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지리적 위치와 습속
해(奚) 역시 동호(東胡)의 종(種)으로, 흉노(匈奴)에게 격파되어 오환산(烏丸山)
주 001에 의지했다. 후한[漢]주 002의 조조(曹操)가 그들의 우두머리[帥]인 답돈(蹋頓)을 참수했는데 대개 그의 후예이다. 원위(元魏) 때, 스스로를 고진해(庫眞奚)라 부르고 선비(鮮卑)
주 003
각주 003)
의 옛 땅에 살았는데 [그들이 살던 땅은 당의] 경사(京師)에서 동북쪽으로 사천 리 [떨어진 곳에] 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이 살던] 땅은 동북쪽으로 거란(契丹)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돌궐(突厥), 남쪽으로는 백랑하(白狼河)
주 004, 북쪽으로는 습(霫)
주 005과 접해 있었다. 돌궐(突厥)과는 풍속이 같아 물과 풀을 쫓아 목축을 하고 양탄자로 만든 천막[氊廬]에서 살았으며 수레를 빙 둘러 구획[營]을 지었다. 그[들의] 군장은 평상시 오백 명으로 호위병을 삼아 [그들의] 본영[牙中]을 지키게 했고 남은 부락 [사람들]은 산곡(山谷) 사이에 흩어져 [살아] 조세를 거두지 않았고 수렵으로 재물을 얻었다. [그들은] 제(穄)주 006를 많이 심었는데 [곡식을] 거두어 들이게 되면 산 주위에 구멍을 파서 [그것들을 두었다]. 나무를 잘라서 절구를 만들고 기와[로 만든] 솥에 죽을 담아 차가운 물과 섞어 먹었다. 전투를 즐겨해 병사들을 오부(五部)로 나누고 [각] 부마다 한 [명]씩의 사근(俟斤)[을 두어] 그들을 다스렸다. 그 나라의 서쪽은 대락박(大洛泊)에 닿았고 회흘(回紇)
주 007의 본영[牙]과의 거리는 삼천 리였는데, 토호진수(土護眞水)에 의지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말은 [높은 곳에] 오르기를 잘했고 그들의 양은 검은 색이었다. 한여름에는 반드시 냉형산(冷陘山)으로 옮겨 가 의지했고 [그] 산은 규주(嬀州)
주 008의 서북쪽과 마주하고 있었다. 수(隋)
주 009에 이르러 비로소 [그들의 이름에서] 고진(庫眞)을 빼고 단지 해(奚)라고만 하였다.鮮卑: 북아시아의 유목민으로 東胡의 支派이다. 처음에 鮮卑山 부근에 모여 살아 “鮮卑”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후 呼倫池 부근으로 이동하였고 다시 陰山 일대로 이동하여 다른 種族과 접촉하였다. 檀石槐가 鮮卑의 각 부족을 통합하고, 과거 匈奴에 필적하는 유목제국을 세웠다. 檀石槐 사후 잠시 분열되었으나, 軻比能이 다시 鮮卑 각 부족을 규합하였다. 曹魏 靑龍 3년(235) 軻比能이 魏의 자객에게 살해되면서 분열하다 이후 兩晉·南北朝時代에 慕容部가 前燕·後燕·西燕·南燕을, 乞伏部가 西秦을, 禿跋部가 南涼을, 그리고 拓跋部가 北魏를 세웠다. 宇文部는 北周를 세웠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鮮卑: 북아시아의 유목민으로 東胡의 支派이다. 처음에 鮮卑山 부근에 모여 살아 “鮮卑”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후 呼倫池 부근으로 이동하였고 다시 陰山 일대로 이동하여 다른 種族과 접촉하였다. 檀石槐가 鮮卑의 각 부족을 통합하고, 과거 匈奴에 필적하는 유목제국을 세웠다. 檀石槐 사후 잠시 분열되었으나, 軻比能이 다시 鮮卑 각 부족을 규합하였다. 曹魏 靑龍 3년(235) 軻比能이 魏의 자객에게 살해되면서 분열하다 이후 兩晉·南北朝時代에 慕容部가 前燕·後燕·西燕·南燕을, 乞伏部가 西秦을, 禿跋部가 南涼을, 그리고 拓跋部가 北魏를 세웠다. 宇文部는 北周를 세웠다.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색인어
- 이름
- 조조(曹操), 답돈(蹋頓)
- 지명
- 해(奚), 흉노(匈奴), 오환산(烏丸山), 원위(元魏), 선비(鮮卑), 당, 거란(契丹), 돌궐(突厥), 백랑하(白狼河), 습(霫), 돌궐(突厥), 대락박(大洛泊), 회흘(回紇), 냉형산(冷陘山), 규주(嬀州), 수(隋), 해(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