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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해의 지리적 위치와 습속

  • 국가
    해(奚)
해(奚) 역시 동호(東胡)의 종(種)으로, 흉노(匈奴)에게 격파되어 오환산(烏丸山) 주 001
각주 001)
烏桓山: 대체로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阿魯科爾沁旗 북부의 大興安嶺山脈 남단을 가리킨다(馬長壽, 1962: 13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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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의지했다. 후한[漢]주 002
각주 002)
여기서는 光武帝 劉秀가 건국한 後漢(25~220)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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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曹操)가 그들의 우두머리[帥]인 답돈(蹋頓)을 참수했는데 대개 그의 후예이다. 원위(元魏) 때, 스스로를 고진해(庫眞奚)라 부르고 선비(鮮卑) 주 003
각주 003)
鮮卑: 북아시아의 유목민으로 東胡의 支派이다. 처음에 鮮卑山 부근에 모여 살아 “鮮卑”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후 呼倫池 부근으로 이동하였고 다시 陰山 일대로 이동하여 다른 種族과 접촉하였다. 檀石槐가 鮮卑의 각 부족을 통합하고, 과거 匈奴에 필적하는 유목제국을 세웠다. 檀石槐 사후 잠시 분열되었으나, 軻比能이 다시 鮮卑 각 부족을 규합하였다. 曹魏 靑龍 3년(235) 軻比能이 魏의 자객에게 살해되면서 분열하다 이후 兩晉·南北朝時代에 慕容部가 前燕·後燕·西燕·南燕을, 乞伏部가 西秦을, 禿跋部가 南涼을, 그리고 拓跋部가 北魏를 세웠다. 宇文部는 北周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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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옛 땅에 살았는데 [그들이 살던 땅은 의] 경사(京師)에서 동북쪽으로 사천 리 [떨어진 곳에] 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이 살던] 땅은 동북쪽으로 거란(契丹)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돌궐(突厥), 남쪽으로는 백랑하(白狼河) 주 004
각주 004)
白狼河: 지금의 遼寧省 경내의 大凌河를 말한다. 水源이 白狼山에서부터 흘러나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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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쪽으로는 습(霫) 주 005
각주 005)
霫: 東胡의 일종으로 수당시대 潢水(지금의 內蒙古自治區 시라무렌강) 이북에 살았다. 동쪽으로는 말갈, 서쪽으로는 돌궐, 남쪽으로는 거란, 북쪽으로는 오락후와 접해 있었다. 사면이 모두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 수렵을 주로 하였다. 赤皮로 옷을 만들어 입었고 언어와 습속은 거란과 대체로 동일했다. 당 정관 3년(628) 사자를 보내 당에 조공했다. 후에 潢水 남쪽으로 옮겼다가 거란에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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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접해 있었다. 돌궐(突厥)과는 풍속이 같아 물과 풀을 쫓아 목축을 하고 양탄자로 만든 천막[氊廬]에서 살았으며 수레를 빙 둘러 구획[營]을 지었다. 그[들의] 군장은 평상시 오백 명으로 호위병을 삼아 [그들의] 본영[牙中]을 지키게 했고 남은 부락 [사람들]은 산곡(山谷) 사이에 흩어져 [살아] 조세를 거두지 않았고 수렵으로 재물을 얻었다. [그들은] 제(穄)주 006
각주 006)
穄: 빛이 검은 메기장이다. 이에 관해서는 현재 어떤 학명의 식물에 속하는지 불분명하다는 주장도 있고(內田吟風, 1945: 28~29), 북방에서 생장하기에 적합해 지금도 內蒙古自治區 일대에서 경작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李涵·沈學明, 1985: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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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많이 심었는데 [곡식을] 거두어 들이게 되면 산 주위에 구멍을 파서 [그것들을 두었다]. 나무를 잘라서 절구를 만들고 기와[로 만든] 솥에 죽을 담아 차가운 물과 섞어 먹었다. 전투를 즐겨해 병사들을 오부(五部)로 나누고 [각] 부마다 한 [명]씩의 사근(俟斤)[을 두어] 그들을 다스렸다. 그 나라의 서쪽은 대락박(大洛泊)에 닿았고 회흘(回紇) 주 007
각주 007)
回紇: 鐵勒 부족의 하나인데 고대 투르크어로 기록된 위구르(Uyghur)를 전사한 것이다. 지금 中國에서는 維吾爾로 전사한다. 回紇(迴紇: 『舊唐書』) 혹은 回로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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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본영[牙]과의 거리는 삼천 리였는데, 토호진수(土護眞水)에 의지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말은 [높은 곳에] 오르기를 잘했고 그들의 양은 검은 색이었다. 한여름에는 반드시 냉형산(冷陘山)으로 옮겨 가 의지했고 [그] 산은 규주(嬀州) 주 008
각주 008)
嬀州: 당 貞觀 8년(634), 北燕州를 고쳐 설치했고 처음의 치소는 懷州(지금의 河北省 涿鹿縣 서남쪽)이었으나 長安 2년(702), 淸夷軍城(지금의 河北省 懷來縣 동남)으로 옮겼다. 天寶 원년(742), 이름을 바꿔 嬀州郡이라 했다가 乾元 원년(758), 다시 嬀州라 했다. 오대 때에 可汗州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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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서북쪽과 마주하고 있었다. 수(隋) 주 009
각주 009)
隋(581~618): 581년 楊堅이 北周를 대신해 칭제하고 국호를 隋라 하였다. 개황 3년(583) 大興(지금의 섬서성 서안시)에 도읍을 정하고 陳을 멸한 후 전국을 통일했다. 양제 大業 7년(611)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으로 붕괴되었다. 2대 38년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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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러 비로소 [그들의 이름에서] 고진(庫眞)을 빼고 단지 해(奚)라고만 하였다.

  • 각주 001)
    烏桓山: 대체로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阿魯科爾沁旗 북부의 大興安嶺山脈 남단을 가리킨다(馬長壽, 1962: 13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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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여기서는 光武帝 劉秀가 건국한 後漢(25~220)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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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鮮卑: 북아시아의 유목민으로 東胡의 支派이다. 처음에 鮮卑山 부근에 모여 살아 “鮮卑”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후 呼倫池 부근으로 이동하였고 다시 陰山 일대로 이동하여 다른 種族과 접촉하였다. 檀石槐가 鮮卑의 각 부족을 통합하고, 과거 匈奴에 필적하는 유목제국을 세웠다. 檀石槐 사후 잠시 분열되었으나, 軻比能이 다시 鮮卑 각 부족을 규합하였다. 曹魏 靑龍 3년(235) 軻比能이 魏의 자객에게 살해되면서 분열하다 이후 兩晉·南北朝時代에 慕容部가 前燕·後燕·西燕·南燕을, 乞伏部가 西秦을, 禿跋部가 南涼을, 그리고 拓跋部가 北魏를 세웠다. 宇文部는 北周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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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白狼河: 지금의 遼寧省 경내의 大凌河를 말한다. 水源이 白狼山에서부터 흘러나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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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霫: 東胡의 일종으로 수당시대 潢水(지금의 內蒙古自治區 시라무렌강) 이북에 살았다. 동쪽으로는 말갈, 서쪽으로는 돌궐, 남쪽으로는 거란, 북쪽으로는 오락후와 접해 있었다. 사면이 모두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 수렵을 주로 하였다. 赤皮로 옷을 만들어 입었고 언어와 습속은 거란과 대체로 동일했다. 당 정관 3년(628) 사자를 보내 당에 조공했다. 후에 潢水 남쪽으로 옮겼다가 거란에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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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穄: 빛이 검은 메기장이다. 이에 관해서는 현재 어떤 학명의 식물에 속하는지 불분명하다는 주장도 있고(內田吟風, 1945: 28~29), 북방에서 생장하기에 적합해 지금도 內蒙古自治區 일대에서 경작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李涵·沈學明, 1985: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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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回紇: 鐵勒 부족의 하나인데 고대 투르크어로 기록된 위구르(Uyghur)를 전사한 것이다. 지금 中國에서는 維吾爾로 전사한다. 回紇(迴紇: 『舊唐書』) 혹은 回로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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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嬀州: 당 貞觀 8년(634), 北燕州를 고쳐 설치했고 처음의 치소는 懷州(지금의 河北省 涿鹿縣 서남쪽)이었으나 長安 2년(702), 淸夷軍城(지금의 河北省 懷來縣 동남)으로 옮겼다. 天寶 원년(742), 이름을 바꿔 嬀州郡이라 했다가 乾元 원년(758), 다시 嬀州라 했다. 오대 때에 可汗州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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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隋(581~618): 581년 楊堅이 北周를 대신해 칭제하고 국호를 隋라 하였다. 개황 3년(583) 大興(지금의 섬서성 서안시)에 도읍을 정하고 陳을 멸한 후 전국을 통일했다. 양제 大業 7년(611)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으로 붕괴되었다. 2대 38년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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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조조(曹操), 답돈(蹋頓)
지명
해(奚), 흉노(匈奴), 오환산(烏丸山), 원위(元魏), 선비(鮮卑), , 거란(契丹), 돌궐(突厥), 백랑하(白狼河), 습(霫), 돌궐(突厥), 대락박(大洛泊), 회흘(回紇), 냉형산(冷陘山), 규주(嬀州), 수(隋), 해(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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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지리적 위치와 습속 자료번호 : jo.k_0017_0219_0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