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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지리적 위치와 습속

  • 국가
    거란(契丹)
거란(契丹) 주 001
각주 001)
契丹: 지금의 遼河 상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목축활동을 하며 북위시대 스스로를 契丹이라 하였다. 4~10세기에 걸쳐 이 지역에서 庫莫奚와 함께 양대 세력을 형성하였다. 풍속의 대부분은 突厥과 비슷했고, 唐代에는 八部로 나뉘었는데, 唐末 迭剌部의 우두머리 阿保機가 부락을 통일하고 916년 遼를 건국했으며, 北宋 宣和 7년(1125) 女眞의 금나라에 멸망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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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본래 동호(東胡)주 002
각주 002)
東胡: 종족명. 匈奴의 동쪽에 거주했기 때문에 東胡라고 불렸다. 이들은 長成의 동북쪽에 살았고, 목축에 종사했다. 春秋戰國時代에는 남쪽으로 燕과 인접해 있었는데 燕에 패하자 북쪽의 遼河 상류 지역으로 이동했다. 秦나라 말기에 다시 강성해졌지만 匈奴의 冒頓單于에게 패했다. 이들을 이후 등장하는 烏丸과 鮮卑의 조상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林幹, 1995: 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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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한] 종류로 그 선조가 흉노(匈奴) 주 003
각주 003)
匈奴: 기원전 3세기말 몽골초원을 통일하고 북아시아 최초로 유목국가를 건설하였다. 漢과 대결과 和親 관계를 반복하다 1세기경에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그 후로도 내부의 갈등이 계속되다 결국 멸망했다. 주요 세력은 이후 中國 북방으로 내려와 南匈奴를 형성하고 三國時代까지 中國의 藩屛 역할을 했다. 永嘉의 喪亂 이후 五胡十六國時代에는 漢과 前趙, 그리고 北涼 등을 세웠다. 그러나 이후로는 과거와 같은 유목 국가 내지는 중원왕조를 건설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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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격파되어 선비산(鮮卑山) 주 004
각주 004)
鮮卑山: 정확한 위치에 관해서는 설이 분분한데 대략 다음과 같다. ① 鮮卑人들이 이 산에 거처하여 鮮卑라는 명칭을 얻었다. 이에 대해 혹자는 선비가 이동함에 따라 鮮卑山의 명칭도 달라졌다고 했다. ② 현재의 大興安嶺 북단이다. 현재의 內蒙古自治區 鄂倫春自治縣 阿里河鎭 서북의 戛仙洞에서 북위 鮮卑石室이 발견되었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다. ③ 현재의 內蒙古自治區 科爾沁右翼中旗의 서쪽이다. 현재 사람들은 이 곳을 蒙格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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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의지하여 살았다. 조위[魏] 주 005
각주 005)
[曹]魏(220~265): 三國時代 三國의 하나이다. 後漢末 黨錮의 禍, 황건적의 난 등으로 황실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董卓·袁紹·袁術·公孫讚 등의 群雄이 각지에서 할거하였다. 당시 원소 휘하의 部將 중 한 명이었던 曹操는 황건적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해갔다. 마침내 196년 후한의 獻帝를 許(河南省 許昌縣)에 유폐시키고 丞相·魏國公이 되었다. 이 당시 四川과 江南 일대에는 劉備와 孫權 등이 雄據하고 있었는데 208년 조조가 赤壁(湖北省 嘉魚縣 서쪽)에서 유비와 손권이 이끄는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면서 天下三分의 형세가 이루어졌다. 216년 조조는 魏國王에 봉해졌으나 220년에 죽었다. 그의 아들 曹丕(훗날 文帝)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즉위했다. 이것이 曹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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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靑龍) 연간(233~237), 부족의 우두머리[部酋]인 비능(比能)이 조금 사납고 교만했으나 [조위의] 유주주 006
각주 006)
幽州: 前漢 武帝 때 설치한 13刺史部의 하나이다. 隋는 이전의 郡 및 總管府를 폐지하고 涿郡을 세웠다. 唐 武德 원년(618) 幽州를 설치했고 遼 會同 원년(938) 幽州府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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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주 007
각주 007)
刺史: 漢代 지방을 감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가 이후 지방관화 되어 隋唐時代에는 州의 行政長官으로서 軍號를 갖지 않았다. 品秩은 등급에 따라 從三品에서 正四品下까지였다. 그 속관으로는 長史, 司馬, 別駕, 錄事參軍, 司功, 司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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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幽州刺史) 왕웅(王雄)에게 살해되자 무리는 마침내 쇠잔해져 황수(潢水) 주 008
각주 008)
潢水: 湟水라고도 쓰는데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시라무렌강 및 하류의 西遼河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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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남쪽, 황룡(黃龍) 주 009
각주 009)
黃龍: 遼에서 설치한 縣의 이름으로 치소는 지금의 吉林省 農安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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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북쪽으로 도망쳤다. 원위(元魏) 주 010
각주 010)
元魏(386∼534): 南北朝時代 華北을 지배했던 北魏를 지칭한다. 魏·後魏·拓跋魏 등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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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이르러 스스로를 거란이라 불렀다. [그들이 살던] 땅은 [당의] 경사(京師)에서 동북쪽으로 오천 리에 뻗어 있었고,주 011
각주 011)
원문은 “地直京師東北五千里而贏”인데 『舊唐書』에는 “在京城東北五千三百里”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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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는 고려(高麗) 주 012
각주 012)
高麗(전37년경~668): 지금의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약 700여 년 동안 지배했던 우리나라의 古代國家 중 하나이다. 長壽王 때 이후 국호를 高麗로도 불렀으나, 대체로 高句麗로 알려져 있다. 高離·句麗 등의 명칭으로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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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떨어져 있었고, 서쪽으로는 해(奚),주 013
각주 013)
奚: 남북조시대에는 庫莫奚라 불리던 종족이다. 東胡의 하나로 饒樂水(지금의 시라무렌강) 유역에 분포하였고, 유목과 사냥을 겸했다. 北魏時代 종족이 점차 번성하여 辱紇主·莫賀弗·契箇·木昆·室得 등 五部로 나뉘었고, 점차 契丹에 同化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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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는 영주(營州),주 014
각주 014)
營州: 北魏 太平眞君 5년(444) 설치한 州의 이름이다. 치소는 龍城縣(지금의 遼寧省 朝陽市)에 있었는데 후에 폐지했다. 隋 大業 初(605~617) 遼西郡을 설치하고 唐 武德 원년(618) 이를 營州라 한 이래 柳城郡, 營州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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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으로는 말갈(靺鞨) 주 015
각주 015)
靺鞨: 종족명. 원래는 肅愼에서 나왔다. 北魏時代에는 勿吉이라 불렀고 隋唐時代에 비로소 靺鞨이라 불렀다. 지금의 松花江·牡丹江 유역 및 黑龍江 중하류에 분포했다. 동쪽으로는 東海, 서쪽으로는 突厥, 남쪽으로는 高麗, 북쪽으로는 室韋와 인접했다. 五代 때에는 黑水部靺鞨을 女眞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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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위(室韋) 주 016
각주 016)
室韋: 각종 史書에서 失韋라고도 적었다. 북위시대부터 그들에 관한 기록이 나오며, 五部로 나뉘어 嫩江 및 黑龍江 주변에 살았다. 『北史』(권94, 「室韋傳」: 3129)와 『隋書』(권84, 「北狄傳」: 1882)에서는 “契丹之類”라 하여 남쪽에 거주하는 자들을 契丹, 북쪽에 거주하는 자들을 室韋라 적었다. 이들 중 額爾古納河 일대에 살던 蒙兀室韋는 蒙古部의 선조가 된다. 부락은 千戶 또는 몇 개의 千戶로 이루어졌으며, 首領은 莫賀咄이라 부른다. 북조시대 이래로 중원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후에 突厥에 복속되었다. 거란이 遼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室韋의 일부가 遼에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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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인접해 있었고], 냉형산(冷陘山) 주 017
각주 017)
冷陘山: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扎魯特旗 남쪽의 奎屯山을 말한다. “奎屯”은 몽골어로 “冷”의 뜻이다. 산이 높고 서늘해 한 여름에 이 곳에서 더위를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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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로막고 있어 스스로를 굳건하[게 지킬 수 있었]다. 사냥을 해서 사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배자[君]는 대하씨(大賀氏)주 018
각주 018)
大賀氏: 과거 거란의 종족명 중 하나이다. 당초 거란은 시라무렌강·老哈河 일대에서 흥기하여 부락연맹을 형성했다. 대하씨는 부락연맹의 수령을 역임했고 八部를 통령했다. 원래는 돌궐에 신속했는데 당 武德(618~625) 초에 使者를 보내 조공하였다. 이후 당과 돌궐에 의탁하거나 반기를 드는 등의 행위를 반복하다 마침내 돌궐에 의탁했다. 이로써 부락연맹의 통치권은 遙輦氏에게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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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승병(勝兵) 4만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무리를] 팔부(八部)로 나누어 돌궐(突厥) 주 019
각주 019)
突厥: 6세기 중반 柔然을 무너뜨리고 3세기에 걸쳐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를 호령했던 유목제국을 지칭한다. 突厥은 원래 그 국가의 中核集團이었던 阿史那氏가 속한 부락의 명칭에서 연원한 것으로 고대 투르크어로는 ‘투르크(Türk 또는 Türük)’의 음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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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신속하고 사근(俟斤)주 020
각주 020)
俟斤: 고대 투르크어 irkin을 음사한 것으로, 부락 수령의 칭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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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었다. 무릇 [병사를] 징발하여 전쟁을 할 때에는 여러 부락[部]이 모두 모였고, 사냥을 할 때에는 부락[部]이 [그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해(奚)와는 [서로] 불만스럽게 생각해 매번 전투를 벌였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번번이 선비산(鮮卑山)으로 도망쳐 의지하였다. [그들의] 풍속은 돌궐(突厥)과 대체로 같았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묘를 쓰지 않고 말[이 끄는] 수레에 시체를 실고 산으로 들어가 나무 꼭대기에 두었다. 자손이 죽으면 부모가 아침저녁으로 곡을 했으나 부모가 죽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고 또한 상복[喪]을 입는 기간[喪期]도 없었다.

  • 각주 001)
    契丹: 지금의 遼河 상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목축활동을 하며 북위시대 스스로를 契丹이라 하였다. 4~10세기에 걸쳐 이 지역에서 庫莫奚와 함께 양대 세력을 형성하였다. 풍속의 대부분은 突厥과 비슷했고, 唐代에는 八部로 나뉘었는데, 唐末 迭剌部의 우두머리 阿保機가 부락을 통일하고 916년 遼를 건국했으며, 北宋 宣和 7년(1125) 女眞의 금나라에 멸망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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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東胡: 종족명. 匈奴의 동쪽에 거주했기 때문에 東胡라고 불렸다. 이들은 長成의 동북쪽에 살았고, 목축에 종사했다. 春秋戰國時代에는 남쪽으로 燕과 인접해 있었는데 燕에 패하자 북쪽의 遼河 상류 지역으로 이동했다. 秦나라 말기에 다시 강성해졌지만 匈奴의 冒頓單于에게 패했다. 이들을 이후 등장하는 烏丸과 鮮卑의 조상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林幹, 1995: 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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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匈奴: 기원전 3세기말 몽골초원을 통일하고 북아시아 최초로 유목국가를 건설하였다. 漢과 대결과 和親 관계를 반복하다 1세기경에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그 후로도 내부의 갈등이 계속되다 결국 멸망했다. 주요 세력은 이후 中國 북방으로 내려와 南匈奴를 형성하고 三國時代까지 中國의 藩屛 역할을 했다. 永嘉의 喪亂 이후 五胡十六國時代에는 漢과 前趙, 그리고 北涼 등을 세웠다. 그러나 이후로는 과거와 같은 유목 국가 내지는 중원왕조를 건설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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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鮮卑山: 정확한 위치에 관해서는 설이 분분한데 대략 다음과 같다. ① 鮮卑人들이 이 산에 거처하여 鮮卑라는 명칭을 얻었다. 이에 대해 혹자는 선비가 이동함에 따라 鮮卑山의 명칭도 달라졌다고 했다. ② 현재의 大興安嶺 북단이다. 현재의 內蒙古自治區 鄂倫春自治縣 阿里河鎭 서북의 戛仙洞에서 북위 鮮卑石室이 발견되었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다. ③ 현재의 內蒙古自治區 科爾沁右翼中旗의 서쪽이다. 현재 사람들은 이 곳을 蒙格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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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曹]魏(220~265): 三國時代 三國의 하나이다. 後漢末 黨錮의 禍, 황건적의 난 등으로 황실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董卓·袁紹·袁術·公孫讚 등의 群雄이 각지에서 할거하였다. 당시 원소 휘하의 部將 중 한 명이었던 曹操는 황건적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해갔다. 마침내 196년 후한의 獻帝를 許(河南省 許昌縣)에 유폐시키고 丞相·魏國公이 되었다. 이 당시 四川과 江南 일대에는 劉備와 孫權 등이 雄據하고 있었는데 208년 조조가 赤壁(湖北省 嘉魚縣 서쪽)에서 유비와 손권이 이끄는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면서 天下三分의 형세가 이루어졌다. 216년 조조는 魏國王에 봉해졌으나 220년에 죽었다. 그의 아들 曹丕(훗날 文帝)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즉위했다. 이것이 曹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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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幽州: 前漢 武帝 때 설치한 13刺史部의 하나이다. 隋는 이전의 郡 및 總管府를 폐지하고 涿郡을 세웠다. 唐 武德 원년(618) 幽州를 설치했고 遼 會同 원년(938) 幽州府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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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刺史: 漢代 지방을 감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가 이후 지방관화 되어 隋唐時代에는 州의 行政長官으로서 軍號를 갖지 않았다. 品秩은 등급에 따라 從三品에서 正四品下까지였다. 그 속관으로는 長史, 司馬, 別駕, 錄事參軍, 司功, 司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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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潢水: 湟水라고도 쓰는데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시라무렌강 및 하류의 西遼河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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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黃龍: 遼에서 설치한 縣의 이름으로 치소는 지금의 吉林省 農安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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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元魏(386∼534): 南北朝時代 華北을 지배했던 北魏를 지칭한다. 魏·後魏·拓跋魏 등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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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원문은 “地直京師東北五千里而贏”인데 『舊唐書』에는 “在京城東北五千三百里”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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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高麗(전37년경~668): 지금의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약 700여 년 동안 지배했던 우리나라의 古代國家 중 하나이다. 長壽王 때 이후 국호를 高麗로도 불렀으나, 대체로 高句麗로 알려져 있다. 高離·句麗 등의 명칭으로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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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奚: 남북조시대에는 庫莫奚라 불리던 종족이다. 東胡의 하나로 饒樂水(지금의 시라무렌강) 유역에 분포하였고, 유목과 사냥을 겸했다. 北魏時代 종족이 점차 번성하여 辱紇主·莫賀弗·契箇·木昆·室得 등 五部로 나뉘었고, 점차 契丹에 同化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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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營州: 北魏 太平眞君 5년(444) 설치한 州의 이름이다. 치소는 龍城縣(지금의 遼寧省 朝陽市)에 있었는데 후에 폐지했다. 隋 大業 初(605~617) 遼西郡을 설치하고 唐 武德 원년(618) 이를 營州라 한 이래 柳城郡, 營州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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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靺鞨: 종족명. 원래는 肅愼에서 나왔다. 北魏時代에는 勿吉이라 불렀고 隋唐時代에 비로소 靺鞨이라 불렀다. 지금의 松花江·牡丹江 유역 및 黑龍江 중하류에 분포했다. 동쪽으로는 東海, 서쪽으로는 突厥, 남쪽으로는 高麗, 북쪽으로는 室韋와 인접했다. 五代 때에는 黑水部靺鞨을 女眞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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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室韋: 각종 史書에서 失韋라고도 적었다. 북위시대부터 그들에 관한 기록이 나오며, 五部로 나뉘어 嫩江 및 黑龍江 주변에 살았다. 『北史』(권94, 「室韋傳」: 3129)와 『隋書』(권84, 「北狄傳」: 1882)에서는 “契丹之類”라 하여 남쪽에 거주하는 자들을 契丹, 북쪽에 거주하는 자들을 室韋라 적었다. 이들 중 額爾古納河 일대에 살던 蒙兀室韋는 蒙古部의 선조가 된다. 부락은 千戶 또는 몇 개의 千戶로 이루어졌으며, 首領은 莫賀咄이라 부른다. 북조시대 이래로 중원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후에 突厥에 복속되었다. 거란이 遼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室韋의 일부가 遼에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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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冷陘山: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扎魯特旗 남쪽의 奎屯山을 말한다. “奎屯”은 몽골어로 “冷”의 뜻이다. 산이 높고 서늘해 한 여름에 이 곳에서 더위를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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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大賀氏: 과거 거란의 종족명 중 하나이다. 당초 거란은 시라무렌강·老哈河 일대에서 흥기하여 부락연맹을 형성했다. 대하씨는 부락연맹의 수령을 역임했고 八部를 통령했다. 원래는 돌궐에 신속했는데 당 武德(618~625) 초에 使者를 보내 조공하였다. 이후 당과 돌궐에 의탁하거나 반기를 드는 등의 행위를 반복하다 마침내 돌궐에 의탁했다. 이로써 부락연맹의 통치권은 遙輦氏에게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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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突厥: 6세기 중반 柔然을 무너뜨리고 3세기에 걸쳐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를 호령했던 유목제국을 지칭한다. 突厥은 원래 그 국가의 中核集團이었던 阿史那氏가 속한 부락의 명칭에서 연원한 것으로 고대 투르크어로는 ‘투르크(Türk 또는 Türük)’의 음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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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俟斤: 고대 투르크어 irkin을 음사한 것으로, 부락 수령의 칭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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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비능(比能), 왕웅(王雄)
지명
거란(契丹), 흉노(匈奴), 선비산(鮮卑山), 조위[魏], 황수(潢水), 황룡(黃龍), 원위(元魏), 거란, 고려(高麗), 해(奚), 영주(營州), 말갈(靺鞨), 실위(室韋), 냉형산(冷陘山), 돌궐(突厥), 해(奚), 선비산(鮮卑山), 돌궐(突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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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지리적 위치와 습속 자료번호 : jo.k_0017_0219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