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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남대적(男大迹)의 가계와 즉위 과정

일본서기 권 제17

남대적천황(男大迹天皇;워호도노스메라미코토) 계체천황(繼體天皇;케이타이텐노)

남대적천황(男大迹天皇;워호도노스메라미코토)주 001
번역주 001)
제26대 천황(재위:507~531)이다. 應神天皇의 5대손이며 彦主人王과 振媛命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한다(『釋日本紀』에 인용된 「上宮記」). 원래 近江國 高嶋鄕 三尾野(滋賀縣 高島市)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일찍 죽고 나서 어머니의 고향인 越前國 高向(福井縣 坂井市 丸岡町 高椋)에서 자랐으며, 越前·近江 지역의 유력세력으로 성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506년에 武烈天皇이 죽은 후 大伴金村이 그를 천황으로 추대하였으나 사양하다가 다음해 河內國 樟葉宮에서 즉위하였고, 仁賢天皇의 딸이자 무열천황의 누이인 手白香皇女를 황후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507년에 즉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511년에 筒城宮, 518년 弟國宮 등 나라분지 바깥을 전전하였고, 526년에 비로소 磐餘의 玉穂宮(奈良縣 櫻井市)으로 옮겼다. 그의 불분명한 계보와 遷宮 등을 근거로 응신천황의 혈통을 부정하기도 하고 지방의 유력호족으로서 왕위를 찬탈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는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어 있다. 주요 내용으로는 인현천황의 딸인 수백향황녀를 황후로 맞아들인 한편 8명의 비를 정한 일, 백제가 이른바 임나 4현을 청하자 이를 허락한 일, 백제가 오경박사 단양이를 파견하고 이후 오경박사를 교대로 파견한 일, 백제에 기문과 대사의 지배권을 인정한 일, 백제가 伴跛(大加羅)와 대립한 일, 백제의 무령왕이 죽고 성왕이 즉위한 일, 신라에 멸망한 南加羅를 재건하기 위하여 近江毛野臣을 파견하려고 하였으나 磐井이 반란을 일으켜 이를 진압한 일, 근강모야신을 安羅에 파견하였으나 백제 및 신라와 갈등을 일으킨 일 등이 있다. 繼體紀에는 백제삼서 중 하나인 「百濟本記」가 인용되어 있고 한반도 관계 기사가 급증하는 특징을 보인다. 특히 가야 여러 나라의 멸망 과정에 대한 기사가 많아서 한국 고대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중국식 시호인 繼體에 대한 일본식 시호(和風諡號) 袁本杼命(『古事記』), 男太跡天皇(『新撰姓氏錄』), 乎富等大公王(『釋日本紀』에 인용된 『上宮記』의 逸文), 雄大迹天皇(同 「筑後風土記」 逸文) 등으로 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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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은 언태존(彦太尊;히코후토노미코토)이다.]은 예전천황(譽田天皇;호무타노스메라미코토)주 002
번역주 002)
제15대 應神天皇이다. 실재한 최초의 천황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4세기 후반 또는 5세기 초의 倭王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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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5세손주 003
번역주 003)
문맥상 應神의 5세손인 彦主人王의 아들로 볼 수 있다. 『古事記』에서도 品太王(應神)의 5세손 袁本杼命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례적으로 그 사이 2대의 계보가 누락되어 있어서 武烈天皇까지의 應神王朝가 사실상 혈연적으로 단절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한편 이에 대하여 『釋日本紀』 述義에 인용되어 있는 「上宮記」의 逸文에서는 凡牟都和希王(應神)-若野毛二俣王-大郞子(意富富等王)-乎非王-汙斯王-乎富等大公王에 이르는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이 「上宮記」의 표기법이 「推古朝遺文」(7세기 초)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應神과 繼體 사이의 계보를 사실로 인정하는 주장도 있다. 현재는 繼體가 비록 應神의 5세손인지는 의문스럽지만,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라 야마토 지역 유력호족의 지지를 얻어 왕위에 즉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혈통상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雄略의 손녀이자 仁賢의 딸이고 武烈의 누이인 手白香皇女를 맞이하였고, 현재 천황가로 이어지는 欽明을 낳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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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며, 언주인왕(彦主人王;히코우시노오호키미)주 004
번역주 004)
汙斯王으로도 표기하며, 應神天皇의 4세손으로 乎非王과 久留比賣命 사이에서 태어났다(『釋日本紀』). 滋賀縣 高島市 安曇川町에 있는 田中王塚古墳이 彦主人王의 무덤으로 추정되어 현재 陵墓參考地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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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원(振媛;후루히메)이라고 한다. 진원활목천황(活目天皇;이쿠메노스메라미코토)주 005
번역주 005)
『釋日本紀』에 인용된 「上宮記」에는 垂仁天皇으로부터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으나, 『古事記』나 『日本書紀』에 따르면 繼體는 부계와 모계가 동시에 垂仁天皇에 출자를 두고 있으므로, 모계만을 垂仁에서 계산하고 있는 점에 의문이 있다. 또 垂仁보다 실재성이 높은 應神에게는 대왕이 아닌 왕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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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7세손이다. 천황의 아버지는 진원의 용모가 단정하고 아주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근강국(近江國;아후미노쿠니) 고도군(高嶋郡;타카시마노코호리) 삼미(三尾;미워)주 006
번역주 006)
현재 滋賀縣 高島郡 高島町이다. 여기서 보이는 國郡의 명칭은 8세기 이후 율령제하에서 정비되므로, 이는 『日本書紀』 편찬자가 편찬 당시의 지식에 근거하여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郡의 訓은 코호리(こほり)로, 우리 말의 ‘고을’과 동일한 어원으로 생각된다. 또한 7세기 말까지는 郡 대신 評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음이 木簡을 통하여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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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별장주 007
번역주 007)
원문은 別業으로 別邸·別莊이라는 뜻이다. 주로 농업을 관리하기 위해서 세운 건물을 말하며 田宅·田家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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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사람을 보내어, 삼국(三國;미쿠니)의 판중정(坂中井;사카나위)주 008
번역주 008)
현재 福井縣 坂井市 三國町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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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부터 맞아들여 비로 삼았다. 비는 천황을 낳았으나, 천황이 아직 어릴 때 부왕(父王)이 죽었다. 진원이 탄식하여 “내가 지금 고향을 멀리 떠나 있으니 어찌 부모를 봉양할 수 있겠는가. 나는 고향(高向;타카무코)[고향월전국(越前國;에치젠노쿠니)의 읍명이다.]주 009
번역주 009)
현재 福井縣 坂井市 丸岡町 高田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는 振媛의 아버지인 오하치노키미를 모시는 高向神社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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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돌아가 부모를 모시면서, 천황을 기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황은 성장하여 사람을 사랑하고 어진 이를 예우하였으며, 마음이 관대하였다. 천황이 57세가 되던 (무열천황) 8년 겨울 12월 기해(8일)에 소박뢰천황(小泊瀨天皇;워하츠세노스메라미코토)주 010
번역주 010)
제25대 武烈天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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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죽었다(崩). 원래 자식이 없어서 후사가 끊어졌다.

  • 번역주 001)
    제26대 천황(재위:507~531)이다. 應神天皇의 5대손이며 彦主人王과 振媛命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한다(『釋日本紀』에 인용된 「上宮記」). 원래 近江國 高嶋鄕 三尾野(滋賀縣 高島市)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일찍 죽고 나서 어머니의 고향인 越前國 高向(福井縣 坂井市 丸岡町 高椋)에서 자랐으며, 越前·近江 지역의 유력세력으로 성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506년에 武烈天皇이 죽은 후 大伴金村이 그를 천황으로 추대하였으나 사양하다가 다음해 河內國 樟葉宮에서 즉위하였고, 仁賢天皇의 딸이자 무열천황의 누이인 手白香皇女를 황후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507년에 즉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511년에 筒城宮, 518년 弟國宮 등 나라분지 바깥을 전전하였고, 526년에 비로소 磐餘의 玉穂宮(奈良縣 櫻井市)으로 옮겼다. 그의 불분명한 계보와 遷宮 등을 근거로 응신천황의 혈통을 부정하기도 하고 지방의 유력호족으로서 왕위를 찬탈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는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어 있다. 주요 내용으로는 인현천황의 딸인 수백향황녀를 황후로 맞아들인 한편 8명의 비를 정한 일, 백제가 이른바 임나 4현을 청하자 이를 허락한 일, 백제가 오경박사 단양이를 파견하고 이후 오경박사를 교대로 파견한 일, 백제에 기문과 대사의 지배권을 인정한 일, 백제가 伴跛(大加羅)와 대립한 일, 백제의 무령왕이 죽고 성왕이 즉위한 일, 신라에 멸망한 南加羅를 재건하기 위하여 近江毛野臣을 파견하려고 하였으나 磐井이 반란을 일으켜 이를 진압한 일, 근강모야신을 安羅에 파견하였으나 백제 및 신라와 갈등을 일으킨 일 등이 있다. 繼體紀에는 백제삼서 중 하나인 「百濟本記」가 인용되어 있고 한반도 관계 기사가 급증하는 특징을 보인다. 특히 가야 여러 나라의 멸망 과정에 대한 기사가 많아서 한국 고대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중국식 시호인 繼體에 대한 일본식 시호(和風諡號) 袁本杼命(『古事記』), 男太跡天皇(『新撰姓氏錄』), 乎富等大公王(『釋日本紀』에 인용된 『上宮記』의 逸文), 雄大迹天皇(同 「筑後風土記」 逸文) 등으로 표기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제15대 應神天皇이다. 실재한 최초의 천황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4세기 후반 또는 5세기 초의 倭王으로 생각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문맥상 應神의 5세손인 彦主人王의 아들로 볼 수 있다. 『古事記』에서도 品太王(應神)의 5세손 袁本杼命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례적으로 그 사이 2대의 계보가 누락되어 있어서 武烈天皇까지의 應神王朝가 사실상 혈연적으로 단절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한편 이에 대하여 『釋日本紀』 述義에 인용되어 있는 「上宮記」의 逸文에서는 凡牟都和希王(應神)-若野毛二俣王-大郞子(意富富等王)-乎非王-汙斯王-乎富等大公王에 이르는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이 「上宮記」의 표기법이 「推古朝遺文」(7세기 초)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應神과 繼體 사이의 계보를 사실로 인정하는 주장도 있다. 현재는 繼體가 비록 應神의 5세손인지는 의문스럽지만,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라 야마토 지역 유력호족의 지지를 얻어 왕위에 즉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혈통상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雄略의 손녀이자 仁賢의 딸이고 武烈의 누이인 手白香皇女를 맞이하였고, 현재 천황가로 이어지는 欽明을 낳았다고 본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汙斯王으로도 표기하며, 應神天皇의 4세손으로 乎非王과 久留比賣命 사이에서 태어났다(『釋日本紀』). 滋賀縣 高島市 安曇川町에 있는 田中王塚古墳이 彦主人王의 무덤으로 추정되어 현재 陵墓參考地로 지정되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釋日本紀』에 인용된 「上宮記」에는 垂仁天皇으로부터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으나, 『古事記』나 『日本書紀』에 따르면 繼體는 부계와 모계가 동시에 垂仁天皇에 출자를 두고 있으므로, 모계만을 垂仁에서 계산하고 있는 점에 의문이 있다. 또 垂仁보다 실재성이 높은 應神에게는 대왕이 아닌 왕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현재 滋賀縣 高島郡 高島町이다. 여기서 보이는 國郡의 명칭은 8세기 이후 율령제하에서 정비되므로, 이는 『日本書紀』 편찬자가 편찬 당시의 지식에 근거하여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郡의 訓은 코호리(こほり)로, 우리 말의 ‘고을’과 동일한 어원으로 생각된다. 또한 7세기 말까지는 郡 대신 評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음이 木簡을 통하여 확인되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원문은 別業으로 別邸·別莊이라는 뜻이다. 주로 농업을 관리하기 위해서 세운 건물을 말하며 田宅·田家라고도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현재 福井縣 坂井市 三國町 지역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현재 福井縣 坂井市 丸岡町 高田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는 振媛의 아버지인 오하치노키미를 모시는 高向神社가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제25대 武烈天皇이다.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남대적천황, 언태존, 예전천황, 언주인왕, 진원, 진원, 활목천황, 진원, 진원, 무열천황, 소박뢰천황
지명
근강국, 고도군, 삼미, 판중정, 고향, 고향, 월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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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적(男大迹)의 가계와 즉위 과정 자료번호 : ns.k_0029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