註中國史書百濟傳(周書)」p.268) 여기서 坂元義種의 見解를 따른다면 扶餘로 수도를 옮긴 뒤에도 여전히 泗沘라는 이름 外에 ‘固麻城’이라 불리웠을 可能性을 배제할 수 없다. 마치 현재의 수도인 ‘서울’이 行政區域上의 地名이라는 의미 外에 首都라는 意味도 갖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參考文獻≫
『日本書紀』卷 14 「雄略天皇紀」21年條.
李弘稙, 「梁職貢圖論考」『韓國古代史의 硏究』1971.
坂元義種, 「譯註中國史書百濟傳(周書)」『百濟史の硏究』1978.
≪參考文獻≫
金永培, 「公州 百濟王宮 및 臨流閣址 小考」『考古美術』56·57合號, 1965.
朴容塡, 「公州 百濟時代의 文化에 關한 硏究」『百濟文化』2, 1968; 「公州出土의 百濟 瓦·塼에 關한 硏究」『百濟文化』6, 1973.
兪昌均, 「百濟地名·表記用字에 대한 檢討」『嶺南大論文集』9, 1975.
盧重國, 「百濟王室의 南遷과 支配勢力의 變遷」『韓國史論』4, 1978.
成周鐸, 「百濟 熊津城과 泗沘城 硏究」(其一)『百濟硏究』11, 1980.
三品彰英, 「久麻那利考」(上·下)『靑丘學叢』19·20合輯, 1935.
山尾幸久, 「朝鮮三國の軍區組織」『古代朝鮮と日本』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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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03
우리나라의 三韓에도 바다에 가까운 지역에서는 때때로 文身을 하였다는 記錄이『三國志』 「東夷傳」韓條 및 倭條에 다음과 같이 보이고 있다.
…… 今辰韓人 皆褊頭 男女近倭 亦文身(『三國志』 「東夷傳」韓條)
…… 男子無大小皆黥面文身(『三國志』 「東夷傳」倭條)
<참조>
『三國志』韓傳 註 32)
文身
우리나라 역사에서 文身에 관한 가장 이른 자료가 된다. 倭에 근접한 지역의 주민들이 男女를 가리지 않고 文身을 한 것 같다. 흔히 文身은 南쪽 지방의 사람들만이 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멀리 시베리아 지방을 포함하여 北쪽의 사람들도 文身을 하고 있었다. 『三國志』倭人傳에는 文身을 行하는 이유가 비교적 소상하게 기술되어 있다.
斷髮文身以避蛟龍之害 今倭水人好沈沒捕漁蛤 文身亦以厭大魚水禽 後稍以爲節諸國文身各異 或左或右 或大或小 尊卑有差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倭條.
金廷鶴, 「考古學으로 본 韓國文化의 起源」『韓國文化人類學』2, 1969.
金貞培, 「韓國에 있어서의 南方文化論」『白山學報』9, 1970.
方善柱, 「江淮下流地方의 先史諸文化」『史叢』15·16合輯, 1971.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1976.
≪參考文獻≫
『三國志』卷 30 「東夷傳」韓·倭條.
金貞培, 「韓國에 있어서의 南方文化論-反省과 展望-」『白山學報』9, 1970.
李丙燾, 『韓國古代社會와 그 文化』1973, 瑞文堂.
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武寧王陵發掘調査報告書』1973.
邊太燮, 「韓國史における南方文化」『アジア公論』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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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04
中國의 言語가 섞여있다는 것은 이미『三國志』의 辰韓傳에서 그 내용이 나타난 바 있었다. 그러나 辰韓에 秦役을 피해서 온 사람들 때문에 中國의 言語가 있다는 것은 辰韓의 辰과 秦의 音이 유사하기 때문에 생긴 잘못이며, 설사 부분적으로 中國의 言語가 사용되었다 해도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參考文獻≫
李崇寧, 「百濟語 硏究와 資料面의 問題點」『百濟硏究』2, 1971.
趙載勳, 「百濟語 硏究 序說」『百濟文化』6, 1973.
都守熙, 「百濟語 硏究」『百濟硏究』7, 1976.
姜吉云, 「百濟語의 硏究(系統論)Ⅰ」『百濟硏究』8, 1977; 「百濟語의 硏究(系統論)Ⅱ」『百濟硏究』9,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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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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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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