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의 지리적 위치와 습속
거란(契丹)
주 001은 본래 동호(東胡)주 002의 [한] 종류로 그 선조가 흉노(匈奴)
주 003에게 격파되어 선비산(鮮卑山)
주 004에 의지하여 살았다. 조위[魏]
주 005
각주 005)
청룡(靑龍) 연간(233~237), 부족의 우두머리[部酋]인 비능(比能)이 조금 사납고 교만했으나 [조위의] 유주주 006자사주 007(幽州刺史) 왕웅(王雄)에게 살해되자 무리는 마침내 쇠잔해져 황수(潢水)
주 008의 남쪽, 황룡(黃龍)
주 009의 북쪽으로 도망쳤다. 원위(元魏)
주 010때에 이르러 스스로를 거란이라 불렀다. [그들이 살던] 땅은 [당의] 경사(京師)에서 동북쪽으로 오천 리에 뻗어 있었고,주 011동쪽으로는 고려(高麗)
주 012와 떨어져 있었고, 서쪽으로는 해(奚),주 013남쪽으로는 영주(營州),주 014북쪽으로는 말갈(靺鞨)
주 015·실위(室韋)
주 016[曹]魏(220~265): 三國時代 三國의 하나이다. 後漢末 黨錮의 禍, 황건적의 난 등으로 황실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董卓·袁紹·袁術·公孫讚 등의 群雄이 각지에서 할거하였다. 당시 원소 휘하의 部將 중 한 명이었던 曹操는 황건적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해갔다. 마침내 196년 후한의 獻帝를 許(河南省 許昌縣)에 유폐시키고 丞相·魏國公이 되었다. 이 당시 四川과 江南 일대에는 劉備와 孫權 등이 雄據하고 있었는데 208년 조조가 赤壁(湖北省 嘉魚縣 서쪽)에서 유비와 손권이 이끄는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면서 天下三分의 형세가 이루어졌다. 216년 조조는 魏國王에 봉해졌으나 220년에 죽었다. 그의 아들 曹丕(훗날 文帝)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즉위했다. 이것이 曹魏이다.
각주 016)
와 [인접해 있었고], 냉형산(冷陘山)
주 017이 가로막고 있어 스스로를 굳건하[게 지킬 수 있었]다. 사냥을 해서 사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배자[君]는 대하씨(大賀氏)주 018로 승병(勝兵) 4만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무리를] 팔부(八部)로 나누어 돌궐(突厥)
주 019에 신속하고 사근(俟斤)주 020이 되었다. 무릇 [병사를] 징발하여 전쟁을 할 때에는 여러 부락[部]이 모두 모였고, 사냥을 할 때에는 부락[部]이 [그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해(奚)와는 [서로] 불만스럽게 생각해 매번 전투를 벌였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번번이 선비산(鮮卑山)으로 도망쳐 의지하였다. [그들의] 풍속은 돌궐(突厥)과 대체로 같았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묘를 쓰지 않고 말[이 끄는] 수레에 시체를 실고 산으로 들어가 나무 꼭대기에 두었다. 자손이 죽으면 부모가 아침저녁으로 곡을 했으나 부모가 죽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고 또한 상복[喪]을 입는 기간[喪期]도 없었다.室韋: 각종 史書에서 失韋라고도 적었다. 북위시대부터 그들에 관한 기록이 나오며, 五部로 나뉘어 嫩江 및 黑龍江 주변에 살았다. 『北史』(권94, 「室韋傳」: 3129)와 『隋書』(권84, 「北狄傳」: 1882)에서는 “契丹之類”라 하여 남쪽에 거주하는 자들을 契丹, 북쪽에 거주하는 자들을 室韋라 적었다. 이들 중 額爾古納河 일대에 살던 蒙兀室韋는 蒙古部의 선조가 된다. 부락은 千戶 또는 몇 개의 千戶로 이루어졌으며, 首領은 莫賀咄이라 부른다. 북조시대 이래로 중원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후에 突厥에 복속되었다. 거란이 遼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室韋의 일부가 遼에 병합되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曹]魏(220~265): 三國時代 三國의 하나이다. 後漢末 黨錮의 禍, 황건적의 난 등으로 황실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董卓·袁紹·袁術·公孫讚 등의 群雄이 각지에서 할거하였다. 당시 원소 휘하의 部將 중 한 명이었던 曹操는 황건적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해갔다. 마침내 196년 후한의 獻帝를 許(河南省 許昌縣)에 유폐시키고 丞相·魏國公이 되었다. 이 당시 四川과 江南 일대에는 劉備와 孫權 등이 雄據하고 있었는데 208년 조조가 赤壁(湖北省 嘉魚縣 서쪽)에서 유비와 손권이 이끄는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면서 天下三分의 형세가 이루어졌다. 216년 조조는 魏國王에 봉해졌으나 220년에 죽었다. 그의 아들 曹丕(훗날 文帝)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즉위했다. 이것이 曹魏이다.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 각주 015)
-
각주 016)
室韋: 각종 史書에서 失韋라고도 적었다. 북위시대부터 그들에 관한 기록이 나오며, 五部로 나뉘어 嫩江 및 黑龍江 주변에 살았다. 『北史』(권94, 「室韋傳」: 3129)와 『隋書』(권84, 「北狄傳」: 1882)에서는 “契丹之類”라 하여 남쪽에 거주하는 자들을 契丹, 북쪽에 거주하는 자들을 室韋라 적었다. 이들 중 額爾古納河 일대에 살던 蒙兀室韋는 蒙古部의 선조가 된다. 부락은 千戶 또는 몇 개의 千戶로 이루어졌으며, 首領은 莫賀咄이라 부른다. 북조시대 이래로 중원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후에 突厥에 복속되었다. 거란이 遼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室韋의 일부가 遼에 병합되었다.
- 각주 017)
- 각주 018)
- 각주 019)
- 각주 020)
색인어
- 이름
- 비능(比能), 왕웅(王雄)
- 지명
- 거란(契丹), 흉노(匈奴), 선비산(鮮卑山), 조위[魏], 황수(潢水), 황룡(黃龍), 원위(元魏), 거란, 고려(高麗), 해(奚), 영주(營州), 말갈(靺鞨), 실위(室韋), 냉형산(冷陘山), 돌궐(突厥), 해(奚), 선비산(鮮卑山), 돌궐(突厥)