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牟大가 表文을 올려 말하였다.] “공에 대하여
○ 百濟註 024
『南齊書』百濟傳의 原文 一部가 떨어져 나갔으나 學界에서 논의하는 바와 같이 報功勞勤의 前文 324字가 빠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册府元龜』 「外臣部」에 그 逸文이 있다는데 그 기사는 다음과 같다.
武帝 永明 八年(490) 正月 百濟王 牟太遣使上表 遣謁者僕射孫副 策命太龍亡祖父牟都爲百濟王 曰於戱 惟爾世襲忠勤誠著遐表海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彛典用纂命 往欽哉 其敬膺休業 可不愼歟 詔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今以世襲祖父牟都爲百濟王 卽位章綏等王銅虎竹符曰 其拜受不亦休乎
『南齊書』百濟傳은 前史의 것을 襲錄하지 않고 南齊時代의 史料에 의거하여 기술하였는데 내용은 대부분이 朝聘關係이다.
≪參考文獻≫
『册府元龜』卷963 「外臣部」封册條.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出版部.
武帝 永明 八年(490) 正月 百濟王 牟太遣使上表 遣謁者僕射孫副 策命太龍亡祖父牟都爲百濟王 曰於戱 惟爾世襲忠勤誠著遐表海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彛典用纂命 往欽哉 其敬膺休業 可不愼歟 詔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今以世襲祖父牟都爲百濟王 卽位章綏等王銅虎竹符曰 其拜受不亦休乎
『南齊書』百濟傳은 前史의 것을 襲錄하지 않고 南齊時代의 史料에 의거하여 기술하였는데 내용은 대부분이 朝聘關係이다.
≪參考文獻≫
『册府元龜』卷963 「外臣部」封册條.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出版部.
[ …… 牟大가 表文을 올려 말하였다.]
“공에 대하여 보답하고 부지런히 힘쓴 것을 위로하는 일은 실로 그 명성과 공업을 보존시키는 것입니다. 假行註 025 寧朔將軍註 026 臣 姐瑾 등 4인은 충성과 힘을 다하여 나라의 환란을 쓸어 없앴으니 그 뜻의 굳셈과 과감함이 名將의 등급에 들 만하며 나라의 扞城이요 사직의 튼튼한 울타리라 할 만 합니다. 그들의 노고를 헤아리고 공을 논하면 환히 드러나는 지위에 있어야 마땅하므로 지금 전례에 따라 외람되이 임시 行職을 주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은혜를 베푸시어 임시로 내린 관직을 정식으로 인정하여 주십시오. 寧朔將軍 面中註 027王 姐瑾은 정치를 두루 잘 보좌하였고 무공 또한 뛰어났으니 이제 假行冠軍將軍 都將軍註 028 都漢註 029王이라 하였고, 建威將軍 八中註 030侯 餘古는 젊을 때부터 임금을 도와 충성과 공로가 진작 드러났으므로 이제 假行寧朔將軍 阿錯註 031王이라 하였고, 建威將軍 餘歷은 천성이 충성되고 정성스러워 文武가 함께 두드러졌으므로 이제 假行龍驤將軍 邁盧註 032王이라 하였으며, 廣武將軍 餘固는 정치에 공로가 있고 國政을 빛내고 드날렸으므로 이제 假行建威將軍 弗斯註 033侯라 하였습니다.”
百濟王이 對中國과 관련하여 臣下에게 주로 官職을 잠정적으로 주었을 때 行이라는 字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中國의 同意가 있게 되면 비로서 行이라는 글자가 떨어져 나가게 된다. 이러한 例는 이미 『宋書』百濟國傳에서 그 例가 보이거니와 具體的인 事例는 여기 『南齊書』百濟傳에 상당수 실려 있다. 行이라는 記錄 이외에도 行職, 行署, 私署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百濟와 中國과의 관계를 성찰하는데 참고가 되는 점이다.
<참조>
『魏書』百濟傳 註 16)
私署
사사로이 官職을 준다는 뜻이니, 北魏 朝廷의 任官을 받지 아니한 것을 가리킨다.『南齊書』百濟國傳의 ‘假行寧朔將軍臣姐瑾等四人 …… ’의 ‘假行’도 같은 뜻이며, 또한 ‘行’·‘行職’·‘行署’ 等으로 表記하기로 한다. ‘行’字를 쓴 예로는『宋書』百濟國傳 末尾의 ‘ …… 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 …… ’ 등의 用例를 들 수 있다. 이는 모두 中國王朝에서 正式으로 임명을 받지 아니한 官職을 뜻하며, 百濟의 王은 臣下들에게 假授한 爵號를 正式으로 除授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 관례였다.
≪參考文獻≫
『南齊書』卷58 「東南夷列傳」百濟國條.
『宋書』卷97 「夷蠻列傳」百濟國條.
≪參考文獻≫
徐榮洙, 「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東洋學』11, 1981.
坂元義種, 「古代東亞細亞の國際關係-和親·封册·使節よりみたる-」(上·下), 『ヒストリア』49·50, 1967~1968; 「五世紀の日本と朝鮮-中國南朝の封册と關聯して-」『史林』52卷 5號, 1969; 「三國史記と百濟本紀の史料批判-中國諸王朝との交涉記事を中心に-」『百濟史の硏究』1979, 塙書房.
江畑武, 「四~六世紀の朝鮮三國と日本-中國との册封をめぐっ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
谷川道雄, 「東アジア世界形成期の史的構造-册封體制を中心に-」『隋唐帝國と東アジア世界』1979, 唐代史硏究會.
<참조>
『魏書』百濟傳 註 16)
私署
사사로이 官職을 준다는 뜻이니, 北魏 朝廷의 任官을 받지 아니한 것을 가리킨다.『南齊書』百濟國傳의 ‘假行寧朔將軍臣姐瑾等四人 …… ’의 ‘假行’도 같은 뜻이며, 또한 ‘行’·‘行職’·‘行署’ 等으로 表記하기로 한다. ‘行’字를 쓴 예로는『宋書』百濟國傳 末尾의 ‘ …… 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 …… ’ 등의 用例를 들 수 있다. 이는 모두 中國王朝에서 正式으로 임명을 받지 아니한 官職을 뜻하며, 百濟의 王은 臣下들에게 假授한 爵號를 正式으로 除授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 관례였다.
≪參考文獻≫
『南齊書』卷58 「東南夷列傳」百濟國條.
『宋書』卷97 「夷蠻列傳」百濟國條.
≪參考文獻≫
徐榮洙, 「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東洋學』11, 1981.
坂元義種, 「古代東亞細亞の國際關係-和親·封册·使節よりみたる-」(上·下), 『ヒストリア』49·50, 1967~1968; 「五世紀の日本と朝鮮-中國南朝の封册と關聯して-」『史林』52卷 5號, 1969; 「三國史記と百濟本紀の史料批判-中國諸王朝との交涉記事を中心に-」『百濟史の硏究』1979, 塙書房.
江畑武, 「四~六世紀の朝鮮三國と日本-中國との册封をめぐっ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
谷川道雄, 「東アジア世界形成期の史的構造-册封體制を中心に-」『隋唐帝國と東アジア世界』1979, 唐代史硏究會.
『宋書』 「百官志」에 보면 龍驤將軍은 第三品官, 寧朔將軍은 第四品官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宋代에 이미 寧朔將軍쪽이 龍驤將軍쪽보다 上位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宋書』百濟國傳에서는 龍驤將軍이 上位로 되어 있다.
≪參考文獻≫
『宋書』卷30 「百官志」下.
金庠基, 「百濟의 遼西經略에 對하여」『白山學報』3, 1967.
方善柱,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白山學報』11, 1971.
金錫享, 「三韓三國の日本列島內分國について」『歷史評論』165·168·169, 1964.
김세익, 「중국 요서지방에 있었던 백제의 군에 대하여」『력사과학』1, 1967.
坂元義種, 「古代東アジアの日本と朝鮮-‘大王’の成立をめぐって-」『史林』51卷 4號, 1968;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 「古代東アジアの‘大王’について-百濟大王 考補論-」『京都府立大學術報告-人文』20, 1968; 「五世紀の日本と朝鮮」『史林』52卷 5號, 1969; 「五世紀の日本と朝鮮の國際環境-中國南朝と河南王·河西王·宕昌王·武都王-」『京都府立大學術報告-人文』21, 1969.
大庭脩, 「前漢の將軍」『東洋史硏究』26卷 4號, 1968.
≪參考文獻≫
『宋書』卷30 「百官志」下.
金庠基, 「百濟의 遼西經略에 對하여」『白山學報』3, 1967.
方善柱,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白山學報』11, 1971.
金錫享, 「三韓三國の日本列島內分國について」『歷史評論』165·168·169, 1964.
김세익, 「중국 요서지방에 있었던 백제의 군에 대하여」『력사과학』1, 1967.
坂元義種, 「古代東アジアの日本と朝鮮-‘大王’の成立をめぐって-」『史林』51卷 4號, 1968;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 「古代東アジアの‘大王’について-百濟大王 考補論-」『京都府立大學術報告-人文』20, 1968; 「五世紀の日本と朝鮮」『史林』52卷 5號, 1969; 「五世紀の日本と朝鮮の國際環境-中國南朝と河南王·河西王·宕昌王·武都王-」『京都府立大學術報告-人文』21, 1969.
大庭脩, 「前漢の將軍」『東洋史硏究』26卷 4號, 1968.
王, 侯와 관련된 地名으로 보아 武珍州로 比定한는 견해가 있다.(末松保和, 『任那興亡史』) 武珍州는 全羅南道 光州가 되거니와, 文章의 內容으로 보아 地名으로 보는 것도 무리가 없다.
이것은 百濟의 中央統治制度 및 地方의 行政統制라는 측면에서 거듭 연구를 해야할 問題이다. 한편 이러한 類의 地名比定은 百濟의 海外經略說과 관련하여 批判的인 見解가 강력히 대두되고 있음에 주목을 要한다.
≪參考文獻≫
申采浩, 『朝鮮上古史』 1948, 鐘路書院.
金庠基, 「百濟의 遼西經略에 對하여」『白山學報』3, 1967.
方善柱,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白山學報』11, 1971.
李丙燾, 「百濟七支刀考」『震檀學報』38, 1974.
千寬宇, 「馬韓諸國의 位置試論」『東洋學』9, 1979.
都守熙, 「百濟地名硏究」『百濟硏究』10·11輯, 1979.
金貞培, 「七支刀硏究의 새로운 方向」『東洋學』10, 1980.
李明揆, 「百濟對外關係에 關한 一試論-大陸進出說考察을 위한 하나의 假說로서-」『史學硏究』37, 1983.
梁起錫, 「五世紀百濟의 王·侯制에 對하여」『史學硏究』38, 1984.
金錫享, 「三韓三國の日本列島內分國について」『歷史評論』165·168·169, 1964.
김세익, 「중국 요서지방에 있었던 백제의 군에 대하여」『력사과학』1, 1967.
末松保和, 『任那興亡史』1961, 吉川弘文館, 東京.
井上秀雄, 「三國史記地理志の史料批判」『朝鮮學報』21·22合輯, 1961.
榧本杜人, 「石上神宮の七支刀とその銘文」『朝鮮學報』3輯, 1952.
坂元義種, 「古代東アジアの大王について」『京都府立大學術報告-人文』20, 1968;
「古代東アジアの日本と朝鮮」『史林』51卷 4號, 1968;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 「五世紀の日本と朝鮮」『史林』52卷 5號, 1969; 「五世紀の日本と朝鮮の國際環境」『京都府立大學術報告-人文』21, 1969.
栗原朋信, 「七支刀の銘文からみた日本と百濟·東晋の關係」『歷史敎育』18卷 4號, 1970.
神保公子, 「七支刀の解釋を中心に」『史學雜誌』84編 11號, 1975.
村山正雄, 「七支刀銘字一考-榧本論文批判を中心に-」『旗田巍先生古稀記念朝鮮歷史論集』(上), 1979.
宮崎市定, 「七支刀銘文試釋」『東方學』64, 1982.
이것은 百濟의 中央統治制度 및 地方의 行政統制라는 측면에서 거듭 연구를 해야할 問題이다. 한편 이러한 類의 地名比定은 百濟의 海外經略說과 관련하여 批判的인 見解가 강력히 대두되고 있음에 주목을 要한다.
≪參考文獻≫
申采浩, 『朝鮮上古史』 1948, 鐘路書院.
金庠基, 「百濟의 遼西經略에 對하여」『白山學報』3, 1967.
方善柱,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白山學報』11, 1971.
李丙燾, 「百濟七支刀考」『震檀學報』38, 1974.
千寬宇, 「馬韓諸國의 位置試論」『東洋學』9, 1979.
都守熙, 「百濟地名硏究」『百濟硏究』10·11輯, 1979.
金貞培, 「七支刀硏究의 새로운 方向」『東洋學』10, 1980.
李明揆, 「百濟對外關係에 關한 一試論-大陸進出說考察을 위한 하나의 假說로서-」『史學硏究』37, 1983.
梁起錫, 「五世紀百濟의 王·侯制에 對하여」『史學硏究』38, 1984.
金錫享, 「三韓三國の日本列島內分國について」『歷史評論』165·168·169, 1964.
김세익, 「중국 요서지방에 있었던 백제의 군에 대하여」『력사과학』1, 1967.
末松保和, 『任那興亡史』1961, 吉川弘文館, 東京.
井上秀雄, 「三國史記地理志の史料批判」『朝鮮學報』21·22合輯, 1961.
榧本杜人, 「石上神宮の七支刀とその銘文」『朝鮮學報』3輯, 1952.
坂元義種, 「古代東アジアの大王について」『京都府立大學術報告-人文』20, 1968;
「古代東アジアの日本と朝鮮」『史林』51卷 4號, 1968;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 「五世紀の日本と朝鮮」『史林』52卷 5號, 1969; 「五世紀の日本と朝鮮の國際環境」『京都府立大學術報告-人文』21, 1969.
栗原朋信, 「七支刀の銘文からみた日本と百濟·東晋の關係」『歷史敎育』18卷 4號, 1970.
神保公子, 「七支刀の解釋を中心に」『史學雜誌』84編 11號, 1975.
村山正雄, 「七支刀銘字一考-榧本論文批判を中心に-」『旗田巍先生古稀記念朝鮮歷史論集』(上), 1979.
宮崎市定, 「七支刀銘文試釋」『東方學』64, 1982.
末松保和는 武州 發羅郡이 가장 가깝다고 보고 있다. 鮎貝房之進은 이를 半奈夫里縣에 比定하고 있다.( 「三韓古地名考補正を讀む」) 이들을 현 지명과 대비하여 보면 發羅는 지금 全羅南道 羅州이며, 半奈夫里는 羅州郡 潘南面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類의 地名比定은 百濟 大王制下의 ‘王’·‘侯’의 存在와 관련하여 흔히 거론되고 있다. 한편 최근 學界 일각에서 百濟王侯制의 존재를 百濟의 大陸 및 日本列島에로의 海外經略說과 연관, 고찰하는 경향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음에 비추어, 종래의 地名 比定 또한 再考되어야 한다.
≪參考文獻≫
鮎貝房之進, 「三韓古地名考補正を讀む」『史學雜誌』36編 11號, 1925.
末松保和, 『任那興亡史』1961.
이러한 類의 地名比定은 百濟 大王制下의 ‘王’·‘侯’의 存在와 관련하여 흔히 거론되고 있다. 한편 최근 學界 일각에서 百濟王侯制의 존재를 百濟의 大陸 및 日本列島에로의 海外經略說과 연관, 고찰하는 경향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음에 비추어, 종래의 地名 比定 또한 再考되어야 한다.
≪參考文獻≫
鮎貝房之進, 「三韓古地名考補正を讀む」『史學雜誌』36編 11號, 1925.
末松保和, 『任那興亡史』1961.
比自伐에 比定한다면 이것은 全羅北道 全州가 된다. 물론 比自伐은 昌寧의 古名이지만 이것은 해당되지가 않는다. 위의 이름과 유사한 것으로 分嵯郡이 있는 바, 이는 全羅南道 長興郡 冠山面에 비정되고 있다.
<참조>
『魏書』百濟傳 註 19)
弗斯侯
弗斯侯는 蓋鹵王代보다는 後代의 일지만 東城王이 永明 8年(東城王 12年, 490)에 南齊에 國書를 보내 臣下들에게 王·侯·將軍 등의 爵號 除授를 청했을 때 그 國書 중 ‘ …… 廣武將軍餘固 忠効時務 光宣國政 今假行建威將軍·弗斯侯 …… (『南齊書』百濟國傳)’라 한 데서도 보인다.
『南齊書』의 ‘面中王’·‘八中侯’·‘弗斯侯’ 등 王侯名은 大王인 百濟王이 그 밑에 ‘王’·‘侯’를 거느린 것을 의미하며, (坂元義種,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pp.1~14) 이러한 ‘弗斯’·‘面中’ 등 地名의 王·侯는 바로 ‘二十二檐魯’의 一部가 아닐까 하는 推定도 있다.(千寬宇, 「馬韓諸國의 位置試論」pp.206~207)
弗斯·面中 等의 地名 位置比定은 末松保和에서 부터 試圖되어, (『任那興亡史』pp.20~60) 坂元義種도 本文에 대한 譯註에서 末松保和의 견해를 수용하는 등(『東アジア民族史』p.221)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최근 暫定的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견해를 내놓은 千寬宇는 그 위치比定에서 ‘弗斯’는 ‘伐首只一唐津’일 것이라 하였고, (앞의 논문, p.206) 末松保和·坂元義種은 ‘比斯伐-全州’ 혹은 ‘夫沙-昇州樂安’일 것이라 하였다.(末松保和, 앞의 책, p.241; 坂元義種, 앞의 논문, p.221)
本文의 譯文에서 ‘弗斯侯와 長史’라 하였는데 이 뜻은 ‘弗斯의 侯이면서 동시에 (中央官職으로서는 幕府의 幕僚인) 長史’ 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參考文獻≫
『南齊書』卷58 「東南夷列傳」百濟國條.
千寬宇, 「馬韓諸國의 位置 試論」『東洋學』9, 1979.
末松保和, 『任那興亡史』1960.
坂元義種,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東アジアの民族史』卷1, 1974.
≪參考文獻≫
全榮來, 「完山과 比斯伐論」『馬韓·百濟文化』1, 1975.
<참조>
『魏書』百濟傳 註 19)
弗斯侯
弗斯侯는 蓋鹵王代보다는 後代의 일지만 東城王이 永明 8年(東城王 12年, 490)에 南齊에 國書를 보내 臣下들에게 王·侯·將軍 등의 爵號 除授를 청했을 때 그 國書 중 ‘ …… 廣武將軍餘固 忠効時務 光宣國政 今假行建威將軍·弗斯侯 …… (『南齊書』百濟國傳)’라 한 데서도 보인다.
『南齊書』의 ‘面中王’·‘八中侯’·‘弗斯侯’ 등 王侯名은 大王인 百濟王이 그 밑에 ‘王’·‘侯’를 거느린 것을 의미하며, (坂元義種,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pp.1~14) 이러한 ‘弗斯’·‘面中’ 등 地名의 王·侯는 바로 ‘二十二檐魯’의 一部가 아닐까 하는 推定도 있다.(千寬宇, 「馬韓諸國의 位置試論」pp.206~207)
弗斯·面中 等의 地名 位置比定은 末松保和에서 부터 試圖되어, (『任那興亡史』pp.20~60) 坂元義種도 本文에 대한 譯註에서 末松保和의 견해를 수용하는 등(『東アジア民族史』p.221)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최근 暫定的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견해를 내놓은 千寬宇는 그 위치比定에서 ‘弗斯’는 ‘伐首只一唐津’일 것이라 하였고, (앞의 논문, p.206) 末松保和·坂元義種은 ‘比斯伐-全州’ 혹은 ‘夫沙-昇州樂安’일 것이라 하였다.(末松保和, 앞의 책, p.241; 坂元義種, 앞의 논문, p.221)
本文의 譯文에서 ‘弗斯侯와 長史’라 하였는데 이 뜻은 ‘弗斯의 侯이면서 동시에 (中央官職으로서는 幕府의 幕僚인) 長史’ 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參考文獻≫
『南齊書』卷58 「東南夷列傳」百濟國條.
千寬宇, 「馬韓諸國의 位置 試論」『東洋學』9, 1979.
末松保和, 『任那興亡史』1960.
坂元義種,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東アジアの民族史』卷1, 1974.
≪參考文獻≫
全榮來, 「完山과 比斯伐論」『馬韓·百濟文化』1, 1975.
註) 024
『南齊書』百濟傳의 原文 一部가 떨어져 나갔으나 學界에서 논의하는 바와 같이 報功勞勤의 前文 324字가 빠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册府元龜』 「外臣部」에 그 逸文이 있다는데 그 기사는 다음과 같다.
武帝 永明 八年(490) 正月 百濟王 牟太遣使上表 遣謁者僕射孫副 策命太龍亡祖父牟都爲百濟王 曰於戱 惟爾世襲忠勤誠著遐表海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彛典用纂命 往欽哉 其敬膺休業 可不愼歟 詔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今以世襲祖父牟都爲百濟王 卽位章綏等王銅虎竹符曰 其拜受不亦休乎
『南齊書』百濟傳은 前史의 것을 襲錄하지 않고 南齊時代의 史料에 의거하여 기술하였는데 내용은 대부분이 朝聘關係이다.
≪參考文獻≫
『册府元龜』卷963 「外臣部」封册條.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出版部.

武帝 永明 八年(490) 正月 百濟王 牟太遣使上表 遣謁者僕射孫副 策命太龍亡祖父牟都爲百濟王 曰於戱 惟爾世襲忠勤誠著遐表海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彛典用纂命 往欽哉 其敬膺休業 可不愼歟 詔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今以世襲祖父牟都爲百濟王 卽位章綏等王銅虎竹符曰 其拜受不亦休乎
『南齊書』百濟傳은 前史의 것을 襲錄하지 않고 南齊時代의 史料에 의거하여 기술하였는데 내용은 대부분이 朝聘關係이다.
≪參考文獻≫
『册府元龜』卷963 「外臣部」封册條.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出版部.
註) 025
百濟王이 對中國과 관련하여 臣下에게 주로 官職을 잠정적으로 주었을 때 行이라는 字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中國의 同意가 있게 되면 비로서 行이라는 글자가 떨어져 나가게 된다. 이러한 例는 이미 『宋書』百濟國傳에서 그 例가 보이거니와 具體的인 事例는 여기 『南齊書』百濟傳에 상당수 실려 있다. 行이라는 記錄 이외에도 行職, 行署, 私署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百濟와 中國과의 관계를 성찰하는데 참고가 되는 점이다.
<참조>
『魏書』百濟傳 註 16)
私署
사사로이 官職을 준다는 뜻이니, 北魏 朝廷의 任官을 받지 아니한 것을 가리킨다.『南齊書』百濟國傳의 ‘假行寧朔將軍臣姐瑾等四人 …… ’의 ‘假行’도 같은 뜻이며, 또한 ‘行’·‘行職’·‘行署’ 等으로 表記하기로 한다. ‘行’字를 쓴 예로는『宋書』百濟國傳 末尾의 ‘ …… 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 …… ’ 등의 用例를 들 수 있다. 이는 모두 中國王朝에서 正式으로 임명을 받지 아니한 官職을 뜻하며, 百濟의 王은 臣下들에게 假授한 爵號를 正式으로 除授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 관례였다.
≪參考文獻≫
『南齊書』卷58 「東南夷列傳」百濟國條.
『宋書』卷97 「夷蠻列傳」百濟國條.
≪參考文獻≫
徐榮洙, 「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東洋學』11, 1981.
坂元義種, 「古代東亞細亞の國際關係-和親·封册·使節よりみたる-」(上·下), 『ヒストリア』49·50, 1967~1968; 「五世紀の日本と朝鮮-中國南朝の封册と關聯して-」『史林』52卷 5號, 1969; 「三國史記と百濟本紀の史料批判-中國諸王朝との交涉記事を中心に-」『百濟史の硏究』1979, 塙書房.
江畑武, 「四~六世紀の朝鮮三國と日本-中國との册封をめぐっ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
谷川道雄, 「東アジア世界形成期の史的構造-册封體制を中心に-」『隋唐帝國と東アジア世界』1979, 唐代史硏究會.

<참조>
『魏書』百濟傳 註 16)
私署
사사로이 官職을 준다는 뜻이니, 北魏 朝廷의 任官을 받지 아니한 것을 가리킨다.『南齊書』百濟國傳의 ‘假行寧朔將軍臣姐瑾等四人 …… ’의 ‘假行’도 같은 뜻이며, 또한 ‘行’·‘行職’·‘行署’ 等으로 表記하기로 한다. ‘行’字를 쓴 예로는『宋書』百濟國傳 末尾의 ‘ …… 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 …… ’ 등의 用例를 들 수 있다. 이는 모두 中國王朝에서 正式으로 임명을 받지 아니한 官職을 뜻하며, 百濟의 王은 臣下들에게 假授한 爵號를 正式으로 除授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 관례였다.
≪參考文獻≫
『南齊書』卷58 「東南夷列傳」百濟國條.
『宋書』卷97 「夷蠻列傳」百濟國條.
≪參考文獻≫
徐榮洙, 「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東洋學』11, 1981.
坂元義種, 「古代東亞細亞の國際關係-和親·封册·使節よりみたる-」(上·下), 『ヒストリア』49·50, 1967~1968; 「五世紀の日本と朝鮮-中國南朝の封册と關聯して-」『史林』52卷 5號, 1969; 「三國史記と百濟本紀の史料批判-中國諸王朝との交涉記事を中心に-」『百濟史の硏究』1979, 塙書房.
江畑武, 「四~六世紀の朝鮮三國と日本-中國との册封をめぐっ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
谷川道雄, 「東アジア世界形成期の史的構造-册封體制を中心に-」『隋唐帝國と東アジア世界』1979, 唐代史硏究會.
註) 026
『宋書』 「百官志」에 보면 龍驤將軍은 第三品官, 寧朔將軍은 第四品官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宋代에 이미 寧朔將軍쪽이 龍驤將軍쪽보다 上位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宋書』百濟國傳에서는 龍驤將軍이 上位로 되어 있다.
≪參考文獻≫
『宋書』卷30 「百官志」下.
金庠基, 「百濟의 遼西經略에 對하여」『白山學報』3, 1967.
方善柱,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白山學報』11, 1971.
金錫享, 「三韓三國の日本列島內分國について」『歷史評論』165·168·169, 1964.
김세익, 「중국 요서지방에 있었던 백제의 군에 대하여」『력사과학』1, 1967.
坂元義種, 「古代東アジアの日本と朝鮮-‘大王’の成立をめぐって-」『史林』51卷 4號, 1968;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 「古代東アジアの‘大王’について-百濟大王 考補論-」『京都府立大學術報告-人文』20, 1968; 「五世紀の日本と朝鮮」『史林』52卷 5號, 1969; 「五世紀の日本と朝鮮の國際環境-中國南朝と河南王·河西王·宕昌王·武都王-」『京都府立大學術報告-人文』21, 1969.
大庭脩, 「前漢の將軍」『東洋史硏究』26卷 4號, 1968.

≪參考文獻≫
『宋書』卷30 「百官志」下.
金庠基, 「百濟의 遼西經略에 對하여」『白山學報』3, 1967.
方善柱,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白山學報』11, 1971.
金錫享, 「三韓三國の日本列島內分國について」『歷史評論』165·168·169, 1964.
김세익, 「중국 요서지방에 있었던 백제의 군에 대하여」『력사과학』1, 1967.
坂元義種, 「古代東アジアの日本と朝鮮-‘大王’の成立をめぐって-」『史林』51卷 4號, 1968;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 「古代東アジアの‘大王’について-百濟大王 考補論-」『京都府立大學術報告-人文』20, 1968; 「五世紀の日本と朝鮮」『史林』52卷 5號, 1969; 「五世紀の日本と朝鮮の國際環境-中國南朝と河南王·河西王·宕昌王·武都王-」『京都府立大學術報告-人文』21, 1969.
大庭脩, 「前漢の將軍」『東洋史硏究』26卷 4號, 1968.
註) 027
王, 侯와 관련된 地名으로 보아 武珍州로 比定한는 견해가 있다.(末松保和, 『任那興亡史』) 武珍州는 全羅南道 光州가 되거니와, 文章의 內容으로 보아 地名으로 보는 것도 무리가 없다.
이것은 百濟의 中央統治制度 및 地方의 行政統制라는 측면에서 거듭 연구를 해야할 問題이다. 한편 이러한 類의 地名比定은 百濟의 海外經略說과 관련하여 批判的인 見解가 강력히 대두되고 있음에 주목을 要한다.
≪參考文獻≫
申采浩, 『朝鮮上古史』 1948, 鐘路書院.
金庠基, 「百濟의 遼西經略에 對하여」『白山學報』3, 1967.
方善柱,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白山學報』11, 1971.
李丙燾, 「百濟七支刀考」『震檀學報』38, 1974.
千寬宇, 「馬韓諸國의 位置試論」『東洋學』9, 1979.
都守熙, 「百濟地名硏究」『百濟硏究』10·11輯, 1979.
金貞培, 「七支刀硏究의 새로운 方向」『東洋學』10, 1980.
李明揆, 「百濟對外關係에 關한 一試論-大陸進出說考察을 위한 하나의 假說로서-」『史學硏究』37, 1983.
梁起錫, 「五世紀百濟의 王·侯制에 對하여」『史學硏究』38, 1984.
金錫享, 「三韓三國の日本列島內分國について」『歷史評論』165·168·169, 1964.
김세익, 「중국 요서지방에 있었던 백제의 군에 대하여」『력사과학』1, 1967.
末松保和, 『任那興亡史』1961, 吉川弘文館, 東京.
井上秀雄, 「三國史記地理志の史料批判」『朝鮮學報』21·22合輯, 1961.
榧本杜人, 「石上神宮の七支刀とその銘文」『朝鮮學報』3輯, 1952.
坂元義種, 「古代東アジアの大王について」『京都府立大學術報告-人文』20, 1968;
「古代東アジアの日本と朝鮮」『史林』51卷 4號, 1968;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 「五世紀の日本と朝鮮」『史林』52卷 5號, 1969; 「五世紀の日本と朝鮮の國際環境」『京都府立大學術報告-人文』21, 1969.
栗原朋信, 「七支刀の銘文からみた日本と百濟·東晋の關係」『歷史敎育』18卷 4號, 1970.
神保公子, 「七支刀の解釋を中心に」『史學雜誌』84編 11號, 1975.
村山正雄, 「七支刀銘字一考-榧本論文批判を中心に-」『旗田巍先生古稀記念朝鮮歷史論集』(上), 1979.
宮崎市定, 「七支刀銘文試釋」『東方學』64, 1982.

이것은 百濟의 中央統治制度 및 地方의 行政統制라는 측면에서 거듭 연구를 해야할 問題이다. 한편 이러한 類의 地名比定은 百濟의 海外經略說과 관련하여 批判的인 見解가 강력히 대두되고 있음에 주목을 要한다.
≪參考文獻≫
申采浩, 『朝鮮上古史』 1948, 鐘路書院.
金庠基, 「百濟의 遼西經略에 對하여」『白山學報』3, 1967.
方善柱,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白山學報』11, 1971.
李丙燾, 「百濟七支刀考」『震檀學報』38, 1974.
千寬宇, 「馬韓諸國의 位置試論」『東洋學』9, 1979.
都守熙, 「百濟地名硏究」『百濟硏究』10·11輯, 1979.
金貞培, 「七支刀硏究의 새로운 方向」『東洋學』10, 1980.
李明揆, 「百濟對外關係에 關한 一試論-大陸進出說考察을 위한 하나의 假說로서-」『史學硏究』37, 1983.
梁起錫, 「五世紀百濟의 王·侯制에 對하여」『史學硏究』38, 1984.
金錫享, 「三韓三國の日本列島內分國について」『歷史評論』165·168·169,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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末松保和, 『任那興亡史』1961, 吉川弘文館, 東京.
井上秀雄, 「三國史記地理志の史料批判」『朝鮮學報』21·22合輯, 1961.
榧本杜人, 「石上神宮の七支刀とその銘文」『朝鮮學報』3輯, 1952.
坂元義種, 「古代東アジアの大王について」『京都府立大學術報告-人文』20, 1968;
「古代東アジアの日本と朝鮮」『史林』51卷 4號, 1968;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 「五世紀の日本と朝鮮」『史林』52卷 5號, 1969; 「五世紀の日本と朝鮮の國際環境」『京都府立大學術報告-人文』21, 1969.
栗原朋信, 「七支刀の銘文からみた日本と百濟·東晋の關係」『歷史敎育』18卷 4號, 1970.
神保公子, 「七支刀の解釋を中心に」『史學雜誌』84編 11號, 1975.
村山正雄, 「七支刀銘字一考-榧本論文批判を中心に-」『旗田巍先生古稀記念朝鮮歷史論集』(上), 1979.
宮崎市定, 「七支刀銘文試釋」『東方學』64, 1982.
註) 028
註) 029
註) 030
末松保和는 武州 發羅郡이 가장 가깝다고 보고 있다. 鮎貝房之進은 이를 半奈夫里縣에 比定하고 있다.( 「三韓古地名考補正を讀む」) 이들을 현 지명과 대비하여 보면 發羅는 지금 全羅南道 羅州이며, 半奈夫里는 羅州郡 潘南面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類의 地名比定은 百濟 大王制下의 ‘王’·‘侯’의 存在와 관련하여 흔히 거론되고 있다. 한편 최근 學界 일각에서 百濟王侯制의 존재를 百濟의 大陸 및 日本列島에로의 海外經略說과 연관, 고찰하는 경향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음에 비추어, 종래의 地名 比定 또한 再考되어야 한다.
≪參考文獻≫
鮎貝房之進, 「三韓古地名考補正を讀む」『史學雜誌』36編 11號, 1925.
末松保和, 『任那興亡史』1961.

이러한 類의 地名比定은 百濟 大王制下의 ‘王’·‘侯’의 存在와 관련하여 흔히 거론되고 있다. 한편 최근 學界 일각에서 百濟王侯制의 존재를 百濟의 大陸 및 日本列島에로의 海外經略說과 연관, 고찰하는 경향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음에 비추어, 종래의 地名 比定 또한 再考되어야 한다.
≪參考文獻≫
鮎貝房之進, 「三韓古地名考補正を讀む」『史學雜誌』36編 11號, 1925.
末松保和, 『任那興亡史』1961.
註) 032
註) 033
比自伐에 比定한다면 이것은 全羅北道 全州가 된다. 물론 比自伐은 昌寧의 古名이지만 이것은 해당되지가 않는다. 위의 이름과 유사한 것으로 分嵯郡이 있는 바, 이는 全羅南道 長興郡 冠山面에 비정되고 있다.
<참조>
『魏書』百濟傳 註 19)
弗斯侯
弗斯侯는 蓋鹵王代보다는 後代의 일지만 東城王이 永明 8年(東城王 12年, 490)에 南齊에 國書를 보내 臣下들에게 王·侯·將軍 등의 爵號 除授를 청했을 때 그 國書 중 ‘ …… 廣武將軍餘固 忠効時務 光宣國政 今假行建威將軍·弗斯侯 …… (『南齊書』百濟國傳)’라 한 데서도 보인다.
『南齊書』의 ‘面中王’·‘八中侯’·‘弗斯侯’ 등 王侯名은 大王인 百濟王이 그 밑에 ‘王’·‘侯’를 거느린 것을 의미하며, (坂元義種,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pp.1~14) 이러한 ‘弗斯’·‘面中’ 등 地名의 王·侯는 바로 ‘二十二檐魯’의 一部가 아닐까 하는 推定도 있다.(千寬宇, 「馬韓諸國의 位置試論」pp.206~207)
弗斯·面中 等의 地名 位置比定은 末松保和에서 부터 試圖되어, (『任那興亡史』pp.20~60) 坂元義種도 本文에 대한 譯註에서 末松保和의 견해를 수용하는 등(『東アジア民族史』p.221)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최근 暫定的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견해를 내놓은 千寬宇는 그 위치比定에서 ‘弗斯’는 ‘伐首只一唐津’일 것이라 하였고, (앞의 논문, p.206) 末松保和·坂元義種은 ‘比斯伐-全州’ 혹은 ‘夫沙-昇州樂安’일 것이라 하였다.(末松保和, 앞의 책, p.241; 坂元義種, 앞의 논문, p.221)
本文의 譯文에서 ‘弗斯侯와 長史’라 하였는데 이 뜻은 ‘弗斯의 侯이면서 동시에 (中央官職으로서는 幕府의 幕僚인) 長史’ 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參考文獻≫
『南齊書』卷58 「東南夷列傳」百濟國條.
千寬宇, 「馬韓諸國의 位置 試論」『東洋學』9, 1979.
末松保和, 『任那興亡史』1960.
坂元義種,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東アジアの民族史』卷1, 1974.
≪參考文獻≫
全榮來, 「完山과 比斯伐論」『馬韓·百濟文化』1, 1975.

<참조>
『魏書』百濟傳 註 19)
弗斯侯
弗斯侯는 蓋鹵王代보다는 後代의 일지만 東城王이 永明 8年(東城王 12年, 490)에 南齊에 國書를 보내 臣下들에게 王·侯·將軍 등의 爵號 除授를 청했을 때 그 國書 중 ‘ …… 廣武將軍餘固 忠効時務 光宣國政 今假行建威將軍·弗斯侯 …… (『南齊書』百濟國傳)’라 한 데서도 보인다.
『南齊書』의 ‘面中王’·‘八中侯’·‘弗斯侯’ 등 王侯名은 大王인 百濟王이 그 밑에 ‘王’·‘侯’를 거느린 것을 의미하며, (坂元義種,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pp.1~14) 이러한 ‘弗斯’·‘面中’ 등 地名의 王·侯는 바로 ‘二十二檐魯’의 一部가 아닐까 하는 推定도 있다.(千寬宇, 「馬韓諸國의 位置試論」pp.206~207)
弗斯·面中 等의 地名 位置比定은 末松保和에서 부터 試圖되어, (『任那興亡史』pp.20~60) 坂元義種도 本文에 대한 譯註에서 末松保和의 견해를 수용하는 등(『東アジア民族史』p.221)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최근 暫定的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견해를 내놓은 千寬宇는 그 위치比定에서 ‘弗斯’는 ‘伐首只一唐津’일 것이라 하였고, (앞의 논문, p.206) 末松保和·坂元義種은 ‘比斯伐-全州’ 혹은 ‘夫沙-昇州樂安’일 것이라 하였다.(末松保和, 앞의 책, p.241; 坂元義種, 앞의 논문, p.221)
本文의 譯文에서 ‘弗斯侯와 長史’라 하였는데 이 뜻은 ‘弗斯의 侯이면서 동시에 (中央官職으로서는 幕府의 幕僚인) 長史’ 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參考文獻≫
『南齊書』卷58 「東南夷列傳」百濟國條.
千寬宇, 「馬韓諸國의 位置 試論」『東洋學』9, 1979.
末松保和, 『任那興亡史』1960.
坂元義種,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東アジアの民族史』卷1, 1974.
≪參考文獻≫
全榮來, 「完山과 比斯伐論」『馬韓·百濟文化』1,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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